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行遊女

백화란만 커뮤니티 러닝 자작 캐릭터 과거 설정

秘史 by 史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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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 하얀 새白鳥. 본래 이름은 하얗게 밝아오는 아침白朝.

백조는 때때로 꿈에서 까치나 참새 따위가 간간이 우는 이른 아침의 고즈넉한 풍경을 보곤 했다. 하얗게 밝아오던 하늘, 상쾌한 공기, 밤새 내린 눈이 얇게 덮인 뜨락. 그리고 그곳을 가로질러 내달려오는 우리 아들.

아온阿溫……

애처로운 부름은 항상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다. 두 팔을 뻗어 받아든 아이가 내 몸으로 파고들며 기괴하게 일그러드는 찰나, 백조는 눈을 뜬다. 칠흑같은 밤.

안심했어. 아침이 아니라서. 더이상 그런 아침은 보고 싶지 않아……

주변을 더듬어 병을 찾아 들이킨다. 갈증이 내려간다. 동시에 입이 쓰다. 마실 것이라곤 술 밖에는 없으니까.


“깊은 밤중에 죄송하게 됐습니다, 누님.”

그야말로 칠흑같은 밤이었다. 그런 시간에 자신의 방으로 찾아올 이는 드물었다. 권위적인 아버지, 유약한 어머니. 하지만 그들은 나를 지원해 주었으면서도 예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구중궁궐같이 답답한 집안에서 유일하게 이 시간에 나를 보러 찾아와 줄 수 있는 것은…

“주무시려던 참이었나요?”

백조의 하나뿐인 남동생이었다. 이름은, 백하白霞.

“아니, 마침 잘 왔어. 나 차를 끓이려고 했는데…… 같이 들자.”

그는 난처한 기색으로 문간에 서서 나를 한 번, 방을 한 번 돌아보았다. 태를 보아하니 앉아서 차나 마시면서 히히덕거리려고 온 건 아닌 성싶었다. 백조는 짐짓 아쉬운 체를 하며 남동생을 끌어 제 옆에 앉혔다. 옛날에는 나와 마시는 차가 세상에서 제일로 맛있다고 그랬으면서……

“무슨 일이기에 그래, 응? 할 말이 있어 왔니?”

“누님, 지내시기 좀 어떠십니까?”

“무어, 어떨 게 뭐 있어. 우리 집인데 나와 안 맞는 곳이 있으려고. 내 얘긴 말고 네 얘기나 하자. 네 부인은 좀 어떻든.”

“……불편한 건 없어 합니다. 그래도, 누님께서 혹시 심기가 상하시진 않았을지 걱정하던데……”

백조는 대답을 얼버무린 후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동생의 미안해하는 눈빛도, 묘하게 자신을 불편해하고 피하는 그의 부인도,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하인들도.

백조의 집안인 상 씨 가문은 현재 1남 1녀를 두고 있었다. 금지옥엽 아들, 그리고 그냥 딸. 어릴 때부터 눈에 띄는 편애를 받던 동생은 혼인과 동시에 백조의 방을 빼앗았다. 물론 동생의 의지는 아니었다. 딸자식은 출가외인이라는 아버지의 방침에 따라, 아직 혼담도 오가지 않는 친딸을 작은 방에 짐짝처럼 박아놓고 금지옥엽 아들의 부인을 안채에 들인 참이었다.

하인들은 자신의 수발을 들면서도 틈만 나면 모여 쑥덕거렸다. 내놓은 자식이다, 붙어있어봤자 떨어질 콩고물도 없다, 잘해줬다가 괜히 시집살이에 딸려간다…… 맞는 말이다. 백조에게 잘해줘 봤자 안채 사람들의 눈총만 받을 뿐이었다. 이 집에서 백조의 자리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백조는 별로 불평하지 않았다. 작은 방에서 지내라면 지냈다. 친하게 지내는 몸종도 없고 혼자 지낼 방이라면 제격인데다, 동생에 비해 지닌 패물도 없었고, 짐도 간소한 탓이었다. 밖에 내어 보일 때는 체면이 있다면서 온갖 것을 입히고 발라 밀랍처럼 굳혀놓고, 귀가하면 천 년 굶은 벌떼처럼 다시 모든 걸 긁어가는 일상의 반복. 백조는 그냥 웃었다. 웃고 있으면 다들 안 건드리니까.

