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죠게토] Orthodox Roman

(과거) 야구부 좌완 고죠X우완 게토 → (현재) 프로선수 고죠X사회인 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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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타입 재업로드

踏みしめる土の饒舌

딛는 땅의 요설

幾万の人の想い出

수많은 사람의 추억

情熱は過ぎてロマンに

정열은 지나쳐 로망으로

花ふぶく春に負けじと

꽃보라가 휘몰아치는 봄에 질지라도 *

オーソドックス ロマン

Orthodox Roman

“아저씨 유명해요?”

 

아이는 수저를 놓다 말고 문득 물었다. 둥근 고리 손잡이가 달린 플라스틱 젓가락 위에서는 고무 인형을 닮은 캐릭터들이 한껏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다.

 

“뭐라고?”

“아저씨 유명하냐니까요.”

“티비에 나와요?”

 

우린 선생님이 티비 보지 말랬는데. 바보 된대요. 근데 가끔은 봐도 돼요.

아이 두 명이 번갈아 떠드는 사이 캐릭터 수저는 두 벌로 늘었다. 고죠 사토루는 제 몫의 스테인리스 수저를 받았다. 플라스틱 고리 사이로 손가락을 구겨 넣는 상상에서 벗어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아이들은 수저를 다 놓고서도 아사즈케를 놓는다, 물병을 놓는다 하며 부엌과 식탁을 수차례 오갔다. 두 번이나 거푸 물었던 질문도 순식간에 안중에서 사라진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이미 저들끼리 텔레비전의 끔찍한 해악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재재대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멀어진다. 어린 손끝에서 식기들이 달각였다.

아이들이 마침내 빈손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며 고죠 사토루는 그들이 잊은 질문을 곱씹는다. 유명하냐고? 그 고무인간보다 내가 전파를 많이 탔을 텐데. 추측은 사실이었으므로 자만이 되지 않는다.

 

“유명하지. TV에도 나오고.”

“진짜요?”

“나나코, 똑바로 앉아야지. 미미코도 인형 내려놓고 와.”

 

부엌에서 쟁반을 든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능숙하게 대답을 가로채며 카레라이스가 든 접시 네 개를 내려뒀다. 아이들의 몫 위에 베이컨으로 만 오크라를 올리거나 물병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손길이 매끄러웠다. 이윽고 머리를 고쳐 묶으며 자리에 앉기까지, 그는 모든 것이 무척이나 익숙한 듯했다.

고죠 사토루는 생각한다. 보고 있자니 기가 찬다고.

다시 한번 확실히 해두자면 고죠 사토루는 한 번도 유명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언젠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그는 세 살배기 시절에도 유명인사였을 것이라 평했다. 아마 빈정대는 투였을 텐데, 세 살 즈음은 확실치 않지만 다섯 살 즈음에 그는 확실히 제법 유명했다. 중학교 입학식에서 얼굴을 마주쳤던 당고모가 그의 다섯 번째 생일파티를 소란스럽게 회상했던 것을 안다. 네 부모님이 사람을 얼마나 많이 불렀는지 아니? 초대장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지. 우스운 일이야. 고작 다섯 살짜리 생일이었는데. 여자의 웃음소리는 귀가 따가웠다.

당고모의 즐거운 추회에는 달리 대답하지 않았지만, 고죠 사토루 또한 그날을 어렴풋하게 기억한다. 그날은 온통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어린 사토루가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고 다니던 어머니도, 어머니에게서 나던 화장품 냄새도, 아이보다 어른이 많았던 거실도 싫었다. 거실에 모인 어른들은 모두 그들의 아이가 사토루와 친해지길 바라는 것 같았다. 소년은 그들을 상대하느니 차라리 어머니의 품에 붙어 눈을 감고 있길 택했다.

감은 눈 저편에서는 폭죽이 터졌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여기를 보라기에 눈을 떠보면 셔터 소리가 몇 번.

마치 폭죽처럼.

 

 

고시엔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그날도 플래시는 어린애 생일파티의 폭죽처럼 요란했다.

고죠는 열네 살의 봄에 야구를 시작했고, 열여섯의 여름에는 스타가 되었다. 우승의 주역. 고시엔의 왕자. 158km의 소년. 마땅한 기삿거리라고는 B 리그 프랜차이즈 선수의 도핑 이슈뿐이었던 스포츠 일간지들이 산뜻한 홍안에 환호했다. 고죠 사토루가 아닌 것들은 차근차근 커버에서 밀려났다. 어디서나 고죠의 얼굴을 볼 수 있던 여름이었다.

그 덕에 J 고교의 후문도 한동안 기자들로 붐볐다. 그라운드로 향하기 위해 후문으로 통행하던 야구부원들은 기자들을 뚫고 지나가는 데에 익숙해졌다. 마지막까지 유명세의 감각을 즐기던 아이들도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을 깨달은 후에는 차라리 정문으로 우회하길 택했다. 고죠 사토루에게는 어느 쪽이건 중요할 것 없는 사정이었으나.

여름의 끝물에도 기자들은 끈질겼고, 고죠는 한결같았다. 오후 연습이 시작하기까지 한참이나 남은 시각에도 고죠가 인터뷰에 다정하게 응하는 일은 없었다. 대신 그는 스포츠백을 고쳐 메고 라커룸으로 향했다. 뭐라고 말해도 기사는 뽑히던데, 알 반가. 철제 문고리가 손쉽게 돌아갔다.

 

“헤이세이의 초신성. 기적은 신화가 되는가.”

 

익숙한 목소리에 고죠는 시선을 들어 올린다. 늦여름의 오전 볕 사이로 매미가 울었다.

 

“스구루?”

“오늘도 대단한데, 사토루.”

“이렇게 빨리 왔어?”

“기자들 오기 전에 도착하고 싶으면 일찍 다녀야지.”

 

농조로 대답하며 스구루는 웃는다. 소년이 움직이면 간이침대가 삐걱댔다. 침대 위에는 스포츠 매거진이 펼쳐져 있었다. 광택이 반짝이는 싸구려 종이 위로 볼캡을 눌러쓴 고죠가 보인다. 거창한 헤드라인이 붙어있었다. 헤이세이의 초신성. 기적은 신화가 되는가.

 

“꾸준히도 챙겨보네.”

“연구 차원이랄까.”

 

잡지가 가벼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스구루는 던진 것이 오른손에 깨끗하게 안착한 것을 확인한 후에 도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왼편으로 향하지 않은 것은 그의 배려일 것이다. 스구루는 한 번도 그의 왼편을 향해 무언가를 던지지 않았다.

게토 스구루는 J 고교 소속의 우완 투수였다.

