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악한 남자
2023 고죠게토 온리전 <백귀야혼식> GE12
⚠️ 샘플의 여장 요소, 고죠의 스쳐지나간 모브 여자 친구 언급 및 본편에서 수면 장애에 대한 비전문가의 묘사를 다루고 있는 팬픽션입니다.⚠️
마지막 소재에 관해 미화하려는 의도는 일체 없었으며, 이 점에 관해 민감하신 분들께선 감상을 재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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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시절의 고죠와 게토의 일상물 3편 < 1편의 일부 SAMPLE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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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고죠와 고죠를 배반하지 않은 교주 게토의 일상물 1편 < 전문 SAMPLE 공개
B6 | 벨벳 코팅 | 후기 포함 188p | 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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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PLE 줄거리>
비술사 혐오를 숨기고 산 지 거진 10여년. 게토는 자신의 마음을 잘 숨길 줄 아는 영악한 남자다.
그런데 이 영악함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 줄이야.
미미코와 나나코, 소중한 쌍둥이 딸들이 게토의 마음도 모르고 원숭이 애인을 데려오고 말았다.
홧술로 속풀이를 해버리는 그.
옆에서 메로소다나 쪽쪽 빨던 절친이 입을 떼기 전까지는 나름 괜찮은 현실 도피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서러우면 스구루는 나랑 사귀면 되겠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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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야의 밤낮은 구분할 길이 없다. 이케부쿠로, 신주쿠와 함께 도쿄의 3대 부도심.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스크램블 교차로 위로 수 천명의 사람이 쏟아진다. 푸른 신호 아래에 군중이 집결했다. 영원할 것 같은 북적임도 노을을 닮은 신호 하나면 금세 흩어진다. 부둣가에 돌진하는 파도 마냥 쉼없이 뭉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발걸음. 거침없는 비산의 형태를 띈다. 이곳의 집단에게 결속력은 없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세 명의 사내 무리가 그 인파를 거슬러 올라갔다.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의 성지, 스타벅스 전광판을 중심으로 좌측으로 666보. 도보 10분도 채 안되는 거리를 지나자 공기가 변한다. 무거워지는 어깨가 꺼림칙한 예감을 속삭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길은 없다. 돌아갈까 망설이는 순간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다른 직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3개월 연속 실적 꼴찌 영업 2팀. 자신이 팀장을 단 이후 끈질기게 따라온 꼬리표다. 더 이상의 조롱은 받고 싶지 않아. 나도 인정받는 상사가 되고 싶다. 다잡은 마음과 달리 식은땀이 배어나오는 손이 미끄럽다. 손수건을 찾을 여유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흥건하게 묻어 나온 땀을 정장 끝자락에 문질렀다. 여기가 정말 맞냐는 부하의 질문에 맞춰 고개를 들어본다. 길잡이로 나선 또 다른 부하가 뒷통수만 벅벅 긁어대는게 보였다. 무안한 눈빛이 휴대전화 속 지도와 눈앞의 풍경을 번갈아 보기 바쁘다. 여기가 맞는데… 혼잣말과도 같은 난처한 중얼거림이 막막함을 더한다. 그도 그럴게 이곳은 막다른 골목길이다. 남은 333보를 걸어갈 길이 없다.
"하다 하다 낚시질도 당하네. 그-러-게~ 제가 그 사람 이상하다 했죠? 오늘도 꽁친 것 같은데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안 그래도 고등학생 때 좀 놀아봤다더니. 학생일 적 버릇을 못 고친 남자가 건들거리며 불평을 토했다. 바닥을 배회하는 비운의 콜라 캔만 애꿎게 걷어차인다. 깡-! 경쾌한 울림이 퍼졌다. 거침없는 포물선이 막다른 벽 한가운데에 꽂혔다. 양아치가 되기 전까지는 축구 인재였다는 이야기가 영 허풍은 아닌가 보다. 이 골목에 들어선 뒤 처음으로 실없는 사고를 하게 되었을 때였다. 캔이 부딪힌 곳을 시작으로 벽의 모습이 사라져간다. 두 눈을 비비며 의심해도 바뀌는 건 없다.
"나는... 사실 초능력자였나? 여긴 다이애건 앨리?"
다이애건 앨리면 마법사겠지, 멍청아. 단순한 지적이 따르는 일은 없었다. 흠칫 물러난 두 사람을 뒤로 하고, 영업을 성공시키겠다는 일념이 가장 강한 남자가 먼저 손을 뻗었다. 용기 있게 내민 손이 벽돌의 딱딱한 감촉을 느끼는 대신 허공만 배회한다. 괜찮은 것 같은데? 이번에는 손 대신 걸음을 떼었다. 그렇게 한 걸음을 나서자,
"과, 과장님?!"
순식간에 사라진 상사의 모습에 길잡이를 자칭한 직원이 기겁한다. 이걸 따라가야 해? 말아야 해? 고민이 역력한 동료를 보며 혀를 찼다. 사내 새끼가 그렇게 겁이 많아서 쓰나. 본인이 초능력자였을지도 모른다는 꿈의 실현이 코앞이다. 비현실적인 상황을 목도한 남자에게 두려움이란 금방 사라질 감정. 상사가 사라진 골목 너머로 몸을 던지자 그의 뒤로 겁먹은 탄식이 다시 한 번 뒤따랐다.
챠라락- 이그조틱한 커튼이 얼굴을 스친다. 형형색색의 대나무 구슬이 와닿았다. 서늘한 감촉이 얼음장 마냥 차갑다. 달인가? 커튼에 그려진 무늬를 찬찬히 들여다보려는데 짙은 향이 온 감각을 덮쳐온다. 제사에나 쓸 법한 잿더미 냄새. 죽음을 연상시키는 냄새가 불쾌하다. 거래처만 아니었으면 당장이라도 코를 막았을 텐데. 박봉이어도 소중한 월급을 떠올리며 가게 내부를 살폈다.
포르말린으로 절인 양서류, 토끼. 저건 모형 눈인가? 척 보기에도 취향이 고약해 보이는 장식물들을 지나친다. 어느새 따라붙은 동료가 소매 끝을 잡아왔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그대로 나아가자 관상용 식물로 둘러싸인 카운터가 나왔다. 자신들의 상사는 용케 주인으로 보이는 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침 저기들 오시네요."
간드러진 중저음이 자신들을 지목했다. 약간의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독특하다. 거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게 분위기와 섞여 오히려 부드러운 인상으로 여겨지는 게 신기하다. 목소리만큼이나 특이한 복장도 훑어봤다. 화려한 무늬가 그려진 탓에 아뱌야인지 아즈칸인지 알 수 없는 상의. 무슬림 계통의 여성이 입을 법한 베일에 화려한 술을 달아 장식한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유일하게 드러난 눈매에 시선이 빼앗긴다.
"물건은 확실하겠죠?"
한편 상대는 탐색전 보단 본론으로 빨리 들어가고 싶은 눈치였다.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사무 가방을 들어올리며 정중히 답한다. 눈빛만큼이나 성깔있나 보네. 실제로 내뱉는 말과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며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사내는 건네받은 사무가방을 한 번 들어올렸다 내려보고 말았다. 무게로 물건의 유무를 확인하는 모양새다. 직접 열어볼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아쉽네. 뭐가 있는지 궁금했는데.
그렇다. 사실 저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판매자인 우리도 몰랐다. 그저 잘 팔고 와라. 회사의 부당한 지시와 함께 거리로 내쫓겼다. 얼간이 삼형제나 마찬가지다. 마약인가? 아니면 폭탄? 이러다 일반인 운반책으로 6시 뉴스를 장식하면 어떡하지? 불안이 닥쳐와도 항의할 생각은 못했다. 회사와 반대되는 의견을 티냈다간 즉시 해고. 암암리에 기정사실인 이야기다. 이렇게 독재로 굴러가는 악덕 회사일지라도, 표면적으로는 유명한 중견기업. 제게 있어 분에 넘치는 간판을 잃기에는 자신의 처지가 허락하지 않는다. 부모님은 고등학생 때 가출한 이후로 뵌 적이 없고, 당시 함께 어울렸던 불량배 친구들은 취직 준비를 하며 전부 연이 끊겼다. 이대로 잘리면 기댈 곳이 없는 상황. 선택지는 소거법으로 결정됐다. 체념을 안고 회사 건물을 나왔을 당시만 해도 이 수상한 걸 누가 사나 근심이 차올랐다. 실제로 머지않아 수상한 양반과 거래 약속을 잡게 되었을 때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농담이 아니다. 거래 약속을 잡는 내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남자는 누가 보더라도 제정신이 아니라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거래 당일에 대면하게 된 게 그날 본 괴인이 아니라 눈앞의 사내인 점은 그나마 행운이었다. 이쪽이 고용주가 맞긴한가 봐. 난데없이 탁상 밑에서 꺼낸 종을 짤랑이는 폼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청아한 소리와 함께 남자 뒷편의 차양막이 걷어졌다. 한 눈에 보기에도 농구선수 느낌이 나는 또다른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주인장 너머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을텐데 용케 저 덩치로 문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구나 싶다. 그나저나 저 복장은 창파오야...? 대체 무슨 국가 컨셉의 가게인지 짐작이 안된다. 적어도 의상은 통일하지. 혀를 끌끌 차기 직전, 텅-! 던진건가 의심이 들 정도로 불량하게 돈가방을 놓여졌다. 걸쇠를 푸는 동작은 얌전한 걸 보며 착각이었나 알쏭달쏭 해진다. 고민하고 있는 사이, 사전에 고지된 액수를 확인한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히 거래를 마쳤으니 인사를 나누고 떠날 차례다. 의레 그렇듯 악수를 하기 위해 그는 가까이 서있던 창파오 종업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니, 내밀려고 했었다는 쪽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역시 넌 가발을 써야 했다니까, 사토루."
뜨거운 빛이다. 화려한 일렁임이 동공의 수축을 종용했다. 숨 또한 가빠진다. 화마가 코앞에 와닿아있다. 죽는다. 타죽을거야. 본능적인 위기감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꽃은 더이상 가까워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고개를 돌리자 사토루라고 불린 창파오 종업원과 눈이 마주쳤다. 으겍-. 남자가 면전에 대고 구토 소리를 낸다. 갑자기 당한 무례한 행동에 기분 나빠할 새도 없이 그의 검지가 미간 사이를 콕 찔러왔다.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눈 앞은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달링이야말로 방금 쓴 주령 별로지 않아?"
기절시키는 용도인데 확률이 1/2이라니. 완전 구려. 빈정대는 말을 들은 게토가 카운터에서 일어섰다.
"이렇게라도 일감을 주지 않으면 계속 농땡이 피우고 있을 사람이 누군데 그래."
태연작약하게 떠드는 두 사람의 행동은 도저히 범죄자와 조우한 태도가 아니다. 맹수가 해충에게 겁먹는 경우는 없으니 당연하다. 여지껏 소극적으로 행동한 남자, 주저사가 불꽃과 함께 술식을 거두며 틈을 봤다. 여느 때처럼 자신을 직장 동료로 여기게끔 인식을 바꾼 재료들을 납품하러 왔는데 익숙한 브로커 대신 이상한 놈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부터 일이 꼬였음을 직감했다. 무엇보다 저놈들은 못알아볼래야 못알아볼 수가 없지. 잡히면 죽는다. 자신의 가볍지 않은 죄질을 떠올리며 바닥을 박찼다. 하지만,
주변이 좀 소란스럽네. 잔인할 만큼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온몸이 지네에 감싸인다. 포박을 마친 게토에게 칭찬의 휘파람이 휘익 불어졌다. 추파를 받은 눈이 뾰족해진다. 시선만 보이는 탓에 기분이 더 나빠보인다. 어이쿠, 마주치지 말자. 한껏 자신을 째려보는 질책으로부터 도망친 고죠가 거래 품목 가방의 다이얼을 돌렸다. 오백..칠십.. 이! 달칵,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난다. 분명 가방 안에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면 즉시 눈을 돌리라고 했었지? 메두사 같네~. 주의점을 떠올리며 목표를 확인한다.
"이건..."
사탕? 기막혀 하는 게토의 말을 부정한다. 이건 껌이다. 풍선껌.
"너, 너 이 새끼들 뭐야?!!! 주인장은 어떻게 했어?!!"
소란을 배경 삼아 가방 안을 뒤적인다. 온통 껌, 껌의 연속이다. 그나마 노란색이 귀엽네. 비닐 포장을 뜯어 한 알을 입에 넣었다. 달콤함보다 인공감미료 향이 자극적이다. 여유적적 가방을 여는 사이 좁은 문을 비집고 들이닥치는 장정들. 그러니까, 아마도 두 사람의 진짜 목표였을 주저사 무리가 분개하는 걸 구경했다. 와, 이걸 아직도 팔아? 우리가 고전 다닐 때 먹던 거잖아. 나란히 추억여행에 탑승해 파란색을 고른 게토가 두건을 벗었다. 껌을 질겅이며 말해도 발음이 새지 않는 재주가 있다.
"조건은 어떻게 할래? "
"먼저 가방을 확보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로 하자."
"저녁밥 내기?"
저녁밥 내기! 도돌이표 마냥 상대의 말끝을 따라한 고죠가 풍선을 팝! 터트린다. 승부욕으로 자극된 열의가 씨익 치열을 드러냈다. 거기 아저씨들~ 시체 치우는 건 내 능력 밖이라서 말이야. 곱게 가자? 선전포고와는 달리 초장부터 쓸려나가는 선반 위 장식품들을 봐도 게토는 나무라지 않았다. 달려드는 주저사들에게 카운터를 집어던진 장본인이다보니 그럴만한 처지가 못되었다는 쪽이 옳다. 싸울 때 기물 파손을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어? 더군다나 주저사 본거지인걸. 장막만 잘 내렸으면 됐지. 막나가는 특급들로 인해 뒷일을 책임질 보조감독의 베갯잇만 촉촉해질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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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토 스구루는 인기가 많다. 날카로운 인상과 달리 둥글게 말린 입매에서 나오는 청산유수로 사람을 홀려먹어서. 이상한 앞머리를 지녔지만 그마저도 매력으로 먹혔다.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 천 년 묵은 능구렁이. 아무튼 간사한 놈. 게토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본인은 쓰레기가 맞았다. 그가 타인을 구슬리는 법을 익힌 건 기억을 거슬러 이십여 년 전. 어머니를 따라 명품관에 들어갔을 때였다. 못 사는 건 아니지만 썩 잘나지도 않은 중산층 가정의 차림.
"편하게 둘러보시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직원들은 모자母子에게 다가오는 대신 카운터에서 비즈니스적인 인삿말을 건넸다. 태평한 인사와는 대조되게 게토의 다리는 비명을 질렀다. 아침부터 점심이 지날 때까지 혹사당한 결과다. 제 다리의 심각성을 깨달은 게토는 필사적으로 눈알을 굴리며 앉을 곳을 찾았다. 발가락부터 찌르르 타고 올라오는 근육의 떨림을 억누르며 고개를 쭉 뺀다. 탈의실 앞 검은 사각형. 드디어 구세주가 눈에 들어왔다. 인조가죽으로 이루어진 싸구려 의자가 그렇게 반갑긴 처음이었다. 달콤한 휴식을 기대한 그는 어머니의 손을 놓고 목표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의자 위에는 재고 상자 하나가 이미 선객으로 자리 잡은 채였다.
"스구루 쨩, 거기 뭐 있니?"
"으응- 아니. 근데 저거 엄마 가방이랑 똑같이 생겼다."
"어머! 정말이네?"
