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재우는 마음 씨
2023 고죠게토 온리전 <백귀야혼식> GE12
⚠️ 타 샘플의 여장 요소, 고죠의 스쳐지나간 모브 여자 친구 언급 및 본편에서 수면 장애에 대한 비전문가의 묘사를 다루고 있는 팬픽션입니다.⚠️
마지막 소재에 관해 미화하려는 의도는 일체 없었으며, 이 점에 관해 민감하신 분들께선 감상을 재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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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시절의 고죠와 게토의 일상물 3편 < 1편의 일부 SAMPLE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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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고죠와 고죠를 배반하지 않은 교주 게토의 일상물 1편 < 전문 SAMPLE 공개
B6 | 벨벳 코팅 | 후기 포함 188p | 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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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PLE 줄거리>
고죠는 곤란했다. 곤란해도 너무 곤란했다.
스구루에게 장난치기 위해 보낸 가짜 러브레터.
그 러브레터 속 가상의 여인에게 스구루가 반한 듯 하다.
더군다나 그에게 있어서 이번이 첫사랑이라는데⋯.
가장 곤란한 건 편지를 받고 기뻐하는 게토를 볼 때마다 싱숭생숭한 기분이 드는 자신이었다.
*로맨스 코미디가 아닙니다. 약 시리어스/어두운 분위기 주의*
잠이 많은 너에게. 오늘은 어떤 꿈을 꿨어?
*
본래 영화라면 자고로 고전이 최고라 생각한다. 흑백 필름으로 점철될 만큼 아주 고전은 아니고, 이게 이렇게나 오래됐다고?! 싶을 정도의 십 이십 년 전 작품이 딱 좋다.
이음새 사이로 거칠게 튀어나온 못을 반질한 구두 굽으로 짓밟는다. 질 나쁜 복도가 거침없는 보폭에 맞춰 신음 소리를 낸다. 기세 좋게 미닫이문을 열어젖힌 고죠의 등장에 학생들도 마룻바닥과 비슷한 앓는 소리를 냈다. 기운을 북돋는 더블 피스를 취해도 돌아오는 호응은 없다. 선생님 울어버린다. 아마도 눈가로 추정되는 위치를 붕대 위로 찍어 누르자 하품 소리가 쩍 울렸다. 입학식 첫날 이후로 쭉 이런 분위기다. 상대하지 않는 게 상책. 옆구리에 끼고 들어온 삼각대와 빔프로젝터가 담임인 그보다 훨씬 환영받았다.
일전에는 판다가 다른 동급생을 위해 총대를 메고 질문을 던져왔다면, 지금은 유타가 그 역할을 대신 수행한다. 제법 안정된 어조로 조곤조곤 물어오는 태도가 전학 첫 날과는 사뭇 다르다. 그새 적응을 마쳤다는 점이 기특하다. 훌륭한 교사는 노력하는 학생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 법. 호의를 가득 안은 그가 거창하게 검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주목을 샀다. 젊은이의 청춘에는 쉬어가는 시간도 중요한 법이지! 두 사물의 쓰임새에 대한 설명은 실로 짧고 명쾌했다.
'말이 좋아 영화 보는 시간이지, 실제로는 서술형 채점 시간이었어.'
이게 벌써 10년도 더 전인가. 과거의 대화를 떠올린 고죠는 제 학생들에게도 비슷한 경험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수업 띵까먹겠다는 말을 거창하게도 하네. 전등에 반사된 불빛이 톡 쏘아붙이는 마키의 안경테에 닿아 반짝인다. 심드렁한 그녀의 눈빛과 대조되는 밝기다. 찬 바람이 쌩하니 불어오는 반응에 고죠는 얌전히 무릎을 굽혔다. 찬 공기는 밀도가 낮아 아래쪽으로 흐른다지만 그에게는 위 공기보다 아래 공기가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교탁 서랍을 열어 여러 잡동사니를 끄집어내자, 서있을 때보다 아늑한 감정이 가슴에 피어오른다.
