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의 카운슬링
나루미츠, 유가미츠
*유가미의 말버릇은 일판을 따라갑니다.
*역5 강스포
2028년 12월 15일 오후 11시 02분
사형수의 독방은 대중 매체 속 이미지만큼 차갑고 외롭지 않다. 단지 어두울 뿐이다. 그곳에 익숙하게 들어선 미츠루기는 종종 자신의 계절감이 잘못된 기분을 느꼈다. 아마 큰 착각은 아닐 것이다. 이곳의 시간은 겨울에 멈춰있었다.
그리 넓지도 않은 방의 철창이 열리고, 구두 굽 소리가 존재감을 과시해도 독방의 주인은 고개 한 번 들지 않는다. 죄수는 손에 들고 있는 종이 쪼가리들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게 전부였다. 매를 닮은 눈은 글을 달빛조차 희미한 이곳에서도 읽는 데에는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미츠루기는 그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저 팔짱을 낀 채 검지를 까닥이며 시간의 흐름을 쟀다.
남자는 잃어버린 세월의 흐름을.
2028년 4월 19일 오후 8시 27분
암흑시대를 끝내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선 미츠루기에게는 새로운 일과가 생겼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할 만큼 은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게감 넘치는 일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불 꺼진 구치소에서 사형수를 면회하는 일이 어떻게 가볍냐고 반문할 수도 있었으나 미츠루기 레이지는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두려워한 적 없었다. 검사이면서 사형수인 죄수는 두렵기보다도 대화하기 까다로운 상대다.
굳이 검토해볼 필요가 없던 법정의 기록을 붙들고 몇시간이나 소비해버린 것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구치소에 도착했을 때는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권력으로 만들어낸 시간에 촉박함은 없었다. 면회실에는 적당히 앞을 볼 수 있을 정도의 등 한두 개가 켜져 있었다. 남자만큼이나 미츠루기에게도 익숙한 조명이다. 공간을 가르는 유리 너머엔 제법 얼굴이 익은 사내가 수갑을 찬 채 앉아있었다.
“처리할 일이 많아 늦어버렸군. 사과하지.”
“헷, 마음에도 없는 사과는 필요 없다.”
솔직한 사과를 건네면 남자는 입매 한쪽만을 비틀어 웃었다. 노골적인 도발에 말려드는 대신 간수들이 준비해둔 의자에 앉으면 여유로웠던 그의 얼굴은 꾸미지 않은 냉소로 돌아온다. 미츠루기는 검사의 옷을 입고도 직급 같은 건 없는 듯이 구는 그에게 말을 꺼내려다 말았다. 처음 만난 순간, 격식 있는 높임말에 잔뜩 들어있는 조롱과 비꼼을 다시 겪고 싶진 않아서였다. 기분이 상한다기보다는 끝도 없이 새빨간 검찰청장을 높이면서 진지한 대화를 피하는 게 피곤했다. 거기에 배배 꼬지 말고 차라리 성질껏 말하라고 명령한 뒤로는 쭉 이런 말투였다. 한 번 그렇게 선을 넘으니 확실히 대화는 이전보다 잘 됐다. 검사보다도 사형수에 가까운 그의 태도에 위화감을 느낄지언정 짜증은 나지 않았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은 더더욱 말이다.
“…기분 좋아 보이는데.”
미츠루기의 기분에 대해, 그리고 그가 늦게 온 이유에 대해 이미 짚이는 것이 넘쳐나는 유가미는 낮게 혀를 찼다. 이번에 웃는 건 미츠루기 쪽이었다. 오늘 유가미는 죄수의 신분으로 법정에 선 이래로 처음 패소했다. 승패에 집착하는 재질은 아니었지만, 어떠한 날조나 위증도 없이 당당하게 무죄를 따낸 것도 모자라 진범의 고발까지 마친 시점에서 다른 말이 필요 없는 완패였다. 의뢰인을 무조건 믿겠다는 신념 하나만으로 그 요괴 같은 시장의 무죄를 주장하는 건 보통의 정신력으로 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맛본 패소가 치명적이었다고 한들 받아들이지 못할 건 아니다. 패배에 불복하지 않는 것 또한 검을 쥔 사람의 덕목이다. 자신에게 패소를 선사한 변호인이, 눈앞에 검찰청장이 매일 같이 이야기하는 어떤 사내의 제자들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타인의 실패와 패배를 즐기는 악취미 따위는 없을 검찰청장이 자신의 앞에서 웃고 있는 이유였다.
물론 미츠루기는 죄수 검사의 첫 법정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검찰청장으로서 할 말이 많았다. 법정에 정식으로 검사 신분으로 설 것을 최초로 명령했던 때에 그는 어딘가 불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승소만 따내면 되는 거냐 물어왔다. 숨길 생각도 없이 지나치게 많이 담긴 의미는 미츠루기를 더없이 불쾌하게 만들었다. 결국 언짢음을 참지 못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일부러 이해하지 못한 듯이 구는 유가미를 질책했다.
결과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건 미츠루기 쪽이었다.
대화할 때부터 꽤나 속이 꼬여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눈치챘으나 그것은 정말로 어렴풋이, 였을 뿐이다. 수갑을 차고 법정에 선 유가미는 제 입맛대로 재판장은 물론 증인과 피고인을 가지고 놀더니, 끝에 가서는 변호사가 먼저 유죄판결을 내려달라고 간청하게끔 만들었다.
수감된 이후로 몇 년이나 재판을 쉬고, 수감되기 전에도 어린 나이로 부족한 경험 등등 여러 가지를 고려한 미츠루기가 몇 번이고 검토한 사건이었다. 염려와 달리 간단히 승소를 따낼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까지 불유쾌하게 압도적으로 끝내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자신과 있던 면회조차 꽤나 내숭 떨고 있었다는 것도.
최초의 법정에서 형사들도 다루기 포기한 그를 데리고 구치소로 돌아온 건 미츠루기였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지적해야 할지, 애초에 지적한다고 바뀌기는 하는 건지. 스스로도 느낄 만큼 심각하게 미간을 구긴 채, 얼마 못 가 법정의 왜곡 그 자체라 불리게 될 남자를 노려보았다. 어쩌면 이단아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르는 당사자는 어깨를 으쓱이기만 할 뿐이었다. 말을 한다고 곧이곧대로 듣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삐뚤어진 고집을 마주하니 걱정이 밀려들었다. 죄수이자 검사인 모순적인 신분만으로도 법의 암흑시대를 상징한다는 말이 나도는 처지에, 그의 행동은 없던 암흑도 몰아올 기세였다. 또 한 번 모순적이게도 죄수라는 신분이 그의 날조 가능성을 역으로 차단해준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렇게 매 공판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 아프게 만드는 나날들을 보내던 와중에 드디어 유가미가 패소한 것이다! 그것도 맡는 재판마다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남자의 제자들로부터.
“나도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게 전부라 걱정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내 생각보다 더 스승을 닮은 제자들이더군.”
“헷,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결국 증거는 그의 편을 들었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해도 그것이 진실이라면 결국 모든 모순의 답은 거기로 향하게 되어 있는 법이다.”
진실. 미츠루기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유가미는 앞에 있는 사람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가늘게 눈매를 좁혔다.
“그러고 보니 내 수갑에 재밌는 짓을 해놨던데.”
유가미는 자신의 앞으로 나와 있는 책상을 내리쳤다. 나무가 울리는 소리와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뒤섞이고, 뒤이어 사슬이 잘그락 울린다. 드물게 평온했던 미츠루기의 눈썹 끝이 움직였다.
“유감을 표하지. 그게 경찰청에서 내건 조건이었네. 나도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유가미의 법정 복귀를 위해 미츠루기는 정말 많은 곳을 뛰어다니며, 상당히 많은 사람을 만나고, 아주 많은 서류들을 결재해왔다. 암흑시대를 걷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무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촉망받는 신예 검사로 예리하게 증인과 피고인의 심리를 파고드는 유가미의 살인은 검찰계의 큰 오점이었다. 나루호도의 변호사 자격이 박탈당하고 그가 여태껏 무죄판결을 받아낸 모든 법정을 재조사하며 한창 시끄러울 때 터진 일은 법조계에 완전한 어둠을 가져왔다. 사람들은 어느 쪽도 믿지 못했다. 이면을 본 변호사, 검사들은 판결을 받아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꾸며내고 숨기기 시작했다.
유스티티아의 눈이 다른 의미로 가려진 암흑시대를 걷어내고자 미츠루기는 검찰청장이라는 직책에 올라서자마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나루호도의 결백은 밝혀졌으니, 남은 것은 유가미의 결백뿐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의 결백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를 법정에 세워 사람들에게 보여야 했다. 때가 되자 7년간의 잠적 끝에 추레한 차림으로 법정에 나선 누군가처럼 말이다.
그렇게 미츠루기의 고집과 유능 앞에 차례대로 일이 진행되어갈 때였다. 찾아갈 때마다 문전박대당했던 경찰청에서 돌연 조건을 걸어왔다. 유가미 검사의 통제권은 경찰 관할에 맡기며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을 것. 다른 때였으면 검사는 검사국 관할이며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며 밀고 갔겠지만, 유가미는 검사이기 전에 죄수가 우선이 되어버린 신분이었다. 아무리 미츠루기가 법정까지 당도할 길을 깔아도 경찰청의 인도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설득해내자니 끝을 알리는 마지막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법정으로 모든 추문을, 더 나아가 암흑시대까지 끝내야 했던 미츠루기는 결국 관리 권한을 경찰청에 남겨 놓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당시에는 아쉽기 짝이 없었으나 어느 정도 바구니에서 섞이며 정치를 배운 현재의 미츠루기는 그 선택이 여러모로 옳았다고 회상한다. 검사와 형사가 떼어놓을 수 없는 수사 동료라면 상층부끼리 부딪쳐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경찰청장이 진심으로 죄수 검사의 탈옥이나 돌발 행동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죄수에 대한 통제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보여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결과적으로는 경찰청장이 옳기까지 했다. 기록을 훑으며 영상으로 법정을 복기하던 미츠루기조차 유가미가 수갑을 끊는 순간에는 진심으로 당황했으니.
“…그러나 고압 전류를 사용하는 건 어느 정도 도를 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빠른 시일 내로 다른 방도를 찾아보지.”
잠자코 뒷말을 기다리나 싶던 유가미는 상대의 말이 끝나자마자 돌연 폭소하기 시작했다. 책상을 몇 번이고 탕탕 내려치며 수갑도 신경 않고 웃는 꼴은 딱 봐도 비웃음을 위한 과장된 몸짓이었다. 그러기를 몇 초, 가까스로 웃음을 진정시켰다는 듯 가증스럽게 어깨를 떨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미츠루기는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없이 자신을 깔보는 유가미를 바라보았다.
“청장 나리께서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흉악한 살인범을 민간인 앞에 세우는 일이다. 오히려 그 정도 보안이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러는 자네야말로 수갑에 사용된 전류의 양이 얼마인 줄은 알고 말하는 건가? 당장 그 수갑을 풀어본다면 살이 타 있든지, 피부가 죽어있든지 할 거다. 말이 나온 김에 묻겠는데, 심리가 끝난 후에 적절한 치료는 받았나?”
“헷, 죄수의 수갑을 그런 이유로 푸는 물러터진 멍청이가 있을 리가. 자국이 남았다면 삼도천에 가서도 사형수인 게 금방 들통나겠군 그래.”
결국 미츠루기의 미간이 좁혀지다 못해 구겨진다. 유가미는 자신을 살인자로 폄하하는데 거침없었다. 미츠루기는 그의 무죄를 믿는 자신의 행동이 주변에서는 의심을 살만큼 과한 특혜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그 특혜를 온전히 누리고 이용해야 할 당사자에게 불합리함을 지적받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팔짱을 낀 채 법정에서처럼 검지를 까닥이던 미츠루기는 잠시 대화를 거슬러 올라갔다.
“…처음 수갑 이야기를 꺼낸 건 개선을 요구한 게 아니라 자신이 그런 취급을 받아야 마땅한 살인자라고 말하고 싶어서였나.”
유리 벽 너머에 있는 검사를 상대할 때 가장 기초되는 것은 그가 건네는 호의를 의심하는 일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내가 수갑에 대해 불평할 상대가 청장 나리 말고 더 있나.”
“내 입에서 진실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게 싫은 건가?”
“억측이다.”
“유가미.”
또다시 한번 그가 책상을 내려쳤다.
“흥미가 식었다. 증거도 없는 헛소리를 듣는 건 오늘의 법정으로도 충분해서 말이지.”
피곤하군.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유가미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어떠한 발언도 하지 않겠다는 그의 완고한 뜻이었다. 교묘하게 진실로부터 멀어지려던 유가미를 붙잡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더 이상의 대화를 진행하기에는 실마리가 부족했다.
그를 면회하러 가기로 한 지 다섯 번째의 일이었다.
2028년 7월 23일 오후 4시 30분
자유에 추를 매달아 시간을 통째로 부여잡고 있는 공간도 결국 계절의 변화만큼은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 시멘트 바닥의 냉기가 그나마 더위를 달래는 한여름이었다. 사시사철 걸치고 다니던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소매를 걷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창 건너편으로부터 유가미가 들어왔다. 건너편에 앉아있는 자신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는 게 미츠루기를 맞이하는 그의 일과였으나 오늘따라 그 정도가 깊다. 방문의 이유를 들킨 건 그가 처음 패소했던 날과 똑같았으나 오늘은 어쩐지 수치를 참을 수 없는 미츠루기가 의미 없이 목을 울렸다.
“조서는 읽었다. 우려와 달리 잘 마무리된 것 같아 다행이군.”
“…….”
“크흠.”
“…….”
어제, 가는 곳마다 파란을 일으키는 변호사가 드디어 화려한 복귀에 성공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게 있다면 그 건너편에서 아직 전설이 건재함을 보여주게끔 한 검사가 바로 유가미였다는 것 정도일까. 미츠루기는 언젠가 그에게 진실을 좇는 변호사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다고 계속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두 사람이 마주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에게 푸른 변호사에 관해 그렇게까지 많이 늘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법의 암흑시대를 상징하는 둘이 법정에서 붙은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이래서야 완전히 자식 자랑하는 팔불출 부모 같은 꼴이었다. 유가미는 아예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그 태도가 되레 그의 심기가 얼마나 불편한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자네가 보기에 그 남자는 어떻던가.”
