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송]잎을 흔드는 바람에도 끝은 있기에
글쓴이의 주관적 캐릭터 해석으로 작성된 글로, 캐주의 해석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안개가 핀 새벽의 애록은 지독한 고요의 향이 났다. 숨을 내뱉는 것조차 소음이 될 것 같은 적막. 송학은 촉촉이 젖은 공기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몸 안으로 짙은 새벽의 향이 몰려들었다. 덜 피어난 꽃잎에 묻은 이슬과 젖은 풀의 물기, 연못 위로 내려앉은 짙은 물안개와 이른 잠이 깬 개구리의 울음소리. 먹빛 정취가 느껴지는 애록. 송학에게 있어서 이 땅은 애정이자 슬픔이자 그리움이었다.
‘대장, 내일은 비가 올테니 우산을 챙기십시오.’
부인이 그러더냐. 무심히 물었을 뿐인데 귓가를 붉히던 부하의 얼굴이 그려졌다. 칼끝에 묶인 보라색 매듭도 문득 떠올랐다. 뻣뻣한 녀석이 제 부인을 떠올릴 때면 소년의 얼굴을 하는 것이 여간 간지러운 것이 아니었다. 송학은 답지 않게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나도 많이 물러졌군.”
습관처럼 엄지와 검지 사이 푹 팬 살을 슥슥 문질렀다. 칼을 갈무리할 때 스친 검날이 남긴 상처는 검잡이들의 긍지와 같은 것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상처도 나지 않을 만큼 단단한 껍질이 되어버린 살은 송진을 바른 듯 만질만질했다.
그러고 있노라면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떠올랐다. 이미 통증조차 느낄 수 없는 제 상처 위를 만지며 앓던 이가.
깊어지는 생각에서 벗어나려 송학은 마루 아래로 내려섰다. 이슬에 젖어 응어리진 모래가 발아래서 도르륵 도르륵 굴러다녔다. 그 소리가 마치 젊은 여인의 웃음소리 같았다. 생각은 끝내 떨치지 못했다.
“하아….”
문득 무너지는 날이 있다. 두터운 겨울 껍질을 입은 소나무와 같은 송학이지만 그런 그에게도 곧은 잎을 흔드는 바람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 바람은 긴 시간 송학의 뿌리에 맺힌 이름이었다.
비극은 평범한 날의 얼굴을 하고 들이닥쳤다. 가끔 그날의 참상이 꿈에 보였다. 지금처럼. 알 수 없는 검은 것들로 뒤덮인 마당과 그 가운데 쓰러진 작은 그림자. 마지막 숨을 내뱉을 때 끊어질 듯 작은 소리로 불렀던 제 이름은 지금까지 송학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 소리를 떠올릴 때면 늘 물안개를 닮은 빛의 무언가가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던 눈높이, 잊지 못했던 그림자, 익숙한 걸음걸이와 살랑이는 움직임. 송학의 발이 우뚝 멈춰 섰다. 여인의 모습을 한 형체는 사뿐한 걸음걸이로 마당을 노닐었다.
‘딸일까요? 아들일까요?’
어느 쪽이 좋아요? 희미한 인영은 둥그렇게 솟아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송학은 알았다. 이것은 제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후회의 잔영. 미련의 얼굴. 혀끝에서 맴돌던 이름은 끝내 목구멍 너머로 삼켜졌다.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를 쓸어주고 싶었으나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딸이면 했는데.”
그 말을 네게 전하지 못했어. 그게 왜 이토록 후회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여인은 살랑이는 걸음걸이로 송학을 등지고 앞으로 걸어갔다. 부른 배가 내리고 어느새 품에는 작은 아이를 안은 채였다. 품에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한날한시에 보냈어야만 했던 아이. 홀린 듯 그림자의 앞으로 걸어갔으나 아이의 얼굴은 흐렸다. 보지 못한 것은 그릴 수 없었다.
‘아이 눈이 당신을 꼭 닮았어요.’
'“….”
‘우리 아이도 당신처럼 훌륭한 검사로 키워야겠어요.’
“….”
‘얘야, 아버지를 닮아 건강하게 자라야 한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림자는 연못 근처로 걸어갔다. 노랫소리 사이로 아이의 앙알거리는 울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송학은 박힌 듯 서서 그림자가 지나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지평선 너머 해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눅눅하게 젖어 있던 자리는 보일 듯 말 듯,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뭐해?”
기둥에 가려 사라진 인영을 쫓던 송학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자를 쫓으며 고개를 기울이던 송학은 급작스레 잠에서 깬 것처럼 몸을 떨었다.
“당신….”
“좋은 아침.”
레겐은 졸음이 잔뜩 묻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품에 안긴 이솔이 꼭 닮은 표정으로 레겐이 하는 양을 따라 하고 있었다. 저를 향해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부녀를 보던 송학의 몸이 풀어졌다. 웃음이 났다. 장난스레 손 키스를 하는 둘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송학의 뒤로 해가 빠른 속도로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슬이 걷히고 마당을 적셨던 습기도 조금씩 물러났다.
“이 아침에 무슨 일이야.”
“공주님이 화장실 가고 싶대서.”
“파란은?”
“아직 자. 몰래 나왔어.”
날이 아직 찬데, 겉옷을 입히지 않고선…. 꾸짖는 투에 레겐이 입술을 삐죽였다. 우리 공주님 건강해. 어제 나무 타는 거 못 봤어? 이솔을 받아 안은 송학을 품에 안으며 레겐이 투정했다.
“그래도 조심해야지. 이솔이 앓으면 파란도 함께 아프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파란이 방에 혼자 있으니 이만 들어가지.”
“네에.”
레겐은 송학의 이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몸을 물려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 이솔은 크게 하품하더니 송학의 품 안으로 기대왔다. 묵직한 무게감, 그 안정감에 레겐이 제가 그랬듯 이솔의 작은 이마에 입을 맞췄다. 방으로 돌아가자, 가서 더 자자꾸나. 혹시나 아프진 않을까, 잠든 아이를 한껏 끌어안은 채 송학이 한 걸음을 내디딜 때.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비단잉어들이 춤추듯 헤엄치는 연못에 손을 담그고 노는 아이의 인영. 그 뒤를 지키는 여인의 모습도 보였다. 마당은 이제 온통 해의 영역이 되어서 그림자는 연못의 가장 끄트머리에 조금 남았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이제 곧 사라질 터였다. 그를 알기라도 하는 듯 여인은 그림자 속에서 아이를 안아 들었다. 잠깐 사이 여인의 작은 품이 가득 찰 정도로 자란 아이는 졸린 눈을 비비며 그 품을 파고들었다.
송학은 여인이 몸을 돌리는 것을 보았다. 뱃속에 있는 아이를 도닥이며 불러주던 익숙한 가사의 자장가도 들려왔다. 살랑이는 걸음걸이에 흔들리는 치맛자락이 점점 흐릿해졌다. 마침내 그늘 한 점 없이 햇빛이 온 마당을 침범했을 때, 여인은 완전히 사라졌다. 남은 것은 송학과 그 품 안에서 다시 잠에 빠진 아이뿐이었다.
아침의 찬바람이 나무를 뒤흔들며 파도와 같은 소리를 내다 이내 사그라졌다. 갓 피어난 꽃이 세찬 바람에 잠시 고개를 꺾었으나 이내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송학은 아이의 등을 조용히 도닥이며 그림자가 사라진 연못 끄트머리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마지막 인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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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집 아들 훔치기 3탄
렉송 딸랑구들 봤을 때부터 쓰고 싶었던 이야기
피상적인 내용이라 잘 전달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나는 만족함
어쨌든 썼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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