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재판

환대의 방식

220 by 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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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실례할게. 평소보다 반 톤쯤 낮아진 목소리로 인사치레를 마친 사매가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연중 최고치의 습도를 예보 받은 날답게 축축한 바깥공기를 거느린 채, 기우뚱한 걸음걸이로 내부에 들어선 누이의 모습은 실로 안되어 보였다. 미리 골라 둔 블렌딩을 찻주전자에 덜어내고 포트에 물을 올린 뒤 남자는 소파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실내에 들어찼던 후텁지근한 습기는 에어컨의 송풍 기능 덕에 차차 흩어져가고 있었다.

“당장 내어줄 만한 신발은 이것뿐이네만.”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보다시피 지금 발 상태가 이래서…….”

손에 들린 남성용 슬리퍼에 반색을 하며 붕대 감긴 오른발을 들어보이던 누이가 아랫입술을 천천히 빨며 말끝을 흐렸다. 잠입 수사 도중 범인들을 뒤쫓다가 구두의 뒷굽이 부러졌다지. 병원에 동행한 수사관을 통해 대강의 사정을 들어 두었지만, 표정과 행동거지를 보건대 발목만 접질리고 끝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가죽 장갑을 고수하는 이유라면 뻔하지 않은가. 맨 무릎 언저리에 붙어 있는 반창고까지 일별했을 무렵에는 남자의 눈썹 앞머리 역시 시나브로 좁아져 있었다.

“누차 조언했잖은가. 현장을 살필 때만이라도 신발을 갈아신는 게 좋겠다고.”

“언제, 어디서 범인을 맞닥뜨리게 될 줄 알고 짐을 늘리란 말이야?”

“처음부터 단화를 신고 다니면…….”

“그 문제야말로 여러 번 말했지. 절대로 싫어.”

누이를 저토록 완고하게 만드는 것은 요컨대 자존심의 문제다. 여러 서방 국가의 사람들과 협업을 하다 보면 동양인 특유의 아담한 체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자신을 호락호락하게 여기는 피고인들을 면전에서 상대하며 알게 모르게 겪어 온 고초도 있다 보니 굽 높은 신발을 고수하는 것이 이제는 불가피한 일이 되었다던가. 까치발을 하고도 재판소의 창문 너머를 볼 수 없다는 데 발칵 성을 내었던 수년 전이나 지금이나 건재한 사매의 고집이 꺾일 리 만무한즉, 종내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쉰 뒤 화제를 돌려 낼 따름이었다.

“진찰을 해 준 의사는 무어라던가.”

“뻔한 얘기뿐이지. 소염진통제 위주로 처방해줄 테니 당분간은 격렬한 활동을 삼가고, 섭식에도 주의를 기울이라고.”

“말인즉슨 계획의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이야기가 되겠군.”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도 뭣하지만, 숙녀의 피치 못할 사정을 헤아리고 그에 대처하는 것 또한 신사의 소양임을 염두에 두길 바라.”

“훗, 익히 아는 바일세. 해서―”

능숙히 말을 받으려던 찰나, 잔잔히 끓어오르는 물소리가 두 남녀의 주의를 환기했다. 찻물의 온도와 농도에 관한 한 피차 까다로운 취향을 지녔음을 염두에 두자면 우선순위는 필히 저쪽일 수밖에 없다. 두 조의 찻잔에서 피어나는 향긋한 내음을 트레이째 받쳐 들고 돌아왔을 때 테이블 위에는 예의 그 검은색 가죽 장갑이, 해진 손꿈치 부분을 위로 한 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렇게 드러난 맨손에는,

“……넘어지면서 바닥을 헛짚었어.”

피멍이 맺힌 손끝에 시선이 달라붙자 뾰조록해진 목소리로 그리 얼버무리는 누이였다. 더 이상의 추궁은 불허하겠다는 의사 표시가 명백한 가운데 남자는 말없이 잔을 들었다. ‘완벽’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산 증거를 숨김 없이 보여주기라도 했으니 그녀로서도 나름의 신의는 지킨 줄을 안다. 저 자존심을 지탱하는 완고한 천성에 혀를 찰 엄두도, 사소한 불상사인 양 생채기들을 묵인할 마음도 없는 한, 침묵만큼 도리에 맞는 답을 찾기도 어려울 터.

멍 자국이 그만치 남았다면 뼈에도 영향이 미칠 수 있네. 적어도 스스로에게만큼은, 절념(竊念) 끝에 추슬러 낸 감정이 얼핏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렇게까지 심각한 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는 사매에게는 어떻게 들렸을지 모를 일이지만. 루주 자국이 남은 찻잔을 소서 위에 돌려놓는 동작의 자연스러움만 놓고 보자면 경미한 부상이라는 설명이 과히 빈말은 아닌 듯하였다. 기실 그를 안도케 한 것은 일면식도 없는 전문의의 의학적 소견이 아니라 다음 공판일까지는 채찍을 쥘 예정이 없다는 누이의 말마디였다.

“내 상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숨길 게 없게 됐으니, 좀 전에 끊겼던 이야기나 마저 잇는 게 어때?”

