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이제 그만할까? (1)
셀의 말에 서진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이 기회인 거 같았지만, 서진은 그 말을 입에 쉽게 담을 수가 없었다. 표현해야한다. 서진이 용기를 내 셀을 쳐다보았다. 셀의 표정이 묘했다. 울고 난 후라 셀의 눈가가 붉게 물든 모습이 서진에게는 또 보지 못했던 셀의 모습이어서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도 서진은 셀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발갛게 눈이 부어가는 그 모습조차도 말이다.
셀은 서진에게 다시 듣고 싶었던 말을 아직 듣지 못했다. 말을 못하면 고개를 끄덕이든, 내젓든 하면 되는데 서진은 그저 빤히 셀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래서 셀은 자신이 했던 생각이 진짜인지, 조금 불안해졌다. 셀과 서진이 동시에 말했다.
"아니야?"
"셀."
서진이 셀의 한쪽 손을 잡고 매만졌다. 서진의 뜨거운 체온이 셀에게 전해졌다. 손이 너무 뜨거워서 셀은 움찔거리며 놀랐지만 서진으로부터 손을 빼지는 않았다. 서진이 셀의 손을 살펴보듯 손가락이며 손바닥이며 모든 셀의 부분을 손으로 천천히 쓸어댔다.
"셀, 넌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서진은 겨우 감정을 담아 말을 뱉었다.
"좋아해."
서진이 심호흡을 크게 했다. 서진은 얼굴이 화끈거려 더는 셀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서진의 시선은 자신이 잡고 있는 셀의 손에만 꽂혀 있었다.
"셀…… 난 이런 게 그렇게 익숙하지가 않아서 너한테 상처만 준 거 같아. 그렇지?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서진의 작은 떨림이 셀에게도 전해졌다. 셀은 서진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서진은 그날도 이렇게 떨었을까? 셀은 서진의 떨림을 받아서 그런지, 아니면 함께 이 분위기에 젖어 들어서 그런지, 자신은 듣기만 하는 처지인데도 마음이 떨려왔다. 서진이 이어서 말했다.
"난…… 잘해주려고 노력 되게 많이 했거든. 그런데 그게 네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던 거 같아. 그렇지?"
서진이 고개를 들어 셀을 쳐다보았다. 셀은 서진과 눈이 마주쳐버리는 바람에 서진의 눈을 피해 눈을 살짝 내리 깔았다. 셀에게는 서진이 여전히 붙잡고 있는 자신의 손이 보였다. 서진의 손은 여전히 뜨거웠다. 셀이 손을 꼼지락거리자, 서진이 셀의 손을 놓아주며 말했다.
"내가 좀 더 티를 냈어야 했는데. 미안해."
서진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구는 편이었다. 그래서 셀은 서진이 자신에게도 그냥 친절함을 베푸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서진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이 좀 더 받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뭘 받았는지, 어떤 종류의 챙김을 더 받았는 지는 좀체 알 수가 없었다. 남들에게도 다 똑같이 해주는 거 같았는데 말이다. 티를 좀 더 많이 냈으면 좀 더 빨리 알아차렸을까? …… 알아차렸겠지. 셀은 서진이 야경을 보여준다고 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러자 설렘과 불안함이 뒤섞였던 그때의 감정이 다시 셀을 휘감았다. 지금의 상황과 맞물려, 셀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터지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셀이 서진에게 잡혔던 손을 자신의 무릎 위로 가져와 주먹을 쥐었다. 아직도 손이 따뜻했다. 서진의 온기가 좀처럼 빠져나가질 않았다. 셀이 툴툴거렸다.
"오늘 미안하다는 말만 몇 번째야."
"그러게. 하하…… 내가 잘못한 게 많잖아. 하나씩 사과해야지."
서진이 귀를 붉히며 말을 이었다.
"좋아하니까…… 네가 싫다거나…… 너를 갖고 논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
서진은 자신의 태도를 하나하나 해명하고 싶었다. 이건 왜 그랬고, 무슨 생각을 했고, 그래서 이런 행동이 나왔다고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 모든 과정이 다 쓸모가 있을 거 같지는 않았다. 지금은 자신의 진심을 셀에게 전하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진은 숨을 삼켰다. 겨우 세 음절인 한 단어를 입에 담는 게 서진에게는 너무나도 힘들었다. 서진이 떨려오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천천히 말했다. 음절 하나하나에 진심을 담아, 셀이 그 말을 흘려 듣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좋아해, 셀."
셀은 고개를 숙인 채 서진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지금 서진의 목소리는 유달리 더 듣기 좋았다. 일부러 목소리를 깔기라도 한듯, 듣기 편안한 소리로 서진은 말하고 있었다. 분명 목소리는 떨려오는 걸로 봐서 자기도 많이 긴장한 것 같은데 말이다.
서진은 셀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셀의 얼굴을 보면 지금 겨우 나오는 말도 목에서 막혀서 더는 나오지 못할 거 같아서였다.
