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2)
"감사합니다."
셀은 택시에서 내렸다. 그래도 연락 한 번 넣을 줄 알았던 김서진은 아직도 연락이 없었다. 셀은 집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주변에 있는 놀이터까지 천천히 걸어 갔다.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기분 전환 시켜준다고 한 말이 설마 이런 뜻은 아니었겠지. 해가 진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셀은 그네에 걸터 앉아 다리를 폈다 접었다 하며 성의 없이 그네를 탔다. 발을 바닥에 딱 붙인 채 그네를 탔다.
서진의 말은 너무 갑작스러웠고, 그 때문인지 잊고 있었던 감정도 다시 수면 위로 둥둥 떠올랐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오랫동안 묵혀놓은 감정을 마주하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셀이 중얼거렸다.
"나 사실 아직도 좋아했구나......."
셀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멍청이가 뭐라고 아직도 좋아해......."
머리가 복잡했다. 쉽게 해결될 일도 아니고, 그리고... 일단 자기가 싫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당연히 좋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게 수 년 전의 일에 대한 복수도 아니었다. 그냥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셀은 서진의 감정을 받아줄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분명 친구로서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서진의 메세지가 도착했다.
잘 도착했길 바라. 오늘 일로 놀랐을 텐데 미안해. 내 감정이 너무 앞섰나봐. 푹 쉬고, 내일 봐.
서진의 메세지는 아까와는 다르게 건조했다. 셀은 메세지를 읽었지만 답장은 하지 않았다. 답장을 할 만한 여력이 없기도 했고, 하고 싶은 마음도 딱히 들지 않아서였다.
"그렇네...... 내일 봐야하네......."
하아, 셀이 움직임을 멈추고 무릎 위에 엎드리듯이 몸을 숙였다. 내일은 또 어떻게 봐야하지? 셀은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셀은 팀원들의 일정표를 기억에서 떠올렸다. 혜정과 솔은 내일 다른 업무로 사무실로는 출근을 안 하고, 정원은 언제나 그렇듯 사무실로 올 터였다. 그리고 서진은...... 갑작스러운 지원 요청이 없다면 아마 내내 사무실에 있겠지. 셀은 벌써부터 마음이 갑갑해졌다. 여전히 서진을 좋아한다는 것과는 별개로 셀은 아까의 그 순간은 셀에게는 가장 피하고 싶었던 순간 중의 하나로 다가왔다. 자신이 좀 더 어른스럽게 서진의 감정을 받아주어야 했었던 거 같았다.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으면 지금 상황보다는 훨씬 좋았을 거 같았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자신은 서진을 버리고 그곳에서 나왔다. 셀은 서진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조금은 들었다. 셀이 다시 아까 전의 일을 곱씹자, 셀이 가지고 있던 미안한 마음은 곧 화로 변했다. 그러게 누가 깜빡이도 없이 들어오래? 셀이 굽혔던 몸을 펴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아, 진짜 이걸 어떻게 해야 한담."
반달이 하늘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하늘도 셀의 어지러운 마음과는 다르게 구름 한 점 없었다. 셀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야경...... 예쁘긴 했어."
서진은 차 안에서 그네에 앉아 있는 셀을 쳐다보고 있었다. 셀은 서진의 메세지에 답하지 않았다. 서진은 셀이 자신의 메세지를 읽은 게 어딘가 싶었다. 서진은 셀이 떠날 때까지 차 안에서 셀에게서 눈을 떼놓지 않았다. 셀이 늦은 시간에 저러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게 자신 때문인 거 같아 서진은 조용히 자신의 화를 속으로 삭이기만 했다.
셀이 이제 그만 자리를 뜨는 거 같아서 서진은 조용히 차에서 내려, 멀리서 셀을 쳐다보았다. 셀이 자신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거리에서 서진은 천천히 셀의 뒤를 따라갔다. 셀이 더는 방황하지 않고 곧장 집으로 들어가, 몸도 마음도 천천히 풀어내길 바랐다. 마음은...... 아마 자신이 풀어주는 게 맞겠지만 말이다. 서진은 셀의 집에 불이 켜지는 걸 보고 나서야 천천히 차로 돌아갔다.