알록달록한 CD 케이스 사이에서 어느 명작을 보여주는 것이 좋을까 고민을 이어간다. 이것도 좋고, 이것도 좋은데. 일단 다 꺼내놓을까. 우수수 선택지를 늘여놓으면 학생들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푸른 CD 커버 하나를 골랐다. 『내 남자 친구의 결혼식』. 옛저녁에 본 적 있다. 저 배우 라인업은 아니지만. 참치 마요, 연어알젓. 듣자 하니 때마침 토게가 대여점에서 빌려오고 반납을 까먹은 채 교실에 두고 갔던 모양이다. 추천이 모조리 반려된 그는 아랫입술을 삐쭉이다 징그럽다는 욕만 더 얻어먹었다.
속독이 가능한 그에게 영화는 책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느린 오락거리였다. 차라리 책을 읽는 게 훨씬 나을 거야. 싸구려 침대 매트리스에 몸을 기대며 불만을 토로하는 그의 말에 게토는 가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이유를 깨닫고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 너답네. 그 말이 여태껏 들어온 너답다는 말 중 가장 상냥하게 들려왔다. 음습한 비꼼이나 시기, 왜곡된 동경이 아닌 있는 그대로 나를 봐준 듯한 기분. 그래도 유명한 작품이니까 한 번 보는 게 어때? 이어지는 권유에 고죠는 이끌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윤기나게 캐러멜이 코팅된 팝콘을 제쳐두고 흘러가는 영상에 속절없이 집중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처음이라는 것은 다시는 같은 기분으로 그 경험을 겪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상실 없는 처음은 없다.
정작 당시의 게토는 고죠만을 몰랐다. 본인의 생각보다 더 많은 처음을 고죠에게서 가져갔음을 깨닫지 못했다. 알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을 가능성도 있다. 매사에 받은 만큼 배로 돌려주어야 되는 성실이 초래한 무지요, 모순이었다. 잘난 체 하며 자아성찰을 읊어도 마음이 따라주지 않으니 당연히 괴로워질 수 밖에 없다. 그래도 그런 그의 마음이, 고죠는 싫지 않았다. 조금 답답하기는 했지만. 굳이 감정 하나하나에 의미나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어? 스구루, 부드러운 부름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아 질문하기를 관뒀다. 게토가 두리번 거리면 슬쩍 보다 콜라를 건네주고, 고죠가 입을 벌리면 곁눈질로 그를 살피다 팝콘을 넣어주는 가벼운 호흡 사이에 서로를 호명할 노력까지는 필요 없던 셈이다.
그날 본 영화와 같은 이름을 지닌 리메이크작은 원작만큼의 흥미가 돋지 않았다. 남자 주인공이 사실 여자 주인공을 사랑하지만, 여자 주인공을 시험하기 위해 모든 일을 꾸몄다는 내막이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사실 여주가 시한부라서 죽어버리고 만다는 결말에 질려버려서 그럴 수도 있다. 진짜 사랑을 깨달은 남주와 그의 애인, 그 옆에서 유쾌하게 사랑을 응원해 주는 여주와 게이 친구의 춤이 엔딩 스크롤에 없다는 건 상당히 찝찝했다.
"결말이 왜 저래. 호칭이 달링인건 또 뭐고."
상당히 볼멘소리가 나와버렸다. 달링이 뭐 어때서 그러니? 무엇보다 이건 사랑 이야기잖아. 사랑이란 건 원래 다 그래. 또래에 비해 성숙한 점이 있는 게토는 의미 모를 말로 대꾸하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의미냐고! 가끔은 악을 내지르며 요상한 앞머리를 쭉 잡아 뜯고 싶었다. 혹부리 영감의 이야기 원천이 혹인 것처럼 스구루의 짜증 나는 말들은 죄다 저 앞머리에서 나오는 걸지도 몰라. 저 앞머리만 어떻게 처리하면 스구루의 입을 막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런 만행을 실제로 벌이지는 않는다. 몸에 힘을 빼고 침대 위에 엎어진 채 손을 뻗었다. 스구루의 침대는 자신의 침대보다 더 폭신하게 느껴진다. 분명 같은 매트리스일텐데 이상하다. 어떤 섬유유연제를 쓰냐고 물어볼까. 가벼운 상념과 함께 게토의 앞머리를 한 움큼 집으며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의심을 감추지 않으면서 고죠의 손이 닿기 쉽게 숙여오는 무방비함을 놓치고 싶을 리 없다.
