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https://youtu.be/YJ463nxJqHI?si=iRbeAsmK8MjB61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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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은 내내 비였다.
지난밤 퇴근길엔 서점에 들렀다. 바스락거리는 이불 위에 새로이 구매한 화집을 올려놓고 몇 장 넘겨보다 잠든 것 같다. 비슷한 시간에 잠들어 같은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가벼운 스트레칭 후 들어간 욕실 거울에 비친 얼굴도 어제와 같았다. 여느 때와 별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다. 컨디션과 상관없이 오른팔 안쪽의 이물감이 불현듯 거슬리기 시작한 것만 제외하면 그랬다. 예고도 없이 냉랭한 금속이 존재감을 드러낼 때면 창밖은 어김없이 비였다.
신호에 걸린 틈을 타 운전대에 올려둔 팔을 연신 주물렀다. 기름칠한 녹슨 자전거 페달에 발을 구르듯 팔을 뒤로 두어 번 돌리자 뻐근함이 좀 가셨다. 진화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달라지는 습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기상에 따라 통각을 시험하는 듯한 느낌은 반가운 때가 없었다. 비는 세기와 굵기를 더하며 내리는 중이었다. 중력에 원 없이 무게를 싣고 내려오는 빗줄기 소리가 그때의 갈채처럼 들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출근길 적적함을 달래려 습관처럼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때마침 흘러나오는 일기예보.
‘아침부터 수도권에 강한 소나기가 내리고 있는데요. 이는 밤까지 중부지방과 그 밖의 지역으로 확대되겠습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요란한 비도 예상되니까요. 교통안전 신경 써주셔야겠습니다. 며칠간의 소나기는 곧 올해의 장마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지난해보다 좀 이른 편인데요. 이번 주 후반 남부지방으로부터 시작될 전망이며⋯⋯.’
고막을 건드리는 산뜻한 음성에 섞인 차창을 두드리는 반복적인 물소리. 초여름, 불청객의 방문을 알리는 노크 소리였다.
01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소식은 유난히 반갑지가 않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반복되며 찾아오는 계절 중 하나일 뿐인데 유난히 많은 기억을 떠올리도록 부추기는 탓이었다. 시작은 항상 장마를 필두로 하였고 뒤를 이어 매년 기록을 갱신하는 무더위가 찾아왔다. 올해도 분명 지난해보다 더울 것이다. 주변을 둘러싼 밀도 높은 습기는 오른팔을 더욱 욱신거리게만 할 뿐이었다.
그날도 비였다. 미술 수업을 마치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차로 데리러 오겠다는 부모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스스로 갈 수 있다며 씩씩하게 굴었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걱정하면서도 다 컸다는 듯 기특해했다. 물론 체격은 이미 또래보다 훨씬 커서 정말 다 자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재미있었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온몸을 적셔가며 등원한 것도 그 이유였다. 집안 형편과는 상관없이 하나뿐인 아들이 좋아하는 일에 아낌없이 지원해주겠다는 그들 덕에 나는 학원 다니는 것에도 곧잘 재미를 붙일 수 있었다.
물줄기는 거칠고 무거웠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비가 무섭게 내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득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려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렇게 까지 인적이 드문 곳은 아니었으나 날씨 탓인지 평소보다 적은 사람 몇몇이 나와 함께 신호를 기다렸다. 한 손에 우산을 들고 나머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어 꼼지락 댔다. 이내 꺼내 든 종이를 읽어 내려가며 나는 입술 새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나더러 재능이 있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잘한다는 칭찬의 말은 어린 나에게 최고의 동력이 되었다.
우산 속으로 비가 들이치자 행여나 성적표가 젖을까 재빨리 집어넣으려 하는 찰나 강한 바람에 그를 빼앗겼다. 얼마 못 가 횡단보도 한 가운데 떨어진 내 인생의 보물 지도는 내 마음도 몰라주고 이미 푹 젖은 채였다. 잉크가 너무 번져버릴까 겁이 났다. 아직 빨간 불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신호가 바뀌자마자 그곳을 향해 뛰었다. 허리를 숙여 종이를 낚아챈 후 바로 그 자리에서 내용을 확인했다. 아직 알아볼 수 있다. 기뻤다. 내 기쁨을 함께하듯 갈채를 보내는 빗소리. 굉음과 눈부신 불빛.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오른쪽으로 돌렸다.
나는 날고 있었다. 화구통에 담겨 돌돌 말려있던 캔버스가 장막처럼 펼쳐졌고 각양각색의 물감과 붓들이 시야 위로 흩뿌려졌다. 내 몸 어딘가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왼쪽 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통증이 일 때는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아스팔트 위로 몇 바퀴 구르며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착지했을 때 나는 정신을 잃었다.
제법 큰 규모의 외과수술이 몇 차례 지속됐다. 사경을 헤매던 나의 시청각 세포들은 한동안 직선으로 내리쬐는 전등의 눈부심과 심장박동 수를 알리는 기계음만을 감지했다. 그리고 마지막 수술을 마친 후 서사시 같던 꿈을 꾸고 깨어나던 날, 나는 삶에 대한 불평을 멈췄다.
삶은 또 다른 연옥이었다. 환상통을 느낄 새도 없이 안식을 찾았던 지난 생과는 달랐다. 주술도 주령도 없는 세상이었지만 지난 생에 대한 기억이 저주처럼 따라다녔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해지는 전생의 기억을 받아들일 능력이 되지 않는 미성숙한 나의 뇌는 곧잘 눈물샘을 건드리곤 했다. 침대에 얽매여 생활하는 아프고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감정표현은 단말마와 같은 절규를 뱉어내며 베갯잇을 적시는 것뿐이었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가엾게 여겼다. 모두가 나를 가엾게 여겼다. 어린 나이에 어쩌다가. 사고가 일어난 후 몇 개월 동안 나는 주변 연민을 양분 삼아 회복했다.
정성껏 나를 돌보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곤욕이었다. 이 사람들도 나와 같은 굴레를 도는 것일까. 아무 죄가 없는 사람들인데. 그렇다면 이번 생에도 나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싶었지만 마음은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네가 준 자비와도 같은 안식을 잊지 말라는 듯 왼쪽 가슴께에 피부색보다 짙은 보기 흉한 상흔이 남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엄청난 흔들림을 동반하는 팔로 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됐다. 근육 속 이물감이 느껴질 때마다 오른쪽 팔을 지긋이 바라보는 것이 습관이 됐지만 그 눈빛에 원망은 담지 않았다. 업보. 카르마. 내게 주어진 삶의 형태를 아우를 단어들이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삶이란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 올라가는 것과 같았고 이는 곧 이번 생의 타나토스를 기다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은 너였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생각했다. 나는 살면서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까. 나처럼 너도 같은 이름과 모습으로 태어났을까. 그럼 나와 같은 기억을 갖고 있을까. 기억이 있는 그래도 나에게 아는 체를 해올까. 만약 네게 기억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토록 질긴 우리의 인연에 대해 설명해야 할까.
안녕 사토루, 오랜만이야. 있지, 나에겐 전생의 기억이 있어. 주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던 세상에 우리가 살던 생의 기억이야. 우리는 그곳에서 매 순간 함께였고 친구를 넘어 친우였어. 누구보다 빛나는 청춘을 보내며 많은 것을 공유했고 서로에게 속해있단 감각을 온몸으로 느낄 정도로 서로를 좋아했어. 비록 종국엔 다른 길을 걷게 되어 내 마지막은⋯⋯.
재활을 시작하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후 온갖 소셜미디어를 뒤지며 네 흔적을 찾아내려 노력했다. 검색 창에 한자, 영문 가리지 않고 네 이름을 골고루 쳐넣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성년자의 어설픈 흥신소 흉내에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어쩌면 너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생각도 했다. 나는 너보다 빨리 생을 마감했으니까. 너의 끝은 나와는 달리 한참 뒤였을 테니까. 아직 너는 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평행세계가 있어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길을 걷다 혹시나 우연히 너를 만나진 않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는 습관이 생겼었다. 혹여나 내가 널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네가 날 알아볼 수 있도록 나는 그때의 나와 행색을 비슷하게 했다. 평범하게 짧던 머리를 기르고 이전처럼 올려 묶었다. 귓불에는 피어싱을 했다. 주변을 둘러보는 습관은 나이가 들며 점차 사라졌지만 어쩐지 외형만은 그대로 유지했다.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강요당한 후 남들보다 조금 늦은 고등학교 진학을 했다. 나는 수업 시간 외에는 거의 도서관에 처박혀 시간을 보냈다. 주로 역사나 공상과학에 대한 서적들을 탐독했다. 원치 않게 흘러 들어온 전생에 대한 기억이 진짜이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사실은 조금 간절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간절함은 어디에선가 너를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에 기인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혹은 다른 세계에 있을 너와 함께했던 시절의 이야기 한 조각쯤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그러나 그 어떤 문헌에서도 나의 기억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어린 나는 절망했다. 손톱만큼의 의심도 없이 존재할 것이라 믿었던 전생이 내가 빚어낸 환상일 수도 있다는 것. 활자들은 그것에 매몰찬 증빙을 더할 뿐이었다. 그럴 때면 이토록 사무치는 그리움이 허황일 수도 있다는 것에 양가감정이 들었다. 이 세상에 있는지도 모르는 대상을 이렇게나 생생히 그리워한다는 것에 대한 절망감. 그리고 만날 수 없다면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안도감이었다. 큰 사고를 당한 것이 내 뇌에도 영향을 준 것 일지도 몰라. 주술도 존재하지 않는 지금 누군가에게 전생이라는 단어로 화두를 던진다면 돌아올 것은 조소일 것이었다. 지속하면 부모님의 걱정하는 얼굴을 또 마주할 것이다. 또래 사이에서 은어로 일컬어지는 언덕 위의 하얀 집에 가고 싶지 않던 나는 나 자신에게 타협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래, 나만 알고 살아가는 거야.
기억을 찾았던 나이의 두 배쯤 되는 삶의 기억을 가진 건 그런대로 편리했다. 유쾌하진 않지만 나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사람을 다루는데 익숙했던 그때의 특기를 살려 주변에 적을 만들지 않았다. 기억을 막 찾았을 때를 제외하곤 감정을 절제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며 주변엔 항상 사람들이 넘쳐났지만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또래들은 나를 동경했고 혹자는 그런 나를 보며 성숙하다거나 일찍 철이 든 것 같다는 감상을 남기곤 했다.
살아오는 동안 기억 속 존재하는 이들 중 그 누구도 만날 수는 없었다. 덮어두어야 할 기억을 들추게 될 매개체가 될 그들의 출연이 무산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살아지는 대로 살다 보면 언젠가 너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이제는 없었다. 나는 살아가고 있다. 오른팔 속의 이물감과 꾸준히 섭취해야 하는 심장약과 수면제 그리고 여러 번 덧칠한 덕에 선명해진 기억 속의 너와. 저주처럼 새겨진 마지막 순간의 네 말 한마디를 말미암아 이전과는 달리 이룰 대의도 명분도 없는 삶을.
날씨 탓인지 평소보다 긴 회상과 상념을 잇다 보면 어느새 도착해있었다. 시동을 끄고 조수석 아래에서 집어 든 우산을 차 문을 열며 펴 들었다. 그 잠깐 문이 열린 틈을 타 기어코 들어가서 차 시트를 적신다. 둘러맨 가방 가죽 위로 맺힌다. 바람을 동반하면 우산 안으로 들이쳐 머리와 얼굴 그리고 전신에 닿았다. 쇄골에 닿는 빗방울은 높은 기온과 상관없이 오소소 소름이 돋게 했다. 신발과 바지 밑단을 적셨다. 비는 그랬다. 언제 마주쳐도 좀처럼 유쾌할 수가 없는 대상이었다. 입구를 지나자 팀원 중 하나를 마주쳤다.
“게토 선배! 저 진짜 너무 설레요.”
“좋은 아침.”
