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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실로

RE: by 세시의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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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솔은 이제 혼자서도 곧잘 지원 업무를 잘 다녔다. 이제 타 부서의 사람들과 안면도 익혔고, 서로 간의 신뢰도 어느 정도 쌓인 덕이었다. 기솔은 이게 다 초반에 서진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초반에 서진은 항상 자신의 임무 때마다 기솔을 데려가곤 했었다. 거기서 다른 사람들과 안면도 트게 하고, 기솔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언제나 훈련도 도와주었고 말이다. 그러니 기솔은 자신의 지금 위치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서진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후임이 들어온다면, 당연히 서진처럼 행동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진에게 한 번 성의의 표시도 한 번은 해야할 거 같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표현하면 좋을 지가 고민이었다. 서진과 제일 친해보이는 셀에게 물어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기솔은 나중에 단 둘이 있게 되었을 때 셀에게 슬쩍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찰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기솔은 사무실이 있는 층인 4층을 누르고 닫힘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로 뛰다시피 걸어오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솔은 열림 버튼을 누르고 그 사람이 들어오는 걸 기다려주었다. 남자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말했다.

“고마워요.”

기솔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민원인인가? 하지만 민원인이라기엔 옷도 너무 깔끔하고, 허둥대거나 긴장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관련 종사자라고 하기엔 그가 갖고 있는 짐이랄 것도 전혀 없었기에 기솔은 남자가 이곳에 온 목적을 알아차리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엘리베이터의 버튼도 누르지 않았기에 기솔은 더욱 더 남자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여기 엘리베이터로 빠르게 갈 수 있는 곳은 자신의 사무실과 창고 뿐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남자가 민원인이 맞다면, 이상한 곳으로 빠지기 전에 제대로 안내를 해주고 싶었던 솔은 용기를 내서 먼저 말을 걸었다.

“혹시 어느 부서로 가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사이람 1팀으로 가려고 하는데…….”

남자의 시선이 버튼이 모인 곳으로 갔다. 4층 버튼에 불이 켜져 있는 걸 확인한 남자는 기솔에게 시선을 돌렸다. 

“부서 위치가 바뀌었나요?”

“아니요, 그러면 맞게 타셨어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남자의 나이는 이내와 얼추 비슷해보였다. 아님 그보다 조금 더 많거나. 기솔은 이 사람이 어쩌면 타 경찰서에서 온 간부나 직원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물었다.

“어디서 근무하세요?”

“아, 사이람1팀이요.”

“그러면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네, 물어보세요.”

“지금 사무실에 서이내 있어요?”

“네?”

기솔은 사이람1팀에서 일하면서 단 한번도, 이내를 이렇게 부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항상 서 팀장님, 서이내 팀장님, 혹은 드물게 이내의 계급을 부르는 분들도 계셨다. 하지만 이렇게 격 없이 이내를 부르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약간 얼이 빠진 듯한 기솔의 대답에 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남자는 짧은 탄식을 흘린 뒤 다시 질문했다.

“서이내 경감, 지금 사무실에 있냐고.”

엘리베이터가 4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기솔도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 네, 오늘은 이쪽으로 출근하셨어요.”

남자가 고개를 까딱이며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남자는 더 이상 기솔을 신경쓰지 않는 듯, 빠르게 사무실로 향했다. 기솔은 그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며 남자의 정체에 대해 생각했다. 


확인 끝냈습니다. 해당 흐름에서의 N10 지점은 이전에 확인하셨던 흐름보다 약 2배 혹은 그 이상으로 빠르게 도달하였습니다. 따라서 이후에 따라올 흐름도 이전에 겪으셨던 것보다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내는 정원이 보내온 보고를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 N10 지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를 비교했을 때 많은 변곡점들이 생략되었으므로 이후에 일어날 변화에 대해서는 예측하기가 어려우며, 순서가 어긋날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단 표에…….

