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고요해진 밤

비휴 by 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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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왜 이 모양으로 돌아가는지, 아릿한 두통과 함께 단편적인 기억들이 드문드문 이어진다. 분명 어제는,

요청을 받고서 뛰어간 자리에는 이미 서른이 넘는 수의 사람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어중이떠중이만 모은 것은 아닌지 몇몇 얼굴은 최근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해서 성현아도 얼굴은 기억하고 있는 인간들이었다.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달리던 다리가 귓구멍을 향해 쏘아지는 괴성에 움츠러든다.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것은 모험가들이 아니었다. 수적으로는 훨씬 유리함에도 누구 하나 먼저 달려들지 못하고서 거대한 괴물을 방치한 채 지켜만 보는 상황이었다.

"다들 뭐 하는 거야! 여기서 멈출 생각이야?"

"그럼 네가 먼저 가보든가!"

이런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 용병으로 보이는 두 인간이 서로 다투며 말싸움 따위나 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제껏 살아온 것은 실력 따위는 상관이 없다. 높은 등급의 모험가들이라면 모를까 우리같이 새벽에 불려 나온 어중이떠중이 모험가들은... 순전히 운이다. 조금 더 안전한 의뢰를 맡을 수 있던 운, 위험한 순간에 대신 죽어줄 동료가 있었던 운, 던전이 요동치지 않았던 운, 처음 고른 길드에서 처음 받게 된 의뢰가 고양이 찾기 따위였던 운…….

실랑이를 벌이던 저 둘은 저 스스로 그 운을 걷어찬 셈이다. 색이 다른 천이 서로 기워진 뭉툭한 솜인형의 앞발이 위에서 아래로 두 사람 사이를 화해시키려는 듯 갈라놓았다. 누군가 본다면 귀엽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과는 끔찍했다. 앞발이 지나간 자리는 피와 근육이라고밖에 설명 못 할 살덩어리들만 남았다. 저것을 보고서 이제는 생명체라고 부르기 어렵겠지. 앞발이 두 사람을 사이좋게 앞뒤로 이등분 해놓는 광경을 보고서 먼저 발을 떼는 무식하고도 용감한 이는 없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친 모험가 무리는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끄, 르..륵

이제는 핏덩어리가 되어버린 것의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부터 살이 차오른다. 고결한 사제들이 외는 신성한 주문이나 고위급 마법을 받으면 저런 상처에도 회복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모습은 사뭇 다르다. 기도를 확보하기 위해서 막혀있던 피와 살덩어리가 바닥으로 투둑 떨어지더니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온다. 차출된 모험가 중에서 어디 귀족 출신 도련님이라도 있나? 하지만 곧 성현아는 그 생각을 고쳐먹었다. 찢겨버린 살들이 모두 회복되고 죽어버린 줄 알았던 모험가들이 되살아났을 때는 더이상 그들은 우리가 알던 것이 아니었다. 얼굴이 있어야 할 위치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동물 탈이 말끔하게 자리하고 있었고 그것들은 동공이 풀린 채 제대로 된 발성이 아닌 목을 긁어대는 소리를 낸다. 저것들은 이제 인간이 아니다. 하나는 여우 탈을, 다른 하나는 곰의 탈을 쓴 괴물들이다.

"젤린!"

그들의 동료로 보이는 모험가가 소리쳐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지를 상실한 것의 공격이었다. 괴물은 들고 있던 대검을 어린아이들의 칼 장난처럼 크게 휘두른다. 날도 제대로 세우지 않은 공격이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방금 이름을 소리치며 달려가려던 모험가와 그를 말리던 주변 용병들까지 모두 끔찍하게 해체되고 말았다. 차라리 예리하게 날을 세운 검으로 베였다면 이렇게까지 충격이 있지는 않았으리라. 사람이 절반으로 찢겨서 상처가 뭉개져 버리는 꼴을 보고 나자 여기 모인 대부분은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제껏 만난 이들은 기껏해야 고블린 떼와 비슷한 정도의 위험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뒷골목이나 마을에 사는 일반인들의 육체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괴물이었던 탓이다. 아무리 어중이떠중이라고는 하지만, 도시 경비대에서 위급상황이라고 호출된 길드의 모험가들이 연약할 리가 없다. 아무리 연약하다고 하더라도 여기 있는 이들 모두 심장에서 마력 정도는 뽑아낼 수 있는 것들이니까. 그리고 괴물이 된 것들은 인간이기에 정해진 한계치를 가볍게 무시한다. 그 마력을 뽑아내는 심장을 억지로 쥐어 짜내는지 육신의 수명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힘은 무척 폭력적이다. 마치 마차의 내구도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그 앞에 날뛰는 지룡을 달아놓은 모양새다. 신체 강도가 버티지 못해 휘두른 팔의 근육과 인대가 끊어져 팔이 길게 늘어지고 바닥에 대검이 질질 끌린다. 기괴하게 뒤틀린 뼈는 방금 있었던 공격의 대가를 그대로 잔인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저, 저런 걸 어떻게 이기라고!"