“사실 잠도 잘 못 잤어요. 작가 쪽에서 먼저 연락해오다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나도 기뻐. 알아주는 사람이 생긴 것 같아서.”
“먼저 와있어요, 그 사람! 외국인인 줄 알았는데 일본인이더라고요! 아, 나도 미팅 들어가고 싶다.”
내게로 쏟아지는 후배의 달뜬 목소리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화장실에 들러 온몸에 달라붙은 습기를 덜어내며 긴장감도 함께 떨치려 애썼다. 늦지 않은 도착이었지만 작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소위 말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얼굴에 장착한 채 나는 문을 열었다.
모두를 기다리게 한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떠는 것까지 계획했었다. 당연히 본인이 일찍 도착한 것이니 괜찮다는 답변을 들은 후엔 작가의 맞은편에 앉아 대화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우리 미술관의 지난 전시를 좋게 봐주어 고맙다는 감사 인사와 함께 나도 평소 당신의 작품을 좋아하고 있었노라고 전할 참이었다.
“어, 게토 씨. 이쪽은 새로운 기획전 함께 할⋯⋯.”
이어 소개하는 말이 몇 문장 더 이어졌지만 물속에 잠긴 듯 귓가가 웅웅거렸다. 암전으로 덮인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와 함께 등장하는 주인공에게 그러하듯 모든 감각이 한 존재에게만 집중되었다. 들리지 않을 것이 당연한 걸 알면서도 어느 때보다 요동치는 심장 박동 소리가 전해질까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길게 늘어뜨리고 있던 속눈썹이 두어 번 아래위로 날갯짓을 하자 이내 벽안이 드러났다. 문신처럼 스며들어 결코 잊을 수 없던 눈동자 속 내가 담긴다. 무채색으로 도배된 내 삶에 윤슬을 닮은 찬란한 색의 물감 두 방울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고죠 사토루 입니다.”
그곳에 네가 있었다.
02
“게토 씨.”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몇 번이나 더 듣고서야 최면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나는 자리에 앉았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린 나는 당황한 티를 좀처럼 숨기질 못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더듬었고 평소보다 오른손이 더 떨리는 것은 당연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색은 창백할 것이었다. 평소와 다른 나를 보는 직원들의 눈길에서 당황스러움이 느껴졌으나 그를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너의 등장은 나를 나사 빠진 태엽 인형처럼 만들기 충분했다. 나는 삐걱거리며 간신히 이야기를 마치고 명함을 꺼내 전달했다. 미팅 장소를 도망치듯 벗어나 화장실로 직행했다. 제일 안쪽 칸에 자리 잡은 나는 전신을 가득 채운 혼란함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쿵쿵. 심장 소리가 고막을 가득 메웠다. 고장난 메트로놈 같았다. 기억을 찾은 후 처음으로 배운 적 없는 시험 범위에 속한 문제를 받아본 기분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너와의 재회는 나의 예상을 훨씬 벗어난 곳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짧은 시간 동안 훔친 네 모습을 하나둘 꺼내 보았다. 오랜만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본 너는 여전히 반짝거렸다. 나 스스로가 그러길 바랐던 건지 기억이 모호하나 너는 이름도 생김새도 모두 내가 기억하는 너였다. 듣기 좋은 목소리. 입고 있던 셔츠만큼이나 하얀 피부와 머리카락. 긴 윗머리가 까슬한 뒷머리를 덮도록 내려와 있었다. 매끄러운 능선의 코도 한 때 내 이름을 잔뜩 머금고 있던 입술도 옆에서 너를 올려다볼 때 옆모습과 함께 보이던 귀도 모두 기억 속의 너와 같은 생김새였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던 은하수를 담고 있는 눈.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어낸 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식은땀으로 젖은 앞머리와 창백해진 얼굴색. 더듬어가며 단어를 나열하며 겨우 목소리를 뱉어내던 입술. 사시나무처럼 떨던 오른손. 너에게 전생의 기억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다. 기억의 유무와 상관없이 내 첫인상은 최악이었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의 첫 만남이었는데 제대로 망친 것은 누가 봐도 사실이었다. 이왕이면 잘 보이면 좋았을 텐데.
자리로 돌아온 나를 본 동료들의 걱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맘때쯤 항상 컨디션이 좋지 않던 나를 알던 그들에게 둘러댈 핑계가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올해 좀 심한 것 같네. 별일 아니야. 걱정해줘서 고마워. 뱉어낸 말과 달리 나는 기억을 되찾았을 때에 버금가는 이번 생 최대의 고난을 마주하는 중이었다. 동료 중 한 명이 기운 차리라며 가져다 준 차로 목을 축였다. 마른 세수를 하며 머릿속 부유하는 생각의 조각들을 한 데 모으려 노력했다.
내가 바꿀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너를 만났다. 반평생 가까이 고대하던 일이었지만 내 삶에서의 이변이었다. 꿈으로만 치부했던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전생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듯 살던 나는 네가 살아 숨 쉬는 지도 모르면서 감히 너를 만나기를 꿈꾸었었다. 조악한 나룻배를 타고 떠다니는 삶 위로 거친 물결을 일게 하는 네 존재감에 나는 모종의 압도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나는 짐 같은 삶이 끝나기 전 너를 만났다는 사실이 못내 기뻤다. 지금 와서 너를 만난 것은 내 마지막이 가까워 진 것일까 아주 잠깐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만약 그렇다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결말이 정해져 있는 굽이진 일방통행의 출구가 또 다시 너일 수 있다면 나는 진심으로 웃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네게 그럴 생각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벌써부터 너와의 미래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같은 학교에 입학했던 지난 생과는 확실히 다른 시작이었다. 운명 같은 만남이 주어졌지만 나는 나 없이 살아온 이번 생에서의 너를 모른다. 내가 너의 유일이며 대부분의 처음이었던 지난 삶과는 분명 다르겠지. 비즈니스 관계이니 불가피하게 몇 번 더 만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연스레 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래도 친구로는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도 나와 어울리며 어깨를 나란히 해줄까. 나는 조금 설레면서 걱정되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이번 생에도 네 옆에서⋯⋯.
헛된 희망을 품으며 설레발치는 것을 관두고 마음을 다잡았다.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고민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어느 날처럼 무턱대고 너에 대한 것들을 찾아내기보단 기다리기로 했다. 너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얼기설기 엮인 생각들을 촘촘히 정리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얼마 가지 않아 나는 너를 다시 만났다. 역시나 예상했던 때는 아니었다. 상설전시실의 소장품 하나를 확인하고자 들른 참이었다. 확인 사항을 기록한 뒤 전시실을 나와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너를 보았다. 너는 통유리창 앞에 팔짱을 끼고 서서 빗방울로 장식된 유리창 밖 정원을 감상 중이었다. 첫날과는 달리 선글라스를 낀 채 였다. 나는 멀찍이 서서 그런 네 옆모습을 감상했다. 도둑 시선으로만 훔쳤던 너를 제대로 보는 것은 이번 생 처음이었다. 나는 고작 너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인데도 가슴이 벅찼다.
가만하게 너를 감상하며 나는 몇 가지를 깨달았다. 첫 번째는 내가 가지고 있는 전생의 기억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 둘째, 너는 여전히 눈부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나는 아직 감당 못할 정도로⋯⋯.
“어? 게토 씨다.”
얼마 동안 너를 쳐다보고 있었는지도 모르던 나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너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숨어서 짝사랑하던 사람을 몰래 지켜보던 것을 들킨 것처럼 창피했다. 아래 이름이 아닌 성으로 나를 부르며 존댓말을 해오는 너를 보며 확신했다. 기억을 가진 것은 나뿐이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보냈다. 나는 알고 있지만 알지 못하는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생각하느냐 사고회로를 바쁘게 돌렸다.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거야. 이전의 작가들에게 대했던 것과 같이. 익숙한 티도 절대 내지 말고. 물론 너는 그런 내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혹시 시간 있어요?”
평일 오전 미술관은 관람객이 없어 한적했다. 층고가 높은 박공형의 지붕 아래 네 목소리가 울렸다.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온 너는 다짜고짜 미술관 안내를 해달라고 했다. 당황한 나는 얼떨결에 그 요청을 수락했다.
우리는 나란히 미술관 안을 걸었다. 부러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지만 굳이 닿지 않는 거리를 유지한 채 였다. 네게선 과일과 시트러스가 섞인 머스크향이 났다. 날씨와도 너와도 잘 어울리는 향이었다. 예전의 너는 향수 같은 건 뿌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전시실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나는 기계처럼 관내 장소와 소장품들을 소개했다. 저쪽에선 특별전시 중이니까 다음번에 둘러보세요. 도슨트들이 정각마다 해설을 해주니까 시간 맞추시면 좋을 것 같네요.
“게토 씨,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이걸 다 알아요?”
“제가 하는 일이니까요.”
“그래도 대단한 것 같아.”
지하에 위치한 전시실에서 나와 대나무로 장식된 산책로를 걸어 입구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몸은 괜찮아요? 그날 좀 안 좋아 보이던데?”
“아⋯⋯, 괜찮아요.”
“다행이네.”
그날의 기억이 상기되어 구멍만 있다면 숨고 싶었다.
“사람들이 날 처음 보면 무서워하더라고. 게토 씨도 그런 줄 알고 걱정했다고요.”
“무섭진 않았어요.”
“다행이다. 게토 씨한텐 무서워 보이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일인칭이나 말투는 바꾸면 사람들이 덜 무서워할 것 같은데요.”
“은근 잔소리하는 타입이네.”
예전과 똑같이 생긴 입술에선 예전의 네가 할 법한 말이 나왔다. 말과 함께 지어 보이는 표정도 꼭 그때의 너 같아서 나는 너를 보면서도 네가 그리워졌다.
“나 다음엔 여기 정원이랑 카페도 구경시켜줘요. 귀국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었는데 그럴 친구가 없어요.”
“좋아요.”
짧았지만 ‘오랜만에’ 보낸 너와의 시간은 즐거웠다. 너를 다시 만난 것에 당황하던 나는 어디로 간 건지 너를 배웅하는 것이 아쉽기까지 했다.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고 싶은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너를 보낸 후 혼자서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홀로 기억을 가진 채 살아가는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난 너. 우연으로 포장된 만남. 다음을 기약하는 듯한 인사. 너와 내가 보이지 않는 붉은 실로 묶여있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 유려한 전개였다. 겨우 닿은 것이 멀어질까 겁이 났다. 정말로 마지막이 가까워 진 것일까. 지난 생과 같은 결말이 지어지면 어떡하지. 지금의 나는 너를 두고 갈 생각은 좀처럼 할 수 없는데. 무서웠다.
비는 잠시 소강상태였다. 물기 가득한 흙내음. 비에 젖은 목조로 된 지붕에서 나는 나무 냄새. 그리고 비 냄새가 났다. 맺힌 물방울들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다 시선을 조금 더 위로 던졌다. 며칠간 이어지는 장마로 인해 풀과 나무들이 푹 젖어 있었다. 정원을 가득 채우던 신록들은 어느새 녹음으로 치달아 있었다. 그 너머를 보면 언제라도 망설임 없이 비를 쏟아 내릴 것 같은 먹구름이었다. 지나가려면 한참 멀었겠지. 나는 뻐근한 오른팔을 주물렀다.
네가 인사치레처럼 뱉은 말이라 생각했던 말이 약속처럼 굳어 있었다. 나는 너를 미술관 내 정원과 카페에 데려갈 요량으로 가장자리에서 너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어깨를 만져오는 손길에 뒤돌아보면 어느새 도착한 네가 있었다.
