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별희

수풍

축제를 맞은 황성의 거리는 주야 할 것 없이 분주하다. 탕후루에 딤섬, 전갈 꼬치를 파는 포장마차하며, 불을 뿜어내는 곡예사가 몇 걸음마다 보일 지경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끊길 기미가 보이지 않고 낮부터 술에 취해 노래를 흥얼거리는 노인들도 있다. 어느 모로 보나 흥겨운 분위기였으니,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이 웃고 떠들며 즐기는 중이었다. 아니, 정확히 따지자면 ‘모든 이들’이라 함은 옳지 않겠다. 단 한 명, 웃음기라고는 일절 띠지 않고 냉엄한 표정을 유지하는 이가 있었으므로. 그는 몰려드는 인파 속에서도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도도한 낯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내려다 보았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정갈한 흰색 도포자락이 펄럭였고, 손을 모아 차락, 소리를 내며 펼치는 쥘부채에는 일필휘지로 쓰인 듯한 물 수(水)자가 쓰여져 있었다. 선계에서라면 그 모습을 보고 감히 눈치채지 못할 이가 없었으니, 그가 바로 하늘조차 파도로 뒤엎는다는 수횡천이었다. 콧대 높은 수사 대인, 사무도는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황성 거리의 모습을 일별했다.

“더러운 데다 난잡하기가 그지없군.”

코웃음을 치며 내뱉는 목소리는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어서 주변의 몇몇 사람들이 험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대부분은 되레 그의 기세에 기가 죽어 자리를 피할 따름이었다. 어느새 그 많던 인파도 사라지고 사무도의 곁에는 단 한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사무도와 마찬가지로 기품 있는 흰 도포를 입고 쥘부채 하나만을 들고 있었지만 표정만은 그와 달리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부채를 펼치고 가볍게 흔들자 기분 좋은 바람이 그들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체 높은 풍사 대인, 사청현이었다.

“형, 꼭 이래야겠어? 오랜만의 하계 시찰이잖아. 기분 좀 내면 어때?”

“시찰은 무슨. 그저 축제를 즐기고 싶었던 것 뿐이겠지. 온갖 핑계를 다 대고 내려온 것 알고 있다.”

“아하하……. 형에게는 도저히 숨길 수가 없다니까.”

사청현이 머쓱한 낯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흥. 사무도가 못마땅한 낯으로 사청현을 훑어보았다. 사청현은 제 형이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라도 간다는 듯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그래도 형도 함께 내려와줬다는 건 같이 즐길 마음이 있다는 거 아니었어?”

“즐기기는. 너 혼자 내려보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따라온 것 뿐이다. 보나마나 뻔하지. 내가 몇 번을 말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는 여상을 취해 저 난잡한 무리들에 섞여서 놀 것이 아니냐. 만에 하나라도 그 중에 법력이 강하고 품성이 좋지 못한 자가 있으면 어쩌려고…….”

“아아, 알겠어. 알겠다니까. 그래도 지금은 형이 있으니까 그럴 일은 없잖아?”

“당연하지. 내 앞에서 감히 너를 건드렸다간 그 놈은 죽어서도 후회하도록 만들 것이야.”

사청현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사무도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사청현이 웃음기 어린 낯으로 답했다.

“나는 형을 참 잘 뒀네. 중천정에 있을 때도 온갖 법보를 다 쏟아부어서 끌어올려주더니만, 등선한 다음에도 몇백 년이나 나를 돌봐주는 형이라니.”

그 말에는 형에 대한 솔직한 애정뿐만 아니라 조금쯤은 놀리는 의도도 섞여 있었지만 웬일로 사무도는 동생을 나무라지도, 꾸짖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제 동생을 바라볼 뿐이었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사청현은 의아한 낯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사무도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허울 좋은 말은 됐다, 라며 발걸음을 성큼성큼 옮기기 시작했다.

“아아, 잠깐만. 나 두고 어디 가려고? 갈 곳이라도 있어?”

“너야말로 발길 닿는대로 가려던 것 아니었느냐?”

“아냐, 아냐. 오늘은 내가 봐둔 곳이 있어. 나만 따라와.”