드물게 눈치를 보던 미츠루기는 결국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물었다. 이전 재판으로 그가 승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된 덕분에 지금 그의 기분이 나쁜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지만, 수치스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매일 같이 사형수에게 자랑했던 동화 속 전설만큼 듬직하거나 하진 않더군. 이제껏 해온 논의를 뒤집고 되는대로 허풍 떨질 않나, 범고래를 신문하질 않나…….”
“훗, 재판 내내 이어지는 전제 조건을 손바닥 바꾸듯 뒤집어버리는 주제에 피고인에 대한 믿음만큼은 져버리지 않는다. 그게 그 남자의 장점이지.”
“몇 년만의 복귀였다지? 첫 재판으로 범고래를 맡더니, 발상의 역전이니, 회전이니 하면서 기어코 사건 관계자 전원의 무죄를 증명해버리고 말이야. 특히 궁지에 몰린 주제에 뻔뻔하게 웃는 그 낯짝…….”
“정말이지 변하질 않았군.”
미츠루기는 잠시 당황해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나루호도를 떠올려본다. 증인석에 서서 몇 마디 하는 것만으로도 법정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남자는 역시 변호사 배지를 달고 밑도 끝도 없는 허세로 법정에 휘몰아칠 때가 가장 눈부셨다.
“…그리워하고 있지? 그의 앞에 마주 서서 진실을 좇는 건, 사실 당신이 하고 싶었던 거잖아?”
유가미는 일부러 느릿하게 고개를 위로 들어, 천천히 눈을 떴다. 보통이라면 머리칼로 가려 아슬하게 보이지 않았을 회색빛 눈동자가 평소보다 선명히 보였다. 성격 나빠 보이는 웃음은 여전했지만, 그곳에는 다른 때와 다르게 이해가 배어있었다. 유가미는 전부 다 알고 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한순간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지게끔 만드는 미소였다.
“매일 같이 나루호도, 나루호도 하고 있었으니 알기 싫어도 알아버린다고? 당신은 검찰청장이라는 위치 때문에 하지 못하고 있는 일을 나로 해소하려는 거다.”
“…나는 피고인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 변호사를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헷, 그 허세의 명검은 무엇보다 검찰청장 나리의 자랑이었잖나? 나루 선생은 싸울 가치가 있는 상대다. 법정의 누구라도 인정하겠지.”
상대가 집중하게끔 일부러 말을 끊은 유가미가 살짝 옆으로 턱을 돌렸다.
“이미 과거에도 라이벌로 유명했던 모양인데, 당신이 그를 만나기 위해 다시 법정에 선다고 해도 이해 못 할 사람은 없을 거다.”
전혀 승기가 보이지 않는 무모함에서 시작되어 터무니없는 발언을 내뱉는가 싶다가도, 기어코 화려하게 논리를 역전해 진실에 도달하는 그 모습을 그리워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꼭꼭 감춰진 진실을 찾아내는 남자의 허세가 어느새 미츠루기의 자랑이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었고.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당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산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그동안 노력해준 수고에 그 정도 대가를 받는 게 당연했던 거라고.”
“…그렇군. 이게 자네의 특기라던 심리 조작인가.”
실로 달콤한 유혹이다. 얼핏 협박과 회유를 섞어 쓰는 것처럼 보일 뿐인 말들이 진정으로 위험한 이유는 대상의 욕구를 본인보다 더 빠르게 눈치채고 찔러오기 때문이다.
“진실이라는 단어 앞에 꼬리를 말고 도망갈 때와 다르다 싶더니, 이번에는 그런 수를 준비하고 온 건가.”
“청장 나리나 정도 되는 사내가 원하는 걸 부정하는 모습은 보기 꽤나 민망한걸…….”
“과거를 그리워하는 건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허나 그곳에 매여있기만 하면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 변호사처럼 허세라도 떨어볼 생각인가? 포기하고 솔직하게 인정해라. 그 남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나리께서는 눈빛부터가 달랐다고. 모른 척해주는 내 입장도 슬슬 생각해달란 거다.”
“자네야말로 인정하게. 이 모든 게 무의미한 논의라는 것을. 그 남자는 과거에서 벗어나 이제 막 앞으로 걷기 시작한 참이다. 그것을 고작 추억을 떠올리겠다는 이유로 내가 감히 막을 것 같나?”
미츠루기는 유가미와 완전히 똑같은 이유로 일부러 말을 끊었다.
“훗, 사람을 완전히 잘 못 봤군, 유가미. 아니면 너의 잘난 심리 조작이야말로 억지와 허세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나?”
유감스럽게도 상대를 도발해 페이스를 흩트리고 넘어오게끔 유도하는 것은 유가미가 아닌 미츠루기의 특기였다. 유가미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진다. 그는 항상 진심으로 자신이 겪은 상황이 신난다는 듯 웃고, 폭소를 터트렸으나 진심을 마주 보는 순간이면 언제나 냉소로 가득 찬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겁을 먹고 도망칠 그 본성을 마주할 때, 미츠루기는 진상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간 듯한 기묘한 쾌감을 느꼈다.
“진실 앞에서 도망치겠다면 막지 않겠다. 나는 자네가 감춘 진실을 자네의 의지와 상관없이 꺼낼 예정이니.”
“이 유가미가, 그렇게 둘 것 같나?”
“글쎄, 그게 어려울지 어떨지는 일단 도망치지 않는 대화가 필요하겠지.”
“이제 와서 안부를 주고받기라도 하자는 건가?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못할 것도 없다만. 그러고 보니 이번 재판에는 유독 동물들이 많이 나왔었군. 자네는 분명히 조류를 선호했지.”
“…….”
“그 선호 기준에는 비행 유무가 포함되어있는 건가?”
“하…….”
보란 듯이 화제를 돌린 미츠루기는 뻔뻔하게 웃었다. 이쯤 되면 유가미는 자신이 그를 우습게 봤음을 인정해야 했다. 검사국이 창립된 이래 다신 없을 천재라는 수식어는 그저 놀리기 위해 붙은 게 아닌 모양이다. 제시된 욕망은 정확했을 터다. 그것을 떨쳐내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는 일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자신의 앞에서 스스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대개 두 종류로 나뉘었다. 엄청난 바보이거나, 갖고 있는 욕구에 자신의 해방이 포함되어있거나.
그러나 미츠루기는 어느 쪽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는 멍청하지도 않았고 진심으로 자신의 자유와 석방만을 원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감정의 치부를 찔려놓고도 아예 자각도 못 할 만큼 둔하면서도 말 한마디 섣부르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한 이 남자를 어디에 분류하면 좋을까.
“주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자네가 감옥에서 퍼트리고 있는 소문도 괜찮다만.”
유가미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오늘 이 면회실에 들어온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처럼.
“잠시 눈이 피로한 것뿐이다. 독방에 들어오는 빛 같은 건 없으니까, 이렇게 해가 쨍쨍한 날이면 눈이 제 기능을 못 하거든.”
그러나 대답은 분명하게 돌아왔다. 유가미의 어깨는 직전보다 한결 편하게 내려가 있었다. 미츠루기 또한 처음처럼 대화를 재촉하는 대신 그를 기다리기로 한다. 여름의 더위가 시작돼서인지 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조차 선명한 날이었다. 조용히 있으면 매미 울음소리가 들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팽팽했던 긴장이 풀린 탓일까, 새삼스럽게 그가 독방에 갇혀있는 사형수임을 자각한 미츠루기는 유가미가 조금이라도 창살 밖 일상을 느끼고 향수를 느낀다면 그것으로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에게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게 된 건 우연히 긴을 만난 다음부터다. 이런 꼴을 하게 되고서는 법정에서 챙기는 게 전부지만.”
유가미가 입을 열었다. 눈은 여전히 감고 있었지만, 고개를 돌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미츠루기는 기꺼이 시시한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사소한 진실이라도 섞여 있으면 좋았을 테지만, 없어도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다.
2028년 10월 26일 오후 3시 46분
모든 준비를 다 한 채 기다린다면, 기회라는 건 결국 찾아오기 마련이다. 신중해야 하는 일일수록 초조함을 티 내서는 안 된다. 법정 전술 중에도 가장 기본에 꼽히는 진리를 알면서도 시선이 한 번씩 벽에 걸려있는 시계로 향했다. 이다음에 펼쳐질 일들이 솔직하게 기대됐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법정의 유가미는 난봉꾼 내지는 폭군 같은 이미지로 통했다. 이단아라는 모욕적인 수식어는 그의 난폭함을 담지 못하고 이제 신사적인 포장지가 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멋대로 수갑을 채워 법정에 세우고, 고압 전류로 손목을 지질 때조차 어떠한 불만도, 요구도 없는 남자였다. 법정에서 신나게 깽판 치던 검사는 유치장에서는 독해 보일 정도로 초연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런 사내가 돌연 검사석에 서기를 자청해온 사건이 있었으니, 그 재판이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게 한 시간 채 안 된 일이다.
죽음을 앞두고 미련마저 정리한 남자가 욕심을 낸 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하루 전에 완벽하게 진상 파악을 마친 상태였다. 애써 초조함을 눌러 죽인 채 기다리면 머지않아 구치소의 문이 열렸다.
“기다려도 소용없어. 진은 안 와.”
정확히는 열려야 할 곳의 반대편에서.
“…자네는 누군가?”
“어머, 자기소개는 한 시간 동안 면회실을 독차지하고 있던 쪽이 먼저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아직 닫히지 않은 문 너머로는 그녀를 말리기를 포기한 순경들이 보였다. 아주 지쳐 보였고, 몇몇은 아예 바닥에 누워있기도 했다. 미츠루기는 섣부르게 상대를 추론하는 대신 예의 있는 동작으로 그녀에게 허리를 숙였다.
“미츠루기 레이지, 검찰청장이다. 의도치 않게 시간을 독점한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그가 오면 몇 가지 간단한 질문만 하고,”
“당신이 그 재수 없는 검찰청장이었구나? 듣던 대로 꽉 막혔네.”
“…자네의 이르,”
“유가미 카구야. 아까 말한 대로 진은 오늘 안 와. 아마 일주일간은 면회 거부할걸? 억지로 끌어온다면 이를 뽑지 않는 한 입을 여는 일은 없을 테고. 아니, 이를 뽑아버리면 입을 여는 소용이 없나?”
깔깔깔 웃어대는 와중에도 눈매는 여전히 서늘한 채다. 그 익숙한 가식과 험악함에 미츠루기는 유가미의 비뚤어진 성격이 감옥에 있어서 그렇게 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카구야에 대해서는 이미 서류로 몇 번 마주한 적 있었던 미츠루기는 무례를 하나하나 지적하는 대신 본론으로 넘어가기를 택했다.
“그가 오지 않는다는 건 무슨 말이지?”
“한 시간이나 바람맞았으면 눈치챌만한데.”
“재판이 끝난 다음에 바로 구치소로 오게끔 하라고 형사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죽는 것보다 월급이 깎이는 게 낫다고 생각했겠지.”
“…….”
검찰청장님이랑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방해하지 마. 쓰러져있는 순경들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전한 카구야가 문을 닫았다. 실내는 금방 조용해지고, 조금 전까지 얼굴에서 불길하게 맴돌던 장난스러움은 단번에 사라진다. 그녀는 경찰들뿐만 아니라 빈 면회실에도 꽤 익숙한 사람 같았다.
“…나와 할 이야기라고.”
“진을 담당하는 형사에게서 들었어. 최근에 계속 면회를 오는 높은 사람이 있다고. 당신들에게 있어서 그 일은 이미 끝난 사건일 텐데, 계속 진을 찾아오는 이유가 뭐지?”
유가미를 담당한 형사는 투철해 보이는 정의감과 달리 입은 제법 가벼운 모양이다. 아니면 나름대로 그를 걱정하고 있기에 카구야에게 말했거나. 단어 사이사이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적의는 그녀가 보낸 7년의 세월 동안 법을 향해 쌓아온 분노였다. 미츠루기는 감춰진 진실이 만드는 악몽에 갇혀있는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불청객을 쫓아내기 위해 이미 끝난 사건이라 단정 지어 말하고 있었으나, UR-1호 사건은 7년 전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마음속에서 단 한 번도 끝난 적이 없었을 것이다.
UR-1호 사건과 7년의 세월은 감옥의 안과 밖에 있는 두 명의 유가미를 바꿔놓았다. 그러나 안에 있는 이가 스스로를 닳게끔 내버려 뒀다면, 밖에 있던 이는 그 무엇보다 날카롭게 가시를 세운 채, 어떤 일에도 꺾이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7년 전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함이다.”
“이제 와서 진실을 밝히겠다고?”
“이제라도 밝히는 것이다.”
“그렇게 밝혀낸 진실이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몰라. 정말로 진이 했다고 확증만 얻고 끝날지 모르지. 걔도 맨날 말하잖아? 내가 죽였다고.”
“상관없다. 진실은 언제나 아름답다는 같잖은 이상론을 펼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자네의 말대로 그가 정말로 범인이 맞다면, 그땐 법의 암흑시대를 걷어낼 다른 방도를 찾겠지.”
“당신 진짜 검찰청장 맞아? 보기보다 대책 없는걸.”
“이상론과 별개로 그의 무죄가 진상의 일부분임을 확신하고 있으니까. 자네야말로 보기보다 독하군. 아무리 나를 시험하기 위함이라 해도, 유가미가 수감된 이후로 매달 재심소장을 보낸 사람이 그가 진범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
“…….”
카구야의 시선이 매서워진다. 그러나 조용히 상대를 압박해오는 위협에 익숙해진 미츠루기는 어깨만 과장되게 으쓱일 뿐이었다. 그녀는 악몽을 찢어발기고 감춰진 진실을 쟁취해내고야 말 사람이다. 미츠루기는 그런 사람의 도움을 받을지도 모르는 지금을 놓칠 생각은 없었다.
