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가 되지 아니한 세상에서
역전재판1 - 소생하는 역전 스포일러 주의
고생하셨습니다. 준비해 둔 물잔을 건네며 차석 수사관, 호우즈키 토모에가 말했다. 수석 수사관 겸 경찰부청장 간토 카이지는 그것을 한달음에 마신 뒤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음, 역시 이런 자리까지 와서 날 챙겨주는 건 토모에 누나밖에 없다니까.”
“오늘 일정에는 저밖에 대동하지 않으셨으니 어쩔 수 없죠.”
평소와 같이 온화한 어조의, 하지만 또렷하게 사실을 적시하는 부관의 대꾸에 간토 카이지는 탄성을 터뜨리듯 웃었다. 이런 자리에 사람이 너무 바글바글하면 아이들 정서에 그닥 좋지는 않을 테니까. 혼자만 살뜰히 부려먹으려고 대동한 건 아닌데, 혹시 삐졌어? 그럴 리가요. 이런 자리에 참석하는 것도 귀중한 현장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가 내미는 빈 잔을 받아드는 호우즈키 토모에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이런 자리’라 함은 대민(對民) 관련 업무를 가리킨다. 유수의 정치인들과 행정가들이 지역사회 내의 모임이나 기관 등지에 얼굴을 비추며 여론을 고취하는 것은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다. 경찰청에서도 꼭 그와 같은 취지에서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중단기형 캠페인을 기획하는 전담 부서를 두고 있으며, 개중 몇몇은 치안 확보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매 행사마다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인력이 차출되는 것을 숱하게 봐 왔다 보니, 호우즈키 수사관으로서는 간토 부청장이 이번 캠페인에 자신만을 콕 집어 동행시킨 데에 별다른 의구심을 가지지 않았다.
“아~ 너무 오랫동안 말을 하고 몸을 써서 그런지 좀 피곤한 것도 같고?”
“안 돼요, 저 아직 면허 없단 말이에요.”
경찰 고위직이 졸음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냈다는 기사가 사회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는 불상사는 부디 피해달라는 말을 덧붙이며 호우즈키 토모에가 재킷의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알이 굵은 눈깔사탕 하나가 바로 그녀의 손끝에 잡혀 올라왔다. 이걸로 40분만 참아주세요. 여기서 토모에 누나네 집까지가 딱 40분 거리잖아. 하룻밤 자고 가도 된다는 건가? 능청스럽게 운을 띄우는 간토 카이지에게 호우즈키 수사관이 딱 잘라 말했다. 저희 맨션 주차장, 미등록 차량 대상으로는 시간 당 3천 엔 받아요. 그럼 안 되겠네, 뭐가 그렇게 비싸? 잠이 확 달아나는구먼. 건네받은 사탕을 왼쪽 뺨 안쪽으로 밀어넣은 남자의 손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촬영 담당’이었던 토모에 누나가 보기엔 어땠어? 오늘 너무 어색하지 않았나?”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져 있는 내용을 들려주신 건데 어색할 것까지야 있나요.”
“혈혈단신으로 반 세기 가까이 살아온 입장에서 애들과 부대껴봤어야 말이지. 대관절 어떤 친구가 조직의 넘버 투를 상대로 동화구연 이벤트 같은 걸 주문한 건지, 원.”
월요일이 되면 이걸 기획한 친구가 누구였는지 꼭 확인해 봐야겠다며, 하소연인지 험담인지 모를 말을 늘어놓는 간토 카이지의 옆자리에서 호우즈키 토모에는 픽 하고 웃고 말았다.
“잘 하셨어요, 정말로. 처음 보는 사이였던 걸 고려하면 아이들의 호응도 그만 하면 좋아 보였고요.”
“뭐어, 기관지에 실릴 때는 애들 얼굴에 모자이크가 들어가서 정말로 호응이 좋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보도가 나가겠지만 말이야.”
“피해자의 신상이 특정되어서는 안 되니까요.”
