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재판

Step above this Valse

220 by 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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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나와 어울려 줘야겠어. 거절을 당할 가능성 따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듯한 목소리로 카르마 메이는 요구했다.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심정으로, 그러나 다소 긴장한 채로 미츠루기 레이지는 대답했다.

“이번엔 무엇인가?”

“바보들의 바보스러운 바보 대행진을 보는 것도 슬슬 질려서 말이지. 가볍게 몸이라도 풀고 나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아.”

“그러니까 네 말은, 댄스 파트너로 서라는 거군.”

“말이 빠르게 통하는 건 나쁘지 않아, 레이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조금쯤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수화기 너머의 카르마 메이가 말을 이었다.

“세 시간 후야. 쓸 만한 연습 장소를 봐 뒀으니 그쪽으로 찾아오도록 해. 조금 전에 휴대전화로 위치 정보를 보내뒀는데…….”

“약도 말인가?”

“그래. ……아, 물론. 지도 파일 하나 열어볼 줄 모르는 바보 같은 남자라면 제발 춤 상대가 되어 달라고 백 날 천 날을 바보같이 애걸한대도 이쪽에서 사양하겠어.”

영락없이 카르마 메이다운, 도발적이기 그지없는 언사로 그들 사이의 짤막한 통화가 마무리됐다. 그녀가 송신했다는 파일을 여는 법을 알기 위해 액정 화면을 몇 분간 뚫어져라 노려보던 미츠루기 레이지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춤이라…….”

그에게는 스승이 되고 그녀에게는 부친이 되는 카르마 고우의 안배에 따라 두 사람은 어렸을 적부터 소위 상류층의 테이스트로 분류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수학해 왔다. 특히 사교 댄스를 배우는 데 있어 실전만 한 것은 없기 때문에, 예법을 익히는 동안에는 둘이서 오랜 시간을 함께 붙어있다시피할 때가 많았다. 그랬던 것도 두 사람이 각자 한 사람의 몫을 다하는 검사로 활동하게 되면서부서 차차 잊혔던 것 같지만. 다 잊은 줄로만 알았던 옛 기억의 도막을 훑으며 미츠루기 레이지는 옷장에 걸려 있는 수트들을 고르고 또 골랐다.

그녀가 물색해뒀다는 장소는 도심 내에서도 접근성이 좋은 축에 들어 찾기가 수월했다. 짐작했던 바와 같이 카르마 메이는 이 넓은 홀을 단지 잠깐의 연습을 위해 통째로 빌려둔 모양이었다. 어쩌면 잠시 빌리는 수준을 넘어 아예 사 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카르마 가문의 재력을 다루는 것은 철저히 그녀의 소관이니 이쪽에서 상관할 바가 못 된다. 더욱이 자신보다 앞서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나와 있는 상대를 두 눈으로 일별한 시점부터 감히 다른 생각 따위는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확실히 그녀의 미감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수준 이상의 경지에 올라 있다. 밑단에는 퍼를 덧대어 풍성함을 강조하고, 목부터 가슴 언저리까지 조밀히 수놓아진 비즈가 반짝이는 화사한 빛깔의 저 머메이드 드레스만 보아도 그렇다. 의상의 화려함에 조금도 굴하지 않게 잘 가꾸어진 이목구비와 아직도 퍽 얄캉한 몸피를 드러낸 숙녀가 그간 익히 알아 온 자신의 누이 같은 여성인지 얼마간 실감이 나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미츠루기 레이지는 자신을 향해 작렬하는 채찍질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며 얼굴을 구겼다. 바보가 이런 상황에서조차 바보스러운 표정을 짓다니, 정말로 바보 같은 일이군.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린 카르마 메이가 채찍의 손잡이를 바투 쥐었다. 은사로 짠 엷은 장갑을 낀 왼손이 금방이라도 채찍을 휘둘러댈 것 같아 그만 조바심이 난 미츠루기 레이지가 급히 입을 열었다.

“설마 채찍을 지니고서 춤을 추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법도 딱히 없잖아? 보는 눈도 없고.”

“하지만 여기는 법정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무도장이 아닌가.”

“언제나, 어디서나, 당장이라도 완벽한 상태로 법정에 설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야말로 카르마의 이름을 잇는 자의 본분. 나보다 앞서 검사가 되고도 그런 한심한 소리나 하다니,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무른 남자네.”

“하지만 메이, 네 요구대로 이 시간을 ‘완벽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여러모로 합이 맞아야 한다. 과히 내키지는 않겠지만 여기서 네 손이 할 일은 따로 있다는 걸 고려해서 그건 이만 내려놓아주었으면 한다.”

