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재판

고양이를 부탁해

애니판 오리지널 에피소드 관련 언급이 있습니다.

220 by 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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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랏, 검사님. 취향이 바뀌셨슴까?”

정수리 너머에서 들려오는 이토노코 형사의 물음에 미츠루기 레이지는 고개를 들었다. 그다지 좋지 않은 자세로 장시간을 앉아 있었던 탓에 목과 어깻죽지가 뻑뻑했다.

“아차, 그것부터 먼저 말씀드리려고 했지 말임다. 거북 목 증후군이라고 함까? 조심하셔야지 말임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흐흥 하고 웃는 이토노코 형사의 만면에 흐뭇한 웃음기 같은 것이 올라 있었다. 바로 전날 수사 현장에서 사고를 치는 바람에 냉혹한 급여 조정을 예고받았던 것을 잊어버린 건가 싶어 조금 어처구니없는 마음에, 미츠루기 레이지가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가, 형사? 어째 표정이 즐거워 보이는군.”

“그럴 리가 없잖슴까, 이번달도 맨 국수로 세 끼 모두 확정임다.”

공과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상사에게 서운한 마음을 표할지언정 원망할 줄은 모르는 남자의 처량맞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수사의 기본 원칙 정도는 매일 호흡을 하는 횟수만큼 머릿속에 새겨 두면 좋으련만. 그래도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이번 케이스의 초동 수사에 관한 보고서를 싹싹 모아 왔다며 공손히 내미는 이토노코 형사에게 더 이상의 쓴소리는 하지 않기로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서류를 팔락팔락 넘기며 내용들을 훑고 있는데, 거구의 사내가 큼직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손가락을 꼼질거리는 모양새가 뻔히 느껴졌다. 그것을 무던하게 넘길 만큼 신경이 둔하지 못하므로 결국 미츠루기 레이지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자네의 열렬한 시선을 받고 있으려니 못내 신경이 쓰이는군.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하게.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집게손가락으로 한 곳을 척 하고 가리키며 이토노코 형사가 헤벌쭉 웃는 것이었다.

“그거 말임다, 그거!”

“그거라니, 뭘 말하는 건가?”

뭔가를 쉬이 이해할 수 없을 때 나오는 버릇대로 미간을 살짝 좁히며 미츠루기 레이지는 반문했다. 그리고는 이토노코 형사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니, 내렸다고 할 것까지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 내내 주시하고 있던 자리로 시선이 되돌아갔을 뿐이니. 다시 말해, 이토노코 형사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의 집무실의 책상에 설치된 모니터 속에 있었다.

“정말 귀여운 새끼 고양이들임다! 사람에게 미인상이 있다면, 그 녀석들은 고양이니까 대단한 미묘상이라고 생각함다.”

“자네는 좀 더 덩치 큰 동물이나 개를 좋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작고 귀여운 생물을 좋아하는 건 인간의 본능 같은 것 아님까! ……아, 온전히 제 생각은 아니지만, 마코 양이 말해준 것이니 틀림없슴다.”

그가 한때 형사과의 ‘2대 유감’으로 종종 언급되던 전직 여경, 스즈키 마코와 교분을 이어 가는 중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헌데 이런 스몰톡의 소재까지 거리낌 없이 구사할 정도면 두 사람은 상당히 친밀해진 모양이다. 이토노코 형사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크게 참견할 생각이 없으므로 미츠루기 레이지는 그런가, 하고 간단히 응수했다. 최신 운영체제로 업데이트된 PC의 갤러리 파노라마 기능에 힘입어 모니터에서는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제각기 앞발과 뒷발을 귀염성 있게 들어올리는 장면, 뽀얀 배를 드러내보인 채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장면, 한 녀석이 다른 녀석의 꼬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장면 등이 연신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미츠루기 검사님?”

“음?”

“어쩌다가 고양이를, 그것도 두 마리나 들이신 검까? 페스 대신임까?”