문단 밑에는 일어나지 않은 변곡점들과 변곡점에 대한 설명이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이내는 머릿속으로 이것들을 지나칠 수 있을 확률을 생각했다. 어떤 건 이미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어 보였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았다. 일부는 특정 타인과의 신뢰도에 좌우될 만한 것들도 있었다. 이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유로운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고 싶은 모든 걸 할 수는 없었다. 이내가 지금까지 많은 시간의 흐름들을 확인하면서 알아낸 것이라곤 그게 다였다. 모든 흐름에서는 일어나야만 하는 일들이 반드시 있었다.

……변곡점으로 인한 변화를 복구하는 것에 초점을 잡는 것도…….

…… 알려주신 지점에서는 아직 아무런 변화도 관찰되지 않았습니다…….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들. 피할 수 없는 일들. 이내는 정원이 보내온 장문의 보고에서 잠시 눈을 떼었다. 이내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여전히 눈 앞에 그 글자들이 아른거렸다. 도달 시간이 단축되었다. 다른 일들이 어떻게 진행될 지는 미지수다. 그 지점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관찰되지 않는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이내는 이맛살을 찡그렸다. 이내는 자신의 목표를 다시 한 번 더 상기했다. 그리고 정말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지를 가늠해보았다. 똑똑, 노크 소리에 이내는 힘들게 눈꺼풀을 올렸다. 들어오라는 답을 하기도 전에 상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가도 되지?”

이내는 상대를 보고 놀란 나머지 눈으로만 그를 훑었다. 상대는 그게 들어와도 좋다는 소리로 생각하고 문을 닫고, 소파에 앉아 이내를 마주보았다. 앉으란 이야기도 없었는데, 아주 당연하다는 듯 앉는 손님을 보며 이내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내가 보고 있던 보고서를 덮으며 말했다.

“넌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네.”

이내의 집무실 밖에서는 유리창 너머로 이내와 이내의 손님을 두고 남아 있던 팀원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셀과 말을 나누더니 이제는 이내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태 보았던 이내의 손님들 중 가장 제멋대로인 손님은 저 사람이 처음이었기에 더욱 더 수군거릴 수 밖에 없었다. 기솔이 이내의 집무실 쪽으로 눈을 힐끗거리며 옆에 있던 셀에게 물었다.

“뭐하는 분이신지 여쭤봐도 돼요?”

“경호회사 사장님. 그런데 지금도 하시는 지는 모르겠어. 연락 못 드린지 꽤 되었거든.”

옆에 앉아 있던 혜정이 셀의 앞으로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여기는 이렇게 채우는 게 맞아요?”

“이건…….”

셀이 혜정의 서류를 가까이 가져와 살펴보며 정원이 말했을 법한 정보들을 혜정에게 알려주었다. 혜정의 얼굴이 갈수록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혜정이 셀에게 들었던 정보를 셀에게 다시 확인하는 동안, 기솔은 고개를 들어 셀과 이내의 손님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이내의 나이와 비슷하게 보이는 남자는 소파에 편하게 앉아 이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드르륵,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나자, 솔은 소리가 난 곳으로 눈을 돌렸다. 혜정이 어두운 얼굴로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셀은 혜정의 뒷모습을 안쓰럽게 보고 있었다. 혜정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기솔이 몸을 셀쪽으로 가까이 옮겨 속삭였다.

“제가 도와줄까요?”

“아냐, 할 수 있는데 저러는 거야.”

혜정의 자리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 혜정이 사탕을 먹는 소리가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는 기솔과 셀이 동시에 눈을 마주치고 눈웃음을 지었다. 집무실 쪽 문이 벌컥 열리자, 사무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남자가 셀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셀, 언제 끝나냐?“

셀이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당연히 6시에 끝나죠.”

셀의 답을 들은 손님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다시 이내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셀은 손님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런 질문을 굳이 하신 거람. 기솔이 말했다.

“어쨌든 선배한테도 볼일이 있으신 거 같네요.”