그리 말하고는 제 형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사무도는 손은 놓고 말하라고 일갈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양 붙잡은 손에 힘을 주고는 동생의 걸음을 따라갔다. 외진 골목을 몇 번이나 빠져나가면서 도착한 곳은 생각 외로 으리으리한 무대가 지어져 있는 곳이었다. 공연이 시작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은 것 같았지만 이미 무대는 반쯤 꾸며져 있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청현은 사무도의 손을 잡고 비어 있는 자리로 이끌었다. 어느새 다가온 여동에게 공연 비용으로 동전 몇 닢을 주었더니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꽤나 앞쪽인 데다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서 나쁘지 않은 자리였다. 사청현은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지만 사무도는 여전히 자리에 서 있었다. 자리가 더러워서 그런가? 사청현이 제 옷소매로 자리를 깨끗하게 쓸어주자 사무도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고 수백 년동안 말해도 도무지 듣지를 않아.”

사무도는 부채로 사청현의 더러워진 소매를 털어냈다. 사청현은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형의 손길을 받아내었다. 사무도가 물었다.

“그래서, 이 공연을 보려고 내려온 거냐? 상천정에서 하는 우수한 공연에는 별 관심도 없어 보이던 녀석이.”

“선계의 공연이랑 하계의 공연은 또 다르잖아. 중추연에서 보니까 하계의 공연이 훨씬 재밌어 보이던걸. 이번 공연은 형이랑 나를 소재로 한 공연이래!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너와 나를? ……보나 마나 수사 대인과 풍사 마마 부부에 대한 이야기겠지. 볼 가치도 없어.”

당장에 일어나려고 하는 사무도를 붙잡으며 사청현이 말했다.

“잠깐, 잠깐! 내가 그 정도도 알아보지 않고 왔겠어? 그건 내 쪽에서도 사양이라고. 이 공연에서는 내가 제대로 남자로 나온다고 했어! 내가 직접 물어봤으니 확실할 거야.”

“네가 직접? 언제 또 몰래 하계에 내려왔던 거냐?”

핫. 사청현은 바보 같은 소리를 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바라보아도 말하려 들지 않는 모습에 사무도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됐다. 너를 채근해봐야 내 머리만 아프지. 알겠으니 공연을 보고는 순순히 선계로 돌아가는 게다.”

“그게…… 이왕 내려온 김에 야시장도 즐기고 가면 안 돼?”

“청현!”

사무도의 잔소리가 한참을 이어졌다. 사청현은 지난 수백 년간 단련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머릿속에는 곧 시작될 공연에 대한 기대감밖에는 없었다. 계속 말을 해도 제 입만 아프단 사실을 깨달았는지 사무도도 쥘부채로 한 번 사청현의 이마를 치고는 말을 더 얹지 않았다. 오늘은 생각보다 짧네. 사청현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할―만약에 그랬다가는 또다시 한참이나 잔소리가 시작될 것이었으므로―생각을 목 안으로 눌러담았다. 곧 이어 공연이 시작될테니 정숙해달라는 여동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사청현은 기대감에 휩싸여서는 사무도에게 몸을 붙이고는 목을 빼서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사무도는 제 동생의 밝은 낯을 잠시 바라보더니 무대 위로 시선을 옮겼다. 악기 소리가 울려퍼지고, 장식용 칼이 챙챙거리는 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곧, 무대가 시작되었다.

패왕별희

황성의 이름 난 거지, 노풍은 벽에 몸을 기대고 앉아 머리를 긁적거렸다. 머리에서 뭔가 떨어지는 것도 같았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이만 생기지 않으면 됐지, 뭐. 한동안은 비가 내리지 않아 제대로 몸을 씻지 못했다. 비가 오지 않는데 몸을 씻으려면 저 멀리 숲까지 가서는 강가에서 몸을 씻어야 했는데, 그랬다가는 먼저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굶어 죽는 것보다야 조금 냄새가 나고 더러워도 씻지 못하는 게 나았다. 이제는 완전히 장착된 거지로서의 마음가짐에 노풍은 혼자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뗑그랑, 소리를 내며 앞에 놓아둔 그릇에 동전 몇 닢이 떨어졌다. 노풍은 눈을 번쩍 뜨고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슬쩍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이립을 갓 넘긴 듯한 여인네가 안타까운 낯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놀란 듯 황급히 몸을 돌려 사라졌지만 목소리는 전해져왔다. 인물도 나쁘지 않은데, 저런 꼴이라니. 불쌍해서 어쩌면 좋아……. 노풍은 머쓱한 낯으로 허허 웃으며 그릇 안을 보았다. 오늘은 벌이가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배는 채울 수 있겠어. 그리 생각하던 차에 옆에서 이죽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좋겠어. 노풍. 나는 오늘 땡전 한 푼도 못 벌었는데.”

