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재판

이름 없는 문 - Side 2. Conatus

역전재판 전기 트릴로지 및 역전검사1 스포일러 주의

220 by 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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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배지를 손에 넣은 이래, 나는 카르마 고우의 딸이라는 사실만을 빌미로 하여 무언가를 주장한 적은 한 번도 없어.

2020년 2월 29일 개최된 역전재판 시리즈 통합 온리전에서 발행한 카르마 가문 논커플성 개인지 <이름 없는 문>의 전문을 무료 공개합니다. 카르마 사제 파트(Force de loi), 카르마 부녀 파트(Conatus)의 병렬형 구조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카르마류와 카르마 가문(가계도 구성)에 관한 주관적인 해석 및 설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CAPCOM의 법정 배틀 게임 <역전재판 시리즈> 및 스핀오프 작품 <역전검사 시리즈>의 2차 창작입니다. 모든 등장인물은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캐릭터이며, 본문의 내용은 공식 및 관계자 등과 무관합니다. 

이하 본문에는 역전재판 전기 트릴로지(역전재판123) 및 역전검사1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게임(에피소드) 미플레이자의 열람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실물 서적에 실린 각주의 경우 온라인 포스트에 그대로 싣기 어려워 초록색 글씨로 표기 처리하였으며, 그 내용은 포스트 말미에 별도 기재하였습니다.

표지 일러스트는 애시드 님의 커미션입니다.


정문도 대문도 모두 안에서부터 열렸다. 한 사람만을 위해 틔워진 황막한 길 위에 카르마의 눈 묻은 발자국이 곧이 부조되었다.

거센 풍파가 한 차례 휩쓸고 지난 자리의 분위기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저택의 곳곳은 어둑히 멎어 있었다. 홀의 샹들리에조차 반의반 정도만 밝혀져 있는 탓에 조도는 가히 최악의 수준으로 유지되었고, 실내의 공기는 바짝 날이 서 있는 동시에 휑뎅그렁했다. 발걸음을 옮길 적마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접시를 부실 적에 나는 소음처럼 내내 거치적거렸다. 본국으로 가겠노라는 전갈을 열흘도 더 전에 보내두었음에도 사용인들의 대다수가 불안스레 눈을 굴리는 것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사각도 없이 닿아오는 그 시선들을 물리기 위한 제스처가 기계적으로 반복되었고, 종래에는 몇 번이나 손을 내저었는지 잊어버렸다.

서재에 당도한 것은 부츠의 콧등에서 겨우 물기가 가셨을 무렵이다. 늘 권위 있게 닫혀 있던 문이 빈틈을 보이고 있음을 깨닫고서, 심호흡과 더불어 각오를 한 차례. 보통 때라면 대신 문을 열어주었을 집사장이 머뭇거리며 이쪽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데서 불길한 직감은 더없이 완전해졌다. 손끝으로 문을 툭 치듯이 밀어내고 전등의 스위치를 올리자, 내장이란 내장은 모두 뽑혀 나간 시신의 몰골과 같이 무참한 광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부친이 수감된 날로부터 정확히 사흘 후에 감찰관들이 저택에 들이닥쳤다 들었다. 그 결과 카르마의 완벽을 가시적으로 지탱해 온 사건 조서들과 법정 기록, 그리고 그에 준하는 기록물들의 8할 가까이가 영치되었다고. 남겨진 몇 안 되는 자료들마저 곳곳에 흉히 쏟아져 있어, 압수수색의 정황을 더없이 명료하게 입증해주었다. 적법하되 그다지 정중하지는 않았을 약탈의 과정이 어떠하였을지를 카르마 메이는 어렵잖게 떠올릴 수 있었다. 증거품의 확보는 동료 검사들과 직속 수사관들, 그리고 스스로도 곧잘 벌이는 일이므로 고증에 충실한 상상이 머릿속에서 펼쳐졌다가 접히기를 반복했다.

검찰로부터 돌려받은 자료가 얼마나 되는지를 물으며 바닥에 떨어진 문서들을 손수 개켜 내는 소가주를 향해 집사장이 황망히 고개를 숙였다. 상당수의 자료가 법원 측에 무기한으로 압류되었고, 그나마 돌려받은 일부 기록물들은 책상자리 바로 옆에 모아두었다 하였다. 뒤이어 그는 가주의 명에 따라 불가침영역으로 지정된 장소에 감히 손을 댈 수 없어 이대로 두어 왔던 것이니, 지금이라도 아랫사람들을 시켜 정돈해두겠노라 고하였다. 초로의 나이인 데다 반평생을 가문에 헌신해 온 자이니 그 말에 거짓이나 기만은 없을 터. 그럼에도 카르마 메이는 그 말을 짐짓 못 들은 체하였다. 말없이 행동만을 이어 내는 소가주의 뜻을 알아들은 집사장은 결국 가져오신 짐을 풀어놓겠다는 말을 남기고서 자리를 떴다.

공판의 전체 흐름과 더불어 결정적인 고발의 지점까지 세세히 기억해 둔 케이스, 넘버링과 사건 개요 정도만을 알고 있는 케이스,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케이스. 그런 식의 대분류를 통해 검찰청으로부터 반환받은 기록물들을 한 차례 구분해놓은 카르마 메이의 손이 가장 두툼하게 편철된 보고서를 집었다. 케이스명을 PC에 입력해 판결 원문을 찾고, 그 내용을 보고서의 것과 대조하는 식으로 모든 자료를 교차 검증하는 데 열 시간이 꼬박 걸렸다. 마지막으로 읽어낸 자료를 덮고서 잘게 떨리는 눈두덩을 손끝으로 꾹 눌러 가라앉힐 무렵에는 시침의 끝이 차츰 5를 향해 수렴해가고 있었다.

