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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안 먹는 삼시세끼 in 황금섬
집을 지어보고서야 깨달은 건데. 통유리 달린 3층짜리 저택은 웬만한 돈으로는 해결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가진 것이 좀 커서 그리 걱정하진 않았다. 워낙 험하게 다녀서 사파이어에 여기저기 아주 살짝 흠이 가긴 했지만, 긁힌 정도야 장인한테 맡겨서 깎아내니 감쪽같았고(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중량 손실이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귀한 물건이라 함부로 팔 수가 없어서 건너건너 대륙 너머 귀족에게 조금 싼값에 팔았을 때는 살짝 불안하긴 했다. 이제보니 판매자의 이름값이라는게 꽤 중요한 요소였나 싶다. 해적이 파는 물건은 곤란한가?
여러 우여곡절을 지나, 어쨌든 나는 집을 얻었다. 그것도 아는 사람이 새로 산 섬에! 따지고 보면 저 양반이 더 대단했다. 태풍이든 해일이든 큰 변이라도 생기면 무너질 집을 구한 것에 비해, 발 딛고 설 땅을 차지한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해봐야 손바닥만한, 자기 몸 뉘일 정도의 작은 모래섬일 줄 알았는데 사람이 적당히 모여 살 수 있을 정도의 크기라니. 게다가 해변과 가까운 곳에 심어둔 하카란다는 또 어떤가. 크기도 꼭 알맞았지. 그 나무가 예쁘게 보일 곳에 맞춰서 2층의 베란다를 뚫었다. 매해 가을에 들어서면 창문을 활짝 열고 바람결에 꽃잎이 집안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그러면 창가에 둔 테이블 위에 보라색 꽃잎이 쌓이곤 하는데, 그걸 볼 때면 그 애가 좋아했던 것을 떠올렸다.
살마는 꽃가루에 기침을 하면서도 항상 창문을 열어두고, 봄여름가을 한철 피고 지는 것이 아쉬워서 정원에는 찬바람 부는 계절만 아니면 꽃이 지는 날이 없도록 했다. 홍차에 내려앉은 이파리는 건져서 테이블 위에 두고, 그것이 식탁보를 적셔가는 모습을 찬찬히 관찰하며 크림브륄레를 조금씩 깨먹는 유유자적한 생을 살았다. 그렇게 살다가 갔다.
나는 내가 보고 들은 살마에 대해서만 알았지만, 그래도 지금 남은 사람 중에는 가장 잘 안다고 확신한다. 그의 부모가 본 것은 나도 들었고, 내가 본 것은 아마 평생 그들이 보지 못했을 테니까. 예를 들면 밤 중에 몰래 선물을 사들고선 나무를 타고 창문을 넘어 그를 보러 갔을 때, 따뜻한 방 안에 오래 있었으면서도 찬 공기를 쐰 것처럼 붉게 물든 양 뺨 같은 것을.
깊은 뿌리를 가진 하카란다 위 꽃가지 속은, 어쩌면, 우리 사이 밀회의 상징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그런 망측한 나무를 내 손으로 심었다는 건가.”
“그런 셈이지.”
“찝찝한데……?”
“자네는 내 순정이 그렇게 더러운가!”
오로는 괜히 손을 한 번 털며 말했다. “응.”
“하하, 밖으로 따라나오게. 오늘 섬 주인 바뀌는 날이니까.”
작은 항구에 있는 주점에서 오로와 쓰잘데기 없는 것으로 다투고 있으니 주변 손님(이자 주민)들은 일상이라는 듯이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래도 나름 온지 일 년 즈음까지는 무서워서 눈치라도 보더니, 이제는 몇몇 노름꾼들이 돈이나 걸고 있다. 물론 나는 나에게 걸었고, 오로는 본인에게 걸었다. 섬주인을 투기장 검투사로 쓰는 주민이나, 본인들 싸움에 돈을 거는 놈들이나 끼리끼리라고 생각했다.
“아니, 사람들이 원래 이러진 않았어. 내 생각에는 누구 씨한테 나쁜 물이 든 것 같은데.”
“아, 그렇지. 엔리케가 조금 질이 나쁘긴 하네.”
“너 말이야. 이 양심 없는 해적놈아.”
“음? 거울 보고 말하는 건가?”
그와 동시에 테이블이 엎어지고, 탁자 위 술잔과 그릇이 공중으로 날아간다. 동전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판돈이 올라간다.
그래도 오로가 연륜이 있는데 이기겠지. 연륜도 저만치 쌓이면 그냥 노쇠한 거야. 레뇨라 저건 검은 두 개 차고 다니면서 팔은 하나지 않은가! 그 하나로도 자네 목 정도는 비틀 수 있을 걸. 자네 혹시 이 노름판에 처음 끼어드는 사람인가?
누가 이길 것인가 점 치면서 두 사람을 한참 비교하고 있으면 술집 주인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내 가게에서 지금 뭐 하는 거냐!” 아무리 날고 기는 해적이라고 해도 국자 들면서 달려 나오는 주점 주인은 이길 수가 없다. 자칫하면 뜨거운 스프를 뒤집어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서진 테이블과 의자에 대한 변상을 하고 가게에서 쫓겨난다. 오늘도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며 실망하는 사람들 속에서 주점 주인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섬에서 물건 조달하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알아? 돈으로 다 된다고 생각하지 마!” 그래도 배상도 안 하는 무뢰배 보다는 내가 낫지 않나, 생각했지만 말로 꺼내면 잔소리가 두 시간은 더 길어질 것 같아서 참았다. 그 와중에 오로는 잔소리를 피하고 빠져나가길래 저놈은 왜 보내주냐고 했더니, 섬 관리가 얼마나 할 일이 많겠냐며 백수 한량이랑은 다르지 않냐고 하더라.