"난, 여기서 빠지겠어. 제명할 거면 제명하라고 해!"

서른은 족히 넘는 수의 용병들과 해결사들이 하나둘 전열에서 이탈하더니 그것의 절반도 안 되는 수만이 남았다. 그들 중 도시 경비대 상징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이는 오직 둘이지만…. 그 둘의 동공이 떨리는 것을 보아 아직 충분히 경험을 쌓지 못한 풋내기인 모양이다. 그렇지만 이 땅을 지키는 마지막 남은 양심, 이런 순간에도 그들은 곧 검을 빼 들고 괴물을 향해 겨눈다.

"주변 통제가 끝나면 경비대에서 추가 지원이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이 이상 저 괴물들이 늘어나지 않도록 버텨요!"

그 목소리에 힘입어 다들 무기를 빼 들고 뒤틀림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전선을 가다듬었다. 다행스럽게도 방금의 살육에 만족한 모양인지 아니면 다친 팔을 회복시키는 모양인지 대검을 휘두른 괴물은 멈춰 서서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여우 탈은, 자리에 없었다.

끄아악!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자 어딘가에 구멍을 파고선 얼굴을 빼꼼 내민 여우 탈이 눈에 들어왔다. 굴을 파는 것이 여우의 습성이라고는 하지만, 그게 사람의 신체는 아니겠지.

"제기랄!"

구멍이 뚫린 곳에서 달큼한 기름 냄새가 새어 나온다. 몸통을 기계로 갈아버린 것인가? 세계의 결이 뒤바뀌고 난 뒤 종종 저렇게 제 몸을 기계로 바꿔버리는 멍청한 것들이 있었다. 물론 저 덕에 구멍이 뚫렸음에도 용병은 바로 죽지 않았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가증스러운 괴물의 얼굴을 향해 단도를 찔렀다. 마치 할복하는 듯한 모습이었기에 어쩐지 숭고하게도 느껴졌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금세 얼굴을 빼버린 괴물이 멀찍이 도망친 것이다. 허공에 검을 내지른 해결사는 곧 중심을 잃고 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되는 일이 없네…."

그리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폭발이 일어난다. 저렇게 숭숭 구멍이 뚫리면 당연히 기계는 터지고 말겠지. 당연한 일이다.

성현아는 전선을 유지할 뿐 먼저 튀어 나가지 않고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충분한 정보를 모은 뒤에 공격하는 것이 현명하기 때문에, 와 같은 비겁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무서웠다. 통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다리가 그만 굳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나마 경비대 소속의 인원이 소리친 덕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자신도 몰래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파견 나온 자신의 길드원 중에 이곳에 모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럭저럭 인원이 되는 사무소였음에도 이곳에 없다는 것은 실력 있고 눈치 있는 선배들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미리 퇴근해버렸을 것이고, 그게 아닌 동기나 선배들은 오는 길에 이미 죽어버렸겠지.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여기에 있을 의리는 없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도망칠 수도 없다. 저 여우 탈의 속도라면 아마 등을 보이는 순간 성현아는 느끼지도 못하고 배가 뚫리고 말 것이다. 고통도 잘 못 느끼니 몇 걸음 더 가다가 쓰러지고 나서야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눈치채겠지.

