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색채上

고죠게토 학원물AU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세계를 사랑한다는 것.

주술없는 현대. 미술하는 고죠 사토루, 음악하는 게토 스구루 라는 보고 싶은 것만 날조한 글

사랑하는 지인 P를 위해 이 글을 헌정합니다.


을 가진 것들은 지나간 자리에 흔적을 남긴다.

게토 스구루, 10대의 여름. 무채색의 소년은 그 불편한 진리를 깨달았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어느 공익 광고의 유행한 카피처럼, 인간은 생각보다 많은 공간에 자신의 흔적을 알게 모르게 남기곤 했다. 게토에겐 그런 흔적들을 '지저분하다'고 칭하는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는 유난스럽지 않을 만큼만 결벽적이었고, 그가 사용한 공간에 제가 얼마나 머물렀는지 아무도 알 수 없을 만큼 조용히 영역을 정돈하고 자리를 떠나곤 했다. 그러니 게토가 타자의 영역에 발자취를 남기는 것에 불쾌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선지 위를 방황하는 발자국이 달린다.

3살에 현을 누르면 영재, 8살에 곡을 완곡하면 수재라 불린다. 그러면 13살은? 음악을 전공으로 배우기엔 늦은 나이. 그애가 15살에 지역 콩쿠르 수상을 했다면 어떨까? 고작 바이올린을 배운지 1년 밖에 안 되었다고? 일본이 경악하고 음악계가 놀란, 남들보다 뒤쳐진 나이에 세상에 등장한 비운의 천재.

그것이 게토 스구루였다.

길게 뻗은 손가락과 나이에 맞지 않는 성숙함. 긴 시간의 연주를 견뎌줄 건강과 악보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깊은 심계. 음악을 하는 이들은 게토가 이제라도 발굴될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그의 후견인이자 스승인 야가 교수의 안목을 칭찬했고, 때마침 시기가 적절해 이렇다 할 지원도 없는 일반고에서 소수의 영재출신만 모아놓고 가르친다는 주술예고로의 전학까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모두가 그의 앞길이 찬란할 것이라 말했다. 그는 재능이 있고, 이 뛰어난 재능의 원석이 많은 명사들의 손에서 찬연한 보석이 될 거라고. 그러나 게토의 앞에 놓여진 건 무수한 백지, 백지. 그 위를 밟는 제 발자국이 오염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영재들을 모아놓은 학교 안에서도 경쟁이란 이루어진다. 소수만 가르치는 학교 답게 같은 학년엔 음악을 하는 학생이 작곡 전공 한명 뿐이었으나, 위 아래로 피아노나 지휘, 바이올린을 배우는 학생들은 제법 있었다. 음악과 아이들은 전공생들끼리 뭉쳐다니곤 했는데, 게토는 전학온지 일주일만에 그들 사이에서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곧잘 게토의 후견인이 게토를 발견한 이야기부터 클래식 잡지의 인터뷰에서 야가 교수가 언급한 '영감을 준 어린 천재'에 대한 담론 따위를 모두 꿰고 있었다. 그들은 저들이 게토 스구루란 존재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번 센다이 콩쿨에 3등한 사람 우리 선배라던데."

"1등은?"

"프랑스 유학파. 저번 시벨리우스 2등한-"

"작곡과에서 이번 과제평가 연주자 구하던데 피아노는..."

"-니까 파가니니를 연습한다잖아. 난 차라리 다시,"

"얘들아."

식판을 내려둔 음악과 학생들의 시선이 게토에게 향한다. 전학온지 2달, 게토는 쉽게 아이들 무리에 어울렸으나 자신이 조금 겉돈다고 생각했다. 실은 그 애들 속에 물들고 싶지 않은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착하지만 게토는 종종 자신이 곱게 키운 난초들 사이의 야생화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나 속이 별로 안 좋아서. 먼저 연습실 가볼게."

"벌써? 오늘 급식 맛있는데."

"잘가 게토. 이따 연습실에서 봐~"

"항상 가던 연습실이지? "

"저번에 빌려주기로 한 음반 내 사물함에서 가져가!"

주술예고의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부터 예체능쪽으로 명망이 있거나, 어릴 때부터 전문 영재원을 다니던 아이들이다. 가끔 배려가 모자라 예민하고 평가 시기에 불안해하는 기질이 있어도 대체로 얌전한 구석이 있었다. 중학생 때 심심찮게 주먹다짐 하며 자란 게토에 비하면야 한주먹거리, 아니. 바이올리니스트가 주먹질을 하면 거기서부터 경기를 일으킬 아이들이다.

출력해온 악보를 펼치고, 친구에게 빌린 음반을 플레이어에 넣고 재생시킨다. 노력에는 시간이 필요한데,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작곡과의 친구가 빌려준 음반은 미국의 베토벤 스페셜리스트가 녹음한 음반이라는데, 솔직히 오디오가 좋아서 좋게 들리는 건지 연주자가 기깔난 건지 모르겠다. 악보를 훑고, 눈으로 음을 쫓았다. 제대로 읽힌 건 템포 마킹뿐인데 벌써 막막하다. 한 차례 듣고 나서는 소리를 따라 바이올린을 들고 자세를 잡는다. 박자를 따라 손을 움직이며 눈은 쉼없이 악보를 쫓는다. 충분히 느리게는 얼마나 느린 거지? 표정을 가지고 느려지라는게 무슨 소리냐고. 의문에 짜증이 섞이는 순간, 바이올린이 비명을 지르며 불쾌감을 불협화음으로 뱉어낸다. 실수와 함께 손이 굳는다.

실수에 멈추지 말 것. 실수해도 연주를 이어갈 것. 모든 연주자에게 요구되는 당연한 진실이 게토에게도 당연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마치 금기를 밟은 것처럼 주술예고의 문 턱을 넘은 뒤의 게토는 그러지 못했다. 음이 이탈하면 그를 향한 시선을 과하게 의식한다. 웅성거림 속에 제 이름이 들려올까 두려워진다. 게토 스구루는 지독한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손가락이 어긋난다. 활을 당기는 손에 힘이 더해진다. 미세하게 이탈한 음정이 귀에 닿기도 전에 손가락이 멈췄다. 박자가 어긋난 것을 진동하는 현의 울림으로 먼저 깨닫는다. 귀는 둔감한 주제에 손은 까탈스럽다. 음반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틀린 구간을 반복해서 듣고 다시 바이올린을 쥔다. 체념을 삼키고 한 마디의 악보를 반복한다. 집요하게, 절박하게, 그러나 지루하게.

활을 긋는다. 음을 듣는다. 악보를 읽는다. 다시 현을 누른다. 음을 듣는다. 악보를 읽는다. 다시.

지독한 도돌이표. 박자를 놓친 아다지오. 조급함만 담긴 아첼레란도. 길을 잃은 아드 리비툼. 게토는 손을 내렸다. 수천수백을 반복해도 지난하리만큼 평범한 소리. 고작 이것으론 천재의 자리를 증명할 수 없다. 새하얀 종이, 새하얀 악보, 새까만 점 하나. 음악은 눈이 없어도 아름다운 것이라 했건만, 어째서 게토에겐 오선지가 끝을 모를 레일처럼 느껴지는 걸까.

"왜 거기만 계속 하는 거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손을 삐끗했다. 활을 쥔 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가, 현이 불쾌한 소리를 길게 이었다. 게토는 소리가 들린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제법 가까웠다. 연습실 창 밖이었다. 창문 위쪽에 새하얀 머리가 둥둥 떠있었다.

“——!!!”

게토는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분명 닫아뒀던 창문은 어째서인지 열려있고, 창 밖에 흰 머리를 늘어트린 창백한 인상의 소년이 머리만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늦은 때였다면 영락없이 귀신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바로크 음악가를 너무 많이 봐서 환각인 줄 알았거나! 하지만 다행히, 아주 다행이도 하늘은 아직 맑고 연습실은 해가 잘 드는 방향이었다. 덕분에 소년의 얼굴은 꽤 잘 보였고, 그가 왜 거꾸로있는지 몰라도 살아있는 사람이란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게토는 성큼 창가로 다가가 가장 먼저 창문부터 닫았다. 드르륵, 거칠게 닫힌 창문에 건너편의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위에서 내려온 손이 도로 창을 열었다. 유령이면 창문을 여는게 아니라 통과했겠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했다. 게토가 다시 창을 닫으려 하니 아예 창문을 넘어 연습실 안으로 들어와버렸다. 소년은 두 다리가 멀쩡히 달려 있었다. 정말 영문을 모르겠지만 이 소년은 살아있는 사람이 맞단 의미다. 왜 거꾸로 있는진 아직도 모르겠지만.

