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https://youtu.be/YJ463nxJqHI?si=iRbeAsmK8MjB61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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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은 내내 비였다.

 

지난밤 퇴근길엔 서점에 들렀다. 바스락거리는 이불 위에 새로이 구매한 화집을 올려놓고 몇 장 넘겨보다 잠든 것 같다. 비슷한 시간에 잠들어 같은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가벼운 스트레칭 후 들어간 욕실 거울에 비친 얼굴도 어제와 같았다. 여느 때와 별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다. 컨디션과 상관없이 오른팔 안쪽의 이물감이 불현듯 거슬리기 시작한 것만 제외하면 그랬다. 예고도 없이 냉랭한 금속이 존재감을 드러낼 때면 창밖은 어김없이 비였다.

 

신호에 걸린 틈을 타 운전대에 올려둔 팔을 연신 주물렀다. 기름칠한 녹슨 자전거 페달에 발을 구르듯 팔을 뒤로 두어 번 돌리자 뻐근함이 좀 가셨다. 진화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달라지는 습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기상에 따라 통각을 시험하는 듯한 느낌은 반가운 때가 없었다. 비는 세기와 굵기를 더하며 내리는 중이었다. 중력에 원 없이 무게를 싣고 내려오는 빗줄기 소리가 그때의 갈채처럼 들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출근길 적적함을 달래려 습관처럼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때마침 흘러나오는 일기예보.

 

‘아침부터 수도권에 강한 소나기가 내리고 있는데요. 이는 밤까지 중부지방과 그 밖의 지역으로 확대되겠습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요란한 비도 예상되니까요. 교통안전 신경 써주셔야겠습니다. 며칠간의 소나기는 곧 올해의 장마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지난해보다 좀 이른 편인데요. 이번 주 후반 남부지방으로부터 시작될 전망이며⋯⋯.’

 

고막을 건드리는 산뜻한 음성에 섞인 차창을 두드리는 반복적인 물소리. 초여름, 불청객의 방문을 알리는 노크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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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소식은 유난히 반갑지가 않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반복되며 찾아오는 계절 중 하나일 뿐인데 유난히 많은 기억을 떠올리도록 부추기는 탓이었다. 시작은 항상 장마를 필두로 하였고 뒤를 이어 매년 기록을 갱신하는 무더위가 찾아왔다. 올해도 분명 지난해보다 더울 것이다. 주변을 둘러싼 밀도 높은 습기는 오른팔을 더욱 욱신거리게만 할 뿐이었다.

 

그날도 비였다. 미술 수업을 마치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차로 데리러 오겠다는 부모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스스로 갈 수 있다며 씩씩하게 굴었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걱정하면서도 다 컸다는 듯 기특해했다. 물론 체격은 이미 또래보다 훨씬 커서 정말 다 자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재미있었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온몸을 적셔가며 등원한 것도 그 이유였다. 집안 형편과는 상관없이 하나뿐인 아들이 좋아하는 일에 아낌없이 지원해주겠다는 그들 덕에 나는 학원 다니는 것에도 곧잘 재미를 붙일 수 있었다.

 

물줄기는 거칠고 무거웠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비가 무섭게 내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득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려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렇게 까지 인적이 드문 곳은 아니었으나 날씨 탓인지 평소보다 적은 사람 몇몇이 나와 함께 신호를 기다렸다. 한 손에 우산을 들고 나머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어 꼼지락 댔다. 이내 꺼내 든 종이를 읽어 내려가며 나는 입술 새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나더러 재능이 있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잘한다는 칭찬의 말은 어린 나에게 최고의 동력이 되었다.

 

우산 속으로 비가 들이치자 행여나 성적표가 젖을까 재빨리 집어넣으려 하는 찰나 강한 바람에 그를 빼앗겼다. 얼마 못 가 횡단보도 한 가운데 떨어진 내 인생의 보물 지도는 내 마음도 몰라주고 이미 푹 젖은 채였다. 잉크가 너무 번져버릴까 겁이 났다. 아직 빨간 불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신호가 바뀌자마자 그곳을 향해 뛰었다. 허리를 숙여 종이를 낚아챈 후 바로 그 자리에서 내용을 확인했다. 아직 알아볼 수 있다. 기뻤다. 내 기쁨을 함께하듯 갈채를 보내는 빗소리. 굉음과 눈부신 불빛.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오른쪽으로 돌렸다.

 

나는 날고 있었다. 화구통에 담겨 돌돌 말려있던 캔버스가 장막처럼 펼쳐졌고 각양각색의 물감과 붓들이 시야 위로 흩뿌려졌다. 내 몸 어딘가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왼쪽 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통증이 일 때는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아스팔트 위로 몇 바퀴 구르며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착지했을 때 나는 정신을 잃었다.