여름 대회에는 10번의 등번호를 달고 출장해 두 번의 선발승과 한 번의 세이브를 기록했다. 영리하고 매서운 선수였다. 단정하게 가라앉은 입매마저 투수의 자질로 족했다. 고죠 사토루와 같은 팀이 아니었다면 에이스 넘버를 달기에도 모자람이 없었을 것이다. 

라이벌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호사가들에게는 아쉬운 일이었으나 두 선수는 막역했다. 구태여 서로와 실랑이를 벌이자니 고죠와 게토가 각각 오만했고 명석했던 덕이다. 감독과 코치 또한 두 사람의 친밀함을 늘 흔흔히 여겼다. 한 세대에 한 명이 나와도 귀한 선수들이었다. 함께 등을 맞대고 자라주기까지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다시 간이침대가 처량한 소리로 울었다. 게토는 세 걸음으로 라커룸을 다 가로질러 다가왔다.

 

“병원 다녀왔어?”

“왜 네 이야기는 없어? 저번에 보니까 인터뷰도 잘만 하던데.”

“상식적으로 굴었지. 병원은?”

“저번 호에 나왔던가?”

“사토루.”

 

게토의 미간에 실금 같은 주름이 파였다, 가느스름하게 뜬 눈이 제법 엄격했다. 고죠는 제 라커를 열고 매거진을 던져넣는다.

 

 

J 고교가 고시엔의 무대에서 여섯 번의 경기를 치르는 동안 고죠 사토루는 네 번 마운드에 올라 세 경기를 완투했다. 남은 한 경기는 게토 스구루가 고시엔 통산 첫 번째이자 마지막 세이브를 기록한 날이기도 했다.

그날은 이른 오전부터 날이 흐렸다. 2회 초부터 떨어지던 빗발은 경기가 반환점을 돌기 무섭게 거세져 더그아웃 지붕을 때려댔다. 이런 날은 투수와 야수가 모두 고역이었다. 그러니 빨리 끝내주면 좋을 텐데, 앞에 선 타자는 루틴이 유독 길다. 세 번째로 흙을 다지는 꼴을 보고 있노라니 한숨이 절로 샜다.

비를 맞은 그라운드는 그간의 폭염이 무색하게도 빠르게 식었다. 한기가 계절을 잊고 글러브 사이를 파고든다. 5회 말 투아웃. 상대의 에이스가 나름대로 분투해 스코어는 2 : 0에서 4이닝째 멈춰 있었다. J 고교가 올린 두 점도 고죠가 첫 타석에서 쏘아올린 홈런 덕이니 경기는 대체로 지난한 투수전에 가까웠다. 

볼넷으로 출루한 주자가 1루에서 투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견제 사인은 없었다. 주자도 이 날씨에 흙바닥에 처박히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고죠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나도 슬슬 들어가고 싶은데.’

 

이닝이 길었다.

젖은 셔츠가 어깨에 무겁게 감겼다. 직전의 타자는 저번 타순부터 끈질기게 따라붙더라니, 기어이 공을 아홉 개나 던지게 만들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전날부터 몇 번이고 오르내렸던 선수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필경 팀의 기둥일 것이다. 별명이 우스웠던 것도 같다. 뭐라더라, 오사카 허리케인? 오사카 토네이도? 소년 점프에 나오는 악당 같은 별명이었는데, 그러니까...  

느슨하게 이어지는 잡념들 사이로 심판의 플레이 콜이 끼어들었다. 고죠는 다리를 들어올렸다. 타자가 숨을 들이키는 것이 보였고,

스파이크 아래에서 마운드가 무너졌다.

뭉개진 흙이 빗물과 함께 쓸려나갔다. 

톱니바퀴 같은 몸이었다. 모든 귀와 홈이 빈틈없이 맞물려 있었으니 정교하고 견고하기가 요새와 같았다. 디딤발이 내려앉으면 가슴이 펼쳐지고 어깨가 돌아가는 것이 수순이었는데, 딛는 발이 미끄러지자 무릎이 함께 꺾였다. 허리가 가파르게 내려앉았다. 철사 같던 긴장이 무너진다. 아래로 쏟아지는 힘을 무릎이 가까스로받치고 섰다.

손끝에 실밥이 채인다. 마운드 위에서 모든 일은 찰나였다.

 

“─쓰리 아웃. 이닝 종료!”

 

맥없는 타격음은 빗소리에 묻혀 펜스조차 넘지 못했다.

타자는 파울 플라이로 물러났다. 몸을 일으키니 마스크를 벗는 포수가 보였다. 고개를 까닥이는 모습을 보니 공은 제 갈 길을 잘 찾아간 모양이었다. 요행이었다. 고죠는 그대로 등을 돌려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애초에 세리머니 따위는 기대받은 바가 없었다.

우천중단을 안내하는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소란 사이로 낭랑했다.

 

“괜찮아?”

“이 몸이 비 좀 맞는다고 뻗겠어?”

 

게토는 왼손으로 수건을 건넨다. 고죠는 오른손을 뻗어 받아들었다.

더그아웃의 형광등이 점멸한다.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은 표정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다만 잠근 듯 다물린 입매가 심상치 않다고, 고죠는 소리없이 웃는다. 그의 팀메이트에게는 쓸데없이 진지한 구석이 있었다.

 

“완전 쌩쌩해. 동계훈련 때는 눈 맞으면서도 뛰었거든? 물론 어느 누구는 감기로 일주일씩 퍼져서...”

“퍼진 적 없거든. 손톱이 부러져서 피칭만 안 했지.”

“에에. 거짓말.”

“그리고 그 얘기 아니니까 적당히 해, 사토루.”

“그럼?”

“넘어졌지?”

 

여기선 다 보여. 게토는 턱짓으로 마운드를 가리켰다. 우비를 입은 사람들이 고무래로 흙을 고르고 있었다. 진흙이 묻은 플레이트가 희끄무레한 자국처럼 보였다.

 

“넘어진 적 없거든!”

 

게토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반발을 일축했다.

 

“내려가겠다고 그래. 팀에 투수가 없는 것도 아니고.”

“누구? 너? 오늘 몸도 안 풀었으면서. 불펜 빈 거 다 봤거든?”

“나나미가 몸 빨리 풀잖아. 지금 보내면...”

“야. 아서라. 고시엔을 뭘로 보고.”

큰 손이 게토의 어깨를 덮었다. 손톱이 잘 갈린 왼손이었다.

고죠 사토루는 알았다. 게토 스구루 또한 알았다. 벤치에 있는 모두가 알았고, 관중석을 메운 수많은 눈들이 전부 알았다. 그 손에서 떠난 공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직감할 수 있었다. 앳된 티가 나는 1학년 투수가 아니라 그 누가 올라와도 고죠만큼 던질 수는 없었다. 온 땅의 수재들을 모아둔대도 그럴 것이다. 전국의 마운드에 그보다 어울리는 이는 없다.

때로 이 게임이 온통 고죠 사토루를 위한 것 같다고, 게토는 생각했다.

