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승심

청우문대 연애하는 거 김래빈이 제일 먼저 알아차리는 이야기

류청우는 승부욕이 있는 남자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린 나이에 올림픽이라는 무대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며,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데뷔하는 데 성공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테스타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도 류청우의 승부욕이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으리라. 류청우는 누구에게든 지고 싶지 않았다. 양궁 국대 시절에는 다른 나라 선수들은 논외였고, 같은 팀인 형들에게조차 지고 싶지 않았다. 아주사 시절에는 팀으로서 성과가 그리 좋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류청우는 지지 않으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테스타로 데뷔한 이후에도, 명실상부한 1군 아이돌 자리에 선 뒤에도, 승부욕은 죽지 않았다. 설사 그 대상이 제 팀의 멤버라고 할지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류청우는 그 순간 쿵쿵대며 뛴 심장을 호승심이라 여겼다.

  

[ Welcome to the HUNTHOUSE! ]

 

서커스 천막을 배경으로 휘몰아치는 무대. 박문대가 클라이맥스 파트를 내지르던 때,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박문대에 대한 감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소름, 경탄 그리고 침묵. 비단 관객 뿐만 아니라 같은 멤버인 류청우도 그 순간만큼은 그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류청우는 박문대의 초고음이 터지는 순간 김래빈이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았다. 박문대와 눈이 마주친 듯한 김래빈이 눈을 크게 떴다. 김래빈은 표정에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연습 때보다 더 상승한 박문대의 가창력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상하게도 김래빈을 보며 류청우는 평정심을 잃고 흔들렸다.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평정심은 류청우의 가장 큰 무기였다. 침착함을 잃고 흔들린 건 데뷔 초 예상치 못하게 음악방송 1위 트로피를 거머쥐던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당혹감과 결이 다른 감각이었다. 찌릿-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가슴 한 구석이 아렸다. 류청우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안무를 이어갔다.

 

 

묘하게 다른 느낌을 선사해준 서울 공연이 끝났다. 공연마다 두근거림이 샘솟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번 공연은 뭐랄까, 그 두근거림의 정도나 심장의 찌릿거림이 달랐다. 숙소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도 기묘한 떨림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박문대가 하이라이트 부분을 불렀던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질투?"

문대한테? 나도 잘 하고 싶어서 그런 건가…. 문대는 원래 잘 하는 사람이니까. 

류청우는 손에 쥔 스트레스볼을 주물럭거리며 생각했다. 멤버의 성장에 질투나 하는 자신이 우습다고. 휙- 류청우의 머리 위로 스트레스볼이 던져졌다가 툭- 다시 손 위로 떨어졌다. 류청우는 한참동안 멍하니 행동을 반복했다.

탁- 손에 말랑한 볼이 잡혔다. 그리고 멈췄던 생각이 이어졌다. 

음- 아무래도 문대한테 레슨이라도 받아야 되나.

그게 좋겠다.

 

투어가 다 끝난 뒤 휴식기간, 류청우는 박문대와 김래빈이 함께 쓰는 숙소의 방문을 두드렸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김래빈은 헤드셋을 끼고 음악 작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즉, 똑똑 소리에 반응하는 것은 박문대 뿐이었다. 문이 열리고 곧바로 박문대의 얼굴과 마주했다. 심호흡 한 번 하고 방문을 열였던 류청우는 말간 하얀 얼굴을 보고는 맥없이 웃음이 나왔다. 긴장이 탁 풀린 나른한 무표정. 그 얼굴을 보는 것은 그와 가까운 사람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생각한 적도 있다.

실없이 나오는 웃음에 그냥 옆에 앉아 그에게 귀염이나 받을 뻔했다. 그렇지만 류청우는 찾아온 용건을 잊지 않았다. 그는 문 앞에 선채로 입을 열었다.

"형, 나 노래 가르쳐줘."

"노래?"

"응, 노래. 나도 노래 잘 하고 싶어. 형처럼."