 

제법 큰 규모의 외과수술이 몇 차례 지속됐다. 사경을 헤매던 나의 시청각 세포들은 한동안 직선으로 내리쬐는 전등의 눈부심과 심장박동 수를 알리는 기계음만을 감지했다. 그리고 마지막 수술을 마친 후 서사시 같던 꿈을 꾸고 깨어나던 날, 나는 삶에 대한 불평을 멈췄다.

 

삶은 또 다른 연옥이었다. 환상통을 느낄 새도 없이 안식을 찾았던 지난 생과는 달랐다. 주술도 주령도 없는 세상이었지만 지난 생에 대한 기억이 저주처럼 따라다녔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해지는 전생의 기억을 받아들일 능력이 되지 않는 미성숙한 나의 뇌는 곧잘 눈물샘을 건드리곤 했다. 침대에 얽매여 생활하는 아프고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감정표현은 단말마와 같은 절규를 뱉어내며 베갯잇을 적시는 것뿐이었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가엾게 여겼다. 모두가 나를 가엾게 여겼다. 어린 나이에 어쩌다가. 사고가 일어난 후 몇 개월 동안 나는 주변 연민을 양분 삼아 회복했다.

 

정성껏 나를 돌보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곤욕이었다. 이 사람들도 나와 같은 굴레를 도는 것일까. 아무 죄가 없는 사람들인데. 그렇다면 이번 생에도 나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싶었지만 마음은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네가 준 자비와도 같은 안식을 잊지 말라는 듯 왼쪽 가슴께에 피부색보다 짙은 보기 흉한 상흔이 남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엄청난 흔들림을 동반하는 팔로 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됐다. 근육 속 이물감이 느껴질 때마다 오른쪽 팔을 지긋이 바라보는 것이 습관이 됐지만 그 눈빛에 원망은 담지 않았다. 업보. 카르마. 내게 주어진 삶의 형태를 아우를 단어들이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삶이란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 올라가는 것과 같았고 이는 곧 이번 생의 타나토스를 기다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은 너였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생각했다. 나는 살면서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까. 나처럼 너도 같은 이름과 모습으로 태어났을까. 그럼 나와 같은 기억을 갖고 있을까. 기억이 있는 그래도 나에게 아는 체를 해올까. 만약 네게 기억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토록 질긴 우리의 인연에 대해 설명해야 할까.

안녕 사토루, 오랜만이야. 있지, 나에겐 전생의 기억이 있어. 주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던 세상에 우리가 살던 생의 기억이야. 우리는 그곳에서 매 순간 함께였고 친구를 넘어 친우였어. 누구보다 빛나는 청춘을 보내며 많은 것을 공유했고 서로에게 속해있단 감각을 온몸으로 느낄 정도로 서로를 좋아했어. 비록 종국엔 다른 길을 걷게 되어 내 마지막은⋯⋯.

 

재활을 시작하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후 온갖 소셜미디어를 뒤지며 네 흔적을 찾아내려 노력했다. 검색 창에 한자, 영문 가리지 않고 네 이름을 골고루 쳐넣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성년자의 어설픈 흥신소 흉내에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어쩌면 너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생각도 했다. 나는 너보다 빨리 생을 마감했으니까. 너의 끝은 나와는 달리 한참 뒤였을 테니까. 아직 너는 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평행세계가 있어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길을 걷다 혹시나 우연히 너를 만나진 않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는 습관이 생겼었다. 혹여나 내가 널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네가 날 알아볼 수 있도록 나는 그때의 나와 행색을 비슷하게 했다. 평범하게 짧던 머리를 기르고 이전처럼 올려 묶었다. 귓불에는 피어싱을 했다. 주변을 둘러보는 습관은 나이가 들며 점차 사라졌지만 어쩐지 외형만은 그대로 유지했다.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강요당한 후 남들보다 조금 늦은 고등학교 진학을 했다. 나는 수업 시간 외에는 거의 도서관에 처박혀 시간을 보냈다. 주로 역사나 공상과학에 대한 서적들을 탐독했다. 원치 않게 흘러 들어온 전생에 대한 기억이 진짜이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사실은 조금 간절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간절함은 어디에선가 너를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에 기인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혹은 다른 세계에 있을 너와 함께했던 시절의 이야기 한 조각쯤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그러나 그 어떤 문헌에서도 나의 기억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어린 나는 절망했다. 손톱만큼의 의심도 없이 존재할 것이라 믿었던 전생이 내가 빚어낸 환상일 수도 있다는 것. 활자들은 그것에 매몰찬 증빙을 더할 뿐이었다. 그럴 때면 이토록 사무치는 그리움이 허황일 수도 있다는 것에 양가감정이 들었다. 이 세상에 있는지도 모르는 대상을 이렇게나 생생히 그리워한다는 것에 대한 절망감. 그리고 만날 수 없다면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안도감이었다. 큰 사고를 당한 것이 내 뇌에도 영향을 준 것 일지도 몰라. 주술도 존재하지 않는 지금 누군가에게 전생이라는 단어로 화두를 던진다면 돌아올 것은 조소일 것이었다. 지속하면 부모님의 걱정하는 얼굴을 또 마주할 것이다. 또래 사이에서 은어로 일컬어지는 언덕 위의 하얀 집에 가고 싶지 않던 나는 나 자신에게 타협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래, 나만 알고 살아가는 거야.