우리는 비에 젖은 흙과 돌을 밟으며 정원을 걸었다. 풀 냄새에 네 냄새가 섞여왔다. 잘 어울렸다. 나는 오늘 만남의 목적에 맞게 정원에 있는 석조미술들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을 했다. 이 석당은 당나라의 것이고 어떤 불상이 새겨져 있고 이러한 의미가 있으며⋯⋯. 제법 큰 규모의 정원의 석조물들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나는 입이 아플 정도로 떠들어댔다. 나중엔 목소리가 갈라질 지경까지 이르러 몇 번이고 목청을 가다듬으며 계속했다. 이곳저곳에 있는 유물들을 가리키며 네 시선을 그쪽으로 유도하고자 함이었다.
제법 진지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듣는 네 시선이 너무 뜨거웠다. 나 말고 유물들을 봤으면 좋겠는데. 미술관에선 선글라스 안쪽의 네 눈이 잘 보이지 않았었다. 지금은 눈을 가리는 방해물이 없는 탓인지 살짝만 고개를 돌려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벽안이 있는 것이 퍽 부담스러웠다. 별 의미 없이 쳐다보는 것인걸 아는데도 나는 이상하게 너와 눈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네 시선이 이렇게까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런 건지 지금의 네가 어색해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변을 토독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갑작스런 비였다. 카페로 가는 길을 따라 걷던 길이니 조금만 가면 목적지였다.
“비가 오네.”
“그러네요. 이쪽 계단으로 좀만 내려가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네가 내 왼손을 잡아끌었다. 비 맞기 싫으니까 뛰어요, 우리. 단차가 있어 속도를 내는 것은 어려웠다. 우리는 내리는 비를 거의 다 맞아가며 카페 입구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도 네가 손을 놓아주지 않아 나는 슬쩍 손을 뺐다. 손을 놓아주며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에 예전의 네가 겹쳐 보였다. 놓인 손이 계속 잡혀있는 것처럼 뜨거웠다.
“감기 걸릴 수도 있으니까 따뜻한 거 마셔요.”
“이거 어때요? 고죠 씨는 단 것 좋아하니까.”
“어? 어떻게 알았어요?”
“아, 예전에 그 인터뷰에서 봤던 것 같아요.”
너는 앞에 놓인 따뜻한 코코아를 홀짝였다. 휘핑크림으로 수염이 생긴 네 입 주변을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닦아 내었다. 내 행동은 나도 너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재빨리 손을 가져와 머그를 쥐어 차를 들이켰다. 네 앞에선 자꾸 다짐이 쓸모없어지는 것이 문제였다. 익숙한 티를 내면 안 되는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얼굴이 빨개졌음 어떡하지.
“게토 씨는 엄청 상냥하구나.”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괜찮아요. 나 응석 부리는 거 좋아하거든. 근데 자주 하던 거에요? 엄청 익숙해 보여.”
“⋯⋯예전에 친했던 친구한테 하던 게 습관이 됐어요.”
“그렇구나. 근데 기분 좋다. 나한테도 앞으로 해줘요.”
아니지, 나 친구 없으니까 친구 해줘요. 말도 편하게 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릴 때 영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한다. 교육체계에는 적응이 어려워 거의 홈스쿨링을 했다고 했다. 이곳보단 해외에서 사는 것이 더 편한 외모라 좋았다고도 했다. 천재로 이름을 알린 지는 꽤 된 루키였으나 별안간 일본에서의 개인전 개최를 결정한 이유도 자국으로의 복귀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그냥 그린 건데 주변에서 천재니 뭐니 하더라고.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나이쯤에는 이미 할 줄 아는 게 이거밖에 없었고.
“근데 왜 갑자기 돌아오고 싶어졌어?”
“음, 그냥?”
뭐 집안일 같은 것도 있고. 별 이유 없다는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네가 그냥 와준 덕에 우리는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었으니까.
*
다음 만남은 근처의 카페에서였다. 미술관 밖에서의 만남은 처음이었다. 회사 밖에서 다시 한 번 네 친구가 되어 너를 만난다는 사실에 가슴이 설레었다. 다른 의미로 잠을 설쳤다. 일찍이 와있던 너는 이미 파르페 하나를 해치운 뒤 빈 접시를 옆으로 치워놓은 상태였다. 남의 시선 따윈 아랑곳 않고 테이블 위로 길고 큰 몸을 엎드려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네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나 이곳이 좋아.”
“그렇구나.”
“왜 인지 물어봐 줘.”
“하하. 왜 좋아하는데?”
“도심 한가운데에서 저런 교정을 바라볼 수 있는 게 좋아. 누구에게서도 빼앗을 수 없는 인생의 찬란한 시기를 지켜본다는 거 꽤 낭만적이지 않아?”
“그런가.”
“게토의 학창 시절은 어땠어?”
지옥 같았어. 몸도 마음도 아팠거든.
“글쎄, 그냥 평범했던 것 같아.”
하지만 그 중 제일 괴롭던 건 네가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할 때였어.
“나는 그게 부러워. 평범한 학창 시절.”
나는 내가 대답해놓고서도 잘 알 수 없는 평범한 학창 시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십여 년 전 또래들이 하던 일을 떠올렸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학교에서 만난다. 체육 시간엔 서로 땀 냄새를 풍기며 축구나 농구를 하고 수돗가에서 서로의 살이 얇은 교복이나 체육복 위로 비칠 때까지 물로 장난을 쳤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엔 이성에 대한 호기심 가득 찬 열띤 토론을 했다. 학교가 끝나면 서로의 집이나 오락실로 하교를 하는 것 따위의 일상이었다.
그러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너와 함께였던 그때의 계절을 생각한다. 습하고 꺼림칙하던 나날들. 유난히 많은 저주가 쏟아지던 계절. 끊이지 않는 임무를 쳐내며 퇴치와 거둬들이는 것을 반복했다. 구역질나는 주령구를 마구잡이로 삼켜댔었다. 내게는 불협화음이던 날씨와 저주의 앙상블은 쉬지 않고 계속 연주되었다. 그럴 때마다 돌아보면 나를 향해 웃어주고 있는 네 얼굴이 있던 때였다.
알에서 갓 깨어난 조류처럼 너는 나를 따랐다.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치기 어린 너의 모든 처음에 내가 더해질 때마다 나 또한 그것에 한 번씩 의미를 더했다. 네가 부리는 응석을 받아주는 것이 내게는 벼슬처럼 주어진 일인 양 우쭐대기도 했다. 높이를 모를 깊은 밤하늘에 은하수를 심어둔 듯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가 너만을 위한 특별한 존재가 된 것 만 같은 감상에 젖곤 했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그 눈 가득 담긴 나를 보는 것에 취해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 끝은 나로 인해 얼룩진 청춘이 되어버렸지만.
“나 평범한 거 다 해보고 싶어. 그니까 게토가 도와줘.”
굽힌 팔 안쪽으로 반대쪽 손을 올린 채 턱을 괸 네 모습은 털이 복실복실한 아기고양이를 떠오르게 했다. 무심코 네 얼굴 쪽으로 뻗은 손바닥에 볼과 목덜미를 부벼온다. 거리낌 없이 나를 네 영역으로 들여놓는 너. 피부로 닿아오는 설렘이 내게도 옮은 탓인지 나도 모르게 수줍은 목소리로 대답해버렸다.
“좋아.”
두 글자 밖에 되지 않는 허락의 말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는 네 얼굴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03
“게토 씨, 요즘 그 작가 전담마크 하느냐고 고생이 많네.”
말도 없이 몇 번이나 찾아왔다면서. 폄하하는 듯한 뉘앙스가 묘하게 거슬렸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뭘요, 항상 하던 일인데.”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작가를 만나는 일은 거의 담당하는 편이었다. 그건 매니저로서의 역할이기도 했지만 지난 생의 기억으로 인해 얻은 '재능'덕이기도 했다. 기획전을 위한 첫 미팅 후 작가와 개인적으로 연락하거나 만나는 일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기획자와 작가가 서로의 이해하기 위해 스터디를 할 때도 있었다. 그렇기에 너와의 연락이나 만남을 이미 내 안에선 업무의 연장선이라고 분류되어버린 듯했다. 물론 이전의 작가들과 하던 것과는 형태가 많이 다르긴 했다.
“그래도 인터뷰어들이나 해외 쪽 후일담 들어보면 영 힘들겠더라고.”
워낙 다른 사람들에게 무신경하기로 소문이 났던데. 인터뷰 같은 것도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굴어서 곤란하게 만들기 일쑤고 말야. 예술 하는 사람들 괴짜가 많다지만 안 그래도 힘든 면모에 곱게 자란 도련님 태까지 섞여 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나는 썩 유쾌하지 않은 네 험담과도 다름없는 말을 들으며 지난 며칠간의 네 태도를 돌아봤다. 첫 미팅 때의 기억은 거의 제대로 된 것은 없었지만 꽤나 예의 발랐던 것 같은데. 그 다음 만남에서도 자기 멋대로 가이드 역할을 요청해오긴 했어도 버릇이 없다는 느낌은 없었다. 물론 무심하게 툭툭 내뱉는 말투는 여전했다. 그러나 그것도 예전만큼 공격적이진 않았다. 예전의 너 같으면서도 너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잔소리를 한마디 하긴 했지만.
“그래도 소문만큼 제멋대로인 사람 같진 않았어요.”
“게토 씨가 워낙 사람 다루는 걸 잘해서 그런가 봐. 어쨌든 다행이네.”
하하. 웃으며 대화는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물론 마지막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네가 살아 숨 쉬는 것조차 믿기지 않아 허둥대는 내가 널 어떻게 다룰 수가 있다고.
*
장마가 끝나면 무더위였다. 몇 십 년 만에 찾아온 더위라며 뉴스에서 앞서 다투며 요란을 떨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살인적인 더위가 이어지는 나날이었다.
너는 나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들었다. 워낙 잠이 없다고 했다. 그건 이전의 너와 같았다. 내 휴대폰은 개통 이래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오는 네 연락 덕분이었다. 내가 일하는 중일 때면 너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주로 자신이 혼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보고였는데 대부분 사진이 첨부되었다. 주변 사물과 풍경을 배경으로 적지 않게 네 얼굴까지 찍은 사진을 전송해오곤 했다. 나는 굳이 본인 얼굴을 보내는 것에 대한 의도를 파악할 수 없으면서도 이것을 반평생 혼자 너를 그리던 나에게 주는 보상처럼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 갔던 디저트 집 진짜 맛있어. 다음에 여기 먹으러 오자. 이것 봐. 크레페 완전 커. 게토도 같이 먹으러 오자. 나 오늘 이거 해 먹었어. 다음에 해줄게. 퇴근시간이 가까워지면 데리러 오거나 전화를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방인으로 분류되던 나를 친구로 대하는 일이 네게는 무척 쉬워 보였다. 나는 친구라고 쓰인 이름표가 떨어지지 않도록 가장자리를 매만져가며 꾹꾹 눌러 붙였다. 네가 보내오는 문자의 대부분이 미래에 관한 내용인 것을 알아차릴 때 마다 애써 그것들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근데 게토는 오른팔이 아파?”
오늘도 역시 퇴근 시간에 맞춰 마중을 온 너와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메뉴는 소바였다. 오로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이유로 정해진 메뉴였다. 네가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팔을 가리키며 물었다. 자주 주무르는 것 같은데.
“어릴 때 사고를 당해서. 여름이면 이러는 게 습관이네.”
“어, 미안.”
“아냐. 오래되기도 했고.”
“아팠겠다.”
“응. 근데 진짜 괜찮아.”
거짓말은 아니었다. 신체적 고통 따위는 시간이 흐를수록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었다.
“그러면 그 사고 때문에 그림도 그만둔 건가?”
“맞아.”
“유감이네.”
“어차피 고죠처럼 천재 소리 들을 만큼 대단한 재능도 아니었어.”
“그래도 아깝잖아.”
“글쎄, 지금은 아무래도 괜찮은 것 같네.”
“음.”
“결국 지금 일을 하면서 고죠를 만날 수 있었잖아.”