“손님을 앞에 두고 창을 닫네?”

“창으로 오는 손님이 어디 있어?

게토의 정당한 지적에도 소년은 뻔뻔스레 창을 넘어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실내에 어울리지도 않게 선글라스를 끼고는, 음반 커버를 훑으며 이 사람보단 빈필이 났다느니 따위의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곤 제 방이라도 된 듯 의자에 앉아선 게토를 향해 턱짓하는게 아닌가. 게토는 그 물흐르듯 익숙한 태도에 혹시 제가 모르는 음악과 학생이 또 있었나 의심해봐야했다.

“뭐 해? 연주 안 해? 들어준다니까?”

“아직 악보를 못 외웠어.”

“감안해줄게. 악보 저기 있네. 보고 해.”

진짜 내가 모르는 음악과 학생인가? 게토는 잠시 음악과 정원이 몇 명이었는지 기억해내려 애썼다. 어쩌면 만난 적 없는 선배나 후배일지도 모르니까. 아닌가? 혹시 강사? 아니지. 게토 못지않게 장신의 남자였지만 앳된 얼굴과 쭉 뻗은 기럭지를 감싼 바지는 명백히 교복 바지의 것이다. 정작 상의는 뭘 하다 왔는지 하얀 반팔티에 뭐가 잔뜩 묻어 얼룩덜룩한 상태였는데, 잉크가 흩뿌려진 것처럼 보여 실수로 묻은 건지 게토가 모르는 새로운 패션 트랜드인지 의문스럽게 했다.

“안 해?”

소년을 훑고 있으니 그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며 게토의 주의를 끌었다. 저도 모르게 기세에 밀린 게토는 바이올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멈춘 구간을 다시 연주하는데, 문득 손가락을 움직이는 와중에 ‘아니, 근데 내가 왜 저녀석의 말을 듣는거지?’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활을 긋는 게토의 손에 약간의 짜증이 담기기 시작했다.

“손이 놀려고 하네?”

“노는 걸로 보여? 연습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넌 뭐야?”

“너 베토벤 안 들어봤어? 봄 소나타인데 음색은 아주 여름인데~”

“같은 학생한테 지적받기 싫거든? 너도 음악과냐?”

“허? 날 몰라? 베토벤도 몰라~ 이 고죠님도 못 알아봐~ 아는게 뭐야?”

“베토벤은 알거든!”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면서도, 역시 고죠가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사실 베토벤도 뭐, 제대로 안다고 할 사람은 아니긴 하지. 솔직한 말로 게토는 이게 봄 소나타란 이름인 줄도 지금 처음 알았다. 바이올린 소나타 OP.24라고만 적혀있던데, 그게 제목이 아니었다고? 악보에 안 적혀있었잖아. 물론 음악과 바이올린 전공으로 할 변명은 아니었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떠드는 사이에 착실히 움직인 손은 반복해서 연습하던 구간을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 슬슬 모르는 구간에 진입해 악보에 시선을 집중하니, 고죠가 순순히 악보를 넘겨주었다.

“베토벤도 모르면서 왜 과제곡을 베토벤으로 고른 거야?”

시비걸러 온 건가 이자식? 게토는 이번엔 입을 다물었다. 왜 골랐긴, 몰라서 골랐다 새끼야. 평가곡 선택지가 전부 작곡가만 적혀있길래 그나마 아는 사람 골랐는데 모르는 곡이 나왔다. 베토벤의 이름이야 유명해도 월광이나 엘리제만 알았지 바장조니 내림마장조니 이런 건 구분도 못 한다. 바이올린 소나타만 10곡이라는데 게토가 그 중에 이름을 아는 건 한 손에 꼽았다. 게토는 소리없이 경악했다. 2달간 영재교육을 헛으로 받은게 아닌지 악보를 이해할 순 있었지만 시간이 빠듯했다. 초견이 다인 3악장에 진입하자 연주는 점차 비틀거렸다. 게토는 습관처럼 손을 멈추려 했으나, 고죠가 빤히 지켜보고 있었기에 그러지 못했다. 고작해야 또래 소년일 뿐인데 바보취급 당하기 싫단 생각 탓인지, 악으로 깡으로 연주를 이어갔다. 빌어먹을 베토벤, 후대를 생각해 작곡하라고!

“교사의 해석을 부정하고 내가 옳다고 주장하고 싶은 타입? 아니면 현대음악에 심취한 타입?”

“전혀, 어느 쪽도 아니야.”

경력이 짧은 게토의 필연적 약점은 기교나 연습량의 문제보다도, 아는 곡이 압도적으로 적다는 것이다. 매일 죽어라 연습해도 어릴 때부터 연습하고 곡을 들어온 아이들을 따라가려면 멀었다. 게토의 어머니도 태교로 클래식 정도야 들었겠지만, 한자보다 악보를 먼저 읽던 앨리트 출신들은 들어보고 기억하는 곡의 수가 남달랐다. 후견인은 게토를 천재라고 말했지만, 게토 스구르는 안다. 천재는 보잘것 없다. 진짜 영재들 사이에서 천재로 살아남으려면 그 애들의 세배로 연습해야 한다. 그래서 주술예고에 전학온 이후로 수업시간을 제외하면 줄곧 연습실에 틀어박혀 바이올린을 켰다. 게토는 알고있다. 시간이야말로 가장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재화란 것을. 하지만 고죠는 어떤가? 게토가 연습에 매달릴 시간에 한가롭게 남의 연습실에 처들어와 음악감상을 하고 지적이나 하고 있지 않나? 누군 태어날 때부터 오케스트라를 BGM으로 깔린 저택에서 고상하게 손에 송진도 안 묻히고 자라셨을 텐데, 제가 겪는 고민과 걱정따윈 이해도 못할테다. 그렇게 생각하니 반항심에 김이 빠졌다.

제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하니 트집잡고 싶은 거겠지. 잘난 척도 진짜 못난 놈 앞에서 하면 잘난게 되니, 재수없는 도련님에게 잘못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선배들 중 국제 콩쿠르를 준비중인 특별반이 있다던데, 거기서 온 녀석인가? 경력 1년짜리 굴러먹다 온 돌이 천재라고 주변에서 떠받들어주니 기선제압이라도 하러 왔나보지.

“그럼 타고 났다는 소린데. 재능이네.”

하지만 고죠의 입에서 나온건 전혀 예상과 다른 말이었다. 익숙해졌나 싶으면 예상을 깨는 전개가 이어지니 베토벤이 따로 없다. 고죠는 혼자 턱을 괴고 게토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더니, 말도 없이 게토의 바이올린을 바이올린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가자, 너로 정했다!”

“야!”

고죠가 바이올린을 등에 매고 튀었다. 어디로? 창 밖으로!

황급히 창 밖으로 몸을 내밀었지만, 고죠는 인간인지 원숭이의 환생인지 분간 안 될 만큼 날랜 몸짓으로 창 밖의 좁은 턱을 밟고 높은 나무 가지로 뛰어 올랐다. 마치 그네를 타듯 몸을 유연하게 흔들고는 반동을 이용해 위층의 창틀에 매달려 윗층 교실로 쏙 들어가버렸다. 진짜 또라이 아니야? 게토의 연습실은 무려 4층에 있었다!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거 비싼 거야 미친놈아-!”

비명처럼 터진 본심이 게토의 잇새로 튀어나왔다. 돌아온 것은 대답 대신 창 밖으로 내밀어진 손, V자를 그린 손가락이 한번 주먹을 쥐었다 펴니 검지와 중지 사이에 유키치 한장이 나타났다. 지폐가 팔랑, 떨어진다. 나뭇잎처럼 사뿐히 날아든 만엔짜리 지폐 한 장은 4층 창턱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게토의 앞에 내려앉았다. 빳빳한 지폐는 구김하나 없이 깨끗하고, 새 돈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 모든게 게토를 아주 빡치게 만들었다. 유키치의 얼굴이 게토의 손에서 와그작 구겨졌다.