“실례네, 이토노코기리 형사. 페스는 ‘대신’ 같은 개념으로 뭔가와 견주어질 녀석이 아니야. 그리고 녀석의 보호자는 내가 아닐세. 메이가…….”

“예? 카르마 검사가?”

눈이 쟁반만큼 커지고 입도 딱 벌어진 채로 허어? 하는 이토노코 형사를 보며 내심 아차 싶어진 미츠루기 레이지였다. 기밀 엄수를 요구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타인의 사생활을 입에 담는 것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그의 성정에서는 그마저도 일종의 실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궁금증이 동해버린 이상 이토노코 형사는 카르마 메이를 만났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직접 물어봤다가 그녀의 채찍에 혼쭐이 날 가능성도 농후하다. 무엇을 어디까지 말해 주면 좋을지 고민한 끝에, 미츠루기 레이지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하지.”


조금 늦을 거야. 2시간 정도.

그녀를 기다리던 도중,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휴대전화의 액정 위를 주시하며 미츠루기 레이지는 생각했다. 열흘 전부터 본인의 요구로 잡아 놓은 약속에 늦다니. 게다가 두 시간씩이나 미루면서 사과의 말 한 마디가 없다. 어느 모로 보나 카르마 메이답지 않은 일이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싶은 마음에 통화 버튼을 눌러 볼까 했다가도 그는 세 차례나 단념을 했다. 그들 사이에서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은 상당히 자주 있는 일이지만 통화는 지양되고 있었다. 육성을 듣는 일은 공적인 영역과 직접 얼굴을 볼 때에 한정했으면 한다는 그녀의 영문 모를 고집스러움에 맞춰 주려다 보니 몇 년째 유지되고 있는 일종의 묵계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1시간 반 후, 두 번째로 착신한 메시지의 내용에 이르러서는 그로서도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쉬어야겠어. 오늘 약속 없던 걸로 하자.

일정을 아예 뭉그러뜨리겠다는 일방적인 선언을 하면서도 여전히 사과의 말이 없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문제가 생긴 것이다. 곤란한 상황에 이르렀을수록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아무 단서도 주지 않고 모든 것을 혼자 떠안는 그 버릇, 제발 고쳐주면 좋으련만. 부디 큰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되뇌며 미츠루기 레이지는 곧바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부친의 타계 후 카르마 메이는 본가에 최소한의 관리 인원만을 고용해 두고, 본국에 들어와 있는 기간에는 주로 호텔에서 기거하곤 했다. 그나마 최근에는 검사국 근방에 위치한 적당한 주거 공간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아직 알아두지 못했으므로, 부득이하게 사무국에 연락을 취해 수소문할 수밖에 없었다. 주소를 받아적은 다음 그대로 액셀을 밟아 도착한 주택은 카르마 저택에 비하면 그럭저럭 소박한 규모였다. 어디까지나 본가에 비해 소박하다는 것이지, 갓 스물 언저리의 나이 어린 여성이 혼자만의 힘으로 장악하기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사람이야 쓰고 있겠지만 기껏해야 파트 타임 정도일까.

부디 집안에서 정신을 잃은 상황만 아니기를 바라며 현관의 초인종을 두 번 눌렀지만 집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긴급 상황에서는 묵계 따위는 상관없지 않은가 싶은 마음에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가 이럴 때는 아무래도 응급실 쪽이, 하고 수신번호를 고치려던 그의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장장 두 시간 반 동안 그의 걱정을 잔뜩 사 버린 당사자, 카르마 메이가 충혈된 눈과 연신 쏟아지는 재채기를 숨기려는 듯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 있었다.

“……레이지? 여기는 어떻게, 아니…… 뭐, 하러, 콜록.”

“메이? 무슨 일인가. 낯빛이…….”

“일단 이것, 좀, 잠깐……. 엣취. 윽.”