“제 마음이 편하지 않아 그럽니다. 이 집에서 지내기 불편하시지요.”

“아니라니까. ……으음, 그래도 소하가 나를 걱정해 주니까 그건 되게 좋다.”

미소를 지어보였으나 동생은 도리어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백조는 부러 시선을 피했다. 어떤 중요한, 꺼림칙한, 불길한 이야기를 하려고 저러나. 방을 여기로 옮기라고 했을 때도 저런 표정을 지었었다.

마침내 그의 입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말이 떨어졌다.

“제가 좋은 혼처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누님을 잘 대해줄 곳으로요.”

백조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또 웃었다. 방을 옮기라고 했을 때처럼. 기어이 나를 이 집에서 내쫓으려고 드는구나. 이젠 작은 방 한 켠조차 내어줄 수 없구나. 내가 그리 눈엣가시로구나.

“나 정말 괜찮은데…… 소하, 네가 이렇게 가끔 들러주잖아. 얘기도 해주고. 나, 나 그리고 네 부인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보고 싶어. 응? 네 부인이 아프거나 할 때, 내가 보아줄게.”

“누님, 누님도 이제 누님의 삶을 사셔야죠.”

“여기에도 내 삶이 있어.”

부드러운 손이 백조의 손을 감쌌다. 백조는 그것을 차마 떨쳐내지 못하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동생은 그것을 긍정적인 뜻으로 해석했는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절대 누님을 혼자 두지 않겠습니다. 누님은 여기서 이런 취급 받으실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야말로 제가 누님께 진 빚을 갚겠습니다.”

백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집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나가서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제 한 몸 건사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흔한 결말은 그저 그런 집에 그저 그런 시집을 가서 그저 그런 여생을 보내는 것 뿐이었다.

그래도 동생이 알아봐주는 혼처이니 어쩌면…… 근사한 집에 가게 될지도 몰라. 나를 진정으로 위해주는 아이니까. 언제나 잊지 않고 나를 보러 와주고, 나를 아껴주는, 나의 ‘진짜’ 혈육이니까.

그렇게 시집을 가고서 진짜 출가외인이 된 지 한 달. 꼬박꼬박 오던 서신마저 끊겼다. ‘이런’ 취급을 받지 않겠다고 해주겠다던 동생은, 제 소임을 다 했다는 듯이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다.

백조는 언제나 그랬듯, 혼자가 되었다.


“아온, 그리 뛰다 넘어져.”

“어머니, 여기 토끼풀이 자랐습니다!”

“그래…… 보자, 우리 아온이 네 잎 달린 토끼풀을 찾을 수 있을지, 엄마하고 내기할까?”

“좋아요! 만약 제가 먼저 찾으면, 업어주셔야 해요!”

“다 컸는 줄 알았는데 아직도 아기야…… 그럼, 엄마가 먼저 찾으면 오늘 글공부는 핑계대고 빠져나가지 말기.”

“치이, 오늘은 정말 열심히 하려고 그랬어요!”

“그래, 아온, 그런데 엄마가 먼저 찾아도 괜찮아?”

“아!”

토끼풀 밭에 고개를 박듯이 쭈그려 앉아 꼼꼼하게 풀을 헤치는 동그란 정수리. 백조는 토끼풀을 조금 헤치는 듯하다가 그만두었다.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이 대단하신 집안에 막내 며느리로 들어온 지도 5년. 꼭 그 시간만큼의 귀한 아들이었다. 시집 생활을 버티게 해준 유일한 낙이자, 삶의 원동력, 이유, 상백조의 모든 것. 이름은 온. 자신과는 달리 온 세상의 따듯함을 다 안고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서 지은 소중한 한 글자였다.

귀한 대접 받게 해주겠다던 동생은 정말 귀한 집안을 물어오긴 했다. 본인들만 귀한 나머지 며느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집안이라는 게 사소하지만 큰 문제였다. 그나마 아들이라도 낳았으니 다행이지, 딸을 낳았더라면 온갖 푸대접을 받았을 것이 자명했다.