게토는 단숨에 연습실을 박차고 나가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을 세칸씩 뛰어 오르면서 5층에 뭐가 있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음악과가 사용하는 연습실은 총 4층까지라는 사실도, 그동안 5층에 드나드는 사람을 본 적 없단 사실도 떠오르지 않았다. 게토의 바이올린은 야가 교수가 개인적으로 소장하던 물건을 빌려준 것이다. 바이올린에 흠집 하나라도 났으면 책임지고 은사인 야가 교수를 대신해서 저 놈의 대가리를 깨주마, 그렇게 생각하며 거칠게 문을 열었다.

바이올린은 그곳에 없었다.

문 너머에서 게토를 기다리는 것은 공간을 가득 채운 총천연색 캔버스의 향연, 세상의 모든 색을 한 곳에 쏟아 부어 가득 채운 거대한 눈동자였다. 텅 빈 교실을 빼곡히 채운 끝없는 색, 색, 색의 세계. 마치 퍼즐처럼 나열된 다채로운 색상의 크고 작은 캔버스는 모두 각자의 세계를 비추는 눈동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 시선들은 모두 살아있는 것처럼 선명하고 생생한 색감을 가져,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눈을 마주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오색찬란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의 찬연한 색의 폭포, 그 중앙을 차지한 것은 벽의 절반을 차지하고 세워진 아주 거대한 눈동자였다. 홍채의 결 하나 하나가 전부 다른 색으로 칠해져 마치 광채를 발하는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 세상에 이토록 많은 색이 존재하는 것이 경이롭고 그 수많은 색들을 한 순간에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마저 느껴지는 폭력적인 미색의 공간. 게토는 언어를 상실하고 오직 시각만으로 존재의 떨림을 느꼈다.

“어때.”

이 공간의 주인이 게토의 어깨에 툭 팔을 걸쳤다. 고죠의 손엔 바이올린 케이스가 달랑거리며 걸려 있었지만, 바이올린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 고죠가 고개를 기울였다. 새하얀 캔버스를 닮은 머리카락이 시야의 일부를 가리고, 선글라스 아래의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 이 눈이구나. 게토는 이 공간을 채운 그림들의 정체가 자화상임을 깨달았다.

“내 영역에 발을 들인 감상이?”

자신의 세계世界를 자신의 시계視界 안에 담아 그리는 화가, 고죠 사토루와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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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색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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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6월의 하양에게

고죠 사토루. 미술과 2학년, 회화 전공에 주 특기는 서양화. 이름만 대면 알만한 박물관과 갤러리를 소유한 고죠 가문의 독자로 무려 9살에 첫 전시회를 열어 데뷔한 미술계의 어린 신성. 단점이 있다면 자화상을 너무 많이 그린다는 건데, 그 조차 슬슬 작가의 아이덴티티로 취급되며 어린 학생이 아닌 한 명의 예술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고죠 사토루의 작품은 특별하다. 어떻게 그려야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지 예술의 신이 그에게만 답을 가르쳐줬다는 말도 있었다. 현실에 있는 것을 현실에 없는 색으로 칠하는 색채의 지배자, 고죠 사토루. 현실에 뻔하게 늘어선 당연한 것이 고죠 사토루의 눈에 담기면 신선하고 생생한 색을 품고 재탄생했다. 보는 순간 감탄하고 경애할 수 밖에 없는 찬란, 존재 자체의 감동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움이 그의 그림에 있었다. 고죠 사토루가 14살에 발표해 지금까지도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대형 작품 ‘파랑’을 본 미술계의 거장은 말했다. ‘세상을 가장 아름답게 보고 싶다면 고죠의 작품을 보라. 나는 단 하루라도 고죠 사토루의 눈으로 보는 세계를 보고 싶다.’고.

그만큼 색을 보는 감각과 구상력이 뛰어난 천재로 불리는 고죠 사토루는 다작으로도 꽤 유명했다. 작품의 발표 주기는 들쑥날쑥하지만 꾸준히 신작을 발표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었는데. 지난 봄, 돌연 충격적인 선언을 했다.

‘더 안 그릴래. 그리고 싶은게 없어.’

미술계가 충격에 빠진건 당연했다. 슬럼프니 청소년기의 방황이니 말이 많았으나 당사자는 별다른 해명이 없이 잠적. 아니, 사실 멀쩡하게 다니던 주술예고에 꾸준히 출석은 하고 있었으니 잠적은 아니었지만, 그림을 정말 그만둘 셈인지 손도 대지 않았다. 결국 애가 탄 건 되려 다른 사람들이었으나, 아무리 애걸한들 들은 척도 하지 않은 고죠는 아예 출석만 하고 수업을 빠지며 도망다니기 시작했다. 결국 주술예고의 이사회에서 말하길, ‘원하는 만큼 쉬어도 좋으니 자퇴는 하지 말 것.’ 그것만으로도 고죠 사토루란 어린 천재의 위상이 어디에 있는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고죠 사토루의 자기소개를 빙자한 자화자찬을 듣고 있던 게토가 말했다. 벌써 일주일째다. 연습실만 가면 고죠가 나타나 방해를 하는게. 미술계에서 유명하고 자시고 게토는 문화생활과 거리가 있는 가정에서 자랐다. 게토는 고죠를 몰랐고, 고죠가 작업했다는 유명한 가수의 앨범커버아트를 보고나서야 이건 본 적 있다, 정도의 대답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게토에게 중요한 건 고죠가 연습을 방해한다는 사실이다. 연습실에 오면 바이올린이나 악보를 훔쳐가 5층까지 쫓아오게 만들고, 방음도 제대로 안 되는 5층에서 연주를 하라고 생떼를 부린다. 어차피 피아노도 아니고 바이올린은 어디서 켜든 상관없지 않냐면서. 고죠의 존재 자체가 방해라고 해봤자 들은 척도 안 했다. 벌써 사흘째였다. 슬슬 귀찮음보단 시간이 없다는 초조함이 커져갔다. 하다못해 이유라도 들어보자고, 고죠의 의자를 빼앗아 자리를 차지하고 물었다. 그랬건만 대뜸 자기 자랑이라니, 어쩌라고? 그래서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리고 싶은게 없단 말이야. 영~ 마음에 드는 것도 없고~ 신선한 것도 없고~”

“내 알바냐?”

“그렇다고 대~충 아무거나 그리자니 이 고죠 사토루님의 시간이 아깝잖아?”

“지금 내 시간은 안 아깝냐?”

“어차피 영감들이 뭐라고 떠들든 질린 건 질린거니까~”

“내 말도 안 듣고 있군.”

“땡땡이나 치다 왔는데, 4층에 못 보던게 보이더란 말이지?”

게토의 입장에선, 고죠야 말로 못보던 것이 갑자기 나타난 격이었다. 어쩐지 3층과 4층이 모두 개인연습실인데 다들 3층만 사용하고 4층을 쓰는 사람이 없더라. 다른 학생들은 5층에 고죠 사토루가 있단 사실을 알고 있던게 분명했다. 음악과의 학생 수가 적어 그런 줄 알았지! 게토만 다른 학생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4층 구석까지 올라왔다가 이 미친놈에게 걸린게 분명했다.

“그래서 네 연주를 며칠 봤는데.”

5층은 본래 무슨 용도였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층의 절반이 고죠 사토루의 화랑으로 쓰고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고죠 사토루가 작품활동을 하기 위한 재료나 습작을 보관하는 창고였으니 층 전체가 고죠의 전용이나 다름 없었다. 게토가 쓰는 연습실은 복도 끝에 있었으니, 5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며 소리를 들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방음이 어느정도 되어 있어도 완벽히 차단해주는 설비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대체 왜 저놈의 흥미를 끌었단 말인가. 어차피 평소에도 5층까지 오가며 음악과의 연주는 지겹게 들었을텐데. 심지어 초면에 대놓고 별로라고 꼽줘놓고? 미친놈인가?

“너, 천재라며?”

고죠를 어떻게 따돌릴까, 생각하는 사이 고죠가 말했다. 던져진 말은 큰 의도가 없는 것처럼 가벼웠으나, 게토는 숨이 턱 막혔다.

“생각해보니 이몸의 천재성에 대해서는 그린 적이 없더라고? 그려야할게 보였으니 구현하지 않는 건 화가의 자존심이 용납 안 하지. 그러니까 협조해.”

“전혀 이해가 안되는 흐름이거든?”

“머리가 나쁘구나 스구루군.”