수가 없었다. 살아남으려면 싸워야 했다. 그게 이 도시에서, 세계에서, 던전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품에서 작은 스크롤을 꺼내어 양손으로 찢은 후 그 잔해를 주먹으로 꽉 쥔다. 그러자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하는 마력. 유동적이고 안정화되지 않은 마술은 부작용을 품기 마련이다. 거의 마술에 가까운 마법 정도밖에 되지 못 하는 것이기에 발열도 심하고 지속시간도 짧지만 그래도 그 시간 동안만큼은 바라는 효과를 내주겠지. 길드에서 싼 가격에 내어주는 굉장히 간단한 마법이 담긴 스크롤이었다. 빛과 함께 요란하게 손끝에서 연기와 아지랑이가 피어난다. 지급품이라고는 했지만 이조차도 돈을 내야 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성현아는 수프에 건더기라고는 여관주인의 눈칫밥만 받을 수 있었고 고작 그것만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맥주는 꿈도 못 꾼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에일도 며칠 동안 끊어야 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조정하는 순간 바로 눈앞에 여우 탈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대비하고 있었음에도 엄청난 속도였다. 갑작스레 다가온 탓에 강한 바람이 일었고 성현아의 머리카락은 뒤로 펄럭였다. 단단한 육체 강도를 믿고 한 대 정도 내어준 다음에 반격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런 방법을 택하기에는 방금 꼬치가 되어버린 용병의 모습이 뇌에 아른거린다.

쾅! 성현아의 주먹이 애꿎은 땅을 내리쳤다. 확실하게 붙잡지 않고 내지른 주먹은 무용으로 돌아갔다. 여우 탈은 공허한 눈으로 기다란 주둥이에서 피인지, 침인지 모를 것을 뚝뚝 흘리고 있었는데 용케도 공격을 읽고선 피한 것이다. 스크롤에 담겨있던 마법은 단순했다. [인챈트: 강화] 아주 기초적인 마법으로 일정 시간 동안 정해진 강화 효과를 자신이 지닌 일반적인 무구에 부가한다. 강화 내용은 근력과 민첩성의 상승. 단순한 주먹이 아니라 마법이 담긴 주먹과 함께 바닥을 내려치자 주변의 지반이 무너지고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순식간에 성현아는 제 공격에 시야도, 기동성도 잃고 말았다. 이래서 확실하지 않은 순간에는 스크롤을 사용하지 말라고 레이나가 귀에 못 박히도록 얘기했었다. 그것을 한 귀로 듣고 시끄럽다고 흘린 성현아는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흙먼지를 뚫고 날아들 공격에 대비해 몸을 일으켰지만, 그보다 무언가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더 빠르다.

당했구나,

다가올 죽음을 대비하며 눈을 찌푸리는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양손 검으로 괴물의 어깨를 찍어 내린 백발의 모험가였다. 탈 괴물은 바닥에 꽂혀서 제 자랑이었던 기동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버둥거리며 끼익 대는 소리만을 낸다. 순간 두려움에 떨며 멈췄지만, 이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걸 몸이 말하고 있었다. 지속시간이 짧은 마법의 가동 시간이 그나마 남았을 때 빠르게 해치워야 한다. 단두대에 걸린 죄수의 목을 향해 거대한 날이 떨어지듯, 괴물의 뒤통수에 손날이 내리친다. 아까와 같은 굉음이 공터에 울리고 성현아는 확인 사살을 위해 한 번 더 주먹을 내리친다. 첫 공격에는 부들거리던 것이 두 번째 공격이 끝나자 미동도 없이 축 늘어져 버렸다.

"휴, 덕분에 처리했네."

"잡담할 시간은 없어."

"뭐? 내가 아니었으면 도라처럼 구멍이 뚫려서 기계 위장이나 평생 마법사한테 치료해달라고 쩔쩔대며 살아야 했을걸! 고맙다가 먼저 아냐?"

"어차피 맞아도 안 뚫렸을 거다."

방금까지는 승리는커녕 죽을 것이라 확신하며 두려워했던 주제에 성현아는 입으로는 허세 가득한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세계의 법칙을 뒤집고 비튼 대가가 두 팔에 다가온다. 마법은커녕 마술조차도 다루지 못하는 체질 탓이다. 손끝에서부터 팔꿈치 아래까지 모든 신경이 잠시 꺼진 듯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고 근육은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린 것 같았다. 패널티가 끝나는 순간까지는 팔조차 제대로 들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미련하게 두 팔로 싸우겠다고 휘적거린다면 얼굴에 탈을 쓰게 생겼으니 현아는 미련 없이 마음을 접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깨물어야 하는 법이다.

흙먼지가 가라앉고 시야가 개이자 두 사람은 누가 신호를 준 것도 아닌데도 아까 보았던 괴물을 향해 달려나갔다.