한편 고죠가 게토에 대해 아는 건 한참을 늘여놓아도 끝나지 않는다. 사내끼리 징그럽게 뭘 그리 깊이 부대끼냐 욕해도 선택지가 없다. 장기 임무를 나가면 여자인 쇼코는 독방, 남정네인 고죠와 게토는 같은 방. 운이 나쁘면 한 침대에서 자야 했다. 처음에는 웩웩 토하는 시늉을 하며 가위바위보로 한 사람은 침대, 나머지 한 사람은 바닥이나 소파로 피신했지만 그것도 다 한 때뿐. 자고 일어나서 근육통에 시달리는 이의 짜증을 견디는 것보단 서로 한 침대에 구겨지는 게 상대적으로 다음 날 임무에서 합이 좋다는 걸 깨달은 뒤 없어진 다툼이었다.
그러니까, 임무가 끝나면 바로 옆에 있는 상대에게 굳이 메시지를 보내서 알을 낭비하도록 만드는 것은, 이상한 이모티콘으로 도배된 메시지에 사과의 의미로 아끼는 화보의 여자 배우 사진을 첨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인과였다. 아주 당연한 흐름. 당연함에는 왜라는 질문도, 부연 설명도 필요 없다. 마찬가지로 고죠는 게토도 이 일련의 흐름을 '당연히'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게토가 제일 처음 당연함을 벗어난 건 2학년이 되는 초봄이었다. 게토에게는 원래도 감성적인 면이 많았지만, 옛 문호들처럼 계절이나 날씨에 의해 감정 폭이 좌지우지 되는 경향이 심했다. 그런데도 본인은 한사코 쇼코랑 네가 너무 무뚝뚝한 거라며 다른 사람을 걸고 넘어져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특히 봄과 가을이 가장 큰 고비인데 이날의 봄은 고죠의 애간장을 태우다 못해 아주 들볶는 봄이었다.
하나뿐인 친우를 마구 뒤흔든 문제의 봄은 그의 마음을 입욕하기 위해 잔뜩 만들어놓은 거품 마냥 가볍고 몽실거리게 만들었다. 평소처럼 메시지를 보내도 곧장 부재중 내역을 확인하는 대신 다른 곳을 보고있던 것도 이 때문이라 생각한다. 지금의 청춘을 구가하기 바쁘기에 연애에는 관심 없다. 차라리 상대와 어깨를 맞대고 새 기술을 궁리하는 편을 택하는 게 우리에게 어울린다. 게토가 보조감독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다 못해 고죠에게 그녀와 아는 사이냐고 물어볼 때도 이 믿음을 당연하게 여겼기에 순순히 대답한 것이다.
'저런 녀석 알 게 뭐야. 송사리까지 일일이 기억할 필요있어? 아아- 동료를 존중 어쩌구 저쩌구 알겠어, 알겠다고. 하지만 쟤는 진짜 송사리 맞는 걸. 본가에서 몇 번 봐서 알아. 뭐야, 스구루. 혹시 저런 게 타입이야? 눈 진짜 낮네.'
게토는 그 자리에서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성큼성큼 자리를 떠버렸다. 고죠를 대신할 말상대로 보란듯이 보조감독을 택하지 않은 게 그의 마지막 인내였을지 모른다. 화가 난 게토는 수치스러워 하기 보단 상처받은 모습에 가까워 보여서 섣불리 뒤쫓지도 못했다. 허구한 날 거무죽죽한 주령을 꺼내들며 승부를 내자던 싸움꾼과는 거리가 먼 태도였다.
