16. 회절 (2)
셀은 서진을 굳이 의식하려 하지 않았다. 솔직히 셀은 서진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일도 해야해, 자신에게 일어난 문제도 생각해야 해, 그런 거대한 일들 사이에서 서진이 일으킨 소동은 아주 작은 사건이나 다름 없었다. 셀은 그 작은 사건에 쓸 시간도, 논리적 사고도, 감정적 여력도 많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줄 것이다. 이걸로 멀어지면 멀어지는 거지, 그정도의 관계였던 거지. 하지만 거기까지 다시 생각이 미치자, 셀은 울컥 화가 치미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셀이 자기에게만 들릴 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갑자기 기분 나쁘네."
그러게 누가 난데없이 그런 소리를 하래? 게다가 그 말하고 쪽팔린 건 아는지, 일 바쁘다는 핑계로 보이지도 않고, 연락도 없고. 셀이 입술을 깨물었다. 연애하다 싸운 것도 아니라는 게 셀은 더 억울했다. 자기 마음 몰라줄 땐 언제고, 이제와서 자기가 좋다고 그런 말을 냅다 뱉어버리는 게 어디 있냐고. 셀은 심호흡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내쉰 뒤 다시 일에 집중했다.
서진은 그날 일을 여전히 후회하고 있었다. 셀이 좀체 자신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며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더니, 지금은 그 전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훨씬 못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서진은 애가 탔지만, 그렇다고 또 마음대로 입을 열어 셀을 힘들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서진이 정원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정원아, 다음 주에 급한 일정 들어오면 그냥 넣어주고 바로 알려줘."
"네?"
눈치 빠른 정원은 서진의 부탁에 반문했지만, 곧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오전 내내 셀을 몰래 지켜보았지만, 서진은 셀이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걸 확률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진은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내기는 싫었다. 그래서 서진은 맞부딪혀보기로 했다. 서진은 셀의 자리로 가 셀의 책상을 똑똑 두드리며 셀을 불렀다. 셀은 서진의 얼굴을 보고는 얼굴을 홱 돌려 다시 모니터를 보았다.
"왜?"
서진이 몸을 낮추고 셀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업무 마치고 잠깐 봤으면 좋겠는데."
"…… 할 이야기 없어."
싸늘한 셀의 태도에 서진은 당장 무릎이라도 꿇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빌고 싶었지만, 그건 셀을 더 당황하게 만들 게 뻔했다. 할 거면 적어도 단 둘이 남았을 때나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서진이 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난 아직 남았어."
서진의 말에 셀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네, 업무 끝나고 이야기해요."
돌아오는 대답은 차갑기 그지 없었다. 서진은 맘 같아서는 서운한 티를 팍팍내며 풀죽은 강아지처럼 낑낑거리고 싶었지만, 이 사태의 원인을 생각한다면 그건 너무 이기적인 처사였다. 서진은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서진이 애써 웃으며 답했다.
"그래, 시간 내줘서 고마워."
셀은 서진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모니터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겨우 옮길 수 있었다. 누구 때문에 마음 졸일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지 않는다는 게 쉽지가 않았다. 저번처럼 서진이 어디서 예고도 없이 치고 들어올 지가 겁이 나기도 했고, 셀은 당장은 지지부진한 감정 싸움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체력도 시간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뻔질나게 지원을 나가던 서진은 오늘 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서진과 문제가 있었단 티를 덮으려 애를 썼겠지만, 이번은 달랐다. 그래서 그런지, 사무실은 묘하게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아냐, 그게 설마 나 때문이겠어. 막내들이 자리에 없어서 그런 거지. 솔이라도 있었으면 지원 업무 내내 서진이 어땠는지 물어볼 법이라도 한데, 솔은 혜정과 함께 갑작스런 요청을 받고 밖으로 잠시 나간 상태였다. 하아, 셀은 한숨을 내쉬며 잡히지도 않는 일을 잡아보려 애를 썼다.
사무실은 평소와 다르게 너무나도 고요했다.키보드를 타닥거리는 소리만이 사무실을 채우고 있었다. 셀은 일을 하면서 서진과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했다. 할 이야기가 아직 남았다고? 남아 있을 이야기가 있긴 한가? 서진은 무방비한 상대에게 냅다 고백을 했다, 그것도 이미 한참 전에 자신이 상대의 마음을 거절했던 사람에게. 그것도 갖은 핑계를 다 대며 거절했었던 상대에게 말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자신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서진은 분위기에 취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었다. 상대의 감정은 생각도 못한 채 말이다. 셀은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 어른과 애 핑계를 대며 자신을 거절했던 사람이, 되려 어른스럽게 굴지 못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정원은 일찍 자리를 떴다. 이런 날에는 그게 맞았다. 서진과 셀, 필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 사내 연애는 이런 게 제일 싫었다. 정원이라고 아무리 눈치를 안 보는 건 아니었다.