엄마, 나 다리 아파. 솔직하게 칭얼거려도 됐건만 게토는 반사적으로 말을 돌렸다. 딱히 거짓말도 아니다. 오동통한 손가락 끝에 위치한 가방은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일한 명품백과 같은 제품이었다. 가방은 물건을 넣고 다니는 용도일 텐데도 그 가방만큼은 다른 천 가방에 넣어져 귀하게 모셔졌기에 똑똑히 기억했다.
"그 제품 라인이 요즘 제일 인기 있는 모델인데 정말 안목이 좋으시네요. 마침 이쪽 라인이랑 매치하시면 잘 어울리실 텐데 한 번 보시겠어요?"
어머니와의 대화에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자 토끼 눈을 뜬 게토가 고개를 들었다. 빙그레 미소 띤 직원이 구둣발을 또각거리며 다가왔다. 매장 조명 때문인지 역광이 들어 마치 승냥이처럼 보인다. 실적을 올릴 건수를 잡은 영업직만큼 승냥이에 어울리는 이도 없을 테니 이 또한 거짓은 아닐 것이다. 어린 자녀가 자신들의 브랜드 제품을 분간해낼 정도라면 그의 어머니는 충성도가 높은 우수 고객일지도 모른다. 계산을 끝낸 직원의 호객은 멈출 줄 몰랐다. 열변을 토해내는 그의 옆에서 어머니는 매장의 모든 진열장을 구경해야 했다. 적당한 추임새가 다 떨어졌을 무렵, 마지못해 열쇠고리 하나를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나서야 그녀는 풀려났다. 흰 장갑을 낀 손이 조심스럽게 유리관에 손을 집어넣는다. 이 상품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정중한 말과 함께 눈앞에 들이밀어진 키링은 스왈로브스키가 촘촘히 박혀 아기곰의 형상을 이룬 별세계였다.
한편 어머니가 직원에게 붙잡혀 있는 사이, 게토는 그토록 염원하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어머니의 영혼 탈곡쇼를 직관하며 들이킨 고급 오렌지 주스는 매우 달콤했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매장을 나설 때 두 사람의 안색은 들어설 때와 확연히 뒤바뀐 낯이었다.
하물며 명품백을 감싸던 천 가방과 똑같은 재질의 벨벳 주머니에 담긴 열쇠고리는 게토의 몫이 되었다. 오늘 하루 종일 엄마와 어울려준 보너스라나. 자신의 말 한마디 때문에 그 고생을 하셨는데 책망은 커녕 칭찬만 돌아왔다. 나이가 들며 길거리 향수 시향지 조차 권해지지 않게 된 지금, 간만에 고객 대접을 받으신 게 몸은 피곤하셨어도 나름 즐거우셨던 모양이다. '엄마 혼자 갔으면 누나들이 그렇게까지 친절히 대해주진 않았을 거야. 오늘 스구루 쨩 덕분에 신기한 체험을 했어. 고마워.' 애정 어린 손길로 두 뺨을 감싸 안는 온기에 볼을 비볐다. 마치 이 일련의 흐름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순진한 아이처럼. 어머니가 기쁘다면 자신도 기쁜 기특한 아들처럼. 언변의 중요성을 아는 영악한 아이의 시작은 어쩌면 이때부터일지 모른다.
2
게토의 인기가 끊이질 않는 데에는 잘생긴 얼굴, 뛰어난 능력, 화려한 언변. 다양한 요소가 맞물린 덕이겠지만 고죠 사토루의 친우라는 점도 적잖이 영향을 줬다.
도대체 어떤 성인군자길래 고죠의 절친이 될 수 있는걸까? 모두의 의문은 한결 같았다. 그런 질문을 받 때마다 게토는 의중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띄우며,
"사토루-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굴었길래 평판이 이런거야."
자신에게는 다른 태도로 대한다는 걸 은근히 어필하며 마운트를 취했고,
"봤지? 저 녀석도 똑같은 놈이라 가능한 거야."
에스프레소 도피오를 물 대신 홀짝인 쇼코가 코웃음 쳤다. 그녀의 말마따나 고죠와 게토는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쓰레기였다. 애초에 마카롱과 소바. 두 음식의 카테고리가 다른데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예외의 경우가 있긴 하다.
"미미이코… 나나코오… 지금도 아직 내 품 안에 쏙 들어올 아이들인데 어째서. 어째서어-!"
그렇겠지. 네 덩치라면 저기 지나가는 아저씨도 품에 쏙 들어올거야.
오늘 밤만큼은 분통을 토하며 책상을 쾅 내려치는 게토가 고죠보다 쓰레기 같았다. 선술집에서 멜론 소다를 열창하던 또 다른 쓰레기는 만취한 친구 앞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며 우정을 과시했다.
"스구, 루- 훗. 울어? 지금 울어?"
아이들은 언젠가 부모 곁을 떠나기 마련이다. 하나의 인격체로 거듭나기 위해서, 부모의 죽음으로 인해서, 외부적 요인 때문에. 이유도, 시기도 다양한 법이지만 인생에 있어 독립이란 필연적인 요소다. 게토의 자립은 주술계에 발을 들인 고등학생 무렵. 제 딸들보다 이른 시기에 마친 주제에 당시의 기억은 조금도 떠올리지 못하는 모양새다. 아니지. 멀리 갈 필요도 없다. 하사바 자매보다 나중에 거둔 네기 군이었던가. 화상 자국이 인상적인 소년을 떠올려본다. 얼마 전, 진지한 마음으로 교제 중인 애인을 소개받았다고 시종일관 입꼬리를 씰룩일 때는 언제고 지금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니 제삼자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다.
"그치마안- 네기는 남자애고... 미미코랑 나나코는 여자애지?"
차별 한 번 끝내주네. 애들 앞에서는 그딴 소리 하지 마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본인의 입단속만은 잘하는 남자였다. 오죽하면 그 지독한 비술사 혐오증을 여태껏 숨길 수 있었을까. 기껏해야 그의 질풍노도 시기에 함께 학창 시절을 보낸 선후배와 동급생, 선생님. 그리고 후시구로 메구미 정도만이 게토의 이면을 알고 있다. 주술사 킬러와 똑닮은 얼굴만 아니었음 그를 찾아간 고죠와 게토가 초면부터 무례하게 헛구역질 해댈 일도 없을테니 후시구로 군 마저 영영 몰랐겠지.
비단 게토가 이렇게 과음을 한 이유는 쌍둥이가 연애를 시작해서만은 아니다. 연애 상대가 비술사. 게토가 그토록 혐오하는 원숭이가 자매의 옆자리를 꿰찼다는 사실에 배알이 꼴렸을 확률이 높다. 차마 그 사실을 대놓고 말할 수는 없으니 우리 딸은 아빠랑 결혼한다고 했는데…! 철부지 부모처럼 굴어 진심을 은폐하려는 심산이다.
정말 성가신 남자야. 쇼코는 게토 앞에 놓인 가다랑어 내장 젓갈을 자신 앞으로 가져오며 혀를 찼다. 관심은 온전히 서비스 슈토에게로 돌아간다. 한술 떠서 머금으면 혀에 가장 먼저 와닿는 건 나무의 무기질적인 감촉. 차마 형체를 온전히 유지 못 할 정도의 부드러움이 젓가락 사이를 타고 흘러내린다. 젓갈 특유의 폭발적인 짠맛이 선두를 달리지만 감칠맛의 연쇄 덕에 많이 먹어도 부담이 없다. 식도로 넘어가기도 전에 녹아내린 한 입의 마침표에는 비릿함 대신 유자 향의 달큰함이 남아 주인장의 고심을 엿볼 수 있어 좋다. 술을 부르는 맛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이보다 좋을 수 없다. 되에 넘치도록 따라 찰랑이는 맑은 술. 맡기만 해도 눈 앞이 핑 돌 사케로 입을 헹군다. 크으- 상쾌한 탄식이 새로운 대화의 신호탄으로 날아올랐다.
"그렇게 서러우면 스구루는 나랑 사귀면 되네."
누가 신호탄을 핵폭탄으로 이어받으래. 고죠가 헛소리를 하자마자 술자리에 참여한 인원 전원이 일제히 시선을 교환한다. 고죠에게 술 먹인 거 누구야. 그런 짓을 할 미친 놈이 누가 있겠습니까? 음-! 고죠 선배의 멜론 소다는 평범한 멜론 소다가 맞는 것 같은데요! ...그걸 마셔보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하이바라. 히이익-! 왜, 왜 저를 보시나요...? 서로를 향해 쏟아지던 의심은 우타히메에게로 가 멈췄다. 귀 끝까지 붉어진 주정뱅이2가 뭐. 뭐어엇~! 고함을 친다. 패스. 누군가의 간결한 외침과 함께 이미 고주망태인 그녀가 용의선상에서 지워졌다.
그럼 정말로 고죠에게 술을 먹인 건 누구야? 의문을 풀기도 전에 게토의 끅끅 웃는 소리가 사고를 멈추게 한다.
"사토루가 연애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그것도 나랑?"
따끈한 닭안심 꼬치를 집어든 게토가 말했다. 먹기 좋게 분리된 고기 조각들이 고죠의 앞접시에 놓인다. 고죠의 충격적인 고백 때문인지 술이 깬 듯한 침착함이다. 그와중에 지적한 부분이 고백받은 점보다 고죠와의 연애 가능성이란 점이란 게 참 가관이다. 마마냐? 웃음 섞인 목소리로 물어보자 적어도 파파라고 해줘~ 농담까지 되받아친다. 그런데... 너 말야. 아직 취해있는 거 다 티나거든. 아까는 쌍둥이의 부모였다면 지금은 고죠의 부모로 갈아탄 것처럼 밖에 안 보인다. 이미 수북해진 앞접시 위에 재주 좋게 고기 탑을 쌓고 있는 게 놀랍다. 당연히 그가 내뱉고 있는 말은 고기 탑의 경이를 뛰어넘은 상태다.
"사토루는 이제 결혼 생각할 나이지, 결혼."
"나랑 해줄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묻니. 네 약혼자에게 가서 말해."
"내 약혼자가 넌데."
"언제부터...? 아까부터라고 하면 진짜 가만 안둘거야."
"아까부터로 정해진 게 당연 -아악! 진짜로 때렸어?! 악!"
형편없는 만담을 안주 삼아 보지만 젓갈만큼 맛깔스럽지 않다. 저것들 무대 위에서 끌어내. 손을 두어번 쥐었다 피며 허상의 토마토를 그리워한다. 고전 만화의 한 장면처럼 토마토를 던지고 싶어도 던질 게 없다. 하이바라를 제외한 모든 일행의 안색이 어두웠다. 고죠. 하는 수 없이 총대를 메고 맨정신의 폭풍을 지목했다. 게토 술 깨울 겸 나가서 대화해. 아무리 날이 좋아도 가을 밤의 기온은 확연히 다르다. 한 번 대화를 시작하면 길어지는 게 당연한 두 사람에게 나가라는 소리는 나가서 얼어죽으란 소리 밖에 안된다. 소다 얼음 녹으면 맛없는데~ 찡얼거리는 척 하나 싶더니 본심은? 간결하게 되묻는 저의가 궁금하지도 않다. 구역질 나, 꺼져. 단도직입적인 본론에 폭소가 터진다. 쌍으로 뭘 쪼개. 빨리 나가라고.
"스구루 안 추워? 옷이 그게 뭐야. "
결국 쫓겨난 고죠와 게토는 술집 앞을 배회했다. 마땅히 머물 곳도 없는 도심지의 전광판 아래 그림자 두 개가 늘어진다.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스구루, 스구루우~ 말을 계속 걸어보아도 돌아오는 건 치켜든 중지 손가락 뿐이다. 주홍빛으로 물든 아스팔트 바닥에 쭈그려 앉아, 주홍빛 보다 더 붉게 물든 게토의 뒷목을 바라본다. 전지가 다 되었는지 간간히 깜빡이는 빛이 그의 형체를 일렁이게 만들었다. 나란히 옆에 주저 앉으며 다시 한 번 묻는다. 스구루는 왜 나랑 결혼 안해? 너 같으면 하겠니? 단호한 한마디에 아랫 입술을 삐쭉인다.
언제 생겼는지 모를 버릇이 툭툭 튀어나왔다. 습관과 버릇과 천성. 차이를 구분하기 위해선 약간의 노력이 필요한 개념들이다. 다시 양치를 다시 하는 한이 있더라도 사탕 한 알로 하루를 마무리 하는 습관.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저절로 튀어나오는 입술은 버릇. 자기 만족을 위해 이기적으로 구는 독선주의는 천성. 버릇과 습관은 만들 수 있지만 천성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타고 나는 거니까. 그 진실 하나 때문에 게토는 고죠에게 새로운 습관과 버릇의 계기를 제공한 장본인이면서 스스로의 위치를 한정지었다. 귀찮아. 상식이라는 틀에 끼워맞춰지는 걸 피곤해하는 고죠와는 정반대다.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며 새삼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게에 들어설 때부터 거뭇튀튀 하게 변하던 푸른 하늘이 완전히 어둠에 잠겨있었다. 자신들의 상황과도 비슷하게 보인다.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되어버렸는데, 지켜야할 의무만 늘고 재미는 없다. 시시콜콜 하게 연락을 주고 받으며 상대방으로만 채워진 통화 기록은 이제 업무와 관련된 사람들의 번호로 가득하다. 콘솔 게임기를 가운데 두고 단둘이 밤새던 일은 옛날 일이라는 듯 게임기를 잡아본지도 오래고, 딱딱한 술병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질문을 바꿔볼게."
또 헛소리 하기만 해봐. 알코올에 절여져 풀린 눈 중에 가장 매서운 시선이 닿는다. 아무리 자신이 장난을 자주 친다지만 이런 취급은 좀 서운하다. 같이 장난쳐온게 누군데 그래.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고죠는 포커페이스에 능한 남자다. 소란스러워진 가슴을 뒤로 하고 설득에 나섰다.
"스구루는 지금 쌍둥이들이 연애해서 삐진 거잖아."
"안 삐졌어."
"아냐, 너 삐졌어. 그리고 계속 말 끊으면 나도 삐질 거니까 각오해."
쩝, 반박할 여지가 없다. 할 말을 잃은 게토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곧 잠들 것처럼 보여도 귀 기울이고 있단 걸 알기에 차분히 설명을 이어나간다. 요약하자면 역지사지를 이용해보자는 계획이다. 게토가 원숭이를 싫어하듯 쌍둥이가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던가. 바로 고죠, 자신이다. 그런데 그 고죠가 사랑하는 게토님의 애인이 된다? 눈이 돌아버린 쌍둥이들은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 불나방처럼 달려들고도 남았다. 매달아 버릴거야, 고죠 사토루! 사자후가 벌써 선하다. 한편 인간의 하루는 24시간으로 한정되어 있다. 연인에게 쓸 시간을 게토에게 쏟아부으면 애인 측에선 자연히 관계가 소홀해졌다고 여길 가능성이 높다. 하다못해 게토가 누군데? 말 한 번 잘못했다가 쌍둥이들이 직접 매달아 버릴수도 있지. 하여튼 이 사건을 계기로 쌍둥이 커플은 헤어지게 될 거란 게 요점이다. 잠시 동안만 애인 행세를 하자는 일종의 쇼윈도우 커플 제안에 게토의 귀가 팔랑인다.