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셀은 남자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알 것 같았지만, 대체 왜 이렇게나 일찍 온 것인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바빠야할 사람인데, 왜 한가하게 여기서 이러고 계시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나저나, 두 분이서 아는 사이였었나? 셀은 이내에게서 아저씨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아저씨에게서도 이내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셀은 좀처럼 저 둘이 대화하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눈을 못 떼세요?”

“두 분이 서로 아는 사이인 줄은 몰랐거든.”

그리 중요한 정보가 아니긴 했지만, 셀은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아저씨에게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도리어 생각해보면, 말을 해주는 게 맞는 건가 싶기도 했다. 사실 이 사실에 대해 셀에게 말해야할 의무는 전혀 없지 않은가. 필요가 없었다면, 말해줄 이유가 없지. 셀의 머릿속에서 이성과 감성이 짜맞춘 듯 팽팽하게 대립했다. 머릿속 싸움을 겨우 진정시킨 셀은 자신의 옆에서 자신과 똑같은 곳을 보고 있는 기솔을 발견했다. 이 친구도 눈을 못 떼기는 마찬가지였다. 셀이 물었다.

“너는 왜 눈을 못 떼고 있어?”

셀의 질문에 기솔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기솔이 조금 심각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무 티 났나요……?”

“되게 신기해하는 눈치여서.”

“아……. 팀장님이랑 저렇게 편하게 이야기하는 분은 처음인 거 같아서요.”

기솔의 말에  셀은 다시 이내와 아저씨에게 시선을 돌렸다. 셀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셀은 창 너머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마치 저들의 옛시절을 훔쳐보는 느낌이었다. 기솔의 말대로, 둘은 꽤나 편한 사이처럼 보였다. 


“할 이야기도 다 했는데, 네 재량으로 애들 좀 일찍 끝내줄 수는 없냐?”

영현은 말을 끝맺으며 이내를 보았다. 이내는 가만히 웃고 있었다. 영현은 그게 거절의 의미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도 영현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내가 말했다.

“나한테는 그런 재량이 없는데? 그러게 누가 이렇게 일찍도 찾아오래?”

“네가 일찍 보내줄 줄 알았지. 30분 정도는 괜찮잖아.”

이내는 자꾸만 자신을 회유하는 영현에게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이내는 영현의 회유를 가볍게 받아쳤다.

“나야 일만 다 되어 있으면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니까. 셀은 그러다 걸리면 징계 먹을 수도 있어. 네 자식 같이 아끼는 애가 징계 먹어도 괜찮아?”

“허, 그런 식으로 공격해올 줄은 몰랐는데.”

“나 많이 늘었다?”

“하여튼 인간들은 늙으면 혀 놀리는 솜씨밖에 안 늘더라.”

영현은 몸을 돌려 다시 사무실을 죽 둘러보았다. 셀과 셀 옆에 있던 사람이 자신의 시선을 피해 눈을 황급히 돌리는 걸 보았지만, 영현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영현의 목적은 다른 사람에게 있었다. 사무실에 있어야 할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영현이 물었다.

“김서진은?”

“지원 나갔어. 이 시간 쯤엔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일이 생각보다 많나보네.”

영현이 다시 몸을 돌렸다. 영현이 물었다.

“잘해?”

“관심도 없으면서 왜 물어?”

“내 밑에 있다 나간 놈인데, 그래도 그건 궁금해할 법도 하지 않냐.”

이내는 영현의 질문에 차분하게 답해주었다.

“잘해, 믿을만 하고. 나머진 네가 말한 거랑 똑같고.”

“…… 김서진 들어온 지 1년 정도 되었나?”

“서진이 들어온 지 1년 넘었어.”

이내는 영현의 말뜻을 이해했는지, 말을 이었다.

“잘한다니까, 서진이?”

이내는 영현이 왜 그렇게 서진을 못미더워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서진에 대한 경험을 빗대어보았을 때, 이내는 그저 영현이 서진에게 심술을 부리는 게 틀림 없다고 생각했다. 서진은 어디 가서 이렇게까지 미움을 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랬지만, 이내는 정원이라면 모르겠지만, 정말 서진은 그 정도의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영현은 으레 늙은이들이 일어날 때 내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현이 말했다.

