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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실로 (3) / 14.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1)

RE: by 세시의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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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실로

"그럼, 부탁을 하나 더 할까 하는데."

"바로 부려먹으시는 겁니까?"

"내일 셀 좀 데리고 돌아가라. 난 내일 개인적인 일정이 생길 거 같아서 셀을 못 데려다 줄 거 같거든."

셀과 관련된 일에 서진이 순순히 답했다.

"아.. 네, 그렇게 할게요."

"대표님.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영현은 고개를 까딱였다. 서진이 말했다.

"그들이 셀과 접촉했는 지는 어떻게 알 수 있죠? 그리고 셀이 정신계열 사이람들에게 걸리면 제가 감시해도 소용이 없을 거 같은데요. 그냥 봐서는 알 수도 없을 거고요."

"아마 셀이 널 피하겠지. 그들한테는 네가 제일 성가신 존재가 될 테니까 말이야."


셀은 오랜만에 돌아온 동네를 구경도 할 참, 달리기를 하려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1층으로 내려가며 말했다.

"아저씨, 저 주변에 산책 좀 하고 올......?"

1층이 조용했다. 분명히 할 일 없다고 했던 사람인데. 셀은 1층을 한 바퀴 돌았는데도 영현을 찾지 못했다. 셀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1층 안쪽에 있는 영현의 방으로 갔다. 셀은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셀이 말했다.

"계신 건진 모르겠는데, 아저씨, 저 잠깐 산책 갔다올게요.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주세요."

셀의 말이 끝나자 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셀은 고개를 갸웃거린 뒤 신발을 신고 밖을 나갔다.

땅거미가 진 후의 공기는 다행스럽게도 가벼운 달리기를 하기엔 최고의 조건이었다. 적당히 쌀쌀한 날씨가 얼마만인지, 셀은 평소보다 오래 달리기를 했다. 동네는 셀이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바뀌어 있었다. 동네를 크게 돌아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쯤, 전화가 걸려왔다. 영현이었다. 셀이 전화를 바로 받았다.

"네, 아저씨. 어디 계셨어요?"

"밖으로 나갔냐?"

"네, 날씨가 좋아서 달리기 좀 하려고 나갔어요. 5분 후에는 집에 도착할 거 같아요.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아니다, 집에 네가 없는 거 같아서 연락했어. 어디쯤이니? 여기서 5분 거리면, 마중 나가줄까?"

"네? 아뇨! 그냥 집에 계세요. 그런데 어디 잠깐 다녀오셨었어요? 아까 집에 안 계시는 거 같던데."

"아, 잠시 일이 생겨서 말이다. 안식년을 가져도 일을 놓는 게 쉽지가 않네."

셀이 영현의 집 앞에 도착하자, 그곳엔 영현이 서 있었다.

"왜 나와 계세요?"

"그야, 밤이 꽤 깊어지지 않았니. 어서 들어가자."

셀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영현이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만큼 뛰고 왔어?"

"네, 동네 구경도 하고... 생각보다 바뀐 곳이 많더라고요."

"그래, 꽤 많이 바뀌었어. 너랑 가끔 같이 갔던 식당이 아직 있는지 모르겠구나."

셀이 웃으며 답했다.

"거긴 아직 남아 있더라고요. 다음에 같이 가요."


14.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누군가의 그늘에서 벗어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셀은 영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게 이제 와서는 조금 찝찝했다. 그 말은 뒷조사 이야기와 합쳐져 더욱 찝찝함을 자아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서진의 말을 들을 걸 그랬나.......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인 건지, 영현은 서진을 불러서는 예전처럼 서진을 자기 수족처럼 부리고 있었다. 적어도, 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서진이 뒷좌석에 셀의 짐을 넣은 뒤, 운전석에 자리를 잡았다. 셀이 투덜거렸다.

"진짜 왜 온 거야?"

서진이 시동을 걸며 말했다.

