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3)
"혹시 셀? 셀리엇이야?"
땅에 머리를 처박다시피 떨어트리고 걸어가던 셀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빛에 반사된 머리가 푸르게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셀이 자신의 기억을 뒤지며 자신을 반갑게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할 때, 남자는 반갑다는 웃음을 지으며 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 기억 안 나?"
남자가 큰 입매를 휘며 시원하게 웃어보이자, 셀은 그제야 상대가 누구인지 알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반가움을 표했다.
"뭐야? 이이안? 돌아왔어?"
"응,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어."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그렇지. 유학 간다고 인사한 게 마지막이었지. 초등학생 때였나?"
이안이 자신을 알아본 셀을 반갑게 안아주었다. 셀은 갑작스런 이안의 스킨십에 조금 놀랐지만, 오랜만에 본 반가운 친구의 스킨십을 받아주었다. 셀도 이안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이안이 물었다.
"왜 이 시간까지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어?"
"아, 일이 이제 끝났어."
사실 끝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셀은 이안을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셀이 말했다.
"그러는 넌 여기서 뭐하고 있어?"
"아... 집으로 가야하는데, 길을 잃었지 뭐야. 돌아가려면 돌아갈 수야 있지만,"
이안이 자신의 휴대폰을 흔들어 보였다. 이안이 말을 이었다.
"길 잃어버린 김에 여기저기 구경해볼까 싶어서 그냥 걷고 있었어. 돌아온지 얼마 안 되었거든."
이안이 셀 옆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혼자 다니기엔 너무 늦은 거 같은데, 내가 데려다줘도 돼?"
"이제 겨우 8시가 넘었는 걸, 별로 안 늦었어."
"오랜만에 만났잖아, 좀 더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래."
그건 셀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이안을 만나게 될 줄이야. 반가운 사람을 그렇게 쉽게 보내고 싶지 않았던 셀은 좀 더 이안과 말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렇게 이른 시간은 아니어서 어딘가에서 이야기를 더 길게 나누는 건 조금 무리일 것 같았다. 셀이 말했다.
"그러면 네 집이랑 방향이 맞으면...같이 가자. 어느 쪽이야?"
이안이 지도에 집을 검색해서 보여주었다. 그 좁은 화면을 보기 위해 두 명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셀이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다.
"완전 반대쪽이네."
"아, 그래? 아쉽다. 안 된다고 할 거지?"
"당연하지! 다시 네 집으로 돌아가려면 너무 멀다구. 그럼...... 여기까지는 같이 가자. 너도 이 지하철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 돼."
셀이 지하철역을 손끝으로 짚으며 말했다.이안이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똑부러지는 건 여전하네. 보고 싶었어, 셀."
"뭐?"
"친구니까 보고 싶은 건 당연하잖아, 진짜 보고 싶었는데. 올 기회가 좀처럼 안 나더라고."
"그래도 지금 이렇게 돌아왔잖아."
"응, 잘 돌아온 거 같아."
서진은 우연찮게 셀이 웃으며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필 차를 왜 여기에 주차했을까? 서진은 그 큰 몸을 구겨 본의 아니게 셀의 대화를 엿들었다. 마음 같아선 차에 태워서 집까지 모셔다 드리고 싶었지만, 아까 전 셀의 반응을 생각한다면 그러지 않는 게 맞았다. 일부러 피한 거 같았단 말야. 어떤 남자랑 즐겁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게 서진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밝게 이야기하는 셀의 목소리는 듣기 좋았지만, 그 상대가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화가 나는 지점이었다. 지금은 셀이 서진을 피하기만 하니까 말이다. 서진의 죄는, 셀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죄는 너무나 컸고, 서진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사과를 하던 변명을 하던 뭐든 하고 싶었지만, 셀은 좀처럼 때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서진은 셀이 그 자리를 떠날 때까지 얌전히 담장 아래로 몸을 숙인 채 대화를 잠자코 들었다. 가뜩이나 긴 수명이 절로 단축되는 느낌이었다. 서진은 기필코 빠른 시일 내에 기회를 잡고 말리라 다짐했다. 정말, 자신은 이렇게는 살지 못할 거 같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서진은 자신이 신에게 셀을 알기 전으로 되돌려 달라고 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신이라고는 추호도 믿지도 않는 사람이 말이다.