거의 자리에 주저앉으려 하는 카르마 메이를 부축하며 미츠루기 레이지는 그녀가 두 팔로 겨우 안아들고 있던 가방을 넘겨받았다. 겉으로 보아서는 수상쩍은 낌새가 없었지만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증거품이라도 든 건가 싶어 마음이 못내 급해졌다. 앞뒤를 잴 것도 없이 지퍼를 열려는 그의 팔을 그녀가 채찍의 손잡이 끝으로 쿡 하고 찔렀다.

“……열지 마. 걔네, 낯가림도 많고 잘 놀라니까.”

“걔네……?”

힘 없는 태클과 낯설기 짝이 없는 대명사에 멈칫하는 사이 빼옹, 빼오옹, 하는 울음소리가 가방 안에서 새어나왔다. 음? 하고 가방에 달려 있는 작은 창을 들여다보자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꼬리까지 바짝 세우고 애처로이 울어대는 곤란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눈대중으로 보아하니 생후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듯한 녀석들이었다.

“병원은?”

“당연히, 콜록, 갔다 왔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어느 쪽 병원의 이야기인가?”

“동물, 병원인 게 당연…… 하잖아? 나는 그냥 감기, 콜록, 일 테니까. 오늘은, 귀가 후에 쉬려고 했어.”

“…….”

“뭐…… 야, 그 바보 같은 표정. ……남의 집에 멋대로 찾아와서는.”

“어딘지 몰라도 그 병원에는 발길을 끊는 걸 추천하지. 서비스가 나쁜 곳이다.”

짧게 혀를 차며 대강의 상황 파악을 끝낸 미츠루기 레이지가 단언했다. 동물 알레르기 증상에 대해 설명도 하지 않았다니, 사람에게나 동물에게나 응대가 엉망인 곳이 분명하다. 혼자서 뭘 그렇게 다 아는 표정이냐며 금방이라도 힐난할 기세인 카르마 메이를 붙든 것은 고양이들의 끊이지 않는 울음소리였다. 성체도 아닌 녀석들이 목청들은 좋아서, 주택가의 골목에 서서 이대로 말다툼을 계속했다가는 여러 모로 곤란해질 것이 뻔했다. 결국 발끈하려던 것을 애써 이성적으로 접어내린 그녀가 서둘러 현관의 도어락을 풀었고,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미츠루기 레이지는 적당히 놀려지고 있는 작은 방에 고양이들을 풀어놓은 뒤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거실에 있는 너른 소파 쪽에 그녀를 끌어다가 눕힌 다음 재킷을 벗어 덮어 주며 말했다.

“약을 지어올 테니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누워 있어라, 메이. 집 안도 환기를 좀 시키지.”


“임시 보호?”

“굳이 표현을 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네.”

자신이 시간이 남아 돌아서 유기동물에 오지랖을 부린 건 아니라는 점을 두 번이나 강조하며 카르마 메이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최근 그녀는 CITES 협약(주: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의 국가 간 교역에 관한 국제 협약. 1973년에 워싱턴에서 마련되어 통칭 워싱턴 협약 또는 W 협약으로 불린다)에 따라 반입, 반출이 금지된 희귀 동식물을 조직적으로 사육, 교배, 밀거래하는 범죄조직을 쫓고 있던 참이라 했다. 8개국 소속 국제경찰과의 긴밀한 공조를 통해 조직의 아지트와 대규모 교배 공장의 위치 모두를 특정하는 데 성공했고, 밀수를 알선하는 브로커들과 그들에게 줄을 대 놓은 범국가적 도매상들 또한 일망타진하는 쾌거를 울렸다고.

어느 케이스에서나 현장에서 발로 뛰는 일 다음에는 지난한 행정 절차가 수사 팀을 맞이하게 되어 있다. 교배 공장에서 사육, 관리되던 희귀 동식물들의 기록과 실제로 확보한 동물들의 리스트를 대조하고, 밀렵으로 희생된 야생동물들의 박제를 처분하는 작업이 장장 3주에 걸쳐 이루어졌다. 조직의 수뇌부에 있던 자들을 신문하며 조서를 작성하는 짬짬이 수사관들로부터 물증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받아내는 동안에도 모든 기록에 불일치점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서류로 처리할 작업들이 일단락되고 공소 일정이 확정되었을 즈음, 이만 완전히 폐쇄하려던 공장에 들렀다가 반쯤 죽어가는 몰골을 한 새끼 고양이 두 마리를 발견한 것은 자그마한 기적이자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저렇게 어린 녀석들이 그동안 자력으로 살아남았을 확률은 제로라고 봐도 좋을 텐데, 어미는 끝끝내 발견하지 못한 건가?”