뱉고나서 보니 묘하게 투정처럼 들렸다. 왜 형만 노래 잘 해? 하는 투정. 제 불안감을 느낀 걸까, 짧은 침묵 사이에 그의 머리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 듯 했다. 정적이 이어지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궁금해졌다. 저 작은 머리를 헤집고 들어가고 싶었다. 미묘한 호기심이 일렁이던 찰나 그가 말했다. 류청우의 마음 한 구석에서 기대가 밀려왔다.

"...청우 너도 잘 하면서 왜. 여기서 어떻게 더 잘하려고." 

언뜻 거절인 것처럼 들리지만 거절은 아닌, 무슨 생각으로 이러나 저를 걱정하는 것이다. 박문대는 참 다정한 사람이다. 분명 류청우 자신에 비해 훨씬 더 실력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을텐데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잘 하고 있어, 조바심 내지마. 류청우를 다독이고 있다. 그의 다정함과 별개로 류청우의 호승심은 어쩔 수 없는 거라 류청우는 단호하게 다시 한 번 말한다.

"지금보다 더 잘 하고 싶어." 

돌아오는 것은 허락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근데 내가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는데 나로 괜찮겠어?"

"하하- 무슨 소리야. 형만큼 노래 잘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내가 열심히 배울게."

달가운 대화는 방안에 머무르던 또 다른 내부인에 의해 잠시 중단되었다.

"문대 형" 

류청우의 표정을 살피던 박문대는 김래빈의 부름에 즉각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다시 문가에 서있는 류청우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려 입모양으로 가만히 말했다. 

앉아.

툭툭- 제 침대의 빈 자리를 두드리며. 류청우는 박문대의 손짓 하나에 어느 틈에 내려가있었는지 모를 입꼬리를 자연스레 끌어올렸다. 그리고 박문대 옆에 다가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의 옆에 나란하게.

"아, 청우 형도 계셨군요. 계속 작업을 하는 중이라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제가 대화를 방해한 것은 아닐까요?" 

"어, 아니다. 그렇죠, 형?"

"응, 문대랑 하려던 이야기는 막 끝난 참이었어."

"그래서. 왜 불렀냐, 래빈아."

"작업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번에 문대 형께서 실력적으로 더 상승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형 솔로로 사용할 음악을 만드는 중이었습니다."

류청우는 그의 말이 쿡쿡- 바늘로 제 심장을 쑤시는 것 같았다. 김래빈의 말에 집중하던 박문대는 아차, 싶은 표정으로 류청우를 돌아보았다. 류청우의 마음이 다치기라도 했을까봐 놀란 것 같았다. 사려깊은 그의 표정에 류청우는 오히려 평정심을 찾았다.

"그런데 작곡하다보니 음역대가 예상보다 많이 넓어져 청우 형에게 잘 어울리는 부분과 문대 형에게 잘 어울리는 부분이 각각 절반 정도 생겼습니다. 그러니 혹시 방해가 되지 않으신다면 두 분께서 노래를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조언해주신다면 수정 뒤에 다음 앨범에 수록곡으로 사용하는 건 어떨까요? 아! 형들께서 나중에 유닛을 하게 된다면 그때 사용하는 것도 저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투어에서 깜짝 발표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김래빈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박문대는 점점 안도하고 있었다. 류청우는 후- 한숨을 내쉬며 꺼지는 그의 가슴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류청우는 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하염없이 다정한 사람, 그게 박문대였다. 박문대는 류청우의 손을 잡고 일어나 김래빈의 책상으로 성큼 향했다. 평소 멤버들끼리 자주 손을 잡곤 했는데 오늘따라 류청우에겐 박문대와 맞잡은 손이 뜨겁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놓고 싶지 않아 손가락을 꿈틀거리다 깍지를 껴서 잡았다. 그리고 작업물을 듣는 내내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김래빈이 선물해준 곡은 박문대의 솔로곡으로 작업을 시작했던 곡이니만큼 당연하게도 부르기 어려웠다. 유연하게 변화하는 박자를 잡는 것도 그렇고, 박문대와 함께 화음을 쌓는 것도 그렇고 쉽지 않은 곳이 없었다. 처음 김래빈이 작업물을 들려줬던 날, 박문대조차도 '이걸 사람이 부르라고 만든 게 맞냐?'고 물었을 정도니. 물론 김래빈은 눈을 꿈뻑거리며 '청우 형과 문대 형을 위한 곡이니까 사람을 위한 곡이지 않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류청우에게만 어려웠던 것은 아니고, 박문대에게도 쉽지 않은 곡이었다. 김래빈이 만들었던 노래가 달콤한 연인의 사랑노래였던 까닭이다. 박문대가 사랑노래를 안 불러본 것은 아니다. 꽃그믐 같은 노래도 있고, 타이틀 곡 중에서도 사랑노래라 생각할 만한 것들이 몇 있었다. 다만 그런 곡들은 컨셉츄얼하다는 면 때문에 엇비슷한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 됐는데, 이번 듀엣곡은 대놓고 연인을 위한 곡이었다. 서로를 지독히도 사랑하는 연인.