게토는 그 손에서 시선을 비낀다. 고개를 들면 눈이 마주쳤다.

 

“너무 많이 던졌어.”

“이 몸은 또 뭘로 보는 건지.”

“예선에서도 많이 던졌잖아. 이제 고작 2차전인데 지금 다치기라도 했다가는,”

 

말을 이어나가는 게토를 향해 수건이 날아왔다. 시야가 순식간에 덮였다.

그거 하나 못 잡냐? 경박한 웃음소리는 백기보다 선전포고에 가까웠다. J의 에이스는 저렇게 웃어대면서도 자빠져 뒤통수가 깨지는 일 한 번이 없었으니, 행운도 이쯤 되면 악질이었다.

 

“이제 2차전이면... 우승까지 몇 경기나 남은 거지?”

“... 네 경기.”

 

수건이 발치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게토는 졸지에 젖어버린 앞머리를 이마에서 떼어내며 무어라 힐난했다. 물론 대수로울 것이 없는 소리였으므로 고죠는 새겨듣지 않았다.

 

“네 경기가 아니라 마흔 경기가 남아도 상관없어.”

 

소년은 대신 장담한다.

 

“던지면 그만이지.”

 

게토는 손을 멈췄다. 이내 그는 조금 웃었다. 

훗날 회상하건대 그 즈음의 고죠 사토루는 그 어렴풋한 미소를 일종의 승낙으로 여겼다. 게토는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았고 따라서 고죠 또한 무엇도 허락받을 필요가 없었으나, 돌이켜보자면 그랬다. 그렇게 웃길 기다렸던 것 같다. 고등학교 2학년은 이상한 나이였다. 무릎이나 어깨의 열감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머리 위에서 경기 재개를 알리는 방송이 울렸다.

형광등이 깜박이는 벤치에도 해가 들었다.

 

 

6회와 7회. 웃기는 별명의 5번 타자가 기어이 고죠를 상대로 안타를 때려냈다. 내야와 외야에서 각각 한 번의 실책이 나왔다. 주자 두 명이 기어코 홈을 밟았다. 1학년 중견수가 대회 첫 장타를 신고하며 점수차를 되돌려 놓았으나 고죠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불펜에서 미트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더그아웃에 두 자리가 비었다. 개중 한 명이 2학년 백업 포수였으니 나머지는 볼 것도 없었다.

고죠 사토루는 8회에 교체되었다. 투구 수는 104개. 곡절이야 있었으나 리드를 지켜낸 투수의 등에는 박수가 쏟아졌다.

다시 플레이 콜이 그라운드를 가른다. 전광판에는 게토 스구루의 이름이 올랐다. 

게토 스구루의 마지막 구원등판일이었다.

반강제로 처박힌 진료실에서 고죠 사토루는 최소 사흘간의 휴식을 엄명 받았다. 어깨와 무릎의 염좌 증상 때문이었다. 그나마도 고죠의 난동으로 줄어든 기간이었으니, J 고교에게는 에이스를 잃을 위기였던 셈이다.

고죠의 결장이 16강전에 한하는 것으로 확정되자 감독은 16강전의 대체선발로 게토 스구루를 꼽았다. 누구도 이의를 표하지 않았다. 요란한 전국제패의 구호와 함께 집합이 마무리되었다.

모두가 흩어지던 차에 3학년 포수가 게토의 표정을 살폈다. 눈가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잠잠했다. 직전까지 부실에 들끓었던 사춘기 소년들의 환희는 요원한 낯이었다. 시선이 멀었다.

뭐, 이편이 좀 더 투수다운 얼굴인가. 포수는 짧게 생각했다.

 

그 이후로 고죠는 두 경기에 선발투수로 출장했고, 두 번 모두 경기 끝까지 마운드를 지켰다. 전광판을 차근히 채워나가던 대문자 K. 크게 헛돌던 배트. 스탠드의 환호성과 나팔 소리. 어느 비 오던 날은 하얗게 잊은 듯 사람들은 열광했다. 모두가 어린 투수의 승리를 알고 있었다. 그 고죠 사토루가 보름째 물리치료실을 오가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고죠는 부상이라는 말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의 반감을 기다렸다는듯 거들어대는 감독과 코치-듣자 하니 교장까지-라고 기꺼울 것은 없었으나, 괜한 수식어를 늘리고 싶지 않은 것만은 모두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비밀을 유지하는 데에는 몇 번의 통화면 충분했다. 고죠는 간편한 이름이었다. 그것이 우스웠다.

아무튼 병원 입구에서까지 기자들에게 시달릴 일이 없어진 것만은 좋았다.

금속성이 요란했다.

라커 안에 들어있던 알루미늄 배트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적당히 정리해뒀다고 생각했던 것이 문간에 어설프게 기대 있었던 모양이다. 도와줘라, 좀. 고죠가 눈을 흘겼지만 게토는 돌아보지 않았다. 고죠는 매정한 동기를 붙들고 늘어지는 대신 쏟아진 배트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몸을 숙이는 자세가 매끄러웠다. 아마도 현대의학의 공일 것이다.

어디선가 다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라커룸의 창밖으로 여학생 몇이 끌차를 끌고 가고 있었다. 플라스틱 컨테이너 사이로 금박 수술이 윤슬처럼 찰랑거렸다. 

“뭐야. 치어리딩부가 연습경기에도 나와?”

“그럴 리가 있겠어? 문화제 준비 하나 보지.”

“아, 문화제?”

듣고 보니 앞서나가는 단발머리의 큰 눈이 익숙한 것도 같았다. 그 아이 또한 한여름을 니시노미야에서 보냈을 것이다. 여름이 길었으니 가을이 빠듯도 하겠지. 고죠는 다소 느긋하게 넘겨짚었다.

"잊고 있었다는 눈치네. 너희 반도 바쁘던데."

"어떻게 문화제까지 신경쓰냐. 가을대회도 코앞인데."

"긴장했어, 사토루?"

"웃기시네!"

스포츠 매거진이 라커 구석에서 영영 잊힐 신세를 면했다. 호를 그리며 날아온 잡지를 게토가 얼굴 앞에서 낚아챘다. 빙긋하니 웃는 입매를 고죠는 보았다.

전국에서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소년도 시곗바늘을 앞지를 수는 없었다. 매미 울음이 멀어지면 그것들이 모르는 계절이 왔다. 어느덧 사람들은 시월에 대해 이야기했다. 삼학년들은 더이상 연습에 나오지 않았다. 스탠드와 벤치에 못박혀있던 이름들이 한 칸씩 자리를 옮겼다. 하지는 오래전에 지나서, 이제 저녁 연습을 위해서는 라이트를 켜야 했다. 더그아웃 뒤편 펜스를 따라 코스모스가 피었다. 