나는 순간 굳었다. 답지 않게 들떠선 안 해도 될 말까지 해버린 것을 깨달았다.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정도의 사이에서 듣기엔 부담스러운 발언이었다. 거부감이 들었으면 어떡하지. 네 반응을 살피는 것조차 무서웠다. 목을 가다듬으려 물을 마시는 척 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와! 우리 운명인가 보네, 그럼!”
꽉 막혀있던 가슴 속에 네 미소가 길을 내주었다.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의 온기가 너무 소중해서 나는 이내 한숨 같은 웃음을 짓고야 말았다.
*
하루의 절반 이상이 훌쩍 지나도 해가 지지 않는 때였다. 어느 때보다 길어진 노을을 배경으로 우리는 말 그대로 매일 저녁을 함께 했다. 어느새 단골 식당도 생겼다. 스탬프 랠리를 하듯 안 가본 식당들을 하나씩 정복하는 재미마저 생겼다. 대개 내 입맛에 맞는 식당위주로 방문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저번에 말했던 거 만들어줄게. 게토가 좋아할 거 같아.”
시작은 역시나 너였다.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아 직접 해주겠다며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벌써 서로의 집까지 찾아가도 되는 사이가 된 건가. 잠깐 생각이 깊어질 뻔 했지만 네 초대를 거절할 순 없었다. 평범한 일.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여 저녁을 같이 먹는 일은 그에 속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행이었다.
맛있었다. 너는 의외로 요리 실력이 좋았다. 놀라운 점이었다. 내 입맛에 맞는 요리를 찾았다는 게 그냥 해본 말은 아니었는지 나는 정말 소스까지 싹싹 긁어 먹었다.
“남이 해준 요리에만 익숙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게토가 잘 먹는 거 보니까 기분 좋네.”
“맛있어.”
“당연하지. 나 원래 뭐든지 잘하고.”
독립을 할 수 있는 때부터는 혼자서 지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혼자 해먹을 일이 잦아져 웬만한 요리는 할 줄 안다는 말도 덧붙였다. 네 첫 식사 초대를 선두로 우리는 서로의 집을 고전 시절 기숙사 방처럼 드나들며 켜켜이 추억을 쌓기 시작했다. 정말 그때의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추억에 대한 앨범을 공유하는 것에 나는 조금 설렜는지도 모르겠다. 네가 해주는 요리를 해먹을 때도 있었고 가끔은 학창 시절 때처럼 편의점에서 도시락이나 컵라면을 종류별로 사먹기도 했다. 물론 디저트 진열대 앞에서 좀 더 신중함을 비치는 네 덕에 후식을 더 많이 먹을 때도 있었다.
*
“잠을 잘 못 자?”
서로의 집을 오가는 게 익숙해질 때쯤 우리 집에 방문한 네가 씻고 나온 내게 물어왔다. 침대 옆 사이드 콘솔 위에 놓인 약통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였다. 나는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막 씻고 나온 것 치곤 상쾌한 기분을 그다지 오래 만끽하지 못했다. 하나는 심장약인 건 알겠는데 이건 수면제 아냐?
“가끔? 깊이 잠들기 힘든 때가 있어서.”
예고도 없이 급습하는 기억의 편린이 몰아칠 때면 잠 못 드는 밤이 되곤 했다. 물론 너를 만난 이후론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습관처럼 꺼내놓은 것을 잊고 있었다. 나는 약통을 서랍 안에 집어넣으며 네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말을 찾았다. 너무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다더라. 아까 사 온 신상 푸딩 먹자.
“내가 재워주고 싶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답변이 나왔다.
“어?”
“나도 가끔 잠 못들 때 있긴 해. 다들 그런 때 있잖아.”
“어, 그렇지. 고죠도 그럴 때가 있구나.”
“다음부턴 잠 안 오면 나 불러. 내가 재워줄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만족했다는 듯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나는 그렇게 웃어주는 네 얼굴이 좋았다. 예전의 네가 내게 보여주곤 했던 얼굴, 그때와 같은 미소. 나는 아직도 네 눈을 보면 마음속에서 거센 풍랑이 이는 것만 같았다. 네 마음에 잔뜩 생채기를 내며 먼저 떠난 것은 나인데. 그럴 자격이 없는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나를 향해 웃어주는 햇살 같은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만 싶었다.
“재워준다더니.”
회사로부터 급한 연락이 와 혼자 나가 통화를 마치고 온 참이었다. 테이블에 이것저것 디저트를 먹은 흔적을 잔뜩 남겨둔 채 너는 소파에 모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생에서 잠든 네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잠든 네 옆으로 가 앉았다. 얼굴을 쓰다듬고 싶었다. 소파 아래로 떨어진 팔을 올려주려 손을 잡았다. 길쭉하고 커다란 남자다운 네 손. 그 큼직한 손등에 충동적으로 입술을 댔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나는 처음으로 혼자서만 간직한 기억들이 애틋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너로 인해 상기된 예전 감정들이 입술 새로 새어 나오지 못하게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
네게서 찾은 예전의 너와의 공통점 중 하나는 나와 닿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사춘기 소년들도 아니었고 그때처럼 체술을 익히기 위해 대련 따위를 하는 일도 없었다. 보내고 있는 계절은 누구와 닿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하는 때이기도 했다. 굳이 몸을 부딪힐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그때의 너처럼 나에게 닿아왔다.
지난 생에서의 우리를 떠올렸다. 우리는 떨어져 있는 것이 되려 어색할 정도였다. 거의 한 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시도 때도 달라붙어 오는 네 탓이었다. 같은 공간에 있을 때면 언제나 너는 신체의 일부를 붙여오곤 했다. 주로 어깨동무를 하거나 뒤에서 나를 끌어안아 내 어깨에 턱을 올리거나 하는 방식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씩 귀 뒤로 닿아오는 숨결이 나를 놀라게 할 때마다 돌아보면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 접촉에 성적인 의도는 없을 것이었다. 나는 그것에 우정이라는 이름표를 한 번 더 덧붙였다. 그래, 이걸로 된 거야. 이번 생의 나에게 있어 욕심을 부리지 않는 건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수위가 높았다. 지극히 내 기준에서였다. 상체가 닿아오는 것은 괜찮았지만 무릎 위에 앉는 건 조금⋯⋯. 망설여졌다.
큰 사고로 그림을 그만두었단 이야기를 듣고 네가 꼭 하고 싶다며 노래를 부르던 일을 비로소 실행하기로 한 날이었다. 너와 함께 그림을 그리는 일. 오랜만에 캔버스 앞에 앉는 것은 설렜다. 물론 너와 함께한다는 것이 나를 더 가슴 뛰게 했다. 이젤 앞 의자에 앉아 앉으라는 듯 제 허벅지를 두어대 치는 네 앞에 나는 몸 둘 바를 모른 채 서 있었다. 아무래도 의자 하나를 더 가져오는 게 낫겠다. 말을 꺼내자마자 너는 내 왼팔을 끌어당겨 무릎 위에 앉혔다.
“이렇게 해야 내가 손 잡아주기가 편하잖아.”
귓가에 닿아오는 숨결이 간지러웠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림에만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내 오른손에 연필이 쥐어졌다. 그리고 내 오른손을 잡아 스케치를 시작했다. 고요한 작업실 안은 곧 너와 내 숨소리 그리고 흑심이 닳아 없어지는 소리로만 가득 찼다.
“이쪽에 좀 더 명암을 줘봐.”
“이렇게?”
“응. 잘하는데?”
“고죠가 도와주니까.”
“난 그냥 손만 잡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내 의지대로만 팔을 움직이는 것도 모른 채였다. 어릴 적 꿈꾸던 것을 다시 한 번 재현하는 것에 고양된 나는 무아지경이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나도 사고만 아니었다면 지금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그럼 나는 평생 너에 대한 기억을 찾을 수 없었을까. 너를 모르는 삶은 어땠을까. 지금 와선 상상하기도 힘드네. 그래도 너를 만날 수 있었을까. 기억이 없어도 너를 알아차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쩌면 지난번처럼 친구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습관처럼 다닥다닥 붙어오는 상념들과 함께 그리는 것에 몰두했다. 한 부분이 거의 완성될 때쯤에야 나는 혼자 신났던 나를 의식하고 정신을 차렸다. 매번 말이 많던 네가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리던 것을 멈추고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안, 내가 너무⋯⋯.”
언제부터인지 모를 시선과 마주쳤다. 너무 가까웠다.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면 좀 부끄러운데.”
“왜?”
알고 있는 이유를 곧이곧대로 대답할 마음이 없는 나는 몸을 일으키려 고개를 돌렸다. 너 다리 아프겠다.
“다음에 이어서 그릴래. 오랜만에 하니까 재밌네. 고마워.”
“왜 부끄러워?”
상체를 기울여 눈을 맞추며 짓궂게 묻는 너. 이번에도 역시 내가 먼저 눈을 피했다. 순간 입술에 닿아오는 감촉.
“아, 못 참았다.”
순간 숨 쉬는 법을 잊었다.
“지난번에 나 누워 있을 때 게토가 내 손등에 뽀뽀해줬잖아. 그거 너무 기분 좋았어.”
속눈썹이 얽힐 정도로 가까워 초점을 맞추기 힘들었지만 나는 굳어진 상태로 너를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안 자고 있었으면 말을 해주지. 나는 네가 자는 줄로만 알았는데. 네가 깨어있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내가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면서. 뒤죽박죽 섞인 마음의 소리들이 너무 크게 뭉쳐 목구멍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계속 입술에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아차린 내가 몸을 무르려 하자 너는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아왔다. 너는 그런 나를 보며 짓궂게 웃더니 이마를 맞대어 왔다.
“그래서 한 번 더 할 건데.”
입술에. 대답조차 할 수 없어 가만한 나를 너는 긍정으로 알아들은 것인지 곧바로 입술이 닿았다. 네 입술은 설탕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달큰한 향이 났다. 뒤늦게 밀어내려는 두 손이 잡혀 내려졌다. 너는 계속 나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마주 바라보는 것 보단 눈을 감는 것이 나았다. 버드키스가 여러 번 닿았다 떨어졌다. 살짝 열린 입술을 노크하듯 혀로 두드리던 너는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았다.
아무래도 나는 너와 계속 이렇게 하고 싶었던 것 같아. 너를 갈구하는 마음에 패배한 나는 결국 예전보다 다부지고 어른스러워진 네 어깨 너머로 팔을 둘렀다. 조금 더 가까워지며 네게 무게가 실렸다. 너는 기대오는 나를 들어 완전히 마주 보도록 네 허벅지 위에 나를 앉혔다. 입술만은 떼지 않은 채였다. 혀로 뭉근하게 눌러오는 입술 새로 들어오는 타액은 너의 맛이 났다. 달았다.
잠깐 숨을 고르기 위해 입술이 떨어졌을 때 입술 새 늘어진 은사들을 너는 엄지로 닦아 주었다. 감긴 눈을 떠 너를 바라본다. 푸른 눈동자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순간 나를 원할 때마다 보이던 예전의 그 눈동자가 겹쳐 보였다.
“싫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근데 왜 울어.”
깨닫기도 전에 터져버린 울음을 억지로 멈추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입술 그러지 마. 상하잖아.”
울지마. 응? 다정한 어조로 말하며 허리춤에 닿아있던 손을 가져와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지분거렸다. 이내 그 위로 촉촉이 닿아오는 입술. 코끝이 겨우 닿을 듯한 거리에서 여러 번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던 너는 다시 입을 깊이 맞춰왔다.
보고 싶었어. 네가 너무 그리웠어.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되뇌었다.
04
너와의 일상은 계속되었다.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우리는 헤어질 때마다 입맞춤을 했다. 때로는 어린 아이처럼 서로의 볼이나 입술에 가볍게 내려앉도록 장난스럽게, 때로는 허리 부근이 저릿해지도록 진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 모든 키스는 너로부터 시작되었다. 입맞춤이 깊어질수록 나를 만져 오는 손길에 대범함도 커졌지만 입술과 몸을 떼어내는 건 항상 나였다. 그러면 너는 얼굴 가득 드러난 아쉬움을 애써 구겨 넣곤 했다. 나로선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직 친구였다. 물론 전생에도 우리에게 연인이란 이름표를 따로 붙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서로에게 유일한 것이 당연했던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선을 지켜야 했다. 애초에 네가 지금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어차피 행복이 지속되지 않을까 무서워 애써 외면하려는 비겁한 변명이었지만.
