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구름
어쩌구 SF 레뇨살마
세 블럭 하고도 위로 두 채 정도 떨어진 곳에 살던 사람은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아서 사흘을 꼬박 갇힌 채로 보내다가 어제 겨우 빠져나왔다. 고장 원인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런 걸 조사하러 와줄 사람이 있을리가 없잖나!" 그는 관절을 빼서 닦으며 말했다. 원인은 알아낼 수 없어도 당장에 해결할 능력(몽키스패너로 깡깡 때려보고, 버튼을 되는대로 눌러보는 것도 능력이라고 한다면)이 있는 행인이 구해주고 요구한 것이 바로 지금 손질 중인 의체였다. 그는 강제로 구해져서 보수로 제 다리를 내놓게 생겼지만 불만을 말할 정도의 용기는 없었다. 아니 그야, 눈 앞에서 총을 흔들고 있는데 줘야지 그럼! 다리 지키려다 심장 내놓을 일 있나? 물론 요즘엔 비싸고 다루기 까다로운 생 심장을 구하진 않았다. '매매'에도 트렌드가 있다고. 펄떡거리는 건 관리하기 힘들고 맞는 사람 찾기도 힘들고 비싸지. 차라리 새까만 고무로 만든 인공심장이 싸게 먹히고 좋다.
설마하니 '심장 구하는 게 그렇게 쉽다면 평균 수명이 140세는 거뜬히 넘겠군!' 하는 뻔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없길 바란다. 앞서 말했지만 여긴 엘리베이터 고장 사고가 하루에도 수십 건 일어나도 아무도 관심이 없는 곳이니까. 그런 곳에 아무리 싸다고 해도 장기 덜렁 들고 환자를 찾아오는 의사는 없단 걸, 거리에 누워서 꼼짝않고 있는 여기 다섯살배기 어린애도 알았다. 눈깜박하면 사기를 당하고 어디 하나 잃어버리고, 옆집에서는 며칠 째 더러운 냄새가 났다. 신고라도 했다가는 내가 귀찮은 일에 휘말릴 테니 넘어가자.
어쨌든. 죽음은 가깝고, 그럼에도 죽지 못하는 것은 더 쉬운 일인 이곳에서는 친구 하나 눈 감는 걸 보는 건 일상 중 소소한 이벤트에 불과했다. 그런데 가끔 일상이 견디기 힘들 때가 있지 않나. 어제 죽은 친구는 괜찮아도 오늘 떠난 사랑은 사무치기도 하는 변덕이. 그런 걸 예상 할 수 있으면 그게 어디 인간이야? 아무리 몇 번이고 그려본 미래라고 해도 받아들이기 힘들거나, 믿기 싫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런 법은 없다고? 너 뭐 돼?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돈이 아주 많은 사람(물론 이곳 기준이지만)은 이곳을 떠났고, 적당히 많은 사람은 아픈 가족을 잘 치료해서 살았다. 돈이 조금 많은 사람은 차라리 죽은 이후를 생각했다. 핵심적인 기억 좀 담아서 냉동했다가, 사후에 전자레인지 돌리듯이 기계 상자에 넣고 정보를 입력하면 그 비슷한 인간이 만들어지곤 했다. 학습형 채팅과 비슷한 거라고 해두자. 돈이 조금도 없는 나로선 그럴 바엔 차라리 치료에나 돈을 더 쏟아보는게 낫지 않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의결권이 없는 사람은 입다물고 있는게 맞았다.
살마의 기억이 가로 세로 5센치 남짓한 얇따란 장치로 옮겨가는 것을 커튼 너머로 구경하며, 신발로 바닥을 탁탁 치고 있을 땐 어른들이 조용히 해야한다며 주의를 줬다. 내 신발 밑창소리가 살마의 귀를 거쳐서 저 케이블을 타고 저장되기라도 할까. 귀중한 저장공간이 그런 걸로 낭비되기라도 할까. 그런데 사실은 가구 몇 개 더 팔아서라도, 조금이라도 더 큰 장치를 사서 이런 사소한 걸 다 넣어야 했던 게 아닐까. 나는 저 속에 과연 나에대한 기억이 얼마나 들어갔을지, 내가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될지 알 수가 없어서 불안했다. 뭐라도 더 보탰어야 했는데. 그래야 나에게 굴러 떨어지는 권리가 더 많았을 것이다. 겨우 이름 하나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저 장치의 일 푼도 차지하지 못하더라도 불만을 말 할 수 없는 어린애였다. 살마의 가족들은 총 없이도 내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커튼 너머 실루엣을 볼 수 있는 배려가 전부라고 해도 감사하다 고개를 꾸벅여야 했으니, 나는 어른들 몰래 발을 작게 굴렀다. 어느정도 소음이어야 꾸중을 듣지 않을지 곁눈질로 표정을 살피며 약삭빠른 놈처럼 소리를 키워갔다. 저기 터진 파이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보다는 내 소리가 커야했다. 헐렁한 창문이 바람에 덜컹거리는 정도는 용납할 수 없었는지 한 명이 손으로 창틀을 잡아눌렀다. 단거리 경주에서 엎치락 뒤치락하는 선수가 되어서 방 안의 소음들과 짧게 경쟁했다. 그래도 시계초침 소리보다는 나를 새겨넣어야지. 저장될지 그냥 흘려 지나갈지 모르는, 아주 약간의 확률에 기대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저 고철덩어리가 오류를 내길. 입력된 명령대로 옮기지 않고, 무작위의 다른 기억들이 들어가길. 그 중에 내가 있기를. 그게 안 된다면 이 발구름이라도.
✻ ✻ ✻
이제 들썩임 따위는 없는 목석같은 기계를 살마라고 불러야했다.