“판단이 됐으면 오늘 그가 오지 않은 이유에 대해 자세히 말해 줄 수 있나. 나로서는 아직 확신이 서질 않는군.”
“…진이 피하는 건 뻔하지.”
면회자를 위해 준비된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카구야는 턱을 치켜들었다.
“공주님 때문이야. 듣자 하니 오늘 재판 담당 변호사도 공주님이었다면서?”
한 마디 더 붙은 뒤에야 미츠루기는 비로소 그녀가 말하는 인물이 누군지 눈치챘다. 나루호도의 두 번째 제자이자 신참 변호사 키즈키 코코네. 미츠루기 또한 유가미가 나서서 사건을 담당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그 소녀가 관련되어 있을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소녀는.
“7년 전부터 진은 공주님과 관련된 일이면 분별력이 떨어졌어. 마리의 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되기도 힘들 텐데.”
“…그에 비해 자네는 키즈키 교수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아끼지 않는 것 같군.”
“당연하지. 7년 전에 마리를 죽인 범인이니까.”
카구야는 한 번 드러낸 적의를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미츠루기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답지 않게 애를 써야만 했다.
“발언을 조심하게.”
“진실은 언제나 아름답다는 이상론을 펼치려던 게 아니라며? 이게 당신이 원한 진실이야. 7년 전, 진은 그 애를 지키기 위해 모든 걸 뒤집어썼어.”
“증거는 있나?”
“진의 태도만 봐도 답이 나오지. 사형이 집행되기까지 석 달도 남지 않은 주제에 사건과 공주님의 이름이 동시에 나오기만 해도 입을 닫고 숨어버리는데, 이보다 더 명확한 게 필요할까?”
“법정에서는 증거가 전부다. 그런 어림짐작으로는 판결이 뒤집히지 않아.”
“하지만 당신의 시각은 뒤집혔지? 검찰청장씩이나 되면 7년 전 사건을 파헤쳐보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다시 한번 봐봐. 놓친 게 어이없을 정도로 뻔하게 보일걸.”
만약 이것이 정말로 법정이었다면, 그녀의 발언은 악의성이 짙고 객관성이 떨어져 증언으로 채택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명백하게 느껴지는 적의를 한 번 걸러내고 나면 오늘 당사자를 만나 풀어야 했던 의문점들이 찝찝하게나마 해소되었다.
기실 다른 재판보다 유독 무르던 오늘 그의 태도가 무엇보다도 카구야의 말에 신빙성을 실어주고 있었다. 성격이 나쁜 건 여전했지만, 법정을 학원으로 착각한 증인들의 난동을 방관하거나(유가미의 평소를 보았을 때, 그것은 방관이 맞았다) 궁지에 몰리자 추하게 발악하는 범인을 손쉽게 제압하는 것은 변호 측에 협력하는 검사에게나 기대할 모습이었다
유가미가 사건을 맡겠다고 빠르게 선점하지 않았더라면 담당은 우연인지 다행인지 체포 당시에 현장에 있었던 가류 검사가 맡게 되었을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테미스 법률 학원은 법의 암흑시대와 좋지 않은 관계로 긴밀해 있었다. 이전부터 UR-1호 사건과 함께 법률 학원을 주시해오던 미츠루기는 교사 살해사건이라는 상당히 예민한 사안에서, 더 이상 암흑시대가 주도권을 가져가는 일이 없게끔 사건이 마무리되도록 보다 변호사와의 협력이 가능한 검사를 배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유가미는 미츠루기가 손을 쓰기도 전에 먼저 체포를 담당하게 된 반 형사로부터 사건을 건네받았다. 마치 이 사건을 맡는 건 자신이 당연하다는 그 태도에 굳이 권력을 개입시키지 않은 이유는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여러 가지를 걸어버린 탓이었다. 유가미가 감춰둔 진실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와 계산이 앞서 있던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마주하게 될 진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받아들일 준비 또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주하게 된 파편은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코코네는 나루호도의 소개를 통해 몇 번 마주한 적이 있었다. 타인의 마음을 들을 수 있다던 그녀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 넘쳐나는 법정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거짓 없이 솔직하게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나루호도만큼이나 강한 믿음을 가지고 의뢰인을 대했다. 부족한 경험만 채워진다면 금세 그와 똑같은 신념과 의지를 품고 법정을 휘젓고 다닐 것이다. 어떤 붉은 변호사가 그러하듯이.
그런 코코네가 정말로 모친을 죽인 진범일까?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팔짱을 끼고 있던 미츠루기는 검지를 까닥였다. 가능성이 제시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의심 또한 믿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이다. 그녀가 정말로 범인이라면 동기나 방법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봐야만 했다. 그리고 최초로 발견된 사건 현장에 대해서도.
“진이 오지 않을만했네.”
미츠루기의 상념을 깨고 들어온 것은 카구야의 목소리였다.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그녀는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눈빛이었다. 본능적으로 유가미 카구야가 보이는 호의를 의심한 미츠루기는 뒤늦게 그녀에게 제일 먼저 물었어야 했던 것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면회실에 온 것은, 나를 만나기 위함이었나?”
“보기보다 자만이 심하구나. 한 시간씩이나 면회실을 독차지하고 있는 놈의 얼굴이 궁금해서 들어왔더니 당신이 있었을 뿐이야.”
“지적할 모순이 너무 많은데, 그냥 솔직하게 말해 줄 생각은 없는 건가?”
“어머, 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 건 당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하게 된 생각이라고 말해도?”
“…무슨 뜻인가.”
“진이 최근에 어떤 사람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했거든. 계속 주어를 뭉갠 탓에 형사가 말한 높으신 분과는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당신은 알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진이 당신을 무서워한다는 걸.”
미츠루기의 얼굴이 기분 나쁜 농담을 들은 사람마냥 구겨졌다. 크라바트가 자아내는 우아함이 무색해질 만큼 좁혀지는 미간에 카구야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저번에는 귀찮다고 했었나. 자꾸 집요하게 물어 오는 게 거슬리고 성가시대. 근데 거절할 수도 없어서 곤란하다고. 그래서 처음엔 그 형사님이라고 생각했지, 뭐야.”
“이야기에 어디에도 무섭다는 말은 없다만.”
“그렇게 진을 대하고도 몰라?”
“…….”
미츠루기는 정말로 모르는 얼굴이었다. 카구야가 다시 한번 폭소를 터트린다. 그를 설명할 때 잠깐 주저하면서도 둔하다는 말을 빼놓지 않고 꼭 덧붙였던 제 동생이 떠오른 탓이다.
사형집행일이 석 달도 남지 않게 되고, 카구야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유가미의 면회를 찾아갔다. 재심 요청을 설득하기 위해서. 하얗게 새버린 머리가 어디까지 자랐는지 보기 위해서. 어쩌면 오늘은 문득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몰라서. 카구야의 이유는 다양했으나 유가미는 언제나 똑같았다. 재심에 관해 이야기하면 헛수고라며 비웃었고 코코네에 대해 캐물으면 입을 다물었다.
유도신문 같은 건 성미에 맞질 않았다. 그가 생각을 고쳐먹길 기다릴 시간도 얼마 남지 않게 되고, 기어코 유리 벽을 부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할 즈음 7년 만에 그가 먼저 대화의 주제를 던졌다. 감옥의 생활이 어떤지 결코 먼저 이야기하지 않는 유가미는 이쪽에서 말을 건네지 않으면 시간이 다 될 때까지 침묵을 지키다가 돌아가는 일이 잦았다. 그랬던 그가 먼저 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거기다가 툭 꺼내놓은 주제는 놀랍게도 그의 면회를 오는(자신과 반이 아닌 다른)누군가에 관한 이야기였다.
쓸데없이 7년 전 사건을 파고 다니는 정의감 넘치는 나리. 성가시고 가끔은 거슬리다 못해 귀찮다는 푸념이 대부분이었지만 카구야는 그가 진정으로 귀찮은 사람을 대할 때를 알고 있었다. 쫓아내고자 했다면 진작 했을 것이다. 아무리 검찰청장이라고 한들 처형을 앞둔 사형수가 무엇이 두렵겠는가. 그러나 누군가에 대해 묘사를 늘어놓을 때면 유가미는 꽤나 들뜬 것도 모자라, 자각 없이 다음을 언급했다. 크게 재밌지도 않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전부 들어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유가미의 악담은 정도가 짙어졌으나, 여전히 찾아오는 것을 거절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 모순된 행동에서 짐작하고 있던 이유는 상대를 직접 보는 순간 확신으로 변했다. 카구야는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타인의 심리 따위를 궁금해한 적 없었으나, 동생의 감정만큼은 항상 손에 잡힐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7년 동안 감옥에서 숨기고 있던 진실을 찾아낼지도 모르는 이 남자를 두려워하고 있다. 오늘 진은 오지 않은 게 아니다. 도망친 것이다. 직접적으로 코코네를 위하듯이 굴어버린 자신을 절대 놓치지 않을 이 남자로부터. 둔해 빠져서 상대방의 말을 듣질 않는 고집을 피우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새 대화의 흐름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서 상황을 짚어가는 이 남자라면 진이 집어삼킨 진실을 끄집어낼지도 몰랐다.
“그가 정말로 나를 무서워한다면 순순히 사건의 진실이나 말해줬으면 좋겠군.”
미츠루기는 농담에 맞춰주겠다는 듯, 어딘가 한탄이 섞인 투로 말했다. 카구야는 대답하는 대신 자신의 동생이 처음으로 사람을 무서워하던 때를 떠올렸다. 날카로운 눈매에 과묵하기까지 해서 오해받으면 받았지, 결코 타인을 겁내본 적 없던 놈은 마리의 앞에만 서면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면 모든 게 다 들키는 기분이라고. 죄인을 심판하는 일을 업 삼은 주제에 웃긴다고 생각했다. 바빠서 얼굴 볼 시간도 없다더니, 결국 매일 같이 센터에 들리게 된 꼴도.
“아니면 당신을 사랑하는 걸지도 모르지.”
정색하는 얼굴도 그때마다 다 다르게 생겼구나. 허무한 감상평을 떠올린 채 카구야는 이제 자신을 노려보기까지 하는 그 눈을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 단순히 농담으로 취급하고 넘겼다면, 이번에는 이유를 파악하려는 얼굴이었다.
마리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이름에 달을 품고 태어난 사람답게 무척이나 고귀한 존재였다. 진의 첫사랑이 시작과 동시에 끝을 맺은 건 연적이 남매여서도, 그녀에게 딸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욕심을 낼 줄 모르는 놈은 사형판결마저 깔끔하게 받아들였다. 이 하늘에서 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언제까지고 그녀의 사진을 치워둘 수 없는 카구야는 결코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그를 살릴 수만 있다면 얄팍한 이해라도 이용할 수 있었다.
“진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긴다면 뭔가 달라질지도 몰라.”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면 이만 가겠다.”
미츠루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카구야는 그를 붙잡는 대신에 고개를 돌려 여전히 비어있는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마리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마저 뭉툭해지는 와중에도, 하나 남은 가족은 살아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말만큼은 무뎌지지를 않았다. 그것은 진이 살아 나와서까지 마찬가지일 것이다.
짧아진 해의 끝이 면회소 안을 아슬하게 비추고 있었다. 미츠루기가 나간 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있던 카구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2028년 11월 4일 오후 1시 11분
“어쩐지 초조해 보이시네요.”
상념에 빠진 것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답지 않게 구두 굽 소리가 나지 않게끔 주의하던 쿄야가 결국 입을 열었다. 예민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 상황을 자신의 상관이 만들어내고 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한평생 남의 눈치를 볼 일 없이 살아온 쿄야였으나 조직의 상하 관계까지 무시하고 사회생활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릴까 싶어 대기실을 잘못 찾은 척, 시끌벅적한 변호사들이 있는 대기실의 문을 열었지만 철저한 공사 구분 앞에서는 소용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번 일로 유가미 검사에 대한 검사국의 발언권이 좀 더 강해질 것 같던데요.”
“사고를 물고 늘어진다 한들 담당 형사의 인도는 완벽했다. 오히려 경찰청에서 선례를 얻은 셈이지.”
“역시 정치와 재판은 다르군요.”
변호사들에게는 사적인 일로 법정에 왔다고 했지만, 검찰청장이 사적인 일로 법정에 왔을 리가 없다. 완전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또 아니었지만 적어도 쿄야가 지금 검사국에서 들은 일을 생각해보면 그러했다.
악명 높은 죄수 검사가 구치소에서 법정으로 호송되던 중에 불의의 사고가 났다.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검사국이고 경찰청이고 발칵 뒤집힌 것과 달리, 현장에 있던 담당 형사의 처신으로 다른 소동 없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다고. 결과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 헤프닝이었으나, 아무래도 검찰청장씩이나 되는 위치에 있으면 좋게 끝난 일이어도 결국 일인가 보다.
“계속 그렇게 미간을 구기다간 검찰청장님의 팬들이 슬퍼할 겁니다.”
“…생각할 것이 좀 있어서. 그보다 이번에 자네의 재판에 관해서 말인데, 조서를 읽어보니 아직 피고인의 범행을 입증시키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더군.”
“오늘 재판으로 확실히 밝힐 예정입니다만, 제 사건까지 신경 써주고 계신 줄은 몰랐네요. 듣자 하니 요즘에는 국가 단위로 신경 쓰는 게 많으시다던데.”
“훗, 상급 검사들의 사건을 살피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예나 지금이나 검사국은 천재란 칭호에 꽤나 후한 편이었다. 그렇게 칭송과 기대를 어깨에 메고 이 바닥에 들어온 신예 검사들은 번번이 이 남자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유일하게 미츠루기의 옆에 서서 천재라는 소리를 나눠 들을 수 있던 쿄야는 진정한 재능 앞에 좌절하는 검사들이 결국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았다.
