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雷

잔월효성 커뮤니티 러닝 자작 캐릭터 과거 설정

秘史 by 史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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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항상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글쎄 임신하기 전 웬 집채만한 백호가 달려와 어머니에게 붉은 아가리를 쩍 들이밀었다는 것이다.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자, 그것은 마치 웃기라도 하듯 끽끽대는 소리를 내더니, 어머니가 방금 냈던 비명을 똑같이 따라했다. 그리고는 우르릉, 달려들어 어머니의 뱃속으로 쑥 들어가더란다. 더욱 놀라 일어나보니 다행히 꿈이었다. 그 꿈을 꾸고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는 임신했다. 태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기괴했다며 종종 웃음거리로 들려주시던 말씀을, 문울은 아직도 기억했다.

그렇다면 나는 엄마를 잡아먹고 기어코 내 생명까지 잡아먹은 호랑이 새끼란 말인가. 문울은 고개를 저어 기억을 흩어냈다.


타고나기를 모사(模寫)의 귀재. 발걸음이 가볍던 아이는 소리를 실은 바람처럼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뒷산의 지리에도 빠삭했고, 남들은 모르는 산 속 숨겨진 샘을 찾아 거기서 몇 시진이고 누워있기도 했다. 제일 좋아하는 것은 꽃이 핀 달밤, 그 샘가에 누워 수면으로 무수히 떨어진 꽃잎을 헤어보는 일이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수면(水面)에 취하다 보면 어느새 수면(睡眠)을 취하는 일은 요원해져 있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이를 꺼림칙해 했다. 장난끼가 많던 아이는 짓궂기가 혀를 내두를 정도라서, 가끔씩 자신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어디 가서 그 목소리와 말투를 똑같이 재현해내곤 했다. 아주 어릴 때는 이것이 아주 서툴러, 장기를 부리는 줄 알고 모두가 박수를 쳤었다. 하지만 아이가 커 가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단순한 재능을 넘어 소름까지 끼친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아이가 지나가면 입을 꾹 다물었다.

“저 애 앞에서 말하면 목소리를 전부 훔쳐간다.”

문울은 재밌어했다. 모사를 했을 때 박수를 쳐 주는 이와, 꺼려하는 이, 박수를 쳐 주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꺼려하는 이. 전부 즐거운 반응들이었다. 혹여나 욕을 듣더라도 그것을 칭찬으로 알아들었다. 자신의 성대모사가 똑같지 않았다면, 욕을 듣지 않았을 테니까. 저건 전부 내가 잘해서 듣는 시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어느 날엔 모처럼 달밤에 산을 올랐다. 두려움이 없던 문울은 어두컴컴한 숲을 싸돌아 다니다가 그만 멧돼지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처음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 찰나, 문울은 기가 막힌 수를 생각해 내었다.

‘글쎄 그 백호가 내 비명을 똑같이 흉내내지 뭐니!’

어머니의 말이 귓속을 맴돌았다. 그래, 멧돼지보다 더 크고 강한 것의 소리를 따라해보자. 이를테면, 범의 포효같은 것. 아직 짐승의 목소리는 따라해 본 적 없지만, 내가 따라하지 못할 소리가 어딨겠어? 뭐든 가능해, 사람의 소리나 짐승의 소리나 다 그게 그거야. 본질적으로 같은 소리. 자연에서 나고 자연에서 나는 소리라면 뭐든지!

차분히 눈을 감고, 그것의 소리를 상상하는 거야. 그리고 천천히, 목에서부터, 그르릉, 그르릉 거리는 소리… 아, 되고 있어, 할 수 있어. 눈을 떠, 나는 범이다. 이 산의 주인.

문울은 멧돼지를 노려보며 한 발짝을 내딛었다.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찰랑이는 머리카락이 바짝 곤두섰다.

그날 산에서는 범의 포효가 울렸다.


그 뒤로는 짐승이나 사물의 목소리도 연구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편이 더욱 재밌었을지도 모른다. 주방 일을 하던 아낙에게 그릇 깨지는 소리를 들려주거나, 밤에 몰래 다른 집에 숨어들어가 섬뜩하게 칼 가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폐가에 숨어 다듬이질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점점 문울을 무서워했다. 어떤 이가 말했다.

“분명 귀신이 들린 거야. 도사를 불러야 해!”

사람들이 불러 온 영험하다는 도사는 대뜸 문울을 가리키며 성을 냈다.

“삿된 것들이 가득 들어찼구나! 특히 저 혀! 검게 보이는 것이 아주 사특하다! 도려내야 해!”

문울은 자신의 혀를 빼어 면경에 비춰보았다. 빨갛기만 했다. 저건 사기꾼이야. 문울은 히, 웃으며 도사의 말을 반복해서 따라했다.

“삿된 것들이 가득 들어찼구나! 삿된 것들이 가득! 도려내야 해! 특히 저 혀! 도려내야 해! 아주 사특하다! 삿된 것들이 가득!”