아가씨, 아니…… 소가주님. 밤 동안 열려 있던 문을 통해 내내 찾던 이의 모습을 일별한 상급 하녀가 어깨를 움츠리며 책상가로 다가왔다. 비행기 안에서도 거의 눈을 붙이지 못하시지 않았느냐는 말에, 카르마 메이는 아주 짧게 고개만을 끄덕였다. 신경 안정의 효과가 있는 허브 티에 와인을 가볍게 블렌드했다는 말과 함께 내밀어지는 모닝 티의 향취가 소슬한 계절감에 맞지 않게 퍽 화사했다. 찻잔이 두 번 채워지는 동안 집사장을 비롯한 사용인 몇이 책상 위에 놓인 문건들을 부지런히 날라 갔다. 고작 쉰 건의 분량만으로는 책장 하나를 겨우 채울 수 있었다. 사용인들에게도 은근한 자랑거리였던 서재가 전과 같은 위용을 갖출 수 없게 된 데 심히 안타까워하는 집사장을 향해, 세 번째로 찻잔을 비워낸 카르마 메이가 입을 열었다.

“클레어를 준비시켜. 오랜만에 좀 몰아야겠어.”

그것이 열일곱의 카르마 메이가 본국의 저택으로 돌아와 내린 최초의 지시였다.

 


 

순종 서러브레드답게 길이 잘 든 말은 채찍질 한 번 없이도 시원스레 흙길을 박찼다. 땅 위에서 카르마의 이름 아래에 복속된 영역은 사뭇 넓었고, 원한다면 그 중 어디로든 애마를 몰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갈 수 있는 곳 중 그 어디에도 만나야 할 상대가 있지 않은 고로, 목적의 주축이 상실된 드라이브가 내내 답보되었다.

<Vicennial Cold Snap>. 외출을 만류하는 부집사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각반을 차고 옷섶을 여미던 중, 그러한 헤드라인이 박혀 있는 신문의 1면을 언뜻 보았던 것도 같다. 코끝이 시큰해지고 뺨에는 열감이 올라붙은 다음에야 카르마 메이는 그것을 불현듯 떠올렸다. 지난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해 빡빡히 아린 눈이 잠깐이라도 촉촉해지려 들다가도 다시금 메말라가는 것이 그 때문이었구나, 싶었다. 시야가 흐려서는 말을 몰 수 없기에 그것은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고삐를 바투 쥐고 정면에서 맞부딪쳐오는 바람을 가르는 내내, 그리 길지도 않은 머리칼이 말의 갈기처럼 사납게 흐트러져갔다. 그에 개의치 않으며 카르마 메이는 그저 달렸다. 달려야만 했다. 달리지 않고서는 풀어낼 수 없는 감정이 심중에 한가득 응어리 져 있었다.

아침이면 한 손에 찻잔을 들고 펼쳐내는 조간신문과, 밤 아홉 시 정각을 알리며 시작하는 텔레비전의 뉴스 프로그램. 어딘가로 이동할 때마다 습관처럼 주파수를 맞추어 두는 라디오까지도. 매체는 줄곧 카르마 메이의 삶의 일부였다. 이른 나이부터 후계자의 재목으로서 두각을 보였었다고는 하나, 네 살배기 아이의 사고능력이 성인의 식견에 비견될 만큼 성숙하였을 리 만무하다. 아이적의 카르마 메이는 다만 참을성이 또래에 비해 대단히 좋았고, 오직 하나뿐이라 해도 무방할 목적을 지녔을 따름이었다.

화면과 지면, 스피커 등지에서 흘러나오는 숱한 이야기 중에는 높은 확률로 카르마 검사에 관한 보도가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낭보를 기리기 위해 예비되고 할애되는 대목이 모든 미디어에 반드시 존재했다. 부친이 거두어 낸 완벽한 승리를 희말쑥한 얼굴의 아나운서가 소개하면, 바로 다음 날에는 그 내용이 기사를 통해 사회에 파급되었다. 이따금은 속보를 통해 피고인을 심문하는 과정이 중계되고, 그중 가장 돋보이는 대목이 별도로 편집되기도 했다. 그토록 정밀하게 기술되고 또한 미화된 업적이 곧 부친의 완벽이기에, 카르마 메이에게 선망이란 곧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정언 명제와도 같이 내내 추종하였던 완벽에, 실재한다 믿었던 카르마의 극(極)에 균열의 조짐이 피어 붙은 날, 카르마 메이는 정반대편의 세상에서 유죄자를 사냥하고 있었다. 스무 명의 대배심을 상대로 피고인에게 응당 유죄가 내려져야 한다는 논리를 관철하기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0분 남짓의 휴정이 있는 동안, 자신의 삶에서 공고히 기려져 온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규준이 이때껏 상상도 못 한 방식으로 맞부딪치게 되었음을 알고 난 다음이 문제였다. 군더더기 없는 웅변으로 고발의 논거를 기술하던 그녀의 입술이 어느 새엔가부터 말라 버석거렸다. 그 빈틈을 알아보고 반박을 걸어 댈 변호인 또한 피고인과 마찬가지로 자리에 없던 덕에 기소는 성립되었다. 하지만 본디 계획했던 완벽한 경지를 간발의 차로 잡아내지 못한 고로, 만족스럽지 못한 수준을 넘어 무의미한 승리였다. 공판을 종결짓는 데 필요한 모든 행정상의 처리를 마치고 귀가하는 내내 지독한 두통이 치밀었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전화에 응답하지 않으며 자신을 개입시키지 않는 상황에 화가 났고, 그것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고, 그리고.