입맞춤을 제외하면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우리는 때때로 정말로 남고생이 된 것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 일상에는 내기나 놀림도 빠질 수 없었는데 오늘은 그 중 하나의 연장선이었다.
“게토는 어떻게 라면도 못 끓여?”
“뭐라고?”
나보고 요리를 못한다며 놀리던 것이 시발점이었다.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이를 가는 나를 보며 너는 목청이 보이도록 고개를 뒤로 젖혀가며 웃었다. 요리에 소질이 없는 것도 발끈한 것도 사실이었다. 오늘의 일일 미식 평론가는 기꺼이 퇴근 시간에 맞춰 마중을 나와 같이 장 보는 것을 도왔다. ‘쉽고 맛있는 양식’이라는 단어가 한동안 검색 창을 차지했다. 맛있어서 매일 먹고 싶다고 매달리게 해줄 테니 잘 보라며 으름장을 놓은 상태였다. 마트에선 재료를 얼마큼 사야 하는지도 모르며 우왕좌왕 하는 나를 보며 너는 한 번 더 배를 쥐고 웃었다. 이미 거기서부터 진 느낌이었지만 연습한 것이 아까워서 포기할 수 없었다.
“네 첫 요리 시식을 앞둔 내 심정을 물어봐 줘.”
“알겠어. 게토 스구루 셰프의 요리 시식을 앞둔 심정은 어떠세요?”
“걱정돼.”
“나 원래 하면 잘해. 안 해 버릇해서 그렇지.”
“나 점심도 대충 때워서 저녁은 진짜 맛있는 거 먹어야 되는데.”
“⋯⋯그럼 그냥 네가 해.”
“농담이야. 나 게토가 해주는 건 다 맛있게 먹을 수 있어.”
달라붙어오며 자연스럽게 볼에 입을 맞추는 너를 나는 팔꿈치로 밀어냈다. CCTV가 있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너는 더욱 달라붙어 왔다. 내려야 할 층의 버튼 불빛이 꺼지고 문이 열린다는 안내말이 나왔다. 사는 오피스텔은 엘리베이터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길이 나 있었는데 나의 집은 왼쪽으로 한번 코너를 돌아야 했다. 달라붙어 오는 너를 계속 밀어내며 삐지지 않았다는 걸 온몸으로 증명하려던 나는 방향을 틀자마자 우뚝 멈춰섰다. 장난이라니까. 그런 나를 보고 웃으며 계속 놀리던 너도 고개를 앞쪽으로 돌렸다.
“스구루.”
오늘의 저녁 식사에 초대 받지 못한 손님의 방문이었다.
*
“어쩐 일이야, 집 앞까지.”
“요즘 너무 연락이 안되길래 퇴근길에 잠깐 들렀어.”
“좀 바빴어.”
“그래, 바빠 보이네. 아, 이쪽은 스구루 친구? 안녕하세요.”
“당신 나 알아?”
오랜만이었다. 해외 인터뷰어들이 입을 모아 말했을 그때와 같은 네 모습을 본 것은. 날을 잔뜩 세워 공격적인 태도인 너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나를 보며 너는 분하다는 듯 아래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연락할게. 다음에 만나서 얘기하자.”
“걱정돼서 온 건데 문전박대 할 거야?”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말을 전한 채 문고리를 돌리려는 순간 남자가 옆으로 와 왼 손목을 살짝 쥐려는 찰나였다. 남자와는 닿을 수도 없게 네가 나를 끌어안듯이 당겼다.
“가지? 불편해하는 거 같은데.”
“일단 오늘은 가.”
“하하. 알겠어. 연락해.”
남자가 먼저 백기를 들어주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돌아가는 기척을 낼 때 나는 문고리를 돌려 현관문을 열었다. 신발을 벗고 부엌으로 향했다. 물어오기 전에 먼저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짐을 놓자마자 정리하지도 않고 나는 네게로 갔다. 너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현관에 서 있는 그대로였다.
“스구루.”
네가 나를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나는 나를 오랜만에 이름으로 불러주는 네 목소리가 좋아 계속 곱씹었다.
“나도 너 이름으로 부를 거야.”
“응.”
“너도 나 이름으로 불러.”
“알겠어.”
“불러줘.”
“사토루.”
그 언젠가 지겹게 불러댔던 이름 세 글자를 입술에 담아 뱉어내는 것이 이토록 감격스러운 일일지 몰랐다.
“누구야?”
“그냥 친구야.”
“그냥 친구의 분위기가 아니던데.”
“그런 분위기 맞아. 사토루 같은 친구야.”
“나랑 같다고?”
“그래.”
일단 들어와. 왜 현관에 서서 그래. 네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키스도 했어?”
“뭐?”
“나랑 같다며. 너 나랑 키스하잖아. 우리 친군데.”
“아니야, 그런 거.”
“그런 게 뭔데.”
너는 이상하리만치 집요하고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그래서 그 친구 만날 거야?”
“그래야지. 연락하고 만나기로 했으니까.”
“왜?”
“사토루, 왜 그래. 들어와서 얘기하자"
“나도 모르겠어.”
별 것도 아닌 일에 문 앞에서 너와 대치하는 상황이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시간과 상관없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매미의 구애소리가 이명처럼 들리는 것 같아 거슬렸다.
“나 가봐야 할 것 같아. 요리는 다음에 해주라.”
어느새 습관이 된 입맞춤이 없어 어색했다. 현관문이 닫히고 센서 등이 꺼질 때 까지도 가만히 서 있던 나는 부엌으로 돌아왔다. 초대받은 손님도 초대받지 못한 손님도 모두 되돌아간 집은 고적했다. 함께 장 봐온 재료들을 정리 후 미리 연습해둔 요리를 혼자 해 먹었다.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주령구를 하도 삼켜 미각이 거의 마비됐을 때와 비슷했다. 오랜만에 상기된 원치 않는 기억에 입맛은 더욱 떨어졌다. 대부분을 버렸다. 잠들기 전 혹시나 해서 들여다본 휴대폰에 네 연락은 없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불면에 팔을 접어 눈가에 올렸다. 점차 사그라진 매미 울음소리가 뚝 끊긴 것이 얼마간 지속될 무렵 비 내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구더기처럼 주령들이 솟아나던 그 해 여름은 바빴다. 각자 임무를 수행하는 날이 많아졌다. 시답지 않은 임무를 마치고 기숙사 방에서 우두커니 너를 기다리는 시간도 늘었다. 한시라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던 너의 부재가 잦아지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달갑진 않았다. 그럴 때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침대에 누워 한 팔을 이마 위에 올려두고 누웠다. 그러다 보면 기어코 기억 속을 비집고 고개를 내미는 그날의 기억이 있었다.
열네 살 여자아이의 목숨을 담보로 한 어른들의 게임에서 우리는 장기말 중 하나였다. 임무는 실패했다. 둘이어서 최강이라 생각하던 나의 오만함은 가벼이 짓밟혔다. 여자아이는 죽었고 나는 죽을 뻔 했었다. 눈을 뜨자마자 분노와 자신에 대한 실망감을 어거지로 삼킨 채 너를 찾아 헤맸었다. 너는 여자아이의 주검을 안고 내 앞에 서 있었다. 공허하고 마른 눈을 한 너는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리며 내게 잘못이 없다 말했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라며 모두를 죽여도 될지 내게 물었다. 그런 말을 하는 너를 말렸다.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 의미. 중요한 것이었다.
지키려 할수록 잃는 것들이 많았다. 그들을 지키기 위한 명목으로 참여한 주술사라는 마라톤 게임. 그것이 하는 일이라곤 진득거리는 붉은 액체로 얼기설기 짜인 레드카펫을 깔아둔 채 동료들의 시신을 환영하는 것이었다. 세포 활동이 멈춰 닿지도 않을 굳어버린 고막에 이명과도 같은 굉연한 갈채를 쏟아내며.
어린 여자아이 두 명이 있었다. 존재만으로도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연약한 생명체들. 짐승처럼 우리에 갇힌 채 핍박과 폭력을 받아내고 있었다. 주술사라는 이유만으로 수가 많은 약자들에게 매몰되어 박해 받는 중이었다. 어수룩한 존재들을 향해 실시간으로 추악한 저주를 쏟아내는 비주술사들이 바로 곁에 있었다. 나는 그것을 다 알면서도 비주술사들을 지키고 구하는 일을 선택해왔다.
누구를 위해서?
나이프를 들었다. 팔레트에서 선혈의 색을 덜어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너의 눈을 닮은 색으로 칠해진 캔버스의 빈 자리를 채웠다. 가감 없이 묻혀가는 과감한 채색을 말려줄 이는 곁에 없었다. 나를 원망하는 그들의 절규가 들린다. 나는 뱃속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분노와 함께 주력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생명이 감지되는 곳 마다 빈틈없이 뻗어 모두 꺼뜨렸다. 그때의 갈채가 들려왔다. 나를 조롱하는 것 같기도 칭송하는 것 같기도 한 소리였다. 제법 멀던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데시벨은 점점 커져 고막이 터질 것 같이 귀가 아팠다. 시끄러워.
직접 꺼뜨린 생명들이 연기처럼 솟아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고체가 되어 질감을 가진 어두운 형체들은 팔다리를 만들어 내 쪽을 향해 다가왔다. 가지각색의 모양을 한 기괴함이었지만 이미 알고 있던 추악함이었다. 손을 뻗어 구의 형태로 만들어 삼켜버리면 그만이었다. 익숙한 일련의 과정들을 위해 손을 뻗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다가오는 수는 점점 많아졌다. 빨리 조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몸부림을 치듯 팔에 힘을 주었다. 여전히 움직이질 않았다. 누군가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기분에 나는 겨우 오른팔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누구도 붙잡고 있지 않았다. 내겐 누군가에게 붙잡힐 오른팔이 없었다.
소스라치듯 놀라며 눈을 떴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손을 뻗어 쥔 휴대폰으로 확인한 시간은 새벽 3시. 좀처럼 꾸지 않던 전생의 기억을 들추는 악몽을 꾼 건 오랜만이었다. 엄연히 말하면 악몽은 아니었다. 지난 생에 대한 복기였다. 받아들이면 됐다. 전생의 기억을 나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다짐한 날 이후, 내 일상에는 종종 깊숙이 은폐해온 나의 기억을 벗겨내는 과정이 찾아왔다. 너무 특별해서 한편으로는 너무 괴로워서 부러 꺼내 보기 힘든 기억들이었다. 무의식은 그런 나를 기꺼이 돕겠다는 듯 수마에 잠긴 내게 이따금 그날의 환영들을 보여주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이렇게 몸살을 앓았다.
번쩍하는 섬광에 창밖을 보면 천둥과 함께 요란하고 사나운 비가 계속되고 있었다. 꿈에서 듣던 갈채 소리 같았다. 귀를 막았다. 빗물이 나에게 달라붙은 저주 같은 기억들마저 씻어내려 가주면 안 되려나. 나는 생각했다.