사거리에서 신호를 대기하고 있을 무렵, 호우즈키 토모에는 무릎맡에 두고 있던 서류철의 앞면을 넘겼다. 근 1년 간 있었던 아동 대상 유기 및 약취 사건의 피해자들을 위문하기 위한 단발성 캠페인의 개괄과 진행 순서가 기술된 공문의 최상단에 그들의 이름이 나란히 올라 있었다. 근시일 내로 시작될 아동학대 방지 특별법의 집행과 관련하여 여론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부의 설명을 재독할 즈음, 옆자리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있지, 토모에 누나. 이렇게 하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오늘의 우리는 어른의 사정에 아이들을 동원하는 연출을 벌인 것과 다름없는데.”
“…….”
“이 일도 오래 하다 보면 구석구석에서 탁상행정의 한계를 깨닫게 된단 말이지. 내 보기엔, 애들 장난 같은 동화보다는 제대로 된 심판을 바라는 눈들도 아까 그 자리에서 제법 보였어. 어른들의 동화에나 어울릴 법한 ‘권선징악’ 말이지.”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그 머릿속에 든 생각들을 마냥 무시할 게 아냐. 평소의 가볍게 떠 있곤 하는 텐션이 온데간데없이, 조금쯤은 낯설다고도 할 수 있을 어조로 그리 말하는 간토 카이지였다. 조수석을 벗어나더라도 그와 같은 방향을 으레 바라보곤 하는 호우즈키 토모에였기에, 섣부르게 대답할 수 없는 종류의 질문이었다. 캠페인에 초청받은 스무 명 남짓의 아이들 중 절반 가까이는 정신외상의 치유를 위한 심리상담을 받고 있다는 것 같았다. 모임 내내 주변 사람들과 눈 맞춤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겨우 자리보전만을 하던 한 아이의 경직된 얼굴을 떠올리며 그녀는 무심코 엄지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댔다. 또 손가락 씹으려고? 하고 묻듯이 룸 미러를 통해 가볍게 눈치를 주는 간토 카이지의 시선이 그 행동을 알맞게 멎혔다. 지척의 신호등의 불빛이 청색으로 변하며 부드러운 주행이 이루어져 나갈 즈음, 호우즈키 토모에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이럴 때일수록…… 원칙을 되짚어야 하지 않을까요?”
“원칙?”
“분명 이 세상은 동화 같을 수 없지만, 한 차례의 나쁜 경험으로 인해 삶이 ‘비극’ 내지 ‘잔혹동화’로 결론지어져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요. 죄를 지은 사람에게 마땅한 심판을 내리는 것과는 별개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도움이 되어 줄 어른들이 있다는 걸 아이들에게 알리는 것이야말로 저희 의무잖아요. 이번 캠페인의 궁극적인 목표도 그랬던 것 같은데요.”
“오, 제법 어른스러운 얘기를 하잖아. 내가 보기에는 토모에 누나도 아직 한참은 어린데 말이지.”
너털웃음을 곁들였지만 속은 다소 알 수 없는 말이 직속 상관으로부터 제기되는 데 호우즈키 토모에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그대로 적당한 깊이의 침묵이 드라이브 내내 이어졌다. 교각을 두 차례 지나고 사거리를 세 번 거쳐,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에야 차는 멈추었다.
오늘 하루 수고가 많았어. 내일은 동생 아가씨와 유원지로 놀러간다고 했던가? 차편이 필요하면 편히 연락 달라고. 부청장님도 쉬실 땐 쉬셔야죠. 들어가보세요. 사진은 보정 후에 메일로 전달해 드릴게요. 응, 수고. 집까지 태워다 주셔서 감사하다며 고개 숙여 인사하는 부관을 향해 간토 카이지가 가볍게 오른손을 들어보이고는 창문의 슬라이드를 올렸다.
차가 코너를 돌아 사라지고 난 다음에야 호우즈키 토모에는 한숨을 폭 내쉬고 발걸음을 돌렸다. 동화책 대신 과학 전집을 읽고 싶다고 부쩍 떼부림을 하기 시작한 동생, 호우즈키 아카네가 기다리고 있을 정다운 공간을 향해 구둣발이 차츰 가까워져 갔다. 조금 전의 모임에서 만났던 아이들과 크게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사랑스러운 혈육에게, 오늘만큼은 꼭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아줘야겠다고 마음먹은 채로 문에 열쇠를 꽂아 돌렸다.
아직 호우즈키 토모에가 간토 카이지의 징벌론에 동화되기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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