솔깃해 하는 것 조차 아웃이란 걸 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간섭해서는 안되는 선이다. 모든 아이들은 독립하길 마련이고, 그러기 위해서 보호자가 있는 거니까. 연인 행세를 해줄 사토루에게도 실례다. 꼬리에 꼬리를 물어 고민을 이어가는데 고죠가 뜬금없이 게토의 이름을 불렀다. 재촉하는 목소리에 엎어져 있던 고개를 든다. 찬바람이 통하자 서서히 초점이 맞아간다. 그제서야 거리의 주황빛 조명이 고죠를 비추고 있었단 걸 알아차린다. 그의 윤곽은 빛으로 감싸여 밝다 못해 붉다. 역광이 심해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의중을 살피기도 전에 스구루.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렸다. 결정을 재촉당한다. 학창 시절이 생각나 나쁘지 않았다. 당시의 사토루는 정말 성급했는데. 솔직히 이렇게까지 고죠가 하고 싶은 일을 직접 권하는 것도 오랜만이지. 아무래도 좋아진 게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을 내리자 호흡이 편해진 착각도 든다. 후후, 웃음이 샜다. 도움을 받는 건 게토인데 고죠가 더 신난 기색으로 폴짝 일어나서 더 우스웠다. 양팔을 벌린 고죠가 한바퀴 빙그르르 돌며 외쳤다. 마치 쇼의 한 장면 같아서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좋아! 이번에도 둘이서 해내는거야, 스구루!
3
속았다. 사토루는 이성애자 아니었나? 가슴. 둔부. 자고로 크기가 전부다. 파렴치한 손동작을 휘적이던 15살의 사토루를 떠올렸다. 어디로 보나 성욕 왕성한 십대의 더티톡이다. 아침부터 죽상인 게토가 마른 세수를 했다. 손바닥의 건조함이 착잡함까지 쓸어가주진 못했다. 머리 아파. 전날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침대에 그대로 늘어진다. 삐- 삐삑삑삐삑삐삐삑. 이명까지 들리다니 가지가지 한다. 홧술을 욕하며 베개로 머리를 감싸 귀를 막았다. 포근한 감촉에 몸을 맡기고 늦잠을 꾀한다. 몇 안되는 휴일 날이니 아침을 겸한 점심을 가져도 좋겠지. 꿈의 세계로 도피를 마치기 직전, 머리 위로 눌린 베개가 훽 하니 들렸다. 갑자기 밝아진 방 안의 밝기에 게토의 낯이 당혹으로 물든다. 게토는 자기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사, 토루...? 대낮부터 당당하게 주거침입을 해온 상대에 넋을 놓았다.
"일어났어, 달링?"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넘기며 상체를 일으켜 세운다. 벙쩍은 눈을 꿈뻑이고 있자 모닝 커피가 손에 쥐어졌다. 버터 바른 토스트도 함께 가져온 고죠가 침대 옆에 걸터앉는다. 보송한 이불에 빵 부스러기를 흘릴 수 없으니 이불 밖으로 유인되는 건 금방이다. 독신의 생활이란 처음부터 어지르지 않으면 일거리가 줄어드는 삶이다. 자연히 몸을 사리는 습관들이 몸에 배인다. 바삭. 토스트를 씹는 소리만 방을 채웠다. 게토가 비운 이부자리로 하얀 뒷통수가 기어들어간다. 무단 침입자 주제에 뻔뻔하기 그지없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무릎을 들었다. 악! 고죠가 외마디 비명이 울리며 걷어차인 엉덩이를 문지른다. 무한한을 두르면 맞지 않을 수 있었으면서. 스스로의 잘못을 알긴 하나보다.
"우리집엔 어떻게 들어온 거야, 사토루."
"네가 연인된 기념으로 비번 알려줬잖아."
그보다 자기야라고 불러주면 안돼? 난 달링이라고 불렀는데. 망언을 내뱉는 고죠의 입을 움켜쥐려 했다. 기세 좋게 뻗은 손은 닿지 않는다.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고죠가 그새 무하한을 펼친 채 까불고 있었다. 하마터면 오리입 될 뻔 했네. 응징하려던 손을 낚아채 제 쪽으로 당긴다. 그의 입술이 손등에 닿기 직전, 순간적으로 균형이 무너질 뻔한 게토가 손을 뒤로 뺐다. 대낮부터 봉변 당한 얼굴이다. 허, 게토가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사이, 폭력 반대! 장난스레 외친 고죠가 이불 속으로 쏙 도망칠 기회가 생겼다. 과음한 건 난데 왜 네가 미친거야. 찝찝한 기분으로 손등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감촉을 지운다.
"어차피 흉내만 내기로 한 거잖아.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조금만 더 자극하면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뱉을 것 같은 게토를 보며 고죠가 실실댔다.
"몰입 잘하면 연기인 거 안 들키고 좋잖아~."
그러고보니 어젯밤 달링 참 화끈했지. 꺅! 없던 기억을 만드는 고죠에게 베개를 던졌다. 아침부터 머리가 끓어오르자 두통이 심해진다. 반전술식을 숙취제로 쓰는 쇼코가 부러워졌다. 그런 거라면 이미 다 봤는데 그냥 주면 안돼? 딴청을 피우는 고죠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에잉- 나름 깜짝 선물이었는데. 실내에 들어와도 벗지 않던 겉옷 안주머니에서 조그만 유리병이 나온다. 표면을 만지자 아직 따끈했다. 시판 꿀물을 껴안은 채 이불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으니 더울 법도 하다. 조금 젖었네. 깨끗한 이마에 엉겨붙은 앞머리들을 떼주며 미련한 짓을 감행한 남자를 살폈다. 누구보다 똑똑한 사내가 이러니 적응이 안된다. 땀이라도 식히기 좋게 거실 창문이라도 열까. 몸을 돌리려는데 다시 손이 잡혔다. 괜찮아. 어차피 우리 곧 나가야 해. 게토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다 안다는 어조였다.
"우리라니? 사토루는 출근 해야지."
추궁을 하자 고죠가 눈알만 요리조리 굴린다. 고죠의 학생들이 안타까워졌다. 농땡이니? 다그치자 아니라며 성을 낸다. 이게 어딜 봐서 선생님이야. 먼지 날리니까 그만둬. 온몸을 비틀며 시위하는 고죠 위로 몸을 겹쳤다. 빨랫감처럼 널린 모양새다. 힘을 빼고 무게를 실으면 고죠의 몸부림도 차차 줄어간다. 고양이 같다. 동물병원에서 목덜미 눌린 채 검사 받는 고양이. 앵알거리며 변명하는 말투도 좀 닮은 것 같다.
"출근은 할 거야. 할 건데-."
"할 건데-?"
"달링이랑 같이 갈래."
얘냐. 황당했다. 속으로만 생각하려던 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사토루, 네가 가야할 곳이 학교이긴 해도 너는 학생이 아니라 선생님이야. 외부인을 데리고 가면 안되지. 타이르는데 그럼 나 학교 안 갈래! 싹뚝 말이 끊겼다. 계속 고집부릴거야? 학교 가! 학교 안 가!!! 입씨름만으로 벌써 지친다. 가기 싫은 이유라도 들어보자. 체념하며 고죠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잔근육이 딱딱해서 만지는 재미가 없다. 흥미를 잃은 게토의 검지는 그대로 고죠의 손 안에 조이스틱처럼 감싸였다.
"어차피 오늘은 임무가 있어서 그쪽으로 가야해. 그러니까 학교 안 가."
주술고전의 선생님이 된 고죠와 교주가 된 게토. 표면적인 직업은 달라도 두 사람의 목표는 같았다. 주술계의 후진 양성 및 보호. 존재만으로 상층부 견제가 가능한 고죠는 선생이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것만으로 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렸다. 그렇게 살린 목숨들이 보다 윤택한 환경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게 게토의 일이다. 산골짜기 수상한 단체의 교주님이지만 본거지에 머무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원숭이 설법은 대역에게 맡기고 본인은 해외에서 선교사 일을 행한다. 뭣모르는 상층부는 츠쿠모 유키의 전철을 밟는 거냐며 역정을 냈지만 솔직히 빈정이 상한다. 암시장으로 빠진 주물과 주구를 회수하고, 해외 인력을 스카웃 해오는 게 게토가 말하는 선교사의 일이다. 어디로보나 츠쿠모 쪽보다 즉각적인 이득을 가져다 주는데 말이 많다.
여기까지가 일단락. 이외에도 두 사람이 할 일은 끝나지 않는다. 1급 이상 안건은 직접 불제하고, 전국에 주령을 풀어 임무지를 사전조사 하며, 비술사를 대상으로 한 주력 운용의 원리도 연구해야 한다. 목록을 계속 나열하다보면 과로사로 죽겠다 싶다. 현실 도피나 하자. 흔들흔들 좌우로 흔들며 게토의 손가락을 관찰한다. 자신보다 길이는 조금 짧아도 두께는 더 두껍다. 빈말로도 고운 손은 아니다. 한참을 조물거리며 갖고 놀다 보면 게토가 한숨을 푹 내쉰다. 달링, 어딘가 애처롭게 불러버렸다. 나도 옷은 갈아입어야지, 사토루. 기실 동행 해주겠다는 의미나 다름없는 말에 벌떡 일어났다. 허겁지겁 청자켓을 벗고 있으면, 의아한 시선이 돌아온다. 두 장이나 겹쳐입고 있던 하트 무늬 티셔츠 한 장을 마저 벗으며 게토에게 건넨다.
"내가 이럴 줄 알고 미리 커플티 입고 왔지롱~."
"안 입어!!"
4
뒷좌석에 앉아 패드에 띄워진 임무 개요를 읽어보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뻑뻑해진 눈을 감아버렸다. 하루가 너무 길다. 평일의 한낮. 아직 점심 시간은 멀었을텐데 차창 밖이 소란스럽다. 시부야 한복판이니 그럴만도 한가. 무엇보다 옆에서 딴짓을 하는 고죠가 가장 신경쓰였다. 읽으라는 건 안 읽고 엉뚱한 잡지 사이트를 서핑 중이다. 「 미인백화 ~여신력을 길러 그 사람의 마음을 다시 한 번 GET!~ 」. 분홍빛 제목이 아찔하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주물 수거는 어떻게 됐지?"
이 보고서엔 인력이 투입되었다는 말까지 적혀 있고 뒷내용이 없네. 패드를 톡톡 건드리며 주의를 돌린다. 어떻게 움직여도 소매를 장식한 초록색이 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하트가 박힌 형광 티셔츠. 찌를듯한 채도가 주변의 색감을 전부 잡아먹었다. 누런 낯의 장정 둘이 뒷좌석을 꽉 채웠지만 일언반구 없는 닛타에게 감사를 느낄 수 밖에 없다. 이지치에게 직접 교육을 받은 그녀는 싹싹하게 추가 정보를 읊었다. 바람직한 보조감독의 표본이다.
"넵! 선발조가 투입되었을 때는 이미 주저사 측이 빼돌린 뒤였다고 함다. 그래도 추적 특화 술사가 편성되어있어 즉시 수색. 시부야 내에서 아직 못 벗어났을 것으로 추정중임다."
생각보다 넓은 범위는 아니다.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이라는 게 조금 신경 쓰일 뿐. 도주하는 주저사들은 주로 두 가지 특성으로 나뉜다. 인적이 드문 곳에 쥐 죽은 듯 숨는 유형과, 비술사 사이를 당당히 활보하는 유형. 게토는 패드에 띄워진 페이지를 옆으로 넘기며 붉은 점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두서없이 사방에 포진된 표시들은 주저사의 잔예가 파악된 곳들이다. 익숙한 패턴을 이어보며 후자일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육탄전에 강한 술사는 아니겠네. 두 번째 케이스의 큰 특징을 떠올려본다. 주술사들이 비술사의 안전을 신경쓴다는 걸 악용한 지능형이기에 1대1로 대치하더라도 술사 본인의 위험 부담은 없다. 다만 상대도 그 점을 잘 알아서인지 좀처럼 1대1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주술사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이동할 때도 목적지를 여러 번 꼬아 중간 거점을 만들어 혼선을 더하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중간 거점 사이를 옮겨 다니는 운반책도 주기적으로 바꾸는 탓에 사람으로 특정하는 건 품이 많이 든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마지막에 제 발로 기어들어올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낫지. 그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결국 주물을 팔아치우기 위해선 이곳, 시부야를 벗어나야 한다. 공교롭게도 게토는 한 도시의 개구멍을 특정해내는 일에 매우 익숙했다. 범죄자들과 게토가 비슷한 사고를 해서 가능한 거 아니냐. 개새끼라 개구멍을 잘 찾는거다. 혀를 내두르는 자들이 있을 정도로 이쪽 분야에서만큼은 고죠보다 먼저 언급되는 인재다. 기껏 주저사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장소로 도망치는데 이용해주지 않으면 섭하지. 닛타에게 이 일대의 브로커나 야쿠자 등 뒷세계 사람이 애용하는 타투샵 목록을 부탁했다. 함정을 팔 준비는 순조로웠다.
빙글 빙글 빙글. 역 근처의 전자 상가 건물로 들어선 자동차가 나선형 오르막길을 오른다. 반고리관이 튼튼해서 다행이다. 비스듬히 기운 차체를 따라 몸이 살짝 문 쪽으로 밀렸다. 무거워, 사토루. 여전히 패드에 시선을 콕 박아둔 고죠도 게토 쪽으로 쏠리는 몸을 기댔다. 문제가 있다면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벌어진 자리였단 걸까. 센터 터널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탓에 고죠는 게토에게 기대기 위해 거의 눕듯이 몸을 기울여야만 했다. 허리가 꺾어져라 삐딱하게 앉은 고죠와 안전벨트 간의 줄다리기가 펼쳐진다.
“사토루, 하나도 안 설레니까 잡지에 나온 걸 시도해볼 생각이라면 그만둬.”
쳇, 요즘 잡지도 믿을 건 못되네. 쓸모를 잃은 패드가 시트 백 포켓으로 연행된다. 처음부터 본래 용도로 쓰인 적은 없으니 해방되었다는 표현이 어울리려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무더위 또한 그렇다. 여름이 주역의 자리에서 해방된 지는 꽤 지났건만 자외선의 공격성이 잦아들 기미는 아직 안 보인다. 이 더위에 야외 옥상에 주차했다간 자동차가 불가마가 되고 말겠지. 에어컨이나 빵빵히 틀어 나중에 두 사람을 데리러 오기로 약속한 닛타가 자동차를 몰고 먼저 떠났다.
“그래서 진짜 목적이 뭐야?”
검은 세단이 딱정벌레만큼 작아진 걸 확인한 게토의 낯이 풀린다. 어느새 표정이 시큰둥하게 바뀌어 있었다. 브로커를 확보해 현장을 덮치면 그만인 임무. 암시장과 주구에 해박한 게토가 맡기엔 최적의 사건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여느 1급 술사 페어로도 충분히 해결 가능한 범위다. 나나미 정도의 베테랑이라면 혼자서도 거뜬하겠지. 고죠는 지독한 근무 태만의 의인화이므로 직접 임무를 선택해 움직이는 상황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번 임무에 특급 주령이 배후에 있지 않을까 의심하는 건 합당한 절차다. 아까 열심히 연애서를 읽던 걸 보면 선물로 애정 공세를 해보세요! 라는 문구라도 있었던 것 같은데. 주령구의 끔찍한 맛은 꺼려지지만 고죠가 열심히 찾아본 주령인데 거부하기도 좀 그렇다. 사귀게 된 첫 날 녹용을 받은 연인이 보일 이상적인 반응을 열심히 시뮬레이션 돌려보는 입장이 된다. 아닌 척 내심 설레발을 치는 게토였다.
“역시 달링. 눈치가 빨라.”
집에서 하던 촌극은 여전히 진행되나 보다. 주먹을 입가로 가져가 히죽히죽 웃음을 삼키는 고죠가 수상하다. 불안하게 왜 수줍어하는 거야. 사토루 말대로 내가 어제 진짜 화끈한 게 맞았던가? 나도 모르게 사토루의 머리를 술병으로 내려쳤다거나... 뜸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최악의 시나리오가 상상된다.
“특급 주령 잡으러 가는 거 맞지?”