"너, 무기는? 들고 있지도 않니?"

"너무 비싸."

"에고, 가만있어 봐. 칼 쓸 줄은 알지?"

가방을 뒤적이던 백발의 해결사는 주홍빛 도신을 가진 단검을 현아에게 던져주었다.

"시답잖은 소리 할 때가 아닐 텐데."

힘이 쭉 빠져버린 팔로 제게 날아오는 것을 잡는 건 쉽지 않았다. 오죽하면 몇 번 손에서 놓칠 뻔했으니까. 겨우 붙잡고 혁대에 달아놓은 뒤 몇 걸음을 더 떼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빛이 밤공기를 가르며 호를 그리는 모습을 현아는 볼 수 있었다. 정말로 빛이 나는 것이 아닐 텐데도 화려하게 이목을 끄는, 넋을 놓게 만드는 흐름이 있었다.

"구경만 하고 있을 생각이야!"

붉은 낫이 원과 호를 그리며 곰의 탈을 쓴 뒤틀림을 농락하듯 베어내고 있었지만 흘리는 피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화려했고 재빨랐다. 붉은 머리의 용병은 나름대로 선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확실한 틈이 나오질 않으니 상황 유지가 최선인 듯하다. 곰 탈은 쓴 괴물은 당장이라도 제 팔을 휘둘러 찢어버릴 듯 다가오니 용병도 깊게 몸을 집어넣지는 못하고 있었다. 괴물은 근육이 찢어지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대검을 휘둘러대는데 붉은 머리의 용병은 저 큰 낫으로 흘려도 내고 어느 순간에는 힘 싸움도 하며 상대가 결정력 있는 공격을 할 수 없게 막는다. 몇 차례 눈앞에서 합이 이어지는데 결국 이런 대치 상황에서는 수적으로 유리한 쪽이 압도적일 수밖에 없다. 하얀 머리의 모험가가 신호를 주고선 뛰어나갔고 그에 맞춰서 붉은 머리의 용병이 크게 낫을 휘두른다. 순간적으로 틈이 나자 괴물도 대검을 위에서 아래로, 사람을 쪼개버릴 것 같이 내려찍는다. 하지만 그 공격은 하얀 머리 해결사의 방어로 무산이 되었고 붉은 머리 해결사의 공격이 뒤틀림의 목에 깊은 혈흔을 남긴다.

"얕았나!?"

"아니, 충분해"

낫은 기이한 곡선을 따라 움직인다. 빙글 춤을 추듯 공중에서 유영하는 날이 붉은 선을 따라 아직 아물지 않은 그 틈을 파고들며 쇄도한다. 한 번에 끊어내지 못할 것을 알고 빠르게 한 번 더 공격을 이어간 것이다.

스강-

무언가를 베어내는 소리가 달밤에 울리고 뒤틀림의 목이 찢어지고 말았다. 다른 부위는 재생하는지 몰라도 머리와 목이 떨어지면 저것도 죽겠지.

"왜 이리 늦어!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네."

"어린애가 약간 어벙하게 있길래 도와주느라 늦었지!"

하얀 머리 해결사는 친한 친구와 함께 노는 것처럼 현아의 어깨에 팔을 휘감고는 자기 쪽으로 잡아당긴다.

"손 치우지?"

"우리 또래 같은데?"

"우리 또래면 어린 애지!"

현아는 주변의 소리를 흘려들으며 천천히 시야를 넓혔다. 몇몇 모험가들도 거대한 인형에게 당했는지 탈을 쓴 것들이 몇몇 눈에 들어왔지만 모두 바닥을 구르면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때, 거대한 인형이 제 앞에 있는 누군가를 앞발로 강하게 내려찍는다. 스치기라도 하면 곤죽이 되어버리고 저 앞발에 온몸이 찍히면 인형 탈을 얼굴에 쓰게 되는 엽기적인 상황이다. 그저 피와 장기만 많이 튀어나오면 재미있는 줄 착각한 음유시인이 내뱉는 쓰레기 작품이다.

"으합!"

