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소실
셀은 이내의 집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내가 없는 집무실은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곧 도착한다며 별 일 없으면 미리 들어가 있어도 좋다는 연락에 셀은 고민도 없이 이내의 집무실로 들어왔지만, 생각보다 늦어지는 이내의 방문에 진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셀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내를 맞을 준비를 했지만, 그 자리엔 이내 대신 정원이 서 있었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네 말동무 해주라고 팀장님이 보내셨어.”
“더 걸리신대?”
“네가 기다린 시간 보다는 덜 걸릴 거라고 하시네.”
정원은 자신의 말에 셀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너 기다리게 만든 게 미안하신 거 같아.”
그랬다면 제 시간에 맞춰서 오지 않으셨을까? 셀은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말들을 입에 문 채 답하지 않았다. 단어들이 혀를 톡톡 건드리며 나가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지만, 셀은 이 의지들을 시종일관 무시했다. 대신 셀은 질문을 던졌다.
“팀장님, 옛날에도 종종 이러셨었어? 그러니까, 이렇게 늦으시는 거 말야.”
“늦을 땐 확실한 이유가 있으셨었지. …… 시간 계통 사이람이시잖아, 티끌만큼의 시간도 돌리시지 못할 이유가 있으시겠지.”
“뭐야, 평소의 천정원 답지 않게?”
“나도 사람인데, 죽상인 사람 속을 박박 긁고 싶진 않거든?”
“하하, 내 얼굴이 그정도야?”
“나가서 거울 보고 와, 그러면 알겠지.”
셀은 다시 웃음소리를 내었다. 정원이 이렇게 재밌는 사람이었던가? 물론 정말 재밌어서 웃은 건 아니었다. 이런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닌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게 웃겼을 뿐이었다. 셀은 사무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세로로 길게 난 창문 너머로 이내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오셨다.”
그러고 정원이 앉은 곳을 쳐다보았을 땐, 정원은 이미 집무실 문을 열고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나 있기 싫었냐? 셀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정원의 뒤통수를 째려보았다. 아까 전에 정원에 대해서 평가했던 건 셀의 머릿속에서 금방 날아가고, 이전 버전이 곧장 복원되었다. 저 자기 일 밖에 모르는 재수탱이 같으니라고.
“미안해, 셀. 많이 기다렸지?”
이내가 안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찰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셀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내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정원이가 무리하게 일정 잡지 말고 다음주 일찍 잡으라고 했었는데, 내가 마음이 급해서 당장 이야기를 하고 싶었거든. 그런데…… 그게 오히려 널 기다리게 만들어 버렸네.”
“바쁘셨나봐요.”
“… 돌아오는 길에 일이 조금 꼬여버렸어.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어서 대처가 쉽지 않더라구. 이 일에서 꽤나 잔뼈가 굵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닌 모양이야.”
이 말들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셀이 깨닫는 순간, 이전에, 불과 몇 초 전까지도 느꼈던 불쾌함이 조금 가라앉았다. 이에는 정원의 대답도 한 몫하였다. 그리고 잠깐의 평온함을 느끼기가 무섭게, 이내에 대해 좋지 못한 생각을 했던 것에 대한 수치심이 몰려왔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게 뭐야? 감사인사는 이전에도 했잖아.”
“이 형사님께서 말씀하신 증거물과 경찰서 내에 남은 증거물 기록이 일치하지 않아서, 혹시 이것과 관련해서 아시는 게 있나 싶으셔서요.”
“어떤 건지 설명해줄래?”
“해당 사건 피해자 각각의 진술기록서가 누락되어 있었는데, 혹시 기억하시는 게 있을까요?”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어?”
“…… 네. 문제라도 있나요?”
이내가 턱을 잠깐 괴었다가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내는 기억을 끄집어내려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하더니 의자를 당겨 앉아 인트라넷을 켰다. 이내는 화면이 켜지기가 무섭게 검색을 시작했다. 이내가 물었다.
“기록물들 다 데이터베이스에 올라가 있지?”
“네, 현재 보관소 내에서 보관 중인 건 다 올라가 있어요.”
“바로 답을 줄 수 있으면 좋은데, 나도 기억이 확실하지가 않아서-.”
“이 형사님이 거짓말을 하시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어요.”
“그래, 그러진 않았을 거야. 그리고 나도…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고.”
이내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검색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셀이 말했던 대로 데이터베이스에는 셀이 말한 진술기록서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었다.
“이 형사님은 부지 이전하면서 빠진 게 아니냐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러면 있었다는 기록은 남아 있어야 하는데, 원래부터 없던 것처럼 되어 있잖아. 그이가 착각했나 싶긴 한데, 그럴 거 같지는 않단 말이지. 그 사람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이기도 하고, 꽤 오랫동안 매달리기도 했었으니…….”