“음. 바깥나들이를 하기에 썩 좋은 날씨도 아니고 하니 야외활동은 지양하는 게 좋겠네.”

“좋아. 솔직히 말해서 이즈음 일본의 습도는 오래 견디기가 힘들어.”

“손발의 움직임을 오래 요하는 여가 역시 지금의 네겐 곤란할 성싶군.”

“당연한 소릴.”

“회복 중 컨디션에 지장을 줄 만한 음식들 또한 논외로 두지.”

“……잠깐. 그 얘기는…….”

“앞서의 두 가지 못지않게 중요한 조건이라 보네만.”

요전날 보아 둔 DOCG 등급의 레치오토 와인마저 단념해야 한다는 비보(悲報)에 장탄식을 내뱉는 사매였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적잖은데다 그 책임 소재마저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니 나름대로 상심이 클 것이다. 차마 화를 내거나 따지지도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연거푸 목을 축이는 누이를 위해 찻주전자를 기울이기를 수차례. 미지근해진 마지막 찻물을 잔에 따라낸 남자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함께 어울릴 기분이 아니라면 저택으로 곧장 바래다주겠네.”

“이런 대단찮은 부상 때문에 당신 집으로 가는 걸 내가 마다할 리 없잖아.”

카르마 메이의 저, 드물게 솔직하면서도 곧바른 말씨는 때때로 미츠루기 레이지를 쑥쓰럽게 만들곤 한다. ‘완벽’을 사사하는 동안 금기시되어 왔고 스스로도 내심 불요불급이라 여겼던 감정적 필요를 주고받기란 매양 낯설며 또한 소중하기에. 그리 말해준다면 다행이군.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속 없어 보일 웃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데스크 뒤편의 창가로 다가섰다. 어언간 일몰의 조짐이 피어나면서 티 테이블에 맺혔던 해 그림자가 커튼의 움직임을 따라 바스락댔다.

“집에 볼 만한 영화 같은 건 있어?”

“일전에 네가 상찬했었던 외화의 DVD를 마련해두긴 했네만. 왜, 그, 국제선에서 봤다는 수사 멜로극 말일세.”

“어머, 의외인걸. 내가 아는 미츠루기 레이지는 세상의 많고 많은 엔터테인먼트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나 관심을 띠는 남자인데, 소규모 극장에서나 잠깐 상영됐을 외화의 DVD를 구하다니. 무슨 작정으로?”

“크흠……. 작정이라 할 것도 없었네. 기내에 설치된 액정 화면으로 미장센을 완벽히 즐기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싶었을 뿐.”

그녀의 말마따나 대중문화의 방면에서 기호의 편차가 큰 스스로를 의식하자니 무안스러운 헛기침이 입을 적셨다. 해외 출장길에 오른 누이가 장거리 비행 도중 시청한 한 편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면 실상 그리로 기울 리 없었을 관심이다. 장르물을 표방하는 상업영화에서 으레 난무하는 서스펜스적 장치와 반전, 말초적 자극 따위를 즐기기엔 현실의 업이 깊은 사매가 드물게도 호평을 내놓다니 느와르 영화라도 걸작은 걸작인 모양이라 여겼었다. 가만한 표정으로 붕대 감긴 오른발을 받치던 남자는 불현듯 그날의 마지막 대목을 상기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당신 생각이 났어. 국제선의 환승 시간이 되었다며 전화를 끊기 직전, 그녀가 그토록 감상적인 어조로 말을 끝맺었던 연유란 무엇일는지.

“그 영화의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던가?”

“좋은 점이야 여럿 있었지만, 가장 좋았던 건 역시……. 남자 주인공이 당신을 닮았다는 점일까. 차이점도 조금 있긴 했지만.”

“닮아 있는 동시에 닮지 않았다니, 실로 난제가 아닌가.”

“아닌 척 하면서도 궁금한 모양이네. 당신 그 표정에 다 씌어 있어.”

“음.”

“지금 이 자리에서 이유를 말하지 못할 건 없지만, 그랬다가는 영화를 보는 재미가 줄어들 걸.”

두 계절 내내 미결로 남았던 의문에 몇 시간어치의 유예를 괴어두는 쪽이 그녀를 흡족게 한다면 따르지 못할 것도 없다. 습관처럼 몸에 밴 수긍이 남자의 고개를 움직였고, 그예 만족스러운 표정을 띤 사매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내었다. 식후에 무얼 할지부터 정하고 나니 저녁 메뉴를 정하기가 외려 쉬워졌다며.

슬리퍼를 신고서 딛는 걸음에는 날카로움도 오연함도 한결 덜하다. 에스코트차 곁에 붙어선 사제(師弟)에게 팔을 얽은 채, 다시금 가죽 장갑으로 양손을 방비한 여자가 도(道)내 스시야의 주소를 읊었다. 저녁 여섯 시 반에 수렴해가는 시각, 똑바르게 각이 진 굽 소리와 가볍게 탈박거리는 슬리퍼의 자취가 상급검사 집무실 1202호에서 썰물처럼 흘러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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