확연하게 드러나는 체급 차이. 저 공격에 스치기라도 한다면 당장이라도 깔려 죽을 것 같은데 뒤틀림 앞에 선 모험가는 겁도 없이 먹빛의 대검을 머리 위로 휘두른다. 또 다른 탈을 쓴 괴물이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그 순간 놀랍게도 거대한 앞발이 튕겨 나간다. 일면식이 없었으나 그 소속은 제대로 증명하고 있었다. 도시 경비대 로브가 충격에 휘날렸고 로브에는 이 땅 영주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도시 경비대? 고작 그 정도 소속의 인물이 아니라 저 사람은

"저건 기사인가?"

"증원이라면 너무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당장 체력이 버티는 한 인형의 시선은 제가 끌겠습니다!"

이상하게도 믿음이 가는 말투와 목소리. 방금 보여준 실력이 신뢰감을 불어넣는 것이겠지. 현아는 중얼거리며 지금의 상황을 최대한 눈에 담았다. 고급 저택 한 층은 가득 채울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누더기 인형이 앞발을 휘둘러댄다. 가까이 가면 시선이 분산될 테고 저 해결사의 부담도 줄어들겠지만 지금 가진 무기로 묵직한 한 방을 견뎌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팔이 회복되려면 얼마나 걸려?"

"이제 곧."

"으음, 그래? 그럼 너는 아까 저거 할 수 있겠어?"

"여러 번은 못 해. 저거 기사들이 쓰는 물건이라 버티는 거지. 아마 내 낫은 한 번 부딪히면 날이 다 날아가 버릴걸?"

"저기서 버텨주는 동안은 안전하니까 좀 더 생각해보자. 어차피 저 인형은 바닥에 뿌리를 내린 건지 저기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이고 있잖아."

생각해보니 탈을 쓴 것들과 상대하는 동안 저 거대한 괴물이 공격했던 적은 없었다. 기사가 날아드는 공격을 모두 견뎌내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 인형이 두 다리로 서서 이동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완전히 못 움직인다고 볼 수는 없어. 기존 상식의 틀에서 벗어나 있는 게 바로 요즘 나타나는 괴물들이니까."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탁상공론이나 계속하고 있을 정도로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두 팔이 완전히 회복되면 바로 전투에 나서야 한다. 이 사이에 방도를 찾아내야 한다. 괴물은 어째서 저렇게 된 것일까. 무엇을 바라서 저런 누더기 인형 행세를 하며, 다른 이들의 목에 인형 탈을 꿰매버리고 수를 불려 나갈까.

아마도 저것은 고독했을 것이다. 얼기설기 기운 흔적이 남은 천은 상처일 것이고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는 세계에서 홀로 살아왔겠지. 이 땅에서 자신의 상처를 제대로 들여다볼 시간은 없다. 어제를 반추하고 내일을 꿈꾸는 순간 오늘의 고통이 자신을 집어삼킨다. 굶주린 배를 고인 웅덩이에 채워진 비릿한 물로 채워 넣고 싶지 않다면 상념에 젖지 않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저 괴물은 앞으로 나아가길 포기했다. 군중 속에 뛰어들어 자신을 엮고 타인과 닮은 점을 찾아내려고 손을 뻗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타인에게 자신이 가진 상처를 새기는 것은 공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저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주변에 다가오는 이들에게만 자신의 천을 씌웠겠지. 하지만 더 자신의 주변에 사람이 지나가는 일조차 일어나지 않는다면 저 외톨이 인형은 어떤 일을 벌일까. 인제 와서 상냥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묵직한 파공음.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뒤틀림이 거대한 앞발을 다시 머리 위로 들어 올린다. 기사의 망토가 펄럭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큰 부상은 없어 보이지만, 많이 지쳤는지 전보다 둔하다. 아마 한계에 도달한 것이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하얀 머리의 모험가가 현아의 어깨에 턱을 괴고는 말을 속닥인다.

"...지금 안 움직이면 저 기사는 죽겠거니 싶어서."

"그렇다고 당장 움직이는 건 별로인데. 그러다가 네가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뭐 뾰족한 수라도 있어?"

붉은 머리의 용병은 빈정거리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분명 저 말대로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인형이라면 안에 솜으로 가득 차 있겠지. 그게 자신의 상처가 되었건 우울함이 되었건 모두 불사르면 결국 재로 남아 사라질 기억들이야."

우울이라면 축축하게 젖어 있겠지만 저것은 자신의 바깥을 향한 분노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청중들에 대한, 자신의 상처에 관심을 주지 않는 군중들에 대한, 그리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고여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고여버린 감정이 바깥으로 터져 나오는데 속내가 축축할 리가 없다. 눈물로 적시던 과거의 고통은 모두 말라버렸을 테니.