이내는 한참동안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정적 속에서 키보드를 누르는 소리와 마우스 휠이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렸다. 셀은 그 소리와 이내의 표정에서 증거에 대한 정보가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상하네. 빠져있을 수가 없을 텐데. 더군다나 사고 피해자의 진술서면…… 그 중에 한 명은 너잖아, 셀리엇.”
그리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셀은 달리 할 말이 없어 입꼬리를 올려보았지만 자연스럽게 올라가지는 못했다. 이내의 말대로라면 진술서에는 자신의 것도 있어야만 했다. 시스템을 확인하든, 보관된 서류나 증거품을 찾든 그곳에는 그 진술서의 흔적이라고는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애초에 실존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기억나는 건 없어?”
그러니까 이 일은 사고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한 거 있죠? 제가 모르는 일을 다른 사람이 알고 있다는 게.”
까딱, 소리를 내며 이내의 의자 등받이가 뒤로 살짝 젖혀졌다. 모니터 너머로 보이는 이내의 표정도 셀과 마찬가지로 찝찝해보였다.
“어렸을 때니까, 충격이 커서 그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게 넘기기엔 좀 찝찝하니까…… 한 번 알아볼게, 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진 모르겠어. 알아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고.”
이내의 말대로 충격을 받고 자신이 그와 관련된 기억을 지워낸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이 통째로 도려낸 듯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셀에게는 좀처럼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도 아니었고, 그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해야할 이유도 없었고 말이다. 셀이 말했다.
“언제든 좋으니까 뭔가 알아내시면 꼭 알려주세요.”
다시 의자에 바르게 앉은 이내가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럴게. 다른 게 더 있니?”
“아뇨, 이거 때문에 연락드린 거였어요. 감사합니다, 팀장님.”
“그래. 아, 요새 바쁘진 않지? 일정이 좀 더 늘었던데.”
“괜찮습니다.”
이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휘휘 저으며 그만 나가보라는 시늉을 했다. 셀은 집무실을 벗어나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다. 자리로 돌아가니, 다른 일과 관련하여 정원이 남긴 메세지가 몇 개 있었다. 일단은 이것부터 처리하는 게 맞았다. 어차피 경과 보고서는 이미 작성한 상태였고, 다른 보고서는 아직 추가할 만한 게 나오지 않았다. 셀은 기억을 빠르게 복기하며 곧장 정원의 메세지에 응답했다. 답을 전송하기가 무섭게, 정원의 메세지가 도착했다.
“당장 추가하거나 할 건 없다는 거지, 그러면?”
“왜?”
“급히 출장 잡혔어. 아마도 당장 서류 봐주긴 힘들 거 같아서. 급한 건 기솔씨한테 부탁하던가.”
“아~~ 또 혼자만 가냐구.”
“출장비 얼마 쥐어주지도 않는데, 네가 대신 갈래?”
“맛있는 거 사서 돌아와~”
……
“누가 출장 씩이나 갔다왔는데~~ 아무것도 안 사온대요~~”
……
“진짜 답 안 해주는 거야?”
셀이 몸을 살짝 일으켜 모니터 뒤로 보이는 정원을 염탐했다. 정원은 자기 자리에 없었다. 눈을 조금만 돌리니, 정원은 혜정의 자리 옆에 서서 혜정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혜정의 눈은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정원과 이야기를 하는데 저렇게 눈을 반짝거릴 수 있을까? 셀이 신입의 열정에 감탄하고 있을 때쯤, 그 반짝임이 자신에게 꽂히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반짝임을 더욱 더 돋보이게 해줄, 반쯤 죽은 시선도 함께 꽂히고 있다는 걸 느꼈다. 무언가 이상함을 직감한 셀이 자리에 앉자, 일부러 들으라는 듯 정원의 목소리가 사무실 내에 울려 퍼졌다.
“모르는 거 있으면 셀리엇 씨한테 물어봐요. 그래도 여기서 제일 오래 있었던 사람이니까.”
셀이 모니터 너머로 다시 얼굴을 드러내자, 정원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셀에게 물었다.
“그렇죠?”
셀은 눈을 반짝이는 귀여운 신입을 위해, 정원과 똑같이 대외용으로만 사용하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정원의 말을 받아쳤다.
“굳이 콕 집어서 말씀하시는 의도를 모르겠네요.”
하지만 셀의 말은 허공에서 주먹질을 한 것처럼 허공에서 흩어지고 말았다. 정원은 혜정에게 몇 가지를 더 설명하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거야, 진짜. 셀은 다시 자리에 앉아, 다시 직장인으로서 처리해야 할 일들을 처리했다. 일에 탄력이 막 붙기 시작했을 때즈음, 정원이 셀의 자리로 가까이 다가와 기척을 내었다. 정원이 물었다.