어느새 질주를 멈춘 말이 푸르릉 하는 소리를 길게 뽑더니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동녘에서 움터오르는 일출을 등지고 서(西)로 달려간 끝에, 카르마 메이는 새벽 바다의 끝자락을 간신히 잡쥘 수 있는 변두리에 이르렀다. 용케도 아직 싸늘한 빛깔을 띠고 있는 물자락들의 조후(潮候)를 회청빛의 눈동자가 묵묵히 부감하였다. 거스를 수 없는 힘을 받고서 뭍을 향해 수렴해 드는 저것과 같이, 갈래 없는 길 위로 올라붙고야 말게 될 자신의 족적을 분연히 직감했다. 카르마의 세계에서는 부정도, 회피도 용납되지 않는다. 또한 카르마란 비극에 함입될 수 없는 관념이어야만 한다. 명명하고 싶지 않은 시선과 물음들을 끝도 없이 헤치고 서서, 수없는 것들을 직시할 수밖에 없으리라.

시린 햇빛과 함께 퍼져 드는 물보라의 잔향에서 찬기가 완연히 가셨을 즈음, 카르마 메이는 말머리를 돌렸다. 십수 년의 시간 동안 강고히 자리매김하였던 규준이 결여된 채 삐거덕거리는 제 자리로, 그리로 여지없이 돌아가야만 했다. 차츰 폭설의 기미가 엿보이고 있었다.

 


 

형이 확정되어 사회 일반으로부터 격리된 수인은 여러 가지 권리를 제한받는다. 하지만 그 또한 자연인인 이상 어떠한 권리만큼은 법으로써 정당히 보장받는다. 접견권은 바로 그 정당한 권리의 일환이며, 카르마 메이는 카르마 고우의 친혈연이다. 검사라는 직함을 내세울 필요조차 없이, 카르마 메이가 부친을 접견할 권리를 주장하는 데엔 충분한 명분이 있었으며 절차를 밟기 위해 갖춘 서류에도 흠 잡을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그럼에도 끝끝내 접견실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제는 안 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라고?”

무사안일주의에 안주하려 들기 십상인 말단직들이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분을 삭이는 것도 세 번까지였다. 네 번째의 접견 요구가 반려당하며, 이제는 아예 접견 신청 서류조차 수리하지 않겠노라는 통고를 받았을 때에는 벽에 대고서라도 채찍을 휘두르지 않고는 못 배길 지경이 되었다. 서슬이 퍼런 낯으로 설명을 요구하는 카르마 메이에게 교도관 중 한 사람이 난색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상대방이, 그러니까 카르마 고우가, 친족으로부터의 면회 요구에 일절 응하지 않고 있으므로 당사자가 원치 않는 접견을 진행할 수는 없다 하였다. 재차 내갈기려던 채찍을 손에 쥔 카르마 메이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이쪽의 소란스러움을 내내 주시하고 있던 또 다른 교도관의 얼굴에 희미하게 깔려 있는 표정이 부릅떠진 두 눈동자에 고스란히 비쳤다. 한 달여쯤 전부터 질리게도 경험한, 익숙한 것이었다.

미스 카르마.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니 부디 경청해주었으면 좋겠어. 호출을 받고서 찾아간 면담실에서, 수색이 덜 우러난 허브티를 연신 권하던 미 검찰청의 인사과장이 어떠한 표정과 태도로 일관했던지를 카르마 메이는 정확하게 기억한다. 올해의 인사고과 절차가 완전히 마무리된 것이 불과 두 달 전의 일이다. 최우수 등급의 근무평정을 따냈던 당사자에게 추가 면담에 응할 것을 통보해 온 상층부의 의도를 몰라보기에는 그녀 자신이 불행히도 영민했다. 착석조차 하지 않고 용건을 따져 묻는 카르마 메이에게 인사과장은 파일에 철해두었던 종잇장들을 건넸다. 한눈에 보아도 교도소에서나 취급되는 조악한 재질의 종이에, 필체마저 난잡하기 그지없는 투서들이었다. 더러는 철자마저 틀리게 적은 경우도 있는 탄원서를 빠르게 읽어내린 카르마 메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검사국에서는 나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가? 고작 이런 것을 근거로?”

“비약은 금물이네, 미스 카르마. 이런 것만으로 섣부른 판단을 내릴 만큼 상부 사람들이 성격이 급하지는 않아. 다만,”

“확실하게 말해두겠어. 전부 재고의 여지 없이 유죄였던 자들이야. 배심원들의 판결 또한 만장일치로 나왔었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미스 카르마.”

“이전까지는 재심 청구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놈들이 지금에 이르러서야 수작을 부리는 데 귀를 기울일 셈이라면, 그것이야말로 검찰청의 명예와 권위를 실추시키는 문제로 번질 터!”

허리에 찬 채찍에는 손도 대지 않으며 카르마 메이는 그리 외쳤다. 상대의 직책과 그에 서린 권위에 종순하려는 의도 없이, 오직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투서라 해 봤자 여론전의 전초전쯤으로나 유효할 뿐, 법적 효력이나 당위성은 조금도 띠지 못한다. 그러니 적당한 선에서 대중의 동정표를 산 뒤 이쪽의 반응을 떠보며 앨포드 플리라도 강구해보려는 속셈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중 누구도 ‘기술적 유죄’라는 수치스러운 사치를 살 자격을 가지지 못했다.