가이드 작업을 위해 녹음실에 들어가서도 박문대는 래빈이에게 재차 물었다.

"래빈아, 이거 정말 나랑 청우 형 부르라고 만든 게 맞냐?"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예? 예, 그렇습니다. 테스타 내에서 가창력이 가장 좋으신 두 분이신만큼, 두 분이 부르지 못한다면 어떤 누구도 부를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박문대는 '이 달콤한 노래'를 자신들이 부르는 게 맞냐고 물어본 것이지만, 김래빈은 '이 극악한 난이도의 노래'라고 이해한 모양이었다. 녹음실의 투명한 창 너머로 박문대와 눈이 마주친 류청우는 피식 웃음이 삐져 나오는 것을 참지 못했다. 박문대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차마 눈을 빛내며 자신있는 어조로 답하는 김래빈에게 더 묻지 못했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는 허밍을 시작했다.

사실 처음 김래빈이 노래를 들려주었을 때 류청우는 자신이 이 노래를 더 잘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감정이 고조되는 클라이맥스에서 박문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내 잡고 있던 손이 움찔거렸다. 움츠리다 맞닿은 팔에서는 열기가 느껴졌다. 박문대의 반응을 돌이켜보건대, 박문대 또는 류건우는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없는 듯했다. 류청우는 심호흡을 하는 박문대를 보며 형은 사랑을 해보지 못했으니 자신이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당연히 가창력의 측면만 놓고 본다면 박문대가 우위라는 것은 가슴아픈 사실이지만, 감정을 살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 않나.

그러나 가이드 녹음이 시작되고, 미완성된 가사를 부르는 박문대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류청우는 직감했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형 연애해본 적이... 있었나...'

류청우는 침울해졌다.

가이드 녹음을 단번에 마치고, 악상에 대한 김래빈의 설명을 듣고, 간단히 밖에서 점심을 먹고, 김래빈을 숙소로 데려다주고, 둘은 다시 연습실로 향하는 차에 올라탔다. 류청우는 운전대를 잡았고, 박문대는 조수석에 앉아 말없이 음료를 류청우의 입에다 물려주었다. 여전히 내려가있는 류청우의 입매 끝을 보며 박문대는 생각이 많아졌다. 고민 끝에 박문대는 류청우에게 물었다.

"형, 노래가 생각보다 더 어려워서 그래요?"

"으응, 그것도 그런데."

류청우는 박문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침 빨간 불로 신호가 바뀐 덕분이다.

"형, 연애해본 적 있어요?"

류청우와 류건우의 눈이 마주쳤다.

"아니, 없어."

"...그럼, 왜 그렇게..."

그 노래를 잘 불러요.

류청우는 뒷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그러나 류건우는 뒤에 이어질 말을 알아차렸다.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류건우는 창가를 괴고 있던 팔을 뒷목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뒷목을 문질렀다. 다시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었고, 류청우는 브레이크에서 엑셀로 왼발을 옮겼다.