“10분 뒤에 시간 괜찮아요?”
“전 지금도 괜찮은데요?”
정원이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지금 잠깐 이야기해요.”
셀은 정원과 함께 사무실에서 나갔다. 어디 멀리라도 가는 줄 알았더니, 정원은 사무실 근처에 대충 멈춰 서서는 셀에게 별 것 아닌 일들-하지만 혜정에게는 중요할 수도 있는 일들-을 하나씩 나열하기 시작했다. 셀은 등을 벽에 살짝 기댄 채로 정원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기만 했다. 셀이 혜정에게 해줄 일들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대개 쉬운 일들이 전부였고, 굳이 불편함을 꼽는다면야 조금 번거로울 수도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귀찮은 일이어봤자, 얼마나 귀찮은 일이겠어. 셀은 그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 정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주변에 서진도, 솔도 있었다.
“어차피 출장 갔다와서 내가 확인할 거니까…….”
시선을 내리고 있던 셀은 어느새 입을 다문 채 자신을 보고 있는 정원을 쳐다보았다. 정원이 물었다.
“내 말 듣고 있는 거 맞지?”
“출장 어디로 가는지 물어봐도 돼?”
조금 부드러워보이던 정원의 표정이 다시 딱딱해졌다. 정원이 대답했다.
“안돼.”
“아, 갔다가 오는 길에 맛있는 거 좀 사오라구-. 어디 가는지만 알려주면 내가 찾아서 알려줄 거니까-.”
“알려줄 생각 하나도 없으니까 꿈 깨라.”
“너무하다, 진짜.”
“팀장님이랑 이야기는 잘 했어?”
이번에는 정원의 질문에 셀의 얼굴이 굳었다. 셀은 날을 세우며 질문으로 답을 대신했다.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튀어?”
정원은 기계처럼 눈만 굴리며 셀의 모습을 살피며 답했다.
“그냥 궁금해서.”
“오늘 너 진짜 이상하다?”
“그냥 물어보는 거야. 예민하게 굴지 마.”
“내가 예민하게 굴었다고?”
“내가 물어보기만 하면 자꾸 날이 서잖아.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고.”
정원의 말에 셀은 말문이 막혔다. 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원이 이어서 말했다.
“그냥 나한테 말하기 싫으면 말하기 싫다고 말해.”
이런 말을 내뱉는 사람 치고, 정원의 얼굴은 너무나 담담했다. 그리고 정원의 이런 무덤덤한 태도는 오히려 셀의 신경을 긁었다.
“왜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나는 그런 의도로…….”
셀은 당연히 자기를 싫어한다 가정하고 말하는 정원이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뭐가 달라져? 그러는 넌 왜 갑자기 나한테 그런 걸 물어보는데?”
“물어볼 수도 있잖아.”
“나도 대답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정원이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난 네가 그냥 질문에 답을 하기 싫은 건지, 아니면 상대가 나여서 싫은 건지 알 수가 없어서 그런 말을 한 거야.”
정원이 말을 이었다.
“무슨 이유든 말하기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
“그게 그 말이잖아! 나는 너한테 그런 식으로 행동한 적 없는데, 넌 도대체 왜-.”
“왜 또 둘만 밖에 나와 있는 거야?”
서진은 빠르게 상황을 간파했다. 붉어진 셀의 얼굴과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이는 정원의 얼굴은 서진에게 많은 걸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이 나타나고 더 이상 입을 움직이지 않는 셀의 입에 서진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서진의 의도가 뭐가 되었든, 셀의 심기에 거슬릴 만한 행동인 것도 마찬가지였다.
“왜 나만 봐?”
“셀, 여기서는 조금 조심해서 말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우리끼리야 다 알지만, 남들이 보면 너 되게 버릇없어 보일 수도 있어. 특히…….”
“난 그 문제…….”
서진이 셀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 를 신경 써야지, 당연히. 남에게 밉보여서 좋을 건 없잖아.”
그리고 서진은 정원 쪽으로 고개를 돌려 정원을 쳐다보았다. 정원의 표정엔 여전히 큰 변화는 없었지만, 셀과 서진을 번갈아 보느라 시선은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진이 정원을 불렀다. 정원의 시선이 자연히 서진에게 고정되었다. 서진이 말을 이었다.
“정원아. 셀에게 해야할 말이 있지 않아?”
정원은 이렇게까지 해야하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서진은 꽤나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정원은 서진과 셀을 번갈아 쳐다본 뒤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정원은 눈썹을 찡그렸다가 최대한 싫은 티를 온 몸에서 걷어낸 뒤, 입을 열었다.
“셀,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 내가…… 말을 잘못한 거 같네.”