서진은 운전석에 앉아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셀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줄 때가 언제가 가장 좋을지를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붙잡아서 사과부터 하고 싶었지만, 그건 오히려 역효과일 거 같았다. 그렇다고 셀의 마음이 풀리길 기다리는 것도 이치 상 맞지 않았다. 그걸 그렇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서진은 일단 자신의 일정을 확인했다. 적어도 내일은 셀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서진은 휴가 일정을 신청했다. 현재 일정은 정원이 이내를 대신하여 처리 중이니 내일 아침이면 이미 승인이 나 있을 터였다. 지원 생기면 어차피 그곳으로 바로 가면 되니까...... 서진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다고 셀을 매일같이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진은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영현의 명령이나 다름 없는 부탁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영현이 이 사실을 알았다간, 무슨 말을 할 지 감도 오지 않았다. 셀을 끔찍히도 아끼는 사람이니, 만약 서진이 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말을 들으면 아마 영현은 지옥 끝까지 서진을 쫓아올 터였다. 그러니, 이번엔 멍청하게 굴지 말고 잘 움직여야 했다. 어느 정도 생각을 마무리하고 나서야, 서진이 차를 끌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셀은 자꾸만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서진에게 마음을 말해주었다가 거절 당했던 그 기억이 말이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그 기억은 너무나 선명하게 셀의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그래서 셀은 그냥 눈을 감기로 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잠이라도 오겠지.
"......미안해, 셀. 그건 안 될 거 같아."
"왜?"
"일단 난 네 경호를 맡고 있잖아. 그러니까 너도 알겠지만, 너와 내가 사귀면 직업 윤리에 문제가 생겨."
"그럼 오빠 말고 다른 사람으로 바꾸면 되잖아."
"그리고 대표님이 허락하지도 않으실 거야."
"내 말이면 들어주실거야. 바꿔달라고 할게."
"셀."
"왜 자꾸 안 된다는 거야?"
"셀리엇 아가씨."
서진의 입에서 셀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선을 긋는 듯한 서진의 말에 셀이 표정을 구겼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여태 제가 너무 버릇없이 대해드렸던 거 같네요."
"내가 싫어서 그래?"
"그럴리가요."
서진이 셀을 내려다보았다. 서진이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꿈도 어쩌면 이런 개꿈이 있을까, 셀은 눈을 번쩍 뜨며 잠에서 깨어났다. 서진에게 고백했었던 기억을 기반으로 시작한 꿈은 점점 기괴하게 변해갔다. 마지막에는 서진이 자신의 마음을 세상이 멸망하기 1분 전에 털어놓았다. 셀이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 출근하자."
셀이 몸을 벌떡 일으켜 침대 위를 벗어났다.
셀은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다잡았다. 서진이 있든지 말던지 하던 대로 하는 거야. 셀이 문 가까이 다가가 버튼을 누르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좋은 아침!"
셀의 예상보다 사무실은 더 썰렁했다. 정원만이 손을 ㅎ흔들어주며 셀의 인사를 받아주었고, 남은 자리는 텅텅 비어 있었다. 셀이 자기 자리로 향하며 말했다.
"천정원, 너 혼자야?"
"어, 보다시피 그래."
"김서진은?"
"어젯밤에 급하게 오늘 연가 냈던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보지."
"아, 그래?"
셀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달랐다. 정원은 고개를 들어 셀을 쳐다보았다. 정원이 말했다.
"너 아는 거라도 있어?"
"뭐? 알긴 내가 뭘 알아."
"그래, 내 착각이었나보다."
정원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알긴 뭘 알아? 정원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셀은 무슨 일인지 뻔히 다 아는 거 같은데 말이다. 정원은 더 이상 사내연애같은 남의 연애사업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기에 더는 말을 얹지 않았다.
셀은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서진이 알아서 빠져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불편함을 덜어서 다행이었다. 마주하고 일을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그때는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지냈던 걸까. 셀은 볼펜을 손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생각에 빠졌다.
"셀."
"어?"
"지원 요청 떴어. 바로 간다고 해줄까? 도난 사건인데, CCTV 사각지역이라 네 도움이 필요하다는데. "
"같이 갈래?"
"내가 가서 뭐해? 애들도 아니고."
"그래, 그럼 지금 간다고 전해줘. 지금 가면 그쪽 수사팀이랑 같이 가는 거지?"
정원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셀은 필요한 짐을 챙겨서 곧장 사무실을 떠났다. 셀이 떠나자 사무실은 더욱 고요해졌다. 정원은 평소처럼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수고하셨어요."
"실마리를 그래도 잡은 거 같네요. 고마워요."
셀이 웃으며 그렇다면 다행이라고 대답했다.
"제가 알아낸 기억으로 범인 잡아내면 알려주세요!"
"저번처럼 알려드릴게요!"
셀은 인사를 한 뒤 가벼운 마음으로 사무실로 올라갔다. 간만에 일을 잘 처리해낸 거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이미 수사팀에서 용의자를 어느 정도 추린 상태였고, 여기서 근처 사물이나 식물의 기억을 더듬어 용의자를 특정하였으니, 아마 틀리진 않을 것이었다. 다만, 이런 기억은 증거로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수사팀이 확실한 증거를 잡아야만 하겠지만, 그건 셀의 소관 밖이었다. 셀은 할 수 있는 만큼 지원을 해주었으니 말이다.