"약속 있어서 너 못 데려다 준다고 하던데. 너 혼자 보내는 건 또 싫고, 그렇다고 아무나 시키기는 싫었나보지."

"분명 처음엔 자기 약속 없다 그랬는데."

"내가 데려다주는 게 맘에 안 들면 가서 말씀 드려. 나랑 갈 바에야 혼자 대중교통 이용해서 돌아가겠다고."

서진의 말에 셀이 툴툴거렸다.

"...... 시간이 배로 걸리잖아."

셀이 시트 등받이에 몸을 털썩 기대며 말했다.

"그러게 왜 속도 없이 그러겠다고 한 거야? 어차피 더 이상 네 상사도 아니잖아."

서진이 핸들을 돌려 차를 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면 나도 안 왔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 아니다, 말을 말아야지."

서진의 차가 골목길을 나가 도로에 올라탔다. 서진이 셀을 힐끔 보며 물었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서 쉴 거야?"

"왜?"

"가고 싶은 곳 있으면 같이 가줄게. 날 써먹을 수 있을 때 써먹으면 좋잖아, 안 그래?"

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

"...... 데이트 신청같은 거야?"

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는지, 서진이 되물었다.

"뭐?"

"아냐, 못 알아들었으면 되었어. 가는 길에 생각나면 말할게."

"피곤하면 좀 자도 되고."

담요 줄까? 서진이 물었다. 오늘따라 서진이 어색하게 굴고 있었다. 평소에는 오늘 있었던 일 이야기, 음식 이야기, 듣고 싶지 않은 운동 이야기들만 줄줄 늘어놓았으면서, 오늘은 일절 그런 말이 없었다. 셀이 팔짱을 끼며 툴툴거렸다.

"나 여기서 계속 쉬었는데 피곤할 리가 없잖아."

"그러면 편하게 있어."

"일단 집으로 갈래."

"그래."


"오늘 데려다줘서 고마워."

"별 일 아닌데, 뭐."

"갑작스럽게 불려나온 거잖아."

"그러고보니, 뭔가 더 알려주시긴 했어?"

"아니, 알아봐주신다고 했어. 기다려야지."

"금방 답을 주시면 좋겠네."

그러게. 셀은 그렇게 대답하며 서진의 차에서 내렸다. 서진이 입구 앞에 차를 세운 덕에 셀은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셀이 막 집으로 들어가기 전 서진이 셀을 불렀다. 셀이 고개를 돌려 서진을 쳐다보자, 서진이 셀의 시선을 은근히 피하며 말했다.

"혹시...... 내가 온 게 그렇게 싫었어?"

"뭐?"

서진은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직장에서 보는 사람을 주말까지 봐서 기분이 별로였나 싶어서."

"싫었음 죽어도 대중교통 타고 왔겠지. ......설마 오는 내내 그게 신경 쓰였어?"

셀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서진의 차쪽으로 몸을 돌려 창문이 내려간 창틀에 팔을 반쯤 걸치며 서진을 바라보았다. 셀이 말했다.

"지금 나한테 놀아달라는 거지?"

"아니,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셀이 다시 차에 올라탔다.

"셀. 안 쉬어?"

"김서진! 우리가 본 세월이 얼만데,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싫으면 싫다고 말하는 사람인 거 잊었어?"

셀은 소리를 친 뒤,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그런 게 신경 쓰인다는데 어떻게 매정하게 올라가."

서진이 차를 주차장에 주차했다.

"셀, 그러면 내가 짐 들어줄게. 올라가자."

"너 때문에 내 짐도 까먹고 있었네, 아휴."

"들어줄 테니 가자, 응? 그런 말해서 미안해."

"미안한 거 알면 그렇게 말하지 마. 오늘따라 평소답지 않게 왜 그래?"

"하하, 그러게. 오랜만에 이런 일을 해서 그런가?"

서진이 짐을 들어 셀 집까지 옮겨주었다. 짐은 어차피 셀의 옷가지와 다른 물품이 든 가방이 전부였기에 서진이 가방을 옮겨주는 일은 매우 수월했다. 셀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서진이 문 앞에 셀의 짐을 내려두며 말했다.

