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잘가요
크리주나
왕궁의 창문 너머로 새벽녘의 옅은 햇살과 함께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타고 들어온다. 다섯 번째 새가 지저귀기 시작했을 즈음, 아르주나는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 금방 잠에서 깨어난 이가 으레 그러하듯 그는 살짝 멍한 정신으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창밖은 아직 살짝 어두운 감이 있었고 인기척 없이 고요했다. 아르주나는 한참 바깥을 바라보다가 새들의 소리가 한층 잦아들 즈음에서야 이불을 정리하고 방을 나섰다.
잠시 후 욕탕에서 정결히 몸을 씻고 돌아올 때에는 몇몇 하인들과 복도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고요한 왕궁은 아직 완전히 깨어났다고는 할 수 없었다. 유디스티라 형님은 이제 막 일어나셨을 테고, 비마 형과 쌍둥이들은 아직도 자고 있을까. 그들이 전부 일어날 때에서야 비로소 왕궁의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아르주나는 여즉 잠들어 있을 형제들을 생각하며 작게 미소지은 채 다시금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새 하인들이 정리해둔 방은 몹시도 정갈했다. 그는 먼지 하나 없는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점차 외부의 소리와 시야가 흐려져만 간다. 아득하면서도 편안하기 이를 데 없는 그 감각에 그는 천천히 몸에서 힘을 빼고 의식을 흘려보냈다.
명상에서 깨어난 것은 두어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눈을 뜨니 마주한 창문 너머로는 한결 밝아진 바깥의 모습이 보였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느 때와 같은 하루의 시작이라 생각했지만, 그렇다기에는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다. 저잣거리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평소보다 더 눈에 띄게 소란스럽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혹여 치안에 위협이 되는 일이라도 있다면……. 아르주나가 표정을 굳히고 몸을 막 일으켰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소리 내어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시오.”
곧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시종이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는 말을 전했다.
“아르주나 님. 왕께서 찾으십니다. 크리슈나 님께서 하스티나푸라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그가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시종일관 가라앉아 있던 아르주나의 낯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르주나는 성큼성큼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소란스럽던 외부의 웅성거림이 배가 되어 방을 울렸다. 그 속에서는 익숙한 이름이 섞여 들렸다. 크리슈나! 살아있는 비슈누의 화신! 야다바의 왕께서 하스티나푸라에 오셨다! 아르주나는 홱 고개를 돌리고는 시종에게 일렀다. 그의 낯에는 숨길 수 없는 환희가 묻어나고 있었다.
“지금 바로 채비를 하겠다 이르시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라 전하시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시종이 깊이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았다. 아르주나는 다시금 창밖을 바라보며 크리슈나의 이름을 연호하는 군중의 환호소리를 들었다. 크리슈나. 그가 정말로 하스티나푸라에 왔구나. 이게 얼마만의 만남이던가. 얼마나 그를 기다려왔던가. 나의 오랜 벗, 존경하는 스승, 사랑하는 사촌, 그리고…….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종을 울려 시종을 불렀다. 한시라도 빨리 채비를 하고 그의 앞에 서야만 했다. 당장이라도 그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아르주나.”
“크리슈나!”
유디스티라와의 의례적인 인사가 끝나자마자 크리슈나는 아르주나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일국의 왕이자 신의 화신이라기보단 사랑하는 벗을 만나 잔뜩 신이 난 어린아이에 가까운 행동에 주변의 모두가 탄식하는 마음 반 흐뭇한 마음 반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러나저러나 당사자들인 크리슈나와 아르주나는 다른 이들의 시선이라고는 상관 없이 서로 얼싸안고 해후의 기쁨을 누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들은 마치 세상에 서로밖에 없는 것처럼 굴었다. 그들은 실로, 언제나 그랬다.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던 포옹을 떼어내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아르주나 쪽이었다.
“크리슈나, 이게 대체 얼마만인가요. 당신과 떨어져 있는 시간은 하루도 일 년처럼 느껴진다지만, 이번은 정말로 길었습니다. 대체 몇 년만인지요. 당신이 온다는 말씀을 듣고 매일같이 손꼽아 가며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네가 그리 나를 기다렸다니 기쁘구나, 파르타. 나 또한 마찬가지란다. 이번에는 꽤나 길게 머무를 예정이니 후회 없을 만큼 함께 노닐자꾸나.”
“예에, 크리슈나. 마땅히 그래야지요.”