가을 대회. 동계 훈련. 춘계 선발 대회. 그리고 다시 여름. 고죠는 문득 남은 날들의 수를 센다. 다음의 다음을 세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소년은 몸을 늘이며 하품을 한다.

“가을은 힘 좀 뺄까. 독식하면 미안하잖아?”

“그런 소리 하지 마, 미안하지도 않으면서.”

말끝이 가늘어 고개를 돌려보면, 게토는 고죠를 올려다보고 있다.

“기왕이면 집합에 늦지도 말고, 남는 공 정리 떠넘기지도 마. 후배들 이상한 별명으로 부르는 것도….”

“뭐야, 오늘? 잔소리하는 날이야?”

“이제 곧 주장이니까, 말해둘까 해서.”

“완장 달면 잔소리 안 하는 거야? 스구루, 눈치 봐?”

“그렇다기보다는…”

눈치 보는구나? 이 몸이 무섭지? 고죠는 고개를 기울이며 웃는다. 모로 치우쳐 마주 웃는 얼굴이 화를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오른 어깨로 주먹이 날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참, 이 몸이라는 말도 쓰지 마.” 

게토는 고죠를 후려치는 대신 글러브를 들었다. 앞서 라커룸을 빠져나가는 등 뒤로 문이 닫힌다.

고죠 사토루는 그 문이 다시 열리지 않았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선생님, 이거 잘라주면 안 돼요?”

“먹기 힘드니? 꼭꼭 씹으면 괜찮을 텐데.”

“별 모양이 안 보이니까요. ”

 

직전까지 인형을 안고 있던 아이는 오크라의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이들의 선생님은 금세 가위를 가지러 부엌으로 사라졌다. 불러세우는 것이 늦었다. 잠시만, 사토루. 라며 가로막는 투는 퍽이나 상냥하다.

날붙이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고죠는 기계적인 손짓으로 밥알을 긁어모았다. 불러세워 물을 것이 있었는데, 생각나지 않는다. 빌어먹을 카레 때문인가. 혹은 접시를 앞에 두고도 끊임없이 재잘대는 아이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린 목소리가 귓바퀴를 붙들고 늘어진다.

아이들이 새처럼 재재대는 집에서 게토 스구루의 흔적은 다소 박약했다. 아동용 탁자에 학습지와 함께 뒤섞인 서류 봉투, 가로로 쌓여있는 책 몇 권, 식탁 구석의 우편물 따위가 크레용 그림 사이의 연필 자국처럼 어렴풋했다. 누런 종이 한 장은 스티커와 색연필 낙서들로 이미 본래의 쓰임을 알아볼 수 없었다. 아마 청구서나 고지서 따위였을 것이다.

그런 식이었다. 실낱같은 궤적들은 손때를 탔다.

고죠 사토루는 게토 스구루의 십 년을 모른다.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많았던 시절이 있었다. 혹은 그렇다고 착각했거나.

라커룸의 낡은 철제 문이 다시 열리지 않았다는 것은 고죠 사토루의 착각이다.

그는 그날 이후로도 몇 번이고 그 문을 열었다. 계단 몇 개를 오르면 곧장 그라운드가 펼쳐지는 문이었다. 삼학년이 되는 봄에는 스파이크로 걷어차 반쯤 작살을 내놓기도 했다. 그 이후로 열 때마다 부서질 듯 덜컹인다며 후배들이 숨죽여 불평한 것을 안다.

돌아오지 않은 것은 게토 스구루였다. 그는 다시 문을 열지 않았다. 

라커룸에서 그의 이름이 사라진 것은 가을대회 선수 명단이 확정되기 직전이었다. 송별회나 작별인사는 없었다. 다만 어느 방과 후에 매니저와 일학년 몇이 라커룸에 들어있던 짐들을 바깥으로 옮겨두고 있었다. 고죠는 짐이 든 상자 앞에서 게토를 기다렸다. 소년은 당연하다는 듯 오지 않았다.

상자는 다음 날 아침에 소리 없이 사라져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엇이 싫었는지, 혹은 무엇을 향해 가는지 고죠는 듣지 못했다. 

게토가 사라진 자리에는 풍문이 자취처럼 떠돌았다. 1학년 투수가 이온음료 뚜껑을 따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이거 괜히 말했나요? 다른 애들한테 다 들으셨을 줄 알았는데."

"됐으니까 말해."

"그날 감독님이랑 싸웠거든요, 게토 선배. 선배 교체하자고 했다가."

후배는 눈짓으로 고죠의 무릎께를 가리켰다. 사소한 하극상을 지적하기에는 들린 말이 뜻밖이었다.

고죠의 부상을 감독에게 보고한 사람이 게토라는 것 정도는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 길로 감독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모범생의 행동반경이야 빤하다고, 그 여름의 고죠 사토루 또한 생각했다. 후배는 고죠의 뜨인 눈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감독님이, 경기 나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면 지금이라도 야수 전향하라고 그러셨어요."

"뭐?"

"우익수 백업 시켜준다고."

"그 인간은 기껏해야 오십 대 아니야? 노망이 벌써 났대?"

알루미늄 캔이 손 안에서 우그러졌다. 습관처럼 오른손으로 고쳐쥐었지만 이미 더 망가질 형체도 없었다. 프린트가 벗겨진 모서리가 손마디의 굳은살에 생경했다. 후배가 구겨진 캔을 받아들었다. 

"안타 나온 후로는 바로 불펜으로 보내셨어요. 그 이후로는 별일 없었으니까, 뭐. 선배가 맞은 게 다행일지도."

"듣다 보니까 자꾸 악담한다, 너?"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선배는 안 아프고, 게토 선배는 잘 던졌고, 감독님은 아무 말 안 하고. 게토 선배는 그다음 경기까지 나갔잖아요. 그런 선수 상대로 야수 전향 운운했으면 창피한 줄 알아야지."

후배가 짧게 멈췄다. 얄팍한 화풀이의 희생양은 손쉽게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게토 선배도 대단한 선수라고 생각했어요."

언젠가 게토 스구루는 그를 과묵한 아이라고 평했던 것 같은데, 따지자면 답지 않은 일이었다. 목소리가 길게 이어지는 것이 낯설었다. 귓속 깊숙한 곳이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후배의 눈이 잠시 닿았다가 도로 돌아갔다. 말을 멈추려는 기색을 살폈는지도 모른다고, 고죠는 뒤늦게 생각했다.

"누가 고죠 사토루 다음 그만큼 던질 수 있겠어요. 선배는 던져본 적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세요? 고죠 사토루가 마운드에서 사라진 다음에는 타자들 표정이 달라져요. 타자들만 그렇지도 않아요. 건너편 더그아웃도, 벤치도, 스탠드도 달라져요. 다른 바람이 부는 것 같아요. 해 볼 만 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마운드에 서있는 게 누구든, 왼손이든 오른손이든, 얼마나 빠른 공을 던지든,

고죠 사토루는 아니니까. 한 살 아래의 투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제야 고죠는 귓속을 찌르던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게토 스구루의 이름이 나무 거스러미처럼 일어났다. 눈앞의 하급생은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어렵지 않은 것 같았다. 문득 그 이름이 까마득해서, 고죠는 대답할 수 없다.