셀은 정원의 사과를 제대로 받아주지 않았다. 정원의 목소리와 말과 말 사이의 여백에서 그렇게까지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셀에게는 정원의 사과가 지금 상황을 무마하기 위한 행동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 남에게 좀생이 같아 보일지라도, 셀은 정원의 사과를 받아줄 마음이 없었다. 셀은 정원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대답했다.
“필요하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정원이 서진을 한 번 쳐다보고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서진은 문이 닫히는 걸 보고 난 뒤에야 시선을 내려 셀을 쳐다보았다. 셀의 얼굴엔 여전히 불쾌한 티가 역력히 남아 있었다. 서진이 조용히 셀을 불렀다.
“셀.”
“말씀하세요.”
“정원이가 진짜 사람이 나빠서 그렇게 행동한 건 아니라는 거 알지?”
셀은 서진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과연 모든 걸 다 들었어도 그렇게 말했을까? 셀은 그렇게 생각했다. 서진이 정말 모든 걸 다 봤다면, 이렇게 이야기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걸 말이다. 셀이 말했다.
“뭘 보고 그렇게 판단하시는 건데요?”
“나 너랑 말씨름 하려고 여기 남아서 이야기 하는 거 아니야.”
그건 셀도 마찬가지였다. 서진과 더 이상 나눌 이야기는 없었다. 굳이 말하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셀이 서진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면 저랑 더 이상 나눌 말씀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서진이 몸을 낮춰 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서진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셀, 진짜 이러기야?”
셀은 대답하지 않았다. 셀은 서진이 자신의 표정을 읽고 있는 걸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어디 실컷 읽어보라지. 서진이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여전히 속닥거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쁜 거 아니면 나가서 이야기할까? 아니다, 나가서 이야기하자, 셀.”
“저는…….”
서진이 셀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할 말 있으니까, 나가서 이야기하자.”
셀이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자, 서진은 손으로 반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진짜야.”
서진은 셀을 데리고 평소와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셀은 말없이 서진의 뒤를 따라갔다. 사람들이 모여서 담배를 피는 곳을 지나갔다. 여길 지나가면 건물 입구의 정반대편으로 가는 길이었다. 건물로 돌아가기 너무 멀어서 사람들이 담배조차 피러 오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 곳까지 데려갔다는 건 아마, 사람들 눈이 신경 쓰여서겠지. 울타리를 사이로 지나가는 행인만 있는 곳까지 와서야 서진이 걸음을 멈추었다. 서진은 셀을 건물쪽으로 바짝 붙였다. 셀은 서진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지만,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는 않았다. 셀이 물었다.
“왜?”
“햇빛 뜨겁잖아. 그늘에서 이야기 해.”
서진의 말에 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도 같이 따라올 줄 알았는데, 서진은 셀의 맞은 편에 서서 햇빛을 그대로 받으며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셀이 말했다.
“안 들어와?”
“난 여기가 편해.”
누가봐도 그건 거짓말이었다. 서진은 두 눈을 찡그린 채, 손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햇빛을 가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서진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평소의 셀이었다면, 서진에게 고집부리지 말고 옆으로 오라고 했겠지만, 셀은 그러지 않았다. 서진이 물었다.
“대체 정원이가 뭐라고 했는데, 그렇게까지 열 받아 있는 거야?”
“기분 나쁜 말만 골라서 하잖아.”
서진은 숨을 소리 없이 길게 내쉬는 것으로 한숨을 대신했다. 서진이 셀을 달래듯 말했다.
“그냥 좀 걸러 들어.”
“그걸 어떻게 걸러 들어? 남들하고는 잘도 하하호호 거리면서, 왜 나한테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냐고. 내가 만만해보이니까 그런 거 아냐.”
셀은 그렇게 말을 하고 나자, 있지도 않았던 빗장이 탁, 하고 풀린 느낌이 들었다. 서진은 가만히 셀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게 마치, 서진이 아직도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져서 셀은 속에 담고 있던 말들을 하나씩 풀어내었다.
“내가 물어보는 건 기어코 제대로 대답도 안 하면서, 자기가 물어보는 건 왜 대답 안 하냐고 그러는 게 어딨어? 자기가 싫어서 대답 안 하는 거냐고?”
하나하나 풀고나니, 셀은 화가 풀릴 줄 알았는데 더욱 더 하늘로 치솟았다. 진짜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 셀이 팔짱을 꼈다.
“그게 할 말이야?”