"불꽃 속성의 마법은 없는데…. 스크롤도 없어."

"불꽃이 일면 좋겠지만, 저렇게 말라버린 속내라면 조금만 열을 가해도 충분하겠지."

"그럼 솜털 날리게 배를 갈라버리면 되는 거지?"

그 순간 눈앞에서 사람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괴물이 멋지게 앞발을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고 무언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은빛 갑옷을 입은 해결사가 멀리 날아가 공터 구석에 자리한 나무의 굵은 가지를 부러뜨리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몸이 뭉개진 것은 아닌지 시간이 지나도 탈을 쓴 채 일어나려는 기척은 없다.

날아간 기사에게 정신이 팔려서 뒤틀림이 주변을 둘러보지 않던 순간 옆에 서 있던 하얀 머리 모험가가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두 손으로 꽉 쥔 새까만 색의 검이 흔들림 없이 횡으로 지나갔고 그 공격에 뒤틀림의 배에 얕은 상처가 새겨진다. 천이 원체 두꺼운지 깨끗하게 잘린 것은 아니지만 하얀 솜털이 빼꼼 튀어나와 밤공기 위로 흩날린다.

"계속해!"

방심한 순간을 노린 하얀 머리 모험가의 공격이 큰 성과를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베어진 간격을 따라 붉은 머리 용병의 낫이 따라 들어간다. 한 번 틈을 내는 것이 어렵지 이미 찢어진 천은 작은 자극에도 쉽게 속내를 벌리고 만다. 제 속을 다 드러내는 것까지는 무리겠지만 오래도록 고독을 안고 살아온 이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어떨까. 붉은 원이 벌어진 틈 사이로 그어지자 그 안에서 새하얀 솜털 가루가 터져 나온다. 밤공기 위로 흩날리는 솜털은 고통의 기억이자 씨앗일 테고. 저것들이 사람 머리에 박히면 기억과 감정에 잠겨,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의 추악함에 부끄러워 탈을 뒤집어쓰게 되는 일이겠지.

성현아는 고통에 겨워 거세게 휘두르는 앞발을 땅을 구르면서 겨우 피해내었다. 머리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질량에 온몸의 털이 삐쭉 서는 기분이다. 거세게 차오르는 숨을 억지로 삼켜내고 달려나가는 순간 눈앞에 아득히 먼 괴로움과 분노로 일어난 눈물이 차오른다. 현아는 그 순간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멀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면 눈앞에 흐르는 상像들은 성현아가 겪지 않았던 누군가의 기억이다. 앞발을 피하려고 구르는 와중에 솜털 가득한 곳을 굴렀고 몸 안에 씨앗이 박힌 탓이리라.

"언젠가, 이곳에서 벗어나서 도시로 갈 거야. 매일 같이 따뜻한 반찬이랑 같이 밥 먹을 거라고"

울컥 차오르는 애잔한 기억을 마주한다. 사람 하나가 누우면 가득 차는 단칸방에서 그는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었다.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며 베갯잇을 적시면 목이 말라지는 탓에 함부로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 뒷골목 부랑자들의 삶.

"죽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어…. 너도 알잖아. 이게 이 땅의 법도라는 걸"

"어차피 죽을 자식이었어. 당장이라도 객사할 것 같은 새끼의 옷을 빼앗아 온 게 뭐가 나빠!"

"허억, 허억…. 멍청한 자식. 그렇게 한눈을 파니까 그렇지…. 이게 얼마야…. 한동안 밥걱정은 없겠어."

뒷골목을 구르며 수없이 많이 겪게 된 고통. 지옥 같은 순간에도 하늘을 향해 외친 꿈들과 희망 때로는 비겁하고 약았을지라도 살아가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를 비난하며 그는 살아가고 있었다. 누구의 시체에서 겉옷을 주워도, 착하게 대하던 어느 동료가 숨겨둔 돈을 빼앗더라도. 죄 없는 이만 돌을 던질 수 있다고 한다면 도시에서 자란 그 누구도 돌멩이를 던질 수 없을 것이다. 뒷골목에서 자라온 이들은 흔들린 적이 없을 리가.