모르는 이름인 것만 같다.

게토 스구루는 언젠가 벤치에서는 마운드를 전부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시야가 가로막히지 않으니 사실이었다. 깨끗하게 트인 눈으로 게토는 고죠의 실투를 포착했다. 곱아든 손끝이나 거칠게 돌아가는 어깨를, 내려앉는 허리나 어긋난 무릎을 봤다. 눈앞의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나 그에게 보인 것만은 이상하지 않았다. 전부 보인다면 당연했다. 가릴 수 없었으니 가리지 않아도 좋았다.

고죠는 벤치에 앉아 마운드를 지켜보는 게토를 상상한다. 어느 날은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벤치에 앉아 게토 스구루를 지켜보았고,

무엇이 보였나.

떨었던가. 혹은 그렇지도 않았나. 가까운 계절이 절벽 끝처럼 아득해서 기억나지 않는다. 오른손으로 공을 쥐고 다리를 들어 올렸는데, 볼캡의 그림자가 얼굴을 비스듬히 가로질렀는데, 입매가 단단히 다물려 있거나 혹은 조금 비틀려 올라갔는데, 알 수 없다. 보이지 않는다. 게토의 마운드를 고죠는 모른다. 고죠 사토루는 한 번도 게토 스구루의 마운드에 오른 적이 없다.

─스구루.

 

머릿속에서 누군가 아웃 콜을 외쳤다. 투수판을 밟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배터박스 안이었다. 쬐는 볕 너머로 투수가 서 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가을이 끝나도 게토 스구루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다수의 이들은 그가 가을 대회가 끝나면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기껏해야 열 예닐곱. 상상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 방황도 대단찮을 나이였다. 아마 어느 날이 되면 그라운드 가장자리에 어설픈 표정으로 나타날 것이다. 사춘기 소년들이 떼로 우짖어대는 야구부에서 그 정도 일탈이야 우스웠다. 사람들은 돌아온 탕아를 비웃어줄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게토 스구루가 대단히 간명한 자세로 그 낙관을 걷어차 버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게토는 J 고교를 떠났다. 부모님의 전근으로 이사를 갔다는 담임교사의 말을 이에이리가 뒤늦게 전했다. 진위나 인과 같은 것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지는 모두가 알았다.

3학년이 다가오는 12월. 전학생의 공식전 출장제한은 1년.

게토 스구루는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잔가지 위에 눈꽃이 피는데 여름은 그제야 끝났다. 눈을 뜨니 그곳에 겨울이 있었다.

 

게토가 사라진 이후, 고죠는 자신의 옆얼굴에 들러붙는 곁눈들이 귀찮았다. 갓 3학년이 된 동기들은 고죠마저 팀을 떠날까 전전긍긍했다. 구차한 호의들이 이어졌다. 고죠는 말해주고 싶었다. 그는 야구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게토 스구루는 야구를 그만둘 이유가 되지 못했다. 고죠 사토루가 야구를 그만두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될 수 없었던 것처럼.

고죠 사토루는 여전히 공을 던졌다. 에이스 넘버는 한결같았다. 만장일치로 주장까지 역임했다. 게토가 그를 구하기 위해 공을 이어받고 어깨를 스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었지만, 고죠는 누구의 구원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라운드의 가장 높은 자리. 그곳에서는 태양이 가까웠다.

그래도 가끔, 마운드 위에는 다른 바람이 불었다. 그럴 때면 고죠는 게토에 대해 생각했다.

어디에 있을까.

야구, 하고 있으려나.

 

3학년 여름. 고죠 사토루는 고시엔 본선에서 160km를 던졌다.

 

그 이후로는 모두가 고죠 사토루를 원했다. 청소년 국가대표에 선발되었고, 친선경기라도 있는 날에는 스탠드에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숱했다. 개중 몇과는 교장실의 부담스러운 유리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기도 했다. 그런 자리마다 고죠는 다소 태만한 자세로 일관했으나, 더 이상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 소년은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아도 좋았다. 모두가 그에 대해 알았다.

가을에도 사정은 비슷했다. 동기들이 입시다 진학이다 수선을 떨 때도 고죠는 심드렁했다. 최대 유망주로 불리거나 말거나, 그보다는 벌떼처럼 몰려드는 기자들을 따돌릴 샛길을 찾는 쪽이 더 급했다. 여전히 그들보다 부지런해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 해 고죠는 신인 드래프트가 기록했던 여러 가지 기록들을 갈아치웠다. 동시지명 수도 계약금도 시대의 별이 되기에 가히 족했다. 학교로 찾아온 스카우터 또한 같은 것을 수차례 강조했다. 그 남자 또한 고죠가 어디론가 떠나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대학이라거나, 해외라거나, 어떤 선택지도 소년을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회신 기다리겠습니다, 고죠 군.’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명가의 프런트가 스물도 되지 않은 신인에게 전례 없는 저자세로 일관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야구부의 뜨내기도 알았다. 고죠는 손을 맞잡았다. 스카우터는 잠시 그의 표정을 살피다 돌아갔다.

그를 불안하게 만든 것은 고죠의 잘못이 아니다. 애초에 남자가 길게 늘어놓은 숫자나 사정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건네받은 명함의 맹수 문양은 오랜 명가의 상징이었으나, 실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모자의 알파벳이나 유니폼의 색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콧대 높은 명가가 아니라 유망주의 무덤이라도, 하다못해 촌구석의 신출내기 야구단이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년이 마운드에 선다면. 흙언덕 위에서 별이 된다면.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하지?

 

이튿날, 고죠 사토루의 입단이 결정되었다. 별다른 이변은 없었다. 무심한 낯에 마음을 졸였던 스카우터가 순순한 서명을 기쁘게 반겼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했나?

대답이 심중에서 길을 잃을 때면 그리움은 가을꽃처럼 모서리마다 피었다.

 

공식전의 전야마다 마주앉았던 가라앉은 낯을 고죠는 기억한다. 소년은 차근한 목소리로 이유에 대해 말했다. 하루에도 수없이 외쳐대던 전국제패의 구호 따위보다 그 편이 좋았다. 기껏해야 고교대회. 백 번을 봐도 똑같은 토너먼트. 이기지 않으면 지고, 패자에게는 다음이 없다. 지성의 평균치가 참담한 운동부 녀석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인지 시스템은 간결했는데, 게토 스구루는 혼자 생각이 많았다.