서진은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셀의 말을 듣고 있다는 시늉을 했다. 서진은 자신의 생각보다 셀이 아주 단단히 화가 났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든 좀 풀어놓아야 사무실로 갈 수 있을 텐데. 앞으로 가야할 길이 생각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셀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쉬지 않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는 자기는 내가 싫어서 내가 말하는 모든 것에 그렇게 싫다고 선을 긋는 거야, 뭐야? 한 번쯤은 좋은 말을 해줄 수도 있잖아. 사람 부담스럽게 갑자기 걱정된다는 듯한 태도도 이해가 안 가. 왜? 평소처럼 굴면 반이라도 가는데, 왜 평소랑 다르게 굴어서 사람 이상한 기분 들게 하냐고!”
서진은 그런 셀을 계속해서 쳐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뭐가 문제인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정원이 평소처럼 굴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평소랑 다르게 굴어서 셀의 성미를 건드렸다는 말에서 서진은 정원이 조금 억울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싫어서 말 안 해주는 거냐는 말은 진짜 무슨 생각으로 한 거야? 그러면 역으로, 자기는 내가 싫은 건가? 내가 언제 싫어하는 티 낸 적 있어?”
셀이 거칠게 숨을 내뱉는 것으로 끓는 화를 터트리는 것을 마무리했다. 셀은 이렇게 실컷 속마음을 지르고 나서야 화를 조금은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원에 대한 서운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싫은 티를 낸 적도 없거니와, 정원을 싫어한 적도 없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들 사이에서 셀은 정말 정원이 자신을 싫어하면 어쩌나 싶었다. 하지만 셀의 머릿속의 정원은 싫으면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었기에 셀은 그 생각을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건 세포 하나 만큼의 공간을 내어주기도 아까운 생각이었다. 아니, 착각이었다.
서진은 셀의 들끓던 화가 가라앉다 못해 차갑게 식을 때까지 셀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해가 이렇게 뜨거운데도 서진은 그곳에 잘도 서 있었다. 셀이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그리고, 언제까지 거기 서 있을 거야?”
“좀 나아졌어?”
“나아졌으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어?”
“나아졌으니까 그러고 있는 거 아냐?”
서진이 그렇지 않냐며 고개를 살짝 기우뚱하게 세웠다. 확실히 기분이 더러웠던 건 좀 나아진 거 같기도 했다. 하지만 셀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뱉어낸 감정들이 쉬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정원에 대한 서운함이 이 더위에 증발해버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서진의 표정을 보니, 이를 부정하기엔 이미 한참 늦은 거 같았다. 서진이 말했다.
“어차피 둘 중 한 명이 관둘 때까지는 계속 봐야하는데 좀 적당히 부딪히며 지내.”
“나보고 슬슬 이직이든 퇴직이든 준비하라는 소리야?”
서진이 눈썹 끝을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그 말이 아닌 거 알잖아.”
서진은 이제서야 맘놓고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저런 식의 장난을 칠 정도면 급한 불은 일단 끈 셈이었다. 서진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정원이한테도 말 좀 가려가면서 하라고 전달할게. 솔직히 좀 기분 나쁠 말이긴 했어. 정원이는 별 생각없이 물어본 거였겠지만.”
“걔는 진짜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분명히 나한테만-.”
서진이 셀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아닌 건 아니니까.
“적어도 널 만만하게 보고 그러는 건 아니니까 그만 화 풀어, 셀. 내가 조심하라고 말할게.”
셀이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나 아직 화 풀린 거 아니야.”
“알아.”
가장 먼저 해결해야할 일이 끝나고 나서야, 서진은 셀을 따라 그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그늘 안에 있으니 아주 조금은 시원함이 느껴졌다. 서진은 셀을 그늘 안으로 밀어넣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진은 화제를 돌릴 겸, 자신의 호기심도 해결할 겸, 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오늘 서 팀장님이랑 있었던 면담, 무엇 때문에 했는지 물어봐도 돼?”
서진의 질문에 셀은 멈칫거렸다. 상대가 정원이 아니라 서진이니 무슨 말을 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아까 이것때문에 성질을 팍팍 낸 걸 생각하면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게 쉬운 건 아니었다. 셀은 괜히 신발 앞코로 땅을 툭툭 건드리며 대답했다.
“저번에 나한테 그 사건 조사하는 거, 정 막막하면 서 팀장님한테 뭐라도 부탁해보라고 했잖아.”
“그랬지. 그래서 다녀오지 않았어?”
“갔는데 뭔가 좀 이상한 게 있어서. 그거 여쭤본다고 그랬어.”
“해결은 잘 되었고?”
“그건 두고 봐야겠지.”
셀은 그때 그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 때 있었던 일에 대한 기억만 선명했다면, 사라진 진술서의 존재 여부에 이렇게 매달려 있을 필요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어차피 자기가 진술서 그 자체였을 텐데. 그리고 지금까지 사건을 알아내겠다고 이렇게까지 파헤치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셀은 신발 앞코로 쿡쿡 찌르며 애먼 바닥을 괴롭혔다. 서진이 위로의 말을 던지려는 찰나에 셀이 고개를 들어 서진을 쳐다보았다. 마치 뭔가를 결심한 듯한 눈빛에 서진은 하려고 했던 말을 잊어버렸다. 셀이 서진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 아저씨한테 다녀올까봐.”
