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 일지
03.
삭망 by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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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정보 없는 기록이라 당신의 겉모습을 잊어버릴까 두렵습니다. 이에 남깁니다 :
나보다 한 뼘 반 작은 키(내 손으로 말입니다), 뿔 없이 매끈하고 둥근 이마, 혈관이 비쳐 보이고 비늘 없이 부드러운 살갗(당신이 오랜 우주 생활의 결과라 말했던 것), 밟아 녹은 눈처럼 질척한 회청색 홍채, 휘지 않은 콧대, 미미한 헤모글로빈의 색이 비치는 입술. 나의 꼬리 밑동과 비슷한 굵기의 목, 바이옴을 관리하는 일이 고되어 조금 움츠러들다 끝내 내 품안에 다 담기고 만 어깨, 옷을 부풀리는 가슴팍, 골이 파인 등줄기, 유연하게 움직이는 하지, 앞뒤로만 굽혀지는 무릎, 다섯 개의 말단이 돌출된 발, 육구 없이 거칠어진 발바닥.
나의 당신입니다.
당신이 방문을 지나다닐 때마다 머리 위로 허하게 남는 공간이 눈에 띕니다. 내가 오고 나서는 함선 안의 문틀을 모두 높혀서 그렇잖습니까. 당신의 개인실 문까지 높인 까닭은 내가 거기 방문하길 바라서 그랬던 겁니까 정작 나를 불러준 적은 없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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