크리슈나는 한 손으로 아르주나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곤 이마에 입을 맞췄다. 고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오마. 나중에 네 방으로 가겠다. 아르주나는 그 말에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술이 와닿은 이마가 화끈하게 느껴졌다. 아르주나는 뒤돌아선 크리슈나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대로 서서 이마를 매만졌다. 뒤에서 비마가 등허리를 툭 치며 개구지게 말했다.
“아르주나. 크리슈나와 사이가 좋은 건 좋지만 적당히 해라. 드라우파디가 질투할라.”
“형님!”
아르주나가 화들짝 놀라며 대꾸했다. 농담이 너무 심하십니다. 동생의 뾰족한 말에도 비마는 하하 소리내어 웃었다. 아니면 뭐, 유디스티라 형도 있고. 그 말에 아르주나는 의아한 기색을 보였지만 비마는 별다른 대답 없이 미소지은 채 어깨를 으쓱이며 떠나갔다. 아르주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제 방으로 향했다. 두근대는 마음 한구석에는 한시라도 빨리 크리슈나가 제 방으로 찾아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크리슈나는 정말로, 그의 말마따나 ‘후회 없을 만큼’ 하스티나푸라에 머물며 아르주나와 노닐었다. 그는 판다바 형제가 인드라프라스타에 머물 때에도, 숲에 피신해 있을 때에도, 전쟁 이후 하스티나푸라로 거처를 옮겼을 때에도 적지 않게 그들 형제를 찾아왔지만 그리 긴 시간을 머무르지는 않았다. 그 이유야 많았다. 야다바의 수장이자 드와르카의 왕으로서 하루라도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기도 했고, 그를 수행하고 접대하기 위한 인력을 생각해서도 오래 머무르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말인즉 그것이 크리슈나 나름대로의 배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크리슈나는 얼마간 체류할 계획이시냐는 유디스티라의 물음에도 기간을 정해두진 않았다며, 다만 지금까지 중 가장 길게 머무를 예정이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아르주나 못지 않게 제 사촌을 흠모하는 유디스티라는 크리슈나의 그 말을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화색을 보이며 기쁜 마음으로 그를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그가 머무를 거처는 아르주나의 궁전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르주나를 아끼는 크리슈나의 마음을 고려한 배치였지만 실상 그가 제 거처에서 지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크리슈나는 매일같이 아르주나의 궁을 드나들었고 심지어는 잠에 들 때조차도 아르주나와 자주 한 침대에서 잠들었다. 그들은 꼭 한 몸인 것처럼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움직였다.
어느 날인가는 수바드라가 크리슈나에게 아르주나를 너무 독점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농을 섞어 하소연할 정도였다. 크리슈나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네 남편을 잠시 빌려가겠노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오빠가 그렇게 말하면 어찌할 방도가 없어요. 누구보다 고집이 센 사람이니까요.”
수바드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포기한 듯 제 오빠를 흘겨봤다. 드라우파디와 나머지 형제들 역시 크리슈나의 그런 성정을 모르는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아르주나는 크리슈나의 변덕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크리슈나가 평생을 하스티나푸라에서 머무르겠다고 하더라도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면 하루라도 더 크리슈나가 이곳에 머무르기를 바랐다. 크리슈나의 의중은 쉬이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아르주나의 곁에 머물기를 원하고 있었고, 아르주나 또한 그것만을 원했다. 아르주나는 그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많은 일을 함께했다. 강가에서 함께 멱을 감거나, 풀숲을 거닐거나, 사냥을 하거나, 근처의 도시에 들르거나, 시장에 놀러갔다. 때로는 크리슈나가 가르침을 주기도 했고, 아르주나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무엇을 하든 그들은 즐거웠다. 함께라면 즐겁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르주나.”
속삭이는 목소리에 아르주나는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앞에는 익숙한 인영이 있다. 크리슈나. 아르주나가 반쯤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자 크리슈나가 미소를 지으며 한 손으로 아르주나의 뺨을 간질였다.
“자고 있었니?”
“아니요. 눈만 감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크리슈나는 주무시지 않고요.”
“오늘은 그닥 잠들고 싶은 날이 아니라서. 아르주나. 잠이 오지 않는다면 함께 정원을 산책하지 않겠니?”
“이 시간에 말입니까?”
“응. 나는 밤중에 산책하는 것도 좋아한단다. 달과 별을 벗 삼아 걷는 거지.”
“당신께서 괜찮으시다면 저도 좋습니다. 함께 걷지요.”