"그럼 난 가볼게, 셀."

"짐 옮겨줬는데 조금 쉬다가 가지 그래?"

서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닌 걸."

"그러면 물이라도- "

"고마우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부탁? 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셀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 그건...... 들어보고 결정할래. 이상한 거면 어떡해."

그 말에 서진이 웃었다. 그리고 웃음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에 야경이 예쁜 곳을 알게 되었는데, 같이 가줄 수 있어?"

야경? 셀이 되물었다. 왜 하필 야경이지? 셀이 물었다.

"이상한 부탁이네. 야경 보는 거 좋아했었어?"

"혼자서 청승 맞게 몇 번 보러가고는 했었어."

셀의 반응이 조금 떨떠름하자, 서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 될 게 뭐가 있겠어?"

서진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그러면...... 내가 7시에 다시 이곳으로 올게. 그때까지 편히 쉬어."

"여기서 많이 멀어?"

"아무래도......조금 거리가 있긴 한데, 대표님 집보단 가까워."

"그래, 그때봐."

셀은 알겠다는 듯 서진에게 손인사를 하며 그를 보내주었다. 야경... 셀은 계속 야경이란 단어를 중얼거렸다.

"...... 뭐야. 웬......웬 야경타령이야......."

그리고 왜 난 그걸...셀의 눈이 커졌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미쳤지, 셀은 얼굴이 붉어진 채 가벼운 비속어를 남발하며 스스로를 비난했다. 그리고 제발 그곳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빌었다. 서진과의 관계는 지금이 딱 좋았다. 그리 멀지도 그리 가깝지도 않은 관계로 말이다.

"일단 짐부터...치우자."

셀은 잠깐이라도 이 사실을 잊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짐도 치우고, 샤워도 하고, 밀려 있는 집안일도 모두 해치웠다. 그래도 서진과의 약속을, 그 뒤에 숨어 있을 저의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김서진은 진짜 그냥 보여주고 싶어서 그러는 걸 거야. 이제와서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검색을 해봐도, 친구들에게 질문을 해봐도, 모든 답은 한결 같았다. 심지어 친구에게는 상대가 누구냐는 질문까지 받았다. 셀은 갑갑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지금이라도 아프다고 할까?"

셀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냐, 바로 달려오면 어떡해."

셀은 이번엔 몸을 반쯤 돌려누웠다. 셀은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바로 달려온다고? 왜 바로 달려와? 친구 사이에 그럴 수 있나? 셀이 몸을 180도 돌려 반대로 몸을 돌렸다.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어쩌다 이런 관계가 되었지? 우리 사이 별 거 아니지 않았나?"

별 거...... 아니었는데.

휴대폰에서 전화가 울렸다. 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신인을 확인했다. 셀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아저씨. 네, 집에 잘 들어왔어요. 일은 잘 마무리하셨어요?"

"그래, 김서진이 해코지하진 않았지?"

"네?"

"했어?"

영현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셀이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뇨, 그럴리가요. ...... 오히려 옛날 생각 났어요. 아저씨가 부탁하셔서 저 데리러 왔던 거였잖아요."

"데려다 주겠다고 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미안하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영현이 작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하, 입이 방정이라고 네게 쉰다고 하자마자 다른 일이 생겨버렸구나."

영현의 말에 셀이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부탁한 일 때문은 아니죠?"

"그럴 리가 있냐, 물론...... 네 일이니 차일피일 미룰 생각은 없지만...... 이번 건 피할 수가 없는 일이어서 말이다. 어쨌든 잘 들어갔다니 다행이구나. 그럼, 조만간 다시 연락하마."

"네, 저도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쉬세요."

셀은 전화를 끊고 기지개를 한 번 켰다. 서진이 저녁 약속을 한 건 아니니, 뭐라도 먹고 움직여야만 했다.