차라리 형태를 닮기라도 했으면 기분이 나았을까. 집게달린 팔을 가진 깡통 로봇을 딸이라 할 수 없었던 건지, 새로운 살마는 아주 단순하게 생겼다. 머리 잘린 원뿔은 바닥을 미끄러지듯이 매끄럽게도 움직였다. 문지방은 밀어버렸고, 혹여 카페트가 말려들어가 바퀴를 묶을까 걱정되었는지 바닥에 깔린 것도 모두 치워버렸다. 예민한 기계 몸뚱어리는 손질도 어려워서, 고장이라도 나면 꼬박 4시간은 걸리는 도시로 가서 고쳐야했다. 사람일 때나 기계일 때나 몸 고치는 것은 똑같이 힘들었다. 만약 고칠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어떻게 해야하냐고 물어보자, 살마의 부모님은 잠깐 숨을 멈추었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 뚜렷한 답은 없었다. 어른이라고 모든 일에 계획이 있는 건 아니라는 허술한 말과 함께 멋쩍게 웃었다. 그렇다면 살마를 저 둥근 통에 넣어버리는 것은 어떻게 그렇게 확신에 차서 했는지 묻고 싶었다.
LED를 박아넣어 사람의 감정표현을 흉내낼 수 있게 만든 기종이었다. 까만 전면부에 동그란 빛이 두 개 떠올랐다. 눈을 끔뻑이는 것처럼 가로선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원이 된다. 삿갓표가 두 개 떠오르면 웃고 있다는 뜻이다. 뾰족한 웃음이 전혀 닮지 않아서 우습기만 했다. 미묘한 불쾌감이었다. 사람이 아닌 것이 명확한데 사람으로 대해야했고, 행동을 흉내내려고 하는 것은 새로운 불편함을 느끼게했다. 다른 사람들도 이젠 제대로된 미소를 짓지 않았다. 기계가 아무리 말을 뱉으며 재롱을 부려도 가족의 틈에 완전히 스며들기는 어려워보였다. 다행인 것은 톱니심장을 가진 존재는 이런 걸로 상처를 받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저건 끝내 가족이 되지 못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겠지. 알게 되어도 별다른 감상은 없을 것이다. 그 무던함을 질투했다. 같은 외부인이지만 나는 체인으로 만들어진 심장과 배터리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이따금 저것을 부수는 상상을 하곤 했는데, 실행한 적은 없다. 횟수가 늘어갈 때마다 구체화 되어서 최근에는 머리 뚜껑을 따고 안에 든 저장장치를 훔쳐 달아나는 루트까지 생각했었다! 싼값의 기기는 도난방지 경보 같은 것도 울리지 않겠지만 한 번도 손을 댄 적이 없었다. 나를 처음 봤을 때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진작에 해체해서 여기저기 팔아먹었을 텐데. 어쩌면 기계의 경비 설계가 없어서 그 몫으로 내 이름 하나 남겨둔 걸지도 모르겠다. ‘살마’라는 것은 "레뇨라, 친구." 단 두 마디를 하고는 나에대한 정보값을 뱉지 않았다. 기억을 더 넣었다가는 내가 그대로 가지고 갈까봐 그랬을까. 하기야 순찰도 잘 돌지 않는 곳에서 경찰서 들락날락하는 꼬맹이는 요주의 인물이다. 더 많지도 않고, 정말 최소한의 부피만 차지했다. 내 얼굴과 이름, 한 단어로 축약된 관계.
이마저도 새로 학습하는 정보들에 묻혀 지워질까 하루가 멀다하고 문을 두드렸다. 술 처마시고 길바닥에 쓰러진 놈팽이 주머니를 털어서 산 음료수 박스를 들고서 초인종을 누른다. 안녕하세요, 살마 친구 레뇨라예요. 지금 집에 살마 있나요. 작위적인, 평범한 인사말이다.
✻ ✻ ✻
방에 가득했던 푸른 식물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딱히 고장은 아니었지만, 살마가 이동하다가 화분을 쳐서 깨트렸기 때문이다. 로봇답지 않은 실수였지만, 그런 걱정이 사라질 때까지 살마의 방과 거실에 있던 화분들은 모두 창 밖 베란다에 있을 것이다. 곧 겨울이라, 안으로 들이지 않으면 서리가 내려서 얼어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아끼던 화분이면서도 살마는 불평하지 않았다. 옮기는 이유를 물어보고, 알겠다고 말할 뿐이었다. 나는 그들을 도와 화분을 내놓으면서 살마에게 이 풀떼기는 아마 몇 달 못 살고 죽을 거라고 했다. 아이구, 안타깝네— 라는 반응 말고는 얻을 수 있는 게 없었기에 굳이 더 말을 걸진 않았다.
한 손에 들리는 작은 화분 한 개는 허락을 받고 내가 가져왔다. 별 것 없는 5cm 남짓한 붉은 빛깔의 다육이였다. 키우기 어려울 것 같지 않아서 방에 있는 작은 창틀에 올려두었다. 물을 얼마나 줘야하는지 몰라서 적당히 줬는데 열흘도 되지 않아서 누렇게 변했길래 부족한가 싶어서 더 주었다. 영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방치했더니 아예 죽어있더라. 식물 하나 키우기가 뭐 이렇게 어려운 건지. 어디 버릴 수는 없어서 그대로 두었다. 이쑤시개 두 개로 십자가나 만들어서 꽂아줬다.
“가져갔던 네 다육이 있잖아. 내가 너무 못 돌봤는지 죽어버렸더라. 미안해.”
-괜찮아. 어차피 몇 달 못 살거라고 했잖아.
“그건 저기 밖에 내놓았을 때 그랬을 거란 거였는데.”
-다를 게 있나.