백조는 이전보다 더 숨막히는 삶을 살아야 했다. 차 한 잔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고, 매일 매 시간 자신을 검열하며 답답한 옷과 무거운 머리 장식을 계속해서 치렁치렁 달고 있어야 했다. 체면, 그놈의 체면이 뭐라고 목이 꺾일 만큼 금속을 머리카락 속에 꽂아 넣어야 한다는 말인가. 두피까지 닿아오는 차가운 금속에 머리가 쿡쿡 쑤셨다.

이러다가 넘어져서 목이 꺾여 죽든, 숨이 막혀 죽든, 다 죽이고 나도 죽든…… 아, 그래도 우리 아온은, 안 되지. 아온은, 지켜야 해.

겨우겨우 버티며 살아온 5년이었다. 이제는 남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한 막내 며느리 연기를 하는 데에는 이골이 났다. 미소가 우러나올 때는 오로지 아들을 볼 때 뿐이었다. 아온이 없다면 제 남편도, 남편의 형제들도, 고고한 척 위세 부리며 되도않는 기강을 잡는 이 집의 첫째, 둘째 며느리들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아, 찾았어요, 어머니! 잎이 네 개예요!”

꺄르륵거리며 토끼풀 하나를 뜯어 나풀거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업어달라고 보채는 아이를 향해 쭈그리고 앉았으나, 어째서인지 아이는 묵묵부답이었다.

“아온?”

“어머니, 잠시 손을 내어주세요.”

의아해하며 손을 뻗자, 아이는 그 조그마한 손으로 이렇게 저렇게, 가락지로 만들어 백조의 손에 조심스레 끼웠다. 백조는 그 작은 가락지를 오래도록 들여다 보았다. 네 잎은 네 잎인데 조금은 벌레가 먹었다. 괜찮아, 원래 예쁜 것들은 다른 것들이 시기하는 법이잖아.

“예쁘다…… 아온, 이런 것은 어떻게 알았어?”

“시장에 갔다가 만난 친구가 알려줬어요!”

시장에 언제 갔었지? 고민하고 있자 아이가 아차, 하며 제 입을 가렸다. 아아, 글공부를 빼먹고 도망하던 날 시장에 간 거로구나. 잠시 혼란스러웠던 머리가 곧 진정되었다. 백조는 짐짓 타이르는 투로 말했다.

“혼자는 위험하니 멀리 가지 말라고 했는데.”

“헤헤, 어머니, 시장에 얼마나 재밌고 맛있는 게 많은데요.”

그랬지. 아온은 이런 아이였지. 주변에 사랑이 많고, 모든 것에 호기심과 애정어린 눈빛을 보내고…… 그러니 분명 친구도 사귀어 온 거겠지. 아이는 혼날까 불안한지 눈을 도록도록 굴리면서도, 머쓱한 미소를 잊지 않았다. 마치, 나를 정말 혼낼 거냐는 듯.

백조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너를 어떻게 혼내. 이 작은 아이를, 내가 어떻게 혼내……

아이는 맑게 웃으며 어서 안아달라는 듯이 양팔을 벌리고 재촉했다. 그리하여 아이를 안아주기 위해 가까이 가던 찰나, 백조의 눈에 무언가 보였다. 목 아랫부분에, 가까이 가서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점.

아온에게 이런 점이 있었나?

아온에 대한 것은 확실히 기억해. 코 위에 점, 그리고 발가락에 점. 그리고 오른쪽 손목에 점……. 백조는 거의 병적으로 그것들을 중얼거리며 아이의 얼굴과 몸을 샅샅이 뒤졌다. 그 와중에 연약한 아이의 살이 짓눌리고, 사랑스럽던 입술 새에서 비명이 나와도 멈추지 않고.

없어, 하나도 없어. 그렇다면 ‘이건’ 뭐야. 아온이 아니야? 백조는 한순간 얼굴을 굳히고 똑바로 아이를 응시했다. 아이가 딸꾹질을 시작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네가 누구냐는 거야.