불길함에 휩싸인 말끝이 떨린다. 사토루의 미소가 이렇게나 소름 끼치는 건 오랜만인데. 무슨 사고를 칠지 종잡을 수 없다. 같이 장난칠 때는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 적이 되어 게토에게 달려들었다. 번지점프 시간이야! 해맑은 목소리에게 덜컥 붙잡힌다. 어제 오늘 참 자주 손을 잡히네. 평온한 생각을 떠올려봐도 몸은 이미 난간 아래로 추락했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몸을 이리저리 비추며 옷맵시를 확인한다.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렸어도 주름 하나 구겨지지 않은 옷에 만족한다. 옷을 지켜준 무하한의 주인에 대한 치하는 없다. 한 대 쥐어박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할 자식이다. 비술사는 둘째 치고 주저사가 보고 도망치면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자, 이제 데이트 갈까?”
역시 쥐어박았어야 했다. 대담하게 농땡이를 치겠다고 말하는 고죠의 머리를 마구 흩트렸다. 임무 안 할 거야? 날 선 질문이 고죠를 겨눈다. 데이트까지 나와서 일 얘기만 하는 매정한 달링이라니. 하도 구슬픈 목소리라 누가 보면 게토가 잘못한 줄 알고도 남을 대답이다. 미친 놈에게는 미친 놈이 약인 법. 장단을 맞춰주지 않으면 계속 비협조적일 고죠의 행적에 한껏 비꼬는 말투로 거들었다. 일할 시간에 데이트 조르는 자기가 철없는 애인이겠지. 딱 한마디 했을 뿐인데 고죠의 얼굴이 되살아났다. 의도와 달리 한 번 더 자기야 라고 불러보라며 앙코르를 제창하는 팔팔함이 성가시다.
열심히 일하면. 엉겨붙는 고죠의 팔을 떼내며 약속한다. 허울 좋은 립서비스다. 어차피 여긴 볼 사람도 없잖아. 이쪽이 본심. 하는 수 없이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어둔 팸플릿을 꺼냈다. 꼬깃한 종이를 펼쳐들자, 시부야 지역의 약도 곳곳에 빨간색 동그라미가 잔뜩 그려져 있다. 그게 뭐야. 내가 본 주저사 도주 경로랑 다른데? 의문이 담긴 뉘앙스가 아니다. 그거 디저트 맵이지. 싸늘하게 정답을 맞춘 게토가 인상을 찌푸렸다. 한 번 보여줘봐. 착잡한 한숨을 내쉰 게토가 가까이 달라붙었다. 지도가 작아 어깨가 서로 닿는다. 여기가 제일 가깝네. 여기 들렸다 갈래? 코 앞에 위치한 아이스크림 가게를 고른 게토가 고개를 틀었다. 큰 눈망울을 깜빡이며 이쪽을 보고있던 고죠와 눈이 마주친다. 으음~! 여기 괜찮지! 고죠가 한 박자 늦게 대꾸한다. 여기 아이스크림이 위에 벌집을 올려주는데 진짜 맛있다? 얼른 경험담을 덧붙이는 말에 우연히 눈이 마주쳤던 거였음을 깨닫는다. 사토루가 계속 이상한 장난을 치니까 하마터면 오해할 뻔 했잖아. 요즘 따라 높아진 자의식을 주의하기로 하며 지도를 따라가기로 했다.
"그렇게 좋아?"
"응, 좋아."
샛노란 꿀이 우유 아이스크림 위로 진득하게 흐른다. 앙증맞은 스푼으로 한 입 먹은 뒤 헤실대는 고죠를 구경했다. 그런데 대답이 좀 이상하다. 아이스크림이 좋냐는 질문에 좋다는 대답은 문제될 게 없다. 다만 받아들이는 측에서 기분이 묘해진다. 자신을 바라보며 딱 두 단어만 말하니 착각하게 될 것 같다. 평소 같으면 신경도 안 썼을텐데. 계속 자의식이 흘러넘쳐 곤란하다. 다행히도 고민의 주체가 된 사내는 헛소리가 많은 남자다. 쉴새없이 흘러가는 의식의 흐름을 대충 내뱉으며 거리를 누빈다.
"나는 일본에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세 번째로 많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이거든. 스위츠 먹기로 내기하면 달링에게도 안 져."
"아, 그러셔~? 그럼 첫 번째랑 두 번째는 누구인데?"
"커비랑 갸루소네."
"하나는 사람도 아니잖아."
도심의 한낮은 젊은 대학생과 관광객들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대학생 쯤으로 보이는 연인이 팔짱을 끼고 지나간다. 저절로 저들처럼 한창 연애를 즐기는 중일 쌍둥이들이 떠올랐다. 좋은 꽃말들로 엮인 부케. 순백의 웨딩 드레스. 진심으로 행복하다는 미소. 아직은 조금의 유예 기간이 있는 이야기지만 자신에게는 방금 전의 연인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시작해 하나의 가정을 이루게 될 그녀들을 축복해줄 의무가 있다. 그런데 단순히 자신의 이기심을 문제로 이 미래를 방해해도 되는 걸까 망설임이 든다. 지금 상황도 그렇다. 괜한 결심을 해서 아침부터 사토루의 장난에 휘말리고 있다. 후회만 거듭되는 전날의 선택을 다시 고려해볼 필요성을 느낀다. 그 순간 옆구리에 무언가 파고 들어왔다. 고죠의 팔이다. 스푼을 문 채로 나 츠어. 말하는 게 꼭 바보같다. 추우면 그만 먹어. 현실적인 해결책에 청개구리처럼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다. 그럼 팔짱이나 풀던가. 휙 어깨를 들어 팔을 빼냈다. 야아-! 그 덩치에 잘도 앙탈을 부린다. 아니지, 내 귀가 미쳤나. 방금 전 고죠가 낸 소리는 단순한 성질부리기에 지나지 않는다. 손바닥을 펴 귓구멍을 팍팍 내려쳐본다. 마음 같아선 당장 이비인후과로 달려가고 싶은데 일하는 중이라 가지도 못한다. 생각해보니 나 오늘 휴일인데. 사토루 버리고 가버려? 게토의 심란함도 모르고 고죠가 얼굴을 들이민다. 아 쫌, 팔꿈치로 달려드는 그를 밀어냈다.
앗, 죄송합니다. 남들보다 머리가 한 개 더 위에 있는 그들은 곧잘 남들과 부딪혔다. 안 보여서. 시비가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정말 보이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정신이 팔려 노닥거렸으니 충돌은 예견된 사고였다. 허리를 숙이며 사과하려는데 부딪힌 행인이 먼저 선수를 쳤다. 눈을 어따 두고 다니는 거야?! 약이라도 한 사람처럼 어조의 강세가 일정하지 못하다. 푹 눌러쓴 후드 아래의 초점은 바닥을 향해 있다. 벅벅벅. 악을 지르면서도 두 손은 본인의 팔을 긁느라 바빠서 대화를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알 수 없다. 피가 안 나는 게 신기한데. 어찌나 긁어댔는지 살가죽 전체가 팔에 새겨진 문신 색과 같았다. 실컷 농땡이 치고 있었는데 알아서 굴러들어온 미치광이를 두 사람은 은근히 반색했다. 벌써 찾은 것 같은데? 역시 우린 럭키가이라니까. 다 먹은 아이스크림 컵을 구긴 고죠가 게토에게 속삭였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30분 전.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게토는 닛타가 보낸 자료를 확인했다. 장소는 총 5곳. 많이도 뚫어놨네. 감탄하는 고죠를 옆에 두고 스마트폰에 5곳의 상호명을 입력했다. 그 중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가게는 하나. 라인으로 해당 가게에서 판매된 타투 도안을 직접 방문해 찾아볼 것을 피드백한다. 너무 굴리는 거 아냐? 장식으로 올라간 웨하스를 씹으며 고죠가 깐족댄다. 그럼 네가 다녀올래? 괘씸죄로 그의 입에 들어가던 과자 끝을 잡아 뺏어먹었다. 아~! 내 껀데! 상대가 소리치길 기다려본다. 그러나 고죠는 게토의 예상을 처참히 깨트리며 웃기 바빴다. 달링, 그거 알아? 방금 꺼 간접키스야. 우훗, 웃는 걸 보게 될 줄 알았더라면 복수도 안 하는 건데. 속이 다 니글거려서 얹힌 속을 내려줄 음료가 필요했다. 나 주문 좀 하고 돌아올게.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었을 때였다. 휴대전화 통지음이 울린다. 닛타다. 생각보다 훨씬 빠른 일처리에 감탄이 나온다. 이지치가 후배 교육을 엄청 잘했나 보네. 알림음이 세 번째 띠로링을 뱉기 전 수락 버튼을 눌렀다. 피안화임다! 붉은 피안화! 인삿말을 생략한 밝은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전해진다. 그렇다는데? 통화 음량을 키운 덕에 스피커폰이 아니더라도 고죠에게까지 무리없이 정보가 닿았다. 손깍지를 뒤로 넘겨 팔베개를 한 그가 등받이에 폭 기댄다. 팔에 피안화 새긴 놈만 잡으면 되는거야? 달링~ 힘냉~. 잔망스럽게 취한 파이팅은 받아줄 상대가 쌩하니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러 가버려서 쓸쓸한 어깨 체조로 노선을 틀었다.
너 이 새끼들! 날 무시해?! 찢어죽일 새끼들! 발광하는 사내의 어깨를 잡는다. 소매를 걷자 나타나는 길게 늘어진 꽃술과 얇은 꽃잎. 피안화. 닛타가 말한 문신의 정보와 일치한다. 뭐, 뭐야...! 방금 전까지 컁컁거리던게 우스울 만큼 금방 꼬리를 만 남자를 내려다 본다. 형씨, 우리가 제대로 사과를 하고 싶은데. 같이 좀 갈까? 어차피 선택지는 하나뿐이지만.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는 장정 셋과 연관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 거리에 아무도 없었다.
5
임무는 순식간에 종결됐다. 거래상 하나를 잡아 가게를 탈취. 중간에 혼선이 있긴 했지만 주저사 무리를 일망타진해 주물을 확보했다. 마음만 먹으면 더 빨리 끝낼 수 있었겠지만, 시원찮은 데이트를 즐긴 업보로 시계 바늘은 정오를 넘기고 있었다. 규동? 가츠동? 나 덮밥 먹고싶어. 맛집 블로그의 메인 화면 스크롤을 엄지로 내린다. 기절한 주저사를 깔개 삼아 앉은 고죠는 자신의 턱을 문지르며 신중을 기했다. 사케동 집은 없어? 기절한 주저사들 위로 건너 다니며 매복한 잔류 무리가 없는지 확인을 마친 게토가 손을 탁탁 털었다. 사케동 먹을 때 서비스로 메밀 주는 집이 있네. 갈래? 갈래. 다리 사이에 주물이 든 가방을 끼워넣으며 동의한다. 수백 명을 주살한 저주가 이 안에 들어있다기엔 관심 하나 없는 태도다.
저승을 떠난 이들이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고자 하도록 만드는 저주, 1급 주물 「거자필반去者必返」. 초기 불경의 법화경에 새겨진 구절에서 따온 이름대로 떠난 자를 반드시 돌아오게 만드는 저주를 담고 있다. 3초 이상만 바라봐도 피주자가 되고 마는데 주물이 지목하는 '저승을 떠난 이'가 누구인지 파악할 수 없는 게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다. 아무리 오래 보아도 멀쩡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라보자 마자 자살 기도를 하는 피주자가 있다는 개인 차로 인해 실제 위험도에 비해 등급이 낮다는 의견도 있다.
점심 겸 저녁 밥과 디저트 메뉴까지 선정을 마쳐갈 쯤 닛타와 사람들이 도착했다. 난장판이 된 주저사 아지트를 정리해줄 수습반이다. 사색이 된 닛타의 어깨를 도닥인 게토가 입을 떼었다. 보고서는 사토루가 정리할테니 걱정마. 저래보여도 고등학생 때보단 잘 쓰거든. 엄지까지 치켜세우며 안심시키려 해보아도 그녀의 반응은 영 시원찮았다. 혹시 사토루가 무섭니? 그런 거라면 보고서는 이지치에게 내라고 말할테니까 걱정마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걸 용케 들은 사토루가 짖어댔다. 달링! 그렇게 나올거야? 나 상처 받았어! 흥! 고죠의 몹쓸 연기가 진화될수록 닛타가 고개를 내젓는 속도도 빨라진다. 그, 그런 게 아님다! 실은... 무언가 말하지 못한 사전 정보가 있는 분위기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게토는 결국 두 팔을 교차로 꼬아 팔짱을 꼈다. 어설프게 말을 재촉하는 것보단 신체적 표현이 더 큰 효과를 부를 때도 있는 법이다. 게토가 아무리 상냥하게 굴어도 주술계 사람에겐 네 명의 특급 중 하나. 걸어다니는 재해나 다름없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기 전에 재빨리 실토하는 게 좋다는 건 어느 보조감독이나 아는 사실이다. 헌데 그녀는 아까부터 은근히 고죠를 곁눈질로 살피며 말하길 주저하고 있었다.
"사토루- 오늘 임무에 날 데려온 이유가 뭐야?"
이렇게 금방 끝날 임무에, 특급 주령도 없는 곳인데. 왜 데려온 거냐고. 어조에 힘을 주어 강조한다. 절대로 특급 주령이 갖고 싶었던 건 아니다. 이렇게 본인의 손실을 강조하지 않으면 도망치기 일쑤이니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뿐이다. 브르르- 입술을 풀며 딴청을 피우던 고죠가 귀를 후비적거린다. 게토의 열도 함께 올라간다. 사토루. 꼭 한 번에 말을 듣는 법이 없는 친구를 호명했다. 알았어, 말하면 되잖아. 주저사 무더기 위에서 일어난 고죠가 뻐근한 어깨를 쭉 핀다.
"우리 쪽 임무가 끝난 건 맞는데, 이 임무 자체가 끝난 건 아니야."
"그래서?"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去者必返. 두 개가 합쳐져서 하나인 주물이거든."
펼쳐든 오른쪽 검지와 왼쪽 검지를 서로 맞붙인다. 우리가 회수한 거자필반은 오른쪽 조각에 불과하단 말씀! 상큼하게 누락된 정보를 실토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왼쪽 파편을 임무로 담당하고 있는 또 다른 술사가 있다는 거잖아. 그쪽에 용건이라도 있나 보지?"
딩동댕! 댓츠롸잇-! 딱, 튕겨지는 고죠의 손가락을 꺾고싶다. 딱히 별 것도 아닌 일인데 왜 뜸을 들인거야. 짜증나게. 혀를 차려다 닛타가 앞에 있어 참았다. 그녀는 고죠가 생략한 설명을 이어가기로 결심했는지 패드를 열심히 터치하기 시작했다.
"회자정리 측은 현재 고전의 1학년 학생 팀이 파견되어 추적 중임다."
1학년? 그러고보니 이번에 후시구로가 입학했다고 했지. 현장에 투입된 팀원 중 하나가 그일 가능성이 높다. 입학 당시부터 2급을 부여받은 이례적인 강자. 동행한 다른 학생들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와 함께라면 좋은 경험을 쌓고 돌아올테니 걱정할 건 없겠지. 깔끔히 수긍하려는데 아까부터 킥킥대는 소리가 불편하다. 할 말 있으면 어서 하지 그러니, 사토루. 게토의 말에도 밍기적대던 고죠가 닛타를 향해 검지를 까딱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에게 맡겨놓기라도 한 듯 휴지를 받아낸다. 뭐하자는 건가 싶어 가만 보고 있으니 단물이 다 빠진 껌을 휴지에 뱉었다. 달링도 뱉을래? 권유하는 걸 거절하자 휴지 뭉치를 휙 하니 반파된 쓰레기통 안으로 골인시킨다. 그제서야 겨우 웃음을 멈춘 그가 글썽이는 눈가를 훔쳤다.