“이쪽에서 확보한 동물들 중 유전자 감식이 일치하는 케이스는 단 한 건도 없었어. 공장 내부에서 어미 고양이의 시체를 찾지도 못했고. 말 그대로 정보의 공백이 생겨버린 셈이지. 조금 골치 아프게 됐어.”

“근친교배까지 시키며 혈통과 족보를 대대적으로 취급하던 조직의 리스트에서 누락되었다는 건…….”

“자연발생한 ‘실패작’이라는 거야. 어디까지나 놈들의 기준에서.”

신랄한 어투로 말하며, 카르마 메이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머그를 입가에 가져다대었다. 그가 대신 처방받아 온 약을 한 포 뜯어 입안에 털어넣은 뒤로 컨디션은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다. 그래도 불청객에게 앓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인 것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 듯, 샐쭉한 표정으로 머그의 매끄러운 표면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시선을 내리깐 그녀가 말을 마저 이었다.

“증거품의 리스트를 더는 수정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녀석들이 정식 증거로서 받아들여질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아.”

“으음, 확실히……. 저쪽에서 알아서 인정해 줄 리도 만무하니, 기존에 제출한 증거물들을 통해 정황이라도 확실히 밝히지 못하는 한 녀석들의 운명은 이도 저도 아니게 될 공산이 크군.”

“다른 증거들이 워낙에 확실하니 놈들에게 유죄를 주는 것 자체에는 문제될 일이 없어. 하지만 정작 그 범죄로 인해 태어난 녀석들은 존재도 가치도 인정받기 어렵다니. 정말로 바보의, 바보 같은, 바보스러운 상황이지.”

“저 녀석들에게 보호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사실은 이해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이대로 네가 키울 건가?”

“설마. 내게 고양이 알레르기가 없더라도 무리야. 나는 당신같이 할 수는 없으니까.”

“……나 같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내 나름의 칭찬이니 그렇게 바보 같은 표정 짓지 말지 그래? 미츠루기 레이지.”

사람의 풀 네임을 부르면서 칭찬이라는 말을 함께 입에 담는 사람은 세상에 카르마 메이뿐인 것이 아닐까. 그런 합리적인 의심을 품은 채로 미츠루기 레이지는 자기 몫으로 만들어진 얼 그레이 레몬 티를 한 모금 들이켰다. 과하지는 않을 정도로 진하게 우러난 다향과 따끈한 온기가 목을 적시는 동안 그는 불현듯 열흘 전에 그녀로부터 반려견의 근황에 관한 이것저것을 궁금해하는 연락을 받았던 것을 생각해냈다. 아마도 그 시기는 카르마 메이가 저 불쌍한 새끼 고양이들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았을 때와 거의 일치하리라.

“이번달 초에 갑자기 페스의 안부를 물어 온 것도 이 건과 관계가 있었나?”

“뭐, 겸사겸사라고 해 두도록.”

“혼자서 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겪는 실질적인 애로사항에 대해 궁금증을 가질 정도로 녀석들에게 마음 씀씀이를 가지고 있다는 건 확실하군. 하지만 메이, 동물을 키우는 일에 전혀 경험이 없는 건 아니잖나? 옛날에는 ‘올리버 경’의 산책을 시키겠다고 나와 매일같이 싸우기도 했었고, 네가 그 녀석에게 옷도 입혀 줬었던 걸 기억하고 있는데.”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 다음부터는 당신이 ‘올리버 경’의 케어를 전담했잖아? 임종도 당신 혼자서 지키고 수습했으니, 어려서 잠깐 귀여워만 했을 뿐인 내가 하나의 생명을 완벽하게 책임져 본 경험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애초에 너무 오래 전 일이기도 하고.”