내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서 살마가 할 법한 말이긴 했다. 그런데 이 딱딱한 음성으로 들으니 정말 나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동시에 죽든 말든 상관이 없어서) 출력된 말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이 물체의 가장 큰 문제는 감정을 읽을 수가 없다는 거였다. 진심인지 아닌지, 프로그래밍된 성격은 실제 살마와 같을지 아니면 조작한 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살마의 모습을 몇 단어로 조합해서 만든 것인지. 기억에 기반하여 입력된 질문과 상황 별 답변이 정해져있는 거라기엔 유연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 가족과 친구와 연인을 통에 담아 추억하는 걸까. 아무리 같지 않다고 해도 동영상을 재생하듯이 똑같은 것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본인이 살아서 그 자리에 있다고 해도 같은 반응일까.
전혀 같을 수 없는 것 사이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을 골라 위안을 얻는 행위를 눈 앞에 두고 있으니 처절하기 짝이 없다. 장례 치른 딸을 하위호환격으로 복제한 로봇을 집에 두고 잘 살 수 있을리가. 두드리면 텅텅 소리를 내는 살마를 내려다본다. 위화감과 어긋남을 견딜 수 없게 되면 버려질 철제 깡통. 안에 든 것은 2m 아래 묻힌 시신의 썩지 못한 뇌의 일부. 어떻게 보면 이것도 통조림이 아닌가. 유통기한은 바닥에 쓰여있지 않고 저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있다.
그때가 되면 장치를 초기화 시켜 되팔게 될지도 모른다. 이 로봇은 이들의 거의 전재산으로 산 것이니까. 산 사람은 계속 살기 위해서라도, 어쩌면. 너무 잔인한 사람들로 생각하는 거 아니냐고? 하하, 사람 속을 어떻게 알아! 미래도 모른다. 특정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떻게 행동할지 완벽히 예측 가능한 존재는 없다. 죽은 이가 이곳에 있을 때 뭐라고 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부정적인 상황을 예견하고 탈출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살마, 살마. 혹시라도 죽기 싫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도와줄게.”
-레뇨라. 나는 죽지 않아.
“죽지 않는 건 없으니까.”
-식물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냥 내가 그들을 고깝게 보는 걸지도 모르겠다.
✻ ✻ ✻
죽은 다육이는 가장 가까운 공터에 묻었다. 그냥 봉투에 넣어서 쓰레기처럼 버려도 뭐라 할 사람 없겠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나는 곧 옆 도시로 향하는 차를 타고 3시간은 달려가야 했다. 면허를 따두길 잘했지. 마침 들어온 일감이 면허 소지자에게 유리했다. 차량 제공, 식대 제공. 가서 물건을 옮기고 가져가는 것까지 확인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다른 놈은 굴러다니는 돌을 차서 날렸지만 결국 평소에 하던 일이나 하러 갈 수밖에 없다. 저들끼리 우르르 몰려다니며 골목, 하수도, 구름다리 길목 등에서 지나가는 운송차량을 덮쳐 부품 하나하나까지 털어서 바퀴벌레마냥 흩어지는 거다. 무인 시스템이 많은 세상은 편했다. 어쩌다 사람이 들어있으면 어디 던져서 버리면 된다. 그러면 사람을 상대로 하는 다른 무리들이 그놈을 털어먹고 알아서 처리했다. 참 서로 잘 돕고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온기가 가득하다.
자신들을 버리고 편한 일이나 하러 간다며 몇 마디 욕설을 들으며 시동을 걸었다. 흙 묻은 손을 창 밖으로 빼고 탈탈 털었다. 하하! 난 큰 돈 만지러 간다 버러지들아! 그렇게 외치며 출발했다. 점점 멀어지는 뒤쪽 어딘가에서 야유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없지. 이번 일만 끝나면 모이는 돈은 로봇의 성대 하나도 갈아 끼울 수 있을 정도였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 작업이 얼마나 수상쩍은지 알면서도 발을 들일 정도란 말이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돈을 모으려 하고 있었다. 이렇게 애매하게 말하는 이유는, 모으겠다는 다짐은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살까 싶은 것을 사지 않고, 저걸 살 바에는 더 싼 것도 있는데 굳이……. 그리고 그건 아마도 살마를 개조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솔직히 저 목소리는 너무 ‘로봇’ 같지 않나. 부드러운 근육 틈으로 흔들려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기계가 신호하듯이 쏘아대는 것이 거슬렸다. 나에게 그걸 바꿀 수 있는 권한은 없고 살마의 부모님들도 거절할 수도 있지만, 홀린듯이 살았다. 목소리 하나가 뭐라고. 생긴 것부터 딴판이라 오히려 음성이 비슷해지면 구역질이 날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나는 그냥, 할 수 없다는 듯이 그것을 위해 살았다. 죽은 다육이를 창가에서 치우는 것을 매번 깜박해서. 화분을 볼 때면 불쑥 남은 돈이 얼마더라 생각하게 되었다.
차에는 빌어먹을 라디오도 없었다. 먼 거리라 노래라도 틀고 싶었는데 휴대폰이 먹통이라 내가 불러야 하나 생각했다. 그랬다가는 옆 차선에서 총을 쏠 수도 있으니 자제하고 그냥 심심하게 운전했다. 총은 맞으면 아프니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잘 돌아가던 이 작고 깜찍한 다목적 통신기기가 왜 말을 안 듣는 걸까. 차 안에 모종의 장치가 되어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수상한 의뢰는 보통 진행하면서도 찜찜한 구석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저 뒷좌석에 고이 모셔진 트렁크 안에 든 것을 궁금해하지는 않을 정도의 지혜는 있으니 다행이지. 피터같은 멍청한 놈이었으면 궁금하다고 열어보고 함정(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이런 건 여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시도하면 위험했다)에 걸렸을 것이다. 피터야, 내가 널 살려준거다. 멍청한 녀석! 자리에 없는 놈에게 잘난 체 한 번 해주고 남은 거리를 확인한다.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주변 풍경이 꽤 으슥해졌다. 어떤 거래일지는 모르겠지만 장소 취향 한 번 끝장났다.