"메구미가 간 거 아니야. 다른 애들이 갔어."
"뭐? 후시구로 말고 1급 안건을 맡을 수 있는 학생이 있어? 너무 스파르타 교육 아니야?"
"괜찮아, 괜찮다니까~. 어디까지나 주물 수거인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내가 가르친 학생들인데 못 믿어?"
몇 년 전만 해도 등급 측정 오류로 죽는 술사는 매년 두 자릿 수를 넘었다. 지금이야 전국에 포진된 게토의 저급 주령과 고죠의 전국 디저트 지도 작성 일정 덕에 대부분 즉사는 면하고 있지만 완벽한 시스템을 갖췄다고 하기에는 부족했다. 순전히 고죠와 게토. 두 사람의 전력으로만 지탱되는 신세대에게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자라나는 새싹과 닮은 학생들이지만 게토에게는 어디까지나 비유였다. 고죠처럼 처음부터 좋은 씨앗을 골라내듯 대할 선택지는 없다. 개개인에게 맞는 도전 과제를 내어 모두를 안정적으로 성장시킨다. 분수에 맞지 않은 과제를 받은 학생은 직접 보조해주는 한이 있더라도 죽지 않게 한다. 게토의 지도 성향을 오랫동안 봐온 고죠는 필시 이 점을 노리고 오늘의 소동을 꾸몄을 게 분명했다.
"네 학생들이 아니라 널 믿으니까 이러는거야."
"오오- 조금 감동인데~. 나 지금부터 눈물 좀 짜내볼게. 손수건 준비해둬, 달링."
"사토루, 진짜 쥐어짜버리기 전에 작작하고 뚝 하렴."
"넵."
처음부터 그쪽을 따라가달라고 말하면 좋았잖아. 미간께를 엄지로 긁는데 문득 일련의 생각이 스쳤다. 휴일에 말려든 임무, 아침부터 시작된 지긋지긋한 달링 소리, 그 모든 것의 시초는 쌍둥이들의 연애를 막기 위한 고죠의 제안이다. 설마... 파견된 게 미미코랑 나나코니? 흰자에 핏발이 섰음을 지적하던 고죠는 냉큼 닛타 뒤에 숨었다. 아무리 구겨도 숨겨지지 않는 어깨에 실리는 무게를 허허 웃음으로 날려본다.
"실은 누락된 정보가 더 있슴다만-"
"뭐?! ...아니, 미안. 계속해."
"두 술사 분들께선 국제 컨벤션 센터 일본 청소년 3박 4일 교류회 도쿄 고전 대표 신분으로 참가하셨으며,"
"..."
"참가자들은 인근 4성 호텔에서 숙식하며, 남녀는 한층 차이로만 분리해두었다고 함다."
아무래도 두 개 층 이상을 대관하기엔 예산 부족 및 통솔 문제가 있다보니-. 고죠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통에 더이상 듣지 않고 있는 듯한 게토를 보고 설명을 멈췄던 닛타는 선배의 조언을 떠올렸다. '그냥 말씀하셔도 됩니다.' 피가 되고 살이 될 조언을 실천으로 옮긴다.
"쌍둥이 분들께선 타학교 대표로 참가하신 연인 분들과의 접촉도 있겠네여."
닛타 아카리, 2N세. 동생을 걱정해 주술계로 뛰어든 건 좋았지만 쌀가마니 마냥 들렸는데도 웃기 바쁜 남자가 최강이요, 극성맞은 학부모가 그의 짝인 실정에 의아함만 키우게 될 직장 생활을 예감했다.
6
시부야에서 고토구로 이동하는 30여분. 교통신호로 멈춰서는 모든 구간마다 유난히 들썩이는 검은 세단이 하나 있었다. 도쿄 차량 등록 사무소에서 등록한게 역력한 300번대 승용차의 뒷자리는 아비규환이었지만, 푸른 불로 바뀌는 동시에 얌전해졌기에 사고 걱정은 덜었다. 지금 죽으면 딸들을 못보게 된다는 집념일까. 정지 신호가 떠오르기만을 인내하나 싶더니, 붉은 불이 반짝이는 순간 쿡쿡 볼을 찔러오던 손가락을 물어버린 게토가 입 안의 짠 맛을 지우기 위해 물을 들이켰다.
바깥의 시선을 차단하는 창문은 썬팅되어 있지만 햇빛마저 막아주지는 못했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생수병을 들어올리기만 해도 차량 한 칸이 거대한 썬캐쳐 전시대가 된다. 아무리 행동을 서두르더라도 햇빛은 틈을 놓치지 않으니 별 수 없다. 눈살을 찌푸리며 용무를 끝낸 병을 사이드 보관함에 넣어버렸다. 눈을 감고 평정을 다스리려 해보지만 여전한 불빛의 궤적이 방해를 해온다. 새로운 발생지는 다름 아닌 그의 바지 주머니였다. 라인과 이메일, 페이스북과 트위터, 인스타그램... 다양한 어플리케이션 알림이 스마트폰 화면 위로 떠오르며 자기주장 중이었다. 상대방을 위해서라도 답변을 해야겠지만 확인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이미 이 차량을 떠나 목적지에 도착하고도 남은 상태. 새빨개야 할 심장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심정이다. 암울한 게토의 심장을 대신하듯 고죠의 손가락은 방금의 업보로 새빨갰다. 흉지는 거 아냐? 낑낑 엄살부리는 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건드린다. 왜. 선글라스를 고쳐쓰며 삐딱한 시선이 한결같다. 오전에 끝낸 임무로는 몸이 풀리지도 않았을테니 에너지가 주체 안되는 건 이해한다. 그렇지만 네가 어린애니? 기운이 남아돈다고 옆사람에게 푸는 건 이제 졸업해야지. 말싸움 하기 보단 턱끝을 까딱였다. 문자했어? 이런 건 굳이 안해도 된다는 말에 한 쪽 눈썹을 치켰다. 어서 보내두라니까. 이 앞으로 3일간 도쿄 근처에는 얼씬도 말라는 통지를 보내두기엔 고죠의 막무가내스러움이 필요했다. 성가셔 하는 게 뻔한 손짓이 자판을 두들긴다. 그의 어깨 너머로 영문도 모른 채 단문의 협박장을 받은 이의 물음표와 따옴표, 수긍의 메세지가 돌아오는 게 보였다.
자신들의 얼굴이 조금이라도 학생다웠다면 이런 실랑이도 없었겠지. 달링은 학생 때도 딱히 학생 같지는 않았어. 조롱인지 위로일지 모를 말을 건네는 고죠도 이제 곧 삼십줄이다. 그의 얼굴에서 세월을 찾는 건 헛수고였지만 학창 시절의 얼굴을 알아서인지 과거와 달라진 점을 꼬집다 보면 성숙함을 눈치채고 만다. 연륜에 기반한 능청스러움이 깃든 이목구비는 호의를 사기 쉬웠지만 지금부터 들어갈 장소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방금의 연락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밑작업이다. 게토의 손짓에 맞춰 검은 연기가 두 사람 사이에 자리 잡았다. 감초 사탕처럼 짙고 불쾌한 구덩이를 찢고 나온 소녀가 허리를 숙였다. 소리내어 명령하지 않아도 유리 구두를 벗는 행위가 자연스럽다. 신발이 소녀의 발에서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시계탑에서나 들릴 법한 굉음이 울리며 소녀의 흔적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예상은 했지만 상정을 넘어선 소음에 닛타는 핸들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벌렁이는 순환기계통의 상태를 알 리가 없는 고죠와 게토는 소녀가 남긴 구두를 집어들며 하나씩 나눠가졌다.
"아무리 봐도 너무 작아서 발에 안 들어갈 것 같은데. 내가 주머니에 넣고 다닐만큼 귀여운 애인인 건 알지만 실제로는 작지 않다는 걸 명시해주면 좋겠어, 달링."
책받침 돌리듯 구두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돌리던 고죠가 딴지를 걸었다.
"사이즈는 신을 때 알아서 늘어나니까 걱정마."
뒷말을 흘려들은 게토가 덧붙인다. 12시가 되기 전까지는 원하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술식. 저급 주령이 낸 저주이기 때문에 주령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는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없고, 변한 모습 자체가 신데렐라의 드레스로 간주되고 있는 실정이라 완벽한 변장을 위해서라면 알아서 복장까지 챙겨입어야 하는 주제에 12시의 제약은 기가 막히게 지킨다.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지만 주력의 양까지 속일 수 있다는 메리트 하나로 놀이동산까지 찾아가 조복했다. 그 고생을 했는데 막상 쓸 곳이 없다고 여기려던 찰나에 고죠에게 실험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알뜰살뜰한 흑심을 숨기며 상대에게 당부한다.
"네가 주술사인 닛타 쪽. 내가 카모로 변장하는 거니까 헷갈리면 안돼."
"차라리 토도로 변하면 안돼? 그쪽이 훨씬 재밌을 것 같은데."
"무리야. 안 그래도 우타히메 선배에게 받은 교토측 일정에 따르면 토도가 내일 콘서트 때문에 도쿄에 들릴 예정이래."
동선이 겹쳐 들킬 염려가 있으니 패스네. 마지못해 수긍하게 된 고죠가 먼저 안전벨트를 풀었다. 컨벤션 센터 인근의 호텔에 정차한 차량을 향해 두 개의 인영이 가까워진다. 미미코와 나나코. 게토의 소중한 가족들이다. 그녀들은 호텔에서 막 나왔는지 평소의 교복 대신 서로 비슷한 디자인에 기장만 다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게토님! 게토님~! 어린 여학생들이 새된 목소리로 연호하는 풍경은 흔치 않다. 유명인이라도 왔나? 게토님이 누구야? 문제의 게토님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이들이 더 늘어나기 전에 게토도 고죠를 따라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은 뒤 하차했다.
열심히 세팅한 앞머리가 망가지지 않게 손바닥으로 바람을 막은 두 소녀가 달렸다. 치마가 들리려고 하지만 이는 불제할 때도 자주 있는 일이라 신경쓰지 않게 됐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조금 더 빨리 달려 게토님께 폭싹 안기는 게 좋다. 하지만 오늘은 운수가 나빴다. 원수 같은 고죠 사토루만 아니었다면 이루고도 남을 일었을텐데. 그는 어느샌가 담쟁이 넝쿨 마냥 게토님을 품에 끌어 안고 전력질주를 마친 쌍둥이에게 손을 올렸다. 믿기지 않는 풍경에 속도가 천천히 감속한다. 브레이크가 들지 않은 잔걸음에 망연자실함이 담겼다. 여~ 바보같이 인사를 하는 녀석을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토를 향해 설명을 바라듯 올려다 본다. 입에선 고죠를 향한 험한 말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게토님께 당장 떨어져."
"무례해."
밧줄을 다잡는 미미코와 핸드폰을 들어올린 나나코는 준비가 되었다. 게토님과 고죠가 떨어지는 순간 그를 응징할 수 만가지의 계획. 오늘이 결행일이다. 이쪽은 진심인데 고죠는 헹~ 기운 빠지는 소리를 내며 게토님 어깨에 턱을 올렸다.
"그렇지만 우리 사귀는 사이고? 길에서 키스한 것도 아닌데 웬 호들갑?"
못 믿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츄 할 수도 있는데~ 볼래? 요즘 애들은 너무 개방적이라 부끄럽다, 야~. 약올리는 고죠 대신 쌍둥이들은 게토에게 진위 여부 확인을 청했다.
"게토는 그게 정말이에요?"
"아니죠?"
사토루의 장난을 그만두게 하려면 지금이다. 아이들 앞에서 엄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부터가 옳지 못한 선택이었다. 결정을 내린 게토가 허리를 단단히 감싼 팔을 치우기 위해 손을 겹쳤다. 손아귀에 힘을 주어 떼어내려는데 툭 작은 무게감이 실린다. 자신의 옆얼굴에 머리를 바짝 붙이는 고죠다. 다리를 구부려서라도 기댄 것치곤 미는 힘이 약하다. 손쉽게 밀어낼 수 있을듯한 힘에 망설임이 깃든다. 고민의 이유는 알지 못한다. 알아서는 안되는 걸 자신은 매우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머뭇거리는 사이 게토의 입 밖으로는 의도치 않았던 말까지 언어가 되어 떠내려갔다.
"얘들아, 사토루를 너무 박대하지는 마렴. 사토루, 너도 너무 심술부리지 말고."
공포영화라도 본 듯 사색이 된 미미코와 나나코는 그렇다치더라도 고죠까지 상처받은 표정을 지을 줄은 몰랐다. 자신의 발언에 큰 문제가 있었는지 곱씹고 있자 볼 멘 목소리가 알아서 자진납세 했다. 너~? 사~토루~? 길게 내뺀 장음이 유독 거슬린다. 아, 그게 문제였나.
"자기야 몇 살?"
고죠가 바라던 연인 간의 흔한 애칭으로 부르자 입이 찢어진다. 연기 진짜 잘하네. 사토루는 2학년 8반이에용~. 학생들이 아저씨 취급하는 이유의 주된 원인 중 하나. 고전 개그를 치는 고죠지만 들어주는 이는 게토 하나 뿐이었다. 고죠의 복실한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는 손짓을 따라 위아래로 흔들리는 동공 두 쌍이 흐려져간다. 자기...? 자기야라고? 생각보다 확실한 반응에 게토는 찔리는 양심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래 갈 것도 없이 이번 임무 완수 후 '너희도 연애하느라 바쁜데 어떻게 먼저 연락을 하겠어. 너희의 빈자리가 커서 외로워 하던 찰나에 사토루가 많이 위로해주다보니 그렇게 됐단다.' 뉘앙스로 눈물 흘려볼 미래를 구상했다. 원숭이 새끼들을 미미코와 나나코 곁에서 치울 절호의 기회다. 한순간 잘못된 전철을 다시 밟아버렸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밀고 가는 수 밖에 없다. 언제 주저했냐는 듯 완벽한 연기로 쌍둥이를 배웅한 게토는 그녀들이 호텔 방으로 돌아가는 동안 7번이나 돌아보았기에 계속 꽁냥거리는 척 했다.
그래도 역시 이건 좀 이상하지 않나. 쌍둥이가 호텔 로비로 들어가는 회전문 안에 갇힌 채 같은 자리를 멤돌며 현실을 부정하던 때 까지는 괜찮았다. 그녀들이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우는 이모티콘을 잔뜩 보낸 걸 확인한 게토는 고죠에게 자신의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주었다. 계획이 성공적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했으니 그도 이제 자정하겠지. 착각을 깨닫기엔 3초도 많았다. 잘됐네. 담백하게 말한 그는 우리도 숙소로 가자면서 계속 엉겨붙었다. 무게보다 그의 엉거주춤한 자세가 부담스러웠던 게토는 이대로 숙소로 돌아가면 긴 고행이 일어날 것을 직감했다. 하는 수 없이 포옹 대신 손깍지로 타협을 본 지금, 닛타가 급하게 구해온 여분 옷과 생필품을 풀면서도 등을 딱 붙이고 있는 거리감에 한숨이 나온다. 복 나갈라~. 느긋한 추임새가 편안함을 준다. 호텔 방의 누르스름한 조명. 폭신한 카페트. 맞은편 건물 벽이 보이는 창을 가린 아이보리 커튼. 이 방에 어울리는 어조다. 그러나 이 분위기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던 게토는 참고 있던 본론을 꺼냈다.
"사토루는 왜 나랑 애인 행세해?"