“우리 법에서는 사법부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배심제를 명문화하고 있지. 검사의 기소권이 오남용되어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데 그 목적과 기틀이 잡혀 있는 줄을 미스 카르마도 잘 알 거야. 그렇기 때문에, 이 시점에 그런 건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는 건 꽤나 곤란한 문제라네. 카르마 검사의 건 말이야.”

그가 말하는 카르마 검사란 부친을 지칭함을 그녀는 곧이 알아들었다. 카르마 메이에게 있어 이는 지독한 관성이자 떨쳐낼 수 없는 하나의 경향성이다. 미국에서 검사 배지를 취득한 지 어언 4년이 된 현재, 곧 세 자릿수에 육박하는 재판 경험과 꼭 그와 같은 승소 기록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카르마 검사’라는 호칭이 귀에 설 때가 있다. 부친의 위업을 기리는 데 동원되는 표지로서 그것을 접해 온 시간이 스스로의 이력보다 훨씬 오랜 탓이다. 자신의 근반에 인접해 있는 이데아를 따라잡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온 카르마 메이에게, ‘카르마 검사’에 관한 이번 언급은 지독히도 쓰라리게 해독되었다.

“평결을 담당하는 소배심과 기소의 여부를 가르는 대배심 모두 법률전문가가 아니라는 건 우리를 늘 곤란케 하는 문제지. 법문이 미처 따라잡지 못하는 사회의 진일보성에 부응하기 위해 시민대표를 재판에 참여시킨다는 명분은 아주 좋아. 하지만 배심원 대다수의 생각에는 관습적이고 관성적인 구석이 많다는 걸 미스 카르마도 익히 경험해 왔을 거야.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들이 도출해 낸 ‘최선’이 실은 검사의 교묘한 언변과 속임수에 휘둘린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순간 그들은 강하게 반발하게 되지. 체제의 신뢰성이라는 측면에서 이건 정말 치명적이야. 결국에는 그런 이야기라네.”

카르마 검사가 지난 40년간 구축해 온 무패가 모조리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고까지 생각할 사람은, 적어도 우리 검찰청 내에서는 극히 드물 거라고 장담하지. 하지만 법의 결정과 집행은 늘 공정함을 요한다는 걸 우리는 항시 염두에 두어야만 해. 아직 어린 나이이니만큼, 무엇보다도 가족에 관한 문제이니만큼, 사태를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겠다고 생각하네. 그리도 길게 말을 뽑으며 인사과장은 한 장의 서류를 새로이 꺼내 보였다.

“본국의 서심법정에서 판결이 거의 확정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더더욱 마음의 준비를 해 둬야 하는 상황인 것으로 알아. 그래서 당분간 미스 카르마에게 휴가를 주는 걸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불렀네.”

“……휴가라고. 이 나에게.”

그 자신이 저지른 죄과를 감출 목적으로 카르마 고우가 40년의 검사 생활 중 단 한 번 사용했다는 것을.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부친을 본받듯 자신 또한 지난 4년간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그것을. 부친의 불명예로 인하여 반강제적으로 권고받아야 한다고. 더없이 차게 가라앉은 눈빛을 숨기려 들지 않으며 카르마 메이가 하, 하고 짧게 웃었다.

“이 나라에서 검사 배지를 손에 넣은 이래, 나는 카르마 고우의 딸이라는 사실만을 빌미로 하여 무언가를 주장한 적은 한 번도 없어. 카르마 일족이 추구하는 ‘완벽’이란 입증책임의 원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으니까.

직업인으로서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 담보되어야 하는 신뢰마저 부당히 의심받게 된 오늘의 무례를 결코 잊지 않도록 하지. 내가 카르마의 인간으로서 자존하는 한 영원히.”

가히 선전포고와도 같이 벼려진 언사를 끝으로 카르마 메이가 만년필을 들었다. 헛발질 한 번 없이, 유려하고도 힘 있게 그어지는 매 획이 휴직계의 공란을 차차 채워나갔다. 면담실의 문을 불연히 열어젖힘과 동시에 등 뒤에서 되도 않게 들려오던 말을 그녀는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들어야만 했다.

“일이 이렇게 되어 실로 유감입니다. 카르마 검사.”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로, 카르마 메이는 접견실을 나섰다.


 

끝끝내, 대면 한 번 없이 형이 집행되었다.

카르마 고우의 비위행위가 사회 전역에 떨어뜨린 파문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그의 죽음은 유족들에게 시신이 인계되고도 사흘이 더 지난 다음에야 단 두 점의 매체를 통해 공표되었다. 사회 지도층과 그들이 누리고 선 각종 특권을 향해 사캐즘을 겨누기를 즐겨 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신념과 밑천에 따라 갖은 촌평을 겨누어 보인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그중 무엇도 카르마의 완고하게 높다란 대문을 넘지는 못했다. 망인이 쌓아 올린 공과에 비례하게 추문의 파급력이 배가되고, 그 위신에 다소의 타격을 입었을지언정 카르마는 명문이었다. 부계 혈통을 기준으로 3대에 걸쳐 출중한 실력의 법조인을 배출해냈으며, 작고한 가주의 혼맥이 옛 화족 집안 출신의 무용가와 맞닿아 있다는 명시적인 우수성이 아직은 그럴 수 있게끔 했다.