“넌 어휘가 나쁘니 피차일반이지.”

“요약해줄게, 너도 천재고? 나도 천재지. 그럼 천재의 그림은 천재의 음악을 봐야 한다 이말이지.”

“나 사실 천재 아니야.”

“괜찮아. 이몸에 비하면 다른 녀석들의 재능이야 보잘것 없는게 당연해.”

“진짜 미친놈인가.”

고죠 사토루는 아주 제대로 미친놈이었다. 이런게 천재라면 천재 타이틀 반납해야지. 게토는 고죠의 손에 들려있는 제 악보집을 응시했다. 고죠는 게토와 대화하면서 오일 파스텔을 가지고 놀고 있었는데, 악보가 들어있는 투명케이스에 아무렇게나 낙서하곤 고죠 사토루의 사인을 그려넣었다. 저거 지워지나. 게토는 과제평가까지 남은 시간을 떠올렸다.

“왜 나야?”

약간의 짜증이 담긴, 고요한 질문이 떨어졌다. 주술예고에는 게토보다 연주를 잘 하는 아이도, 못하는 아이도 있다. 바이올린이 필요하다면 바이올린 전공인 후배를 소개해줄 수도 있다.

“네가 가장 ‘원색’에 가까운 소리를 내. 난 그런 정직한 색은 별로지만, 색을 알아야 어디에 칠할지 알 수 있는 법이잖아?”

게토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기도 했고, 그와 비슷한 말을 스승인 야가 교수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네 음색은 아주 정직하다, 지금은 연마되지 않았지만 타고난 것은 재능이니 제대로 배워보지 않겠냐고. 게토 본인도 모르는 재능을 먼저 알아봐준 후견인에게 묻고 싶었다. 자신의 재능이란 천재들만 알아볼 수 있어서 제가 천재로 불리게 된 것이냐고. 의심이나 슬럼프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문득 생각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는게 천재의 안목이라면, 고죠를 지켜보며 자신도 재능의 영역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좋아, 네 제안을 받아들일게. 하지만 조건이 있어. 내 연습을 방해하면 안 돼.”

“방해한 적 없는데?”

“그런 녀석이 음악과 장학생한테 베토벤을 모르냐고 시비를 거냐?”

“베토벤을 베토벤스럽지 않은 색으로 연주하는데 그럼 뭐라고 해?”

고죠는 말을 썩 이해하기 쉽게 하지 않았다. 그 또한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어깨를 으쓱이곤, 물품보관함에서 박스 하나를 끌고 나왔다. 뚜껑이 덮인 상자는 고풍스러운 가죽으로 덮은 트렁크 가방처럼 생겼는데, 뚜껑을 여니 안에 턴테이블이 튀어나왔다. 고죠는 익숙하게 상자 아래쪽에서 LP를 여러장 꺼내더니, 빈티지한 흑백 사진이 인쇄된 음반을 꺼내 플래터에 올렸다.

“왜 미술실에 턴테이블이 있는 거야? 아니, 그보다 여길 미술실이라고 불러도 되나?”

“그냥 작업실이라고 부르는데. 내 작업실엔 원래 악기나 음반을 둬. 그러니 음악연습실 위에 작업실을 내준 거지.”

재생되는 연주는 음질이 깨끗하고 듣기 좋았다. 고죠는 음반을 틀어놓은 채 쌓아둔 캔버스들 사이로 들어가더니, 손바닥보다 조금 큰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가져왔다. 그리곤 자기가 가지고 놀던 오일 파스텔을 손을 으깨 스케치북에 치덕치덕 칠했다.

“봐, 이게 맨날 연습하던 네 연주고.”

스케치북은 찌꺼기가 남은 보라색과 초록색이 섞인채 칠해져 있었다. 고죠는 다음 장을 넘겨 색연필로 노란색을 칠하고 연두색 오일 파스텔로 죽죽 선을 그었다. 고죠는 노란색과 초록색만 꺼내 썼는데, 비슷한 색으로 보이는데도 여러가지 종류가 다른 초록색이 나뭇결처럼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었다. 그림보단 낙서에 가까운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밝다는 느낌이 있었다.

“이게 보통 연주되는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거든.”

유감스럽게도 이해가 되는 비유는 아니었다. 게토는 그걸 이해해보려고 잠시간 노력을 해봤으나.

“이게 뭔데?”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고죠는 파스텔 찌꺼기가 묻은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헤집더니 입술을 삐죽이다 그냥 바닥에 누워버렸다. 아무것도 깔지 않은 작업실 바닥은 다른 연습실과 비슷하게 흡음재가 깔려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누워도 될 만큼 푹신하거나 깨끗한 공간은 절대 아니었다. 특히 군데군데 붓의 잔털이나 파스텔 찌꺼기 같은게 튄게 보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냥 그렇게 보였다고. 보이는 걸 뭐라고 설명해?”

“알겠으니까, 더러운데 눕지 말고 일어나 똑바로 앉아.”

“싫-은데. 내 작업실에서 나한테 잔소리하지 마.”

“애냐? 유치하게.”

결국 그날은 바닥에서 뒹굴거리는 고죠 사토루를 무시하고 그의 작업실에서 바이올린을 켜다 왔다. 연습이 잘 되가는지 알 수 없어 불안했으나, 의외로 관객이 있다고 의식해서인지 되려 실수없이 완곡할 수 있었다. 혼자 연습할 때는 자꾸 틀려 손이 멈췄는데, 실전에 강한 타입이었나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그 뒤로 게토는 꾸준히 4층 연습실 대신 5층의 작업실로 출석을 찍었다.

고죠는 남을 이해시키는 능력은 영 꽝이었고, 듣고나서 좋은 말을 하는 편도 아니었으나. 어쨌든 듣는 귀는 좋았다. 바이올린의 조율이 잘못되어 있거나, 미세한 음이탈도 귀신같이 잡아냈다. 어디가 어떻게 좋은지 혹은 어떤 방식이 나쁜 습관인지 가끔 날씨의 영향으로 습도 영향을 받은 음까지 구분할 줄 알았다. 본인 말로는 연주는 전혀 못하고, 딱히 클래식 애호가도 아니라고 말 하는데 친구들이 온갖 명반이라던 음반이 죄다 고죠의 작업실 창고에서 나왔다. 미술과인건 확실하고, 고죠 사토루의 이름을 검색창에서 쳐보지 않았다면 그가 음악을 전공하다 전과한게 아닌지 의심했을 것이다.

비록 말이 좀 많은 걸 빼면 고죠는 그럭저럭 괜찮은 청자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꼬박꼬박 연주에 대한 피드백을 그림으로 남겼다. 비록 그림이라기엔 대충 색칠하고 마구잡이로 선을 그은 낙서였지만 말이다. 좋아지고 있는건지 나빠지고 있는건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실수는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연주하다 손이 굳는 버릇도 사라졌다.

오일 파스텔과 색연필로 그린 낙서가 하나둘씩 늘었다.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었으나 평가지란 기분이 들어 버리지 못했다. 게토의 악보집에서는 왁스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쌓인 낙서가 악보 뭉치의 두께와 비슷해졌을 때, 이 기묘한 낙서의 미스테리는 맥없을 만큼 어이없이 풀렸다.

“고죠 사토루? 걔 색청이라 그럴걸.”

고기조림을 젓가락으로 쿡 찌른 이에이리가 말했다. 식사 자리에는 작곡 전공의 동급생 이에이리 쇼코만 동석했다. 음악과 몇 명이 교토예고와 함께하는 청소년 오케스트라 경연에 참가하며 학교를 얼마간 비우게 된 탓이다. 게토는 과제평가를 앞두고 제게 과도한 관심을 주지 않는 이 친구만 남은게 편하다고 느꼈다.

“요즘 안 보인다고 하던데, 5층에 있었구나. 피해야겠군.”

“어차피 연습실에 와도 피아노만 치지 않았어? 피아노는 2층이잖아.”

“그녀석은 거리가 의미가 없어. 아예 안 보이는 곳으로 가야지.”

이에이리는 대부분의 악기를 조금씩 다룰 줄 알았지만, 곡을 작업할 때 가장 자주 다루는 악기는 피아노였다. 덕분에 중간시험의 평가곡 반주를 맡아주는 대가로 학기말 이에이리의 작품 발표회에서 바이올린을 켜주기로 거래를 주고받은 참이었다.