소년은 매번 이겨야 할 이유를 찾았다. 대단한 에이스가 있다든가, 동도쿄의 맹주 격이라든가, 주니어 시절의 설욕이 필요하다든가. 떠날 때에도 그랬을 것이다. 고죠는 듣지 못했지만.

부모님의 전근 같은 것은 흘려듣기에도 가당찮은 핑계였다. 학교가 지역 신문을 동원해가며 신축 기숙사를 자랑해댄 것이 일학년 겨울의 일이다. 인프라가 이러니 저렇니 떠들어대는 교장을 둘이 함께 비웃었다. 이듬해 여름에는 함께 빈 방에서 에어컨을 맞았으니, 게토가 그것을 잊었을 리 없다.

그러니 물어보고 싶었다. 무엇이 싫었는지, 괴롭기라도 했는지.

어딘가 아팠는지. 더는 던질 수 없을 것 같았는지. 지거나 이기는 것이 지겨워졌는지. 도망치고 싶었는지. 화가 났는지. 스스로를 비관했다면 언제든 말해줄 수 있었다. 스코어북에 빼곡한 기록이나 지표. 어떤 여름의 하이라이트. 선배에 대해 말하던 후배의 잠잠한 동경 같은 것. 그런 것들을 떠올릴 때면 눈앞에는 언제나 그림자로 얼굴을 가린 투수가 서있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물러서며 뒤늦게 떠올린다. 묻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를 좋아하지 않았어?

 

좋아했잖아. 나를.

어김없이 아웃 콜이 울린다. 타자는 배트조차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타석을 떠났다.

 

구단은 대형 신인에게 쏟을 수 있는 자원을 모두 쏟았다. 긴 부진으로 자존심을 잃어가는 팀의 과시용 퍼포먼스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지만, 세世 중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선수를 홀대했다가는 남은 팬마저 잃어버릴 것이 뻔했다. 속 좁은 퇴물 취급보다야 스포츠 장사치의 허세로 보이는 편이 나았다. 십 년의 명운은 쉽게 판돈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구단은 승리했다. 승리의 여신은 고죠 사토루의 머리 위에서 날았다.

스타디움의 관중석에서 고죠의 유니폼이 승기처럼 펄럭였다. 프로의 문턱에서 고꾸라졌던 선대 고시엔 스타들의 이름은 다시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부진의 예언이나 습관적인 비관도, 수 년 간 이어진 구단의 드래프트 잔혹사도 모두 끝났다. 소년은 한 시대의 문을 닫고 또 열어젖혔다. 열린 문 너머에서 플래시가 쏟아졌다.

그 사이로 어느 가만한 발음을 들은 것도 같아 돌아보길 몇 번. 그러나 여전히 모르는 얼굴들뿐이었다.

 

더 이상 뒤돌지 않게 되었을 즈음에는 기적도 일상이 되었다. 고교 시절을 함께 보냈던 어렴풋한 이름들이 하나둘씩 1군의 그라운드에 나타날 무렵이었다.

어느 날에는 이겼고 어느 날에는 졌다. 어느 날에는 즐거웠던 것 같다. 종종 모든 것이 시시했고 때로 지겨웠지만, 아무튼 던졌다. 많은 종류의 불평이 천재의 투정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삼년차를 넘기기 전에 알았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피쳐 플레이트 위에서는 언제나 홀로 서야 했다. 눈앞의 포수조차도 함께 싸워주지 못했다.

외로움을 아는 것이 어른의 덕목이라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그는 그것을 열여덟의 봄에 배웠다.

 

불이 꺼진 거리 위로 안개비가 내렸다. 최첨단 시설을 갖춘 신축구장이라고 그렇게 자랑을 해대더니, 도시 외곽에 내던져진 모양새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도로 건너편에서 영업을 종료한 대형마트의 간판이 깜박였다.

퇴근이 늦어진 것은 순전히 불운이었다. 경기 초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에 우천 중단 시간이 길었고, 상대의 발악과 불펜의 방화가 맞물리며 경기는 연장전까지 늘어졌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7회에 내려오자마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기장을 빠져나왔을 텐데. 간만에 성실한 시늉을 한다는 것이 역시나 허튼 짓이었다. 하다못해 차라도 가져온 날이면 모를까. 고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정하기가 비견할 곳이 없다.

택시를 불러주겠다며 핸드폰 액정을 두드리던 스태프는 누군가의 부름과 함께 사라져 돌아오지 않았다. 옆얼굴에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으니 그 길로 달아났대도 놀라울 부분이 없다. 그쪽이 먼저 붙잡지 않았다면 지금쯤 뭘 타도 열 번은 탔겠다고, 고죠는 기억 속의 느물대는 등 위에 짜증을 쏟아냈다.

손을 내밀면 굳은살이 박힌 손끝에 빗물이 닿았다. 연장전 종반부터 다시 내리기 시작했으니 밤중이면 빗발이 굵어질지 모른다. 험난한 빗길을 뚫고 귀가하고 싶지 않다면 결정이 필요했다. 절대로 잡히지 않는 택시 호출에 좀 더 매달려 보거나, 주차장으로 돌아가 아직 출발하지 않은 팀메이트들의 차를 찾거나, 당장 가까운 역으로….

 

“고죠다!”

 

무구한 목소리는 때를 모르고 꼴사나운 고민을 훼방 놓았다.

 

“신기하다, 진짜 크다….”

“아까 대단했지? 막, 이렇게. 엄청나게 던졌지? 진짜 신기하다!”

 

풍선 위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발랄했다.

고개를 돌리자 여자아이 둘과 눈이 마주쳤다. 어림잡아 예닐곱 살 즈음 되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눈이 마주치자 저들끼리 떠들던 것을 멈췄다. 아무래도 들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고죠는 짧게 생각한다.

한 손으로는 서로의 손을 잡고, 나머지 손으로는 플라스틱 배트를 쥔 아이들이었다. 가방에 묶어둔 헬륨 풍선에는 원정팀의 마스코트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그 팀에게 주말전 4연패를 안긴 장본인에게도 상냥한 것을 보면 팀은 뒷전이고, 관람을 가족 나들이쯤으로 여긴 것 같지만.

등 뒤에 서있으리라 생각했던 보호자는 보이지 않았다. 혹여라도 길을 잃었다면 홈 팀의 사무실이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고죠는 아이들을 향해 몸을 틀었다.

다가오는 그림자가 길었다.

 

“사토루?”

 

부르는 소리는 빗소리보다 크지 않았다. 다만 나지막하고 가만해서 흔들림이 없었다.

눈을 들면 그 자리에는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서있다. 우산을 받쳐 든 오른손에 어린이용 우비 두 벌이 함께 걸려 있었다. 아이들은 날아가듯 달려가 남자의 빈 왼손에 매달렸다.