낡아빠진 건물은 구시대의 산물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철근을 박고 단열재를 쌓아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단순한 구조에 그 흔한 공기 정화 필터 하나 창문에 달려있지 않았다. 문에는 살균용 에어커튼도 달려있지 않은 것이 분명 이 안에는 병균이 가득할 것이다. 녹슨 경첩이 삐걱거렸다. 도대체 언제 지어진 건물인건지. 이런 곳을 찾은 것도 능력이라면 대단한 능력이었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먼지 쌓인 바닥은 밟으면 밟는대로 모양이 남길래 몇 번 거칠게 털어가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일에 말그대로 족적이라도 남겼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텁텁한 공기, 곰팡이 냄새. 직사각형의 방 가운데에 놓인 탁자 위에 트렁크를 올려두었다. 그러자 트렁크와 탁자가 닿는 부분에서 일순 빛이 났다가 사라졌다.
저건 이제 절대로 건들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일대에서는 차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겨우 시계로 전락한 기술 집약체를 손에 쥐고 건물 밖으로 나와 문가에 서서 상대를 기다렸다. 오래 기다리진 않았다. 벌써부터 흐릿해져가는 살마의 목소리를 기억해내는 일은 시간이 참 잘 가더라. 눈 깜짝하니 십 분이 지나있었고 하품 한 번 하니 벌써 삼십 분이 지나갔다. 검고 푸른 트럭이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을 지나 무성한 수풀을 짓밟으며 들어왔다. 나도 차는 밖에 세우고 왔는데 인정머리도 없었다.
길쭉한 장정(그래봤자 나보다 작았다!) 몇이 짐칸 문을 열고 몰려나와서는 나를 한 번 슥 보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몸을 온통 가려놔서 알아볼 수 있는 구석이 눈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잘 준비된 강도인 줄 알 것이다. 샛노란 의안을 뜨고 이리저리 주변을 확인하는 사람이 하나, 콧잔등에 주근깨 있는 사람이 하나. 나머지는 평범해서 굳이 기억하지 않았다. 그들이 열어둔 짐칸 안을 슬쩍 보니 마네킹인지 안드로이드인지 모를 것이 기대어 앉아있었다. 뭐가 되었든 살아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히 나와 같은 눈과 입을 가지고, 인간의 얼굴을 한 몸뚱어리였는데 무기질적이고 공허했다. 눈을 깜박이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등 자연스러운 행동을 보여주어도 그것은 나와 달랐다.
로봇과 사람을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달라서 아무리 비슷해보여도 결국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걸까. 머리 깨나 쓰는 학자들은 자아와 같은 철학적 문제로 끌고 갈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단순히 몸체를 만드는 기술적인 면에서 충분히 사람과 같지 않게 만들어져서라고 할 수도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말랑한 피부를 붙이고, 가짜 혈관을 그 아래에 심고, 공기를 필요로 하지 않음에도 주기적으로 가슴을 오르락 내리락 움직이게 해야했다. 정해진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수도 해야했고, 가끔 딴 길로 새기고 해야했다. 자식이라면 말을 듣지 않거나 반항을 하기도 해야했는데, 이것은 로봇의 대원칙인지 뭔지 때문에 불가하다고 한다. 내 생각에 로봇이 사람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사람도 탈선하지 않는다면 로봇과 다름이 없는 것일까.
물건을 챙겨서 가다가 멀리서 로봇을 구경하고 있는 나에게 와서는 명함을 하나 내밀었다. 받아서 확인하니 무슨 무슨 연구소라 하길래 거래자(솔직히 무슨 연구소인지는 제대로 듣질 않아서 맞는지 모르겠지만)가 맞는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애초에 모종의 장치를 파훼할 방법을 알고 있다면 주인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그런데 이런 건 원래 물건을 가져가기 전에 보여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뭐, 다른 놈이 훔쳐가는 거였다고 해도 물건이야 회수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신경쓰지 않았다. 암요, 돈을 그렇게 많이 주신다는데 이런 애프터 케어 서비스 정도는 해드릴 수 있지요. 안에 든 것도 궁금해하지 않고, 거래자가 누군이지도 궁금해하지 않으며 당신의 정체도 궁금해하지 않는 철저한 익명의 배송 서비스 업자 레뇨라 카시노입니다.
트럭 문이 닫혔다. 그 사이로 잠시 ‘로봇’과 눈이 마주쳤던 것 같기도 했다. 저런 건 얼마쯤 할까,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돌아가면 나머지 보수를 받아야지.
✻ ✻ ✻
사람은 실수에서 배우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 일에 대해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수신자를 잘 확인하자? 아니면 애초에 수상한 의뢰는 받지 말자는 교훈일 수도 있다. 그런데 고명高明한 나의 의견은 그냥 돈은 나누어서 받지 말자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제길! 잭슨 연구소인지 브리트니 스피어스 연구소인지 미친인지 내가 그런 걸 어떻게 다 구분하겠는가! 도대체 왜 연구소에 자기 이름을 가져다 박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의뢰자가 물건을 받지 못했다는 항의(무려 목소리도 숨기지 않고 ‘통화’로)를 했댄다. 나는 분명 물건을 받아가는 것을 확인했다고, 받은 명함도 보여주었는데 이 사람이 아니라며 뺨이나 한 대 맞을 뿐이었다. 물건을 찾아오지 않으면 너를 대신 개조해서 보내버릴 거라고 하길래 찾아오겠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 생각에는 그건 다른 것을 탓할게 아니라 100퍼센트 네 잘못인 것 같은데…….
조용히 하고 들어라.
거리를 거닐고 있으면 저기 골목에서는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고, 이 건물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도 막막함에 그저 울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우는 거라고 하길래 꾹 참았다. 친구를 묻을 때 이미 세 번 다 울었기 때문이다.