서진은 셀과 약속했던 시간에 맞춰 주차장에서 셀을 기다렸다. 셀은 약속한 시간에 맞춰 밖으로 나왔다. 서진은 셀을 보자마자 손을 들어, 셀이 자신을 금방 찾을 수 있게 했다. 셀은 평소처럼 편안한 복장으로 입고 나왔다. 얇은 니트에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를 신은 채 나왔다. 셀이 가까이 다가오자, 서진이 말했다.

"잘 맞춰입고 나왔네?"

"왜?"

"조금 걸어야 하는데, 거기 길이 좀 깔끔하지가 않거든."

"뭐? 그러면 미리 말해야지! 내가 이런 옷 말고 다른 옷 입고 나오면 어쩔 뻔 했어?"

일부러 말 안 했지? 가 셀의 목 끝까지 나왔다가 입 안에서 걸렸다. 매섭게 쏘아붙이는 셀의 말에 서진이 얼굴을 긁적이며 말했다.

"어...... 내가 안 다치게 잘 잡아주면 되겠다 싶기도 해서 그냥 아무 말도 안 했어. 잘못 말하면 등산처럼 들릴 거 같기도 했고. "

"그래도 미리 말을 해줘야지."

"다음엔 말해줄게."

서진은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셀을 차에 태웠다. 그리고 자신도 운전석 쪽으로 넘어가 차에 올라탔다. 서진은 자주 가 본 것처럼 네비게이션을 쓰지도 않고 바로 차를 움직였다. 셀이 물었다.

"자주 가던 곳이야?"

"알고 난 후로는 꽤 자주 갔어. 해 지는 시간에 맞춰서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서진은 차를 주차한 뒤, 셀을 데리고 누각이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 셀은 올라가는 내내 이게 등산이 아니면 뭐냐며 투정을 부렸다. 그때마다 서진은 셀에게 물이라도 마시라며 가져온 물을 건네주었다. 누각에 도착하자, 서진은 셀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손짓했다. 누각 위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서진은 셀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와, 여기 야경 엄청 예쁘다!"

눈 앞에 펼쳐진 절경에 셀이 폴짝 뛰며 누각의 비어 있는 난간 근처로 뛰어갔다. 잔뜩 신이 난 셀의 뒷모습을 보며 서진이 미소를 지으며 셀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그리고 셀 옆의 빈 자리를 잡아 누각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렇지? 혼자서 여기까지 올 만 하지?"

"응, 여기 또 누구랑 왔었어?"

셀이 고개를 돌려 서진을 쳐다보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셀의 머리칼이 셀의 얼굴을 가리자, 서진은 자기도 모르게 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서진이 말했다.

"네가 처음이야, 셀. 기분 전환 시켜주고 싶었어."

셀의 눈이 동그래진 채 자신을 쳐다만 보자, 서진은 자신의 손이 셀의 귀 쪽으로 뻗어 있는 걸 보고 손을 빨리 아래로 내렸다.

"미안, 이러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이렇게 했네. 마음대로 터치해서 미안해."

서진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붉혔다. 셀은 고개를 숙였다가 고개를 돌려 야경을 쳐다보았다. 셀은 여기 오기 전에 떠올렸던 것들이 생각 나 마음이 어지러웠다. 셀은 지금이 딱 좋았다. 서진과의 관계가 지금이 제일 좋았다. 더 이상 무너질 게 없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모든 걸 다 보여주었고, 서진도 모든 걸 다 보여준, 더는 사사로운 감정이 섞이지 않는 관계 말이다. 그런데 왜...... 나는 왜 다시 이런 걸 생각하는 거냐고.

셀은 지금 자신의 어지러운 마음을 서진에게 드러내지 않는 게 급선무였다. 이를 알 리가 없는 서진은 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서진이 셀을 불렀다.

"셀."

서진의 손이 셀의 손 끝을 스쳤다. 셀은 고개를 돌려 서진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서진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움직이다 셀의 손 끄트머리를 살짝 잡았다. 서진의 따뜻한 체온이 셀의 손 끝으로 전해졌다.