“셀 지금 데려가도 되지?”

여태 말한 모든 것들이 무색해지는 질문이었다. 끈질긴 영현의 태도에 이내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 수 밖에 없었다. 이내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데려가라, 데려가.”

영현은 손을 한 번 흔들며 집무실에서 벗어났다. 이내는 영현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영현의 가자는 말이 들리자, 셀이 빠르게 자신과 눈을 맞추고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이내는 표정과 손짓으로 따라가도 좋다는, 그러니까 퇴근해도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셀의 표정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짐을 챙기고 이내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이내는 영현과 셀이 사무실에서 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공정하게 남은 친구들도 모두 퇴근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못 온 애는 열외로 치고 말이다. 

셀이 영현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

“이렇게 일찍 오실 줄은 몰랐어요.”

영현은 셀이 들고 있던 짐을 뺏어 들며 말했다.

“나는 이렇게 늦게 나가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셀은 영현이 뺏어든 자신의 짐을 잠깐 쳐다보고는 그냥 영현의 손에 맡기기로 했다. 하지만 다른 건 영현의 마음대로 하게 둘 수는 없었다. 셀이 영현의 말을 받아쳤다.

“아저씨가 일찍 오신 거잖아요. 이러실 거면 저한테 연가라도 쓰라고 미리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영현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영현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네 팀장이 융통성있게 굴 거라 생각했지 뭐냐.”

영현의 말에 셀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재밌어서 웃은 건 아니었다. 셀이 영현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대답했다.

“제 퇴근 시간이랑 서 팀장님의 융통성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시는 거에요.”

“뭐, 덕분에 조금이라도 일찍 나왔으니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셀이 영현의 말을 빠르게 반박하기 시작하기가 무섭게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곧 로비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다시 열리며 영현과 셀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영현이 셀과 걸음을 맞추며 대답했다.

“그래, 다음이 있다면 그때는 조금 더 천천히 올게.”

“그런데 요즘 안 바쁘세요?”

“나? 바쁠 게 없지. 회사 나갈 일도 없고, 누가 나한테 일을 주는 것도 아니고.”

영현이 허리를 숙이고 셀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수된 지 두 달 정도 되었다.”

셀이 깜짝 놀라 가던 걸음을 멈추고 되물었다.

“네?”

영현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셀에게 웃어주고는 셀을 두고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셀은 눈을 몇 번 깜빡인 뒤, 곧장 영현의 뒤를 따라갔다. 영현이 백수라니. 영현과 백수는 셀의 머릿속에서 절대로 등치될 수 없는 단어들이었다. 마치 정원과 백수를 잇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영현이 백수라고?

셀은 경찰서에서 영현의 집으로 이동하는 내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제일 먼저 영현이 어쩌다 백수가 되었는지로 시작해서, 거의 마지막즈음에는 추억 여행을 같이 하고 있었다. 영현에게 이미 들었던 대로, 영현의 집이 있는 주택가 쪽은 변한 게 거의 없었다. 그리고 영현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차고하며, 현관 앞의 깨끗하면서도 삭막한 앞마당은 셀이 이곳을 떠나기 전과 모든 게 똑같았다. 

“여기는 정말 바뀐 게 하나도 없네요.”

“먼저 내려가서 들어가 있어라. 짐 챙겨서 따라 들어가마.”

셀은 그러겠다 대답했지만, 들뜬 마음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하고 앞마당을 한바퀴 둘러 보았다. 마당이 넓은 집은 아니기에 영현이 짐을 챙기는 데 드는 시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보고도 남을 정도였다. 셀이 현관 계단 앞에 도착할 때즈음, 영현도 셀의 짐을 챙겨 현관 앞에 도착했다. 셀이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식물이나 반려동물 같은 건 안 키우시네요.”

“너도 알다시피 나는 뭔가 키우는 데에는 재주가 없잖냐. 구경은 다 했니?”

“아직 내부가 남았는데요?”