게토 스구루가 떠난 이후, 고죠는 자신이 그를 평생 몰랐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고죠는 게토에 대해 알았다. 눈매나 표정. 목소리나 기척. 챙 아래로 언뜻 비치는 입매.

다시금 마주선 투수는 유니폼 대신 트렌치 코트를 입고 있다. 흔들리는 가로등 빛에 그제야 표정이 보였다. 


고죠 사토루는 자신이 플레이 콜을 들었다고 생각했지, 빌어먹을 카레를 두고 마주앉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재회의 드라마는 추진력이 부족했다. 팔을 잡아 돌려세웠으나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은 뜻밖의 게릴라 이벤트에 잔뜩 신이 난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게토 스구루는 비 오는 거리에 옛 친구를 버리고 떠날 만큼 박정하지 못했다.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의 홀연한 잠적과는 다른 소양을 필요로 하는 일인 듯 했다. 결국 고죠는 게토의 승용차에 올랐다.

이야기가 애매하게 늘어졌다. 간신히 되찾은 화두도 아이들의 참견에 어디론가 사라지기 일쑤였다. 번번이 빗맞던 대화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양육자는 아이들에게 늦은 저녁을 제공해야 했고, 아이들은 조수석에 올라탄 야구선수가 신기했고, 고죠는 게토에게 물을 것이 있었다. 고죠는 이 중 자신이 가장 결백하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는 차도 없었고, 말없이 사라진 적도 없으니까.

식사 내내 소란하던 거실은 게토가 아이들을 방으로 들여보내고 난 후에야 가까스로 고요를 되찾았다. 아이들과의 짧은 인사 끝에 그는 거실로 돌아왔다.

 

“야구선수는 좋겠네, 월요일 출근 안 해도 되고.”

“일요일에도 일하고 온 건 안 보이냐? 부러우면 지금이라도 하지.”

 

게토의 눈가가 가늘게 접혔다.

어른이 된 얼굴에서 소년 시절의 앳된 낯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게토 스구루는 과히 달라지지 않았다. 고죠가 알았던 것들은 대부분 그 자리에 있었다. 흉터처럼 남은 귀걸이 자국 정도가 그나마 눈에 걸렸다.

 

“…아무튼,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해서 바래다주긴 어려워. 택시 불렀으니까 타고 가.”

“말 돌리긴.”

 

앞에 놓인 머그컵에서 시트러스 향이 끼쳤다. 티스푼 끝에 채 녹지 않은 과일청이 걸렸다.

거실에는 마스코트가 그려진 풍선이 제 자리를 모르고 둥실대고 있었다. 갓 도착했을 때는 천장에 바짝 붙어있던 것이 어른 눈높이 즈음까지 내려왔다. 야구배트를 들고 있는 코끼리가 조금 작아진 것도 같다. 아침 즈음이면 잔뜩 쪼그라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그 팀 팬 아니야. 야구 안 본 지 꽤 됐어.”

“그럼 경기장은 왜?”

“애들이 야구장에 가보고 싶대서. 야구 했다는 거 들켰거든.”

 

게토가 제 몫의 잔을 들어올린다. 사기 컵이 기울면 티백 끄트머리가 흔들린다. 고죠는 자신이 눈치 챈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야구 했다는 건 숨겼구나? 

 

“제일 가까운 날짜로 예매한 건데, 홈 응원석은 자리가 없더라니. 네가 선발인 건 가서 알았네.”

“알았으면 안 왔을 것처럼 말한다, 너.”

 

짧은 정적이 솔직하다.

고죠는 십 년에 대해 생각한다. 귓불에 새 살이 차고 거친 손마디가 부드러워지는 십 년. 말만 잘못 붙여도 들통 난다는 운동부의 태야 본래도 다소 거리가 멀었지만, 어떤 것들은 숨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것을 부득불 감추고 가려 숨겨온 고집이 가상하다. 야구를 했던 시간보다 하지 않았던 시간이 더 길 텐데도. 어쩌다 들켜봐야 들은 이는 기억도 하지 못할 텐데도.

게토가 눈썹께를 매만진다. 어렵잖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오래된 버릇이다.

 

“스구루. 지금 어색해?”

“… 들켰네. 고등학교 동창은 오랜만에 봐서.”

“찔리면 애먼 소리 하는 게 고등학교 때랑 똑같네. 어떻게 달라진 게 없냐?”

 

고죠는 의자를 뒤로 기울였다. 흰 세라믹 식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의 플라스틱 의자가 비명을 질렀다. 여자아이 둘 내지는 직장인 하나가 세상의 전부일 의자에게 190cm를 상회하는 운동선수의 몸은 고될 법도 했다.

 

“가버리기 전에도 이상한 말이나 하고.”

 

이번에는 게토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침음과 사례의 정 가운데쯤 될 것이다. 고죠는 그 덕에 제 말이 나이에 맞지 않은 불평처럼 들린다는 것을 잊었다. 그는 턱을 괸 채 대답을 기다렸다.

 

“이제 와서 고등학교 얘기나 하려니까 좀 이상하지만…. 처음부터 말없이 가버릴 생각은 아니었어. 타이밍이 안 좋았을 뿐이지.”

 

몇 번의 헛기침 후에야 게토는 말을 이었다. 말씨가 골라낸 듯 가지런했다. 그 목소리가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과 비슷했다는 사실은 후에야 깨달았다.

 

“여름 2차전 기억해? 너 다쳐서 내려온 날. 그 뒤로 병원 다녔잖아.”

“어. 그날 감독이랑 싸웠다며.”

“비밀이 없네, 기대도 안 했지만. 그 날은 감독님이 맞았어.”

 

뜻밖의 답에 고죠는 입을 연 채로 멈췄다. 턱밑까지 치받았던 옛 울분이 허무하게 헤집어졌다. 게토는 그것을 휘저어 알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그러고도 표정은 담담했다. 웃고 있는 것도 같았다.

 

“널 다치게 두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넌 앞으로도 계속 던질 테니까. 남은 여름에도, 가을에도, 봄에도, 그 다음에도.”

 

분명히 웃었다. 고죠는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지기 싫었던 것 같지만.”

“하?”

“질 수도 있잖아. 괴물이든 전설이든 다쳤으니까. 그대로 두면 끝까지 얻어맞다 내려왔을지도 모르지.”

“그때도 말했던 것 같은데, 스구루. 이 몸이 그 정도는….”

“맞아.”

“응?”

“맞아, 사토루.”

 

게토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고죠는 말을 잃었다.

 

“네가 그 어깨로 계속 던졌어도 넌 이겼어. 네가 다치든 말든 널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경기장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다 던졌어도 며칠 후에는 가볍게 복귀했을 거야. 마운드에 서보고 알았어.”