셀은 이안을 만나고 나서 조금은 홀가분해진 느낌이었다. 이안은 서진과 지인이 겹치지 않는 사람 중 한 명이었고, 어릴 땐 꽤 친한 사이였다. 지금도 자신을 반가워한 걸 보면, 사이가 크게 틀어지지는 않은 거 같았다. 못 본 지 너무 오래 된 탓에, 가끔 사이가 어색해지진 않았을 지 걱정했었는데. 오늘, 이렇게 이안을 마주하고 나니 그런 걱정은 정말 할 필요도 없는 걱정이었다. 셀은 너무 편한 나머지, 서진과 있었던 일을 이안에게 털어놓아버렸다. 적당한 수습을 위해 나중엔 어느 정도 포장이 들어갔지만, 중간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아마 있는 그대로 말했을 지도 몰랐다.
조금 거리를 두고 대해보는 건 어떨까? 마주치지 않을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그냥 네가 느끼는 감정이 네가 일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면 적어도 그때만은 모른 척 해도 되지 않을까? 힘들면 또 나한테 털어놓아도 되고. 불편한 건 네가 알아서 잘 티를 낼 거라 믿는데...... 대체 그 사람이 누구야?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웬 이상한 사람이 붙은 거 같네.
왜 네가 피해, 셀? 꼭 네가 타인의 감정을 다 받아줄 필요는 없잖아. 안 받으면 그 사람 건데, 굳이 네가 피해다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혹시 계속 귀찮게 굴면 말해. 남자친구 행세라도 해줄게.
농담이지?
도와주고 싶은 건 진짜야. 뭐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줘.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으면 도와줄게.
이안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셀, 조심히 가. 꼭 다시 연락하기다?"
셀이 손을 흔들어주자, 이안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지하철 안에서 셀과 이안은 반대편으로 찢어져 각자의 길로 돌아갔다.
덜컹거리는 낡은 지하철이 오늘은 그리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이안을 만나고 나자, 셀은 자신이 서진을 피하는 게 맞나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안의 말대로 오히려 반대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일하는 내내 서진을 피해다닐 수도 없었다. 셀은 서진이 마지막으로 보냈던 메세지를 확인했다. 집에 잘 들어가라는 메세지가 마지막이었다. 집에 들어가는 상황에서 집에 조심히 들어가라던 서진의 마지막 메세지를 보자, 셀은 기분이 묘했다. 셀은 휴대폰을 보는 걸 그만두었다. 김서진 생각은 하지 말자. 그리고 피곤한 눈을 감으며 집으로 갈때까지 휴식을 취했다.
서진은 자신의 행동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진은 셀이 집으로 바로 들어갔는지, 아니면 늦게까지 웬 남자랑 놀고 있는 지가 궁금했다. 놀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곧 셀을 감시하는 일은 영현이 시켜서 하는 일이라며 자신의 양심을 애써 달랬다. 원해서 하는 게 아니다, 이건 다 시켜서 하는 일이다. 서진은 금방이라도 셀이 어딨는지 온 동네를 뒤져 그 남자와 셀 사이에 훼방을 놓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은 한낱 셀의 친구 중 한 명이지 않은가. 그것도 고백했다가 차인 사람인데, 자신이 무슨 권한이 있다고,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런 일을 해도 되나 싶었다. 서진이 생전 느껴본 적 없던 질투는 이렇게 숙주를 갉아먹고 자라는 기생충처럼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서진은 셀의 방에 불이 켜지는 걸 보고서야, 지하철 시간과 도보 시간을 대충 가늠하여 셀이 어디로 새지 않고 바로 집으로 왔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겨우 마음이 놓였다. 서진은 오늘 목격한 일에 대해 간략하게 작성한 문자와 셀과 함께 있는 남자가 찍힌 사진을 영현에게 보낸 뒤, 집으로 돌아갔다.
"아...그때 그 도련님이구나."
영현이 사진 속 셀과 이안의 모습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서진은 생각보다 착실히 일을 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감시하기 싫다고 말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사진도 깔끔하게 찍어서 보냈다. 영현이 기억을 뒤져 이안에 대한 정보를 끄집어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별로 기억에 남은 건 없었다. 부잣집 도련님에, 그 나이대 애 치고는 조금 어른스러운 느낌이었다. 셀에게 아주 잘 대해주던 애였는데, 무슨 이유로 더는 얼굴을 안 비추었었지. 영현이 중얼거렸다.
"셀에게 잘 대해주는 건 여전한 거 같네."