영현이 툴툴거렸다.

“바뀐 게 없는데 뭘 또 구경하겠다고.”

“제 눈에는 다를 수도 있죠.”

문이 열리자 셀은 영현보다 빠르게 안으로 들어가 집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셀이 제일 먼저 현관 옆에 있는 거실과 부엌이 연결되는 곳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아저씨 방은 여전히 1층 안쪽이죠?”

“그래.”

영현은 자신의 집을 둘러보는 셀의 모습을 보며 잠시 옛생각에 젖었다. 셀이 이곳에 처음 왔었을 때엔, 자신이 셀을 안아 들고 집을 구경시켜주었었는데 말이다. 그랬던 셀이 이제는 다 커서 자신의 발로 다시 들어와 집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얼마 있지도 않고 다시 돌아갈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에 영현은 이 광경을 좀 더 오래 눈에 두었다. 셀은 여기저기 열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열어보며 자신의 기억 속의 집과 현재의 집을 맞춰보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호기심이 많은 건 여전했다. 영현은 셀의 짐을 들어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길어봤자 이틀 정도 있을 수 있는 무게 같았다. 1층을 다 둘러본 셀이 영현의 앞으로 돌아오며 말했다.

“올라갈까요?”

“저쪽은 안 봐도 되냐?”

“저긴 뭐가 바뀌었는지도 잘 몰라요.”

영현이 아쉬우리만치 가벼운 짐을 챙겨 들며 말했다.

“그럼 그만 올라가자. 네 방으로 가면 된다.”

셀이 계단을 먼저 올라가며 물었다.

“저 이번엔 언제까지 있어도 돼요?”

“언제까지 있고 싶은데?”

“이틀? 정도로 생각하고 왔어요.”

“뭐, 하루이틀 더 있다 가면 나는 좋지.”

영현의 말에 셀은 곧장 계단에서 가장 가까운 방으로 걸어갔다. 셀의 방은 2층 계단에서 가장 가까이에 위치해 있었다. 1층처럼 2층도 모든 게 그대로였다. 더더군다나 2층은 1층과 달리, 바뀐 게 거의 없었다. 셀의 기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여기서 변한 것이라고는 셀 밖에 없었다. 자신이 집을 떠나고 2층에 올라온 적이 있긴 하려나. 셀이 물었다.

“2층에 자주 올라오긴 하세요?”

영현은 문 옆에 서서 셀을 보며 말했다.

“네가 있을 때 만큼은 안 오지.”

영현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리고 셀이 영현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시트와 커텐이 달라진 걸 제외하면, 방 안은 셀의 옛기억과 거의 동일했다. 독립 후에 영현의 집으로 돌아온 건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셀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방 안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영현은  셀을 지나쳐 침대 옆에 셀의 짐을 내려놓았다. 영현의 눈에는 아직도 셀이 그대로였다. 아니, 열심히 컸지. 

“좀 더 천천히 자라주길 바랐는데.”

영현의 말에 셀이 답했다.

“아저씨 시간에 맞추려면 전 이제야 겨우 고등학생일걸요?”

셀의 말에 영현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방 안은 청소 되어 있으니 더럽진 않을 거다. 있을 만큼 있다가 가.”

“아저씨는 언제까지 계세요?”

“주말까지는 별 일 없으면 집에만 있을 예정이다. 일 보러 갈 일도 이젠 거의 없어서. 지내면서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셀은 말 대신 웃으며 영현을 한 번 안아주었다. 영현은 머쓱하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셀의 방을 빠져나갔다. 셀은 영현의 발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의 방을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셀은 자신이 얼마 만에 이곳으로 돌아왔는지를 가늠했다. 못해도 3년은 되었을텐데. 이곳은 3년 전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셀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 같았다. 마치 3년 전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셀은 여길 3년 내내 관리해 온 영현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셀은 곧장 1층으로 빠르게 내려와 영현을 찾았다.

영현은 부엌에서 음식을 조리하고 있었다. 셀은 영현의 맞은 편에 앉아, 영현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영현의 셀의 기척을 느끼고는 입을 열었다.