명함에 쓰여진 것을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어떤 미친놈이 도둑질을 하면서 제 정체를 밝히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일단은 그것을 토대로 장물이 어디로 갔을지 알아보려했다. 그들을 거쳐서 이미 다른 곳으로 빼돌려졌을 가능성이 보인다면 나는 바로 튀어버릴 생각이었다. 내 의뢰자들이 눈치를 채기 전에 발빠르게 숨는 것이 관건이었으니까, 그것을 위해서라도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명함에 쓰인 것은 별로 없었다. 소장 이름과 전화번호, 연구소의 주소. 무엇을 연구하는지도 제대로 쓰여있지 않았으나, 그래도 정신머리가 박힌 놈인지 연구소 이름에 제 이름을 갖다 넣지는 않아서 유추할 수 있었다. 그래, 기관의 이름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게 명확히 지어야지! 이건 나같은 놈도 아는 상식이었다. 알겠냐 잭슨?
전화는 걸지 않았다. 쓰인 주소로 찾아가서 며칠간 관찰했다.
먼 도시의 외곽에 위치한 연구소는 그 건물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오가는 트럭은 한 무더기인데, 그만한 물자가 오가는 것 치고는 드러난 것이 작았다. 땅에 묻혀있는가 싶을 정도로. 그렇다면 이 기관의 규모를 파악하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이 주변 넓은 공터 아래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시멘트 덩어리가 묻혀있을 거라니. 지진계가 몇 번 뒤틀린 이후로 사람들은 지하로 뚫고 들어가지 않았고, 하늘로 건물을 띄워보냈는데. 이곳의 주인은 아마 아주 괴팍한 사람임이 틀림 없었다. 위험한 것을 즐긴다거나.
그 주위를 돌아다니는 사람이나, 운전수 중에는 내가 전에 봤던 이들도 있었다. 다행히 명함은 거짓이 아니었나보다. 하루는 흰 옷을 입은 누군가가 땅에서 불쑥 솟아나더니 앞만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는 걸까 궁금해서 지켜보았는데 일분도 채 달리지 못하고 뒤에서 쏜 스턴건을 맞고 멈추더니 그대로 굳었다. 그를 쏜 이를 포함하여 몇 명이 딱딱하게 굳은 사람을 들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망원경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소름이 돋아서 그날은 일찍 철수했다. 어떤 날은 경비의 교대시간을, 어떤 날은 물자가 오가는 시간을 기록했고, 틈틈히 인터넷으로 찾아보기도 했는데 쓸만한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대략 한달을 그곳에 머물면서 알아보았는데 알아낸 것이라고는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탈출’ 소동이 벌어진다는 것과 사람들의 기억장치를 모으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전에 마주쳤던 도둑놈들이 로봇(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훔친 것이 아닐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면 아마 사람과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려는 곳이 아닌가 싶었다.
간만에 돌아와서 보고하자, 그딴 건 모르겠고 이번 주 내로 물건을 회수해오지 않으면 날 팔아넘기겠다는 말이나 들었다. 이 일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저 놈의 목을 먼저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돌보지 못한 방은 그 사이에 먼지가 쌓여있었다. 냉장고 비우는 것을 깜박해서 물러진 야채가 좀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애초에 야채 따위는 잘 두지 않았다. 다만 다행이 아닌 것은 냉동식품도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것이다. 시간이 없어서 그냥 냉장고는 썩은 채로 두었고, 계절은 이제 완전히 겨울이 되었기에 두꺼운 옷 몇 개만 챙겼다. 크지 않은 가방을 들고, 살마네 집으로 갔다. 다시 떠나기 전에 인사나 한 번 하려고 했다. 멀리서 보이는 그 집의 베란다에는 화분이 대부분 죽어있었다. 저럴 줄 알았지. 찬 공기 맞으면 사람이고 식물이고 다 죽을 수 밖에 없다. 혀를 차며 언제나처럼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들어온 집 안은 이전처럼 삭막하지 않았다. 오래 전, 살마가 살아있던 시절을 조금이나마 회복한 것 같은 공간이었다. 바닥에는 러그가 다시 깔려있었고, 따뜻했다. 어른들의 얼굴에도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었다. 껄림칙함과 함께. 살마 인형은 없었다.
“바닥 다시 깔았네요. 살마는 방에 있죠?”
“레뇨라. 잠깐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차마 시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저런 표정으로 말을 꺼낼 때는 꼭 좋지 않은 소식을 가져왔다. 현관에 들어설 때부터 잘못된 상황에 놓여있던 게 틀림없다. 부고를 예고받았을 때와 같았다. 따뜻했던 집안이 차가워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차가웠던 집안이 따뜻해졌다. 이런 변화는 꼭, 좋지 않았다.
✻ ✻ ✻
길고 길었던 장례가 드디어 끝난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다지도 오래 걸렸다. 다만 나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절대로. 그들은 멋대로 편의적인 살마를 만들어냈고, 그러면서 본인들을 치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추억을 되새김질 하고, 닮지 않은 딸을 보며 제 딸은 정말로 죽었다는 것을 상기하며. 상처를 헤집어서 더 단단한 살이 돋아나길 기다리는 것처럼 과격했다. 밤새 서로를 부둥켜 안으며 생각했겠지. 이 사이에 살마가 없음을. 언제나 자신들의 품속에 들어와있던 여린 딸이 이제는 없다는 것을. 로봇 인형은 그 빈자리를 확대하기 위한 연극 소품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는 그 위에 난입한 관객이었다. 배우들에게 말을 걸고, 소품을 가지고 놀았다. 이제 쫓겨날 시간이었다. 막이 내릴 때는 소품의 의견도 관객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았다. 불을 끄고 무대 위를 정리하고, 커튼을 내리면 관객은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깨닫고 떠나야 하는 것이다. 난동을 부릴 때 쫓아내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해야 했을까?