류청우는 심란해졌다. 좋아하는 사람, 형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이상하게 지난 콘서트 때처럼 마음이 쿡쿡 쑤셔왔다. 입술을 앙 다물고 류청우는 애써 속상함을 감추었다. 박문대는 류청우를 쳐다보지 못하고, 대신 얼음이 녹아내리고 있는 아이스티에 둔 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있었다. 류청우는 앞만 보고 운전하느라 박문대와 제 사이에 놓인 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류청우의 혼란스러움과는 별개로 녹음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류청우를 가르치는 박문대의 실력이 탁월함은 말할 것도 없고, 박문대에게 배우는 류청우 역시 실력적으로 뛰어났다. 거기에다가 둘의 성실함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새 아침 운동을 마치고 김래빈, 박문대와 함께 작업실에 가는 것이 류청우의 루틴으로 정착했다.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자 이세진은 선아현을 붙잡고 마찬가지로 안무 연습에 열을 내기 시작했다. 인형 사냥꾼 시즌 2를 찍느라 밤늦게 들어오던 배세진은 김래빈과 박문대가 밤에 일찍 잔다며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내심 좋아했다. 그리고 김래빈을 붙잡고 그동안 녹음한 가안이라도 들려달라고 졸랐다. 당연하게도 완성본을 들으라는 박문대의 말로 그의 요구는 컷 당했다.

그러나 류청우는 박문대가 노래부르는 걸 곁에서 들을 때면 울컥 화가 치밀어올랐다. 서운한 것도 같고, 속상한 것 같기도 했다. 평생 가도 못 이기려나. 나도 잘 부르고 싶은데.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지. 이런 목소리로 노래 불러준다면 누구든 형을 안 좋아할 수 없을 텐데... 대상이 누구인지 궁금했으나 알게 된다면 그것도 싫을 것 같았다. 류청우는 박문대 앞에서는 속절없이 애처럼 굴게 된다 생각했다. 박문대는 류청우가 입술을 짓씹으면 슬며시 다가와 입가를 가만가만 만져주곤 했다. 그게 참, 뭐랄까 기분이 좋았다.

그 덕에 류청우는 우습게도 이제야 제 감정의 정체를 자각하기 시작했다. 승부욕, 질투, 조급함. 아, 콘서트 장에서 느낀 감정은 호승심이 아니었다. 그냥, 첫사랑이었다.

 

 

*

 

- 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 오~ 우리 래빈이가 우리한테 궁금한 것도 있어? 흑흑, 너무 오래간만이라 눈물이 다 나네.

AR 팀의 너스레에 김래빈은 겨우 입을 떼었다.

-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창법이 비슷해지는 건 왜인지 알고 계십니까? 창법 뿐만이 아니라 목소리나 분위기도 비슷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잠시 숨을 삼켰다가 서로 눈치를 살폈다. 답은 알고 있지만 물어본 사람이 사람인지라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러다 한 사람이 대뜸 말을 시작했다.

- 음,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데. 화가들끼리도 그런 경우가 있대. 원래는 서로 화풍이 달랐는데 사귀면서 점점 비슷해졌다고 하는데. 가수들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의도적으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따라하는 게 아니라면.

- 연애... 말씀이십니까?

- 그렇지, 아니면 뭐, 짝사랑?

직원들은 김래빈으로부터 스캔들이라도 알게 되려나 괜한 호기심이 들었다. 하지만 둔한 그가 눈치챌 정도라면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러므로 김래빈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다시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김래빈은 들고 있던 펜을 굴리며 새로이 얻게 된 정보를 머리 속으로 정리해나갔다. 몰랐던 사실을 받아들여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최근 류청우와 박문대의 녹음 작업을 진행하다보니 문득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첫째, 전에 비해 류청우의 실력이 확연히 늘었다는 것. 둘째, 원래도 비슷하다고 느꼈던 류청우와 박문대의 창법, 음색이 더 비슷해지고 있다는 것. 게다가 그 분위기마저도 점점 유사해지고 있었다. 자신의 귀가 맞다면 그 둘은 서로를 점점 닮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AR팀 직원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함께 조합해보면...

"...!" 

손에 들고 있던 펜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러나 김래빈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생각을 멈추지 못하고 이어갔다. 두 사람을 떠올리며 만든 곡이 그래서. 김래빈은 자신이 로맨틱한 작곡을 하게 된 이유를 불현듯 깨달았다. 그래서 문대 형이 첫 날 그렇게 물었구나. 내가 알아차린 줄 알고. 음, 자리를 좀 피해드려야겠군. 그동안 자신이 눈치없이 두 사람의 데이트를 방해했다고 여긴 김래빈은 다음 날 둘에게 장문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남겼다.