나름 큰 마음 먹고 한 질문이지만 당연히 비웃음도 각오했다. 왜. 설렜어? 고죠가 깐죽였다면 아니. 네가 너~무 즐기길래~ 혹시 많이 외로웠던 건 너였나 해서. 맞불을 놓을 작정이었지만 그 수법은 다음으로 미뤄도 될 것 같았다. 왜 안 물어보나 했다며 권태로운 낯으로 자신의 턱을 쓸어내리는 고죠의 태도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닮아있었다. 나이를 먹으며 가벼운 성격이라는 완충제이자 무기를 손에 넣은 고죠는 이를 자유자재로 써먹었다. 무조건 날을 세우기보단 폭포의 낙수차를 겪게 하는 쪽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이미 단신으로도 최강인데 잡기술까지 생활에 적용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 참 상냥한 욕심쟁이네. 고개를 내젓다가도 그 잡기술의 원조가 자신이란 걸 생각하면 미소에 쓴 맛이 함께 어우러진다. 재밌을 것 같아서 그랬는데. 이유로는 부족해? 건방떠는 말투지만 여분의 옷을 옷걸이에 반듯하게 걸어 옷장에 넣어두고 있는 모습은 착실한 청년이다.
"애인 놀이가 하고 싶으면 나 말고 줄 선 여자들도 많잖아."
이런 식으로 내게 시간을 소비하는 건 네게 이득이 없어. 질 나쁜 말을 섞어 대꾸한다. 단호한 말로 벼려진 화살촉의 끝은 고죠를 향한 듯 하지만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특급인 둘이서 이렇게 노닥댈 시간은 없다. 게토야 오늘 하루는 휴일이었으니 잉여 인력을 활용했다 치고 넘겨도 숙박까지는 과했다. 1급 정도의 임무. 보호자 역은 본인 혼자로 충분하니 고죠는 제 갈 길 가라는 은근한 퇴거 명령이다.
"이득은 있어. 나 얼마 전에 헤어졌잖아?"
"그녀와 사귀었다는 자각은 있어서 다행이네."
"날 뭘로 보는거야."
오늘 낮에 간 아이스크림 가게의 알바생이었다. 딱 이틀 사귀고 헤어진 고죠의 여자친구. 그의 전 애인들 중에선 꽤 선방한 기간인지라 술자리의 안줏거리도 되지 못했다. 고백해온 건 언제나 그렇듯 상대로, 오는 사람 가리고, 가는 사람 안 막는 고죠지만 연애관만큼은 개방적인지 커트라인이 낮다는 점의 수혜를 받은 이였다. 가슴이 유독 크고, 키 큰 여성이었으니 심사는 쉽게 통과. 그녀와 나름 길게 간 이유는 특별하지 않다. 평일을 끼고 있어 고죠와 데이트를 빌미로 연락할 시간이 적었기 때문이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라인 몇마디로 결별하게 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라고 생각한다. 그녀 인생에선 최단 기간으로 차인 뒤 무안함만 얻은 시간이었겠지. 이래뵈도 여자 측은 나름대로 진심으로 시작해보려던 것 같았는데 유감스럽지는 않지만 그의 단짝으로서 애도를 표했다. 카운터에서 늘 주문을 받던 그녀가 없는 걸 보면 고죠가 단골인 걸 알기에 스스로 관뒀다는 것까지 쉬이 눈치챌 수 있었다.
"여자에게 불성실한 남자지 뭐겠어."
느낀 바 그대로를 전한다. 그래서 현애인 앞에서 전여친 얘기를 하는 저의가 뭔데? 다 정리한 짐들 틈에서 수건 두 장과 갈아입을 옷을 꺼내며 물었다. 꼭 필요할 때만 상황극 몰입하지. 오리 마냥 입을 댓발 내밀었어도 본인도 하고 싶은 말이었나 보다. 캐묻지 않아도 알아서 말을 이어가는 사내의 시선은 여전히 장롱 안이다.
"헤어질 때 하나 같이 나 보고 사랑을 몰라서 불쌍하대. 웃기지 않아? 옛날 만화도 아니고."
입꼬리를 비틀며 웃는 목소리엔 이해 못할 냉소적임이 섞여있다.
"그래서- 사랑이 무엇인지 나랑 애인 흉내나 내보며 고민해보시겠다?"
고죠의 시선이 장롱 안을 벗어나면 어디로 향할지 짐작된다. 예상한 장소로 옮겨오기 전에 일부러 말을 끌며 발언권을 오래 잡았다.
"우정도 사랑의 일종이라잖아? 마침 달링은 인기 많고."
"흐응~."
"인기만 많아? 정도 많고, 사랑도 많고, 언젠가 칼에도 찔릴 것 같은 걸. 그것도 엄청 많이."
"마지막 말은 생략해도 돼."
"아무튼 옆에서 한 번 관찰하면 좋겠다 싶어서 그랬어. 그럼 이걸로 우리 둘 다 윈윈이겠지?"
게토는 얼굴을 찡그렸다. 고죠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탓에 겉으로 드러난 결과다. 주름이 남기 전에 미간께를 눌러 인상을 폈다. 그래도 납득은 할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지. 그렇지 않으면 한없이 빚지는 건 자신이기에. 고죠의 억지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래도 그렇지. 지금까지 성과가 있었나? 단순한듯 근본적인 의구심을 내비치면 고죠도 진솔하게 부딪혀온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나보다 약해."
오만한 말이다. 발화자가 고죠 본인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지탄받았으리라. 한없이 객관적인 평가는 스스로를 향한 비평도 서슴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솔직히 다른 사람들과 동격의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기엔 무리가 있어. 알고 싶지 않아도 위화감을 느끼고 말거든."
여기까지도 새삼스러운 고백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잠자코 청자의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달링은 다르니까. 가능성을 느꼈어. 너랑 대화하고 있으면 짜증날 때도 있지만 즐거울 때가 더 많아서 좋아."
게다가 무지 강하잖아. 안 그래? 내게 사랑을 가르쳐줄 적임자는 너야, 달링. 열기를 띈 시선이 결국 자신에게로 꽂힌다. 자신의 몸이 장작불에 휩싸인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다. 치밀어오르는 화끈함은 수치인지, 분노인지. 깊게 생각해버리기 전에 스스로 연결고리를 끊어냈다. 아마 학창 시절의 자신이 들었다면 표정관리조차 하기 어려웠을 진실이다. 실제로도 그랬고. 벌어지는 동급생과의 격차, 보람 대신 원망만 돌아오는 일과, 구하고 싶은 사람을 선택할 권리조차 없는 자신.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어하던 과도기가 있었다. 당시에 모두, 그리고 사토루가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었을까. 짐작 가는 어느 방향이든 지금보다 더 상처 많은 길이기에 모두에게 감사를 느끼고 있다. 게토가 워커홀릭이 되어 끝없이 일에 매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 그를 도와준 이들은 모두 제 앞가림은 가릴 줄 아는 인재들이지만 그들이 머무는 주술계를 보호하는 건 게토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란 걸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과찬이네. 열받기도 하고."
들끓는 머리를 식히기엔 샤워가 제격이다. 꺼내둔 속옷과 수건들을 한 손에 쥐고 일어섰다. 비뚜름한 미소를 내건 채 콧방귀를 뀌어주며 샤워부스에 먼저 입장했다. 비품 치고 몽실몽실 잘 생기는 거품과 부드러운 향을 지닌 샴푸에 감탄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게토는 곧 난관에 봉착했다. 다 씻고 나왔더니 호텔 비품 중 크림이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채고 말았다. 사토루에게 갖고 다니는 크림이 있는지 물어나 볼까. 가벼운 마음으로 샤워실에서 얼굴만 빼꼼 내민다. 사토루~. 대답이 없다. 이번에도 자기야라고 불러줘야 갈 거야! 어이없는 농성 중인가 싶어 자기야라고 불러보았건만 기척이 없다. 임시 방편으로 샤워 가운이라도 걸친 채 방으로 나와보니 찾던 이의 모습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 그새 편의점이라도 갔나 보네. 나간 김에 크림 좀 사다줄 수 있냐고 물어보자. 물기가 떨어지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돌돌 감싸며, 고개를 두리번대며 침대 위에 올려두었을 휴대전화를 찾았다. 아, 저기 있었네. 베개 근처에 나동그라진 검은 직사각형 발견했다. 어서 문자 보내고 머리 말려야겠다. 앞으로의 행동을 머릿속에서 정리하였지만 첫 단계를 이행하기도 전에 게토의 손은 반사적으로 휴대전화 옆, 고죠가 벗어두고 간 겉옷을 집었다. 샤워가운 차림으로 나갈 수는 없으니 급한대로 대충 걸친다. 얼음 한 조각을 뒷덜미에 떨어트리는 듯한 감각. 강력한 주력이 느껴진 방향은 자신의 발 밑이다. 그가 몸을 낮추는 것과 동시에 뱀을 닮은 주령 하나가 그 주변을 애웠싸듯 날아온다. 꿀꺽 꿀꺽 꿀꺽. 자신의 꼬리를 물고는 그대로 삼켜가는 녀석을 위에서 보자면 하나의 고리와도 같다. 고리 안을 메운 바닥은 순식간에 형태를 잃는다. 자신을 지탱하던 지면이 사라진 게토는 그대로 계속 추락하다 원하던 층에 도달할 때쯤 몸을 비틀어 착지했다.
"네~ 상황 종료~!"
짝! 손뼉 소리가 경쾌하다. 폭발한 휴대전화와 그로부터 세발치 물러서 고죠 뒤에 숨겨진 쌍둥이만 아니었다면 시트콤 촬영장의 슬레이트를 내렸다고 착각하기 충분하다. 군것질거리를 찾아 편의점으로 향하던 고죠가 아니었다면 쌍둥이는 지금쯤 주저사에게 피습당했을지 모른다. 떨리는 어깨를 감싸안으며 의젓한 척 해도 주저사가 전면에 나타난 이상 이 임무는 그녀들의 역량 밖이다. 고죠와 게토의 본래 계획은 교토 학생으로 변장해 청소년 교류회의 참관객으로 입장하는 것. 정식 참가자인 쌍둥이에 비해 진입 가능 범위는 좁지만 그건 자신들의 능력으로 해결 가능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주저사 측에서 먼저 나서기 시작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들의 목표는 아무래도 쌍둥이. 쌍둥이가 아니더라도 한 번 목표로 삼았기에 그녀들이 무사하다면 다시 덮쳐올 가능성이 크다. 닛타를 호출해 쌍둥이들을 비밀리에 철수시키자 방 안에는 다시 고죠와 게토 둘만 남았다.
"화끈하게 빠른 길로 갈래? 아니면 정석인 대신 느린 길로 갈까?"
선택지를 주는 척 이미 전자로 마음이 가있는 고죠를 보며 게토는 자신이 멋대로 빌린 겉옷이나 벗어주었다. 이미 체념한 자의 마음가짐이다.
"맘대로 해. 다녀올 때 바디크림이나 사오고."
싱글벙글하게 겉옷을 받아든 고죠는 그대로 나가나 싶더니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돌아왔다. 용케 그 사이에 주전부리 두 봉지, 바디 크림 작은 거 한 통, 비정상적으로 큰 여학생 교복 두 벌을 담은 쇼핑백이 그의 팔에 걸려있었다.
7
하사바 사토루와 하사바 스구루는 서로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회장 안을 들어섰다. 해처럼 맑은 얼굴로 이 상황을 즐기던 고죠가 비술사들 눈에는 괜찮다며? 물어보아도 게토 미미코는 인형으로 치마를 가리기 바빴다.
"보이는 사람에겐 안 괜찮잖아!!!"
한껏 데시벨을 낮춘 속삭임이 비명 같다. 입 끝을 동글동글하게 말아올린 고죠의 눈이 가늘어진다. 주의는 금세 분산되어 다른 곳으로 튀었다.
"오, 저기 애들은 과학고인가봐. 로봇 강아지가 춤춰, 달링."
"사- 나나코. 지금 우리 모습으로 연인 행세하면 근친 쌍둥이야. 나나코 역할에만 충실히 해줘."
아, 눼엡~ 눼~. 불만에 찬 코맹맹이 대답은 토라진 나나코가 저절로 떠오른다. 이 나이에 치마가 짧은 건 부담스러워 고죠에게 나나코 역을 맡기고 말았을 때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미미코보단 나나코가 나서는 일이 많기에 참가자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고죠의 나나코 연기에 기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완벽한 적임자다운 연기에 안도하며 회장을 누볐다. 흠칫거릴지 언정 주술사는 아닌 학생들과 눈이 마주치길 십여분. 부스 사이에 주저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잔예를 비상구 근처에서 한 번 발견했다. 그 주변을 중심으로 수색하면 되겠다는 낙관적인 생각도 잠시. 심각할 정도로 성과가 없다. 누군가 직접 실시간으로 잔예를 지우고 있지 않으면 말이 안된다. 그렇다면 주저사는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변장을 한 채 이 회장 안을 돌아다니는 중인 걸까. 단순한 가능성을 유력하게 고려해볼 사항으로 카테고리를 바꾼다. 이렇게 되면 따로 다니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 신중을 기하고 있는 찰나에 낯선 이가 프라이버시 영역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뒤에서 실리는 힘은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무게감이다. 고죠의 것보다 약하고, 기분 나쁘다. 자신의 애인에게 백허그를 하려던 남학생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건장한 남자에게 매미처럼 달라붙은 꼴이 되어 있었다. 많이 바빴어? 어제는 왜 연락 안 받았어. 걱정했잖아~. 다정한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허울 좋은 미소를 지었다. 원숭이 새끼 주제에. 허락도 안 받고 미미코를 끌어안으려 해? 당장 찢어죽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게토가 원숭이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그냥 무시해~ 그렇게 싫어? 히죽이던 고죠가 옆에 있다. 당장 놀리고 싶다는 표정이겠지, 뭐. 운명을 예감한 게토는 고죠의 손등을 톡톡 건드렸다. 자신이 붙잡아 두고 있을테니 마저 둘러보라는 신호다. 그러나 옆을 지키던 인기척은 떠나갈 기색 없이 옆에 계속 머물고 있다. 뭐라도 발견했나? 째진 눈을 살짝만 돌려 옆사람을 확인한다.
"나나코, 어디 안 좋아?"
화가 난 고죠는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이 줄어드는 편이다. 그런 얼굴은 나나코와 거리가 멀지. 이유는 몰라도 이 상태가 계속 된다면 기존의 쌍둥이를 알던 눈 앞의 학생들에게 의심을 사고 만다. 미안해. 나나코 몸이 안 좋은가봐. 우리 이따 보자. 상황을 정리하며 행사장 벽면으로 고죠를 등떠밀었다. 밀려나는 발걸음이 가볍다. 아무래도 고죠도 그 장소를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자판기 코 앞까지 밀린 상대와 마주본다. 안색을 알기 어려운 표정이다. 적어도 평소처럼 원숭이 일로 놀릴 기미는 안 보인다. 단 걸 먹으면 자신이 본 걸 술술 불어주지는 않을까. 음료라도 뽑아줄 심산으로 지갑을 찾았다. 언제나 지갑을 넣어두는 뒷주머니에 손을 돌려본다. 그러나 감람색 치마에게 수납공갑이 있을 리 없다. 아차 싶은 마음을 숨기기 위해 팔랑이는 치맛단이나 탁탁 정리한다.
"사토루, 뭐라도 발견한 거야? 왜 그래."