공포에 질린 도사의 눈을 보며 문울은 깔깔댔다. 사기꾼, 사기꾼이야. 아무것도 모르잖아. 미친듯이 웃어대는 문울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미쳤군, 미쳤어!”

그래, 나 미친년이다. 문울은 속으로 생각했다. 될 대로 생각하라지. 난 그냥 천지간의 소리를 사랑할 뿐이야. 더이상 나를 깔보는 소리를 듣기엔 내 귀가 소중해. 나는 더 많은 소리를 들어볼 거야.

문울은 그 길로 마을을 떠났다.


성인이 되면서 문울은 이제 들은 소리뿐 아니라, 그 소리를 조합해 다른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미 들은 말을 바탕으로 그 사람이 하지 않은 말까지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문울은 그것을 생계를 위하여 쓰거나 범죄에 이용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이건 그냥 내가 좋아해서 내는 소리니까. 이걸로 사람들이 해주는 반응만 봐도 즐거우니까.

몇 년을 부평초처럼 떠돌았다. 문득 집이 그리웠다. 내가 자주 가던 샘가, 거기서 헤어 보던 꽃잎들, 그리고 엄마. 나는듯이 달려간 집은 이미 폐가가 되어 있었다. 다시 돌아온 문울을, 마을 사람들은 귀신 보듯 쳐다봤다. 자신을 아는 이들은 전부 두려워하며 도망치기 일쑤였다. 하는 수 없이 자신을 모르는 7살배기, 8살배기 아이들을 찾아다니며 어머니의 행방을 물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귀신을 부리는 아줌마라고 소문이 나서, 마을에서 쫓겨나서 죽었다던데요. 저 집은 들어가지 마세요, 그 아줌마가 부리는 귀신이 들렸대요.”

문울은 그게 농담인 줄 알았다. 이번에도 듣고 싶은 말만 들었다. 마을을 떠났구나, 그럼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지. 됐어, 이제 내가 좋아하던 샘을 찾아야 겠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인간이 못 견딜 충격이었다. 그래서 못 들은 척 슬쩍 진실을 넘겨버린 것이다. 문울은 그때의 자신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몰랐다. 샘가에 나앉아 수면으로 비치던 제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그 얼굴을 기억해낼 용기가 없었는지도. 그때부터 문울은 기분이 좋지 않으면 가면을 써 얼굴을 가렸다.

다시 찾은 샘가는 아주 고요했다. 소리를 사랑하는 자신이 숨 막힐 정도의 정적. 그때 어머니 목소리를 들었다. 어머니는 웃는 얼굴로 샘 한가운데 떠서 손짓했다. 이리 와, 아가. 내 아가. 어딜 갔다가 이제 오니. 아직도 그 신통한 재주를 부리고 다니니. 많이 컸구나.

문울은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그래, 웃자. 진창에 나가떨어져도 웃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엄마는 저렇게 예쁘게 살아있는 걸. 난 이렇게나 행복해. 어느새 시원한 감촉이 종아리를 감싸왔다. 물 속에서도 소리가 날까? 엄마, 알려 줘요. 그래, 아가. 이리 와. 이리 오렴…

문울은 눈치챘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그 어디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바로 제 입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물 위에 떠 있는 어머니같은 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나와 대화했다. 문울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범의 포효 소리를 내었다. 온 산이 울리고, 새들이 우르르, 날아갔다. 어느새 턱 밑까지 잠겨온 물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문울은 속 편히 웃었다. 나 이제 진짜 엄마를 만나 볼래. 문울은 그렇게 말하고 샘의 가장 가운데로 잠겨들어갔다.

매미 소리가 쨍하게 울렸다.


물 위로 떠오른 문울은 생각했다. 나는 귀신이 됐구나! 하지만 어떤 원한이 있어서? 문울은 생의 마지막에 가졌던,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열망을 떠올렸다. 엄마도 귀신이 됐을까? 그럼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방방곡곡을 떠돌았다. 엄마라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찾아서 꼭 내가 이렇게 모사를 잘하게 됐다는 걸 보여줘야지. 엄마는 항상 내 재주에 욕을 한 적이 없었다. 백이면 백 모두 박수를 쳐 줬다. 엄마의 박수 소리를 듣고 싶어. 세상 모든 소리를 들어본 나잖아. 박수 소리만 들어도 알아볼 수 있어.

거추장스러운 신발은 벗어던졌다. 입에 걸린 미소는 유쾌했다. 장장 800여 년간 수많은 소리를 듣고 지냈다. 이제 엄마는 만나지 않아도 괜찮아. 나, 귀신으로 산천을 누비는 거 적성에 맞다니까. 내 목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를 모사해 내는 거야. 재밌겠다, 그치 엄마?

듣자니 이번에 신선들하고 연회를 한대. 나 출세했지? 아하하! 나 거기서 신선들 목소리를 전부 들어보고 올 거에요. 기대만발! 이제껏 땅의 소리를 따라했으니, 이젠 하늘의 소리도 따라해 볼래. 그러면 천지의 소리가 전부 내게서 나오는 거야.

문울은 기지개를 펴며 웃었다. 개운한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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