살마를 놓아주기로 했다는 간단한 말이었다. 너무도 짧아서 나는 그만 “아하” 하고 반응하고 말았다. 머지 않아 그럴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큰 충격은 아니었다. 그 시기가 너무 빨라서 실망했을 뿐이었다. 2년 쯤 되었나. ‘살마’는 알고 있냐고 물어보니, 아직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물론 그들의 입장에서야 굳이 말해야할 이유가 없었다. 버튼 하나 누르면 꺼질 것이고, 칩 뽑으면 끝이었다. 그렇게 간단했다. 오히려 이것을 만들기 위해 기억을 뽑아내는 과정이 더 길고 어려웠을 정도다. 내일 아침에 수거할 사람이 올 거라고 했다. 나는 오늘 방문하겠다는 말을 미리 하지 않았었다.
일단 온 김에 잠깐 얼굴 보고 가도 될지 양해를 구했다. 내 표현을 지적하진 않으셨다. 고개를 끄덕이길래 그들을 내버려두고 살마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젠 누구도 눕지 않는 침대가 방 가운데를 차지하고, 기계의 충전포트는 저 구석에 있었다. ‘살마’는 그곳에서 충전을 하고 있었다.
나는 먼지 쌓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동안 뭐 했어?”
-평소랑 다른 거 없었지. 내가 집안에서 뭘 하겠어.
“이야, 이젠 비꼴 줄도 아네.”
-좀 성장했나?
“어. 곧 있으면 대학도 가겠다. 나랑 같이 갈까?”
-바보같은 소리!
하하하. 하하. 정직하게 끊어져 나오는 웃음소리를 듣다 보면, 살마 부모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내가 마주 웃지 않자 ‘살마’는 소리를 그쳤다. 내가 말을 꺼내지 않자 침묵은 길어졌고, 깊어졌다. 바람에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 분 단위의 정적 속에서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눈에 무엇도 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탁 탁 탁
익숙한 백색소음을 비집고 바닥 치는 소리가 들려 정신이 깨었다. 두꺼운 펠트화의 밑창이 얇은 러그 위를 툭툭 차는 소리였다. 왜 그런 소리가 녹음이 되어있지, 생각하고 있으니 ‘살마’는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초침 소리는 녹음된 것과 방의 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창틀 소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것은 한순간에 뚝, 하고 끊겼다. 나는 경악스러운 심정으로 살마를 보았다. 살마는 내가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치의 다른 점 없이 계속해서 나를 향해 있었다.
-정적이야, 레뇨라. 소음이 없을 때는 꼭 이 소리를 내야해.
“왜 그런 걸……. 아니, 너무 쓸데없는 거잖아.”
-쓸데없지 않아.
몇 분 남짓한, 저 공간을 담은 소리가 몇 바이트나 차지하고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소리야. 편히 잠들 수 있는 자장가 같은 거야.
레뇨라, 말을 멈추지 말아.
살마는 그렇게 말하고서 전면부의 전원을 내렸다. 다른 날보다도 일찍 잠에 들었다.
✻ ✻ ✻
해가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나는 다시 연구소로 향하지 않고 발이 향하는 곳으로 하염없이 걸었다.
살마는 스스로 즉각적인 오류를 만들어, 들리는 것을 그대로 저장 장치로 옮겼다. 어떻게 했는지도 알 수 없고, 아마 이 개체를 판매한 이도 설명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죽기 직전의 여력으로 겨우 이런 것을 했던가. 그럴 정신이 있었다면 차라리 몇 십분을 더 살 수도 있었다. 수명과 쑤셔넣은 기억의 양이 등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그것을 나에게 써주지! 아니. 이것도 나를 위해 사용한 것일 테니까……. 추억 몇 줄도 골라지지 못할 것을 알아서 나에게 이런 것을 남긴 걸 테니까.
의문을 다시 품어야 했다. 정말 살마에게는 남길 기억을 고를 권한이 없었을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보호자를 우러러봐야했던 조금 더 어렸던 내가 아닌, 지금 다시 생각했다. 그 애는 당연히 자신의 유산을 남겼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에 대해서는 ‘친구’라는 한 단어의 정보값만 주었는가. 만약 그것이 의도된 것이었다면 그 ‘마지막 소리’는 어째서 꽉 들어찬 장치를 비틀어 열어서라도 넣고자 했을까. 나를 위해 남긴 것이 ‘친구’였다면, 그것은 자신을 위한 거였을까.
다들 알다시피 나는 머리가 그닥 좋지 않아서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가는 대차게 망하기 십상이다. 말아먹은 의뢰로 증명했다!
그래서 새벽녘 별이 지기 전에 살마를 납치했다. 별 수 없이. 내가 알아낼 수 없는데 물어볼 사람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침에 수거 차량이 온다고 했으니 그 전에 가로챘을 뿐이었다. 창문 넘나드는 것은 항상 하던 짓이었으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었다면, 내가 덩치가 좀 자라서 몸이 끼일 뻔 했다는 것 뿐이지만 그것도 창틀 잘 분리해서 해결했다. 모두들 아무리 해도 해결법이 보이지 않는다면 몸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도록 하자. 그래도 나름 양심을 발휘해서 모은 돈의 일부를 침대 위에 두고 왔으니 괜찮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시고는 깜짝 놀라셨겠지. 그건 물론 살마의 몸값이랍시고 둔 것이었지만, 일부는 창틀 수리비로 쓰게 될 것이다. 딱히 미안하진 않았다. 내 양심이 원래 자그마해서 그렇다. 어차피 이제 보지도 않을 사람들이었다.
어쨌든 나는 차 하나 (훔쳐서) 운전하며, 조수석에는 매끈하고 차가운 살마를 태우고 있었다. 뒷자석에는 내가 챙겼던 짐과 살마의 충전포트가 놓여있었다. 원래 애매하게 털기보다는 싹싹 긁어가는게 깔끔하고 좋았다.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단자같은 것은 도시를 벗어나기 전에 미리 등을 따서 뽑아내 버렸다. 이제 아무리 찾으려 해봤자 나오는 위치는 고가도로 아래로 데굴데굴 구르면 나오는 강의 둔치일 것이다.