셀이 사무실로 들어가자 정원이 짐을 싸고 있었다.
"벌써 퇴근해?"
"시간을 봐, 열심히 일한 직원은 집에 가야하는 시간이야. 아니, 무슨 일이 생겨도 보내줘야 하는 시간이지."
짐을 다 싼 정원이 말했다.
"그럼 내일 봐. 보고서 올리는 거 잊지 말고."
"아, 퇴근 시간에 일을 시키는 게 어디 있어?"
"오늘 하란 말은 안 했어. 진짜 간다."
정원은 정도 없이 쌩하니 사무실을 떠났다. 셀은 사무실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정원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너무하다니까."
셀은 자리로 돌아가 오늘 안에 해야하는 업무들을 다시 확인했다. 야근...야근...셀은 야근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며 해야할 일들을 하나씩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을 반쯤 끝냈을까, 갑자기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거대한 그림자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셀은 들어올 줄도 몰랐던 사람이 사무실에 나타나자 멍하게 그 사람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서진이었다.
"셀리엇?"
서진이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앉아 있는 셀에게 말을 걸었다.
"왜 아직도 있어?"
"그, 그러는 김서진, 너는 왜 온 건데? 연가 썼다며."
"필요한 게 있어서 가지러 왔어."
서진이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많이 늦을 거 같으면, 기다렸다가 집에 데려다줄까?"
서진의 말에 셀이 고개를 숙이며 작게 말했다.
"너는 왜 아무렇지도 않아?"
조용한 사무실에서 셀의 말이 서진의 귀에 꽂혔다. 서진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게 아니라......."
서진의 말에 셀이 입을 꾹 다물었다. 중얼거리는 소리를 어떻게 알고 들었지? 서진은 귀가 좋은지, 이렇게 조용할 때면 목소리든 무슨 소리든 굉장히 잘 듣는 편이었다. 일을 같이 할 때에는 굉장히 유용한 능력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늦게 가는데 집에라도 일찍 보내주고 싶어서 그랬어. 네가 그게 싫다면, 그냥 갈게. 강요할 생각 없어."
서진이 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그리고, 셀."
서진이 다가오자 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어색하게 말했다.
"일이 다 끝나버렸네. 김서진, 넌 뭐 가져가야한다고 했지? 나, 난 먼저 갈게. 얼른 가서 쉬어야겠다, 하하."
"셀, 내가 안 데려다 줘도......."
셀이 서진의 말을 자르며 빠르게 대답했다.
"괜찮아!"
셀은 서진이 셀을 잡을 틈도 없이 빠르게 사무실을 벗어났다. 서진은 허망한 표정으로 셀이 나간 문을 쳐다보기만 했다. 잡았어야 했나? 서진은 잠시 고민했지만, 셀을 잡으러 쫓아나가지는 않았다. 서진은 셀에게 강압적으로 굴고 싶진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셀을 붙잡았다간 그렇게 작은 애를 부숴버릴 지도 몰랐다. 서진은 그게 제일 두려웠다.
경찰서를 빠르게 나온 셀은 경찰서를 벗어나자마자 한숨을 짧게 내쉬며 속도를 줄였다. 셀은 서진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뛰다시피 걸어서인지, 아니면 마주할 줄 몰랐던 사람이랑 마주쳐서 그런 지는 몰라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쉰다는 사람이 대체 사무실에는 왜 나와서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하는 건지, 원. 셀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었다. 서진과 안 맞을 때는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게 없었다. 정말 어떻게 된 게 단 하나도 없었다. 단추를 잘못 맞추면 계속 잘못 맞추는 것처럼 모든 게 어그러졌다. 셀이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이러고 지내야하는 거야."
셀은 지금 상황이 갑갑했다. 먼저 상황을 풀자니, 서진을 제대로 볼 용기가 안 났다. 그러니까 서진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짓을 또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건 서진이 해야할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서진이 먼저 나서서 풀어야할 일이라 생각했다. 다만, 셀은 그 일을 할 여지를 아직 주지 않았을 뿐이었다.
셀은 이런 상황을 주변에 털어놓고 싶어도 마땅히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다. 셀은 서진과 겹치는 지인이 많았고, 그 외에는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정도로 막역한 사이가 아니었다. 셀은 서진의 존재를 아는 사람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면 대충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는 지를 알 것이 아닌가. 셀은 그것만큼은 주변에 알리고 싶지 않았다.
"혹시 셀? 셀리엇이야?"
땅에 머리를 처박다시피 떨어트리고 걸어가던 셀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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