상례의 전 과정에는 카르마의 직계 혈족과 극소수의 지인, 그리고 일부 사용인들만이 참석하는 방향으로 논의의 가닥이 빠르게 잡혀 갔다. 미혼일 적 모친의 성과 이름으로 세워진 인스티튜트의 소속 연구생들이 눈치껏 얼굴을 비치겠다 하는 것 또한 정중히 사양해두었다. 내밀하게 치러 마땅한 집안일에 타인을 함부로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는 데 가문의 안주인과 두 딸이 뜻을 모았다. 이외에도 장녀와 차녀는 영결식이 치러지는 장소 가까운 곳에 의료진을 대기시켜 두기로 했다. 마흔 줄의 나이에 어렵게 가졌던 막냇자식을 난산으로 본 이래, 문하생들의 레슨을 지도하던 것도 그만둘 만큼 건강이 상한 모친을 염려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영결식 당일, 거의 우려한 그대로의 상황이 되었다. 반려의 구속 이후 내내 와병중이다가 입관식이 치러질 때에야 겨우 입회한 모친은 천 아래에서 드러난 얼굴을 보자마자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 모친을 손 빠르게 부축하는 장녀를 대신하여 사용인 몇이 의료진을 부르러 급히 뛰어나갔다. 하나뿐인 외손주의 자격으로 자리에 든 소녀는 굳은 얼굴을 한 어른들의 틈바구니에서 불안스레 눈을 굴리다가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겨우 일곱 살이 된 아이의 쨍하는 울음소리가 무람없게도 구슬펐다.

아수라장이라 할 정도는 아니어도 품격 있고 조용하다 여기기에는 무리가 있는 그 잠깐의 소란 속에서 카르마의 소가주만이 미동 없이 제자리를 지켰다. 유모의 치마폭째 바깥으로 내몰려가는 조카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 추모의 리본을 매단 채 그를 뒤따르는 작은 애견, 브랜디로 겨우 숨을 돌리게 되었으나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여 결국 들것에 눕혀진 모친. 빠질 이들이 빠짐으로써 실내의 분위기가 깊숙이 가라앉았을 때, 카르마 메이는 집사장을 향해 천을 완전히 걷어 낼 것을 명했다.

부친은 여느 사형수들의 초라한 몰골들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신을 언도받고서 바로 엠바밍을 진행했기에 그는 민낯도 맨몸뚱이도 아니었다. 화장이 입혀진 얼굴과 주름 한 점 없이 다려진 의복이 꼭 생전의 모습과 같이 그를 돋보이게 했다. 입관의 의식 중 마지막 절차를 홀로 목도하게 된 카르마 메이의 메마른 시선이 카르마 고우를 천천히 조감하였다.

바짝 세워 여민 옷깃의 칼라와 단정히 매어진 크라바트에 빈틈이라고는 일절 없었다. 교수대의 밧줄에 옭인 흔적이 목에 남아있을지 어떨지를 가늠하는 것 따위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양 귓불에 끼워진 피어스 또한, 생전의 부친이 스스로 매무시를 하였을 적과 같이 차고 영롱한 빛을 발했다.

케인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저 오른손이 얼마나 뻣뻣이 굳어있을지에 생각이 닿아 갈 무렵, 코끝에 희미하게 걸리는 이질감이 있었다. 화장이 엷게 올라간 부친의 얼굴과 다려진 의복에서 풍기는 그 냄새가 소독약과 방부제의 잔향인 줄을 카르마 메이는 수월히 알아보았다. 생전의 부친이 일류 조향사에게 오더를 내려 사용하곤 했던 향수가 어떤 내음이었던지를 선명하게 기억하는 까닭이었다. 또한 그렇기에, 카르마 메이는 눈앞의 부친이 텅 비어버린 껍데기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카르마 고우는 마땅한 절차에 따라 심판받아 그 생을 박탈당했다. 이제 법규와 체제로는 더 이상 그를 판단할 수 없다. 권리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자를 그 어떤 법문도 책임과 의무의 주체라 여기지 않으므로.

그러나 어디까지나 법적인 이야기다.

명백한 유죄자를 향하여서는 그 누구도 통도할 권리나 자유 같은 것을 명시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 제아무리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또한 사회의 일원인 이상 이는 거스를 수 없는 도덕관이자 일종의 묵계에 해당한다. 카르마 메이는 이제 그것을 알았고, 부친으로부터 항시 내려받았던 권계에도 또한 충실했다. 무르고 미숙한 감정일수록 남 앞에 드러내어서는 안 되며, 반대로 타인의 약하디 약한 지점을 찾아 재주껏 꿰찌르라던 목소리가 귓가에서 허허로이 감겼다. 결국, 카르마 메이는 입술만을 조용히 움직여 애도 아닌 애도를 표하였다.

누구의 입맞춤도 받지 못한 관이 닫혔다.

 


 

부재중 통화가 총 3건 있었다. 모두 한 사람으로부터 남은 기록이었다. 미열이 덜 가신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카르마 메이는 휴대전화를 멀찍이 던져 놓았다. 한때는 그리웠던 듯도 하나 당장은 거들떠도 보고 싶지 않은 누군가의 이름을 띄워낸 액정이 순조로이 점멸했다. 상례의 절차를 모두 치러 낸 다음 날, 사용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고집을 부려 말을 몰아 나갔다가 호우를 맞으며 돌아오는 바람에 얻었던 열병이 아직껏 덜 떨어진 상태였다. 타의로써 얻게 된 휴가가 본디의 취지대로 흘러가게 된 열흘간 그녀는 제법 깊게 앓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츠루기 레이지는 카르마 고우가 길러낸 수제자이며 그에 상응하는 평판 또한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영결식에도, 추도식에도 자리하지 않았다. 가주의 부재 시 모든 권한을 대리하게 되어 있는 후계자의 뜻에 따라, 그의 연락이 닿아온다면 거절을 해 두게끔 저택 내 모든 사용인들에게 엄명이 기실 내려졌었다. 그런 고로 미츠루기 레이지가 장례식에 불참한 것은 전적으로 그 자신이 결정한 바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는 카르마 메이가 그토록 모호한 태도를 견지하며 미츠루기 레이지와의 거리감을 벌려내는 동안에도 시간은 순리대로 흘렀다.