최근에 검찰청장을 폄하하는 말들의 실체는 그날 좌절한 검사들의 시기와 간절함이다. 이 남자가 자신들과 같이 추악한 인간이었다는 증명이 필요한 패배자들의 발악. 사형수의 신분으로 법정에 서는 검사의 뒤에 불합리한 특혜가 있음은 검사국 내에서 공공연하게 퍼져있었다. 재판장을 협박하고, 증인을 위협해서 유죄를 받아내는 죄수 검사를 세우는 건 검찰청장이 암흑시대를 권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말들이 스스럼없이 나돌아다니는 와중에도 검찰청장은 자신이 고집하는 길을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의도치 않게 은사의 사건을 빼앗기고, 그 법정을 관람했던 쿄야는 한 번의 방청으로 죄수 검사에 대한 말들이 전부 부풀려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악의를 가지고 전해지는 소문이 무엇을 집어먹고 몸집을 키우는지, 가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겪고 있던 쿄야는 굳이 따지자면 검찰청장의 편에 가깝긴 했다. 거기다 법의 암흑시대를 불러들인 것에는 미약하게나마 책임을 느끼고 있었고.
“제 대기실에 도착했네요. 검찰청장님의 기대에는 승소의 세레나데로 보답해드리죠.”
“흠, 기대하지.”
“…그리고 유가미 검사라면 아마 괜찮을 겁니다. 몸에 불편함은 없어 보였으니까요.”
말을 마친 쿄야는 대기실 너머로 사라졌다. 돌려줄 말을 찾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던 미츠루기는 뒤늦게 그가 최근까지 사람의 기분과 감정에 아주 예민한 직업을 갖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얼핏 무례할지도 모르는 말들을 농담하는 것처럼 가볍게 말하는 재주가 있는 남자는 무거운 주제를 날카롭게 파고들되 아프지 않게끔 건드리는 솜씨마저도 탁월했다.
나름대로 평화로운 오전의 업무 시간. 평소같이 업무를 이유로 울릴 내선 전화를 받아 들어보니 상대는 평범하게 타인에게 전화를 걸 수 없는 인물이었다. 잠깐 법정에 서볼 생각은 없나? 청장 나리. 어떻게 전화를 걸었는지는 차치하고 갑자기 무슨 소리냐 캐물으면 별것 아니라는 듯 호송 차량의 사고 소식을 전했다. 무언가 더 물을 새도 없이 20분에서 30분 정도 걸릴 것 같다는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연결이 끊겼다. 다시 울린 전화 너머에는 N012번 죄수의 호송차 사고가 일어났다는 경찰 관계자의 목소리뿐이어서, 미츠루기는 잠시 자신이 전화를 잘못 받았다거나 꿈을 꾼 것은 아닌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탈출이라든지 탈옥이라든지 하는 말을 그는 반드시 법정으로 온다는 말을 일축한 뒤, 스포츠카에 올라탈 때까지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했다.
사고가 났다면,
당연히 법정이 아니라 병원으로 가야 하는 게 아닌가?
*
쿄야갸 떠나고 30분 정도가 지나자 피고인들을 연행할 때나 쓰는 법정 뒤편 복도의 문이 열렸다. 계속 중얼거리며 돈의 단위를 세는 뚱뚱한 남성이 먼저 끌려 나가고, 뒤이어 수갑의 상태를 확인하는 담당 형사와 유가미의 모습이 보였다.
“…애초에 수갑을 부수지 않으면 그렇게 귀찮은 일도 없을 거 아닌가.”
팔짱을 낀 채로 수갑을 갈아 차는 광경을 바라보던 미츠루기는 진부한 안부를 묻는 대신 모순을 지적하듯 말을 던졌다.
“헷, 변호인의 헛소리를 듣는데 이 정도 분풀이는 해야지. 거기다 저승의 길동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거든.”
“하하하!! 수갑이 끊어져도 그를 통제할 수단은 확실하게 내 손에 있으니 너무 걱정할 것 없다네!”
특유의 하얀 정장이 오늘따라 눈이 부신 기분이 들어 미츠루기는 살짝 고개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실내에서도 벗지 않는 선글라스 너머에서 정의로 빛나는 눈은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한 신뢰감을 갖게 한다. 등 뒤에 서 있는 사형수의 수갑을 마저 채우는 것을 잊고 웃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반 고조는 다른 형사들과 달리 월급 책정 문제로 의견을 굽히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 그를 통제할 수단은 오로지 그가 주장하는 정의뿐이다. 부담스러운 눈빛은 마주하기보다 잠시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고개를 돌려 빨리 상황을 마무리하라고 무언의 언질을 건넨다.
“수갑의 교체가 끝나면 잠시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오랜 시간을 끌지는 않을 테니 근처에서 대기하도록.”
“흐음, 유가미의 호송 사고가 일어난 지 6시간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감시를 그만두는 일은 곤란하다!!”
“이것도 정의에 관한 일일세.”
“저, 정의라고!”
“그러고 보니 긴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군. 아저씨, 대기하는 김에 확인을 부탁하지. 지금쯤이면 시답잖은 허풍쟁이의 눈알 포식을 끝냈을지도 모르겠어.”
“법을 수호하는 법정에서 그런 극악무도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이 반 고조가 용서치 않는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고 주의하기도 전에 반이 먼저 복도를 뛰어갔다. 호쾌하게 웃는 유가미의 태도에 그의 발언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고 있으면 반 형사가 있던 자리에 떨어져 있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허리를 숙여 간단하게 집은 것은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조작 스위치였다. 검은 몸체에는 별다른 설명 없이 단순하게 on/off 표시만이 있을 뿐이었다. 요리조리 살펴 용도를 파악하려는 미츠루기와 달리 유가미는 슬쩍 넘겨 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걸 칠칠찮게 흘리기나 하고 말이야. 이건 다음 달 월급책정을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잖아. 청장 나리, 수갑을 완전히 채우기 전에는 켜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수갑도 완전히 채우지 않고 간 건가, 그 형사는.”
“그러게나 말이다. 내가 도망친다면 곤란해질 사람들이 꽤 많은 걸로 아는데.”
유가미의 얼굴 위로 불길한 미소가 번진다. 다행히 수갑은 왼쪽 손목에 간신히 걸쳐있는 아귀를 맞닿게만 하면 끝이었다. 어려운 것 없는 작업이다. 상대가 반항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둘 뿐인 복도에서 적막이 감돌았다. 무엇 하나 미츠루기에게 불리하지 않은 게 없었다. 신장은 자그마치 10cm나 차이가 났고, 상대는 저 수갑의 사슬을 힘으로만 끊어내는 기행을 부리는 자다. 의지할 것은 손에 들린 스위치 하나뿐이었으나, 미츠루기는 믿는 것은 그가 도망치지 않으리라는 근거 없는 문장 한 줄이었다.
당장이라도 일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팽팽했다. 부러 고개를 숙여 이쪽을 위협적으로 노려보는 유가미의 눈빛은 도주를 예고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어리석게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믿음이 확신으로 변하면 입보다도 손이 먼저 움직였다. 미츠루기는 스스럼없이 그의 사슬을 잡아끌어 손을 앞으로 내밀게끔 하고는, 갑작스러운 힘에 흘러내리듯 떨어진 왼쪽 수갑을 그의 손목에 마저 채웠다. 법정에 검사로서 출두하는 사형수를 위해 특별히 제작되는 수갑은 헐겁거나 꽉 조이는 기색 없이 딱 맞아들어갔다. 힘을 주면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맑게 철이 얽히는 소리가 울렸다.
“그런 일로는 풀리지 않는 수갑이, 이런 일로는 풀리나 보군.”
“헷,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 이야기는 됐으니 용건이나 말해라.”
“…사고가 났음에도 법정에 온 이유에 대해, 몇 가지 가설을 세워두고 있었다. 첫 번째는 변호사였지.”
유가미는 오늘 상대편에 서는 변호사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기실 법조인이라면 이 김빠지는 사건의 변호인이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피고인이 그 나루호도 류이치의 딸이었으니. 알지 못했기에 화를 입은 것은 돈에 미친 범인뿐이다.
그의 재판에는 언제나 제자들이 조수로 뒤따른다. 카구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미츠루기는 아직 그것을 진실이라 단정 짓지 않았다)를 토대로 UR-1호 사건의 검토를 끝낸 미츠루기는 아직 그가 7년 전에 머물고 있음을 알았다. 그날의 사건으로 유가미는 파괴 공작 및 국가 반역 혐의까지 짊어졌다. 오늘날까지 증거가 명확하게 밝힌 그의 죄는 살인사건뿐이었으나, 하나같이 혐의를 받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죄들이다. 그것을 검사인 그가 모를 리 없음에도, 유가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길을 택했다. 오로지 코코네를 지키기 위해서.
“자네는 키즈키 변호사에 대해 꽤나 각별한 애정을 가진 듯했으니.”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군.”
“어디까지나 내 가설일 뿐이다.”
미츠루기는 UR-1호 사건과 그녀를 연관 지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증거 없이 깊이 파고들었다간 그는 입을 다물고 이번에야말로 도망칠 것이다. 아직도 진실은 멀리 있었으나, 지금의 미츠루기는 그것에 당도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오늘 피고인의 변호사는 그녀가 아니라 나루호도였다. 그가 언제나 재판에 제자를 데리고 나온다고 한들, 오늘 그녀가 올지 안 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해 첫 번째 가설을 지웠다만, 자네의 의견을 따라주지. 변호사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두 번째 가설은?”
“자네가 사실 새보다도 고양이를 좋아했다든가.”
험악한 농담에는 눈물 맺히도록 웃는 주제에 타인의 농담에는 한없이 냉철한 게 유가미라는 남자다. 큰 반응은 기대하지 않았으나 최소한의 분위기 환기조차 되지 않은 지금, 미츠루기는 소식을 전해 들은 순간부터 어딘가에 매달려있던 이질적인 기분의 정체를 깨닫는다.
“자네에게는 반드시 법정에 서야만 하는 이유가 달리 있다든가.”
“일하라고 세워둔 건 청장 나리가 아니셨나.”
“악독하게 부려 먹은 기억은 없다만.”
“헷, 사건을 받아놓고 농땡이를 부릴 생각은 없다. 애초에 큰 사고도 아니었기에 바로 법정으로 왔을 뿐. 이런 걸로 유난을 떠는 걸 보니 검사국에도 오죽 인재가 없나 보지?”
“그렇다면 방금은 왜 도망치지 않았나?”
수갑의 사슬끼리 부딪쳐 소리를 냈으나 미츠루기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 목소리에는 자조가 섞여있었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했다. 아무런 메리트도 없이 순순히 전류가 흐르는 수갑을 차고 법정에 서는 게 단순히 변덕 때문일 리가 없는데.”
“…끝까지 모른 척 하는 게 그 미간에 도움이 됐을 거다.”
“대답해라. 자네는 대체 무엇을 위해 검사석에 서 있는 건가.”
“우연히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뿐, 처음부터 뭘 노리고 자시고 한 건 아니라고.”
유가미는 체념하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시간이 다 될 때까지 버티면 됐던 면회실과는 달랐다. 이번에도 대답을 회피하거나 침묵한다면 오늘 중으로 독방으로 돌아가지 못할 게 분명했거니와 언젠가 검찰청장에게만큼은 반드시 말해야만 했던 일이기도 했다.
“…나는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하는 놈이 있어서 말이지.”
“부탁인데,”
유가미의 말이 끝나자마자 미츠루기는 한숨을 쉬고 이마를 짚었다.
“망령이라고만 하지 말게.”
“이미 알고 있으면서 묻기는. 은근히 취미가 나쁜 거 알고 있나?”
“7년 전 자네의 파일에 그 명칭이 안 들어간 서류가 없던 데다가, 자네가 최근까지 감옥에서 퍼트리고 있던 말들도 너무 의미심장했으니까.”
미츠루기는 잠시 안경을 벗어 자신의 콧잔등을 누르는 것으로 두통을 완화하려 노력해야만 했다.
세계적인 국제 스파이, 통칭 망령. 밝혀진 본명도 얼굴도 국적도 무엇도 없는 존재이자 감옥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유가미가 쫓고 있던 인물이었다. 미츠루기가 이 모든 일들을 추진하는데 기반이 된 그에 대한 신뢰는 거물을 좇던 신예 검사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유가미는 경력을 이제 막 쌓아 올라가기 시작한 젊은 검사였다. 교류하던 국제 수사관과 국제 검사로부터 종종 망령에 대해 전해 들었던 미츠루기는 깔끔한 스파이의 뒤처리에도 포기하지 않고, 위협을 느낀 상대의 불길한 협박에도 굴하지 않는 그가 아주 적재적소에 배치된 인재라고 생각했다. 유가미는 검사 신분으로도 형사들과 함께 일선에 서며 스파이의 타깃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린다면 직접 나와서 상대해보라는 대담한 행보를 보이기까지 했다. 사건의 보안 유지 때문에 당시 상급 검사에 지나지 않았던 미츠루기가 전부를 알지는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그때 유가미 진이라는 검사는 오로지 망령을 잡아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일념으로 빛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7년 전, 자네의 사정을 알던 몇몇은 이렇게 말하더군.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을 좇다가 결국엔 미쳐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망령은 허상 같은 게 아니다.”
“알고 있다. 자네가 잡혀들어간 뒤로도 지금까지 경찰청과 협력해서 계속 쫓고 있었으니까. 망령은 지금 국내에 있다. 아마 복합적인 이유일 테지만… 자네는 상관이 없기를 바랐는데.”
“헷, 아무래도 저승길이 외롭지는 않을 모양이야.”
유가미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눈가를 짚던 미츠루기의 손이 멈춘다.
“망령이 잡혀도, 자네의 사형은 집행된다는 소리인가.”
카구야로부터 가능성을 제시받았을 때부터 넘어가지 않던 의문점이 기어코 고개를 든다. 어째서 7년 전 사건의 혐의를 망령으로 돌리지 않는가. 카구야라면 망령에 대해 모를 수도 있다. 비록 키즈키 교수와 같이 우주 개발 프로젝트의 중역 중 한 명이었던 그녀가 당시 시끄러웠던 망령의 존재를 몰랐을지는 미지수지만, 주변을 개의치 않는 그녀의 성격상 정말로 모른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유가미라면.
