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casablanca

엘쏜

 

 

 

카사블랑카

 

 

 

주의사항

- 영화 〈카사블랑카〉 AU

- 이베리아를 배경으로 한 가상의 전쟁(내전)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쿠데타, 전쟁, 약자에 대한 차별과 모욕, 부상, 사망, 심문, 사상검증 등 민감한 소재가 사용됨에 유의해주세요. 모든 사안에 있어서 캐릭터의 견해와 글쓴이의 견해는 완전히 동일하지 않습니다.

- 체스 기보는 Donald Byrne vs Bobby Fitcher(1956)를 일부 참고했습니다.

- 기본적으로 뭐든 괜찮으신 분들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Louis, I think this is the beginning of a beautiful friendship.”

[루이, 난 이게 아름다운 우정의 시작이라고 생각해.] 

―마이클 커티즈, 〈카사블랑카〉

 

 

 

 

 

  

 

0.

그와 내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8년 전, 그란 파로에서였다.

 

그란 파로―이베리아의 여느 곳에 대한 감상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을 불쾌나 유쾌와 같은 양극단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굳이 따지자면 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 비록 청년기까지의 이십여 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고향이지만 나는 언제고 그곳에 거부감을 느꼈다. 나는 고향을 거부했고, 어쩌면 고향 또한 나를 거부했다. 그곳의 무엇이 그토록 불만스러웠는가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다. 아니, 사실 이베리아와 관련된 모든 것이 그렇다. 모든 것이 깊은 안개 속에 파묻혀 모호하게 일그러져 있다. 이베리아라는 장소가 그렇게 만들었고, 나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었다.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두고 싶었다. 그렇게 서서히 그것들과 멀어져, 종국에는 잊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것들을 되살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를 되살려내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곳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펜을 든다.

 

 

 

1.

이베리아는 몹시도 복잡한 공간이지만 당시의 이베리아를 한 단어로 정의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시도가 아니다. 혼란. 8년 전의 그 나날들은 물론이고, 내가 기억하는 그곳의 모습은 언제나 혼란스러웠다. 눈을 감고 그곳을 떠올리면 익숙한 풍경과 소음들이 스쳐 지나간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시위, 벽마다 붙어 있는 불온한 포스터, 소리 지르는 동급생들, 밤마다 사라져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그런 것들이다. 내가 자라온 고장뿐만 아니라 이베리아의 어느 곳을 가더라도 똑같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성별과 나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누군가는 공화파의 이름으로, 누군가는 왕당파의 이름으로, 또는 파시스트,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수많은 사상들이 충돌하고 폭발했다. 당장 내가 재학 중이던 학교에서도 학생들은 자신 혹은 부모의 신념에 따라 무리를 짓고 언쟁을 벌이는 일이 잦았다. 정도가 과했을지언정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이 다투고 의견을 발전시켜나가는 과정 자체는 몹시도 자연스러운 일이었겠지만 고작해야 열두어살의 나이였던 나는 막연하게 싫은 마음을 품고는 했다. 다양한 의견을 가진 친구들이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거나 납득할 만한 결론을 도출해내는 모습을 보는 것은 물론 기꺼웠지만 걸핏하면 서로를 모욕하거나 손과 발을 써가며 드잡이질에까지 이르는 모습을 보게 되다 보니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이 아예 서로를 만나지 못하거나 대화를 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어느 순간부터는 이미 일어난 분쟁을 말리는 대신 중재자를 자처하며 그들의 토론이 분쟁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막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일부 급진적인 동급생들은 그런 나를 보고 순진해 빠진 중도주의자라거나 기회주의자라며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것에 구태여 반박하지는 않았다. 기회주의자는 아니어도 중도주의자는 맞을지 모른다. 나는 스스로의 의견을 내세우기보다는 다른 이들이 마음 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바랐고, 그것이 분쟁으로 격화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나를 모욕하던 이가 있는가 하면 내게 고마움을 표현하던 이도 있었다. 덕분에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의미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거나 다툼을 막을 수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순수한 기쁨을 느꼈다. 그렇게 ‘중재자’라는 떠들썩한 이름표를 달고 있기를 몇 년, 내가 타인에게, 이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잘못된 표현으로부터 비롯되는가. 누군가가 다른 존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해주고, 적절한 의사소통이 일어나도록 돕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터무니없는 무력감에 휩싸여 무너져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고향은 느리고도 확실하게 나를 옥죄어오고 있었다. 사라지지 않는 관료주의나 부패, 차별과도 같은 것 앞에서 나 같은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곳에서는 언제나 가슴이 답답했다.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서는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그러니 가급적 많은 사람과 함께 이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면, 하고. 그렇게 바랐을 뿐이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었고, 운이 좋게도 나는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재능과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가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사이에는 아주 큰 간극이 자리하고 있다. 그 시기 이베리아에 살던 모두는 이와 같은 딜레마 속에서 고뇌하고 혼란을 경험했다. 우리는 전자가 아닌 후자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러니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나는 정말로 운이 좋은 축에 속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병에 감염되고, 시한부 선고를 듣기 전까지는.