초봄이 되기가 무섭게 단 한 줄의 전언을 남기고 검사국을 떠난 남자에 관한 의론이 검찰청의 관계자들 사이에서 한동안 오갔다. ‘검사 미츠루기 레이지는 죽음을 택한다.’가 과장과 결벽에 겨운 사직서인지, 혹은 말 그대로 유서인지에 관한 가십성의 추측이 소강되어 갈 즈음 카르마 메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미츠루기 레이지의 부재를 인지하고 난 뒤 그녀가 처음으로 한 일은 음성사서함에 남아 있던 그의 메시지를 재생 한 번 하지 않고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한때 미츠루기 레이지가 카르마 저택에서 사용했던 개인실을 폐쇄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카르마 메이는 그에게, 그리고 그로 인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엄정히 대응했다.

완고히 닫혀버린 문과 같이 마무리될 줄 알았던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은 미·일 검찰청 간의 인사교류 프로그램을 경유하는 형태로 복직을 결심했을 때다. 검사국에 직접 프로파일을 제출하러 갔던 날, 카르마 메이는 땟국 진 코트 차림의 형사가 허둥대다 말고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촌극을 목격했다. 바닥에 쏟아진 서류들, 첨부된 사진 속 낯익은 얼굴, 하필이면 그것이 자신의 발치에 떨어진 데 눈을 흘기지만 않았어도 그런 한심한 남자에게 말을 붙이는 일은 없었을 터다. 예나 지금이나 수염이 덜 깎여 까끌까끌해 뵈는 턱을 씰룩이며 떨어진 종잇장들을 주워내려는 남자에게 서늘하기 그지없는 언사가 겨누어졌다.

“이 나라의 형사들에게는 기댓값을 그리 높이 두고 있지도 않지만, 개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칠칠치 못한 모습이군. 이런 바보 같은 실수가 하나하나 모여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초래할 가능성을 고려하면 역시 급여 조정의 근거로 참작할 만하겠어.”

“누, 누구 마음대로 급여 조정을 운운함까!”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그건 제법 유감인데, 수염.”

뭐, 따끔한 채찍 맛을 보게 된다면 제아무리 머리 나쁜 형사라도 스스로의 삶을 반추해볼 수 있겠지. 제법 오랜만에 사람을 상대로 채찍을 드는 카르마 메이였다. 그제야 이쪽을 알아보며 어깨를 움츠러뜨리는 형사, 이토노코기리 케이스케를 향해 그녀는 명령했다. 용건이 있으니 남들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이야기를 할 만한 장소를 향해 앞장서라는, 그 어떤 바보라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심플한 요구였다. 그리고 정확히 5분 만에 당도한 문 앞에서 카르마 메이는 미간을 좁히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남들 귀를 신경 쓰지 않고 대화할 장소로 여기만 한 곳이 없슴다. 그, 그리고……, 아무튼 신경 쓰고 계셨을 것 같아서.”

명판은 내려졌지만 내부의 집기류는 단 한 점도 빠지지 않은 상급검사 집무실 1202호의 문을 열어 보이며 이토노코기리 케이스케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유감스럽게도 적절한 선택이란 이를 두고 말할 법하다 여기며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미츠루기 레이지가 비워 두고 떠난 공간에 발을 들였다. 공손하게도 홍차의 틴 케이스를 향해 손을 뻗어 나가려는 형사에게 카르마 메이는 딱 잘라 말했다.

“차는 됐어. 바보 이하의 바보가 남기고 떠난 이 바보 같은 장소에 오래 머물 생각 따윈 없으니까. 당신은 증언만 하면 돼.”

“무, 무슨 증언 말임까?”

“작년 말……, 그러니까 DL6 케이스 이후부터 검사국의 명물이 된 그 바보 같은 ‘유서’를 남기고 사라지기 전까지의 미츠루기 레이지에 관한 일체의 정보가 필요해.”

“예? 아니, 그, 갑자기 왜, 아얏!”

“카르마의 앞에서 감히 ‘예’와 ‘아니요’를 한 번에 말하는 건 무슨 버르장머리지?”

“그치만, 저, 미츠루기 검사님이 직접 메시지를 남긴 걸로 아는데,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으셨슴……까악!”

“충분한지 안 충분한지는 내가 판단할 문제야. 자, 어서!”

곱게 다듬어진 눈썹을 치켜올리며 성화를 부리는 카르마 메이의 등쌀을 일개 형사가 견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이토노코기리 케이스케는 미츠루기 레이지의 측근 된 입장에서 보아 온 일련의 사건들과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진술하였다. 말주변이 썩 좋지 못한 데다 의식의 흐름에 끌려다니는 측면도 없지 않은 그의 말을 카르마 메이는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다. 지난 2개월여간 미츠루기 레이지가 겪은 일들에 관해서 대략적으로 아는 바가 있었기에 베풀 수 있는 관용이었다. 다만 이제까지 들은 바 없는 단 하나의 정보에 이르러서는 표정을 사납게 굳히지 않을 수 없었다.

“파파의 사형 집행 전날, 미츠루기 레이지가…… 접견을 다녀왔다고. 확실한 이야기인가?”