망령을 쫓는 주요 관계자 중에서도 가장 유능하고, 대범했으며, 당장 보복이 들어와도 이상할 것 없던 유가미는 어째서 망령의 개입 가능성은 철저하게 논외로 두는가.
“죄를 저질렀으면 대가를 치르는 게 이 나라 법이다.”
단순히 놓쳤을 뿐인가.
“설마 7년 전 사건의 진범이 망령이라든가 하는 형편 좋은 꿈이라도 꿨나?”
아니면 정말로 진범이 그녀이기 때문인가.
“UR-1호 사건과 망령이 무관계하다면, 자네는 어째서 계속해서 망령을 쫓고 있는 거지?”
“내가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을 해결하고 가는 게 검사로서 마지막으로 보일 수 있는 예의라 생각했을 뿐이다.”
“유가미, 자네가 검사로서 해야 할 일은 사건을 마무리 짓는 게 아니라 7년 전에 감춘 진실을 말하는 거다!”
“글쎄, 딱히 감춘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유가미!!”
“내가 죽였다.”
이때까지 꼿꼿하게 세운 허리를 숙여 미츠루기와의 눈높이를 맞춘 유가미는 원망스럽다는 듯 자신을 노려보는 회색빛을 끈질기게 쫓았다. 진실을 피하고 있는 게 누구인지 똑바로 보라는 무언의 반론이었다. 미츠루기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세뇌라도 시키는 듯 자신이 범인이라 주장하는 남자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차마 가늠도 되지 않는 헌신은 끝이 보이질 않는다.
“자네에게 남은 것은 기만에 불과한 예의뿐인가.”
“…….”
“…자네가 살아야 할 이유가 정말로,”
나지막하게 꺼낸 말을 끊는 건 매의 울음소리였다. 대화의 끝을 알리는 법정만의 종소리였다. 그때까지도 시선을 피하지 않던 유가미가 다시 허리를 펴고 섰다. 낮게 비행하던 매가 주인의 어깨에 안착하고 나면 얼마 가지 않아 날짐승을 쫓아 달려온 형사가 그의 옆에 섰다. 매와 비슷한 속도로 달렸을 반은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미츠루기는 그 시끄러운 입이 열리기 전에 자신이 주운 스위치를 건넸다.
“이만 돌아가지. 호송 차량은 준비해두었으니 이번에도 죄수를 끌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든가 하는 기행은 삼가게.”
스위치를 건네받으며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 깨달은 반이 눈에 띄게 가라앉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유가미는 바로 직전까지 대립하던 감정마저도 거짓이었다는 듯 보기 드문 얼굴로 산책을 마친 매의 턱부리나 쓰다듬었다. 모든 흥미가 새의 쪽으로 쏠린 모습이었다. 어느 쪽이든 대답하지 않는 그들에게 끝까지 형식적인 인사를 남긴 미츠루기는 이내 망설임 없이 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붉은 코트가 멀어질수록 유가미의 손가락이 서서히 느려진다. 주인의 이상을 눈치챈 매는 멈춘 손길을 재촉하는 대신 아프지 않게끔 마디를 부리로 쪼았다.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유가미는 긴에게 뻗은 손을 내리는 것도 잠시, 자신의 목 주위를 매만졌다.
“유가미, 괜찮나?”
보기 드문 유가미의 행동에 반이 물었다.
“타이를 너무 조여서 맨 모양이다.”
슬슬 돌아가고 싶은데. 유가미가 자연스럽게 반을 재촉했다. 정의의 임무를 질질 끌 이유가 없는 반이 곧 앞장서서 죄수를 호송한다. 재주와 요령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남자가 수갑을 채워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라서인지 손목을 잇는 사슬이 계속 부딪쳐 소리를 냈다. 족쇄를 찬 것은 양손이었음에도 자꾸만 목이 조이는 것 같았다.
답답했나?
이제 와서?
2028년 12월 15일 오후 11시 32분
1년이 끝나기 직전에 12월은 여름과는 다른 생기를 띠고는 한다. 길거리 가로수들은 벌써부터 크리스마스를 맞아 앙상한 나뭇가지에 꼬마전구를 걸쳤고, 가끔씩 걷는 도심에선 정겨운 캐럴이 들려왔다. HAT-1호의 무사 귀환을 축하한 세상이 그다음으로 가장 기다리고 있는 것은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는 것뿐이다. 이렇게 평화로운 하루가 매일 지속된다면 일주일 뒤에 유가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독방에 남은 것은 겨울의 냉기뿐이다. 창살 맞은편 벽에 기댄 미츠루기는 말없이 그가 보고 있는 서류를 바라보았다. 유가미는 달이 바뀌자 본격적으로 면회를 거절한 채 독방에 틀어박혔다.
“…오늘도 멍청하게 서 있다가 갈 생각인가?”
“자네가 말을 걸지 않으면 그렇게 되었겠지.”
유리 벽 대신에 창살을 사이에 두게 된 미츠루기는 더 이상 예전만큼 많은 말들을 늘어놓지 않았다. 타인을 다루는 데 능숙한 사람들은 대개 대화에서 직접적인 말보다 효과 있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주제를 이어가고 싶지 않을 땐 입가에 손을 올린다든가, 동의할 때는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든가, 상대를 추궁하거나 기다릴 때는 그저 응시해온다든가 하는 것들. 7년의 고독을 홀로 버텨온 유가미는 최근 들어 미츠루기와의 적막을 견딜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불리해지면 입을 다물었던 처음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가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게 껄끄러웠다.
부러 천천히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렸다. 자연스럽게 미츠루기의 시선이 제 얼굴에서 손으로 이동한다. 그 시선 앞에 놓일 때마다, 유가미는 7년 만에 죄수복을 입고 있는 스스로가 볼품없어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대면하게 될 거라면 조금이라도 검사다운 행색을 갖출 수 있는 구치소가 나을지도 몰랐지만, 그렇게 된다면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져 가는 카구야의 면회를 피할 수가 없었다.
“아오이 다이치 살해사건인가.”
“망령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허술함이지만, 반드시 관련되어 있을 거다. 하수인이든 뭐든.”
“국가는 아직 네게 걸려있는 스파이 혐의를 완전히 풀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담당 검사를 바꾸지 그래.”
“다른 검사들이 손도 대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은 주제에 뻔뻔하군.”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는 까닭은 혼란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진실이 은폐되어있기 때문이다. 탐사선 HAT-1호가 발사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고, 누구의 방해 공작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대다수 사람이 몰랐던 그때처럼.
우주탐사선 발사를 방해하는 목적을 가지고 국가기관에 잠입해, 사람을 죽일만한 인물은 오직 한 명뿐이다. 유가미는 사건이 일어난 장소와 피해자에 대해 전해 듣자마자 수갑을 부쉈다. 그가 보이는 집념은 7년 동안 기다려온 것이 사형이나 해방 따위가 아니라 그 사건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내일의 공판으로 마무리되기는 힘들 거다. 상대는 그 끈질긴 변호사의 제자들이니.”
“확실히 애송이를 상대하는 일은 피곤하더군. 그런 김에 하나 묻겠는데, 망령의 예고가 왔음에도 센터 자체적인 대응은 없던 게 확실한 건가?”
“…정부의 대책은 경비 강화뿐이었다. 오오가와라 소장은 예고를 받은 즉시 정부에게 알렸지만, 고작 스파이의 방해 공작이 두려워 대대적으로 홍보한 HAT-2호 발사를 미룰 수는 없다고 판단한 거겠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군.”
“네가 은폐를 비난하는 꼴도 꽤 웃긴다만.”
유가미는 대답하는 대신 자조하듯 웃었다. 마지막이 가까워진 남자는 여전히 7년 전에 멈추어 서 있었지만, 때때로 진실을 은폐한 것에 대한 비난을 인정하는 듯 굴었다. 독할 만큼 자신이 범인이라 주장했던 그 태도와는 상당히 반대되는 일을 이제 와서 하는 이유는 7년의 연극이 지쳤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시간이 다 되기도 전에 그가 먼저 닳아버렸을지도. 그럼에도 유가미는 스스로가 무엇을 느끼는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절대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숨기는 진실에 포함되어있었다.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짊어지고 창살에 갇혀있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미츠루기 또한 오래전에 겪어본 적 있었다. 그뿐일까? 미츠루기는 유가미가 보낸 세월의 곱절을 넘는 시간 동안 억울해야 했던 사람의 악몽을 해결한 적도 있었다. 결코 순탄하다고 할 수 없는 미츠루기의 옥중 경험들은 유가미의 앞에만 서면 다사다난했던 체험 정도로 전락하고는 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시 서류로 고개를 돌린 유가미의 얼굴에는 피곤함만이 묻어있었다. 그 지나친 초연함과 무덤덤함은 한 번,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수십 수백 번 동안 죽음의 공포가 무엇인지 느끼는 미츠루기가 이해할 수 없는 미지다.
그는 진실을 말할 생각도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헌신의 시작은 스승을 향한 충성이라고 그의 가족은 말했다. 그녀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속죄이자, 죽은 스승의 단 한 가지 소원을 저렇게 미련 맞고 멍청하게 지키려는 거라고.
“…이제 6일, 아니, 곧 날짜가 바뀌니 5일인가.”
“망령의 모가지를 따는 데는 충분해.”
또다시 미츠루기가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은 결국 사형수를 포기한 것 같기도 했고, 그저 조용히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결국 쫓기듯 입을 여는 것은 유가미 쪽이다. 허락된 시간이 줄어들수록 미츠루기는 초조해하는 대신 차분히 기다렸다. 입을 다물고 침묵한다면 그곳에 포함된 뜻마저 빠르게 간파하는 검사의 앞에서 진실을 숨기고자 한다면 도망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음에도. 자신을 쫓아 사형수의 독방까지 찾아온 남자를 피할 곳은 남지 않았다. 감옥이라는 제한된 공간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도망치지 못하는 이상 물어야만 했다.
“이제 슬슬 시간을 허비하는 건 그만두는 게 어때?”
“난 아직 자네를 포기하지 않았다.”
“헷, 마지막 정도는 솔직하게 말해라. 법의 암흑시대를 끝낼 좋은 본보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뿐이잖아?”
고개를 숙인 죄수의 눈가 밑으로 그림자가 진다. 눈 밑에 물든 다크써클로도 충분히 사납게 보이는 얼굴이 어둠을 등지자 어느 때보다 흉악했다. 그리고 미츠루기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준비를 마친 듯한 그 모습에서 비로소 누구의 것인지 모를 체념을 읽어냈다.
“너를 포기하지 않은 거다, 유가미.”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허탈하게 말이 나갔다. 오히려 의도하지 않았기에 그토록 공허했을지도 몰랐다.
“나는 내 사람을 그리 쉽게 포기하지 않아.”
조용히 손안에서 구겨지던 수사자료를 내려놓은 유가미는 처음으로 몸을 일으켜 창살로 다가갔다. 곧게 선 등과 똑바른 걸음걸이는 법정에서 보아 온 것과 똑같았다. 다른 죄수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수갑을 찬 채로 이런 독방에 있어도 그의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자신을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그의 마음을 믿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유가미를 살리고 싶은 미츠루기의 마음에는 어떠한 거짓도 없었다.
“난 검찰청장의 사람이 된 기억은 없는데?”
창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유가미는 웃으며 말했다. 미츠루기는 지지 않고 벽에 기댔던 몸을 움직여 그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여태까지 누린 특혜를 모른 척할 셈인가?”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뿐이었지, 답지도 않군. 갑자기 감정에 매달려서 호소하기나 하고 말이야. 법정에서 물러났다더니 세상이 아름답게만 보이나 보지?”
불과 몇 달 전에 수갑 하나를 두고 이야기하던 두 검사의 사이에는 이제 창살 하나가 있었다. 차갑고 딱딱하게 녹슬어있는 현실이었다. 사람을 위축시키는 독방에서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던 미츠루기는 사형수의 독방 그 자체가 되어 있는 남자로부터 눈을 돌렸다.
“유가미.”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한다.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사랑 같은 감정이,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되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게 효과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헛소리라 여겼던 카구야의 말을 이제 와서 곱씹는 이유는 그런 말에라도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심정을 지금에서야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의 맹목과 헌신은 애정으로 갈아치워지거나 대체될 게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저 찰나의 무언가로 거슬리기만 한다면.
“…내가 시간 아까운 줄 모르고 이러고 있는 건, 내가 자네를,”
갑작스레 움직이는 수갑의 쇠사슬이 창살에 부딪히는 건 순간이었다. 창살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온 죄수의 억센 손이 상대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그 얼굴에는 어떠한 웃음기도 없었다. 다음을 이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흉흉하게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굳게 닫힌 입매가 열리는 대신 턱 끝에서부터 솟은 근육들이 움틀거렸다. 명백하게 느껴지는 분노의 다른 이름은 동요였다. 목이 붙잡힌 상황에도 역설적으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답지도 않다더니.”
“…….”
조여오는 숨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손으로 팔을 뻗으면 그대로 쥐어 터트릴 것만 같았던 유가미가 먼저 몸을 뒤로 비켰다. 뒤로 물러선 남자의 손을 쫓는 대신 자신의 목 부근을 매만졌다. 항상 단정함을 유지하고 있던 크라바트는 엉망으로 구겨지고 헤집어진 채였다. 가장 안에 받쳐입은 셔츠는 조금 늘어나기까지 한 것 같았다. 그에게 허락된 자유의 길이가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그리고 창살의 틈이 조금만 더 벌어져 있었다면 분명 목이 졸렸을 것이다. 그러나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사람은 미츠루기가 아니었다. 애석한 일이었다.
“다신 찾아오지 마라.”
창살로부터 멀어지더니, 달이 가려지고 찾아온 어둠에 완전히 녹아든 남자가 말했다.
“카구야의 면회를 피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고려해보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사슬마저 빛나지 않게 된 검은색을 바라보던 미츠루기는 그의 뜻을 뒤늦게나마 존중하기로 했다.
사랑은 무의미하다. 그 가치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츠루기에게 필요한 건 달콤하기만 한 유대감 따위가 아니라 죽은 호수에 던져질 돌멩이와 그 충격이 만들어낼 파란이었다.