“흐응, 좋아. 바보 같은 피고인이 바보스럽게 내보이는 바보 같은 약점을 모아뒀다가 반격의 순간 단박에 휘몰아치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지. 그러니 각오해 두도록 해, 미츠루기 레이지.”

독이 오른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흘겨보며 채찍을 적당히 구석진 곳에 던져두는 그녀를 의식할수록 어쩐지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이제 와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했다가는 서심법정까지 갈 것도 없이 유죄로 만들어 주겠다고 벼를 테니 별다른 도리가 없다. 최대한 머리를 짜내어 채찍질을 피할 수 있을 방법을 궁리한 미츠루기 레이지가 그녀에게 제안했다.

“메이, 댄스 종목 말이다만. 비엔나 왈츠라면 그래도 꽤 기억하는 편이다.”

“상관없어. 마침 분위기를 맞출 노래도 몇 곡 가지고 있으니까.”

선뜻 동의를 표한 그녀가 휴대기기를 조작하자 홀에 설치된 음향기기에서 단선율의 피아노곡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자세를 취했다.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관객이자 파트너가 되는 자리에서 경의를 담아 인사를 한 차례. 다음으로 한 사람이 세 걸음씩, 총 여섯 걸음의 보폭을 좁히며 어깨와 허리에 손을 둘렀다.

왈츠에서 널리 구사되는 3박자의 스텝을 무난하게 밟아가기를 수 번. 홀을 함께 한 바퀴 돈 다음부터는 턴과 스텝을 동시에 취해야 하기에 더욱 정밀한 박자 감각과 더불어 호흡의 일치까지 요구된다. 스스로가 기억하는 한에서는, 어릴 적의 카르마 메이 또한 비엔나 왈츠를 퍽 즐겨 추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기교적으로는 단순한 듯하면서도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연습만 완벽하게 해낸다면 가장 우아한 형태의 움직임이 나온다고.

“못 본 사이에 실력이 정말 형편없어졌군! 리드를 해야 하는 쪽에서 계속 반 박자씩 움직임이 처지고 있잖아.”

“큭……!”

“강약의 흐름을 생각하지 않을 거라면 스텝을 꾸역꾸역 맞추려 애쓸 필요도 없을 걸. 정말 실망스럽네, 미츠루기 레이지.”

“……사교 댄스는 정말로 오랜만이라 그렇다.”

다섯 번째의 내추럴 턴(natural turn)을 마치고 서로의 몸이 다시 가까워졌을 때. 정말 못 볼 꼴을 다 보겠다는 듯 미간을 좁힌 카르마 메이에게 미츠루기 레이지는 변명하듯 말했다. 스핀을 돌던 중 불현듯 몇 년 전의 해프닝을 떠올리는 바람에 박자를 놓쳤노라고 솔직하게 말하기가 영 뭣한 까닭이었다. 방학을 맞아 본가에 돌아온 그녀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춤 상대가 되어 달라고 청해 온 적이 있었는데, 허리에 손을 올리다 말고 조금 살이 붙었냐고 놀렸다가 그대로 허벅지와 발등을 걷어차인 유치한 다툼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아찔한 인상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아마도 그 다음부터 일과 후 남는 시간을 함께 보내기엔 묘하게 떨떠름한 사이가 되었던가. 정확히는, 그녀 쪽에서 ‘경쟁심’을 이유로 들며 함께 여가 시간을 가지기를 한사코 거부해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사로서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다. 자신은 카르마 가문의 지도 편달 하에 익혀 온 것들을 지금 이상으로 더욱 소중하게 여기며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카르마 메이는, 그녀에 관해서는 어쩌면 더욱,

“미츠루기 레이지. 나와 어울리는 시간을 즐기도록 해. 다른 하찮은 것에 정신을 파는 어수룩함 따위, 카르마는 결코 용납하지 않아.”

파트너의 품에 안기는 듯한 자세를 거침없이 취해 오며 카르마 메이가 귓전에 속삭였다. 마침 한 번의 연주가 끝나고 새로운 곡조의 왈츠가 시작되고 있어, 앞서의 실수를 마음에서 깔끔히 털어버리기에 최적의 조건이 갖추어졌다. 그녀의 도드라져 있는 날개뼈 부근을 훑듯이 손끝을 움직였다가 타이밍에 맞게 물려내며 미츠루기 레이지는 순순히 응수했다.

“법정에서 함께 공방을 주고받을 때처럼, 최선을 다해 보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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