셀은 지금 당장은 자신의 머릿속을 정리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영현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오랫동안 봐왔고,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사람말이다. 어디가 엉켰는지를 확인하려면 어느 정도는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영현은 셀의 질문에는 빠짐없이 모두 대답했지만, 그렇다고 나서서 무언가를 알려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마, 영현이 알려주지 않은 게 더 있을지도 몰랐다. 그새 생각에 빠진 셀은 서진의 말을 대충 흘려 들었다. 셀이 대충 들은 서진의 말에 대한 대답이랍시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중얼거렸다.
“아저씨는 뭐라도 알고 있겠지. 어릴 때부터 나를 봐왔으니까. 그리고…….”
서진이 셀의 말을 가로채며 물었다.
“굳이 가야 해?”
서진의 질문에 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서진은 항상 영현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썩 좋아하지 않는 표정이 얼굴에 여실히 드러났다. 셀은 서진의 이런 태도를 볼 때마다 영현이 대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왔는지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셀이 아는 영현은 그렇게 못된 사람일리가 없는데 말이다. 셀이 대답했다.
“항상 전화만 드렸어서, 이번에는 한 번 찾아뵙기도 해야하고.”
“안 가면 안 돼?”
“같이 갈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여태 못 물어본 것도 여쭤보고,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도 있고.”
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서진은 한숨을 내쉬며 벽에 몸을 가볍게 기대었다. 서진의 표정은 여전히 밝진 않았지만, 그렇기에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다. 서진이 뭐라고 자신이 영현에게 가는 걸 막겠는가? 한 발 물러선 서진에게 셀이 물었다.
“안부 전해줘?”
서진이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받지도 않으실 거야.”
“에이, 안부 정도는 받으실 걸?”
서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서진을 보며, 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렇게 고집이 센 사람이 나한테 고집이 세다고 말한다고?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건지도 모르겠다. 셀이 말했다.
“그냥 너 잘 지내고 있다고만 전달할게.”
모든 걸 포기한 서진이 손목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힘없이 말했다.
“그래, 그만 돌아가자. 생각보다 오래 있었네.”
돌아가자는 말에 셀은 토를 달지 않았다. 셀이 곧장 몸을 움직이자, 서진은 셀의 옆에서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 걸었다. 셀은 이제야 일정을 머릿속으로 체크하며 언제쯤 영현에게 갈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평일은 아무래도 출근도 해야했고. 무엇보다, 이번 주엔 지원 일정이 잡혀 있었다. 지원을 하고, 해당 건에 대한 보고서까지 작성하려면 남은 근무일 중 하루를 빠지기엔 꽤나 빡빡한 일정이었다. 당장 가기엔 주말이 제일 좋은 선택지로 보였다. 마음 같아서야 연차를 쓰고 당장 찾아가고 싶었지만 말이다. 한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서진의 목소리가 셀의 생각을 방해했다.
“언제 가려고?”
“금요일 근무 끝나면? 왜?”
“가는 거 도와줄까 싶어서 물어봤지.”
데려다준다는 뜻인가? 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그렇게 가지마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도와주겠다는 거야. 셀이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셀이 말했다.
“아냐, 혼자 갈게.”
정원은 퇴근 시간을 넘어선 시간임에도 아직 사무실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원의 눈이 모니터에 띄워진 서류들을 빠르게 훑어내리고 있었다. 정원은 기솔과 셀이 최소한의 일로도 충분히 일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자신의 선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미리 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정원이 일을 하는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출장 후에 돌아왔을 때 일폭탄을 맞고 싶지 않아서였다. 출장 갔다와서 보고서까지 써야할 마당에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지난 일들까지 처리할 생각을 하니, 정원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니 모든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 문제의 싹들을 모두 제거할 생각이었다. 똑똑, 하고 목재를 두드리는 소리가 정원의 집중력을 흩트렸다. 정원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서진이 서 있었다.
“정원아.”
정원은 서진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대충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한가하게 그런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정원은 고개를 돌려 주변에 자신과 서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빠르게 확인했다. 그래서 이제야 온 거구나. 정원은 서진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셀 이야기 하시려고 그러는 거죠? 저는 괜찮습니다. 타이밍이 안 맞았던 거겠죠. 반응이 좀 격해서 놀랐던 거지, 기분이 나빴던 건 아니었어요.”
서진은 정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되돌아 오는 서진의 말이 없자, 정원은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돌렸다. 정원이 이어서 말했다.