*
감정을 억누르고 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음이라는 서랍 가장 아래 칸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기억과 감정들을 함께 욱여 넣는 것은 습관처럼 괜찮다는 말을 내뱉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도 오랜 학습의 결과였다. 어릴 적, 그러니까 기억을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 또래보다는 조숙했지만 그렇지 못한 신체 덕인지 이따금 갈무리 할 수 없는 감정들로 서랍 한 칸이 넘치도록 가득 찰 때가 있었다. 빈 곳을 찾아 손가락을 사용해 눌러 넣어도 도무지 닫히질 않았다. 진짜 있었을지도 모르는 너란 사람의 존재가 화석처럼 굳어져 너무 큰 공간을 차지하는 터였다. 시도 때도 없이 눈에 선명하게 비치는 네 얼굴 덕에 어지러웠다. 아픈 몸에 이어 온전치 못한 정신을 병행하는 끔찍한 일상에 대한 보상으로 나는 알코올이나 니코틴을 선택했다. 계절이나 날씨와는 상관없이 물방울 속에 갇힌 것처럼 숨이 막혀올 때면 나는 그것들을 찾았다. 딱히 맛이나 멋이 있다는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그게 일반인들에게 있어 가장 흔한 방식이라 그랬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처연함을 겉옷처럼 두르고 혼자서 앉아 있었다. 즐겨 가던 곳은 혼자서 술을 마시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바텐더는 수다스럽지 않아서 좋았다.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혼자 얼굴을 비치는 내게 반가움만 전할 뿐이었다. 서비스랍시고 근황이나 별다른 이유를 물어오지 않는 것이 편했다.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 자리를 뜨려 몸을 반쯤 일으켰을 때였다. 한 쪽 어깨를 두드려오는 손길이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일상에서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게 영 익숙지 않은 내가 올려다볼 정도로 키가 컸다. 제법 취기가 올라 흐릿해진 초점을 맞추려 눈을 찌푸리며 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밝은 모발색과 푸른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칭하는 말은 교사일 때의 너와 같았고 적당히 도톰한 입술에서 뱉어내는 말투가 무척이나 다정한 사람이었다. 남자와의 첫 만남이었다.
무던히도 억눌러 겨우 자취를 감춘 그리움이 어느새 고개를 들이미는 것을 막을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면 나는 남자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나는 너를 닮은 그에게 이번 생의 첫 입맞춤을 바쳤다. 남자는 호텔까지 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신적 나이와 신체나이 사이의 괴리에 혼란스럽던 나보단 진짜 어른인 그는 모든 행동에 여유가 있었다. 방에 들어왔을 때까지도 서두름이 없었고 먼저 씻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취기로 달아오른 얼굴을 가린 채 생각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답지 않은 충동으로 어떤 일을 저지른 건 이번 생에선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런 내 행동의 방아쇠는 너를 떠오르게끔 하는 그의 외모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날 밤 우리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와 내가 닿았던 건 내가 술김에 무작정 입술을 부딪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가진 욕구 중 가장 약한 것이 성욕인 생을 살고 있었지만 서로 간의 주고받은 암묵적인 신호에 의해 호텔까지 온 것 치곤 나는 너무 건조했다. 샤워를 하면서 침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남자를 생각해도 감흥이 없었다. 상념과 함께 긴 샤워를 마치고 온 나를 기다리던 남자는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할 마음 없는 사람하곤 하지 않는다는 게 본인의 신조라고 했다. 나는 그게 고마웠다. 모로 누워 먼저 잠든 남자의 등을 보며 마저 생각했다. 왜일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그는 네가 아니었다.
아침이 밝자 나보다 먼저 눈을 뜬 건 수치심이었다. 당돌함을 넘어 맹랑하기까지 했던 지난밤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나는 숨고 싶었다. 남자는 그런 나를 귀여워했다. 아침 식사까지 같이 한 우리는 연락처를 교환한 후 각자 귀가했다. 얼마 못 가 남자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남자는 내가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대학생이었던 나와 달리 버젓한 사회인이었던 그는 매사 여유로웠다. 두 번째 만남에서도 역시 어색했지만 다정한 남자는 내가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견디도록 배려해주었다. 몇 번의 만남 끝에 남자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이따금씩 남자로부터 먼저 연락이 오면 만나서 식사를 하고 서로의 근황을 전하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남자를 만날 때마다 나는 너를 떠올렸다.
약속시간보다 먼저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는 입구에서부터 눈에 띄는 외모였다. 창가로 들어오는 이른 오후의 햇볕에 밝은 그의 모발이 더욱 빛났다. 백색에 가까운 너와 달리 밝지만 금발에 가까운 색이었다. 그는 자신이 혼혈이라고 했었다. 너의 눈동자는 오롯이 푸르름만 담고 있는데 반해 그의 눈동자는 회색이나 녹색이 섞여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남자는 이제 보니 너와 그렇게 닮지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너무 간절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남자를 매개체 삼아 무던히도 너를 그렸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찾은 거지?”
“뭘?”
“스구루가 항상 나 너머로 보고 있던 사람.”
30대 후반이 된 그는 이전보다 더 여유로웠고 어른스러웠다. 적당한 울림을 가진 듣기 좋은 목소리로 인사에 이어 전해온 말에 정곡을 찔렸다.
“알고 있었구나.”
“흔치 않잖아. 나만큼 이국적으로 잘생긴 사람은.”
“미안.”
“웃으라고 한 소린데.”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대놓고 나를 경계하면서 위협하는데 무슨 제 반려 보호하는 늑대 보는 줄 알았어. 무섭던데? 하하. 방해꾼을 자처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내가 끼어들 틈 찾기가 힘들더라. 농담 아닌 농담을 덧붙이는 남자 덕에 나는 계속 입가가 쓰렸다.
“생각보다 아프네. 내가 줄 수 없는 걸 원하던 건 알고 있었지만.”
나의 죄책감에 무게를 실으려 부러 하는 말이 아닌 것을 안다. 나는 앞에 놓인 머그를 양손으로 쥔 채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결코 짧지 않은 지난 몇 년간 속내를 알면서도 저와 어울려준 것이 명백했다. 그를 통해 보고 있던 대상이 누구인지까지 들킨 상태였다. 양심에 가책이 더해졌다. 숨기는 게 적성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나 투명했던 건지 싶었다.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이렇게까지 드러낼 수 있었던 건 너를 닮았다는 이유에서 였을까.
“이별의 선물은 키스로 하자.”
“안할 거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강렬하게 해주면 더 좋고. 패기에 비해 실력은 영 아니었잖아. 지금은 잘하는지 검사해줄게.”
“놀리지 마.”
“하하.”
이제는 좀처럼 너와 닮은 모습을 찾기가 힘든 남자는 웃는 얼굴로 내게 눈 맞춰왔다. 어쩌면 나는 남자의 외모보단 다정함에서 너를 읽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잘 살아. 당신 좋은 사람이잖아.”
“그럴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서 나는 남자의 뒷모습이 아주 작아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저 다정하고 넓은 품에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안기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또 그에게 미안해졌다. 직접 찍어버린 마침표로 인해 내가 속해있던 세상 하나가 사라진 것인데도 나는 이상하게 후련했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비로소 온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탓이었다. 그러나 정작 네가 지금 내 옆에 없는 모양새가 우습기도 했다. 네가 나를 다시 이름으로 불러주었던 날 이후로 너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며칠 전 너와 함께 장을 봐왔던 남은 재료들로 같은 요리를 해 먹었다. 맛이 없었다. 모든 것이 쉽게 상해버리는 날씨 덕에 싱싱하지 않은 재료가 문제인지, 형편없는 내 실력 때문인지, 기분 탓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역시나 대부분을 남기고 잔반 처리를 한 나는 설거지를 했다. 문득 평소 설거지를 도맡아 하던 네가 멋대로 정리해둔 식기들이 눈에 띄었다. 어색했다. 나는 원래 있던 모양새들이 어땠는지를 간신히 기억해내며 놓인 식기들을 이리저리 옮겨댔다.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 정리된 싱크 위 선반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였다.
05
여전히 너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나는 무엇이 네 기분을 언짢게 한 지 모른 채 며칠을 보냈다. 일단 무작정 사과부터 해야 하나 고민했다. 휴대폰을 들어 너와 주고받던 메시지 함으로 들어갔다. 스크롤을 올려보면 항상 먼저 연락을 해오는 건 너였다. 참 많이도 보내온 네 사진들을 보며 미소 짓던 나는 텍스트란에 이것저것 눌러 적었다. 사토루, 미안해. 기분 상하게 한 것 같아서. 작업은 잘 돼가? 며칠 전에 팀원 중 한 명이 케이크를 사 왔는데 너무 맛있더라. 네 생각이 났어. 틈이 날 때마다 나는 메시지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결국 보내지 못했다. 애꿎은 임시 저장함만 몸집을 키워갔다.
요란한 천둥소리에 정신이 들어 창 밖을 보면 소나기였다. 장마가 지나가니 국지성 호우라고 했다. 해가 쨍쨍하진 않아도 흐리진 않은 날씨였는데 이 계절은 시도 때도 없이 비였다. 무섭게 내리는 비는 며칠 전 꾸었던 꿈을 상기시켰다. 저주로 시작되어 저주로 끝나는 꿈. 그리고 저주같이 새겨진 지난 생에 대한 기억. 그래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지난 생의 기억이 꼭 저주 같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기억이 있어 나는 너를 그리워 할 수 있었다. 나와 같은 기억을 갖고 있지 않아도 내 눈앞에 나타나 준 네가 고마웠다.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던 네 등장에 사실은 나도 아이처럼 들떴었다. 네가 이전처럼 나를 따라주는 것도 경계를 허무는 것쯤 아무 일도 아닌 양 자연스레 내 영역에 침범해주는 것도 기뻤었다. 내가 망설일 때면 손을 잡아 이끌어 기꺼이 네 영역에 나를 데려다 놓는 것도 좋았다. 울적함만을 가져다주던 비가 어떤 때는 옆에 있던 네 덕에 생애 처음 단비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너는 여우비 사이로 비치는 햇빛처럼 나를 내리쬐었다. 어느 날부터 나는 필사적으로 매진하던 내가 알던 너와 지금의 너 사이의 공통점 찾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때의 너도 지금의 너도 결국 너였기 때문이다.
서랍을 열어 스페어 우산의 부재를 알아차린 나는 야근을 자처했다. 빗소리가 잦아들 즈음 나는 퇴근 준비를 했다. 이 정도면 맞아도 되겠다 싶은 세기였다. 입구까지 나가는 몇 분 새 빗줄기가 굵어지진 않겠지. 옥외주차장에 주차해둔 차까지 걸어가는데 얼마나 걸리려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생각했다. 평소보다 보폭을 크게 하며 걸었다. 입구 근처에 한 인영이 보였다. 어떤 팀의 누가 나와 같은 신세인 걸까. 나는 흐린 실루엣이 누군지 정확히 하기 위해 양쪽 눈에 힘을 주며 걸었다. 입구가 가까워지고 망막에 맺힌 상이 또렷해질수록 발걸음이 물에 젖은 듯 느려졌다. 발자국 소리에 인기척을 느낀 인영이 내 쪽을 향해 돌아보았다. 너였다.
작은 우산 속에서 서로의 한 쪽 어깨를 적셔가며 약속이나 한 듯 네 집으로 걸어갔다. 네가 사는 멘션 입구에 들어서 엘리베이터를 탈 때 까지도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일주일 만에 본 네 얼굴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현관을 들어설 때까지도 말이 없는 네 덕에 얼떨결에 어색함을 느낀 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사토루.”
“스구루.”
우리는 동시에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무엇이 미안한지 여전히 모르는 상태였지만 일단 사과의 말을 전하기로 했다. 머릿속에서 임시 저장함을 뒤졌다. 친구인 척 하며 해묵은 연정을 숨겨온 것. 네게 다른 친구인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것. 그리고 그걸 신경 쓰게 한 것. 그를 만나면서도 계속해서 너를 떠올린 것. 이 모든 것이 합쳐진 감정일까. 알 수 없었다.
“미안해.”
사과는 네 입에서 먼저 나왔다. 무엇이 미안한 것일까. 어느새 나에게까지 네 초조함이 옮아있었다.
“나 너랑 친구로 지내는 거 앞으론 좀 힘들 것 같아.”
너는 이 말을 하려 비 오는 날 회사 앞까지 찾아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 관계를 요구하며 시작한 것이 너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꾸 친구 이상의 것들을 바란 것 같아.”