 

고죠는 어느 날의 먼 환호성과 어떤 소년을 떠올린다. 소년은 오른손으로 공을 쥐고 다리를 들어올린다. 볼캡의 그림자가 얼굴을 비스듬히 가로지른다. 입매가 단단히 다물려 있거나 혹은 조금 비틀려 올라간다.

 

“네 경기가 아니라 사십 경기가, 사백 경기가 남았대도, 네가 던지면 이겼겠지. 넌 최강이니까.”

 

그리고 소년이 돌아선다. 세 걸음으로 좁은 라커룸을 모두 가로질러 그에게로 온다.

소년은 고죠 사토루를 걱정했다. 그가 무너지는 것을 홀로 알았다. 남은 싸움을 셌다. 계절을 가늠했다. 마주 앉았다. 이유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속삭인다.

 

“하지만 그렇다면 무슨 의미가 있지?”

 

고죠는 불현듯 티백이 늘어진 저 머그컵을 빼앗아 내용물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술이라면 좋을 것이다.

불행히도 게토 스구루는 취하지 않았다.

 

“내가 너라서 이기고, 누군가 네가 아니라 진다면.”

 

우리는 무슨 의미가 있지? 그가 묻는다.

언젠가 그와 고죠가 당연히 우리였던 시절이 있다. 그에게 고죠가 특별했던 만큼 고죠에게 그가 특별했던 날들이 있다. 그때는 나란히 서는 것이 당연했다. 손을 뻗으면 상대의 어깨가 쉽게 닿았다. 그들은 같은 편에 서서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자를 벗고 더그아웃 앞의 흙을 뜨는 패자들이, 혹은 벤치에 들지 못한 스탠드의 열외자들이 그곳에 있다.

그들은 고죠 사토루가 아니다. 게토 스구루 또한 그렇다.

 

우리는 무슨 의미가 있지.

고죠는 그것이 제게 묻는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물음의 앞에, 저 까마득한 곳에, 흰 선 너머에, 열일곱의 소년이 있다.

에이스의 숫자가 훈장처럼 선명하다.

 

고독에 대해 아는 것이 어른이 되는 길이라면 고죠 사토루는 열여덟의 봄에 처음으로 어른이 되었다. 그것은 망각의 강의 어느 줄기를 건너는 일과 같아서 고죠는 소년시절을 잊었다. 그날로는 돌아갈 수 없다. 알아버린 이상 되돌릴 수 없다. 열일곱의 고죠는 사라졌다.

게토 스구루가 영영 답을 얻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다.

게토는 다시 웃는다.

 

“뭐, 원래 오래 할 생각은 없었어. 애초에 집안 형편이 안 됐거든. 고시엔까지 가보다니, 운이 좋았지.”

 

고죠가 알지 못하는 모양의 미소였으므로 그는 그것을 떠난 이후에 배웠을 것이다.

 

“얘기 안 한 건 미안해.”

 

혹시 취한 쪽이 자신인지, 고죠는 제 머그컵을 내려다본다. 그래봐야 설탕에 절여진 자몽 조각과 눈이 마주칠 뿐이었다. 선홍색 시트러스 티는 충분히 달았다.

기껏 지켜놓은 4점차의 리드를 계투가 즉각 원점으로 돌려놓을 때, 경기 내내 상대를 영봉으로 틀어막아도 아군의 타자들이 한 점조차 벌어주지 않을 때, 넉넉히 띄워놓은 내야 인플라이 타구에 야수 셋이 달려들고도 공이 흘러나올 때에도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하다못해 게토 스구루가 십 년 만에 자신을 만난 감상을 고등학교 동창은 오랜만이라는 정도로 일축해버릴 때도 고죠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 잊었다.

 

“좋아하지 않았어?”

 

고죠는 그것을 오래 물어왔다.

 

“나랑 야구하는 거, 좋아하지 않았어?”

 

게토는 언제나 대답하지 않았다.

 

“차 왔네. 이제 가”

“너는 대답을…!”

 

게토는 전자음이 울리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스피커 너머에서 늙수그레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그컵은 식었고 풍선은 가라앉았다. 의자가 바닥을 긁었다. 떠밀리듯 집어든 스포츠백이 맥없이 끌려나왔다. 검은 코트도 스케치북이 되어버린 고지서도 쌓여있는 설거지거리도 어깨 너머로 멀어진다. 현관에서는 빗소리가 들렸다. 잠금장치가 절걱대며 돌아갔다.

 

“스구루!”

“좋아했어. 야구도, 너도.”

 

게토는 기어이 먼지를 뒤집어쓴 접이식 우산까지 떠넘겼다.

 

“십 년 전에 말했으면 고백인데,”

 

복도까지 밀려나와 돌아보면, 게토가 웃고 있다. 아는 웃음이던가. 센서등이 깜박여 보이지 않는다.

 

“잘 가.”

 

문이 닫힌다. 오래된 맨션의 복도에 금속성이 요란하게 울린다. 언젠가 비슷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날도 게토는 고죠의 면전에서 문을 닫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그 길로 그라운드를 떠났다. 그라운드 위로 저녁 햇살이 쏟아져도, 바람이 불어도, 누군가의 발길질에 닫고 나간 문이 박살나도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사라졌다. 그 뒤로는 고죠의 일방적인 패배였다. 문을 닫고 나서면서 원 아웃, 돌아오지 않으면서 투 아웃, 십 년 만에 다시 만난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쓰리 아웃.

세 번의 기회를 모두 루킹 스트라이크 아웃으로 물러서는 등 뒤로 주심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쓰리 아웃, 이닝 체인지.

고죠는 문고리를 낚아챘다. 먼저 걸린 보조걸쇠가 간신히 문을 붙들었다. 문틈 사이로 크게 뜨인 검은 눈이 보였다.

 

“나는 좋아해.”

 

몇 계절이나 기다려온 대답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표정에 대고 몇 번이고 외쳤다. 그 아래에 있는 얼굴이 까맣게 낯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작 게토 스구루였다. 귀걸이를 끼지 않거나 어린 아이의 손을 잡거나 불투명하게 미소 지어도, 아무튼. 그는 여전히 생각이 많았고, 낮게 말했고, 고죠의 컵에 과일청을 부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게토 스구루는 오래된 질문에 낡아빠진 답을 돌려주며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애초에 고죠는 그럴 뜻이 없었다. 대답을 기다린 세월이 길어 그조차 그것을 잊을 뻔했다. 그에게는 돌려줄 말이 있었다.

그 한 마디가 기억나지 않아 한참을 기다렸는데, 떠오른 것은 네 덕이다.

 

“야구도, 너도.”

 

들리던 빗소리는 어느덧 끝물이었다. 물먹은 바람에 구름이 걷혔다.

 

“좋아해.”

 

게임 재개를 알리는 장내 방송 같은 것은 없었지만,

플레이 콜이 울린다.

オーソドックス ロマン,

오소독스 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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