게토의 낯빛만큼 붉은 사과를 허공 위로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던 고죠는 골머리를 앓았다. 육안으로 인해 늘 달고 다니던 두통과는 다른 성가심이다. 예상보다 게토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며칠 째 고죠만 보면 혀를 차고 똥 씹은 표정으로 턱을 괸 채 시간을 때우다 사라진다. 우정보다 사랑을 택한 듯한 친구의 행보에 고죠는 고죠대로 빈정이 상했다. 그래봤자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는 타인인 주제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 홧김에 와삭 새빨간 과육을 베어물자 끈적한 즙이 손목을 타고 흐른다. 소매 안까지 찝찝함이 스며들기 전에 닦아내자. 책상 위 곽티슈에 손을 뻗었으나 거리가 멀었다.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책장에 의자가 부딪혀 가벼운 물건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원체 방 안에 들여놓은 물건이 적은 탓에 책장의 균형을 맞춰줄 만한 중심점이 없어 생긴 불상사였다. 과즙으로 축축한 손을 티슈로 닦아내며 이렇게 된 김에 간만에 방정리나 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떨어진 것들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을 때, 그대로 웃음이 터지지만 않았다면 정말로 대청소를 했으리라. 투명 엘자 파일을 집어들어 내용물을 탈탈 털자 순정 만화에나 나올 법한 분홍 편지지 다발이 손에 들어온다. 지난 발렌타인 시기에 자신이 먹을 초콜릿을 사고 받은 사은품이다. 쇼코라도 줄까 고민하다 그대로 책장에 박아두고 잊어버린 존재가 이렇게나 반가울 줄이야. 이상적인 계획이 고죠의 머릿속에서 방금 맛본 사과만큼이나 붉게 타올랐다.
"그 녀석 편지인데, 관심 있어?"
굳이 주어를 정하지 않아도 지금 상황에서 고죠가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뻔하다. 고죠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은 게토가 그의 손에서 홱 하니 편지를 낚아챘다. '다른 할 말은 없는 거야?' 그럴듯한 지적 대신 봉투에 붙은 스티커가 찢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손톱 끝으로 살살 뜯어낸 하얀 강아지 스티커가 그대로 게토의 책상 끝에 안착했다. 멍청하게 혀를 쭉 내뺀 강아지는 반질거리는 책상이 마음에 들었는지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하게 붙었다.
고죠는 슬슬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려는 게토의 변화를 내려다 보았다. 그 분 이름이 코코로 씨인 거야? 짜증이 섞이지 않은 게토의 대답을 간만에 듣는 기분이다. 요 며칠 간 쭉 냉전 상태였으니 실제로 그럴 지 모른다. 자신도 답장을 써야겠다며 답지 않게 허둥지둥 대다가 엿보지 말라며 지레 성내는 모습까지 모든 게 우스웠다. 정작 고죠는 게토가 책상 서랍 안으로 감춘 편지에 조금도 관심 없었다. 전달하는 도중 좀살맞게 가로채서 엿본 건 아니다. 무엇보다 코코로 씨라니. 그런 앙증맞은 이름이 보조감독의 이름일 리 없지 않은가. 고죠는 보조감독의 성 씨가 고죠라는 점 이외에 그녀 이름에 들어가는 한자 한 획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어중이 떠중이와 스구루의 오작교가 되어줄 마음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다. 고죠의 사토루를 뜻하는 깨달을 오悟에서 나 오吾만을 생략하여 대충 만든 가명 코코로心의 탄생식이 성공하자 고죠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였다.