“색청이란 건 말이야. 소리를 눈으로 보는 공감각- 같은 거라던데. 음악과에선 유구하게 악명 높은 녀석이거든.”

음악과에서 고죠 사토루란 이름은 또 다른 악명으로 통하고 있다고 한다. 연습실 난입자, 악보 파괴자로. 작품활동을 하느라 홈스쿨링을 하던 고죠는 주술예고에 입학하는 조건으로 전용 작업실과 음악과 수업을 마음대로 들을 수 있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고죠 사토루가 색청이란 사실은 미술계에선 꽤 공공연한 이야기인데, 요구조건이 이와 관계있다고 판단한 이사회에서는 음악과 연습실로 쓰던 건물의 5층 성악연습실을 리모델링해 미술 작업실로 바꾸고, 지하에 가창과 녹음이 가능한 설비를 새로 증축해 음악과의 불만을 없앴다.

물론, 음악과의 진짜 불만은 최신식 설비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음악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고죠 사토루는 거슬리는 음이 보이면 대뜸 남의 연습실 문이나 창을 열고 들어가 ‘쓰레기.’ ‘추하다.’ ‘끔찍해.’ 같은 말을 하고 갔기 때문이다.

“창문으로 다니는 건 그때도 똑같았나 보구나.”

“그거 때문에 예전에 선배 하나가 연습실 건물 앞 나무를 잘라버려야 한다고 건의 넣었는데, 그 원숭이 자식이 혹시라도 떨어져 손이라도 다치면 어떡하냐고 허락을 안 해줬어.”

“연습실 창문을 잠그는 건?”

“가능은 하지만 유리창에 ‘최악’ 같은 글이 붉은 물감으로 적히는 바람에 상처받는 작곡 전공생이 몇 있었지.”

음악의 정원에 나타난 미술계의 사탄이라…. 게토는 이쯤되니 고죠의 눈에 띈게 운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알 수 없어졌다. 고죠는 바이올린의 상태가 별로라던가, 음이탈의 실수는 지적해도 게토의 연주가 최악이란 소린 하지 않았다. 몇달 사이에 성격이 유해졌을 가능성은? 글쎄, 이에이리의 반응을 봐선 영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뭐, 그녀석 눈 때문에 어지간한 거장의 연주는 다 들어봤을테니까.”

“듣는 귀가 좋은 줄 알았는데, 보여서 그런 건가?”

“아마도. 어떻게 보이는지 전혀 상상이 안 가지만 말이야.”

게토는 자신의 악보집에 있는 낙서들을 떠올렸다. 고죠가 말한 ‘보였다’는 말도. 연주를 봤다는 말을 들었을 땐 그냥 잘못 들었거나, 그가 연습하는 것을 보았다는 의미로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보였던’ 거다.

그의 연주를 그린 낙서들을 꺼내 한장씩 넘긴다. 원색에 가까운, 마치 어린아이가 색연필과 크레파스로 그린 것 같은 섞이지 않는 선과 면의 그림. 정직한 색. 정직한 소리. 미술은 잘 모른다. 어쩌면 음악도 자신은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

‘난 그런 정직한 색은 별로지만, 색을 알아야 어디에 칠할지 알 수 있는 법이잖아?’

……그녀석이 말한 것도 그런 의미일까? 게토는 자신의 음색에 대해 생각했다. 음의 소리, 음의 색, 그가 내는 소리의 색. 낙서의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보라색을 응시했다. 이 선명한 보라의 의미에 대해.

오후엔 시창청음과 실기 수업이 있었다. 자리를 비운 학생이 많아, 실기 수업은 거의 단독 레슨처럼 진행되었다. 교사는 게토에게 리드가 더 매끄러워졌다고 칭찬했다. 음이 선명하고 정갈한게 장점이니, 기교를 위주로 연습해보란 조언이 끝이다. 이후엔 평소랑 비슷하게 스케일 연습을 더 많이 하라던가, 악보를 해석하는 법이나 거장들의 연주 해석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들었다.

“이 곡이 봄 소나타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겠지? 주선율이 워낙 자주 튀니까 통통 튀는 느낌을 산만함이 아니라 경쾌함으로 살릴 줄 알아야해.”

이름을 지난주에 알았는데 그렇게 불리는 이유까지 제가 과연 알고 있을까요? 게토는 속으로만 대꾸하며 겉으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교사의 지시에 따라 코다를 여러번 연습했는데, 정작 수업이 끝날 때는 주제 발전이 미흡하단 말로 끝을 맺었다.

“그래서 봄이 대체 뭔데?!”

“오늘따라 연주가 아주 빨갛네~”

수업이 끝나고, 이젠 익숙하게 연습실 5층에 도달한 게토가 분노의 연주를 하며 짜증을 토로했다. 고죠는 그런 게토를 구경하며 박수를 쳤다. 언제 가져다놨는지, 고죠의 작업실엔 체육창고에 있을 법한 롤메트가 한쪽에 깔려 있었다. 고죠는 그 촌스러운 녹색 매트에 누워 감자칩을 까 먹으며 게토의 연습을 구경했다. 한 손으론 초록색을 납작한 스케치북에 빙글빙글 칠하면서, 한 손으론 감자칩을 한움큼 집어 입에 털어넣는다. 그 편안한 꼴을 보고 있으니 매트를 엎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신경질적인 연주가 끝났다. 씩씩거리던 게토는 한번 연주로 풀어내고 나니 김이 빠져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죠는 감자칩을 봉지까지 탈탈 입에 털고는 부스러기가 묻은 낙서를 종이비행기로 접어 게토를 향해 날렸다.

게토는 그의 이마를 향해 날아오는 종이비행기를 일부러 구겨쥐며 잡아챘다. 펼친 종이는 초록색이 아주 진하게 칠해져있었고, 군데군데 붉은 선이 물결처럼 그어져 있었다.

“왜 초록색이야? 빨갛다며?”

“아주 온 몸으로 ‘나 봄 할건데~ 들여보내줘~’ 라고 주장하는 것 같은 연주라서?”

“네가 감상과 비평 수업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럼 분명 성적이 아주 낮게 나왔을 거야.”

게토는 초록이 잔뜩 묻은 종이를 살살 펴 악보집에 집어 넣었다. 원래 악보를 보관하기 위한 파일이 이젠 낙서 종이로만 채워져 있었다. 악보를 같이 넣었더니, 오일 파스텔 찌꺼기가 묻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왜 이걸 버리지 않는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악보를 보면대에 꽂아두고, 바이올린을 다시 케이스에 넣었다. 연습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단 걸 아는데, 봄이 무엇인지 영 알 수 없었다. 정직한 색이란 말도, 음이 선명하다던 교사의 말이 함께 떠올랐다. 선명하게 칠해진 녹색과 붉은색을 번갈아본다. 처음 받았던 건 보라색과 초록색이었다. 쌓인 낙서들 속에서도 꾸준히 잦은 빈도를 차지한 건 녹색이다. 그리고 고죠 사토루가 ‘베토벤스러운’ 색이라고 보여준 것은 연두색과 파스텔톤의 노란 그림이었다. 봄이란 건 노랑인가? 녹색인가?

문득 게토는 생각했다. 악보 해석은 얘나 나나 못하는게 똑같다. 고죠가 감상하는 능력은 더 좋을지도 모르지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니 쓸모가 없다. 하지만 이녀석의 특이한 능력은 또 다른 기준이 될 수 있다. 조금씩 연주를 달리해보면서 최대한 고죠가 그린 그림에 맞는 색이 나오는 연주로 연습해보면 되는거 아닌가. 게토는 고죠를 리트머스지로 쓸 계산을 마쳤다.

“이봐, 고죠. 부탁이 있는데.”

“고죠 사토루님이라고 부르면 대답할지도~”

“…….”

이자식, 부탁이라 하니 바로 표정이 시건방져지는군. 게토는 미간을 좁혔지만,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였다.

“고죠 사토루, 내가 이번 과제평가를 꼭 좀 좋은 점수를 받고 싶거든?”

“흠?”

“어차피 너도 작품을 만들려면 내가 필요하다며.”

솔직히 여길 드나든 이래로 이녀석이 그림그리는 꼴을 못 봤지만.

“연주를 어떻게 해야 연한 색이 나오는지 알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어?”

“다시 말해봐.”

“연주를 어떻게-”

“아니 그거 말고.”

“뭘?”