“얼굴이 내내 안 좋아보여서 그냥 물어봤던 거에요. 내내 안 좋았던 적은 없었던 거 같아서.”
서진은 정원의 태도를 계속 확인했다. 평소의 정원 답지 않게 어지러이 펼쳐진 모니터 속의 창들을 확인한 서진은 정원이 그냥 바빠서 이렇게 행동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서진은 굳이 돌려서 말할 필요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본론으로 향했다. 서진이 말했다.
“넌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나여서 일부러 괜찮다고 하는 건 아니고?”
서진의 질문에 정원은 모니터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다시 서진에게 옮겼다. 아무래도 서진이 자신을 일찍 보내줄 거 같지는 않아서였다. 정원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정리한 다음, 이전보다는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선배가 셀이랑 제일 친하다고 해도 자기 앞가림은 할 줄 아시는 분이라는 거 알아요. 이런 사사로운 이야기 셀에게 말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정원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더는 모니터의 글들이 정원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대화가 끝이 나야 다시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서진과의 대화가 평소처럼 빠르게 이어지지 않았다. 정원은 한숨을 작게 내쉰 뒤, 말을 이었다.
“셀이 생각하는 저의 이미지를 이제는 좀 더 확실하게 알 거 같아요. 거기에 맞춰서 움직여주면 이럴 일도 없겠죠.”
“정원아.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서진은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서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둘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는 게 틀림 없다고 생각했다. 말을 하지 않는 게 맞는 거 같은데, 이걸 달리 적절히 표현할 말이 서진의 머릿속에서 생각나지 않았다. 차라리 말하지 말까. 서진이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
“아냐, 그냥…… 네가 조금만 조심해 줘. 요즘 셀이 따로 신경 쓰는 일이 있는데, 그거 때문에 좀 예민해서 그래. 해결 되면 괜찮아질 거야.”
슬슬 다시 눈에 다시 문서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원이 가볍게 일을 이어가며 물었다.
“원래 하려던 말씀은 뭔데요.”
“없어. 그게 내가 하려던 말이야.”
“어차피 셀이랑 저랑 사이 좋은 것도 아닌 거 뻔히 아시면서, 힘들여서 포장 안 하셔도 괜찮아요.”
“너는 진짜…….”
“저도 어느 정도는 알아야, 최대한 부딪힐 일을 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셀이 저를 욕할 거라는 것쯤은 대충 예상하고 있어요. 부딪히는 일이 한 두번도 아니고.”
“아니, 그러진 않았어.”
서진은 연신 한숨만 푹푹 쉬어댔다. 서진의 이마에 계속 위치해 있던 그의 손은 어느 새 서진의 눈이 있던 위치까지 내려와 있었다. 서진은 눈이 가려진 상태에서도 여전히 말을 고민하는 것 같았다. 정원이 갑갑함을 토로하려고 할 때가 되어서야 서진이 입을 열었다.
“…… 셀은 네가 자기를 만만하게 본다고 생각해. 물론, 아니니까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해주긴 했는데, 그래도 조심했으면 좋겠어서.”
그 말에 정원의 표정이 구겨졌다. 정원의 시선이 갈곳을 잃은 듯 움직이다가 서진을 향했다. 서진의 표정도 그렇게 좋지는 못했다. 정원은 이런 말을 전한 서진에게 딱히 비난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굳이 따지면 이런 말을 내뱉게 만든 자신이 문제였다. 정원은 이 대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간단하게 답했다.
“제가 조심할게요. 이제 그럴 일 없을 거에요.”
“굳이 이런 말까지 하게 해서 미안하다.”
정원은 덤덤한 태도로 대답했다.
“셀의 심기야 어차피 며칠 지나 있으면 풀려 있을 거고, 저는 그 동안 여기 없으니까 괜찮습니다. 괜히 저희 사이에 끼여서 선배만 고생이시네요.”
“너 어디 지원 잡혔어? 원래는 일반 사무 보려고 여기 온 거잖아.”
“능력 관련해서 일정 잡힌 건 아니니까 괜찮아요. 출장이 사흘 정도 잡힌 거라, 그 기간 안에 처리해야 할 건 솔이랑 셀한테 미리 다 말해놓았어요. 선배는 금요일까지 내내 일정 잡혀 있으시니까, 최대한 다른 사람이 할 수 있게 정리했습니다.”
“내가 따로 도와줘야할 건 없고?”
“셀 기분만 잘 케어해주시면 될 거 같네요. 어차피 저 없어서 상관 없을 거 같긴 하지만.”
서진이 정원의 표정을 한 번 훑었다. 정원의 얼굴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기에 정원의 의중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서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비꼬는 건 아니지?”
“제가 그런다고 얻는 것도 없는데 뭐하러 비꼬겠어요.”