“야아, 역시 신수가 훤해야 한다니까.”

“훤하긴 무얼, 처음 왔을 때야 그랬지만 지금은 완전 거지 꼴이라고, 거지 꼴.”

“거지니까 거지 꼴이지. 그럼 거지인데 귀족 꼴인 게 맞나?”

저들끼리 시시덕거리는 소리에 노풍은 연신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다른 거지였더라면 정말로 시샘에 차서는 몰매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풍은 평판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으므로 저것 또한 단순한 농담에 불과했다. 노풍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릇을 들고는 말했다.

“저녁 즈음에 주변 도축장에서 먹을 것을 얻어오려고요. 여러분도 함께 나눠먹어요.”

그러자 주변의 거지들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역시 노풍이야! 노풍은 마음 씀씀이가 좋다니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입을 오갔다. 이런 때 나오는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제게 음식을 나눠주는 동료를 띄워주는 내용이었기에 노풍도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받아들였지만, 이따금씩은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나오곤 했다. 마치 지금처럼.

“그러니까, 노풍은 풍모가 꼭 우리 같은 놈들이랑은 다르다니까. 예전엔 어디 귀족 집 자제였던 거 아녀?”

“그러니까 말야. 아니면 뭐, 신선 나으리였다든가.”

“예끼! 신선은 아무나 되나? 그런 말 잘못 했다가는 신선 분들이 화를 내리신다고. 기껏해야 부호의 아들이었겠지.”

노풍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웃기만 했다. 과거라 함은 아주 오래 전 인간일 시절의 이야기라야 옳은가, 혹은 얼마 전까지의 신관이었던 시절의 이야기라야 옳은가. 어느 쪽이든 그리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웃고만 있자 다른 거지들도 흥미가 사라졌는지 곧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갔다. 다른 곳에서 구걸하던 시절의 이야기, 자신이 겪어온 왕초의 이야기 등, 온갖 인생사가 오고갔다. 노풍도 흥미롭게 듣던 와중 또다시 화제가 넘어갔다. 그것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축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축제요?”

“그래. 노풍은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 모를 수도 있는데, 축제 때가 대목이라고. 축제 때는 다들 기분이 좋아지니 잘만 하면 잔뜩 벌어들일 수 있어.”

“황성 축제는 아주 오래 전에 와본 게 마지막이라서요.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노풍,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오래 전이라봤자……. 아무튼 그때 잘 해봐! 노풍은 실력이 좋으니까 간만에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아마도 제가 말하는 예전은 여러분은 물론이고 여러분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태어나기 이전의 이야기일 텐데요……. 하지만 이런 것을 말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노풍은 그저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마따나 예전의 일보다는 지금 당장의 벌이가 중요할 때였다. 이전의 기억을 아무리 떠올려봐도 황성에서 거지를 마주쳤던 기억은 없었지만―그 시절에는 거지라고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이곳에서 몇 년을 지낸 이들의 말이었으니 아마 확실할 것이었다.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라. 마지막으로 배부르게 먹었던 것이 언제적 일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한때는 온갖 산해진미도 질려서 물리던 때가 있었는데……. 노풍은 고개를 저으며 기억을 흩어보냈다. 다 의미없는 기억들이다.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을 떠올려보아야 무엇하리. 그저 고기 한 점이라도 먹을 수 있다면 좋겠구나 하고 바랄 뿐이었다.