2028년 12월 ??일 ??시 ??분
사형수에게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건 다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유가미가 눈을 뜨고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망령의 수하에 대해 신문하던 도중에 벌어진 법정 폭파 사건. 직접적인 타격은 없었으나 망령의 일로 곤두선 신경과 감옥의 열악한 환경이 맞물려 누적된 피로가 결국 일을 그르친 모양이다. 패닉에 빠진 사람들이 일으키던 소동을 떠올리다가 억지로 밀어냈다. 당장 그것보다 중요한 건 흘러간 시간을 붙잡는 일이었다.
감옥에서 시간을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에서 자기 자신을 잃게 만드는 것 또한 감옥이 죄수에게 내리는 형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여태까지 유가미가 시간의 흐름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고 있을 수 있던 것은 미츠루기의 면회였다. 허나 그는 이제 오지 않을 것이다. 초조함 때문인지 거세게 뛰는 심장박동이 자신의 귀로 똑똑히 들려왔다. 당장 사형집행실로 끌려가도 미련없는 몸이라지만, 망령의 체포를 눈앞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유가미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철창살로 막혀있는 창가에 가까이 갔다. 현명한 파트너는 끝내주는 식사를 즐길 때를 제외하고 언제나 부름에 답했고,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짧게 끊어 높은 소리로 휘파람을 울리면 날개가 퍼덕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옥에 수감된 유가미를 편안하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소리였다. 그것이 자유로운 바깥이 아닌 철창문 밖에서부터 들려와, 발톱으로 쇠를 긁는 소리로 변하지만 않았더라면 유가미는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빠르게 이곳으로 날아든 새는 열쇠가 들어갈 잠금장치를 발톱으로 긁나 싶더니 창살을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몸을 들이받았다. 비교적 가느다란 목이 수월하게 들어오다가도 활짝 펼쳐진 두 날개가 걸렸다. 유달리 격한 긴의 돌발 행동에 유가미는 서둘러 철창살 밖으로 손을 내밀어 잔뜩 격양된 파트너를 달랬다. 사냥감의 뼈와 가죽을 분리하는 데 전혀 무리 없는 발톱과 부리가 이깟 철창살에 부러지거나 할 일은 없겠지만 마냥 성하지만도 않을 것이다. 창살에 난폭하게 굴던 긴은 갑작스럽게 내밀어진 팔에 한발 물러나, 상황을 살피다 이내 익숙한 홰에 내려앉았다. 팔에 앉은 뒤로도 계속 주변을 살피고 몸을 잔뜩 낮추는 것을 보아 흥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것 같았다. 평소 입고 다니는 겉옷과 같이 덧댄 천이나 가죽이 없는 직물은 매의 발톱에 쉽게 구멍이 뚫렸으나 유가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긴이 이 감옥에 자유롭게 출입한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하늘을 통해서였다. 유가미는 사람보다 매의 의사를 존중했다. 법정에 아슬하게 튼 그의 둥지를 제집으로 옮길 때도 준비한 건 하나의 홰와 24시간 내내 열려있는 창문이었지, 새장이 아니었다. 우수한 파트너의 도움을 받을 때 역시 유가미는 긴이 자신과 같은 철창에 갇혀있게 두지 않았다. 새들은 끝없는 하늘을 누비는 유일한 존재였다. 비행하는 자체로 자유가 무엇인지 말하는 존재들. 결코 가축이 될 수 없는 그들이 인간의 곁에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머무르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여길 들어온 거냐. 탄식 같은 혼잣말을 던지면 긴은 똘망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짐작 가는 건 딱 하나뿐이다.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어느 정도 진정된 긴은 처음부터 얌전하게 있었던 것마냥 자신을 쓰다듬어 달라는 듯 고개를 기웃거리기만 했다. 순진하고도 무해한 눈동자에 유가미는 결국 다른 손을 뻗어 매의 턱부리를 살살 긁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이 끔찍한 공간에 긴이 들어오게끔 편의를 봐준 것은 분명.
“오오옷!!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건가, 유가미?! 그래서 긴이 그렇게 날아갔던 것이군! 하하하!! 자네들의 우정은 정말이지 언제봐도 놀라워.”
“…아저씨가 왜 여기 있지?”
“음? 그야 당연히 저스티스! 때문이 아니겠나. 법정 폭파 사건으로 쓰러진 자네를 간호하기 위함이네!”
유가미는 뒤늦게 자신이 실망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수감된 이후로 처음으로 무언가를 기대했다는 것도. 그러나 어리숙하게 입 밖으로 내는 대신에 자신이 놓인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반은 양손에 허리를 두고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간호 따위를 입에 담는 그의 진짜 이유는 자신의 감시일 것이다. 반은 공사 구분이 철저했다. 피고인의 사정을 듣고 눈물을 쏟아내면서도 결코 봐주거나 하지 않는다. 당장 매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발톱으로 창살을 긁고, 애절하게 울어도 결코 사형수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게 반이라는 형사였다.
“시간은 얼마나 지났지?”
“음, 법정 폭파 사건이 있은 뒤로 하루가 지났군! 지금 변호사들이 폭파 사건에 대해 재판하고 있네. 어제 맞은편에 섰던 오도로키 변호사도 유가미군과 마찬가지인 이유로 이번 재판은 불참이다.”
“…피고인은?”
긴이 울었다. 유가미가 답지 않게 긴장하고 있음을 느낀 탓이다. 유가미는 이 폭파 사건이 망령의 짓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하! 이번 사건의 담당 검사는 이미 정해져 있어. 자네가 뒤늦게 맡겠다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니야. 정의를 향한 자네의 마음은 알고 있지만 진정으로 갱생을 위한다면 더 이상 망령은 쫓지 말고…….”
“아저씨, 세 번 말하게 하지 마라. 피고인은 누구냐.”
“우우… 모리즈미 시노부, 사립 테미스 법률 학원 사건에서 피고인으로 체포되었던 그 소녀일세.”
“체포된 근거는?”
“거기까진 말해 줄 수 없다, 고 해야 할지. 자네의 간호로 사건에서 제외되었으니 거기까진 모른다, 겠군! 하하하!!”
태평한 웃음에 유가미의 긴장이 한순간에 풀린다. 툭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던 그 소녀가 망령의 또 다른 수하가 아닐까 하는 가능성을 품는 것은 아주 잠시에 불과했다.
폭발한 것은 우주센터에 설치된 제3의 폭탄이 분명했다. 스위치는 이미 용의자로부터 확실하게 수거한 상태였으며, 소동이 벌어졌을 때 호시나리는 증인석에 서 있었다. 망령이 꼬리를 끊기 위해 수하와 함께 법정을 날려버리려고 한 걸까? 그랬다면 여러모로 대기실에 있을 때를 노리는 게 나았을 텐데. 더 이상 자신을 쫓지 말라는 경고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끝없이 꼬리를 무는 생각이 문득 한가지 물음표에 닿는다. 사건을 처음 받았을 때부터 깊숙한 곳에서 존재했으나 억지로 묻어버렸던 의문.
호시나리 타이요가 정말로 망령의 수하일까?
“유가미?”
어딘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면 선글라스 너머의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이쪽을 살피는 기색과 달리 냉정한 눈빛에 유가미는 뒤늦게 망령의 스파이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은 자신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딘가에 검찰청장이라면 모를까, 보편적인 사람들이 사형수의 안위를 신경 쓸 리가 없다. 여태까지 그래왔듯 이번에도 검사석에 세우고자 했다면 그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눈을 뜰 때까지 감옥 안이었다는 것은 폭파 사건의 혐의가 제게로 와있다는 뜻이었다. 만약 사형집행일까지 눈을 뜨지 못했더라면 누구도 깨우지 않았을 것이다. 유가미는 비로소 자신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필사적이던 긴의 태도가 이해됐다. 때때로 유가미는 키즈키 마리를 살해했다는 죄가 가진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잊고는 했다.
“유가미, 역시 몸에 이상이 있는 거라면,”
“…헷, 눈을 달고 다니는 건 오로지 선글라스를 끼기 위함인가? 간호 따위가 필요 없다는 건 충분히 확인했겠지. 이제 그만 아저씨의 정의를 실현하러 가는 게 어떠냐.”
“음!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당장 맡은 일을 훌륭하게 끝내는 것도 정의를 위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유가미는 반을 처음 만난 날에 그를 제 입맛대로 구워삶는 일을 포기했다. 그가 하고자 한다면 휩쓸리지는 않아도 막을 수는 없었다. 감시를 물리지 않겠다고 반이 다짐했다면 쫓아낼 수 없다. 그렇다면 당장 긴 만큼이라도 다시 하늘로 돌려보내 주면 좋을 텐데.
“그럼, 먼저 검찰청장으로부터 전언이다!”
“뭐?”
“시민들의 대피를 도운 것에 대해 비공식적으로나마 고맙다고 하더군.”
“…아무래도 경찰에게 해야 할 감사가 잘못 도착한 것 같은데.”
“하하하! 부끄러워하지 말게. 시민들이 침착하게 대피 명령을 따를 수 있었던 건 자네 덕분이라는 것을, 현장에 있던 이 반 고조가 똑똑히 보았으니까!! 정말이지, 자네 마음속에 남아있는 검사로서의 신념은 그야말로─ 저스티스!! 그 자체!!! 유가미의 갱생을 믿는 나로서는 정말로 기쁜 일이야!!”
유가미는 머리가 아파져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게 혼자서 멋대로 울었다가, 기뻐했다가, 주먹을 쥐고 열정으로 타오르기 시작하는 정신 사나운 형사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에, 욱신거리는 아픔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매의 홰를 자처하던 팔을 다시 안으로 되돌려 자신의 머리를 짚었다. 갑작스럽게 서 있을 곳을 잃은 긴은 당황하는 대신 영특하게 날아올랐다.
“아차! 내가 너무 늦었군. 비공식적인 감사인만큼 사례 역시 조촐하지만…….”
반이 자신의 허리춤에서 열쇠를 꺼내 들었다. 유가미가 저 열쇠를 볼 때는 법정으로 이송될 때뿐이었다. 굳게 닫힌 문이 살짝 열리고, 그리 높지 않은 천장을 불편하게 날아오르던 매가 부드럽게 안으로 들어온다. 제법 느리게 강하하는 긴을 받아 드는 동시에 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당황스러운 마음이 앞서다가도, 제 어깨에 올라타 비로소 편안해하는 긴의 기색이 느껴지자 반사적으로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닫힌 문 따위는 어찌 됐든 알 바 아니었다.
“자네의 얼굴을 보아하니 조촐한 사례는 전혀 아닌 모양이야.”
“…나중에는 다시 데려가라. 긴은 답답한 걸 싫어하니까.”
“음! 걱정하지 말게!! 그럼 두 번째 전언이다.”
“또 있다고?”
“반드시 네가 다시 법정에 설 수 있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전달은 이상이다!”
반은 정장만큼이나 하얀 치아를 뽐내며 웃었다. 익숙하게 매를 쓰다듬고 혹시나 그가 다친 곳이 없는지 살피던 유가미의 손이 굳었다. 긴을 매만지며 그대로 잊을 뻔한 두통이 다시금 지끈거렸다.
“그럼, 오늘은 이만 쉬게! 어제의 재판으로 새롭게 발견된 사실을 토대로 우주센터의 조사도 다시 펼쳐지고 있으니, 수사자료는 내일 중으로 다시 받을 수 있을 거다!! 자네들의 감격스러운 재회를 위해 나는 시간이 되면 다시 오도록 하지!”
말을 마친 반이 곧장 몸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유가미는 그를 붙잡았을 것이다. 유가미는 처음으로 그가 자신을 공백 속에 홀로 남겨두지 않기를 바랐으나, 결국 입 밖으로 새어 나간 건 무미건조한 대답뿐이었다. 고독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혼자일 때면 집요하게 차오르는 상념들에게 잠식되는 느낌이 끔찍할 만큼 싫을 뿐이다. 그게 자신의 죄와는 상관없는 일들일수록 특히나 더.
그날 밤, 미츠루기는 제게 사랑 따위를 고하려 했던 게 아니다. 냉정하게 정리되는 한 문장을 당시에도 떠올렸으나 그보다 먼저 손이 움직인 이유는 굳이 찾지 않았다.
일주일 뒤면 이 독방에는 다른 사형수가 들어오게 된다. 긴은 하늘로 돌아가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는 건 카구야 정도가 유일할 것이다. 감옥에서 죽어가던 7년 동안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정리해놓은 유가미가 남겨 놓은 미련이라고는 긴의 목을 감싸고 있는 스카프가 전부였다. 그것마저도 긴이 해안가의 절벽으로 돌아가면 거친 해풍을 견디지 못하고 바다 위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유가미 진의 정리는 그렇게 끝이 났어야 했다.
망령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코코네를 향한 걱정을 누르며, 스승을 떠올려도 울지 않도록 정리하는 데 걸린 시간이 7년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처분을 결정했던 감정까지 계산해보면 거진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렇게 텅 빈 독방에 누워있으면서 계속 무시하고 존재를 부정했던 상자가 기어코 활짝 열려버렸다. 유가미는 절망감을 느꼈다.
제게 남아있는 시간으로는 결코 미츠루기 레이지를 정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28년 12월 18일 오전 10시 12분
“꼴이 말이 아니네. 목을 매는 건 밧줄이 아니라 다크써클로 할 생각인가 봐?”
“…누님의 악담과 저주를 들이마시고 죽는 것도 나쁘진 않지.”
“어머, 사람의 말을 사케 정도로 취급하는 건 그만둬줄래?”
“헷, 먼저 시작한 건 누님 쪽이다.”
마치 배경의 조경물처럼 서 있던 간수가 작게 몸을 떨었다. 오늘따라 유독 면회실의 한기가 서린 탓이다. 얼핏 들으면 평범하게 사이 나쁜 남매 같기도 한 대화를 먼저 그만두는 것은 카구야의 쪽이다. 턱을 괸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여유가 넘친 채였다.