‘올리버 경’이란 그가 카르마 저택에 데려와 처음으로 길렀던 유기견의 이름이다. 스승의 아래에서 면학에 힘쓰는 와중에도 반려견을 보살피며 깊은 애정을 쏟았는데, 열 세번째 생일을 지나고 두 달쯤 후에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던 것이 지금까지도 꽤나 마음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 녀석의 자견에 해당하는 현재의 반려견, 페스도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라 자잘하게 신경 쓸 일이 슬슬 많아지고 있는 참이다. 이야기가 꺼내어진 김에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리며 퍽 감상적인 표정을 짓는 미츠루기 레이지를 향해 카르마 메이가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내 감정을 떠 보려고 들기에 앞서 카르마의 철칙을 생각해보도록 해, 레이지. 증거품은 다른 무엇이기에 앞서 증거품이야. 감정도, 가치도, 그 명백한 사실에 우선할 수 없어.”

“메이.”

“그리고, 한 가지를 확실하게 해 두도록 하겠는데.”

비워진 머그잔을 테이블에 소리 나게 내려놓은 카르마 메이가, 그를 향해 정면으로 눈 맞춤을 해 왔다.

“미츠루기 레이지, 우리는 타인이야. 그러니까 비슷한 일을 겪더라도 책임을 지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어.”

“…….”

“지금 이 케이스에 관련된 모든 것들은 내 권한 아래에 있지. 그러니 저 녀석들의 신변과 거취를 보장하는 것까지도 검사로서의 나의 책임이자 의무에 해당돼. 저 녀석들을 증거 목록에 올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좋은 주인을 찾아 줄 생각을 처음부터 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곳의 펫 커넥션은 미국과는 다르게 돌아가고 있고, 나로서는 임시 보호 이상의 행동을 취할 여력이 없으니까. 이럴 때는 역시 현지인에게 협조를 받을 수밖에 없는 거잖아? 그러니 적절한 정보와 인편만 찾아서 내게 넘겨 주도록 해. 그러면 나머지는 내가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어. 그렇게 만들 거야.”

스스로의 역량을 과시하는 듯한 기세로 한참 동안 말을 또박또박 쏟아낸 카르마 메이가 다시 잘게 쿨룩이기 시작했다. 고양이들의 울음만큼이나 애처로운 구석이 있는 그 기침 소리가 멎기를 기다리는 내내 미츠루기 레이지는 생각했다. 실로 카르마 메이다운 주장이다. 그녀가 조만간 건강을 회복하게 되면 자신의 입 밖으로 낸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리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그로서는 주장의 당위나 가능성을 따져 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명징한 한 가지 사실을 모르는 척하고 싶어하는 그녀에게 필요하고 또 유익한 말은, 당장의 앉은 자리에서 요구받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일 터. 상대방이 얼마나 불 같은 반응을 내보일지 짐작하면서도 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네 말의 요점은 전부 알아들었다. 이유들도 타당하니 그에 대한 반박은 하지 않으마. 하지만 너는 마치 위증을 하려는 증인처럼, 내게 표정으로 다른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조금쯤은 스스로의 속내에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미츠루기 레이지. 나는 늘 완벽하게…….”

“너는 어렸을 적부터 카르마의 위명을 계승하는 자가 짊어져야 할 것들에 대해 탁월한 이해를 보여 왔다. 그렇기에 일곱 살부터 후계자로 인정을 받았고, 부친이 남기고 간 과오에도 굴하지 않으려 애쓰는 중이며, 그 이상의 것들을 스스로의 힘으로써 이뤄낼 작정이겠지. ”

“말을 빙빙 돌려서 하는 남자에겐 흥미 없어. 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

“카르마 메이. 너는 분명 실력과 긍지를 갖춘 한 사람의 어엿한 검사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가질 법한 감정들을 단지 효율과 책임감이라는 미명 하에 단념하려 든다면, 너는 영영 부친을 넘어서기 어렵겠지.”