정원이 자리를 비우자, 서진과 셀, 그 둘만이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셀은 천천히 짐을 쌌다. 어느 새 서진이 가까이 와 있었다. 서진이 물었다.
"일은 다 끝났어?"
셀이 고개를 들어 서진을 쳐다보았다. 셀이 서진을 편하게 보기 위해 의자를 뒤로 살짝 젖히며 말했다.
"네, 끝났어요. 여기서 이야기할까요?"
서진을 보고 있는 와중에도 셀은 서진이 꼴도 보기 싫은 마음과 그래도 말은 해야 결단이라도 낸다는 마음이 속에서 갈팡질팡하며 셀의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셀은 일부러 뚱한 표정으로 서진을 쳐다보았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일주일 간 아무 연락도 안 했으면서, 이제서야 얼굴 보고 이야기하겠다는 말을 하는 게 어디 있어?
“네가 여기가 편하면 여기서 이야기하고, 그렇지 않으면…….”
셀이 서진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아냐, 여기서 이야기해.”
중요한 이야기든, 그렇지 않은 이야기든, 어딘가로 이동하는 시간이 숨 막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셀은 어디로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서진에게는 그런 분위기를 풀 만한 시간이 필요할 지 몰라도, 셀은 아니었다. 게다가 서진은 평소랑 다르게 말을 고르는 것처럼, 말을 하기 전에 되게 고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업무 이야기였다면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았을 거고 말이다. 그래도 뻔뻔하게 굴지는 못하는 성정이라, 그 일을 벌여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건 못할 사람이었다. 셀은 싸늘하게 서진을 쳐다보았다. 서진이 말했다.
"일주일 간 별 일 없었지?"
셀은 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다고 말할 지, 아니면 별 일 없었다고 말하며 서진과의 대화를 지지부진하게 이끌고 갈 지 고민했다. 그렇지만, 기분이 나쁘다고 숨어버리는 건 셀에게는 더 갑갑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숨어서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서진에게 셀은 좀 독하게 굴고 싶었다. 잘못을 모르면 이김에 알아차리라고, 이미 알고 있다면, 잘못을 뼈저리게 알기를 바랐다. 셀이 쏘아붙였다.
"왜 연락 안 했어?"
"네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
서진의 대답에 셀의 입술이 작게 비틀렸다. 그게 답이라고 하는 거야, 지금? 서진의 생각이 어떻든, 셀은 서진의 대답이 비겁하게만 느껴졌다. 다시 내 핑계를 대는 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게 서진의 진심이었든, 아니면 그저 적당한 핑계를 둘러댄 것이든, 서진의 답의 진실 여부는 셀에게 상관이 없었다. 그저 그런 핑계로 자신을 방치한 것이라 느껴지는 셀에게는 서진의 진심이 무엇이었든 셀의 마음에 와닿지 못했다. 셀이 속입술을 꽉 깨물며 화를 삭혔다. 셀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런 말 해놓고 잠수 탄 거나 다름 없었잖아, 알아?"
"찾아갔으면 만나줬어?"
서진의 반문에 셀은 몸이 뻣뻣해지는 걸 느꼈다. 셀은 서진을 한참을 노려보았다. 셀은 자신의 집 앞으로 찾아온 적도 없으면서 저렇게 말하는 서진이 너무 뻔뻔하게만 느껴졌다. 언제부터 사람이 저렇게 뻔뻔해졌대? 셀은 화를 참지 못하고 언성을 지르려다가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셀은 심호흡을 하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화가 진정되지는 않았다. 서진을 보지 않으면 화가 좀 가라앉을까 싶었다. 셀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말하고 싶었다. 셀은 서진에게 서진의 행동 하나하나에 감정적으로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서진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셀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한 번 치솟은 화가 그리 쉽게 가라앉을 리가 없었다. 셀이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연락도 안 한 사람이, 날 찾아올 생각을 했어?"
셀의 말이 맞았다. 서진은 어쨌든 셀을 찾아가지 않았다. 셀을 만날 생각도 해보고, 셀의 집 주변을 기웃거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서진은 마지막에는 그냥 돌아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셀과 마주치려는 노력을 그리 열심히 하지 않았다. 셀을 핑계로 서진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서진은 셀의 무릎 위에 자리잡은 셀의 주먹을 보았다. 어찌나 힘을 세게 주고 있는지, 주먹이 하얘질 정도였다. 왜 항상 자신은 이런 곳에서 매번 하나씩 놓치고 느리게 움직이는 걸까. 서진이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
서진의 사과는 셀에게 충분히 와닿지 못한 것 같았다. 셀은 서진의 사과를 듣지 못한 사람처럼 서진에게 쏘아 붙였다.
"난 네가 중간에 한 번은 더 연락해줄 줄 알았어. 그런데 어떻게 된 게 한 마디도 없더라? 진짜 왜 그랬어?"