유가미는 카구야가 말을 멈출 때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갑자기 말을 그만둘 때면 유리창 건너편에 앉아있는 동생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괜히 불편한 척 고개를 돌리는 건 몸 어디에도 다치거나 아픈 곳이 없으니 괜한 걱정 말라는 유가미의 의사 표현이었고.
한동안 면회를 거절한 것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던 카구야는 예상과 달리 평소와 같았다.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자신을 살폈고, 직전의 면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답잖은 대화들을 주고받았다. 이다음 남은 것은 다음 면회에도 그럴 것처럼, 아직 늦지 않았으니 진실을 말하라고 요구할 차례였다. 오늘은 그것을 끊을 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간수를 불러 그녀를 칙칙하고 우울하기만 한 이곳에서 빠져나가게끔 명령하는 일뿐이다.
“할 이야기가 없으면 슬슬 돌아가지 그래.”
“이야기야 많지. 내가 검사를 싫어하게 된 이야기는 어때?”
“그 레퍼토리라면 질렸다.”
“그럼 내가 검사를 더더욱 싫어하게 된 이야기는?”
“누님과 수다를 떠는 건 인형들의 몫이 아니었나.”
“어머, 여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인데도? 사실 최근에 어떤 검사는 다른 놈들과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뻔했거든. 처음으로 나한테 당신의 동생은 무죄가 아니라고 말해 준 검사였어.”
“헷, 검사인 척하는 사기꾼이라도 만난 거 아닌가?”
카구야는 여전히 턱을 괸 채였다. 대화할 때는 언제나 상대방의 눈을 마주 봐라. 유가미에게 그것을 가르친 건 누구도 아닌 카구야였다. 절대 눈을 먼저 피해서는 안 돼. 그건 내가 졌다고 인정하는 것과 다를 게 없거든. 어른들이 가르치는 예법과는 꽤 결이 달랐지만 어릴 적에 위 형제가 또 하나의 어른이었던 당시의 유가미는 카구야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랐다. 나중에 가서야 상대방의 눈을 마주 보는 것에 함의된 비언어적 표현들에 대해 더 자세히 배웠지만, 근간은 카구야가 옳다고 생각했다. 시선을 먼저 피하는 것은 곧 자신이 불리함을 인정하는 행위다. 그 때문에 유가미는 그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책상 밑으로 손톱을 세워 살을 파고들게끔 주먹을 쥐었다.
“역시 사기꾼이었던 걸까?”
“누님을 속이다니 간도 크군. 어떻게 생긴 놈인지 면상을 못 보는 게 아쉽게 됐어.”
“마치 너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사람 같았어. 솔직히 조금 재수 없기도 했지만, 보통은 그런 거 변호사가 하잖아?”
“…변호사를 사칭하기에는 귀찮았나 보지.”
“그런데 오늘까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어. 너는 여전히 한심한 얼간이 같은 얼굴이고,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물어보니 한참을 침묵하다가 하는 말이 법을 어길 수는 없다고 하더라고. 웃기지 않아? 널 가둔 법 자체가 완전히 엉망인데 그걸 어길 수 없다고 하는 게.”
“누님.”
“난 그런 거 절대 용납 못 해.”
카구야가 말하는 검사가 누군지는 듣자마자 알았다. 그를 피하고자 카구야를 마주 보고 앉은 것은 아주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수라는 신분을 아직 1년도 채우지 못했을 때, 유가미는 카구야와의 면회 자리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건 한마디도 할 수 없음에 가까웠다. 코코네를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보다 자신을 꺼내고 싶어 하는 가족을 눈앞에 두었을 때였다. 그런 한편으로는 카구야에게서만큼은 코코네를 지키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존재했다. 더 정확하게는 혼자 남게 될 가족을 외면하지 못할 것 같은 자신의 나약함이 겁이 났다.
카구야는 자신보다 더 강한 사람이다. 어릴 때는 단순히 나이 차이에서 오는 체격과 힘의 차이 때문에 우위를 인정했다면, 그것이 간단히 뒤집힌 지금은 단순한 무력이 강함의 척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카구야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집안에서, 혹은 직장에서 얼마나 유능하고 대단한 사람인지 굳이 늘어놓을 것도 없었다. 카구야는 달을 사랑하기로 했을 때 기꺼이 볕이 드는 땅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달이 저 물은 뒤로 어둠밖에 남지 않은 밤에서 길을 헤매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유가미가 카구야를 믿는 것은 그 강함이다. 자신이 곁에 없어도 그녀 혼자 잘 버텨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 카구야를 지탱하는 것은 스승의 유품이었다. 비록 코코네를 받아들이는 일은 평생 없겠지만 그들만 있다면, 그들을 돌봐야 한다면 카구야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가끔씩, 자신을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지 할 각오가 서린 눈을 볼 때면 유가미는.
“갑자기 뭐야 이상한 얼굴 하고.”
“…….”
“진?”
“…쓸데없는 바람을 불어 넣은 게 누님인가?”
“혼자만 아는 이야기를 대뜸 묻는 그런 화법은 대체 어떤 죄수한테 배운 거야?”
“그 검사한테, 이상한 말을 했냐고 묻고 있는 거다.”
카구야의 손이 천천히 내려간다. 턱을 괴고 비스듬했던 그녀의 자세가 천천히, 그러나 꺾이지 않겠다는 듯 올곧게 바로 섰다.
“어떤 말?”
되짚어보면 그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기점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면회를 대놓고 거절했던 그날이었다. 코코네에 관해 캐물을 게 뻔한 그를 피하고자 간수를 협박해서 독방으로 도망쳤던 날. 그 뒤로 미츠루기는 한층 더 조심해졌고, 혼자서 침묵을 지키는 시간이 길어졌다. 단순히 실마리를 잡았으나 섣불리 접근하지 않을 뿐이라 여긴 그 태도가, 사실, 어쩌면.
“진, 너를 거기서 꺼낼 수만 있다면 난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어.”
처음부터 수상하다고 여길 것은 목석과 견주어도 지지 않을 사내의 입에서 먼저 그런 말들이, 태도가 튀어나온 원인이었어야 했다. 빛을 받아도 색이 옅어지거나 하지 않는 두 쌍의 회색 눈동자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돌아가라. 더 이상 할 말은 없으니까.”
“…보아하니,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지는 않은 것 같네.”
“…….”
겨울에도 낮은 존재한다. 바람이 거셀지언정 해가 높게 뜨면 햇볕이 창살을 타고 넘어왔다. 카구야는 먼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면회실에는 작은 창이 달려 있었고, 건너편 구치소에는 창살이 달려 있었다. 고민도 잠시 입술을 열던 카구야는 떠올린 것을 입 밖에 내는 대신 상투적인 인사말을 남겼다. 내일 또 올게. 그런 다음에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먼저 방을 나서면서도 화를 내지 않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다.
*
면회실을 나서자마자 반기는 건 잔뜩 시무룩해진 얼굴의 반이다. 양 검지를 꼼지락거린 채,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는 상대에게 건넬 위로를 신중하게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반은 때때로 유가미와 카구야의 문제를 자기 일처럼 함께 고민하고는 했다. 면회실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 중재하러 들어오는 것은 언제나 반이었다.
“유가미가 화를 냈다면 그건 진심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네…….”
무언가 결심하듯 주먹을 쥐며 고개를 든 반의 눈빛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비 맞은 것마냥 눈썹이 내려가고 입매가 굳어있어도 언제나 시민들에게 올바른 정의와 안전을 보장하는 형사다운 눈이었다. 그러나 옳게 빛나는 눈을 앞두고도 카구야는 그의 위로가 웃고 넘어갈 수준조차 되지 못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이라고 해서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이 유가미를 봐온 세월을 비교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카구야의 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웃어주지 못하는 건 마지막으로 남은 일 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지켜본 사람이 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망할 검사.
카구야는 반의 말에 대답하기 위해 마지막에 돌아갈 것을 감히 명령하다시피 말한 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차라리 화라도 냈으면 내 기분이 이렇게 더럽지는 않았을 텐데.”
반은 대번에 믿지 못하는 얼굴을 하면서도 카구야의 말을 반박하거나 반대하는 경솔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카구야는 서른도 되지 않은 핏덩어리 주제에 죽음에 초연해 보이는 그 낯짝이 꼴 보기가 싫었다. 차라리 죽기 싫다고 추하게 징징대는 쪽이 몇 배는 나았으나 그런 건 꿈에서조차 나온 적이 없었고, 당장 화가 날 일을 겪고도 태연히 상대를 바라보고 평온한 숨을 내쉬었다.
변한 것은 사실이다. 삶에 여한이 없어 보여 속을 끓게 만들던 얼굴에는 미련이 흘러넘쳐서, 기어이 끓은 속이 산처럼 분노를 녹이게 했다. 그날 자신이 던진 한마디를 그 검사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사용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같은 검사라면 제 앞에서만큼은 결코 벗겨지지 않던 태연함의 가면을 무너질지도 모른다. 더 솔직하게 말해서, 유가미의 견고함이 무너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저가 원했던 건 살고 싶어진 사람의 발악이었지, 제 감정을 죽이는 데 익숙한 사람의 체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음을 기대하게 되는 것은 내일이 익숙한 자신뿐이다.
정리를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미련을 보며 카구야는 멋대로 그 검사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자신과 제 동생을 상상했다. 7년 전처럼 또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는 동생의 등을 밀고, 때로는 놀리기도 하고, 때로는 도와주기도 하면서…….
카구야는 언제나 혼자서 구치소를 찾아가면서도, 집으로 돌아갈 때는 (여러 가지 복잡한 절차는 무시하고) 둘이 함께일 거라 생각했다. 이번이 아니라면 다음에, 그다음도 아니면 또 다음에. 또 그다음. 그다음. 계속 다음을 찾아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동기부여이자 계기이며 핑계이기도 한 가족마저도 외면하기로 한 그를 보며, 둘이 함께 구치소에서 나서기 위해서는 그의 의사는 오히려 불필요할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음을 향해 걸었던 걸음으로 다져진 것은 굳은살이 박힌 결심뿐이다.
휴대전화 너머로 진이 어떻게든 면회를 다시 나오게끔 하겠다고 약속한 미츠루기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이번에는 그를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지 할 것이라고 돌려준 자신의 답을 실현할 때였다. 추상적인 문장이었음에도 그는 예리하게 범법 행위는 눈감아 줄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허나 법을 어기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법을 믿고, 그 효력이 굳건하다고 믿을 때 이야기다.
혼자만의 상념에 빠진 건지, 답지 않게 말이 없는 반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남긴 카구야는 걸음을 빨리했다. HAT-1호의 귀환이니, 2호의 발사니, 더 이상 제게 어떠한 가치도 없는 일에 할애한 시간을 메꿔야만 했다. 삼일, 아니, 이틀 내로 완성할 수 있을까? 자연스레 밀려와야 할 불안함은 잠잠했다.
진을 구하는 데 더 효과적인 쪽을 택하는 것에 있어서 더 이상 꺼려질 게 없어졌기 때문이다.
2028년 12월 19일 오후 11시 59분
차가운 돌벽에 기대듯 앉아있다가 불현듯 올해는 눈을 보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보통 해가 바뀌기 직전이나 연도가 바뀌고 나서야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하니, 아무래도 이번에 눈 구경은 그른 모양이다.
한기에 굳어버린 손끝의 감각을 살리는 대신에 들고 있던 수사자료를 내려놓았다. 이제 와서 생을 되돌아보거나 갑작스레 여운에 젖을 생각은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사형 이틀 전까지 검사로서 의무를 다하게 된 지금이 제법 웃겼기 때문이다. 나중에 가서는 완전히 자신의 의지로 선 법정에 불만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법의 암흑시대를 끝내기 위해서 감옥 밑바닥에 있는 죄수까지 끌어온 누군가의 노력이 무산된 게, 아주 조금은 허탈하게 느껴졌다. 자신 역시 날조와 위증에 치를 떨던 검사 중 하나였다.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검찰청장의 곁에서 암흑시대를 끝내기 위해 힘쓰는 검사 중 하나로 있었을지도 몰랐다. 애초에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법의 암흑시대 같은 것도 오지 않았겠지만.
검사의 살인이 진실이 된 이상 자신의 죽음은 반드시 세상에 널리 알려져야만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선례가 되어 모두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 법을 지키는 자의 마지막 의무였다. 코코네는 반드시 상처받을 것이고, 그로 인해 다시 만날 스승에게 해야 할 사과는 늘겠지만, 죽으려 드는 것마저 돈이 드는 세상에 이용 가치가 있는 죽음은 그 값을 다 해야만 했다.
눈을 감으면 차가운 돌바닥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정하지만 가까워지지 않는 소리는 현실이라기보다는 의식 저편에서 끌고 오는 착각에 가까웠다. 개인을 식별하는 수단에는 많은 방법이 있었고, 그중 유가미가 의지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발걸음 소리였다.
항상 굽 있는 구두를 신는 카구야의 소리는 좀 더 뾰족했고, 언제나 감정이 실려있기 때문인지 다른 이들보다 선명하고 힘이 있었다. 눈이 부시게 광을 낸 고급 정장 구두를 신는 반의 소리는 대개 일정하지 못했다. 어떨 때는 신이 나서 경박하게 달려오지만, 또 어떤 때는 자기 잘못을 알아서인지 늘어지고 축 처져서 왔다. 그리고, 스승이었던 마리 교수. 그녀는 딸깍거리는 게다 소리마저 품위 있게 들리게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일 없이 언제나 일정한 걸음걸이는 검을 쥘 때면 무엇보다 단호하게 들렸고, 그림을 그리다가 잠이 든 딸의 곁에 갈 때면 누구보다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그 딸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제자에게 걸어오는 스승의 걸음은 아마 평소와 특별하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정정해야 했다. 검술을 가르칠 때면 항상 생명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지 말 것을 당부한 스승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목숨을 버린 사람의 앞에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걸어온다 한들 감옥의 돌바닥을 깨부수겠다는 듯 당당하게 걷지도 않을 것이고.