“그래, 출장 잘 다녀오고. 다음주에 보자.”
서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정원에게 손인사를 했다. 정원은 서진과 눈을 맞추고 간단하게 목례를 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제서야 겨우 혼자가 된 정원은 남은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빠르게 남은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불이 다 꺼진, 깜깜한 방에서 벨소리가 울려퍼졌다. 밝은 빛과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손이 몇 번 뻗쳐지더니, 옆에 있던 스탠드가 켜졌다. 잠에서 막 깬 정원이 피곤에 절은 얼굴로 현재 시간과 발신인을 확인한 뒤 전화를 받았다.
“지금 몇 시인지 아세요?”
“오늘 별 일 없었지?”
대답 대신 돌아오는 질문에 정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원은 다시 시계를 확인한 뒤 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팀장님, 지금 몇 시인지 아시냐고요. 저희 새벽엔 서로 연락 안 하기로 했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정원이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린 뒤, 마른 세수를 하며 이내의 질문에 대답했다.
“네, 별 일 없었어요.”
“별 일 없는 것치고는 셀 표정이 안 좋던데.”
“제 말에 감정적으로 반응해서 그래요. 제가 조심하면 돼요.”
“그러게 진작 잘 대해주지 그랬어? 성질 죽이고 잘 지내는 거 같아 보이긴 했는데, 역부족이었나보네?”
“저는 최선을 다했다고요. 시답잖은 농담도 받아주고, 헛소리도 들어주고, 하다못해 제 능력도 보여줬는데. 나름 사람 좋게 대했다고 생각했는데도, 걔 머릿속의 저는 생각보다 더 싹퉁바가지 없는 새끼였나보죠.”
“네가 그렇게 행동한 건 아니고?”
정원은 이내에게 말려들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말했다.
“왜 새벽부터 사람 속을 긁고 싶어하시는 거에요?”
“너는 괜찮은 거 맞고?”
“왜 다들 제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전 괜찮아요. 팀장님. 시킬 일 없으면 그냥 전화 좀 끊어주시면 안 돼요?”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어차피 여기서 중요한 건 제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셀이 기분이 나쁘다는데 저한테 무슨 여지가 있어요? 말실수 했다는 건 변하지 않는데. 그러니 "
정원은 피곤함에 말을 쏟아내다가 입을 다물었다. 정원이 아까보단 차분해진 투로 말을 이었다.
“…… 겨우 몇 개월 같이 있었다고, 제가 좀 친해졌다는 착각을 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제 태도가 흐름에 영향을 준 적이 있었나요?”
“그런 적은 없었어. 정원아. 몸 안 좋으면 조금 쉴래? 근무기록은 알아서 처리해줄게.”
“지금 무단으로 조작하겠다는 뜻은 아니시죠? 제가 자다 깬 지 이제 5분도 안 되었는데, 이런 소리를 들으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제대로 안 가네요.”
전화기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원은 감기는 눈을 애써 바로 뜨고, 눈을 비볐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도 이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원은 자신이 얼마나 버르장머리 없이 굴었는지를 깨닫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무리 자다 깼다지만, 사람을 너무 날카롭게 대하고 있었다. 상대는 심지어 한참 어른인데 말이다. 정원은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듯 쥐며 손바닥을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머리에서 사람의 체온보다 약간 더 높은 열기가 느껴졌다. 최근에 제대로 쉰 적이 있기는 했던가. 정원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잠을 제대로 잔 날을 세어보려 했지만, 마땅한 날이 생각나지 않았다. 쉬기는 쉬어야 했다. 정원이 말했다.
“죄송해요, 팀장님. 팀장님 말씀대로 쉬는 게 맞는 거 같네요.”
“출장을 사흘로 신청한 건, 넉넉히 잡아서지?”
“네, 이틀이면 충분한데 혹여나 변수가 생길 수도 있을 거 같아서 사흘로 신청했어요.”
“어차피 훑어볼 양이 많진 않을 거라…… 이틀만 일하고, 하루는 그냥 쉬어.”
이내의 말대로 될 거란 보장은 없었지만, 정원은 이내의 말에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아까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였다. 정원이 답했다.
“네.”
“나머지는 다음에 이야기하자. 일 끝나면 연락해.”
“네, 그럴게요.”
“난 웬만하면 내일 쉬었음 좋겠는데.”
“제가 알아서 할게요. 들어가세요.”
정원은 이내의 말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정원은 눈을 감은 채 자신의 미간을 오랫동안 누르고 있었다. 몸은 너무 피곤한데, 잠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침대에 머무른다고 해서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정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걸어나갔다. 식기가 달그락거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커피머신이 윙윙 소리를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셀의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에 영현의 메세지가 도착했다.
아저씨: 그러면 내가 금요일에 데리러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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