"그래도 난 당신이 그렇게까지 비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이제 그런 식으로 돈 버는 건 그만두자. 같이 있으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영원을 약속한, 둘도 없을 사랑. 속죄의 기회를 얻고 그는 도시에서 사라져버린 희망을 다시 품었다. 힘들고 고될지언정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방식으로 벌어들인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대가를 치르고 얻어낸 지폐들. 뿌듯한 감정에 그 둘은 서로를 끌어당겨 안았다.

"내…. 가 없어도, 잘 지키, 면서…. 살 수 있, 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불합리로 이루어진 세계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아니 철저하게 합리성으로만 이루어진 이 땅의 흐름이다.

"네가! 네가! 그때 그 돈만 안 훔쳤어도! 우리 어머니는!"

스쳐 지나가는 비극은 몇 번이고 반복되어서 상영된다. 애절한 이야기는 공감으로 이어지고 공감은 다시 애절함으로 닿아 가슴이 미어진다. 한 번 내어준 마음은 쉽게 닫을 수 없고 불쌍한 저 인형에게 따스한 포옹을 안겨주고 싶어진다. 모두 같은 마음으로 저 아이와 같은 모습을 한 채 서로가 고통을 껴안아 주면 따뜻해질 텐데. 그럴 수만 있다면,

"그래도 난 너만큼 쓰레기처럼 살지는 않아서."

슬픔에는 우열이 없지만, 고통에는 우열이 있다. 누구나 자기 손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프다고 얘기하는 모습을 현아는 너무 많이 보며 살았다. 모두 다 괴로울 텐데 자신이 겪은 실험이 제일 괴로웠다고 멱살을 잡고 싸우던 모습을 매 순간 지켜보았다. 아무리 슬픈 사연을 지니고 있다고 한들 뿌린 씨앗이 썩었으니 피어오는 열매도 필시 썩어버렸겠지. 설마 달콤한 과육이라도 얻기를 바랐나? 무언가를 빼앗으며 연명해온 삶의 끝은 속죄와 함께 시작되는 재출발이 아니다. 적어도 남에게 준 상처의 배만큼 베이고 찔려야 한다. 악순환의 고리에 갇힌 채 홀로 깨끗하게 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세계는 용인하지 않는다.

감정의 탁류에 휩쓸리지 않고 다시 일어선 순간 누더기 인형은 안아주고 싶은 사랑스러운 물건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분리수거를 잘못한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기에. 혁대에 찼던 단검을 손에 꾹 쥔다. 점차 돌아오는 근육의 감각. 빛깔이 주홍빛이지만 특별한 힘이 담겨있지는 않으니 불꽃을 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 불씨라면 어떨까. 아주 작은 스파크만 튀더라도 타오르고 싶어하는 저것들은 순식간에 불꽃이 되어 사그라들 것이다. 성현아는 주머니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를 꺼내어 손에 꾹 쥐었다. 모험가이기에 누구나 지니고 다녀야 할 물건이다. 아마 이거라면 충분히 이 어두운 밤을 뒤집고 밝게 빛낼 수 있을 것이다.

 

제때 말하지 못한 말들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고 저 하늘 위로 멀리 날아간다.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는 상념들은 수신자가 명확하지 않으니 효과가 있을 리가 없다. 밤하늘에 새겨진 별들처럼, 어두운 밤공기 위에 수 놓인 하얀 솜털들을 뚫고서 현아는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씨앗이 퍼뜨려지고 머릿속을 헤집어놓지만, 그 순간들은 발목을 붙잡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겪지 않은 추억은 잊어버릴 기억 너머로 흘러 들어간다. 현아는 망설임 없이 곧장 벌어진 틈 사이로 뛰어 들어가며 두 손을 안쪽으로 쑤셔 넣었다. 쑤셔 넣는 것과 동시에 검으로 부싯돌의 위를 가볍게 부딪쳤다. 운이 나쁘면 몇 번을 더 해야 했을 텐데 운 좋게도 단 한 번 만에 작은 불꽃이 튀었다. 작게 난 상처에서부터 시작했지만, 불꽃은 점차 그리고 순식간에 번져 붙어 결국 인형의 머리까지 불태운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불꽃이 붙은 앞발을 휘두르는 것을 붉은 낫이 가르고 검은 검이 튕겨낸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거대한 몸을 인형이 일으켜 세웠지만, 그도 얼마 가지 않아 풀썩 주저앉고 만다. 타오르는 불꽃 사이로 그어진 새빨간 실선은 어렴풋하게 혈향을 남기고 지나간다. 탄 내 가득한 곳에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붉디붉은 낫은 하늘 위로 날으는가 싶더니 인형의 머리를 자르고 나서 다시 땅 위에 섰다.