셀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의 말이 꼭, 자신이 서진의 연락을 기다렸다는 말처럼 느껴졌다. 사실은 자신이 서진을 더 필요하다고 느꼈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좋아하니까. 셀이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자신의 얼굴을 서진에게 보여주기가 싫었다. 어쩌면 여태 얼굴에 서진에 대한 감정이 써져 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걸 알고, 서진이. 셀이 중얼거렸다.
"나 갖고 노는 거야?"
그런 거야? 이 말은 차마 입 밖으로는 나오지 못했다. 좋다며, 좋아서 네 감정을 어찌하지도 못하고 입으로 내뱉었다며. 그런데 왜 연락 한 번 안 한 거야? 그 감정이 그렇게 순식간에 식을 감정이었다면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해서 내 머리를, 내 마음을 어지럽게 만든 건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중간에 연락은 할 수 있었잖아.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문자 한 번 넣어볼 수는 있었잖아."
불공평해. 셀은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화가 난 건지, 서운한 건지, 둘 다인 건지 는 셀도 알 수가 없었다. 무릎 위에 둔 손등에 눈물이 떨어져 흘러내렸다. 셀이 고개를 들어 서진을 바라보았다. 셀이 화가 나서 물었다.
"일은 네가 치고, 수습은 내가 하길 바랐어?"
"그, 그게 아니라……."
셀의 눈이 붉어져 있었다. 눈물을 참다 못해 몇 방울을 흘린 거 같았다. 서진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내 생각이 짧았어, 셀."
서진이 얼굴을 찌푸리며 셀의 앞에 한쪽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전과는 반대로 서진이 셀을 살짝 올려다보게 되었다. 서진은 눈물로 엉망이 된 셀의 얼굴이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서진은 속이 쓰린지, 얼굴색이 이전보다 좋지 않았다. 서진이 셀을 달래듯 말했다.
"그러니까 울지마. 울 거 같으면 차라리 날 때려, 알겠지?"
서진이 정말 자신을 때리라는 듯 슬금슬금 앞으로 다가오자, 셀이 고개를 홱 돌렸다. 스스로가 너무 추하게 느껴졌다. 이런 거로 울기나 하고. 서진에게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셀은 손으로 반쯤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이제와서 이렇게 말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이야."
하지만 이게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지 금방 깨달은 셀은 정말 서진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서진이 빠르게 팔을 올려 얼굴을 맞는 걸 간신히 막았다. 셀이 서진의 팔뚝을 몇 번이나 주먹으로 쳤지만, 좀체 화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주먹만 아팠다. 왜 쓸데없이 사람이 단단한 건데! 셀이 흐아앙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아픈 속이 좀처럼 금방 풀리지가 않았다. 셀은 손바닥으로 서진의 팔뚝을 힘껏 때리며 말했다.
"매번 나만 힘들고!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서진은 아프다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셀의 화를 묵묵히 받아내었다. 잠시 셀의 손이 다가오지 않자, 서진은 올린 팔 너머로 셀의 동태를 살폈다. 셀이 금방이라도 또 울 것같은 표정을 짓자, 서진이 급하게 말했다.
"미안해, 그러니까 울지만 말아주라, 응?"
셀이 얼굴에 생긴 눈물자국을 손으로 지워내며 쏘아붙였다.
"뭐가 미안한지 알고서나 하는 소리야?"
그리고 서진 때문에 치솟을 대로 치솟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숨을 내쉬었다. 셀의 입에서 숨이 떨리듯 흩어져 나왔다. 셀이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눈물은 멋대로 나오는 거니까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마! 내가 울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어, 셀."
서진의 말에 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걸 본 서진이 급하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
서진의 손이 허공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셀의 눈가를 손으로 조심히 닦아주었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자기도 소화해내지 못하는 감정을 타인이 소화를 시켜줄 줄 알고 드러내었다는 게 얼마나 큰 오만일까. 서진은 염동력으로 휴지를 가져와 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휴지로 톡톡 두드리며 닦아주었다.
"내가 잘못했어."
서진은 속이 쓰렸다. 셀은 그때도 이렇게 울었을까? 차라리 그때 못이기는 척…… 아니다, 서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서진은 한 발 늦은 자기가 바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 사달을 만들 바엔 입 다물고 혼자 앓았어야 했는데. 왜 바보같이 안 하던 짓을 해서 셀을 힘들게 만든 걸까? 서진이 붉어진 셀의 눈가를 눈으로 조용히 훑었다. 내일이 주말인 걸 다행으로 여겨야할 것 같았다.
셀은 서진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서진은 계속 잘못했다는 이야기만 줄창 해대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보면 정말 미안한 거 같기는 했다. 하지만 행동이 영 탐탁치 못했다. 왜 조용히 있었냐고. 셀은 지금 서진의 행동도 사실 좋게만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우는 게 보기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셀은 자신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서진의 시선을 피해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셀이 물었다.
"넌 정말 내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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