"그래서 난 더는 너를 헷갈리게 하거나, 힘들게 하는, 이런 건 그만하고 싶어."
서진이 말을 이었다.
"셀, 너만 좋다면…… 내가, 우리가 원하는 관계로 다시 시작하고 싶어."
셀이 고개를 들어 서진을 쳐다보았다. 서진의 얼굴과 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때도 그랬을까? 셀이 고개를 들자, 서진이 시선을 한 번 마주쳤다가 고개를 돌렸다. 셀이 답이 없자, 서진이 다시 셀 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셀이 서진의 시선을 피해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다. 셀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서진이 눈동자를 굴리며 셀의 기분을 파악하고자 했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표정만으로는 알기가 힘들었다. 서진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가 그런 의사가 없다면…… 난 당연히 네 생각…… 네 의사를 존중할거야."
서진은 자신의 생각을 무리하게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 날도 셀은 서진의 고백을 듣더니 기겁을 하며 곧장 자리를 뜨지 않았는가. 관계가 발전하지는 못해도 계속 친구사이로도 잘 지낼 수 있을 터였다. 여태 잘 지냈는데, 그러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서진은 셀이 그런 관계를 지속하는 걸 힘들어 한다면 자신이 거리를 적당히 잘 두고 지내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셀이 자신을 더는 보기 싫어한다면? 볼 때마다 자기를 피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만 하지 말아달라고 셀에게 비는 것 말고는 달리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셀은 서진이 초조해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서진이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답이 어떤 답일지 궁금해 한다는 것도 말이다. 셀은 서진을 놀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의 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든 것에 대한 아주 작은 복수 정도는 하고 싶었다.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셀은 시간을 끌기 위해 일부러 서진을 놀리듯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사무실에서 하는 거야?"
셀의 장난을 눈치채지 못한 서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서진은 취조를 당하는 사람처럼 지금의 상황을 해명했다.
"다른 곳으로 가서 이야기하면 네가 날 따라가줄 것 같지 않아서 그랬어……. 별로지?"
그건 내가 싫다고 해서 여기서 이야기한 거 아니었어? 셀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숨기기 위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평소의 서진의 모습은 어디가고, 어딘가 안절부절못하는 서진의 모습이 셀은 이제 웃기기만 했다. 이 사람이 이런 모습도 가지고 있구나란 생각에, 셀은 입꼬리가 자꾸만 실룩거렸다. 오늘 김서진 때문에 감정이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지, 서진은 알까? 셀은 웃음기를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문 채 말했다. 셀은 서진에게 진지하게 대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묵혀둔 자신의 감정에게도 말이다. 셀이 말했다.
"난 그날 네가 그 이야기를 한 후로, 내가 아직도 널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어. 그런데 그 감정을 바라볼 준비가 안 되어 있었어. 진짜…… 오랫동안 덮어놓았었거든. 그날 이후로. 쭉."
서진이 셀의 표정을 살피다가 살짝 장난기를 섞어서 말했다.
"나 늦었다고 구박하는 거지?"
셀이 서진의 정강이를 앞코로 쿵, 하고 찍으며 말했다.
"알면 가만히 들어. 지금 누가 엄청 늦어서 내가 이러고 있는 거잖아."
서진이 입을 열려고 하자, 셀이 검지로 서진의 입을 가리키며 서진의 말을 가로챘다.
"미안하다는 말 이제 금지야! 잘못한 거 알고 있으면 입 다물라 그랬지, 내가?"
셀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셀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하…… 분위기 잡고 싶었는데, 너 때문에 못 잡겠잖아. 멋진 척하는 건 항상 자기만 해. 어쨌든…… 흠흠, 그래, 그만 하자."
서진의 눈동자가 떨렸다. 셀은 일부러 서진을 애타게 만들었다. 이 정도는 복수 측에도 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서진이 입을 열었을 때부터, 좋아한다는 그 말을 입에 담았을 때부터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누구처럼 마음을 거절하지 않는 것에 감사하라고. 셀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네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 관계를 새로 정립하자."
셀의 말을 들은 서진이 셀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셀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서진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서진에게는 퍽 귀여워보였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귀여울 수 있지? 하지만 셀의 말을 다시 생각해보면 셀의 말은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빌려왔지만, 서진은 그게 좋은 뜻으로 해석해야하는지, 나쁜 뜻으로 해석해야하는지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서진은 약간 얼이 빠진 사람처럼 물었다.
"좋은 쪽으로?"
"당연히 좋은 쪽이지! 내가 네가 말했던 단어를 그대로 가져와서 말했잖아!"
셀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싫었다면 네 말도 다 안 들었을 거야."
셀의 마지막 말에 서진이 셀에게 달려들어 셀을 꽉 안았다.
"아니, 이럴 것까지는-!"