하늘이 되고 싶었다. 바람이 되고 싶었다. 땅의 구속을 벗어던지고 저 하늘로 날아간다면 자유로워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수천 년 동안 저 멀리를 바라보던 인간이 드디어 하늘로 발을 내딛던 시대였고, 나도 그 일원이 되고자 했다. 별과 함께 호흡하고, 공기 속을 가로지르며…… 사람들이 쏘아올린 염원을 전달한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을까.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가진 이에게 자신의 염원을 전달하고자 하는 이는 없다. 그를 하늘로 날아오르도록 허락할 이는 더더욱 없다. 나는 저 드넓은 창공을 뒤로하고 영원히 이 대지 위에 속박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바람이 되고 싶었다.

나고 자란 도시를 떠나 온갖 곳을 떠돌아다녔다. 이곳에서 한 달을 보내고, 저곳에서 세 달을 보내고, 다시 저 멀리로 떠났다. 이베리아를 떠났다.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존재를 기억하기 전에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하면 반쪽짜리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불행하지는 않았다. 마주치는 사람들을 도우면서 위안을 얻었다. 한순간에 태어나고, 다시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목숨이라면 그 찰나의 시간 동안이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사실로 말미암아 나 또한 구원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떠돌기를 한참, 우연한 기회로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모종의 사건을 겪으며 그들과 나는 서로에게 도움을 받았고 일종의 동지애를 형성했다. 그들은 내가 감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전혀 놀라움이나 반감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는 증세를 늦출 수 있는 치료제도 건네주었다. 느리게나마 병세가 진전되고 있었던 나로서는 생명을 빚진 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무리는 로도스 아일랜드라는 구호 단체와 연결된 신문사에 소속되어 있다는 모양이었다.

점차 눈앞의 사람들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그들은 정착하지 않은 채 떠돌아다니는 이들이었고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과 함께하지 않을 만한 이유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갚아야 할 은혜도 있었던데다 환자 입장에서도 치료제를 공급받을 수 있는 이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도움이 될 터였다. 잠시나마 좋으니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들은 내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는 듯 보이더니 곧 승낙의 뜻을 보였다. 임시 기자라는 우스꽝스러운 직함을 달고 그들과의 동행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반 정도는 제법 즐거운 나날이 이어졌다. 길어봤자 몇 달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들과의 동행은 계속되었고 사이도 빠르게 돈독해졌다. 특종을 위해 가끔은 위험한 장소에 잠입하기도 하고, 17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쉬지도 않고 이동한 적도 있었다. 혼자였다면 지루하고 괴롭게만 느껴졌을 시간이었지만 오히려 행복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을 느꼈던 것이 얼마 만이었을까. 나는 내가 단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홀로 떠돌아다니던 어떤 순간도 그 나날만큼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존재를,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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