너는 일주일을 고민했다고 덧붙였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떠올리며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도 아니었다. 결국 친구도 아니게 되는 일. 많은 이유가 있을 수는 있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을 살아가는 중 둘 중 하나에게 예기치 못하게 발생하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 네가 다시 해외로 나간다던가, 내가 다른 지역에 있는 직장으로 옮기게 되어 자연스럽게 멀어진다던가 하는 것들. 그리고 가장 생각하기 싫었던 이유는 너의 변심이었다.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게 전해오는. 애초에 너는 마음먹고 친구를 사귀는 것이 처음이라고 했었다. 생각했던 것과 달랐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단순히 흥미가 떨어진 것일 수도 있다. 며칠 전 우리가 겪은 것과 같은 별것도 아닌 일로 시작되는 시답잖은 말다툼에 정이 떨어졌을 수도 있고 매번 저로부터 시작되는 연락에 지쳤을 수도 있다. 내가 조금 더 적극적인 친구 같은 태도를 취했어야 했나.
내가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었다. 물론 우리는 연인이 아니었다. 그와 나도 그저 친구였을 뿐인데. 나는 조금 억울하기까지 했다. 충분한 설명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려 했다. 그는 내가 너를 비춰보던 거울과도 같은 존재였다고. 그에겐 미안하지만 내겐 이제 네가 있어 모두 정리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의미도 없어 보였다. 일방적인 마음을 숨기기에 급급하여 나는 감히 상황이 이 정도까지 흘러갈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다. 그럼에도 나는 괜찮다고 말해야 했다.
“나는 신경 쓰지 마. 사토루가 원해서 시작한 일이기도 했고.”
“정말?”
“⋯⋯.”
“정말 괜찮아?”
너는 나에게 무슨 대답을 바라는 것일까.
“응. 괜찮아.”
“다행이다.”
안심하는 너의 말에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럼 앞으로 우리 관계는 뭐가 되는 거지. 비즈니스 관계인 건가. 전시가 끝난 후에도 간간히 서로의 안부를 전하며 관계를 유지하는 작가들은 있었다. 교활한 나는 그 찰나에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네게 닿아있을 수만 있다면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내 절박함이 어느 정도인지 비로소 체감했다.
“내 생각 강요하려는 건 아니야. 그냥 내 마음이 이렇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응.”
“스구루도 나랑 같은 마음이면 좋겠는데.”
말이 칼날이 되어 심장이 베인 듯 아팠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신경 안 써도 돼. 사토루가 그렇다면 그런 거니까.”
“스구루, 나 봐봐.”
분명 못 들을 거리가 아닌데도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체 했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면 정말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방법 말고는 어떻게 내 감정을 숨겨야 할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여태까지 살아오며 익힌 방법들이 네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애써 무시한 나를 알아챈 네가 한 발자국 물리더니 살짝 허리를 숙여 나와 시선을 맞췄다.
“스구루.”
“응.”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건데.”
“⋯⋯.”
“항상 나를 볼 때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듯한 눈을 하는 거 자각하고 있는 거야?”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스구루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일주일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으면 스구루도 내가 보고 싶지 않을까 그래서 먼저 다가와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아직 어려웠던 것 같지? 괜찮아. 나는 그런 스구루도 귀여워. 그리고 이 이상은 사실 내가 참기 힘들었어. 이렇게 나만 가득 들어있는 스구루의 눈이 그리웠어. 너는 양쪽 눈두덩에 번갈아 입을 맞추며 말했다. 깊숙이 집어넣어 숨겼다고 생각한 너에 대한 마음은 들통 난지 오래였다.
“좋아해.”
눈꼬리에 맺힌 눈물이 흐를까 무서웠다.
“나는 언제나 나 혼자서도 괜찮았어.”
발목께에서만 찰박이던 바닷물이 순식간에 해일이 되어 덮쳐오는 것 같았다.
“근데 스구루를 만나고 나선 그게 싫어졌어. 혼자는 외롭잖아.”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바다와 같은 색의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너.
“그니까 스구루가 책임져.”
그 날처럼 우리를 감싸는 비 오는 날의 냄새. 예전의 우리가 생각났다. 임무가 끝나고 보조 감독을 기다리는 중 내리는 갑작스런 소나기였다. 비를 피해 들어선 낡은 건물 앞 얕은 처마 아래. 젖은 교복 셔츠 안으로 비치는 속살과 머리부터 전신에 젖은 빗물을 덜어내며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장난스럽게 입 맞추며 서로의 마음속에서 서로를 발견했던 그때. 끌어안은 두 팔과 피부로 닿아오는 체온과 오가는 숨결로 거창한 고백의 말을 대신했었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너도 웃는다. 내내 그리워했던 그때의 소년 같은 얼굴로.
“스구루는 어때? 나와 같아?”
이미 내 마음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얄궂게 물어온다. 나 역시 그런 네가 감당 못할 만큼 좋았다. 말해도 되는 걸까. 시도 때도 없이 차올라 잠겨버릴 만큼 깊어져 버린 마음을 인정해도 되는 걸까. 내가 너에게 더 바라도 되는 걸까. 감히 욕심내도 되는 걸까. 내가 너와 같아도 되는 걸까. 나는 더 이상 기억으로만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걸까. 너를 만난 후로 쉴 새 없이 곱씹어온 고민들.
자격이 없다 치부하고 스스로를 힐난하며 가둔 너에 대한 마음은 이미 형태를 쉽게 알아차릴 정도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도 그때의 나처럼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은데 잘 될지 모르겠어. 나는 웃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한 얼굴을 하고 네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나도 그래.”
기다렸던 대답을 들었다는 듯 이내 예쁜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코끝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초점이 맞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웃는 얼굴이 계속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거면 됐어.”
스구루는 더 안 해도 돼. 내가 더 많이 좋아하니까 내가 더 많이 행동하면 돼. 네가 속삭였다.
*
“진짜 그 자식이랑 아무것도 안 했어?”
“지금 분위기에서 다른 사람 얘기 해야 돼?”
“대답해줘.”
“그냥 친구라고 했잖아. 친구끼리 할 수 있는 것만 했어.”
너와 친구일 때도 키스는 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사람은 네가 아니니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나는 역시 솔직하지 못했다.
“그래도 질투나.”
너는 여전히 솔직했고.
“그럼 스구루, 친구끼리 할 수 없는 건 뭐야?”
손가락 하나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이 온몸을 바싹 붙인 채 내게 물어왔다. 무겁지 않은 비였지만 우산 속으로 얕게 들이친 비로 네 몸 곳곳엔 비가 묻어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젖은 목덜미 위로 뜨거운 숨결이 먼저 닿자 다음 차례는 입술이었다. 허리를 감고 있던 한 손으로 내 손목을 잡아 내렸다. 내 손바닥을 쓸던 네 긴 손가락들이 내 손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와 맞물렸다. 팽팽하게 융기한 앞섶이 아랫배에 닿아왔다. 우리 이제 친구 아니잖아. 친구 아닌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건 뭔지 스구루가 가르쳐줘. 너는 목덜미에 묻었던 입술을 내 입술위에 올린 채 말했다.
“오늘 자고 가면 안 돼?”
성난 아랫도리와는 다르게 강아지처럼 순수한 눈망울로 묻는 너. 나는 예전부터, 그러니까 지금보다 훨씬 더 이전의 너를 알 때부터, 이런 식으로 요구해오는 너를 거절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내 것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어깨를 지나쳐 목에 양팔을 둘렀다. 입술 새를 비집고 나와 닿는 숨이 한낮의 바깥 공기처럼 뜨거웠다. 발꿈치를 살짝 들었다. 눈을 감은 채였다. 오래 전부터 유독 나에게만 상냥하던 네 아랫입술을 머금었다. 대답 대신 제기한 입장 표명을 감지한 현관 센서 등이 켜졌다.
06
예상처럼 올해의 여름은 지난해보다 길고 더웠다. 평소보다 이르게 찾아온 초여름의 장마를 시기하듯 뒤늦게 가을장마가 찾아왔다. 그가 한차례 훑고 가며 꺾이길 기대했던 열기는 그대로였다. 절기상 가을의 시작이라는 때가 찾아와도 기온은 여전히 높았다. 길거리엔 짧고 얇은 소재의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한가득이었다. 지겹지도 않은지 계속 머무르기를 희망한 계절 본인 탓이었다. 무려 달력을 세 장 넘기는 동안에도 떠날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우리는 같은 일정으로 바빴지만 이전보다 함께 보내는 시간은 더 많아졌다. 너의 집에서 지내는 것은 이제 일상이었다. 전시가 다가올수록 잦은 야근을 하는 나를 매번 마중 나오는 네가 자연스럽게 데려가며 시작되었다. 가까운 곳에서 출퇴근을 하는 것이 편하기도 했다. 이따금씩 옷가지나 필요한 것들을 챙기러 내 집으로 돌아가는 때마저 너는 동행했다. 어쩔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곤 잠시라도 떨어지기 싫다는 이유였다. 그 어쩔 수 없는 때라는 것이 도무지 언제인지 알 수는 없었다.
기획단계에서 여러 의논 끝에 정해진 네 개인전의 키워드는 자서전이었다. 이곳 사람들에게 너는 아직 이방인이었다. 그들이 보지 못했던 네가 걸어온 인생을 보여주자는 취지였다. 전시장은 총 네 구역으로 나뉘었다. 네 생애와 뮤즈를 일대기에 맞게 나누어 배치했다. 막 재능을 발견하기 시작한 유아기부터 청소년기 그리고 현재까지가 세 구역을 차지했다. 마지막은 완성되지 않은 자서전의 미래를 보여주는 섹션이었다.
너는 그곳에 전시할 신작에 몰두 중이었다. 작업실에 들어가 혼자 시간을 보내는 때가 많아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매진하는 너를 방해하기 싫어 당분간 내 집으로 돌아가 생활 하려 했으나 네게 보란 듯이 거절당했다. 어쩔 수 없이 너 대신 네 체향을 끌어안고 잠든 새벽녘이면 너는 이불 속을 파고들어 왔다. 간혹 그대로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들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니었다.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이 내 몸을 전부 배회하기 시작하고 목덜미 위로 네 입술이 몇 번씩 내려앉는 것이 신호였다. 분위기는 무르익기 마련이었고 결국 끝까지 하고 지쳐 잠드는 때가 더 많았다.
“사토루, 나는 너랑 달리 아침에 출근을 해야 한단 말야.”
“그래서 한 번 밖에 안 하잖아.”
내가 참느냐고 얼마나 애쓰는지 스구루는 알지도 못하면서. 너는 무려 나를 배려하고 있는 중이었다.
*
전시를 한 달쯤 앞두었을 때부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일에서 재미를 찾고 있었다. 너를 생각하는 것이 업무로 전환된 것이 기뻤다. 이번 생에서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롯이 너와 네 작품들이 빛날 공간을 내 손으로 직접 구축해나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큰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전시의 청사진을 너와 함께 그려가는 것도 좋았다. 디자인이나 디스플레이에 대한 미팅도 대부분 네 집에서 이루어졌다. 아직 더운 날에 미팅 일자나 장소를 따로 잡거나 이동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편했다. 그러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눈에 띄게 응석이 많아진 너와 단 둘이 미팅을 진행하는 것이 불편하기도 한 아이러니한 상황이 계속되는 나날들이었다.
“사토루, 이 작품 다음에 이거 전시하는 건 어때? 이런 느낌으로 시선이 이어질 수 있게.”
“좋아.”
“보고 말하는 거 맞아?”
등 뒤에서 나를 껴안은 너는 내 옷 속에서 계속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사토루, 나는 너랑 의견을 나누고 싶은 건데. 조금이라도 볼멘소리가 나올 참이면 너는 옷속에서 손을 꺼내 내 손을 잡아 입가로 가져갔다.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입 맞추며 너는 말했다.