"천이 좀 타버리니까 자르기 쉬운데?"

붉은 머리 해결사는 낫을 갈무리하며 추락하는 뒤틀림의 모습을 지켜본다. 머리와 목을 베어냈으니 저것도 결국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을 것이다. 하얀 머리 해결사도 몸에 붙은 하얀 씨앗을 털어내며 근처로 다가왔다.

"조심해 머리에 이상한 사자탈 같은 거 쓰고 싶지 않으면."

"그건 얘한테 말해야지. 아까 한 뭉텅이로 뒤집어썼는데. 괜찮아?"

"무슨 눈 맞은 것처럼 머리가 하얗게 셌는데? 이게 뭐야-"

현아는 두 사람이 자기 머리를 털게 내버려 두고는 살짝 익은 두 팔이 쓰라린지 표정을 찡그렸다. 두 손이 살짝씩 따끔거리고 붉게 달아오른 것이 아무래도 화상이라도 입은 모양이다. 땀에 젖은 셔츠가 겨울바람에 마르는 차가운 감각에 나른한 숨을 내뱉는다. 결국,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안도의 한숨이 하얀 연기로 뭉쳤다가 이내 투명하게 퍼져나간다. 기도 안으로 들어차는 차가운 새벽공기가 아리고, 붉게 달아오른 두 손은 따끔거린다. 남들보다 고통에 둔하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이 느껴지는 순간에 현아는 살아있음을 느꼈다.

"여러분들 괜찮으십니까!?"

우렁찬 목소리가 울리고 그 주인이 지척까지 달려왔다. 분홍색의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 전체적으로 상처가 없는 부분이 없지만 큰 상처는 또 없다. 노련하다는 증거일까, 용케도 그런 공격을 맞고도 살아나서 이렇게 뛰어온다.

"아니, 당장이라도 엎어져서 자고 싶어. 성탄절에 이게 무슨 일이야."

"저희가 여러분들을 보호했어야 했는데, 다른 쪽에서도 사고가 나서 우선 그쪽으로 모두 인력이 배치된 탓에…. 긴급하게 여러분들을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됐어, 됐어. 뭘. 의뢰비만 제대로 들어오면 되는 거지. 우리가 그거 말고 바라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몇 차례 말이 오가는 것을 현아는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이럴 때 무슨 말이라도 꺼내서 얼굴을 트는 것이 해결사 인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라고 부끄러워 말고 말 좀 걸고 다니라고 레이나에게 여러 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선뜻 입이 열리지는 않았다. 조금 걸음을 옮겨서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박하 향이 퍼지고 입 밖으로 하얀 연기가 흩어진다.

"왜 거기서 혼자 있어?"

한 번 더 연기를 빨아들이려는 찰나에 하얀 머리의 모험가가 현아에게 다가오더니 팔을 붙잡는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현아는 금세 사람들이 모인 자리로 질질 끌려간다.

"이럴 때 서로 말이라도 터놓아야 나중에 의뢰 잡기 편하단 말이야."

"알겠으니까, 좀. 이것부터 놓고."

세 사람의 시선이 한곳에 모이자 현아는 그 눈살에 못 이겨 마지못해 입에 물었던 것을 내리고는 입을 열었다.

"성현아다. 소속은, 이제 없을 것 같은데."

"응? 이제 퇴사라도 하려고? 용병인 권수민이야. 소속은 없이 활동하고 있고"

"말 좀, 참…. 나는 프뤼나야. 모험가에, 수민이랑은 구면이고. 뭐, 혼자서 움직이고 있어."

세 사람의 말이 끝날 무렵 공터에 주홍색의 빛이 서서히 들어오며 주위가 환해지기 시작했다. 차갑게 얼어붙은 파란 주변. 고장 났던 가로등 불 하나가 들어오며 그사이를 비춘다. 마치 여명을 알리는 불꽃처럼. 분홍색 머리의 기사는 모범적인 경례 자세를 보이며 우렁차게 외친다.

"이 땅에 선 군주의 검. 기사, 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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