“배고프니?”

셀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기다릴 수 있어요.”

달구어진 팬에 뭔가를 볶는 소리가 들렸다. 셀은 턱을 괴고 영현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릴 때 주말에 한 두 번 정도는 이렇게 영현이 직접 해주는 요리를 먹고는 했었다. 평일은 서로 바쁘니 밖에서 음식을 사 먹거나, 미리 사둔 반찬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식이었다. 영현의 뒷모습은 그때와 똑같아 보였다. 셀은 시선을 돌려 자신이 앉은 식탁을 손으로 한 번 슥 쓸어보았다. 여기에 있는 모든 게 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대로였다. 마치 영현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말이다. 셀이 웃으며 말했다.

“옛날 생각 나네요.”

“며칠 정도는 더 있고 싶어지지?”

셀은 영현의 장난을 여유롭게 받아쳤다.

“제가 아저씨랑 놀 시간이 있을지 다시 체크해봐야겠네요.”

셀은 일부러 휴대폰을 꺼내 일정을 확인하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영현은 고개를 살짝 돌려 셀을 본 뒤,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내 욕심이 과해서 그래. 오랜만에 봤잖냐.”

“요즘 일 없으시다고 집에만 계시는 건 아니죠?”

식기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영현이 셀의 앞에 식기를 내려놓아주었다. 숟가락과 포크를 식탁에 내려놓은 거로 봐서는 오늘의 저녁은 양식인 듯했다. 영현이 셀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렇진 않아.”

곧이어 영현은 셀 앞에 음식이 담긴 접시를 가져다 주었다. 베이컨과 새우가 얹어진 오일파스타가 셀 앞에 놓였다. 음식을 본 셀은 부엌에 은은하게 퍼져 있던 마늘향의 이유를 알아차렸다. 파스타에는 다양한 형태의 마늘들이 면 사이사이에 끼어 있었다. 이렇게 많은 마늘이 들어간 알리오올리오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먹지 못할 거 같았다. 셀이 말했다.

"마늘 좋아하시는 것도 여전하네요."

영현이 자신의 몫의 음식을 들고 오며 말했다.

"입맛은 크게 안 바뀌는 모양이야."

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먹을게요.”

“여전히 입맛에 맞을진 모르겠구나.”

“왜 그런 걱정을 하세요?”

영현이 들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몸이 예전 같지 않거든. 세월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야.”

“엄살은. 늙지 않는 게 아저씨 능력이라고 하셨잖아요.”

"그 능력도 세월은 이길 수 없나보지. 왜, 네 능력도 언제나 잘 되는 건 아니지 않더냐. 네가 시험기간만 되면 머릿속에 남는 게 없다며 불평만 해댔던 거 기억하지? 자기 정도면......."

셀이 영현의 말을 막기 위해 입에 있던 음식을 빠르게 목구멍으로 넘긴 뒤,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아, 그때 이야기는 하지마세요!"

셀이 툴툴거렸다.

"머리에 지식을 넣는 건 제 기억 능력과는 다른 거라고요."

"결국 네가 기억하는 건 똑같잖냐."

"아무튼 다른 거에요."

또 언제적 이야기를 꺼내시는 거야. 셀은 포크로 면을 빙빙 돌리며 영현의 행동을 흘긋거리며 쳐다보았다. 저런 건 어떻게 저렇게 잘도 기억하는지, 몸이 예전같지 않다는 영현의 발언은 그저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으레 하는 엄살 같은 게 틀림 없었다. 셀은 포크에 돌돌 말린 면을 보면서 자신의 질문을 던지기엔 지금이 가장 적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런 이야기가 나온 김에 물어보는 게 좋지 않겠어? 셀이 들고 있던 포크를 그릇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뭔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셀의 말에 영현의 포크질의 속도가 느려졌다. 영현이 눈썹을 부드럽게 세우며 궁금증을 표했다. 셀이 말했다.

“제 능력, 언제 발현되었는지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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