셀은 몸이 갑자기 뒤로 휙 넘어가자 눈을 질끈 감으며 서진의 몸에 매달렸다. 의자가 부딪혀 쿠당탕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셀은 여전히 서진의 몸에 잘 붙어 있었다. 의자가 넘어 갔으니 같이 넘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 셀이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서진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셀은 서진을 보지 않으려고 괜히 서진의 어깨쪽으로 고개를 더 돌렸다. 심장이 빨리 뛰는 거 같았다. 그리고 서진에게 바짝 안겨 있어서 그런지, 서진의 심장도 빨리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셀은 서진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처럼 서진의 몸을 더 끌어 안았다.
"휴, 바닥이랑 거리가 짧아서 놓치는 줄 알았네."
서진이 자신의 팔로 붙잡은 셀을 단단하게 안으며 일어섰다. 키차이 때문에 셀의 다리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진은 셀이 불편할까봐 자신의 팔뚝으로 셀의 몸을 받쳐주었다. 서진이 셀에게 웃어주자, 셀은 지금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서진이 셀을 천천히 바닥에 내려주었다. 바닥에 발이 닿자, 한시름 놓은 셀이 한숨을 내쉬었다. 셀이 이를 갈며 말했다.
"너...... 일부러 그랬지."
"아냐, 내가 왜 일부러 그래."
"누가 첫날부터 그러래!"
셀이 주먹으로 서진을 한 대 쳤다. 서진이 셀에게 맞은 곳을 다른 손으로 감싸며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파, 셀."
"그러게 누가 사람을 이렇게 놀래키래?"
"네가 날 받아준 게 너무 좋아서 그랬어."
서진이 힘껏 셀을 끌어 안았다. 셀은 저항도 못한 채 서진의 품에 끌려들어갔다. 서진이 이렇게나 좋아할 줄이야. 그나저나 원래 이렇게 감정 표현을 잘하는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서진은 거리낌없이 애정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그래, 좋은…… 좋은 날이니까 오늘은 그냥 받아주자. 셀은 자유로운 팔을 움직여 서진을 안아주는 대신 서진의 팔을 토닥거려주었다. 서진이 셀을 안은 채 물었다.
"일 언제 끝나? 집에 데려다줄게."
"좀…… 기다려야할 텐데."
"저녁은?"
"안 먹고 일하는 게 더 빨라."
"간식이라도 사줘?"
"이러고 있는 시간에 보고서 한 자라도 더 쓸 수 있을 거 같아."
셀의 말에 서진이 머쓱하게 웃으며 셀을 안고 있던 팔을 풀어주었다. 서진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간식을 사오겠다며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셀은 차마 서진을 말릴 새도 없었다. 셀이 한숨을 쉬며 서진이 넘어트린 의자를 세워 앉았다. 보고서도 보고서였지만, 셀은 서진이 사올 간식이 더 걱정이었다. 분명 간식이라 치부하기 어려운 것들을 간식이랍시고 사올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걸 먹는 게 셀에게는 더욱 스트레스였다. 셀이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오자마자 집에 갈 수 있게 후다닥 써야겠다."
서진은 뛰쳐나가듯 사무실을 나왔다. 서진은 사무실에서 좀 멀어지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했다. 서진은 금방이라도 자신의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방금 전에 서진은 셀에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셀은 그것을 받아주었고, 마음 졸이는 것 없이 셀에게 있는 그대로 자신의 감정을 포옹으로 표현했다. 서진은 자신의 심장이 터진다면, 아마 과한 행복으로 인해 혈압이 급격하게 상승했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서진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지 않나 생각했다가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직 셀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했으니 벌써 이런 식으로 미래에 초를 칠 수는 없었다. 죽어도 셀에게 줄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다 주고 나서야 죽어야할 것 같았다. 물론, 서진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보았을 때, 그에게는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그래서 서진은 오히려 더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셀을 챙겨줄 수 있을 거 아닌가. 좀 전의 일로 잠시 목적을 잊은 서진이 급하게 목적을 다시 떠올렸다. 얼른 간식 사서 돌아가야지.
서진의 입꼬리는 좀처럼 내려가지 않고 있었다. 중력이 없었다면 하늘 끝까지 치솟을 것처럼 서진의 입꼬리는 서진의 얼굴에 높이 걸려 있었다. 서진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기보다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 밖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서진은 편의점에서 셀이 맛있다고 했던 간식들만 골라 바구니에 담았다. 그러다 너무 단 것들로만 바구니가 가득 차자, 서진은 정신을 차리고 하나씩 건강에 매우 좋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과자들을 하나씩 쳐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셀의 입에 맞을 간식들의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셀이 좋아하는 간식들과 그렇지 않을 것 같은 간식들의 수가 비등해졌을 때쯤 서진은 간식들을 계산대로 넘겼다. 셀이 이걸 어떻게 다 먹냐는 잔소리를 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서진은 양껏 간식을 사 들고 셀에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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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달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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