[ 형, 오늘부터 당분간 저는 녹음실에 나오지 않기로 했습니다. 최근 제가 작곡하는 음악의 폭이 제한되는 것 같아 다른 분들의 녹음 현장을 견학하는 것으로 소속사 AR 팀에 요청드렸습니다. 저희 앨범에 사용할 곡들이 유출되는 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니 정식 녹음은 2주 뒤에 다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그리고 제가 알아보니 녹음실과 그 주변 복도에는 따로 CCTV가 설치되어 있지는 않다고 합니다! 소속사 내 테스타 전용 녹음실이기 때문에 편하게 사용하시면 되겠습니다. ]

당연하게도 류청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이었고, 박문대는 마지막 두 문장에서 말의 뉘앙스를 알아차렸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작업실에서마저 내내 붙어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그 날 류청우는 김래빈의 지원사격에 힘입어 박문대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물론 박문대는 기꺼이 그 공략에 넘어가주었다.

작업실에서 함께 붙어앉아 타이밍을 노리던 류청우의 시야에 박문대의 희고 가는 손가락이 들어왔다. 잡고 싶다. 생각이 들자마자 류청우는 그에게 뜬금없는 말을 건네었다.

"형, 연애 안 해봤다고 했잖아."

"그랬지."

박문대는 차 안에서 괜히 다 녹은 아이스티만 들었다 놨다 했던 제 자신을 떠올렸다. 류청우의 손을 잡고 싶어 조바심이 났던 제 자신이 우스웠다. 피식-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제 입에서 흘렀다.

"나도 연애 안 해봤는데, 형도 안 해봤다면서. 근데 형은 어떻게 그렇게 불러? 나 이 노래 더 잘 부르고 싶은데 감정이 잘 안 잡혀."

박문대는 류청우의 말에 '그건 탐닉의 시간이라는 부가효과 때문'이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시 닫았다. 생각해보니 그건 무대 위에서 몰입도였지. 음, 그럼 정말 류청우 때문인 것 같은데. 3분 내내 사랑한다고 말하는 노랜데 그걸 류청우랑 같이 부르니 당연히 감정이 잘 잡힐 수밖에 없지 않나. 긴 침묵이 이어졌다. 류청우는 침묵을 버티지 못하고 박문대를 재촉했다.

"형?"

"아, 미안미안. 생각 좀 하느라고. 너는 내가 어떻게 도와줬으면 좋겠냐."

음, 류청우는 이기는 방법을 아는 남자였다. 또 자신의 승리를 직감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 순간 류청우는 박문대의 손을 잡은 제 모습을 상상했다.

"나랑 손 잡아줘. 연애하는 건 어떤 기분인지 궁금해." 

 

다시, 김래빈과 함께 녹음 작업을 재개했다. 부스 안에서 박문대가 목을 풀고 있었다. 어제는 그 부스에서 박문대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입술을 부벼댔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감출 수 없었다. 작업실 구조상 김래빈이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속도가 느린 김래빈이라 할지라도 제 얼굴을 봤더라면 분명 알아차릴 터였다. 박문대는 이제 막 헤드폰을 끼고 마이크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다. 류청우는 제가 아끼는 그 목소리로 박문대가 듀엣곡을 얼마나 행복하게 불러줄지 들뜬 기분이 되었다.

박문대가 입을 열어 미성을 내는 순간, 류청우는 그에게 결국 패배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기분이 좋았다. 박문대에게 지는 것은 싫지 않았다. 되레 달콤했다. 그에게 지는 동안은 도와달라고 어리광부릴 수 있을 것이며, 그가 앞서 나가는 것을 뒤에서 응원할 수 있을 것이었다. 류청우는 유리창 너머의 연인에게 미소지었다. 눈이 마주친 연인이 적절한 타이밍에 사랑의 언어를 입에 담았다. 짜릿했다. 아, 이건 누가 들어도 연인의 목소리인데- 류청우는 이따 숙소에 돌아가는 길에 김래빈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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