“교도관들이 제출한 접견 기록을 보기 전까지는 본관도 미츠루기 검사님이 거기 들르신 줄 꿈에도 몰랐슴다.”

“접견 당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당연히 그런 건 남아있지 않슴다. 중대한 사유가 없는 한 수형자의 접견은 비밀을 보장받지 않슴까.”

그래, 그랬었지. 눈에 띄게 허탈한 표정이 되어 아랫입술을 깨무는 카르마 메이의 눈치를 보며 이토노코기리 케이스케가 애써 부연했다.

“DL6 케이스의 진상이 밝혀진 이후로 미츠루기 검사님은 공적인 문제와 관련 없는 당신의 족적을 누구와도 공유하려 하지 않았슴다. SL9 케이스를 전후로 한동안은 아예 몇 날 며칠간 집무실을 떠나지 않은 적도 있었고 말임다. 그래서…… 본관으로서도 이 이상 말씀드릴 게 없는 게 유감스럽슴다.”

그리 말하며 허락도 없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려는 형사에게 매운 채찍질이 다시금 쇄도했다. 아갸갸갹! 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주워섬기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남자를 향해 카르마 메이의 집게손가락이 까딱였다. 무척 가볍고도 위협적이기 그지없는 사인이었다.

“생각이 바뀌었어. 내 목적을 이룰 때까지 당신을 사역할 작정이니, 앞으로 내 허락 없이 뭔가를 하고 다닐 생각 따위는 꿈에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대체 본관에게 뭘 더 원하시는 검까…….”

숫제 우는 소리를 내며 몸을 떠는 형사의 앞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명료히 날을 세웠다. 복수를 계획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게 더 있어.

“나루호도 류이치라는 남자에 대해 아는 걸 전부 말하도록 해.”

 


 

5월. 카르마의 계녀가 열여덟의 나이가 되어 관례를 치르도록 예정된 시기. 부친의 강고한 전설과 그로써 증명되던 권능을 동경하던 내내 카르마 메이가 몹시도 기다려 온 순간. 그러나 정작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뭇 마른 눈길과 힘을 들인 두 다리로 버티고 서야 하는 고독의 지점. 이른 아침부터 사용인들의 도움을 받아 성장(盛裝)을 마친 카르마 메이는 거울 속의 자신을 직시했다.

검사 배지를 손에 넣은 이래, 몸가축에는 항시 공을 들여왔으므로 평소보다 조금 짙게 올린 화장이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차려입은 예복 또한 반년 전에 주문을 맞춰 둔 것이어서 원했던 그대로의 미감을 자아내었다. 그럼에도, 본질적으로 ‘완벽’하지 못한 예식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상중에 올리는 관례라는 구실로 수가 그리 많지 않은 방계 혈족들의 접근마저 금한 채, 최소한의 요건만을 갖추어 예식을 치르게 된 데 유감이 없다면 거짓이다. 가문의 후계자로 대접을 받기 시작했던 일곱 살부터 꿈꾸어 온 성년식은 좀 더 화려하고 절대적인 이미지로 상상되곤 했었다. 가졌으면 하였던 것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알기에 단념하기로 결론지었을 뿐. 바라마지않았던 축복도, 명예도, 이 자리에는 함께할 수 없게 된 줄을 카르마 메이는 순순히 인정했다.

후계자의 성년식은 직계 혈족의 권한으로써 가주가 주도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부친이 작고한 이후, 생존해 있는 직계 존속이라고는 모친뿐이게 된 상황에서 가주의 역할을 대신 수행할 이가 필요했다. 승계에 간여할 자격이 없는 방계의 혈족들은 고려조차 하지 않고, 당신께서는 ‘법적으로’ 이름을 얻은 혈족이라는 이유로 단 위에 서기를 사양하던 모친의 의향은 묵인했다. 그들 모두를 후보군에서 제하고 난 끝에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준비는 다 된 모양이구나. 상복 차림을 한 카르마의 장녀가 투왈렛 룸에 들며 그리 말했다. 꼿꼿이 선 자세 그대로, 카르마의 차녀는 가볍게 고개만을 끄덕이며 거울 속 반전상을 향해 시선을 고정해두었다. 출가 후 부친에게서 가내의 예법을 엄히 따르지 않아도 좋다는 관용을 산 이답게 별다른 인사치레 없이 곁에 다가서는 자매에게서는 레몬버베나 향초의 잔향이 감돌았다.

“어머니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오는 길이야. 오늘 있을 식에서 네게 검을 내리는 역할을 맡아주었으면 한다고.”

더는 가문의 이름을 띠지 않게 된 내가 차악쯤으로 고려될 수 있을 줄 몰랐다며 농담조로 말하는 자매에게 내어놓을 수 있는 대답은 단출하였다. 차악을 차악이라 부르는 것조차 사치에 지나지 않는 게 지금의 상황이지. 협조에는 감사할 생각이야. 곧 가주로 서게 될 손아래형제의 그 말이 간곡한 하명과도 같은 제안임을 이해한 장녀가 쓰게 미소했다.

“어렸을 적부터 너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만큼 타고난 이름을 소중히 여겨 왔었지. 결혼을 하고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된 나를 올려다보던 네가 나이에 맞지 않게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게 아직도 기억에 선해.”

“……여자는 언젠가 카르마일 수 없게 된다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과거형으로 말을 하는구나. 하기야, 아버지가 안배하신 대로 가주의 자리는 당신께서 가장 열렬히 계획했던 자식에게 이어지게 될 것이고 네겐 그 지위를 띨 만큼의 자질이 있으니, 어릴 때의 생각에 더는 발목을 붙잡히지 않게 되는 게 당연하겠지만.”