지금 우리는 미미코와 나나코야. 의심 받을 행동은 하지 말아야지. 타이르려던 말이 싹뚝 끊겼다. 지금부터 따로 행동하자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두 눈을 꿈뻑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방금 전까지 생각한 방향성이니 수긍하니 그만이다. 여태껏 먼저 권유하지 않았던 이유도 오직 고죠가 자신 곁을 계속 맴돌고 싶어하는 눈치길래 모른 척 해주고 있었을 뿐. 이렇게 선수 쳐온다고 해서 안될 건 없다. "어차피 연인 행세를 못한다면 굳이 붙어 있을 필요는 없겠지? 특급이 뭉쳐다니면 그건 그거대로 효율이 떨어지잖아." 여태껏 게토 본인이 해온 주장을 고죠 입으로 들으니 떨떠름하다. 자신의 할 말만 끝낸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먼저 이동하는 고죠의 뒷모습에 석연찮음을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왜 갑자기 성질이래. 걱정을 짜증으로 덮는 것으로 마무리한 게토가 신발 앞코를 가볍게 찼다. 변변한 화풀이도 되지 않는다. 제일 처음 물어보았던 질문. 고죠의 기분이 갑자기 나빠진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이미 날아간 직후였다.
고죠와는 비상구 앞에서 다시 만났다. 잔예를 쫓으며 헛발질만 날리는데 피곤함을 느낄 참이었다. 그는 그새 기분을 갈무리 했는지 방금 전의 다툼은 없었다는 양 굴었다. 단순히 환기를 했다기엔 지나치게 들뜬 면면에 미소가 둥실둥실 떠다녔다.
"스구루, 이쪽이야. 이쪽! 수상한 걸 내가 발견했어!"
가까워지는 홍조에 무심코 허리를 물린다. 너무 가깝잖아. 거리를 두자 혀를 찬다. 애새끼 같은 행동이다. 어디로 가면 돼? 살랑살랑 걷는 고죠를 앞장세운 게토가 물었다. 따라오면 안다는 대답은 끝까지 비밀로 할 생각인듯 하다. 단층이 안정적인 하얀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오던 게토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EXIT. 도망을 감행하는 초록빛 사람의 그림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스구루? 웅얼거리는 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금방 갈게.
두 사람이 계단을 내려온 건 총 3개 층. 회장의 본관이 2층에 위치했던 걸 생각해보면 이 앞은 지하다. 창 하나 없는 복도는 인공적인 불빛에 잠식되어 있었다. 전구가 하나라도 나가는 한 시야가 단숨에 좁아질 폐쇄 공간이다. 수상한 게 뭐였는지라도 알려주면 안돼? 스몰토크로 적막을 채워보려 한다. 아아~ 명랑한 화답이 돌아왔다. 놈들의 매개체는 그림자였어. 술식의 일환인거지. 그렇게 설명을 시작한 고죠의 말은 이랬다. 메구미가 십종영법술을 응용해 그림자에 물건을 수납하듯 놈들도 그림자에 자신들의 몸을 숨겨왔다. 그걸 순간이동처럼 사용하니 현장 검거가 어렵기는 당연지사. 하지만 자신이 누구랴. 육안의 고죠 사토루 아니던가. 대충 훑을 심산으로 내려온 눈 앞의 방에서 더러운 잔예와 거자필반과 비슷한 주력이 느껴졌다고 한다. 실례합니다~! 고죠가 조심성 없이 확인도 않고 문고리를 돌렸다. 걸쇠가 없었는지 손쉽게 열렸지만 조명 하나 없는 방은 짐승의 아가리와 같다. 새카만 암실에 발을 내딛은 고죠는 금새 그림자에 집어삼켜졌다. 탁, 탁. 방 안을 탐색하며 구둣발을 구르던 소리가 잦아든다. 여전히 문턱 너머에 서있는 게토의 모습에 고죠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스구루? 거기서 뭐해?"
"자료 조사가 훌륭하네. 하지만 한 가지 서투른 점이 있어."
노력이 가상하니 60점은 줄까? 그래도 낙제야. 사뭇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딴소리를 해온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스구루. 그 사이 나 몰래 뭐 잘못 먹고 왔어?"
상대의 돌발 행동은 당혹감을 부른다. 곤두서는 솜털을 무시하며 대화를 재개해본다. 그래도 방심은 할 수 없어서 언제라도 대응할 수 있게 왼쪽 다리는 뒤로 빼두었다. 당장 싸울 생각은 없는 지 게토는 자신의 뒷목만 문지르며 여유를 부렸다.
"사토루랑 나는 엊그제부터 사귀기 시작했거든. 그래서 사토루는 요 이틀 내내 날 달링이라고만 불렀어. 정말 유치하지 않아?"
젠장. 욕할 새도 없었다. 술식까지 자연스럽게 전개해놓을 심산이었던 것 같은데 얕은 수는 통하지 않아. 훈수와 함께 주령이 날아들었다. 미리 대비한 덕에 첫 수는 피했지만 이어지는 연사를 피하지 못했다. 허벅지에 박힌 하얀 주령이 꿈틀거리며 촉수를 늘린다. 10개의 다리가 바지에 엉겨붙어 움직임이 제한된다. 한없이 불리해진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불제를 방해오는 점액이 성가시다. 설상가상으로 눈앞까지 흐려져 간다. 독을 내포한 점액이 본격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신호다. 남자의 신음 소리에 맞춰 낄낄 소리가 울렸다. 민화에서나 봤을 법한 외눈박이 호롱불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남자 뒤에서 히죽댔다. 게토는 낑낑거리는 고죠의 어깨를 발로 차 넘어트렸다. 작신작신 밟아 주며 눈을 가늘게 뜨며 웃고 있지만 그저 조롱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발 아래에 깔린 남자의 허덕임이 커질수록 외양의 변화도 생겼다. 하얀 백발은 흔하디 흔한 흑발로. 커다란 체구는 미성숙한 육체로. 쌍둥이의 애인 자리를 차지했던 원숭이가 바르작거렸다. 아니, 원숭이는 아니겠네. 주력이 존재한다. 고죠의 모습에서 원숭이의 모습으로 두번째 변신을 했다기엔 방금 전 쓴 독은 술식을 제한하는 능력이 있다. 이 모습이 본인의 진짜 얼굴이라는 의미다. 차라리 주력을 숨기는 주구를 써왔다는 쪽이 말이 되겠어. 추론이 정리되자 마자 머리 끝에 도달한 감정은 분노였다. 감히 우리 애들도 모자라 사토루까지 욕보여? 곱게 제압하지는 않을 심산으로 발 끝에 중심을 실어 신경을 누른다. 돼지 마냥 꽥꽥 울어대는 비명이 시끄럽다. 이제는 자포자기를 한 건지, 미친건지. 비명 소리를 키워가던 놈은 갑자기 웃어대기 시작했다. 시끄럽네. 사토루에게 연락도 해둘 겸, 입이나 막아두자. 작은 주령 하나를 불러내며 스마트폰 카메라 렌즈를 켰다. 화면에 다 담기게 된 남자의 모습은 무척이나 비루하다. 그런 상태에서 마지막 말을 외칠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맹목적인 맹신. 그 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광기가 개거품을 물었다.
"하, 하하핫-!!! 됐어, 됐다고!!! 억울하게 매장된 순리여! 당신들은 구원받으리-!!!"
이 방에서 생각을 오래하는 순간, 당신이 진 거야. 쉭쉭거리는 지탄도. 특급도 별 거 없네. 되돌려진 조소도. 전부 뿌리치기 위해 발을 거뒀지만 골든타임은 이미 지나간 후였다. 자신이 패배할 걸 이미 상정한 주저사는 지금만을 기다려왔다. 거자필반의 짝. 회자정리를 바닥에 미리 설치해두고 그 옆에 제압되어 수모를 당한다. 자신을 심문하기 위해 가까이 온 주술사는 주물까지 들여다 볼 수밖에 없겠지. 사람의 시야란 건 의외로 넓으니까 말이야. 천하의 고죠 사토루를 잡은 게 자신이 아닌 게 조금 아쉽지만 이정도면 훌륭한 성과였다. 비틀거리며 혼란스러워 하는 남자를 확인해본다. 머리를 감싸쥔 손 끝이 떨린다. 본래라면 죽어서 이 세계에 남아있어선 안되는 잔여물의 반응. 꼴사납기 짝이 없다.
잔여물이란 윤회와 운명의 고리에서 벗어난 이단들이다. 하나의 영혼 당 부여받은 운명은 하나씩. 몇 번을 되살아나더라도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순리지만 잔여물들은 뻔뻔하게 탈선하여 다른 이가 가졌어야 할 운명을 가로챈다. 죽어있어야 할 이가 계속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잔여물인 이가 원래라면 보지 않았을 시험에 합격했다고 치자. 당연히 정원에는 그가 채워지고, 본래 합격했어야 할 운명을 지닌 자는 자신의 운명을 박탈당한다. 그 시험 하나로 한 사람의 학력과 교우관계, 경험이 전부 어긋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끝나면 개인의 문제겠지만 이런 피해자가 한두 명이 아니라면? 사회적 교류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란 생물은 끝없는 외부 자극을 만들고, 받는다. 잔여물에 의해 운명이 바뀐 이들이 다른 장소로 옮겨가 기존의 순리를 따르는 이들까지 망칠 수 있다는 의미다. 암세포보다 지독한 질병이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숙주를 파괴해야 한다는 건 당연한 상식이고. 때마침 숭고한 우리의 사도 앞에 성물이 내려왔다. 마주하는 순간 죄인이 따랐어야 할 본래의 순리. 쉽게 말해 '전생'을 비춰주는 두 개의 거울은 그들의 죄를 대신 꾸짖어 주는 천군만마다. 저승에 있어야 할 이들을 모두 되돌려 보내면 이 세상도 다시 순리대로 돌아가겠지. 그렇게 된 세상이라면 모두가 더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믿음 아래 차오르는 숨을 고른다. 방금 전의 외침으로 기력이 쇠했다. 아득해진 머리로 눈엣가시 같은 잔여물의 신음을 자장가 삼았다.
8
혈관을 이동하던 수분이 모조리 몸 밖으로 빠져나간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게토의 눈에는 원초적인 감정만이 서려 동공이 수축해간다. 흔들리는 눈빛은 빛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다음을 기약했다. 안면의 피부가 짖이겨서 시야를 확보하기 힘들었지만 10년 전에 비해 조금도 바뀌지 않은 길을 따라 걸으면 개구멍까지는 금방이었다. 다툼을 하다 실수로 뚫어버린 담벽락 아래의 구멍이다. 싸운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되돌아보면 우스운 장난에 불과하지 않았다. 선생님께 들킬새라 인근의 덤불을 끌어다 가렸더니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눈 감아 주신겠거니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우연찮게 개통해버린 개구멍은 구멍가게로 가는데 뺀질나게 이용됐다. 그 추억을 뒤로 한 건 우리 중 누구였을까. 나름대로 괜찮은 관계였는데. 차갑게 식어가는 몸과 달리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었다. 아드레날린은 사실 기름의 한 종류였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온몸이 저릿거리며 불타는 감각을 체험한다. 오른팔은 이미 불탄 채이니 느껴질 것도 없을텐데 놀라운 일이다. 오른팔. 그러고보니 지금의 내겐 오른팔이 멀쩡히 존재했다. 어째서? 마음이 질주하기 시작한다. 나는 분명 최선을 다했다. 팔 하나쯤 잃었어도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무력이 있다. 최악의 주저사. 최강의 주술사와 대척점에 서며 동등함을 유지해온 길이 부끄러울 리 없다.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한 거니까. 그렇지만 역시 마지막에 그가 찾아온 건 반칙이라고 생각한다. 웃음을 참으며 불러두었던 호롱불 주령에게 손짓했다. 길게 뻗은 혀가 오른팔을 감싸온다. 이대로 팔을 뜯어내면 기억 속의 자신과 같아질 수 있을까. 막연한 고민을 하자 마침 익숙한 주력이 가까워지는 걸 느낀다. 언젠가 죽게될 거라면 차라리 기억 속의 자신처럼 죽고 싶다. 강한 충동이 귓가에서 결단을 종용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거야, 스구루."
팍. 미미코의 교복을 입은 마른 남학생. 다시 말해 나나코의 애인이던 주저사를 기절시킨 뒤 끌고온 고죠가 어슬렁 걸어왔다. 경각심 없이 하품이나 하는 고죠가 못마땅하다. 전에 만났을 때는 참 안심되었는데 말이야. 왼손을 쥐었다 피면 그 신호만을 기다려온 존재가 즉시 반응해왔다. 맹렬한 속도로 비상구 계단을 내려온 설녀가 고죠를 제치고 게토 옆을 차지한다. 그의 팔을 조이던 호롱불은 저만치 튕겨져 나동굴고 있었다. 처음부터 상대가 고죠가 아님을 눈치챈 게토가 비상구에 대기 시켜두었던 해주 특화 주령이다. 청량해진 공기와 함께 이성이 다시 일을 재개했다. 맑아진 시야가 주변을 확인한다. 자신의 딸들과 똑닮은 여고생 교복을 입은 남정네 넷이 방 안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징그럽다 못해 한심한 풍경이다. 두 눈을 질끈 감고 가장 먼저 할 일을 떠올렸다. 우선 저주에 걸렸을 당시 떨어트린 휴재전화를 주웠다. 운 좋게도 액정이 깨지지는 않았다. 멀끔한 유리 기판을 두드려 닛타에게 연락을 취한다. 조금이라도 빨리 상대방에게 신호음 닿기를 바란다. 더이상 맨정신으로 이 공간에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딸내미들이 자기만 봐서 신나시시겠어요, 게토 아범님?"
"쇼코..."
혼돈의 장소를 겨우 탈출한 게토였지만 그대로 푹 쉬는 일은 허락받지 못했다. 불행히도 그의 다음 행선지는 집이 아닌 고전으로 정해졌다. 스스로 해주했다지만 제대로 후조치를 받았다는 보증인이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소독 약품의 알싸함에 향긋함을 다 잡아먹힌 커피를 들이키며 쇼코가 실실거린다. 진단은 끝났지만 용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그도 그럴게 그녀는 지금 무척이나 즐거웠다. 매일 퉁명스러운 미소나 짓던 동기를 놀릴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게토가 대차게 오해한 점이 하나 있었다. '미미코와 나나코가 연애를 한다.' 그의 가장 큰 고민은 사실 없던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들 또래에 해당하는 두 비술사 남성진이 주물이 발견된 장소와 동선이 자주 겹친다. 다음과 같은 창들의 목격담에 의해 허니 트랩 작전이 세워졌다는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보통의 학생 술사들에겐 이런 임무를 시키지 않지만 비술사 사회 속 교류 경험이 적은 그녀들에겐 필요한 맞춤 수업 중 하나였다. 비밀 임무이기도 하니 담임인 고죠 외에는 아무도 몰랐던 사실. 알았다고 해서 알려줄 수 있는 일도 아니니 원망하기도 애매하다.
"그럼 고죠랑은 이제 헤어지는 거야?"
너도 이틀은 갔네~. 고죠의 애인 치고 선방한 연애 기간을 축하해온다. 애초에 사귄 적이 없는데 어떻게 헤어져. 앓는 소리를 내는 게토의 어깨를 도닥였다. 그만 놀리라는 간청을 받아들인다. 그래, 쉬어라. 퇴거 요청을 놓을까 고민했지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문 밖의 실루엣을 확인한 쇼코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고죠와 게토를 핑계로 휴식 시간을 가질 계획이다. 누가 오면 난 학장님 뵈러 갔다고 전해줘. 살랑이는 손짓과 함께 사라진 여인의 자리를 풍채 좋은 남자가 채운다. 그는 긴 다리를 꼬며 앉자마자 빈 머그잔 속을 확인했다. 우와, 사약이야. 패스. 차라리 이게 낫지.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낸 알사탕을 바스락 깐다. 달링드 머글랭? 아직도 이어지는 호칭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이제 그만해도 됐잖아. 제대로 된 상식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남자가 진절머리쳤다. 스구루는 자기가 볼 일 끝나면 입 싹 닦는 편? 너무하네~. 단단히 나사빠진 대답이다. 무슨 소리야. 모른 척 잡아뗀다. 말했잖아. 난 사랑이 궁금하다고. 가르쳐주기로 한 거 아니었어? 기어코 더한 소리를 내뱉는 고죠에 치를 떨었다.