적당히 착각할 시간을 주었으니 이제 편지의 진짜 발신인을 밝힐 차례다. 그렇게 잘난 사랑이면서 진짜 상대가 보낸 건지 아닌지 분간도 못하며 절절하게 구는 게 말이 되느냐. 신명나게 놀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들뜬 낯의 게토의 시선이 얽혀오는 순간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오히려 계획의 종지부에 가까워오면서 유치한 충동이 서서히 가라앉아 곤란함이 가중됐다. 멈춰있던 사고 또한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저 얼굴을 만들어낸 사람이 자신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 멍청히 두 눈만 깜빡이기를 잠시. 수십 초의 공백을 만들어버린 듯 해 다급히 수습하려고 보면 실제로는 고작 몇 초에 불과한 시간이 흘렀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눈길을 돌린 벽시계 아래로 빛이 쏟아진다. 잘게 부서지는 빛조각을 그대로 되받아치는 유리가 눈부시다. 빛의 통로로 변모한 창문이 기꺼이 산책로가 되어 봄바람을 실내로 이끌었다. 눈치도 없이 침입한 따스함이 코 끝을 간질인다. 분명 곧 화를 내며 달려들 게토의 주먹에 대비해 무하한을 펼쳐두고 있을 터인데 콧속까지 시큰하게 아려왔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아름다워 보인다는 말. 이상향에 환상을 가진 게토나 좋아할 이야기다. 그 생각에 대한 견해는 지금도 여전하면서. 끝내 종지부 찍기를 망설이는 자신이 있다. 아무래도 좋으려나. 불쾌함과 당혹스러움 사이에 피어오른 달콤함이 판단의 나태를 부른다. 이 모든 부조화 속에서 확실한 것은 단 한 가지. 꽃가루처럼 가벼운 장난에 꺾이기엔 사랑에 빠진 게토의 미소가 너무 아깝다는 점이다.
축약하자면, 고죠는 변덕스러운 스스로의 마음을 떨쳐내지 못했다. 조금만 더 지켜볼까.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나중에 말해도 분명 괜찮을 거야. 여름방학 숙제를 미루는 초등학생처럼 적당한 때를 잡지 못한 고죠는 그 후로도 계속 코코로가 되어 게토에게 편지를 보냈다.
단순히 안부를 전하던 편지의 형태는 어느샌가 왜곡되어 갔다. 게토의 책상 끄트머리 네 곳이 모두 아기자기한 스티커로 도배되어 더이상 붙일만한 곳이 없어졌을 때, 빼도박도 못하게 러브레터가 되어버렸다. 이 자식 인기도 많으면서 다른 여자 만날 생각은 없는 거야? 물론 이대로 코코로를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간다면 당장 게토의 목을 조르러 가겠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았다. 게토가 코코로라고 착각하고 있는 보조감독이 교토에 머물고 있기 때문일까. 고죠는 대담하게 사칭을 이어갔지만 한편으로는 진짜 정체를 밝히면 게토가 절교를 선언할까 걱정이 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고죠에게 포기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별 의미 없는 날씨 이야기에 농담이 아닌 건강 걱정으로 돌아오는 상냥함도, 낯간지러운 플러팅을 해보려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영 아니었는지 박박 문질러 지워진 지우개 자국에 묻어난 망설임도 게토의 친구 위치에서는 볼 수 없는 점들이다. 게토의 전부를 알고 싶다는 집착은 없지만 이미 알아버린 사실을 무시하기란 어렵다. 당분도 아닌 타인과의 교류에 중독될 수 있다니. 이런 건 알고 싶지 않았는데. 심경의 변화가 이루어진 데에는 고죠가 직접 코코로의 편지를 전부 쓰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타격이 컸다. 아무리 그의 작문 실력이 좋고, 여러 연애 소설을 참고해 간질간질한 문장들을 적어내렸다 해도 필자의 마음이 담기기 마련이다. 결국 고죠는 스스로가 꾸민 가짜 관계에 길들여진 바보가 게토만이 아님을 내심 인정했다.
"매번 피곤하지 않아?"
코코로의 주소가 고죠 가문 본가인 탓에 자못 민망한 얼굴을 한 게토가 사과를 건넸다. 꽃가루가 허파까지 파고든 건지 가슴이 콕콕 쑤셨다.
"전서구도 하얗고, 내 머리도 하얘서 어쩐지 닮은 것 같다고 웃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편지 이야기만 나오면 시치미 떼느라 뚱한 고죠의 대답에 게토는 입을 꾹 다물다, "우리 이따 뭐 먹으러 갈래? 쇼코 줄 고로케는 포장하면 되니까 둘이서 먹고 오자. 응?" 고죠를 살살 달랬다. 어기적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을 무렵 덧붙인 마지막 한마디만 아니었다면 고죠의 마음도 이렇게까지 무겁지 않았을 것이다.