저녁이 되어 노풍은 조심히 동전이 든 그릇을 들고 주변의 도축장으로 향했다. 도축장의 주인은 시큰둥한 눈으로 그릇 안을 보더니 내던지듯 뼈다귀 몇 개를 던져주었다. 드문드문 살점이 붙어있으니 먹을 만한 정도는 되었다. 노풍이 연신 고개를 숙이자 주인은 손을 내저으며 빨리 눈앞에서 사라지라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뭐어, 거지가 눈앞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당연한 일인가. 노풍은 서둘러 도축장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뼈다귀를 한아름 안고 거지 소굴로 돌아가던 차에 우르릉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무너져가는 풍수묘가 보였다. 방금 전의 소리는 입구의 양쪽 옆에 서 있던 수사 신상과 풍사 여신상 중 여신상이 무너지면서 낸 소리인 모양이었다. 아래에 깔린 여신상은 이제 원형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쪼개져 있었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노풍의 귓가에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풍수묘도 끝이네요. 이미 지방의 풍수묘들은 다 불타고 무너졌다던데요. 그 왜, 이미 소문이 다 돌았잖아요. 사실은 수사 대인과 풍사 대인이……. 노풍은 질끈 눈을 감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어떤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았다. 피가 나도록 귀를 파내고 싶은 심경이었다.

거지의 하루하루는 비슷하다. 재미있는 일도 없고 특별한 일이랄 것도 따로 없으니 매일매일이 그저 흘러갈 따름이다. 어느 날은 배를 채우고, 어느 날은 배를 곯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흘러, 어느새 축제 주간이 되었다.

“노풍! 내가 말했지? 축제 때는 벌이가 좋다고!”

그리 말하는 거지의 그릇에는 한눈에 보아도 꽤나 많은 동전이 담겨 있었고, 그의 입가는 헤벌쭉하니 벌어져 있었다. 노풍은 순수하게 기쁜 마음으로 박수를 쳤다. 거지는 즐거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소리를 가다듬고 엄하게 말했다.

“그렇게 축하만 해주지 말고, 노풍! 너도 제대로 벌어야지. 오늘은 누구나 짭짤하게 벌 수 있을 테니, 나도 굳이 도와주지는 않을 거야. 정 없다고 하진 말라고!”

노풍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거의 동시에 거지는 뒤돌아 달려갔다. 아마 좋은 먹잇감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노풍은 미소를 지은 채 그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제 자리를 뒤로 하고 거리를 거닐었다. 어제는 나름 배부르게 먹었으니 오늘은 음식이 그리 급하지만은 않았다. 아무리 오늘이 대목이라지만 그렇게까지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그는 구걸보다도 오랜만에 마주한 축제의 모습을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거지가 다 된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나봐. 멋쩍게 그리 생각하면서도 발걸음은 가뿐했다. 제가 지나가면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들 덕에 인파가 드문 곳으로 골라 다니느라 지나 다니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뻔뻔하게 걸어다니는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 괜히 시비가 걸리면 귀찮은 일이었으므로. 그래도 외진 길목에서나마 축제를 즐길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노풍은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만 같았다. 아이들은 수백 년이 지나도 변하질 않는구나. 그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리를 지나다녔다. 음악과 귀한 안주 아끼지 말고, 부디 오래 취하여 제발 깨지 말았으면 좋겠네…….1) 길을 거닐던 이들 중 마음씨 좋은 이들은 노풍에게 돈을 몇 닢 건네주었으니, 그 덕에 노풍은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제게는 사치임이 분명하였으나 포장마차에서 탕후루 한 개를 사서 입에 물었다. 달콤한 설탕 절임과 새콤한 산사나무 열매가 입 안에서 터지며 즐거운 감각을 내주었다.

곳곳에 선 상점을 구경하고 곡예를 구경하다보니 어느새 하늘은 어둑해졌지만 인파는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노풍은 이제 슬슬 제 자리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외진 골목길을 지나갔다. 그런데 영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평소와는 다른 자리에 있는 상점과 인파가 더더욱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우선 대로변에 나와서 찾아보자는 생각으로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그곳에는 허름한 무대가 서 있었다.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 겹쳐지는 것만 같은 모습에 그는 눈을 깜빡였다. 그럴 리가 없다. 이미 수백 년이 지났고, 그때 있던 무대는 이미 몇 번이나 무너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배우들도 죽어 스러졌을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풍이 무대 쪽으로 다가가자 의심스러운 눈길이 그를 향했다. 자리를 지키는 이가 내민 손에 남은 모든 동전을 털어넣자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그가 불현듯 깨닫고 물었다.

“이 공연은 무엇을 주제로 한 공연인가요?”

“수사 대인과 풍사 마마를 주제로 한 공연입니다.”