십 년도 더 전에 있었던 일까지 들추어내는 말이었지만 비아냥거리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럼에도 무어라 대꾸하기 힘든 독설 한 자락을 맞닥뜨린 마냥 입술을 벙긋하기를 멈춘 카르마 메이에게 장녀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동기간이지만 일생토록 추구해야 할 ‘완벽’은 달리 지어 받은 입장에서, 일족의 정점에 서게 될 네가 세우고 있을 그 각오를 존중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카르마의 이름을 띠지 못하게 된 데 미련을 두거나 후회하지 않아.”

“…….”

“나와 다르게 너는 계속해서 그 이름을 지니고 살게 되겠지만, 그에 잡아먹히거나 너무 매몰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한번쯤 이 말을 네게 하고 싶었어.”

어린 자식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상냥하게 깊은 자매의 눈동자와 말씨였다. 생전의 부친이라면 후계자에게 이 같은 유훈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 내심 자조하면서도 카르마 메이는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누리고 서게 될 지위에 걸맞은 품위를 갖추는 것 역시 가주의 소양이자 덕목이므로.

카르마의 유물은 검이다. 군청색의 벨벳에 싸인 채 싸늘히 빛을 발하는 스몰소드를, 단 위에 마주 선 자매가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관례의 핵심은 윗대의 직계 혈족에게서 예식용 궁정검을 내리받은 후계자가 전 생애에 걸쳐 사냥해 나가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서하는 데 있다. 머리에 쓴 베일을 걷어낸 장녀가 두 손으로 검을 받쳐 들고서 선문답의 첫머리를 읊었다.

업칭의 눈금을 가누며 묻노라. 일족의 후예로서 일생토록 짊어지기를 바라는 업을, 스스로의 수사(修辭)로써 이 자리에 매달도록 하라.

받아든 검은 과히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누구와 무엇을 향하여 얼마만큼의 의지를 싣느냐에 따라 사냥의 성패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젊은 가주에게 가르치려는 듯이, 딱 그만큼의 무게감을 지닌 가보였다. 배면에 아로새겨진 문양을 눈으로 따라 덧그린 끝에, 카르마 메이는 스스로가 기억하는 한 가장 오래되었으며 앞으로도 자신의 안에서 내내 존속하게 될 하나의 욕구를 응시했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을 듣기를 간절히 바랐고, 까치발을 하고 서면 손에 닿을 듯한 것들만을 골라서 줄곧 목적하였다. 어떤 이유로든 그에 이르지 못할 적마다 자존의 욕구는 더욱 돌올해졌다. 책장의 맨 아래 칸에서 겨우 꺼낸 민법총칙의 겉면을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던 네 살. 부친의 손을 잡고 걸어간 길의 끝에서 카르마의 이름을 내려놓던 자매의 미소에 충격을 받은 다섯 살. 딸이기에 앞서 제자로서 대우하겠노라는 말을 들으며 가슴을 폈던 일곱 살. 영광된 자리에서 자신보다 앞서 대우를 받기 시작한 이의 손을 뿌리치며 스스로의 성과 이름을 울부짖듯이 외친 열 살. 마침내 검사 배지를 손에 넣은 열세 살. 생애의 여러 곡면으로부터 지금의 이 자리에 귀결하는 입증의 기제를 반추하고 그를 더욱 단단하게 세워 올리기로 결단한 끝에, 카르마 메이는 선언했다.

“카르마의 명예를 수복하기 위하여 맹세하니.”

“나는 가장 완전한 계절이 되어, 이 발밑의 지옥을 부유케 하겠다.”

무릎 맡에서 아이답게 칭얼거리는 것을 얼마간 허락받았던 언젠가, 부친은 그가 가장 귀애하는 피붙이에게 이야기했다. 네가 일개 꽃도 나무도 아닌, 계절과 같이 군림하는 후예이기를 바라노라고. 꺾이지도 베이지도 않으며 만상을 자연히 지배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을 담아, 늦봄처럼 찾아든 네게 붙인 이름이 바로 그것이라고. 카르마 고우에게서 받아 띠게 된 것들 중 결코 접어내릴 수 없을 몇 가지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카르마 메이라는 이름이다. 그리 규정된 자신을 부정한다면 카르마의 이름을 잇는 자가 될 수 없을 터.

믿어 온 영광이 더는 존재치 않는다 하더라도 걸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복수자의 길이다. 그 같은 마음가짐으로 검을 들어, 허공을 향해 고요히 날을 세웠다. 카르마의 태생으로서 그 유의를 전수받고 검사의 직분에 몸을 담은 인간으로서 열어젖히게 될 모든 문들을 향한 선언이었다. 카르마 고우의 딸이기에 앞서 그의 제자이며, 완벽을 추구하는 검사인 다음에야 카르마 메이가 되겠노라 맹세하는 열여덟 번째의 봄. 그 어떤 이해와 몰이해에도 연연하지 않고 이어질 기로에서 회청색의 눈동자가 벼려진 칼날과도 같이 빛났다.

살아 있는 그 누구도 그녀보다 카르마다울 수는 없었다.


2. Alford Plea. 기술적 유죄 또는 재판상 유죄라고도 한다. 미국의 형사소송에서 피고인 측은 무죄를 주장하지만 검찰 측에서 제시하는 증거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는 경우, 형벌의 집행이 전적으로 합당하지는 않으나 법적 안정성을 기하기 위해 유죄 판결을 내린 뒤 피고인을 석방하는 방식. 형량을 완화하기 위해 변호인 측에서 재판상 유죄 처리에 합의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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