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feelings

청우문대

bad feelings

류청우 X 박문대

그런 날이 있다.

잊고 있던 추억이 불현듯 떠올라 사람을 한순간 깊은 구덩이로 끌고 들어가는,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내 어린 영혼을 빼앗으려드는 것이 슈베르트의 가곡 속 마왕이라도 되었다면 압도적인 절대자를 마주한 어린 아이처럼 겸허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괴롭히는 것은 다름 아닌 오래 전 잊은 내 감정들이었다.

시스템이 날려버렸던 이전 생의 기억들. 무력감, 답답함, 체념 같은 감각들. 그것들은 벌레처럼 스멀스멀 팔다리를 타고 기어오르며 게걸스럽게 나를 집어삼켰다. 나를 잊었니, 이제 나와 함께 가자. 그렇게 고막 가까이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아. 우울증인가.'

  

사람들의 반응에 즉각적으로 희비가 교차하는 이런 직종에 종사하노라면 언젠가 한 번 쯤은 마주할 진단명이다. 또 연예인이 아니라도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질병이기도 하다. 경쟁, 갈등, 줄타기, 떠올리다보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장시간 멈춰 있던 노트북 화면이 검게 변했다. 무의식적으로 마우스를 흔들었다. 노트북 화면의 불빛이 어둔 방안을 밝혔다. 달칵, 달칵. 빛이 뿜어져나오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스크롤을 내리고 버튼을 클릭했다. 하루를 마무리할 즈음 하는 반복적인 일과이다. 클릭, 스크롤, 스크랩, 타이핑, 그리고 다시 클릭.

 

[ 인기 아이돌 박**군 연예인병 논란 ?! ]

[ 테스타 화려한 정상 탈환 아쉽게 놓쳐... ]

테스타나 박문대의 이름이 들어간 자극적인 제목의 콘텐츠가 하루에도 수십 개씩 웹사이트에 떠돌아다닌다. 알맹이 하나 없는 부실한 내용의 클릭베이트Clickbait용 기사들. 눈에 보이는 것만 이 정도인데 보이지 않는 것까지 고려하면 얼마나 될 지…. 왠지 기도가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양손 가득 펼쳐 눈을 가렸다. 이렇게라도 보지 않으면 답답함이 가실까 싶어서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금방 바보 같다는 생각이 차올라 손을 내렸다.

 

어쩐지 우울의 원인을 고작 이런 한 줄짜리 헤드라인에 돌리고 싶지 않았다. 거짓기사, 우울증, 라이벌, 테스타, 가족, 교통사고, 화재, 펜션. 그렇게 상념은 타고, 타고, 타고 깊이 묻어둔 어느 죽음에 도달했다. 문득 생이 이렇게 끝나더라도 그 끝은 꽤나 행복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어느 죽음은 단 한 줄의 기사도 남기지 못하기 때문에….

'테스타 박문대라면 기사가 수 십 개는 나겠지.'

박문대는 무기력하게 반복노동을 이어갔다. 다시 클릭, 스크롤, 스크랩, 타이핑, 또 다시 클릭. 정보의 바다는 맹렬한 뉴스 기사의 폭우를 맞으며 넘실거렸다. 눈앞의 검은 글자들이 시야를 덮쳤다. 작은 돛단배를 닮은 커서는 불안정하게 바다를 표류했다. 이 표류는 바다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집어삼켜지는 것이 고작인가.

눈앞이 명멸한다. 삐—— 뱃고동이 높게 그리고 오랫동안 귓속을 파고든다. 모니터에서 벗어난 활자는 지금이야말로 너를 잡아먹겠노라 경고하며 내게 다가온다.

"문대야! 박문대!"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온 것은 환한 모니터가 아니라 울고 있는 류청우였다. 그는 실의에 빠진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을 품에 밀어넣고 류청우가 줄줄 눈물을 흘렸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작은 섬조차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떠다니고 있었던 게 아니었나, 나는? 갑자기 뭍으로 건져올려진 바다생물이 된 심정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녀석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목덜미가 녀석이 흘린 눈물로 젖어들었다. 피부에 짠 물이 스몄다. 나는 그것이 꽤나 달갑게 느껴졌으나, 그게 그의 눈물임을 인지하고선 조금 답답해졌다. 류청우는 뭐가 그렇게 슬픈 것일까. 꽉 붙잡힌 팔다리가, 몸통이 갑갑했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저 때문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곧 류청우는 진정이 되었는지 슬그머니 몸에서 힘을 풀어주었다. 신체는 자유로워졌으나 어쩐지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에게 구속이라도 당하고 싶은 걸까. 갑자기 부모를 잃은 어린 아이처럼 마음 둘 곳 없이 혼란스러웠다. 울음을 그친 류청우는 그런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마주한 그의 얼굴에 눈물 자국이 흥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얼굴을 보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아, 알았다. 내가 그를 다독이는 줄 알았더니, 그가 나를 다독이고 있던 모양이다.

슬픔은 수용성이라 했던가. 그의 눈물이 내 우울도 녹여내고 죄다 흘려보낸 것이 분명했다. 잊었던 이전 생의 기억들과 더불어 우는 법조차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터라 슬픔을 마땅히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러니 류건우의 몫까지 대신 울어주는 류청우를 사랑할 수밖에.

우울이 떠난 빈 자리에 미안함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걱정시켜서 미안하다 전해야 하는데 입이 꽉 닫혀 열리지 않았다. 이제 막 뭍으로 끌어올려진 탓에 입으로 호흡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탓이다. 입을 벌리는 대신 팔을 올려 그가 안았던 것보다 세게 그를 끌어안았다. 류청우는 당황한 눈치였으나 곧 더 큰 힘으로 나를 감싸안았다. 그리고 내 입을 기어코 벌려내 숨을 밀어넣었다. 말라버린 입술을 타액으로 적시고, 입안의 연한 감각을 일깨웠다. 내 기도가 어디에 붙어있는지 가르치고, 헐떡이며 숨을 쉬게 만들었다.

그 덕에 말을 배운 나는 호흡을 되찾자마자 그에게 놀리듯 물었다.

"다 울었어요?"

"…아니."

키스를 하는 내내 짠 맛이 밀려들지 않았나. 아직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는 그에게 다시 말했다.

"그럼 더 울어도 되는데."

"문대 너…. 아니, 건우 형. 형 쓰러질 뻔 했어요."

"…미안해, 걱정 끼쳐서. 스트레스가 심했나보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눌 정도로요.”

“응, 그랬나봐.”

류청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힘들었느냐 물었다. 옛 생각이 났는지,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자신이 옆에 있어도 되는지. 그 말에 담긴 속뜻을 이해 못할만큼 눈치가 없진 않았다.

 

"지금은 괜찮아요."

형 오기 전까지는 힘들었던 것 같은데, 형 오고 나서 다 괜찮아졌어요. 형이 옆에 있어서 참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 소곤소곤 연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가슴께에서 몽글몽글한 빛이 피어오르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를 좀먹던 감정들은 언젠가 또 나를 죽이려 기회를 노릴 것이었다. 그러나 뭐, 괜찮지 않을까. 이렇게 또 류청우가 물리쳐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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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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