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함의 관계 정의
체온중독자들 크리스마스 백일 연성
애샬 힐은 열세 살 생일 케이크 위 촛불을 끄면서 생각했다. 세상은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 많지 않은 것 같다고. 딱히 대단한 일이 더 생길 것 같지 않았다. 소설을 많이 읽어서일까.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는 모습이 자신의 미래일 거라 막연히 생각해서일까. 앞날의 풍경이 자신이 아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갑자기 지루함을 느꼈다. 케이크는 잘 말려서 가루낸 딸기를 섞은 생크림과 상큼한 단맛의 오렌지를 잘라 올린 수제였다. 박수를 받으며 그 케이크를 잘라서 접시로 옮기는 동안 깨달았다. 아차, 소원 비는 걸 깜박했네.
이후 린다 에버라는 폭풍우를 만나 부평초마냥 흔들리며 살게 되었을 때, 감히 세상에 대고 지루하다 말한 천벌로 이렇게 살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때 소원이라도 빌었어야 했는데. 불평만 투덜거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히 빌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남들 다 한 번씩은 지나치게 된다는 ‘세상은 지루해’라는 제목의 사춘기를 겪었을 뿐인데, 말 한 번 잘못했다고 이리 지독한 형을 살게 되었다. 십대 후반을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성인이 되어서 겨우 길을 따로 걷게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마을에 있는 적당한 가게에서 일하면서, 어릴 때 예상했던 가만히 흘러가는 삶이 이제 시작이구나 했다. 사춘기를 제때 끝마쳤다면 세상을 새침하게 보는 시선도 금방 사라졌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그리고 그런 힘없는 생각을 또 했다는 이유로 다시 삶에 린다가 뚝 떨어졌다.
자신의 삶에 자꾸 형벌처럼 나타나는 한 인간을 차마 버리지도 못해서 그대로 묶여버렸다. 스스로 택한 종신형이면서 어쩐지 억울한 기분에 상대도 바닥에 잡아두었다. 린다는 애샬을 태우고 여행하는 거친 새였고, 애샬은 린다를 가두는 새장이었다.
그렇게 또 이십 년을 살다보니 폭풍 속 나룻배로 사는 것이 일상이라, 위기를 위험으로 인지하지 못했다. 창 밖에서 세찬 빗물이 총알처럼 쏟아지고, 파도에 하염없이 흔들린다. 배에 오래 올라타서인지 이젠 굳건한 땅을 밟으면 멀미를 할 지경이었다. 애샬은 갈 블라더 호텔에서 기묘한 경험을 했다. 누구도 자신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큰 관심도 없는 고즈넉한 산골 저택에서, 그는 그저 좀 피곤해보이는 신사 애샬 힐이었다.
이 기가막힌 산업 스파이에게 아무런 의심도 없이 친절을 베풀고 떠벌떠벌 이야기를 다 해주는 직원이라든가.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바쁘게 움직이려고 했던 것. 사실 그런 것 다 갖다 버리고 흥청망청 놀다가 돌아가도 되었던 건데 굳이 어렵게 살았던 것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편안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삶의 불안을 야기하며, 불안정함만이 사람을 살아있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애샬 힐은 제 삶에 세번째로 들이닥친 불안정의 격랑을 기껍게 받아들였다.
끊임없이 바쁘고, 변함없이 약간의 두려움이 존재하는 생활은 침착했다. 폭음 속에 살면서 그것이 고요한 줄 알았다. 미카엘 랭던, 포스턴 하워드는 들이닥친 새로운 노크 소리였다. 세상은 온갖 것이 터지는 소리로 가득한 와중에 들리는 침입의 전조가 위험을 알려줬다.
‘자신’을 아는 기자와 일터 근처 골목에서 한낮의 담배를 즐긴다거나, 어쨌든 한 사업장의 수뇌부가 특정 기자와 친목하는 모습은 보기 좋을 것이 없는 걸 알면서도 점심시간에 잠시 만나서 커피나 한 잔 한다거나 하는 기행들은 손끝을 사포로 문지르는 것처럼 따끔따끔한 감각이었다. 편함이라는 감정에서 이런 것을 느낀다는 게 이상했다. 기이하다는 걸 알면서도 고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또한 언젠가는 일상이 될 거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블라블라.
다만 여기서 애샬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결국 재앙이란 예상할 수 없기에 그런 것이었다. 익숙해지려 하니 떠나버리는 이벤트를 해줄 거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교훈을 하나 얻은 것이 있다면 불안함이란 애샬이 생각했던 것처럼 삶을 다채롭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었다는 거다. 다양함은 다양함이고, 재미는 재미였다. 흥미는 흥미였고, 즐거움은 즐거움. 그리고 불안감은 그저 불안감일 뿐이다. 다른 신호가 될 수 없었다. 애샬은 미카엘 랭던을 만나고서 진정한 불안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지키고 싶은 평화가 깨어질 거라는, 직간접적 경험에 의한 예측성 압박에 의한다.
모두에게 비밀이 까발려지는 것은 인생의 작은 굴곡이 되겠지만 미카엘이 사라지는 것은 애샬의 인생 속 거대한 불행이 될 것이라는 걸 찬찬히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든 다가올 미래임이 틀림없다.
입맞춤 한 번. 그리고 두 번.
“애샬, 나 한 마디만 해도 돼?”
“해봐.”
“처음에 비해서 많이 능숙해진 것 같습니다, 애샬.”
“다음부터는 무슨 말을 할지 미리 키워드를 듣고 허락해줘야겠군…….”
“그래도 막지 않을 거잖아.”
세 번.
붙었다가 떨어진다.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는 듯이.
다음날 린다는 애샬을 보고, 또 빌어먹을 기자가 돌아왔구나 알게 된다. 린다 에버는 그들을 보며(정확히는 애샬을 보면서) 과연 애샬이 자신에게도 그러할까 생각할 때가 있었다. 자신이 애샬의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친구가 저 기자에게 휘둘리는 거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린다는 애샬에게 어느 것 하나 묻지 않았지만 대답을 알았다. 애샬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린다는 그를 이만큼 안다는 사실에 우쭐했다.
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린다는 누군가와 같은 일을 행하지 않았고, 얌전히 잡혀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린다는 애샬에게 있어서 포스턴 하워드와 같은 위치에 서지 못했지만, 어차피 사람은 누군가가 만든 계단 위에 서있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놈팽이와 내가 같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뒤처지고, 다른 면에서는 더 나을 수 있다는 걸 말했다. 한가지 요소의 지표로 모든 것을 판단 할 수 없듯이.
그래, 저기 쌓여있는 문서 더미가 그렇듯이. 질투란 참으로 옹졸하고 좁은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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