“다시 불러보라고.”

“고죠 사토루?”

“흐음…. 다시.”

“고죠 사토루.”

고죠는 무려 5번이나 자기 이름을 부르게 시켰다. 게토는 슬슬 짜증이 올라왔으나, 고죠가 유독 빤히 제 입을 보고 있었기에 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고죠는 혼자 고개를 갸웃하더니, 제 입으로 고죠 사토루, 사토루, 고죠, 하며 제 이름을 중얼거리며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작업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돌연 혼자 남겨진 게토만 어이없는 상황이 되었다.

갑자기 사라진 고죠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작업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어차피 오라던 사람도 없는데 게토 역시 가지 말까 싶었으나, 어딘가에서 또 불쑥 나타나겠거니 싶어 5층에서 연습을 이어갔다. 고죠의 방해가 없으니 연습이 더 잘 되어야 정상인데, 어쩐지 잘 되고있는지 아닌지 영 알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 내일도 안 오면 그냥 연습실로 내려가야지. 아니, 애당초 내가 걔를 기다려야하는게 맞나? 속으로 그렇게 불만을 품으면서도 게토는 고죠가 없는 나흘동안 5층에 출석을 찍었다.

정말로, 오늘도 안 오면 내려가야지. 라고 다짐했던 금요일.

작업실 문을 열자, 시야에 가득 찰 만큼 거대한 캔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게토는 처음 5층에 발을 들였을 때의 데자뷰를 느꼈다. 그때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건 빼곡하게 채워진 색색의 그림들이었고, 중앙에 가장 거대한 눈의 그림이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완전히 비어있는 새하얀 캔버스가 있을 뿐이었다.

“어때.”

그 새하얀 백지 앞에 고죠 사토루가 있었다. 고요하게, 캔버스 주변의 그림들을 다 치워놔 텅 빈 공간의 중심에, 온갖 물감과 붓을 늘어놓고 바닥에 주저앉은 공간의 주인이.

“이몸의 천재성을 담으려면 이정도 대작은 그려줘야 맞겠지? 스구루.”

게토의 방문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젖히며 돌아보는 고죠의 표정이 밝았다. 그건 꽤 뻔뻔하고, 자신만만한, 한편으론 장난을 치기 직전의 소년처럼 보였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말이야. 하얀 색이 부서지는게 보였어.”

고죠는 손 끝에 연필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슬렁거리며 팔을 휘적이는데도, 리듬을 타듯이 경쾌한 움직임이었다. 기대감에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마음에 드는 풍선을 고르느라 설레이는 아이처럼, 고죠의 손끝이 거대한 캔버스 위를 그어내린다. 흐린 스캐치가 천천히 캔버스 위를 채워져간다. 이토록 거대한 종이에 가느다란 실선에 불과한 선은 저 여백을 채우기에 모자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난 천박한 모티브는 취급 안 해. 최고의 영역에 도달한 예술은 기술이나 의미가 문제가 아니거든.”

고죠의 목소리가 노래하듯 통통 튀며 울렸다. 게토는 문득, 경쾌함이란 통통 튀면서도 산만하지 않아야 한다던 교사의 말이 이해갈것 같았다. 지금의 고죠야말로 봄철의 나비처럼 가볍고 경쾌하면서, 부산스럽지 않고 자연히 시선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아름다움 그 자체를 그리는데 의미가 있지. 그러니까 이름이야. 날 그리기 위해 필요한 색은 당연히 이름의 색이지.”

언제는 그리고 싶은게 없어서 그만두겠다더니. 그림을 그리는 고죠의 모습은 누구보다 생동감이 넘쳤다. 고작해야 스케치를 그리고 있는데, 정교하게 짜여진 무용을 보는 것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야샤 하이페츠를 처음 본 크라이슬러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내게 주어진 재능이 진짜 천재의 앞에서 그림자가 되는 것을 지켜보는 행위가. 게토는 문득 생각했다. 고죠 사토루에겐 소리로 표현해야할 감탄과 찬사가 무의미해서, 신이 그에게 소리조차 색으로 부여한게 아닐까.

“연주해줘 스구루. 네가 좋아하는 곡이든 연습곡이든 아무거나 상관없어. 하얀색이 돋보이려면 배경색이 필요한 법이거든.”

“아주, 제멋대로네.”

진짜 천재란 이런걸까? 게토는 고죠의 사고흐름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신나보이는 그가 자신의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가져온 바이올린을 꺼내 들고 고죠의 뒤에 섰다. 게토는 바이올린을 들고, 오랜만에 베토벤이 아닌 다른 곡을 연주했다. 쇼송,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시곡 op.25.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이자이에게 헌정된 곡이자, 게토가 처음 야가 교수의 후원을 받는 조건으로 그에게 직접 배웠던 곡이다. 그리고…….

게토를 1년만에 지역 청소년 예술제에서 최우수상을 받게 해준 곡이자, 그를 천재로 만들어준 곡이었다.

야가 교수는 쇼송의 곡을 가르쳐주며 게토에게 말했다. 질투와 사랑, 유대와 죽음이 모두 담긴 곡이라고. 당시에 게토는 주제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거 처한 현실이, 게토가 가진 염세적 태도 따위를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음악이라 게토는 연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게토의 연주는 들으면 야가 교수는 뭐라고 말 할까.

게토는 문득, 고죠 사토루가 싫어질 것 같았다.


게토 스구루는 천재다. 13살에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잡고, 학교 음악시간에 전공자도 아닌 교사의 가르침으로 차이코프스키를 연주한 소년. 기반도 과거도 없지만 미래만은 그 손 끝에서 갈라지는 음색처럼 찬란하게 빛날 천재.

사실 거짓말이다. 게토는 13살에 바이올린을 처음 잡은게 아니다. 어릴 때 으레 하던 영재교육의 일환이랍시고 유행을 돌던 예체능 학원은 한바퀴 다 돌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엔 악보는 대충 읽을 줄 알았다. 집안 사정이 갑자기 고꾸라져 학원은 학습지로, 학습지는 독학으로 바뀌기 전까진 말이다. 

부모님은 아들이 천년에 한번 나타날 천재이기까지 바라진 않았지만, 하나 정도는 자랑할만한 재능이 있길 바랐다. 학원에서 그리 두각을 드러낸 아이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사업이 망한 뒤로 게토에게 재능이 없는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예체능을 하는 아이는 키우려면 돈이 많이 드니까. 레슨 한번에 수십만, 제대로된 악기의 값은 신장을 팔아도 마련할 수 없다. 콩쿠르 한 번 나가면 거기서 입을 정장을 대여하는 것조차 돈이다. 어른의 태도는 참 손바닥 뒤집듯이 자기 형편대로 바뀐다.

딱히 미련이 큰건 아니었다.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전할 때 원장 선생님은 몇 번이나 그만두기 아까운 재능이란 말을 반복했으나,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단 어머니의 말에는 붙잡지 않았다. 아마 아이들의 재능이란 그런 것이다.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면서 땅의 사정대로 덮을 수 있는 것. 독학으로 콩쿠르에 우승했다는 말도 와전된 것이나 다름 없다. 게토가 바이올린을 배웠단 걸 아는 경음악부의 친구가 동아리에 임시 멤버가 되어달라고 매달린게 계기였다. 겉멋 든 중학생들은 관심에 목이 말랐고, 특이한 요소가 있으면 sns나 학교 축제같은 때에 어필하기 좋았다. 게토가 볼때 그들 밴드의 문제는 실력이었으니 몇 번 하다 그만두겠지 싶어 참여했다. 어차피 학교 끝나고 할 일도 없어 노닥거리기 나쁘지 않았다. 몇 번인가 무대에 올랐다. 그게 롹이즈네버다이 티셔츠를 입고 있던 야가 교수의 눈에 띄고 말았다. 어째서인지 그에게 바이올린을 배워볼 생각 있냐는 제안을 들었다.

솔직히 바이올린은 모르겠고, 장학금 때문에 주술예고에 왔다. 야가 교수가 원하는 기숙학교에 들어가면 생활비를 지원해준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까진 기대도 안 한다. 솔직히 그만큼 갈 수 있는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야가 교수의 지원 덕에 얼추 초보자 티를 간신히 벗고, 지역 청소년 예술제에서 상을 받았을 땐 이걸로 먹고 살 수 있을진 몰라도 학비는 안 들겠다 싶었다. 주술예고에 와서 너무 사는 세계가 달라 가끔 답답하긴 했어도, 선택받은 앨리트만 다니는 학교에서 먹여주고 재워준단 사실에 기뻐하던 부모님을 생각하면 노력할 의욕이 났다.