천천히 눈을 뜨면 철창 앞에는 미츠루기가 서 있었다. 착각인 줄 알고 눈을 감았으나, 아니었던 모양이다. 미츠루기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앉아 있는 사형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득 유가미는 겨울에서 멈춰버린 이 독방을 앞두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몇 가지 들어야만 하는 게 생겼다.”
유가미는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수사자료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외운 지는 오래였으나 무엇을 묻든 답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명백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미츠루기가 안경을 고쳐 썼다. 그 나름대로 말을 고르거나, 입 밖으로 내뱉기 조심스러운 말을 하기 직전 하는 버릇이었다. 당사자가 그 버릇을 인지하고, 집중시키도록 유도하고 있을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망령을 잡기 위한 결정적인 증거를 자네가 갖고 있다고 들었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군.”
팔락, 무미건조하게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공백을 메웠다. 눈이 오지 않아 다행이다. 유가미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마냥 태연하게 굴며 생각했다. 미츠루기가 무엇을 말하는 지는 듣자마자 알았다. 망령의 성문 분석데이터.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망령에 대한 증거이자 스승이 제게 남긴 단 하나의 유품. 긴의 둥지에 잠들어 있는 그것이 유가미의 품으로 되돌아올 때는 비나 눈이 내려 둥지가 마땅치 않을 때뿐이다. 7년이 지난 지금까지 망령이 쫓고 있을 그것을 수색당하기 쉬운 감옥에 둘 수는 없었다.
유가미의 태도에 미츠루기는 입을 여는 대신 오른손 검지를 조용히 까닥였다. 조급해질 상대방이 먼저 말해오기를 기다리는 그의 수법이었다. 전처럼 넘어가는 대신에 유가미는 수사자료를 한 장 더 넘겼다. 방패와 방패의 싸움이었다.
“…가족과의 면회는 어땠나?”
“끔찍했지.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자네의 가족은 자네를 그 감옥에서 꺼내기 위해 무엇이든지 할 것 같던데.”
“그건 청장 나리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최초 현장 발견자인 오오가와라 소장의 증언서를 읽어내리던 유가미는 상대의 말에 농담 섞인 조언을 할지, 무시할지 고민하다가 비난하는 것을 택했다.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비치는 것은 찰나에 불과하다. 똑똑한 남자는 카구야가 처음부터 가족의 편이었음을 알았으리라.
“나리도 한번 말해보지 그래. 진실을 듣기 위해서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고.”
정리되지 않은 상대를 눈앞에 두고 어떤 말이 나갈지는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원망만큼은 묻어나오질 않기를 바랄 뿐이다. 묻어나왔다면 둔감한 그가 눈치채지 못하길 바랐고, 눈치챘다면 그대로 돌아가길 바랐다. 그러나 미츠루기는 이번에도 조용히 안경을 고쳐 쓰는 것으로 모든 답을 대신했다.
“어째서 나를 비난하는지 모르겠군. 내가 무슨 말을 해왔든 결국 자네가 원하는 대로 되었을 텐데.”
부정할 수 없었다. 유가미는 차갑게 굳은 손에서도 식은땀이 흐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츠루기는 평상시와는 달리 자신에게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에서 나오지 않은 채였다. 질책하듯 내뱉은 말에는 어떠한 원망도 없었다. 한순간 유가미는 여태까지 자신이 상대해온 미츠루기가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만했음은 인정하지. 자네가 나를 위해 살고 싶다든가, 할 리가 없는데 말이다.”
미츠루기는 너무도 간단하게 대화의 저울 위로 무게추를 올렸다. 기울어지는 쪽이 누구이고, 불리해진 쪽이 누구인지 헤아릴 새조차 없었다. 유가미는 황급하게 그의 입을 막을 수단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업보로는 더 이상 그를 베어낼 수 없었다. 검사라면 모를 수 없는 DL6호 사건을 아직도 수치로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직함을 달고 있지도 못했으리라.
필사적으로 궁리한 끝에 떠올린 것은 푸른색 양복을 입은 변호사였다. 전설에 대한 설화만큼 이 검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태연하게 움직여야 했던 입은 미츠루기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굳었다. 그 눈은 상대가 당장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미츠루기가 다시 한번 안경을 고쳐 썼다. 유가미는 수사자료를 들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불행으로 여겨야 할지 몰랐다.
“유가미.”
손에 들린 게 없었다면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을 텐데.
“너를 살리고자 하는 나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결국 그조차 너의 마음대로 되었을 때는, 자네의 뒤를 이어 망령의 수사를 하는 게…, 나일 수는 없는 건가.”
내일 죽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정리할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그래서 결국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여놨더라면 기어코 어떤 말이든 내뱉었으리라. 유가미는 뒤늦게 미츠루기가 이제 와서 망령의 증거를 요구하는 이유를 진정으로 깨닫는다. 그는 자신의 최후를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둘의 사이에서 유가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은 것은 없었고, 없게 될 것이다. 이긴 것은 자신이다. 그러나 제 손안에 남은 것은 이미 잔뜩 구겨져서 문장을 읽을 수 없는 증언서가 고작이었다.
“그조차도 욕심낼 수 없는 건가.”
“…욕심을 낼 거라면 처음부터 탐냈어야지.”
“처음부터 원하고 있었다. 자네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겠지만.”
법정이었다면 수갑을 깨부수고 입을 다물게 했을 것이다. 유가미는 더 이상 그가 내뱉는 말 중에 무엇이 진심이고, 무엇이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지 구분할 수 없었다.
“눈치라면 채고 있었다. 당신이 원하고 있던 건 그 빌어먹을 변호사 양반이라고.”
“여태까지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거지?”
“그래야만 해.”
겨울의 새벽은 여름의 밤보다도 어두웠다. 잔뜩 낀 구름이 달빛을 가리고, 희미한 복도의 등이 깜빡거린다. 점멸하는 빛 속에서 7년 동안 사형수이자 검사였던 죄수는 처음으로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앉아있었다. 미츠루기는 자신이 무너트린 것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단언할 수 있었다.
자신이 원한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고.
“유가미.”
“어이, 간수들! 검찰청장께서 이제 돌아간다고 하신단다! 중요한 귀인 잘 모시도록 해.”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뒤이어 나가 있을 것을 지시한 간수들의 기척이 느껴져 왔다. 미츠루기는 불편한 심기를 내비쳐 그들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는 대신에 먼저 등을 돌려 복도에서 벗어났다. 타인에게 그를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가미는 마지막까지 무너진 자기 자신을 이용했다. 그 처절한 발악을, 미츠루기는 모른 척할 수밖에 없다.
그는 빠져나온 감옥을 뒤돌아보지 않고 언제나 자신다운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빠르거나 느려지는 일 없이 일정하지만, 돌바닥을 깨부수겠다는 듯 당당한 구두 굽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 소리를 조용히 듣던 유가미는 눈을 감았다.
밖은 여전히 어두웠고, 구름은 심상치 않았으나 내일은 어디에도 눈은 내리지 않을 것이다
2028년 12월 20일
잠에서 깨어난 오도로키는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팔을 부여잡았다. 붕대를 감고, 사무소에서 멀어지기로 결심한 뒤로도 팔찌는 계속해서 조여왔다. 도망친다면 진실을 가리키는 손을 끊어 버리겠다는 듯이. 축복이라고도 여긴 적 없던 재능은 저주로 먼저 다가왔다. 알아, 안다고. 외면할 생각 없어. 이별에 슬퍼할 새도 없이 죄어오는 팔찌에 짜증 내듯 중얼거렸다. 괜찮다고 몇 번씩이나 함께 외친 친구가 오늘보다 그리운 적이 없었으나, 제게 남아있는 것은 재킷뿐이다. 오늘은 법정 폭파 사건으로 미뤄진 호시나리의 재판이 있는 날이었고 오도로키는 반드시 그를 우주로, 달로 보내야만 했다. 넥타이를 목 끝까지 밀어 올리면 배가 눌린 인형처럼 괜찮다는 소리가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나 오늘만큼 진심으로 외친 적도 없었다. 진실의 가혹함은 이미 첫 법정에서 지독하게 맛본 적 있었기 때문이다.
법정 준비를 마치고 사무소로 달려가는 코코네는 뒤죽박죽 엉킨 머릿속들을 정리했다. 이번에 서는 상대 검사는 다행스럽게도 유가미였다. 그가 법정에서 부릴 행패와 거기에 맞서야 하는 나루호도를 생각해보면 엄밀히 다행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변호사 배지를 달았다고 해서 그의 일상을 전해 들을 수 없는 건 아쉬웠지만, 법정 폭파 사건이 있고 난 이후로 그가 정말로 괜찮은지 맞은편에 서서 볼 수 있다는 건 감사하게 여겨졌다. 거기다 호시나리의 무죄가 밝혀지고, 아오이의 억울함이 풀린다면 오도로키도 반드시 사무소로 돌아올 것이다. 아직 증거는 한참 모자라고 증언도 불리하지만, 나루호도라면 반드시 진실을 밝혀내줄 것이다. 코코네는 오르막길도 무리 없이 돌파하며 달려 나갔다. 오도로키로부터 받은 특훈, 괜찮다고 스스로 되뇌는 것을 잊지 않으며.
증인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오오가와라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하게 될 위대한 증언에 대해 고민했다. 호시나리의 무죄는 중요했으나 발사대의 교체만큼은 절대로 밝혀져서는 안 되었다. 7년 전에 끝났다고 믿은 악몽은 바로 자신의 발밑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7년 전과 같은 사상자를 낼 수 없다는 결단이 만든 결과가 아오이 다이치의 죽음이다. 한평생 우주 개발에 몸을 바친 오오가와라를 무력하게 만드는 게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우주였어야 했다. 깨닫는 순간에 비로소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무지와 마주하는 미지의 공간.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지게끔 만드는 공허와 허무. 그것은 이상에 우주를 품고 사는 이들이라면 항상 갖고 있는 무력함이기도 했다. 최근에 오오가와라를 무력함과 공포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망령이었다. 그것은 미지를 빚어 만든 존재처럼 느껴졌다. 대항하려 해도 피할 수 없다는 듯 오오가와라로부터 동료들을 빼앗아 갔다. 그런 존재를, 법정에서 올바른 증언을 한다고 해서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판단을 마친 오오가와라는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몇 번이고 짜 맞춘 위대한 거짓들을 중얼거리면서.
무죄판결을 받은 뒤, 구치소에서 정식적인 절차를 밟던 호시나리는 무언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당장 출소 절차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하는 담당관의 목소리보다도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하던 소녀의 외침이 선명하게 귓가에 맴돌았다. 착오가 있던 게 분명한데, 그 착오로 자신은 우주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모순은 전부 법정에서 변호사와 검사들이 해결했을 텐데,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호시나리가 정신을 차린 건 구치소로 연행되던 코코네를 마주한 뒤였다. 울었던 게 분명한 붉은 눈가를 하고도 우주에 갈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며 손으로는 브이 자를 만들고 웃었다. 평소에 그녀의 감정을 대변한다던 기계마저 밝은 초록빛을 띤 채로. 호시나리는 두 발로 자유롭게 구치소를 벗어나며 생각했다. 자신의 무죄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고.
겁먹은 인질들에게 마술을 보여주던 미누키는 로봇들을 통제하고 있던 여자를 바라보았다. 인질 한두 명의 목숨쯤은 가볍게 여기는 태도로 협상의 주도권을 가져오던 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인질 중 누구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미누키가 사람들에게 마술을 보여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뒤집었을 때도 그녀는 제지하지 않았다. 모니터와 마이크에 대고 차분하게 이야기하기도 했고, 화를 내며 주장하기도 하는 여자는 말하는 내내 관람객을 위해 전시되어있는 센터의 재킷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도로키의 팔찌나 코코네의 동글이가 없어도 미누키는 그녀가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파파라면 분명 그녀가 정말로 나쁜 선택을 하기 전에 자신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미누키는 강한 믿음을 가지며 인질들 앞에서 웃어 보였다.
예외 중의 예외로 검사석에 선 미츠루기는 자신이 쌓아 올린 로직이 틀렸음을 꽤 오랜만에 인정해야 했다. 7년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죄수에게 필요했던 건 코코네를 믿는다는 한마디였다. 모든 걸 끌어안고 사형을 받아들인 죄수는 처음부터 자신의 무죄를 믿어주는 사람 따위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츠루기는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아주 당당하게 피고인을 믿어보겠노라 선언하는 남자를 보며 미소를 감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허세와 의뢰인을 향한 믿음은 자신의 자랑이다. 혀에 남은 미묘한 씁쓸함을 가볍게 삼킨 미츠루기는 자신의 유일무이한 라이벌을 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유를 되찾고, 모든 것을 마무리 지은 유가미는 당장 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축하를 기념하는 라멘을 먹기 위해 끼어들고, 그로 인해 평소보다 훨씬 소란스러워진 대기실에서 익숙하게 사라지려는 팔을 붙잡았다. 움직이는데 수갑의 사슬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어떤 해방감을 가져다주는지, 어제 독방에서 마지막으로 생각한 게 무엇이었는지. 그에게만큼은 확실히 전해야 했다. 저마다 한마디씩 얹어서 난장판이 된 소란에 묻히되, 확실히 전해질 수 있도록.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면, 긴은 당신을 찾아갔을 겁니다.”
다듬은 말투에는 전에 없는 정중함이 묻어있었다. 검사이기 전에 죄수였던 신분에서 온전히 검사가 된 지금 더 이상 직속 상사에게 무례하게 굴 수는 없다. 그런 게 아니어도 유가미는 더 이상 그에게 예의 없게 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미 개를 한 마리 키우고 있다만.”
“어제 돌려주지 못한 답입니다.”
미츠루기의 표정이 빠르게 어두워진다. 그 표정에 자신의 말을 잠시 곱씹던 유가미가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이제 와서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야. 다만,”
“잠깐 기다려라, 유가미.”
망령은 생각했다.
“나는 어제, 자네의 면회를 간 적이 없네.”
유가미 진이 미츠루기 레이지를 정말로 사랑했다면, 자신은 잡힐 리 없었다고.
유가미(인정x) >> 미츠루기(자각x) >> 나루호도(생각x)
^망령은 전부 알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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