기억을 찾았던 나이의 두 배쯤 되는 삶의 기억을 가진 건 그런대로 편리했다. 유쾌하진 않지만 나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사람을 다루는데 익숙했던 그때의 특기를 살려 주변에 적을 만들지 않았다. 기억을 막 찾았을 때를 제외하곤 감정을 절제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며 주변엔 항상 사람들이 넘쳐났지만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또래들은 나를 동경했고 혹자는 그런 나를 보며 성숙하다거나 일찍 철이 든 것 같다는 감상을 남기곤 했다.

 

살아오는 동안 기억 속 존재하는 이들 중 그 누구도 만날 수는 없었다. 덮어두어야 할 기억을 들추게 될 매개체가 될 그들의 출연이 무산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살아지는 대로 살다 보면 언젠가 너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이제는 없었다. 나는 살아가고 있다. 오른팔 속의 이물감과 꾸준히 섭취해야 하는 심장약과 수면제 그리고 여러 번 덧칠한 덕에 선명해진 기억 속의 너와. 저주처럼 새겨진 마지막 순간의 네 말 한마디를 말미암아 이전과는 달리 이룰 대의도 명분도 없는 삶을.

 

날씨 탓인지 평소보다 긴 회상과 상념을 잇다 보면 어느새 도착해있었다. 시동을 끄고 조수석 아래에서 집어 든 우산을 차 문을 열며 펴 들었다. 그 잠깐 문이 열린 틈을 타 기어코 들어가서 차 시트를 적신다. 둘러맨 가방 가죽 위로 맺힌다. 바람을 동반하면 우산 안으로 들이쳐 머리와 얼굴 그리고 전신에 닿았다. 쇄골에 닿는 빗방울은 높은 기온과 상관없이 오소소 소름이 돋게 했다. 신발과 바지 밑단을 적셨다. 비는 그랬다. 언제 마주쳐도 좀처럼 유쾌할 수가 없는 대상이었다. 입구를 지나자 팀원 중 하나를 마주쳤다.

 

“게토 선배! 저 진짜 너무 설레요.”

“좋은 아침.”

“사실 잠도 잘 못 잤어요. 작가 쪽에서 먼저 연락해오다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나도 기뻐. 알아주는 사람이 생긴 것 같아서.”

“먼저 와있어요, 그 사람! 외국인인 줄 알았는데 일본인이더라고요! 아, 나도 미팅 들어가고 싶다.”

 

내게로 쏟아지는 후배의 달뜬 목소리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화장실에 들러 온몸에 달라붙은 습기를 덜어내며 긴장감도 함께 떨치려 애썼다. 늦지 않은 도착이었지만 작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소위 말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얼굴에 장착한 채 나는 문을 열었다.

 

모두를 기다리게 한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떠는 것까지 계획했었다. 당연히 본인이 일찍 도착한 것이니 괜찮다는 답변을 들은 후엔 작가의 맞은편에 앉아 대화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우리 미술관의 지난 전시를 좋게 봐주어 고맙다는 감사 인사와 함께 나도 평소 당신의 작품을 좋아하고 있었노라고 전할 참이었다.

 

“어, 게토 씨. 이쪽은 새로운 기획전 함께 할⋯⋯.”

 

이어 소개하는 말이 몇 문장 더 이어졌지만 물속에 잠긴 듯 귓가가 웅웅거렸다. 암전으로 덮인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와 함께 등장하는 주인공에게 그러하듯 모든 감각이 한 존재에게만 집중되었다. 들리지 않을 것이 당연한 걸 알면서도 어느 때보다 요동치는 심장 박동 소리가 전해질까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길게 늘어뜨리고 있던 속눈썹이 두어 번 아래위로 날갯짓을 하자 이내 벽안이 드러났다. 문신처럼 스며들어 결코 잊을 수 없던 눈동자 속 내가 담긴다. 무채색으로 도배된 내 삶에 윤슬을 닮은 찬란한 색의 물감 두 방울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고죠 사토루 입니다.”

 

그곳에 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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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한 가젤 구매자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이만한 현재의 추억과 아름다움이 없다... 고 생각하며 보고 있었는데 그 다음 제목 못을 보고 감탄했네요. 책 제목의 의미를 이해했습니다... 게토는 미래이자 못이군요...

  • 전설의 바다표범 구매자

    책으로보고 웹으로도보고 여기가 바로 천국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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