자세히 보니 달랐다. 보기도 싫은 남편을 빼닮았던, 푸르스름한 머리칼이 없었다. 자신을 다그치던 콧대 높은 시어머니를 빼닮은 긴 속눈썹이 없었고, 자신을 탐탁찮게 여긴 시아버지를 빼닮은 곧은 손가락이 없었다. 전부 달랐다.

대신 눈앞에는, 자신과 닮았으면서도 햇살을 받은 듯이 찬란하게 빛나는 밀색 머리칼, 수려하지는 않았지만 정감있는 속눈썹, 누구의 손이라도 따스히 맞잡아줄 것만 같은 둥글고 무딘 손가락이 있었다…… 그러니 그것은 아온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고’ 싶었던 다른 무언가였다.

온전히 나를 지지해줄 나의 아군. 나를 버리지 않고, 나만 따라와줄, 내가 없으면 안 될, 나와 나의 아들을 닮았으나 그들을 닮지는 않은, 따스한 무언가를…….

어째서 이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을까?

백조는 웃었다. 실소했다. 실성했다. 미친듯이 웃어버렸다. 아니, 미친 것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진짜 ‘온기'는 잃은 채, 몇 번이고 내 손에 쥐고픈 따스함을 찾아 헤맸던가. 모든 것을 잊고 맞이한 5년짜리 시한부 행복은 즐거웠니?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그러나 몇 번이고 제 행복을 죽이는 과정 속에서, 자신마저 잃어버린 후였다.

생기를 잃은 적막의 한가운데, 살아있는 것들의 숨을 앗아갈 듯한 하얀 아침, 덩달아 하얗게 빛나는 눈 덮인 뜨락. 백조는 모든 것을 떠올렸다. 냉혹했던 시집살이, 유일한 낙이었던 아온, 그 아이의 죽음, 손자의 죽음에 분노한 시부모, 모든 걸 며느리의 탓으로 돌려 더욱 표독스럽게 배척받아온 모든 나날. 그리고 처음으로 묻혀본 그들의 피까지, 전부 다.

조금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나를 내려다보던 그들의 눈빛은 그토록 차가웠건만, 어째서 그들을 이루는 심장이며 오장육부며 새빨간 덩어리들은 이토록 따듯한 건지. 그런 따스함을 품고 있었다면 왜 내게는 한 톨도 내어주지 않았던 건지.

왜 그토록 따스했던 아이의 몸이 차갑게 식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지. 내 몸으로부터 나와 내 품에서 길러낸 아이를 그들이 뺏어갔을 때, 저항하지 못했는지.

나는 그저, 작은 온기 하나를 바랐을 뿐인데. 나를 비춰줄 작은 온기. 손바닥만한 온기. 내 손가락에 걸린, 이 토끼풀 가락지만큼의 온기.

백조는 두 손을 내려다 보았다. 또다시 붉게 물든 손이, 아직까지 맥박을 퉁겨내는 저 깊은 곳을 향해 갈망하듯 저미어 들어갔다. 아이의 입에서 더는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붉고 끈적한 액체가 밀려나왔다. 따듯했다. 눈물나게 따듯했다. 가짜 온기라도 괜찮았다. 이렇게 내 손을 데워줄 수 있다면…….

그러나 온기는 언제고 식을 것이다. 백조는 붉게 물든 아이의 머리칼에 얼굴을 부비다가 일어섰다. 겨울이라 그런지, 차게 식은 공기가 폐부로 들어왔다. 이번 겨울을 나려면,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 했다. 또다시 모든 것을 잊은 나를 데워줄, 5년짜리 행복을.

“아온, 보고 싶어.”

작게 읊조린 후, 백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창고를 가득 메운 술독, 먼지 쌓인 술단지들. 백조는 자연스럽게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 단지 하나를 열었다. 꼭 5년을 숙성됐을 술빛이 빛났다. 이것을 마시고 나면, 아온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늘 그랬듯……

자고 일어나면, 아온이 날 맞아줄 거야.

술이 식도를 태우며 몸 속으로 퍼져나갔다. 열기에 취해 몽롱해진 백조 앞으로, 핏빛 기억이 부서졌다. 모든 기억이 지워지고 나면, 다시금 행복할 수 있으리라. 다시금 찾게 되리라. 다시금 쥐게 되리라.

나의, 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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