그리 말하곤 아르주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어 크리슈나도 몸을 일으키고 두 사람은 함께 조용히 정원으로 나섰다.
하스티나푸라의 궁중정원은 몹시도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었고, 그 아름다움은 밤에도 덜하지 않았다. 연못은 달빛을 받아 빛났으며, 풀벌레들의 소리가 잔잔하게 울려퍼져 정취를 더해주었다. 두 사람은 인적 없는 정원을 조심히 거닐었다.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불편한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편안한 침묵만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기분 좋은 침묵을 먼저 깨뜨린 것은 크리슈나였다.
“아르주나.”
앞서 걷던 크리슈나가 아르주나를 불렀다. 달빛 아래의 꽃들을 구경하던 아르주나가 고개를 들어 크리슈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아르주나를 눈짓하곤 말을 이었다.
“요즘도 잠을 잘 자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부끄러울 것이 뭐가 있니. 그저 걱정이 될 뿐이야. 네가 건강하고 행복한 것만이 나의 행복이란다. 보자, 잠이 잘 오는 향이라도 쥐여줘야 할까. 아니면 만트라라도 알려주는 게 좋을까.”
“저는 괜찮습니다. 저는 지금 충분히 행복한걸요.”
아르주나가 멋쩍게 웃었다. 그리 말하는 아르주나의 얼굴은 살짝 붉어져 있는 것도 같았다.
“남아있는 가족들이 건강하고, 크리슈나께서 무탈하시면 저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 이상은 무엇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도 너의 행복에 한 자리를 차지한다니 기쁘구나.”
“크리슈나께서도 저의 행복이 곧 당신의 행복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 또한 마찬가지일 뿐입니다.”
“그렇다면야 서로를 위해서라도 행복해져야겠구나.”
크리슈나가 미소를 지었다.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상대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겨있었다. 그가 그런 표정으로, 그런 목소리로 저를 바라보고 말을 건넬 때면 아르주나는 가슴 어딘가가 간지러워지곤 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걸음을 이어가던 크리슈나는 정원에서 가장 큰 연못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르주나도 그의 곁에 멈춰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연못의 가장자리에는 몇 개의 연꽃이 피어있었다. 밤인지라 봉우리를 오므리고 있었지만 그 모습에도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아르주나가 말했다.
“언젠가 제게 말씀하셨죠. 더러운 물속에서 살지만 범접할 수 없는 연꽃처럼 살라고.”
“잘 기억하고 있구나.”
“평생 그 가르침을 염두하며 살았습니다.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너는 내가 아는 자 중 가장 연꽃 같은 자다. 어떤 진창도 너를 더럽히지 못했지. 언제나 고결하게 빛을 잃지 않았고.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단다.”
과연 그럴까요. 크리슈나. 아르주나는 말을 삼켰다. 그는 제가 죽인 수많은 이들을 생각했다. 자신의 드러낼 수 없는 어둠을 생각했다. 그것은……그 누구에게도, 크리슈나에게마저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과 그에게만은 이상적인 모습을 보이고 싶은 마음이 충돌했다. 그가 어떤 태도를 보이기 바라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떨리는 한숨을 내쉬자 크리슈나가 제 쪽을 바라보고 있음이 느껴졌다. 아르주나는 자신이 끝내 말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보여주는 신뢰를, 사랑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크리슈나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는 어쩐지 슬픈 듯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그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곤 했다. 어째서 그리도 슬픈 표정을 하시냐고 물어도 그는 그저 너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뿐이라는 아리송한 대답만을 남길 뿐이었다. 무엇이 그리도 미안한 걸까. 미안한 것은 오히려 제 쪽이었다. 신의 화신으로서 그가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알면서도 무엇 하나 함께 들어주지 못한다. 평생 그의 도움을 받아왔으면서도 무엇 하나 그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의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 과분하게 느껴졌다. 그에게는 차마 하지 못할 말들이었다. 아르주나는 어렵게 말을 골랐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얼마 없었다. 그리고 그 중에, 해야만 할 말이 있었다.
“크리슈나.”
“응?”
“이번이 마지막인 것이지요?”
많은 것이 생략된 말임에도 누구 하나 구태여 묻지 않았다. 크리슈나는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그뿐이었다. 그의 평온한 태도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니길 바랐다. 자신의 과한 추측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아르주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간다리 왕비가 남긴 말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날 이후로 삼십여 년이 흘렀지요.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만약 그 끔찍한 저주가 실현된다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르주나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느새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어려 있었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어떤 형태의 저주든 제가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게 하겠습니다. 만에 하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끝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습니다.”