3살에 음악을 들으면 영재, 6살에 악기를 쥘 수 있으면 천재라 불린다. 그러면 16살은? 1등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성장이 빨라 남들보다 훌쩍 머리가 높은 게토는 벌써 성인용 바이올린을 사용했다. 그는 또래 애들과 비슷한 수준이면 안 된다. 동년배에서 두각을 드러내 '발굴'된 천재는 천재가 아닌 것이 밝혀지면 도로 길가의 돌이 되기 쉽상이다. 게토는 그걸 잘 알았다.

다행히, 돌멩이도 잘 닦으면 어딘가 광채가 나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라고. 게토 스구르는 자신을 그렇게 평가했다. 매일같이 돌을 닦았다. 활을 들고, 현을 짚는다. 다행히 게토는 머리가 좋았다. 천재인 척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줄 알았다.

고죠 사토루가 눈 앞에 나타나기 전까진.

천재란 무엇인가? 게토는 그 답을 찾지 않았다. 알고 싶었으나 알려하진 않았다. 그저 뻔한 칭찬, 호들갑, 남들이 이름 앞에 붙인 타이틀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 게토 스구루는 그 답을 안다. 천재란, 진짜 천재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천재란 타인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다. 그건 따라하거나 노력한다고 가능한 영역이 아니었다.

게토는 더 이상 천재인 척 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진짜 천재를 알고 있었으므로.

“표현력이 좋아졌구나. 음색은 갈수록 좋아지는 걸 보니 2학기엔 콩쿠르에 나가봐도 좋겠는 걸.”

교사는 뿌듯한 얼굴로 게토의 어깨를 두드렸다. 게토는 여전히 천재라고 불렸다. 주변에서 그를 추켜세웠고 그의 재능과 노력을 칭찬했다. 게토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 체념과 깨달음, 불편한 감정과 별개로 게토의 성적은 떨어지지 않았다. 안 맞는 옷을 벗은 것도 아니면서 틀에 끼워맞추는 법만 알아 실수도 줄었다.

게토는 자신이 주술예고에 꽤 안정적으로 자리잡아간다고 느꼈다. 고생하던 과제평가는 해석에 대한 지적을 받았지만 기술에 대한 지적은 사라졌다. 음악과 내에서도 합주를 부탁받거나 콩쿠르에 나갈 예정이 있냐는 질문을 종종 듣게 되었다. 선배들 사이에선 알음알음 저들끼리 상을 나누기 위해 출전할 무대를 합의하는 모양이다. 나가기만 하면 입상은 문제 없다는 듯한 태도들이 자신감인지 뭔지 알 수 없었다. 게토는 당분간 콩쿠르보다 모자란 스펙트럼을 넓히고 싶다고 답했다.

그의 후견인, 야가 교수는 콩쿠르에 대해 어떤 코멘트도 없었다. 그는 주로 지휘 전공의 학생들을 가르쳤기에 만나기는 쉬웠으나, 게토 하나만 돌보는게 아니었기에 대체로 바빴다. 게토는 굳이 그에게 어떻게 할지 묻지 않았다.

“나가서 뭐 하게? 그딴거 다 광대놀음이지.”

콩쿠르에 대해 말하자, 고죠는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사실 따지자면 고죠는 교내행사도 외부행사도 대부분의 행사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게토는 익숙하게 바이올린 케이스를 이젤에 걸어두고 작업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작업실은 온통 물감과 기름, 그 밖의 알 수 없는 약품 냄새로 가득했다. 게토는 이제 이 공간의 냄새에 익숙해졌다. 고죠 사토루가 주위에 다가오면 냄새로 먼저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물감의 냄새는 강렬했다. 게토가 꾸준히 환기를 시켜놔도 작업중인 고죠는 물감이 마른다며 창을 닫기 일수였다.

“겨울에 개최되는 콩쿠르는 입상하면 국제대회에 출전 기회를 준다더라고.”

고죠의 캔버스는 여전히 스케치만 있는 상태였다. 아니, 정확히는. 흰 색이 칠해지고 있긴 했다. 작업을 시작한지 3주가 지났다. 고죠는 캔버스에 계속해서 하얀 색만 칠했다. 거의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하얀색 물감 종류를 다 모은 것 같았는데, 붓칠을 하다가 물감칼로 발랐다가, 물감 튜브채로 캔버스 위에 짜내기도 하며 알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오늘은 손이 재료인지, 한쪽 팔등에 흰색 물감을 몇 개인가 골라 잔뜩 짜놓고, 반대쪽 손가락을 붓 삼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고죠가 돌아다닐 때마다 바닥과 벽에 흰 물감 자국이 묻어났다. 바닥에 비싼 물감이 뚝뚝 떨어져도 신경쓰는 기색이 없었다.

“입상이야 쉽겠지. 쓸모도 없는 상패 같은게 뭐라고 연연하는지 몰라.”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고죠는 물감이 묻은 손으로 제 머리를 쓸어넘겼다. 벌써 몇 번이나 그랬는지 왁스를 바르지도 않은 흰 머리카락은 군데군데 빳빳하게 물감이 말라 붙어 굳어있다. 흰 물감을 얼마나 만졌는지 고죠의 손가락은 다섯개가 전부 하얗게 덮여 있었다. 덥다며 교복까지 벗어던지고 하얀 면티만 입은 상태였는데, 덕분에 머리카락도 몸도 손도 하얀 고죠는 조각상이 일부 사람의 몸을 얻어 움직이는 것 같이 보였다.

“우린 너랑 다르게 쓸모없는 상패나 수상경력이 없으면 음악가로 살기 힘들거든. 그림만 내다 걸면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서는 고죠 사토루님은 절~대 모를 세계지.”

게토가 빈정거리자 고죠가 입술을 삐죽였다. 고죠는 제법 세속적인 사리에 밝았지만, 태생적으로 부족함이 없어 되려 이상적인 부분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이 넓은 작업실엔 온갖 재료와 물감, 미술도구 따위가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잡동사니와 구분이 전혀 가지 않았지만 일부는 게토의 생활비보다 비싼 재료들이었다. 어떤 물감은 게토가 지금 사용하는 연습용 바이올린 가격보다 비싸다고 했다. 게토는 그렇게 값비싼 재료들이 칠해진 저 캔버스의 가격이 얼마나 될까 종종 생각했다. 고죠의 그림을 본다고 뭘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흰색 여백 위로 흰색이 채워지는 건 알겠다. 전부 하얗게 보이지만 고죠는 그가 구분하지 못하는 색을 구분하고 있는지 걸음마다 손가락을 바꿔 다른 하얀색을 찍어가며 움직였다. 수작업은 뭐든 비싸다던데. 천재의 수작업 작품은 과연 얼마에 팔려나갈까.

“왜 그렇게 대회를 싫어하는 거야? 넌 콩쿠르에 참가할 일도 없잖아.”

“예술이 뭔지도 모르는 관객들 앞에서 연주하는 바보들이나 몇시간 동안 똑같은 곡만 주구장창 들어놓고 거기에 순위를 매기고 있는 멍청이들이나 다 똑같아.”

“연주자에 따라 곡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는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생각보다 비관적인데.”

설령 정말로 심사위원이 참가자의 수준을 구분하지 못한다 해도, 고죠 사토루를 거기 앉혀두면 그들이 무엇이 다르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낼 것이다. 고죠는 명확하게 눈으로 보고 있으니까. 하지만 왜 음악계도 아니고 미술계의 젊은 신성 취급받는 고죠가 콩쿠르를 부정적으로 보는지 알 수 없었다.

“뻔해. 결과가 뻔한 색이야. 나 그런거 싫어하거든- 그보다 연주나 해줘. 오늘 영감들 잔소리 듣느라 질렸단 말이야.”

“그래그래, 창작곡도 괜찮아? 이에이리가 작곡한 곡인데, 곧 작곡반 작품발표회 시기라 초연을 맡게 되었거든.”

“쇼코가-? 흠, 스구루랑 안 어울리는데.”