“……뭣?”

“달리 표현하자면, 하고 싶은 것과 해야만 하는 것이 불일치한다고 해서 한쪽을 마음에서 반드시 도려내야 완벽해진다는 법은 없다는 얘기다. 녀석들에게서 억지로 애착을 떼려는 기색이 역력한 채로 그렇게 계획과 포부를 읊어 봐야 결국 속만 더 상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렇게 하는 것이 네가 믿는 ‘완벽함’의 전부라면, 유감스럽게도 너는 아직도 스스로의 미숙한 지점을 극복하지 못하는 셈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스승과 내가 서재에 있을 때마다 문틈으로 엿보이던 표정을 아직까지도…….”

“바보의, 바보 같은 소리 따위!”

여전히 기운이 반 토막난 얼굴을 하고도 기어이 채찍을 꺼내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카르마 메이의 기세에 미츠루기 레이지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었다. 그리고는 아차, 하고 짧게 후회했다. 머리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는지 다시금 발갛게 익어버린 얼굴과, 눈가에는 물기까지 어린 모양새가 딱하게 보이는 까닭이었다. 그녀가 이 정도로 밑지는 행동을 취하고 있는데 한 번쯤은, 딱 한 대까지만 맞아 주는 것이 저 속상한 마음을 풀어주는 데에는 더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장갑을 벗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신음하는 그녀를 도로 자리에 앉히고 난 다음, 그는 전기 포트의 스위치를 눌렀다. 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찻주전자 안에서 식어버린 차를 미련 없이 버리고 새로 끓인 물을 티팟에 반쯤 부어냈을 즈음, 맥이 한풀 꺾인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나는, 카르마 메이야.”

“그래.”

“내가 이 자리에 올라 거머쥔 것들, 그리고 앞으로 거머쥐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 누구도 감히 간섭하거나 방해할 수 없어.”

“알고 있다. 맹세컨대 나는 검사로서의 네 삶과 포부에 간섭할 생각 따위는 없다. 좋든 싫든 카르마의 업은 이제 온전히 네 것이니까.”

“알고 있다면서 잘도……, 그런 말을 하네.”

“나에게 있어 너는 늘, 카르마 ‘메이’니까 말이다.”

“…….”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을 합리화하고 싶다면, 목표나 이유가 반드시 ‘완벽함’일 필요는 없다. 합리화란 본디부터 뻔뻔스러움을 토대로 하는 행동 기제니까. 조금 더 단순하게, 예를 들자면, ‘최선’으로 선회해보는 게 때로는 더 만족스러운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 않겠나. 단지 그 말을 해 주고 싶었을 뿐이다.”

이제는 명실상부하게 세상 유일의 ‘카르마 검사’로 자리를 굳히고, 더욱이 국제 검사의 반열에까지 든 그녀는 자신의 행보를 넓혀가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 바람대로 커리어를 다져 나가는 데 지장을 초래할 수 있는 것들은 가능한 한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는 그 마음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나 애를 써 가며 잘라내기에는 못내 아까운 것이 바로 연민이라는 감정이 아닐까.

혈통의 순수성이 상해 버린 이상 아무 가치도 없다고 외면받고, 인간들이 좋을 대로 지어낸 법의 테두리 내에서마저 수용되지 못하는 자그마한 녀석들의 처지를 카르마 메이는 분명 안타까워하고 있다. 정작 스스로의 무른 부분은 조금도 인정하기 힘들어하는 그녀에게, 그녀 자신이 허락하는 한에서는 기꺼이 참견하고 도와 줄 의향이 그에게는 충분히 있었다. 새로 우려 낸 차를 빈 머그잔에 따라 건네며 미츠루기 레이지가 말했다.

“아무튼, 원래 얘기로 돌아와서 제안을 하나 하자면. 녀석들의 거취와 관련해서 나도 힘 닿는 한 거들어 줄 테니 너도 협력해 다오, 메이.”