“아르주나.”
크리슈나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어린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제안에 고맙구나. 분명 너와 함께라면 물리치지 못할 적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허나 그래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예정대로 이루어져야만 해. 나도, 형도, 야다바의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란다. 크룩셰트라의 모든 전사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네게는 또 다른 운명이 주어져 있단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아르주나는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한다. 운명에 맞서는 것이 필요 없다고 한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자신의 죽음 앞에 그렇게 담담할 수 있는가. 자신을 혼자 내버려두고 떠나려고 할 수가 있는가. 아르주나는 크리슈나의 옷깃을 붙잡으며 말했다.
“또 다른 운명이라 함은 무엇입니까? 당신을 살리고 성취할 수는 없는 운명입니까? 평생을 당신에게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신의 뜻에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끝이 당신을 떠나보내는 것이라니요. 저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냈습니다. 그중에는 제가 죽인 사람들도 있었지요. 이제 당신까지 떠나보낸다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크리슈나. 당신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너무도 두렵습니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가 횡설수설 말을 잇는 것을 참을성 있게 들었다. 이제 그의 눈에는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 비쳤다. 누구보다 간절히 고독을 바라지만 동시에 고독을 모르는 남자의 공포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흐느끼기 시작할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크리슈나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아르주나를 바라보며 그의 몸을 품에 안았다. 백여 년 전 처음으로 그를 만났을 때와 한치도 달라진 것이 없는 몸은 오늘따라 가냘프게 느껴졌다.
“아르주나. 너의 괴로움을 안다. 연꽃 같은 삶이란 동시에 한없이 고독한 삶이기도 하지. 많은 것을 떠나보내면서도 살아가야 하고, 또 나아가야만 한단다. 그 중에는 미운 것도 있고, 사랑해 마지않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크리슈나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찌할 바 없는 것. 모든 것은 변하고 떠나기 마련인 것이다. 나와 너인들 영생을 누릴 수는 없지 않겠느냐? 언젠가는 떠나야 할 일이고, 내게는 그것이 지금일 뿐이다. 떠나가는 것을 애써 붙잡으려 하지 말거라. 너의 맡은 바를 행하거라. 너의 백성들을 지키고, 가족들을 지키거라.”
아르주나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숨죽여 우는 그의 모습에 크리슈나는 더욱 세게 그의 품을 끌어안았다. 아무리 자신이 소중한들 그는 가족을 두고 떠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비겁한 수를 쓰고 있음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제 사랑하는 벗을 위해서라면 몇 번이라도 그리할 것이었다. 크리슈나는 천천히 품에서 그를 떼어냈다. 아르주나가 그를 붙잡으려는 듯 팔을 뻗었지만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크리슈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아르주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르주나는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대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크리슈나. 당신께 해야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진정 당신을…….”
크리슈나가 손가락으로 아르주나의 입을 막았다. 창백한 그의 체온이 부드러운 입술에 와닿았다.
“알고 있단다. 내 소중한 벗, 내 사랑하는 사촌. 그 말을 듣는 것은 다음 번의 일로 남겨두자꾸나. 이별은 만남을 위한 새로운 초석이니, 우리는 분명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아르주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슈나의 말은 언제고 의뭉스러운 데가 있어서,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그는 윤회전생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몰랐고, 저 천상 위의 삶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혹은 아예 다른 무언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크리슈나는 거짓말만은 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말을 믿었다. 언젠가 분명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될 것이었다.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의 눈물자욱을 닦으면서 그의 이마에 입맞췄다. 여느 때보다도 긴 입맞춤이었다. 마치 이번이 마지막인 것처럼. 아르주나는 멀어져 가는 그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다시 만날 그때까지, 그를 잊지 않기 위해서.
이제 곧 드와파라 유가의 별이 저물고, 기나긴 이별이 시작될 것이었다. 그 속에 다시 만남을 기약하는 두 남자가 있었다. 그들은 광활한 우주 속에서 다만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기만을 바랐다.
댓글 1
민첩한 달팽이
어! 저 조지아주 사는데 스페이스 이름이 재밌네요! ㅎㅎㅎㅎ 시작한지 하루 밖에 되지 않아 아직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지만 암튼... 재밌게 읽고 가요~ :))))) 저도 팬소설 생각 중인데 많은 도움과 참고가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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