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재판

당신의 비밀은 나의 명령

220 by 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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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원을 설명하자면 제법 오래 전에 만들어진 규칙이라 하겠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과 귀가 미처 닿지 않는 유희를 강구하려 들기 마련이므로, 핏줄로부터 발현된 재능이라 여길 것까지는 아니었다. 즉, 아동의 인지발달과정 상 지극히 자연스럽게 제기될 법한 놀음의 일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난스러운 규칙이 미츠루기 레이지에게 독특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까닭은, 다른 누구도 아닌 카르마 메이가 그것을 속삭여왔기 때문이다.

봐, 레이지. 이렇게 하는 거야. 제가 직접 고안해냈다는 ‘규칙’의 완벽성을 자랑하며 일곱 살의 카르마 메이가 가슴을 당당히 펴 보였다. 그 곁에 앉아 종이 한 장어치의 ‘규칙’을 정독한 열네 살의 미츠루기 레이지는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마디의 말을 꼭 세 번까지 하여 반대되게 짓는다는 소통의 양식. 시작은 ‘명령’이요, 끝은 ‘비밀’이라는 신호까지 못박아 둔 것이 자못 고집스러울 정도로 아이다웠다. 달리 말하자면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는 카르마치고는 엉뚱한 구석이 가득한 듯도 하였다. 네게만 알려주겠다며 드레스 자락까지 말아 쥐고 달려온 어린 숙녀의 의중을 전부 짐작하기에는 그 또한 아직은 퍽 어린 나이였다.

“좋아, 그럼 연습 삼아 바로 명령할게. 책이 하나 없어. 혼자 읽기엔 아주 쉬워. ”

“……응?”

“명령이라니까, 레이지. ‘명령’.”

예고도 없이 이어지는 실전이란 당황스럽기 그지없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생경한 대화의 템포를 당연스럽게도 놓치고 만 미츠루기 레이지를 향해 카르마 메이는 뺨을 볼록하게 부풀려보이며 ‘명령’을 연신 강조했다. 나이 많은 남동생이 자신의 완벽한 계획에 호응해주기를 기다려주겠다는 아량을 지닐 적마다 나오는 특유의 버릇이었다. 다행히 미츠루기 레이지의 상황 판단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그녀에게 장단을 맞춰 줄 방법은 이미 손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하여 입 안에서 몇 번쯤 말을 골라낸 끝에 미츠루기 레이지가 말했다. 영어나 유럽어로 적혀 있지 않아? 응, 획이 적은 글자들이 부족해. 내 도움은 필요 없는 거지? 아니, 레이지도 관심 없을 내용이니까. 그럼 산책 나가기 전에 각자 서재를 나오자. 군데군데가 모호하게 흐트러진, 정확히 여섯 마디만큼의 대화가 그렇게 끝났다. 비로소 카르마 메이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비밀’ 성립이야.

어느 철학자가 주장하기를, 인간의 의식은 나선의 구조로 감기어 있어 아주 사소한 계기와 자극에 의해 영영 잊은 줄 알았던 기억을 불러들일 수 있다 한다. 꼭 그와 같은 맥락에서 장난스러웠던 옛 시절을 들추어낸 것이 바로 그녀의 말 한 마디였다. 미츠루기 레이지, 명령이야. 오래간만에 티 타임을 함께하는 오전 11시. 알맞은 온도에서 끓여진 홍차의 향을 즐기던 미츠루기 레이지는 곧장 시선을 끌어올려 카르마 메이를 바라보았다. 코도피아 대사관에서의 협업 이래로 그녀는 종종 그를 자신의 직속 부하처럼 대하곤 한다. 이번에도 예의 그 부하 취급의 일환일 가능성이 적지 않았지만, 혹시나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며 미츠루기 레이지는 카르마 메이의 다음 말을 경청하였다.

“주말에, 시간이 좀 없을 것 같거든.”

“……으음. 쇼핑과 관극을 제외한 이야기인가?”

“전혀, 둘 중 아무것도 아니야.”

“하루가 제법 길겠군. 그래서, 혼자 가려는가?”

“티켓을 서둘러 마련해야 하겠지만. 거부권 정도는 주도록 할게.”

“이런. 갑작스러운 이야기로군.”

몇 분간 이어지는 침묵. 말끔하게 비워진 찻잔이 받침 위에 놓이며 자그맣게 달각이는 소리가 났다. 그 오래된 ‘규칙’을 여전히 잘 구사하는군, 메이. 흥, 제법 유치하게 짜여진 암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당신이라면 잊어버렸을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간만에 꺼내 봤을 뿐이야. 아무튼, 그 바보 같은 표정을 보아하니 여기서 굳이 선언을 더 할 필요는 없겠네. 그렇지? 레이지. 카르마 메이의 뼈 있는 지적대로, 돌아오는 주말의 일정은 몇 달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었다. 훗, 하는 짧은 웃음과 함께 미츠루기 레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 사이에서 비밀 아닌 비밀이 다시금 성립되었다.



미츠루기와 메이가 주고받은 ‘비밀 명령’의 규칙은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의 가라가나(がらがな,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반대로 이야기하는 암어적 유희의 일종)라는 소재를 모티브로 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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