"우리 관계를 다시...... 정립하고 싶은데......어때?"

셀의 눈동자가 불안에 데굴데굴 굴렀다. 하지만 시선은 서진에게 꽂혀 있었다. 서진의 손가락이 셀의 손을 얽으며 깍지를 꼈다.

"좋아해, 셀. ......그러니까......."

셀의 귀는 더 이상 서진의 말을 듣지 못했다. 아니, 들었다 한들, 셀의 머릿속에서 서진의 말은 늘어진 테이프처럼 늘어지고 뭉개졌다. 형체를 알아보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셀은 조용히 말했다.

"...... 이제와서?"

좋아한다는 말이 이렇게 상처가 될 수도 있구나 싶었다. 서진에 대한 다른 감정이 깊은 곳에서 다 삭아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저 어디 깊은 곳에 묻어두기만 했던 모양이었다. 약 7년 간 겨우겨우 삭혀 내었던 감정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하자, 셀은 이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내가 좋다고?"

아, 셀이 서진에게 잡혔던 손을 빼냈다. 아직도 손에는 서진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이것도 지금은 셀에게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아직까지 서진에게 남아 있는 감정 만큼이나 이 온기가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셀이 다시 말했다.

"이제 와서 네 감정이 변했으니, 사귀자고?"

"셀, 그렇게 느꼈다면......."

"...... 지금은...... 싫어."

싫다는 말을 자기도 모르게 내뱉어버린 셀은 속삭이듯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며 자리를 떠났다. 서진은 셀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라 셀을 뒤따라 누각을 내려갔다. 서진이 성큼성큼 걸어가 셀을 따라잡았다.

"셀! 어떻게 내려가려고 그래! 집에 데려다줄게."

그러나 셀은 서진을 쳐다도 보지 않자, 서진이 셀의 팔을 잡고 돌렸다.

"셀, 혼자서 못 내려가잖아. 우리 여기까지 차 타고 올라왔어. 집에 데려다줄게, 바로."

"그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어떻게 네 차를 타고 집에 가? 넌 속도 없어?"

"난 괜찮으니까...... "

"넌 괜찮을지 몰라도, 난 아니야!"

셀은 서진의 팔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았다. 서진이 셀의 팔을 좀 더 세게 잡으며 말했다.

"그러면 택시 잡을 때까지 기다려줄게. 나한테 한 마디도 안 해도 괜찮아. 내가 그냥 너 안전하게 가는 지 보고 싶어서 그래."

셀은 더 이상 서진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서진은 올라오는 택시를 바로 잡아 셀을 태워주고는 남자친구 행세라도 하듯, 셀의 목적지를 자신이 대신 말하며 차 문을 닫아주었다.

"조심히 가, 셀."

그래도 도착하면 연락하라고 말하지 않을 정도의 양심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서진은 셀을 택시에 태워 돌려보낸 뒤, 택시가 눈 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택시를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았다. 이미 택시 번호는 다 외웠고....... 서진은 여전히 혼자 뛰쳐나간 셀이 마음에 걸렸다.

"젠장...... 김서진, 이 미친 새끼야....... 오늘이 무슨 날이라고 그런 소리를...... 하."

혼자 분위기에 취해서는 한참 고민해도 모자랄 이야기를 감정에 흔들려 뱉어버렸다. 그리고 그 말의 여파는 너무나도 강했다. 셀을 달래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뱉은 말이라고 다시 주워담지도 못하고. 서진은 한숨만 내쉬었다. 뭘 더 수습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셀이 자신을 그렇게 싫어했나 싶기도 했다. 서진이 자신의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중얼거렸다.

"싫다....... 싫다고 했지.......너무 진심이었는데......."

서진도 곧장 차를 타고 산을 내려갔다. 서진은 내일 출근해서 셀을 보면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하고 사과를 건네야 할 지 생각했다. 무엇보다, 셀이 자신을 보고 도망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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