지평선 따위는 없었다. 불쑥 솟은 건물과 둥둥 떠다니는 주택, 이동수단 사이로 뜨는 태양이 비추었다가 가려졌다가 난리도 아니었다. 그 즈음에 살마도 눈을 떴다.
“깨어나니 낯선 천장인 기분이 어때?”
-빛이 좀 강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선글라스를 씌워주었다.
-이제야 잘 보인다. 어디로 가는 거야?
“딱히 정해진 건 없는데. 가고 싶은 곳 있어? 배터리가 닿는 한은 가보지 뭐.”
-가고 싶은 곳은 없어.
지금 생각하니, 살마는 예전에 비해서 제법 사람같은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농담을 이해했고(물론 새로운 구조의 농담이나 응용문은 가끔 오류가 났다), 말을 숨길 줄 알았으며(물론 한 번만 더 물으면 제대로 대답했다) 문장의 구조가 반듯하지 않은 구어체를 구사할 줄 알았다. 안타까운—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내 말투가 묻어났다는 것이겠지만. 사랑하면 원래 닮는다고 하니까.
가고자 하는 곳은 없었지만, 차를 세우지는 않았다. 차의 주인이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달릴 수 있는 시간은 넉넉할 것 같았다. 그러게 강도 조심 지역에서는 이렇게 차의 배터리를 꽉꽉 채워두면 안 되는 법이었다. 땅 위로 솟은 해가 머리 위를 지날 때까지 계속 입을 나불거렸다. 누구들의 끊이지 않는 연락으로 뜨거워진 휴대전화는 창 밖으로 던져버린지 오래였다. 대화라는 것은 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행위였는지 살마는 중간에 한 번 충전해야 했다. 충전 포트 속 남은 전기가 얼마나 될까. 아무래도 남은 돈으로 급하게 태양광 패널이라도 달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몇 년간 보지도 못한 사람처럼 떠들었다. 네가 예전에 그런 일을 했었는데 기억하느냐, 없는 데이터다, 그럼 이 일은 기억하느냐, 기억한다, 왜 나에 대한 기억을 버린 것인지 아느냐, 기억하지 않는다. 덜컥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를 남기고 죽어버린 살마였지만, 미워하거나 원망할 수는 없었다. 구체적인 질문으로 찾을 수 없다면 곁가지를 넓게 펼쳐야 했다. 살마는 죽기 전에 무슨 생각을 하였는가. 그 때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면(아마 우울증을 표현하고 싶지 않아서 삽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 관련되지 않은 수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것을 토대로 가장 최근의 살마를 재구축해야 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제거된 살마의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그저 껍데기를 훑었다. 어떤 형태로든 존재함으로 단촐한 위안을 얻으나 그뿐. ‘진짜’가 아니니, 광대가 재롱 부리는 것을 보듯이 있었다. 그러니 그동안 밀린 진도를 따라잡아야 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만큼이나 발전한 유사—살마를 이해해보려 한다.
✻ ✻ ✻
살마는 나를 믿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 사이의 적립된 단어, 그것 하나 남겨두면 그동안의 시간을 언젠가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최신 기기는 아니었지만 이용하면서도 분명 학습이 가능한 모델이었으니까. 성격을 형성하는 핵심 기억과 키워드를 심어두면 그것을 행동 원리로 삼아 사람과 소통이 가능한 것이 우리가 사용한 모델이었다. 좋은 점은 적은 기억량으로도 실제 인물과 제법 비슷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한 번 형성된 성격은 바꾸기 쉽지 않다는 거다. 어쩌면 그것도 장점일 수도 있고. 데이터 베이스에 오염이 덜 하다는 이야기니까. 길을 벗어나지 않는다. 정해진 철로 위를 도는 무인 열차와 같았다. 철도 관리자나 그 주변부의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을 꾸밀 수는 있어도 경로를 바꾸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이 열차가 운행을 시작하기 직전 운전수를 태우고 탔다면 어떻게 될까.
단순하게 말해서 ‘살마’ 안에 살마가 있다는 거지?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는 거지.
너 혹시 영혼 그런 거 믿어?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증명도 까다로운 미상의 사념체 같은거?
너는 몸을 옮기면서 뇌를 옮기지 않은 것은 아닐 텐데 왜 이렇게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을 하는 거지? 인간은 오류로 점철된 지능형 로봇과 다를 점이 없다. 그렇다면 시작부터 오류를 발생시켜 만든 로봇이라면 인간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거야. 오류, 즉 예측불가능성이 설정값이 되어 계속해서 경로를 이탈하려 할 테니까. 그렇게 타고났으니까.
그래 이 사이비야.
그래 이 무식한 놈아.
…….
…….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건 또 궁금하긴 한가보지? 나는 며칠에 거쳐서 살마와 대화를 하고 저장장치를 추가로 끼워넣어 저장 가능한 데이터의 양을 늘렸다. 이전에는 새로운 기억이 쌓일 수록 이전의 기억은 사람과 장소, 시기에 대한 키워드만 따로 저장하고 나머지는 삭제하거나, 살마가 잠에 들면 부모님이 그날 있었던 기억이 완전히 저장소로 넘어가기 전에 지우곤 했다. 새로 배우는 것들이 만들어진 살마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까 걱정이 되었던 거지. 하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넣어주어야 오류가 생길 확률이 커지기 대문에 이번에 저장소의 용량을 확장해준 거고. 그래서 차를 타고 했던 며칠간의 대화는 모두 저장되어있을 것이다. 하나도 빠짐 없이. 필요한 것이 있을 때는 살마를 데리고 나가서 돌아다니면서 사곤 했다. 나는 먹을 게 필요했으니까. 그러면서 햇빛 좀 쬐면서 살마도 충전했다. 돌아다니고, 떠들고, 도망치다가 멈춰서 풍경도 구경했다.
그거 데이트 아니야?