노풍이 놀라 입을 떡 벌렸다. 예전이라면 놀랄 것도 없는 일이다. 하늘의 일을 소재로 삼은 공연 중 대부분은 배명 장군 혹은 수사와 풍사 부부를 다룬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수사전과 풍사전이 무너진 지금 그들을 다룬다는 것은 어지간히 취향 나쁜 괴짜가 아니고서야 어려운 일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노풍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한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아마 이게 두 분 대인을 다룬 황성에서의 마지막 공연이 될 겁니다. 노풍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시간이 지나 공연의 시작이 다가왔지만 자리에 앉은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건너편에서 한다는 배명 장군의 치정극을 보러 갔음에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노풍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유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황성으로 떨어진 후로 선계며 오사(五師)에 대한 이야기는 끈질기게 피해왔으면서, 이제 와서 자신들을 주제로 한 공연을 보기 위해 앉아 있는 것은 어째서인지. 그저 그는 마지막 공연이라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는지도 몰랐다. 그는 마지막이 다가온다면 그것을 지켜보는 것은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변을 은은하게 밝히던 불이 꺼지고, 챙챙거리는 무기 소리와 함께 악기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다시 불이 켜지자 화려한 분장을 한 남녀가 무대 중앙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필시 남자 쪽이 수사 대인, 여자 쪽이 풍사 마마이리라. 그들은 내리 애달프게 껴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아무래도 이 연극은 희극보다는 비극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수사와 풍사는 금슬 좋은 부부였지만 곧 그들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이별의 운명이 다가오고, 그들은 운명에 맞서 거센 파도과 바람을 불러일으키지만 결국 패배하고 만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연극의 짜임새는 조잡하기가 그지없어 당사자인 노풍조차도 담담하게 볼 수 있었다. 각본가 누구야? 아무리 끝물인 수사와 풍사라지만 이 정도는 너무한 거 아냐? 노풍이 팔짱을 끼고는 무대 위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그때 무대 위의 풍사가 수사에게로 쓰러지며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툭, 소리를 내며 허리춤에서 찢어진 풍사선과 수사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수사는 떨리는 손으로 제 부인을 안고는 탄식했다.

“부인, 부인. 그대를 어찌하면 좋을꼬. 이제는 하늘을 뒤엎던 나의 파도도 기세를 잃었으니…….”

무대 위의 수사가 대사를 마치기도 전에 노풍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배우들은 갑작스런 관객의 움직임에 이쪽을 잠시 바라보는가 싶었지만 다시 연극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노풍의 수더분한 꼴을 보고는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노풍은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가슴이 시끄럽게 쿵쿵거렸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당장이라도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노풍.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건 조잡한 연극일 뿐이야. 모두 끝난 일이야. 그는 눈을 감은 채 몇 번이나 되뇌이고, 피가 나도록 살을 꼬집은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끝내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 둘이 무대 위에 뒤엉켜 쓰러지며 연극은 끝이 났다. 구슬픈 악기 소리가 흐르며 종막이 펼쳐졌다. 관객석에서는 예의 상의 박수 소리가 울려퍼졌다. 배우들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관객들도 하나 둘 자리를 떠났지만 노풍만은 한참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안 가시오? 누군가가 묻는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는 멍한 정신으로 황성 안을 돌아다녔다. 하루종일 먹은 것이라고는 산사나무 탕후루 하나 뿐이었지만 배고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신없이 거리를 떠돌다가 비로소 멈춰선 곳은 황성을 가로지르는 강 어귀 앞이었다. 얼핏 바다만큼이나 망망해 보이는 강이 흐르고, 바람이 뺨을 스치며 흘러갔다. 쏴아아, 파도소리를 닮은 잎사귀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아주 잘 아는 소리였다.

그 순간 눈물이 흘러내렸다. 닦을 새도 없이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눈물에 그는 멍하니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았다. 뿌옇게 변한 시야 속에서도 어둠 속의 푸르름만은 변함이 없었다. 변한 것은 오로지, 오로지.

노풍은 소리없이 숨죽여 울부짖었다. 사무치게 그리웠다. 권세도, 영광도 아닌 단 한 명의 사람이. 차마 그리워해서는 안 될 사람이, 사무치게 그리워서…….

그는 그저 바람이 이 눈물을 전해주지 않기만을 바랐다.


1) 이백, 장진주(將進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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