"그 말 진심이었어?"
"그럼 뭐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애들과 나를 괴롭히는데 필요한 명분을 얻고자 급조한 변명."
단호한 게토의 부정에 고죠도 더 강하게 나가기로 마음 먹는다. 나는 명분 없이도 잘 괴롭혀. 이미지를 내어주고 설득을 취한다. 전국시대의 장군들도 울고 갈 희대의 전략이다. 그건 그렇지... 평소에는 잘도 따박따박 반박하는 게토도 이번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미련이 남는지 이게 아니면 이해가 안되는데. 계속 궁시렁거린다.
"이해 못해도 납득하기 했잖아."
아랫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민다. 고집에는 고집으로 맞대응한다. 가벼운 분위기를 유도했지만 상대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나 보다. 심호흡을 하고, 발언을 고친다.
"한가지만 물어봐."
그정도는 대답해줄게. 이게 뭐라고 심혈을 기울이는지. 약간의 침묵 속에서 할 말을 고른 게토가 입을 열었다.
"당시에는 혼란스러워 말 못했지만 사토루, 너도 분명 그 주물을 봤지? 사람들이 오기 전에 쓰러진 주저사를 정리한 건 너였으니까 볼 수 밖에 없었을거야."
그게 질문? 미묘한 어쿠에 확인을 받자 자신 없는 시선이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궁금한 건 그 주물이 전생을 보여준다는 사실이 맞냐는 거야."
네가 생각하기에도 네가 그 주물을 통해 본 게 전생이었어? 그런데 너는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었던거야? 아니면 혹시 아예 보지 못했던 걸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뭐지. 너와 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길래. 덜컥 치솟는 질문 중 가장 온건한 사실을 요구했다. 그 이상을 알게 되면 어떤 태도로 사토루를 대해야 할지 고민할 수 있는 모든 선택지가 봉쇄되고 만다. 대답이 늦어질수록 답답함이 늘어간다. 그런 애탐을 고려해줄 생각조차 없는지 말없이 책상을 톡톡 치는 검지 손가락은 오늘 아침, 멋대로 게토 집의 도어락을 연 범인이다. 톡톡. 삑삑. 두 개의 스타카토 음이 이명처럼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문득 당시에는 잠에 취해 떠올리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렸다.
"애초에 내가 네게 우리집 번호를 알려준 적이 없어."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야. 애초에 나 취했어도 필름은 안 끊기는 편이라 어지간해선 다 기억하거든."
야, 너 저번에 토했을 때 기억 안 난다며! 딴길로 새려는 흐름을 붙잡는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 해. 아무튼 이번 생에서 너한테 가르쳐준 적 없는건데 어떻게 알았어? 적반하장이다. 결국 이번에 백기를 든 건 고죠 측이었다. 드문 일이다. 가지런한 손가락 3개를 펼쳐든 고죠가 대화의 환기를 시켰다. 약하지만 절도있게 흔들리는 손짓은 강조와 집중을 부른다.
"스구루는 고양이 목숨이 9개, 사람은 3개라는 걸 알아?"
고죠는 너그럽게 미소지었다.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가지만 결국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부터 늘어놓는 심보는 예시로 든 고양이에 가깝다.
"데이비슨의 늪의 인간 실험도 알겠지? 늪을 지나던 사람이 죽고, 그의 기억을 가진 똑같은 사람이 늪에서 걸어나와 일상생활을 지속한다면 그는 과연 누구인가 어쩌구 저쩌구. 최근에는 복제품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대세지만 기억되지 못하는 순간이 진정한 죽음이라고 하는 사람의 의견도 적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심심풀이 토크로는 좋은 주제라고 생각해. 턱을 주억이는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고죠가 이렇게 말을 장황하게 하는 경우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개를 합한 맥락이야. 모든 영혼은 언제나 같은 삶을 반복하지만 고양이의 경우에는 아홉번, 인간의 경우에는 세 번의 생 정도를 기억한 채 윤회해서 운명을 비트는 게 가능하거든. 어느 삶을 기억할지는 선택할 수 없는데다 한 영혼에 복수의 일생을 담아내는 행위 자체가 그릇에게는 무리가 가니까 보통 단 한 개도 기억 못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네에~ 질문?"
선생답게 굴 필요 없으니까 설명이나 계속해. 휘휘 손부채로 속행을 원하자 불성실한 학생이라며 매도가 돌아온다. 원래도 자신의 불량한 기질을 알고 있었으니 타격은 없다. 게토가 농담을 받아주지 않자 이야기는 다시 본 궤도에 올랐다.
"우리가 수거한 회자정리와 거자필반은 이렇게 돌고 도는 영혼의 한 순간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해. 그렇지만 자각하지 못했던 지난 일생을 받아들이는 행위 자체로 그릇, 다시말해 우리의 육체에는 큰 부담이 되는 게 문제였어. 지난 삶과 이번 삶의 차이가 존재한다면 그 괴리감을 어떻게든 메꾸기 위해 영혼이 어떤 짓이든 감행하게 되거든. 설령 그게 그릇의 죽음이라고 해도."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게토의 반응을 잰다. 참고로 내가 괜찮았던 건 이미 알던 내용의 기억이 보여서였어. 백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받아들이기 쉬우려나. 답이 없는 게토의 공백을 없애려는지 여담을 줄줄 분다. 고죠가 한없이 담담한 어투로 대수롭지 않게 말해서 그렇지, 이건 많은 인류가 궁금해온 내세에 대한 정의나 다름없다. 게토에겐 숙고할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의 전생과 현생이 왜 다른지. 이런 비밀을 지금에서야 밝히는 이유가 왜인지. 눈 앞의 상대는 이미 많은 힌트를 주었다. 이 퍼즐을 조합해내는 건 자력이 아니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뉘앙스로 보아 고죠는 예외적으로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에 해당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단순히 기억하는 사람치고는 너무 많은 조건을 안다. 주술계의 명가들이 숨겨온 사실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하물며 이와 비슷한 비밀을 고죠는 이미 한 가지 지니고 있었다. 육안. 천하를 내려다 보는 신의 증표라 해도 좋았다. 여섯개의 눈, 세 쌍의 굴레, 인간의 그릇이 담을 수 있는 세 번의 삶을 스스로 고를 수 있는 능력이 한 가지 더 숨어있었다 해도 그다지 놀랍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의 협상은 결렬인 게 더더욱 당연하네."
왜?! 고죠가 엄악한 낯으로 일어섰다. 바퀴 의자가 힘없이 뒤로 넘어진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이 갈팡질팡 흔들렸다. 내 설명에 무슨 정나미 떨어지는 부분이라도 있었어? 경계심이 가득한 어조였다. 혼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네. 슬랩스틱 코미디를 본 사람 마냥 나직한 웃음을 흘린 게토가 태평히 허리를 숙인다. 고죠가 엎아놓은 의자를 도로 세워놓는 김에 한 바퀴 돌려본다. 흡집을 살피는 과정이다. 다행히 깨끗하다. 기물 파손 혐의로 어딘가에 출입금지 당하는 건 학창 시절로 졸업하고 싶었다. 검은색 인조 가죽을 팡팡 두들기며 상대를 다시 앉히자 흰자가 가득한 눈동자가 향한다. 조금, 아니 사실 많이 부담스럽다. 게토는 의자를 앞으로 끌어 두 사람의 거리를 무릎이 닿을랑 말랑한 거리까지 좁혔다. 형태 좋은 이마가 드러나도록 가볍게 앞머리를 넘기며 손끝으로 부드러움을 느껴본다. 단순한 동작에 전율이 통한 고죠는 뚫어져라 보기를 관뒀다.
"사토루, 네가 아직 깨닫지 못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내가 보기에 넌 이미 사랑을 알고 있어."
허? 보기 좋은 입술이 떡 벌어진다. 실없는 감탄사가 그가 얼마나 황당한 상태인지 대변했다.
"네 말대로 우정도 사랑의 일종이라며. 네가 나를 친구로 여기며 아껴준다면 그게 사랑이 아니고 뭐겠어. 더군다나 이렇게 한 번의 생을 겪고도 나와 다시 친구가 되어준 걸 보면 너는 날 정말 좋아하는 거겠지? 너무 틀에 박혀 생각하지마. 넌 너만의 사랑을 하면 돼."
음- 안 하려던 말을 하려니 어렵네. 지를 불은 다 질러놓고 머쓱하게 볼을 긁적이며 짓는 웃음은 정작 수더분하다. 너는 내가 죽을 때 어떻게 그런 말을 태연하게 할 수 있었어? 게토의 딴소리에 고죠는 그의 손길이 닿았던 머리를 헤짚는다. 발을 쾅쾅 구르지 않은 데에는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그럼 스구루는?"
"어?"
"스구루도 날 사랑해?
"그게 중요해?"
"무척이나."
빠른 템포로 말이 오가지만 평소보다 딱딱한 말씨였다. 게토는 그 어조를 무시했다.
"사토루, 내게도 너는 무척이나 소중한 친구야."
그 한마디에 고죠는 짜증이 솟구친 듯 했다.
"그걸론 부족한데."
고죠의 대담한 시선이 불편하다. 눈길을 피하려고 하자 무릎 위에 올리고 있던 손이 붙잡혔다. 이걸로 몇 번째 겹쳐진 온기인지 셀 수 없다.
"난 막 일어나서 베개에 눌린 네 볼자국을 놀리며 아침을 맞이하고 싶어. 토스트에 올릴 계란 후라이가 반숙일지 완숙일지 다투는 것도 괜찮지. 잘 다녀오라고 입맞춤을 요구하면 같이 출근하는데 무슨 헛소리냐고 정강이를 차여도 좋아. 출근하던 중에 할인점 매대에서 충동적으로 편지지를 사서 임무하는 도중 땡땡이 치며 네게 편지를 쓸래.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와 마시지 못할 맥주 꾸러미를 사들고 퇴근하면 어서 편지를 읽어보라고 괴롭힐거야. 막 씻고 나온 머리를 서로 말려주며 팔이 빠질 것 같다고 엄살 부리기는 매일 할 거니까 각오해. 잠들기 전에는 오늘 있었던 즐거운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까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 잠들면 좋겠어."
속사포로 쏟아진 버킷리스트에 머리가 멍해진다. 사토루, 그건- 허탈한 게토의 중얼거림을 바로 낚아챈다.
"그래, 고등학생 때는 충분히 다 하던 일이지. 졸업 후에는 하지 않는 일들이고. 어른이 된다는 게 뭐야? 어른끼리는 사귀지 않으면 이런 일을 하면 안된다는 건 이상해."
고죠의 말이 이어질수록 심장이 무거워져간다. 이래서는 안돼. 그를 제지하기 위한 호명을 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고삐가 풀린 짐승 같기도, 방황하는 어린 아이 같기도 한 진심이 범람한다. 고죠 사토루는 이기적이고, 즉흥적이며, 큰 사고가 나지 않는다면 자신의 욕망을 특별히 억누르지 않는다. 게토가 그토록 한없이 크게 생각한 천성의 영역이 그를 궁지에 몰았다.
"스구루. 그럼 반대로 물어볼게. 고등학생 때의 너는 내가 말하는 의미대로 날 사랑했어?"
끝의 음이 올라가는 문장은 질문의 형태를 띄지만 고죠의 눈은 이미 타오르고 있었다. 이미 답을 확신하는 눈이다.
게토 스구루는 인기가 많다. 가벼운 만남과 헤어짐도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사랑을 겪어본 적은 없다. 첫사랑을 죽여본 건 지금으로부터 십여년 전의 이야기. 건방지고, 안하무인에 오만하기까지 한 도련님은 자신과 하는 일마다 처음이란 말을 내세웠다. 스구루도 나랑 하는 게 전부 처음이었으면 좋았을텐데. 평범한 서민이 사회화 과정을 받지 못했으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모르는 눈치다. 터무니 없는 억지를 듣자마자 눈썹에 힘이 들어간다. 배가 찢어져라 웃으면 바보 취급이냐며 화내는 얼굴이 가까워졌다. 귀 끝까지 붉어진 낯을 뇌리에 담는다. 그때 깨달았다. 어쩌면 고죠의 억지를, 자신은 이미 이루어준 걸 준 걸지도 모르겠다고. 가장 아껴두고, 아껴두었던 연심의 자리에 그의 이름 석자를 가장 먼저 새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게토에게 있었다. 당시의 게토는 비술사를 보호하는 술사로서의 자신과 소중한 사람을 지킨다는 이상적인 자신의 간극에 괴로워했다. 하마터면 큰일을 벌일 뻔 하기도 했고. 지금에서야 알아차린 전말이지만 고죠는 전생의 기억을 통해 게토의 이변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고 예상된다. 그랬으니 지난 삶과는 달리 임무지까지 쫓아와 원숭이를 죽이려드는 자신과 담판을 지었겠지. 그 사실을 몰랐던 게토는 막연한 낙담에 빠져있었다. 본인 탓으로 고죠까지 체벌과 근신을 받게 되는 흐름 속에서 본인의 독단이 그의 발목을 잡아버릴 가능성을 깨달아버린 것이다. 더이상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새로운 마음이 기존의 마음을 죽인다. 덕분에 그는 여태껏 고죠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대등한 관계로, 친구의 자리에 만족할 수 있었다.
정작 상대방은 만족 못했다는 게 아니러니한 현실이다. 게토의 연심, 그리고 그걸 죽여버린 정황까지 눈치챈 고죠는 결심했다. 고죠에게 뚜렷한 천성이 있듯, 게토의 천성도 자기주장이 강했다. 본인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결과는 끝까지 책임지려 들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면 매정하게 돌아서는 게 그였다. 그렇다면 게토 스스로 본인의 사랑을 되살리게 하자. 설사 이건 너의 착각이라며 부정하거나, 그간의 행적을 무르는 일을 진작에 막기 위한 노림수이기도 하다. 고죠의 의도대로라면 그가 상정한 사랑을 가르침 받을 대상은 처음부터 고죠 자신이 아닌, 게토였음에 아연실색한다. 본인이 직접 좁힌 거리를 냉큼 받아먹은 고죠가 속삭인다. 그가 잡은 자신의 손은 어느새 그의 가슴팍 위에 얹혀있다. 따뜻하다. 동시에 고막을 가득 채우는 북소리의 요란함이 그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모르겠다.
"괜찮아, 스구루. 나도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야."
입이 바짝 마르고 손바닥에 땀이 난다. 그에게 축축한 습기까지 전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주인의 속도 모르고 움직이지 않는 손이 짜증난다. 짜증은 화를 부르고, 화는 열을 일으켜 안색을 홍당무처럼 바꾼다. 화끈거리는 낯이 들켰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일부러 여유로운 어깃장을 놓았다.
"네 마음이 그렇다면... 지난 밤에 사귀자고 한 말을 다시 돌려줘.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
술김에 받은 걸로 교제하게 되는 것도 싫으니까. 꽁알거림과 함께 기워지는 이유가 초라하다. 그러나 끝까지 고백받는 입장을 고수한다는 점에서 분명 게토 스구루는 약았다. 이와중에 그보다 더 약은 남자가 있다면 믿겨지겠는가. 만일 존재한다면 그는 필시 세계 최강일 것이다.
하하! 함박 웃음이 하얀 공간을 채운다. 이번 생에서는 기어코 붙잡은 남자에게 가벼운 볼키스를 전한다. 술래와의 접촉은 공수교대. 다음 신호가 울리면 이제 술래는 게토의 차례다.
"나랑 계속 있어줘, 스구루. 어디 다시 한 번 날 사랑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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