고죠는 하얀 캔버스만 바라보다, 이에리이의 곡이란 말에 캔버스를 놔두고 체육 매트쪽으로 걸어왔다. 파레트 대신 쓰던 한쪽 팔은 여전히 물감이 마르지 않은 채였는데, 한쪽에 구겨 벗어둔 교복 상의로 대충 문질러 닦곤 도로 밀어 놓았다. 게토는 고죠의 그런 행동을 철없는 도련님 같다고 타박했지만, 고죠는 정말 도련님이 맞았기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물감 묻은 고죠의 교복을 주워 다른 곳에 물감이 묻지 않게 정리하는 건 게토의 몫이었다.

고죠는 그러거나 말거나 물감이 반쯤 마른 손가락으로 게토의 가방을 뒤져 에이이리의 악보를 꺼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이중주. 비올라는 한 학년 후배인 비올라 전공 하이바라가 맡기로 했다.

“악보를 보면 알아?”

“아니? 소리만 보지 악보는 못 봐.”

“그러면서 뭘 안다고 안 어울린단 말을 하는 거야?”

게토는 고죠의 손에서 악보를 빼앗아 보면대에 올렸다. 외우려면 외울 순 있었지만, 작곡가가 살아있으니 작곡가의 의도대로 연주하기 위해 여러 코멘트를 받아왔다.

“쇼코는- 콩테로 그린 그림 같단 말이지. 선은 거칠고 색은 흐린데 그리는 형상은 굉장히 자기주장이 심해. 걔가 만든 곡인지 모르고 들어도 이건 쇼코 곡이구나, 하고 바로 알아챌 만큼.”

“그건 작곡가에겐 제법 칭찬인데, 전해주지 그래?”

“근데 스구루는 원색을 쓰니까, 콩테에 아크릴 물감을 칠하면 안 어울리잖아?”

“오, 제법 비유법이 향상된 말을 하는구나.”

“스구루, 내 말 듣고 있는거 맞아?”

“응, 듣기만.”

고죠의 표정이 불만스럽게 바뀌었지만, 게토는 깔끔히 무시하고 바이올린을 들었다. 아직 미숙하지만 꾸준히 연습한 이에이리 쇼코의 3번째 2중주가 게토의 손에서 연주되기 시작했다.

단단하고 긴 손가락이 바이올린의 현 위를 움직인다. 활의 끝에서 펼쳐지는 음색은 또렷하고도 선명하다. 게토는 콩테로 그린 그림을 본 적 없지만 고죠가 가지고 노는 것은 몇 번 본적 있었다. 우습게도 고죠의 말로서 게토는 곡의 심상을 이해하기 쉬워졌다. 이에이리에게 말하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작곡가보다 더 작곡가의 개성을 잘 인지하는 화가라니.

주선율을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소리는 맑고 깨끗하다. 본래는 중저음을 깔아주며 단단하게 잡아줄 비올라가 치고 들어올 타이밍이었으나, 비올라가 없으니 홀로 움직이는 바이올린의 음색은 마치 가지 없이 날아가는 산새와 같다. 콩테, 콩테. 게토는 고죠의 비유를 떠올리며 손을 움직였다. 새까만 색의, 조금 거친 터치감. 이에이리 쇼코는 기본적으로 쿨한 구석이 있는 침착한 성격이었지만, 확실히 그녀의 곡은 주제를 거침없이 드러내곤 했다. 게토는 짧게 고민하다, 비브라토를 좀 더 여리게 흔들었다. 소리의 폭이 변화하는 진동을 손끝으로 느끼며 악보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런 게토를 고죠가 응시한다. 그의 손 끝에서 피어나는 색을, 소리를. 또렷한 색감을 유지하던 연주에 물 세 방울이 떨어졌다. 수채화? 아니, 수묵화처럼 먹색이 스미며 게토의 색이 변화한다. 고죠는 그 변화에 집중했다.

“스구루.”

게토의 시선은 악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게토의 약점은 언제나 적은 스펙트럼이고, 곡의 표현과 해석은 항상 이해와 동반한다. 하지만 현대 작곡가의 곡은 모두가 처음 듣는 곡이다. 게토의 음색과 표현이 청중들이 듣게 될 첫 지표가 될 것이다. 옛 음악가들의 곡은 그들의 의도를 추론하고 거장들의 연주를 많이 들어봐야 겨우 갈피를 잡을 수 있었지만, 현대의 곡은 살아있는 작곡가에게 언제든 의도와 표현법을 물을 수 있으니까. 거기에 개성과 심상을 시각화할 수 있는 고죠가 있으니, 그의 조언을 참고 삼아 표현의 방향을 잡는다면 게토에게도 어쩌면-

“스구루!”

고죠의 목소리가 연주를 치고 나왔다. 게토가 활을 내렸다. 연주가 아주 잘 되고 있었는데, 어쩐지 조금 아쉬웠다.

“연습에 방해하지 말라고 했잖아.”

“너,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야?”

“뭐?”

고죠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앉지도 못한 상태였다. 막 일어나 게토에게 다가오려다 멈춘 것처럼 어정쩡한 상태로 게토에게 뻗었던 손을 내렸다. 고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도로 앉았다.

“네 색이 사라졌어.”

“무슨 소리야?”

“분명 처음엔 네 색이었단 말이야. 그런데 중간부터 색이. 흐려졌다?고 해야하나? 갑자기 쇼코 같아졌어.”

고죠는 자기가 말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표정을 찡그렸다. 하지만 게토는 고죠 자신도 이해못한 말을 이해했다. 게토의 연주가 게토의 색이 아닌 이에이리 쇼코의 심상을 표현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게토는 아까 겪었던 집중력과 몰입감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아주 적합한 방향이란 것도 알았다.

게토는 드디어 고죠 사토루의 색청능력을 악보 해석 리트머스지로 쓰는데 성공한 것이다! 게토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그는 냉큼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고마워 사토루! 나 잠깐 볼일이 생각나서!”

“뭐? 잠깐! 내 작업 배경음은?!”

확실한 답을 찾으려면 작곡가에게 들려주는게 제일이지. 게토는 그대로 작업실을 박차고 나왔다. 고죠가 뒤에서 뭐라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아니, 뭐 지금은 별로 안 중요한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당연히- 작곡가 이에이리 쇼코의 반응은? 단숨에 오케이. 합격 사인을 받았다. 이에이리의 말로는 거기까지 의도를 알고 표현해줄 줄 몰랐다고 하는데, 게토에겐 오히려 자신감을 더해주었다.

게토는 당장 기숙사로 돌아와 악보집을 펼쳤다. 우수수 쏟아지는 온갖 낙서와 그림들이 금방 게토의 기숙사 바닥을 채웠다. 고죠 사토루를 만난지 한달 남짓한 시간, 대부분 과제곡을 연습했지만 고죠의 요청으로 적지않은 새로운 곡을 연주했다. 신경이 쓰여 같은 곡을 연주한 낙서끼리 모아두기도 했고, 새로운 곡은 낙서 뒷장에 곡명도 적어두었다. 게토는 그 안에서 스케일 연습을 하고 받은 낙서를 꺼내들었다. 비슷한 색이나 악장마다 모아 새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알 것 같았다. 악으로 깡으로 외운 서양음악사나 평균율, 화성학 보다도 고죠의 그림이 훨신 직관적이다. 게토는 이 말도 안되는 깨달음이 자신에게 가져다줄 새로운 희망처럼 보였다. 재능에 회의감을 느끼던 시점이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베토벤은 말했다. 사랑이란 사랑을 한 사람 자신에게 돌아온다. 비극적이게도 미움 역시 그러하다.

게토 스구루는 지극히 세속적인 재능을 타고 난 사람이라, 하늘이 내린 천재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재능은 따라할 수 없어도 사람은 노력으로 따라갈 수 있었다. 게토는 죽은 베토벤은 따라갈 수 없지만 살아있는 고죠 사토루는 쫓아갈 수 있다. 베토벤에겐 질문할 수 없어도 이에이리 쇼코의 의도는 물어볼 수 있는 것처럼. 게토는 베토벤은 이해할 수 없어도 고죠 사토루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게토는 고죠를 통해 천재의 그림자를 밟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미치도록 밉고 괴로워서, 게토는 바이올린을 끌어안고 울었다. 낙서가 가득한 방은 고죠의 냄새가 났다.


하편까지의 전체분은 7월 디페스타 고죠게토 쁘띠존에 발행됩니다.

이후 전체 분량이 유료글로 웹발행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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