억울해서라도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오로를 위해 섬관리 따위를 배울 생각은 없다. 그쪽 선생은 엔리케니까. 그의 혈압을 위해서라도 서로 떨어져있는 것이 낫다. (뭐, 엔리케가 함부로 총을 쏠 수 없는 환경에서 깝죽대지 않으면 언제 나댈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의자 만들라고 나무라도 베어야 하나, 정말로 고기를 썰며 푸줏간이나 꾸릴까. 전자는 이미 비리디스가 한 자리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발 들이기가 쉽지 않다. 좁은 마을에서 비슷한 일자리가 여러 개 나올 순 없는 거였다. 고깃집은? 그 집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찾는 사람이 별로 없을 테니 끼어들긴 쉬운데, 소란이라도 일으켰다가는 섬에서도 쫓겨날까 두려우니 가만히 있어야겠다.
이웃이라는 것들이 의심만 많아서 무슨 일만 생기면 다들 나를 주시한다. 보통은 내가 잘못한 일이 맞긴 했다.
아니, 그런데 입구가 좁아서 죄 뜯어내고 다닌 건 딱히 내 잘못이 아니지 않나. 이 마을에서 불편함 없이 다닐 수 있는 곳이라고는 내 집이나 비리디스네 정도뿐이다. 거기는 뭐가 되었든 큼직해서 좋았다. 외팔이로 혼자 살려니 불편한 게 많아서 이것저것 만들어달라고 졸라대며 자주 들락날락거려서 그곳이 꽤 익숙해졌다.
“사실 문이 그렇게 낮은 건 아니지 않나요?”
“머리가 걸리는 건 아니지. 근데 그냥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게 느껴지는 게 싫네. 아니 애초에 자네가 사람들 집을 좀 크게, 크게 지어줬으면 좀 좋나?”
“그걸…… 제가 다 손 본 건 아닌데요.”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 내가 예민하게 굴면서 괜한 사람을 잡았다는 자각이 없는 건 아니다. 근데 뭐 어쩔 거야.
“근데 이건 도대체 뭘 우린 건가? 이런 차는 마셔본 적이 없는데.”
“아, 섬 안쪽 숲에 향기로운 잎이 많길래 말려봤어요!”
“……. 자네 혹시 나한테 악감정이 있었나?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식으로 암살 시도는 하지 말게. 차라리 도끼 들고 밤에 찾아오면 받아줄테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차는 다 비우고 나온다.
샛길 따라 그가 말했던 숲으로 들어가면 희미하게 멀미가 올라오는 것 같다. 평생을 바다의 파도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다보니 가끔 땅 위에서 가만히 서있으면 울렁거릴 때가 있었다. 짠내와 비린내가 섞인 시원한 바람과는 다른 숲의 풀내음이 어색하다. 바람에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숲 안쪽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잘 들리지 않는다. 사람이 들어와서인지 새조차 울지 않아, 속이 시끄러울 정도로 고요하다. 숲에 사는 이들은 이런 것에 정을 붙이고 사는 건가. 아니면 그들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는 걸까. 내가 나무잎 소리에서 파도소리를 듣는 것처럼, 그래서 그는 거센 바람 소리에서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비바람과 파도가 무서워 사람들이 집을 모두 섬 안쪽으로 밀어넣을 때, 나는 해변가에 지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그리고 새벽에도 항상 파도가 모래사장을 쓸어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살 수가 있었다. 그러면 나는 아직 바다에서 사는 것 같았기에 편하게 누워 잠들었다. 어쨌든 내 고향, 정해진 곳은 없다 해도 바다라 할 수 있으니까. 나무판자에 박힌 못을 하나 하나 세면서 걸음마를 떼었으니까.
어부라도 되어볼까.
기다림을 못해, 채 하루가 되기도 전에 낚싯대를 던질 것이다.
배를 타고 돌아다니는 상인이 되어볼까.
그대로 키를 틀어 멀리 가버릴까 두려워서 그럴 수는 없다.
길 없는 곳으로 대충 걷다보니 도착한 곳이 또 집 근처 해안가였다. 저기 모래에 뒤집어져 누워있는 희멀건 사람형태의 불가사리를 주워다가 울타리에 널었다. 사람을 이런 데에 걸어두냐고 작게 불평하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는데 무시했다. 불가사리치고 수명이 꽤 긴 것 같다. 집에 들러서 낡은 수건을 가지고 나와 위에 올려둔다. 오늘은 날이 좋아 이렇게 대충 두어도 알아서 잘 마를 것이다.
“손님이잖아!”
무시했다.
오늘은 오로한테 저 티마스 불가이스트를 배달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야, 혼자 잔소리에서 쏘옥 빠져나갔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저걸 주워서 보살피고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기에는 오늘 해야할 게 있다는 게 생각났다.
집 앞 나무의 가지를 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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