“정말이야. 나는 스구루가 좋다는 건 다 좋아.”
그렇게 말하는 네 얼굴을 보며 기분이 나아지는 건 조금 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매번 나를 곧바로 바라보는 눈동자를 마주 바라볼 때면 별것 아닌 말도 고백처럼 들려 곧잘 마음이 간지러워지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전시서문을 준비하면서 고민이 많았다. 미술관까지 용기 내 찾아온 관객들이 네가 얼마나 반짝이는 사람인지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알지 못했던 네 과거를 공유 받고 앞으로 더욱 빛날 네 미래에 대한 기대를 심어줄 수 있는 몇 마디 말들을 적어 내려갔다. 며칠 밤을 고민하며 써 내려간 너를 예찬하는 말들을 네게 먼저 보여줄 땐 부끄러워 너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도 쓸 줄 아냐며 예의 너와 같이 나를 놀리며 웃을 줄 알았던 너는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간혹 눈썹을 찌푸리기까지 하며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네 표정을 보니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나는 짝사랑하는 상대방에게 러브레터를 전한 후 답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네 감상을 기다렸다. 한참을 말이 없는 너. 평소와 다르게 흐르는 정적에 초조해진 나는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이상해?”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사토루가 말이 없으니까 내가 다 어색하네, 하하. 너는 마주 웃어오지 않았다.
“스구루.”
“응.”
“사랑해.”
그리고 네 입에서 처음 나오는 사랑 고백. 너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입술을 부딪쳐 왔다. 무척 마음에 들었나 보네. 그 후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는 온통 네 마음이 얼마나 큰지를 몸소 체험하는 시간이 되었다.
*
바잡던 전시 오픈 전 날 나는 촬영을 앞두고 이례적으로 설레는 마음이었다. 나와 너의 손길이 곳곳에 묻은 전시장을 보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도 있었지만, 네가 그토록 기대감을 심어준 네 신작을 볼 수 있는 날이어서 그렇기도 했다. 작업실로 초대받아 신작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전시기획자의 특혜와도 같은 일을 거부당한 지 수 주 째였다. 나는 못내 아쉬우면서도 네가 얼마나 놀라운 작품을 그려냈을지 기대가 컸다.
입구에서 직접 작성한 서문을 지나 나는 천천히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모르는 너의 어릴 적 모습들과 그때의 흔적들. 네가 너인지 몰랐을 때, 그러니까 너의 예명만을 알고 있을 때에도 나는 홀린 듯 네 그림을 좋아했다. 거침없고 자유로운 색채 구사와 과감한 붓터치에 섬세함이 녹아있었다. 그리고 그 섬세함 이면에 있는 외로움이 느껴질 때 나는 그것에 공감하고 아파했었다. 많은 습작과 스케치와 오일 파스텔 자국들이 있는 지금의 네가 있는 공간까지 지났다. 화폭 위에 겹겹이 쌓인 내가 아는 너의 수많은 생각들을 읽어 내려가며 걸었다.
그리고 나는 누구도 닿지 않은 네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공간에 다다랐다. 긴장이 온몸을 감쌌다. 땀이 베인 것 같은 손을 여러 번 쥐었다 폈다. 그래도 기획자로서의 특혜는 특혜였다. 누구보다 네 신작을 가장 먼저 보는 건 맞으니까. 기획 과정 중 네가 유일하게 크게 낸 목소리로 구성된 마지막 섹션은 오직 신작 한 점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다른 것은 나에게 모두 일임하는 것과 같던 네가 조명의 종류마저 함께 고민해가며 특별히 신경 쓰던 기억이 난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베일에 싸인 너의 내일을 간직한 비밀스런 공간으로 들어가 코너를 돌았다.
고개를 돌렸다. 발목을 타고 올라온 기억이라는 넝쿨에 휘감겨 움직일 수 없었다. 이윽고 눈에 담긴 것은⋯⋯.
한 소년의 초상이었다.
너와 내가 함께여서 최강이라 서슴없이 말할 수 있던 때. 우리라는 이름만으로도 푸르렀던 그 시절. 나눠 입은 듯 같은 모양을 한 교복 상의를 입은 소년. 코끝이 시려올 때도 기어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겨울의 붉은 꽃처럼 발그레한 두 볼.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너를 마주 바라보며 웃는 열일곱의 내가 있었다.
丁
가는 길은 내내 비였다.
제법 먼 출장이었다. 비행기를 타기엔 가까운 거리라 나는 자차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 선택이 조금은 후회가 될 정도로 지루한 체증이었다. 갑작스러운 비로 사고라도 난 듯 했다. 이맘때쯤이면 항상 불편한 오른팔에 더해 브레이크와 엑셀을 짧게 번갈아가며 밟아가는 통에 무릎까지 아파왔다. 왕복 8차선의 도로에 갇힌 나는 핸들을 번갈아 잡아가며 틈틈이 스트레칭을 했다.
기획전이 끝난 후의 우리의 일상은 제법 달라졌다. 성공적인 전시. 언론과 각종 소셜미디어에서 전시를 묘사하는 말을 긁어모아 압축한 말이었다. 섭외를 자처하는 연락이 끊이질 않아 모든 계절을 성수기로 보냈다. 다녀오는 출장도 그 일환이었다. 내가 아니어도 이미 아이콘이 되어버린 너임을 알았지만 그를 알리는 과정에 내 손길이 닿은 것이 기뻤다. 너는 전시가 끝나면 나와 보낼 시간이 많아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며 투덜거렸다. 쏟아지는 인터뷰와 전시 제의를 거절하는 것도 귀찮다며 에이전시를 곤란하게 만드는 건 여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같이 살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거의 네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이제는 정말 모든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너는 말 그대로 한시도 내 곁에서 떠나려 들지 않았다. 나는 이제까지의 네 기다림에 대한 보상으로 기꺼이 내 모든 시간을 네가 누리도록 해주었다.
“일어났어?”
“응. 비 온다.”
“그러게.”
“언제 와?”
“글쎄, 생각보다 차가 막히네.”
빨리 보고 싶어. 며칠이나 못 봤잖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푹 잠긴 목소리.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졸음이 한껏 묻어있었다. 나도 보고 싶어.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아직도 마음을 곧이곧대로 전하는 것이 어려웠다.
“스구루도 나 보고 싶지?”
“응.”
그리고 말하지 못한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은 여전히 네 몫이었다. 나는 그것이 고맙고 미안하고.
그 날 결국 나는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전시를 오픈 했었다. 팀원들은 처음 보는 내 얼굴을 보고 놀랐고 그 얼굴을 하고 기분 좋게 웃으며 언론과 게스트들을 상대하는 나를 보며 신기해했다. 한참을 나를 안고 달래던 너도 나중엔 내 부은 눈두덩을 보며 놀렸다.
스구루, 지금 눈 엄청 부었어. 못생겨졌는데 그래서 조금 귀엽기도 해. 공항에서부터 생각했었는데 스구루 완전 울보잖아. 예전에도 지금처럼 슬프면 울고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내가 알기 쉬웠을 텐데. 미리 알아차리지 못해서 미안해.
네 독백과도 같은 위로의 말에 좀처럼 눈물이 멎질 않았다.
*
“이 그림이 내 삶의 이유고 미래야.”
내 인생의 지침 같은 존재거든. 그래서 없으면 안 돼. 모르는 새 반대편 출구 쪽에서 다가오며 네가 말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 그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줄 알고.
“왜?”
“왜라니.”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내가 뭐라고.”
“그런 말 하지 마.”
“다 알면서 왜 또 나를 찾아왔어.”
좀처럼 부러 꺼내 보지 않은 이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아집과도 같은 대의와 명분. 자신을 제외한 다른 누군가를 생각할 여유도 마음도 없던 동시에 오만했던 나. 그렇게 매몰차게 너를 버려두고 간 주제에 내 마지막까지 네 손에 쥐어 준 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너니까. 스구루, 나는 너면 돼.”
까마득하게 깊은 네 마음에 잠겨 질식할까 겁이 났다.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면 너도 한 발자국 내게 다가왔다.
“이번에도 내가 다가갈게. 뒷모습을 쫓는 건 항상 나여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멀어지지만 마.”
꺼내보지 않아도 생채기로 가득했던 네 심장을 안다. 상처받고 남겨지고 아팠으면서 너는 나를 할퀴려 들지도 않는다. 제 상처 한번 핥지 않고 정작 네게 남긴 상흔을 마주하기 두려워 외면했던 나를 감싸준다. 벗겨지고 피가 나고 흉이 여러 번 져서 단단해진 피부 속에 자리한 심장 가장 안쪽에 너는 나를 품어왔다. 너는 어느새 달라진 일인칭으로 자신을 칭하며 일생의 사랑을 고백했다. 그렇게 조금도 녹슬지 않도록 간직해온 나를 꺼내 보여 주었다.
우리는 결국 서로에게 박힌 서로를 빼낼 수 없다.
*
그 여름, 삶에 고여 있던 물감들이 터져 나왔다. 무채색이던 삶은 수채화처럼 물들어갔다. 끝을 모르게 큰 파도 같은 네 마음이 가슴속 출렁이는 고독을 잠재워주었다. 오래전부터 나만 아는 곳에 간직해온 습윤했던 마음이 어느덧 볕이 잘 드는 창가에 말린 침구처럼 보송보송해졌다.
살갗에 닿아오는 것마다 습기를 머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방울이 맺히고 끈적거렸다. 어느 날은 모든 것이 바삭거릴 정도로 해가 쨍쨍한 날이다가 갑자기 비가 왔다. 그치지 않을 것처럼 매섭게 내리던 비도 언젠가는 그치기 마련이었다. 무더위에 좀처럼 잠들기 힘든 밤이 있는가 하면 이따금씩 선선한 밤바람이 밀려오기도 했다. 비단 여름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계절이 그러했다.
막을 수 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위력 앞에서 나 혼자만 단단히 붙잡혀있는 것 같았다. 괴로웠다. 아침에서 밤이 되고 평일에서 주말이 되고 계절이 변하고. 시간은 흘러가는데 전생의 기억만큼은 또렷해졌다. 돌이켜보면 그저 모든 날들을 지나치며 살아가고 있던 나에게 사실 그 모든 시간이 의미가 있던 것이었다. 때와 상관없이 썰물처럼 밀려오는 기억에 등 떠밀려 살아오던 삶이 모두 너에게로 향하는 길이었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울림이 다시금 너와 함께 위한, 내 삶과 함께 공명할 수 있는 주파수를 찾기까지의 여정이었던 것이다.
결국 너를 만났으니 할 수 있는 결과론적인 이야기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감히 말한다. 나에게도 너에게도 기억이 없었을지라도. 시간이 더 오래 걸렸을지라도. 서로의 존재를 관통해 새겨진 영혼의 형태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라고.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다시 만났을 것이라고. 네가 다시 날 찾아주었을 것이라고.
습관처럼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가 전면유리를 닦는 와이퍼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핸들에 걸친 손가락으로 볼륨을 키웠다. 때마침 흘러나오는 일기예보.
‘올해 장마가 시작 됐습니다. 밤사이 남부지방을 시작으로 현재 많은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중부지방도 차차 비가 시작될 것으로 보이니, 현재 비가 오지 않더라도 우산을 꼭 들고 나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하고 또,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지면서 호우 특보도 내려져 있습니다. 내일과 모레는 전국이 장마 영향권에 들겠으며…….’
고막을 건드리는 산뜻한 음성에 섞인 차창을 두드리는 반복적인 물소리. 창밖은 비였다. 계절은 돌고 돌아 다시 여름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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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행복한 가젤 구매자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이만한 현재의 추억과 아름다움이 없다... 고 생각하며 보고 있었는데 그 다음 제목 못을 보고 감탄했네요. 책 제목의 의미를 이해했습니다... 게토는 미래이자 못이군요...
전설의 바다표범 구매자
책으로보고 웹으로도보고 여기가 바로 천국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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