셀은 서진을 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그 다짐이 무색하게 서진을 사무실에서 더는 마주치지 못했다. 정원에게 물어보면 일정이 꽉 차 있다며, 할 말 있으면 문자를 보내든 늦게까지 기다리든 둘 중 하나를 해야한다며 정신 나간 거 같은 서진의 지원 일정표를 보여주었다.
"대학교 1학년도 이렇게 시간표를 짜진 않겠다."
"이번 주는 이전부터 이 모양이었어."
평소였다면 서진에게 바로 연락을 했을 셀이, 이번주는 유독 자신을 통해 일정을 물어왔다. 이게 슬슬 귀찮아진 정원은 셀을 한 번 떠보기로 했다.
"근데 왜 나한테 물어?"
"어? 그야 네가 우리 일정 관리해주잖아."
"평소엔 바로 선배한테 물어보잖아."
"여, 연락을 안 받는 걸 나더러 어쩌란 거야."
거짓말이네, 정원이 생각했다. 정원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리고 자기가 그 사이에 끼이기 직전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건 정말 싫은데.
진짜 눈치 빠른 거 티내네, 셀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뭐라도 말을 더 붙였다간 정원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셀은 가만히 있었다. 정원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 그렇다고. 바빠서 연락 못 받나보지. 나중에 다시 연락해봐."
"그래. 그럴게."
서로와 말다툼하는 것만큼 서로에게 손해인 게 또 없었다. 정원과 셀은 세웠던 날을 다시 내리고 각자 할 일로 돌아갔다.
셀은 이쯤되니 서진에게 조금 화가 나기 시작했다. 방치하는 거야, 뭐야? 그 사달을 내놓고 지금 자기는 일하느라 바빠서 연락을 못한다는 거야? 하지만 셀은 먼저 연락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기다리자니 속에서 열이 뻗쳤다. 마치 자기보고 이 일을 해결하라는 거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제 사흘 째였다. 심지어 서진이랑 저녁에 마주쳤던 그 하루를 빼고 사흘이었다. 자기한테 쫓아와서 소리라도 치길 바라는 걸까? 그러면 그제서야 사과를 할까? 사과?
셀이 빙글빙글 돌리던 볼펜을 멈추었다.
사과를 바라는 건가? 사과를? 물론 사과도 바랐다. 그리고 자신이 반쯤 부숴버린 모래성을 서진이 다시 쌓기를 바랐다. 쌓는 걸 시작하기만 하면 바로 도와줄 텐데, 서진은 가만히 있었다. 모래성의 잔해를 보고 있긴 한 건지도 궁금했다. 바닷가는 가끔 거대한 파도가 치기도 한다는 걸 잊어버린 사람처럼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지 궁금했다.
셀은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서진이 예상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셀을 마주칠 일이 없으니, 서진은 언제가 가장 적절한 타이밍인지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마냥 미룰 수도 없고, 그렇다고 냅다 들이박을 수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들이 박다 못해, 셀을 붙잡고 어디로도 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싶었다. 그렇게 붙잡고 사과든 고백이든 머릿속에 든 걸 모두 보여주고 싶었다. 감정은 뱉으면 흩어진다는데, 이 감정은 왜 삼켜도 강해지고, 뱉어도 강해지는 지 알 수가 없었다. 뱉어내고 나니 외려 더 강한 감정으로 변한 거 같았다. 태양을 물었다가 태양이 너무 뜨거워 뱉은 개처럼 서진은 이 감정이 너무나도 뜨거워서 좀처럼 품고 있기가 힘들었다. 달을 물었다가 달이 너무 차가워 뱉은 개처럼 서진은 이 상황이 너무나도 차가워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옛날 이야기 속에 나오는, 해도 달도 물지 못해 빈손으로 왕에게 돌아갔다는 불개 이야기가 꼭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이 이야기에서 서진에게 다른 점이라고는, 자신에게는 돌아갈 왕이 없다는 것이었다. 서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서진은 지원하러 갔던 현장에 혼자 남아 일정표를 살폈다. 내일, 금요일. 내일이면 셀을 볼 수 있었다.
"서진 선배."
솔이 서진을 불렀다. 서진이 솔을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다 끝났어?"
"저희만 남았어요. 그만 퇴근해요."
"집으로 바로 갈 거야?"
서진의 질문에 솔이 조금 고민이 되는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솔이 꼼지락거리는 자신의 손가락을 보며 말했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그럴까봐요. 내일은 지원 업무도 없으니까, 내일 출근해서 보고서를 쓸까...... 생각 중이에요."
"데려다 줄게, 가자."
서진이 솔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고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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