처음에는 근방의 펫숍 운영자들을 상대로 사진을 보여 주며 수소문을 해 볼 작정이었다. 카르마 메이가 보내 온 사진과 영상을 어딘가에 올리거나 직접 보여 주면서 상황을 설명하면 어딘가에서는 인연이 닿을지도 모른다는, 다소 주먹구구식의 발상이 며칠 전까지의 최선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런 식으로는 일이 잘 풀릴 리 없었다. 오죽하면 이토노코 형사가 자신의 하루 식사가 세 번에서 두 번으로 줄어들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말을 돌려 가며 면박을 주었을까.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전혀 의외의 인맥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스즈키 마코의 고교 동창 중 한 사람이 펫 트레이너로 일하고 있는데, 실력도 인맥도 상당한 축에 속한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고양이들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라나. 일처리의 측면에서 다소 못 미더운 모습을 자주 보인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손뼉까지 쳐 대며 환호하는 것을 제지하느라 미츠루기 레이지의 미간에는 또다시 깊은 주름이 졌다. 하지만 소개받은 펫 트레이너의 소셜 네트워크 계정과 그쪽에 의뢰를 맡겼다는 사람들의 리뷰를 살펴본 다음에는 그로서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서기 시작했다. 카르마 메이 또한 별달리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그로부터 닷새 뒤에는 재판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녀석들의 신변을 의탁하며 추후에 믿을 만한 보호자에게 입양되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의 문서에 서명을 했다.

“메이. ‘헤르’와 ‘프라우’의 근황을 알고 싶다면 언제든지 연락해도 괜찮다고 하는군. 마침 새로운 놀이 영상도 업로드된 모양이다.”

“이 이상으로 미안할 일은 만들지 않을 거야. 애초에 재판에 필요한 정도로만 자료를 요청할 생각으로 그쪽에 맡긴 거였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동 재생되는 동영상 속 새끼 고양이들에게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는 카르마 메이였다. 여성과 아이들을 대할 때와 같이 퍽 유해진 표정으로, 이따금씩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는 것을 목격하기란 상당히 오래간만의 일이다. 마음 한쪽에서 우러나오는 영문 모를 간질간질함에 머쓱해진 채, 미츠루기 레이지는 몇 주 전부터 마음에 걸렸던 문제에 관하여 슬쩍 운을 띄워보기로 했다.

“메이, 나도 네게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지금 당장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한다면, 한 번 말이나 들어보고 결정하지.”

“조만간 유럽권 국가들의 법제 연구차 해외에 나갈 일이 있을 예정인데, 페스를 호텔링하던 곳이 이번에 대대적으로 내부 공사를 한다고 해서 말이다. 6주 동안이나 맡겨둘 곳이 없어서 곤란해진 상황이다.”

“…….”

“너, 개에는 알레르기가 없잖ㄴ……. 크윽!”

“개 알레르기는 없어도 내 스케줄은 눈이 돌아갈 만큼 쌓여 있다, 미츠루기 레이지!”

상급검사 집무실 1202호에서 탄성 있게 휘둘러지는 채찍의 타격음이 터져나오자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 몇이 이크, 하고 어깨를 움츠리며 발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검사국장의 지시로 미츠루기 검사의 앞으로 배당된 새로운 케이스를 전달하려 문간을 기웃거리던 이토노코 형사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타격음을 듣자마자 아예 꽁무니를 뺐다. 아직은 앳된 티가 남아 있는 앙칼진 노성과 채찍 소리가 잠잠해지고 몇 분 후, 미츠루기 레이지와 카르마 메이는 약식의 구두 계약을 했다. 어디까지나 한쪽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결말의 본질은 미츠루기 레이지의 부탁을 카르마 메이가 수용했다는 데에 있었다. 서로의 가장 가까운 이해자를 자처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솔직하지 못한 관계에 놓인 두 사람의 삶에서 기브 앤 테이크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영위되었으므로,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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