"사토루도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을텐데 말이야. 우리 코코로 씨처럼 말이야."
뒤따라 오는 게토의 눈빛은 여지 없이 진심을 담고 있어서 고죠는 다시 뒤돌아 보지 못했다. 자칫 간파될 것 같은 시선이 무거워 가까이 다가갈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허구한 날 제 육안을 피해 고개 돌리는 졸개들의 입장이 된 기분이라 괜히 멀쩡한 선글라스를 다시 고쳐 썼다.
그 날을 기점으로 고죠는 코코로의 편지를 쓰는 빈도를 줄였다. 방향을 잃은 채 쏟아지는 게토의 사랑에 겁을 먹었다기 보단 그저 부산스러운 주변에 의해 바빠져 신경을 분산시킬 여유가 없었다. 편지란 건 바쁜 생활에 의해 쉽게 밀려나는 존재였다. 다행히 서서히 줄어가는 편지에도 게토는 개의치 않아 보였다. 손바닥을 허벅지에 슥슥 비비며 기지개를 편 그는 그저 웃었다. 바쁘시면 어쩔 수 없지. 한 손에는 다 마신 콜라 캔을, 나머지 한 손으로는 고죠의 어깨를 턱 도닥이며 말한 순간을 뚜렷이 기억한다. 겨울이 다가와서 그런지 게토는 긴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소매 끝에서 난 자연스러운 세제 냄새가 조바심을 눌렀다.
의도하지 않게 다음 편지는 이듬해 여름에나 쓰이게 되는 수준에 다다랐다. 게토가 답지 않게 더위를 먹어 비실거리는 모습이 신경쓰였지만 고죠가 직접 걱정하는 것보단 코코로의 편지가 좀 더 솔직한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간만에 꺼낸 편지지였다.
숙소에 도착하자 마자 교복을 벗지도 않은 채 책상 앞으로 달려가 향수와 스티커, 편지지를 정렬시킨다. 허공에 가볍게 향수를 뿌리자 은은한 꽃향기와 이름 모를 과일들의 상큼함이 방 안을 채워갔다. 완벽하고 이상적인 러브레터를 써내기 위해 작년에 구매한 북퍼품의 건재한 수명이 고죠의 의욕을 높인다. 게토 스구루 씨에게, 상단에 한자 석자를 적는 것만으로 묘하게 가슴이 설레고, 마음이 벅차오는 건 이제 익숙하다.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왼손이 오른손과는 전혀 다른 유려한 필체로 코코로를 대변하여 안부를 전하고 있는데, 문득 무언가를 부술 듯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손에 쥔 볼펜을 내려놓고 귀를 기울이자 소음의 정체가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열리지 않는 문을 억지로 당겼다 밀기를 반복하는 괴음이다. 고개를 돌려 제 방 문을 보면 문고리는 미동조차 없다. 소리도 비교적 가깝지는 않았으니 진원지는 바깥이다. 고전 안에서 미허가 주령이 돌아다닐리는 없으니 사람의 소행임이 더욱 유력하다. 그럼 차라리 빨리 범인을 찾아내 조용히 시키는 편이 낫지 않을까. 오붓한 작문 시간을 보장받고 싶었던 고죠는 컴컴한 복도로 조명 하나 없이 나섰다.
범인을 찾기 위해 질질 끌 것도 없이 세차게 흔들리는 옆방 문을 보며 고죠는 발걸음 멈췄다. 고죠의 옆방 주인은 게토다. 둘만 남은 후배들이 소음을 못이기고 나오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게토의 방 문고리는 일정한 박자를 갖추어 돌아가고 있었다.
"여~어. 스구루, 안에 무슨 일 있어? 딱 봐도 있어 보이니까 나 들어간다~."
게토와 요비스테를 마치고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을 때 교환한 스페어 키를 방에서 가지고 와, 열쇠 구멍에 끼워맞춘다. 문이 계속 흔들리는 탓에 좀처럼 한 번에 들어가지 않았다. 인내를 가지고 잠금을 풀자 활짝 열 것도 없이 익숙한 인영이 건너편을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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