쫓기면서 즐기는 것도 데이트라고 한다면 데이트지.
그래봤자 걔 부모도 돈 없는 일반인인데 쫓으면 뭐 얼마나 하겠어.
아니, 살마의 부모는 진작 포기를 했을 거고. 내가 말한 건 내가 날려먹은 의뢰자를 말한 건데.
……. 그놈들이 여기까지 들어오진 못하겠지?
아마 한 발짝만 들여도 잡혀서 실험체로 쓰일 걸. 여기 그렇게 들어온 사람 많잖아.
하긴, 너처럼 나 좀 써주쇼, 하고 들어온 놈이 거의 없지. 대부분 어디서 훔쳐오거나 침입한 놈 잡아다 쓰거나 하는 거니까.
그럼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지. 살마를 학습시키던 도중에 생각했다. ‘살마’는 자신이 살마라고 생각을 하고 있을까? 죽기 전의 살마가 단순히 자신의 원형일 뿐이 아니라 연속적인 개체임을 인지하고 있을까. 혹은, 살마는 이 기계를 자신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살마를 인간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은 건 아니야. 다만 내가 그렇게 여기기 위해서는 그것을 알 필요가 있었다는 거다. 로봇으로, 기억의 일부를 복제해서 만들어진 것은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는가. 단순히 ‘너는 살마가 맞느냐’ 물으면 기계는 당연하다는 듯이 ‘맞다’고 했다. 그에게 자신은 살마라는 설정값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사용자의 불쾌감을 줄이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로봇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용처를 생각해보면 그 제약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제품으로 훌륭했지만, 나에게 도움이 되진 않았지. 스스로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가 중요했으니까. 그리고 조금 미친 소리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내가 실감하기 위해서는 내가 복제 로봇이 되어봐야했다고 생각했다. 마침 연구소를 소개 받기도 했으니까. 명함 내미니까 잘 들여보내주던데.
많이 미친 소리 같은데. 아무도 로봇의 ‘심정’을 알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하진 않아.
그래, 뭐……. 어쩌면 나는 이미 그것을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이해를 하고 싶었던 거야.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면 그냥 계속 그렇게 지내면 됐던 거 아닌가?
인간일지는 몰라도 살마일지는 모르는 거니까.
내가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 정말 미친 것 같다.
네가 나보고 미쳤다고 한 횟수는 내 열 손가락 안에 다 세지도 못 할 거다.
그래서 어때. 너는 지금의 네가 예전의 너와 같다고 생각하나?
아……. 그게 사실 조금 애매해서 말이야. 말했잖아. 나는 이 실험의 기준을 살마로 삼고 있기 때문에, 처음 기억을 추출할 때 그 양을 비슷하게 맞췄거든. 그래서 처음 가지게 된 기억이 별로 없어서 같은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 판단에 필요한 자료가 적어서 말이야.
너 진짜 멍청하다……. 어디 가서 사기 당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이미 당해서 이렇게 된 거 같지만.
결과를 알기 위해서는 살마에 대한 기억과 이 실험을 떠올리게 된 이유를 꼭 넣어야 했고, 그것만으로도 방대해서 다른 건 별로 넣지 못했거든. 애초에 내가 바깥에서 살았을 적의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 해달라고 했는데 대뜸 얼굴도 모르는 살마라는 애 이야기만 한 게 이상하지 않았어? 뭐……. 기억을 제한하는 것 말고도 몇 개 손봐야 하는 게 있었다. 가장 핵심적인 건 내가 오류를 낼 수 있느냐는 거였지. 그런 건 비슷하게 조절하려고 해도 하기 어려운 거니까. 잘은 몰라도 아마 시도가 실패한 것 몇 개를 폐기했을 거다. 지금의은 장치를 물리적으로 손상시키고, 회로를 조금 틀어버리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박사’가 살마를 한 번 보여주면 비슷하게 만들어준다기에 개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그럼 네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여길 탈출하려고 했던 건가?
아니. 나는 결국 원본의 나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지만, 딱히 절망하진 않았다. 양철 심장이라서가 아니라. 살마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 채워지고, 연구소 생활을 한 나는 그냥 ‘살마를 사랑하는 레뇨라’의 부분인거다. 그게 레뇨라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레뇨라가 맞다고 확신할 수도 없을 것 같지만. 내가 탈출하려고 했던 이유는 다른게 아니라, 살마에게 문제가 생겨서 그렇다. 나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살마에게 모종의 장치를 붙여뒀거든. 아마 나를 쫓던 놈들이 건드린 것 같아.
탈출이 급하긴 하겠네. 빨리 가서 구해줘야 할 거 아니야. 아니면 너 대신 살마를 여기저기 분해해서 갖다 팔아버릴 지도 모른다고.
아마 늦었겠지. 내가 지금 탈출을 몇 번이나 실패했는지 알아? 마흔 두 번이다. 처음에 실패했을 때 이미 끝났던 거야.
그럼 나머지 마흔 한 번은 왜 했던 건데. 어차피 뭐 하지도 못할 거 아니야.
아무리 분해해도 그들이 가져가지 않을 것이 남아있다. 내가 장치 개조를 몇 번 해서 그런지 기억 저장소가 좀 대충 기워 만든 고철덩어리처럼 보일 거거든. 몸에서 떼어내면 쓸모없는 폐품이 되어버릴 정도로 얽혀있어서 그냥 버릴 게 분명해.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으니, 틀림없지. 난 그걸 가지러 갈 거야.
망가졌을 거라며. 그걸로 새로 살마를 만들 수 있는 건가?
못하지. 그냥 묻어주려고 하는 거야.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어떻게 하겠어. 다리 수리만 끝나면 다시 시도할 거야. 밖에 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 여기에 남아있을 수가 없지. 남에게서 귀한 딸 납치해왔으면 이런 거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그거 하고 나면 뭐 할 건데.
글쎄……. 뭐, 인생을 꼭 계획적으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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