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새끼들

술에 취해 기억은 휘발되고 말았으니 눈이 뜬 지금이 첫 조우일 것이다

비휴 by 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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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이 주머니에 쑤셔 넣은 새끼줄처럼 꼬여버린 감각에 성현아는 앓는 소리를 내었다. 목구멍 저 아래에서 화학적인 단내가 뿜어져 올라오는 탓에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누가 대리석 위에 눕히고 내 머리를 담금질 하듯이 쇠망치로 머리를 내려친다면 이런 고통일까 싶어 미간이 찌푸려진다. 얼마 더 끙끙대고 나서 겨우 눈을 떠보면 본 적 없는 낯선 천장의 무늬가 있었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서 기억을 되짚어 보지만 전혀 떠오르는 것들이 없다. 게다가 술 때문에 다음날 숙취로 아팠던 적은 20년 넘게 살아오며 없었기에 생소한 감각이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숙취랑은 연이 없을 것 같았는데,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이대로 뻗어있고 싶었으나, 어느 누가 납치해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의뢰를 하다가 앙심을 품은 도적 집단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이름 모를 연구소나 사교도들이 실험을 위해 잡아 왔다면 최악의 사태를 생각해야 한다.

머리를 쥐어 싸맨 채 억지로 몸을 일으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면 어디에서나 있는 평범한 여관방이었다. 원래는 깨끗했겠으나 때와 오염물들 그리고 곰팡이의 쉼터가 되어버린 천장과 벽지. 나무로 된 탁자. 그리고 그 위에 널려있는 텅텅 빈 술병들과 이제는 수분기라고는 남아있는 것 같지 않은 마른안주들. 술병 중에 평소 마시던 나무통 잔이나 초록색의 유리병은 익숙했기에 시선에서 사라졌다. 문제는 저 꼬부랑 글씨가 적힌 자줏빛이나 투명한 유리병이다. 본 적도 없는 술병을 보자마자 등에서 식은땀이 한 줄기 흐르는 것 같았다. 만약 이 술병의 주인이 제게 청구하기라도 한다면? 이 쓰레기 같은 몸뚱아리를 끌고 도망칠 자신이 전혀 없었기에 잔뜩 긴장한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범한 가정집인가?'

어느 조직의 아지트처럼 보이지는 않고, 오히려 생활감이 짙게 묻어나는 공간이었다. 여관방이라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공간이 좀 더 넓었고 좌식이었다.

'같은 도시라지만 이런 곳이 있었구나. 여기는 달에 몇 골드지? 보증금 500으로는 턱도 없을 것 같은데...'

자신이 사는(빌붙은) 조그만 2층 여관방 따위와 비교하면 이곳은 저 도시 중앙에 자리한저택이나 다름없이 커다랗게 보였다. 게다가 방이 하나 따로 달린 것만 해도 성현아에게 있어서는 꿈도 못 꿀 대단한 공간이었다.

"어? 일어났구나?"

경첩이 우는 소리와 함께 문이 하나 열리고 사람이 걸어 나왔다. 새하얀 튜닉 하나만을 걸친 채 저벅저벅 걸어와 제 옆에 풀썩 주저 앉는다. 한 번 팔랑였던 하얀 머리의 단발은 입은 옷보다 훨씬 하얗게 보였다. 방금 막 씻은 모양인지 아직 덜 말라 젖은 머리 위에 수건을 덮은 채 이쪽을 바라본다. 산뜻한 비누 향처럼 싱그러운 웃음. 그는 몇 년 동안 사귀어온 친구 대하듯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더 자도 되는데. 연말이라 길드니 뭐니 다 쉴 거 아니야."

"..."

"장기 안 털어갔으니까 노려보지 좀 말고"

"원래 이래."

"알고 있었어. 연구소에서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다녔잖아. 아, 라면 먹을 거지? 3개 끓인다?"

"...뭐?"

잠깐의 정적과 함께 싸늘한 공기가 집안에 내려앉는다. 그의 말대로 서슬 퍼런 눈빛이 성현아의 두 눈에 서리고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것 같은 자세로 몸을 일으켰다.

"어휴, 알았어. 그냥 한 봉 다 끓일게. 그러면 되잖아."

"지금 그거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 어제 일... 하나도 기억 안 나?"

"뭐?"

"얘들아아 골 울려, 좀 조용히 말하자..."

두 사람이 이야기하던 도중 바닥에서 기어가는 목소리로 시체 같은 것이 끼어들었다. 머리가 산발에 완전히 얼굴을 가려 마치 실력 없는 음유시인의 노래에나 나올 것 같은 연출이었다. 붉은 털 뭉치가 겨우 몸을 일으켜 옆에 나무 탁자에 몸을 기대어 앉는다. 검은색의 옷이 목을 다 가리는데 찾 달라붙어있다. 나도 비슷한 냄새가 날까 싶은 짙은 에탄올 냄새. 엉킨 털 뭉치를 제 손으로 치워내며 제대로 뜨지도 못 하는 두 눈으로 가까운 나를 바라본다. 잔뜩 찌푸려진 얼굴에 비몽사몽 잠기운과 술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얼굴.

술에 취해 휘발된 기억은 의미가 없으니, 내 기억 속 그들과 첫 만남은 이 순간이었다. 너무도 다른 두 사람 가운데에 서서 지켜보는 묘한 상황. 거대한 톱니가 쇳소리를 내며 끼워 맞춰지고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한다. 그 자리에 선 누구도 입을 열어 말을 꺼내지 않는데 머릿속이 시끄러워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말을... 하지 말란 건 아니었는데"

시끄러운 적막을 깬 것은 붉은 머리의 인간이었다. 눈앞에 선 흰 머리의 인간과 같이 고개가 내려가며 시선이 모인다.

"어쨌거나 5개 다 끓여... 해장 좀 해야겠다."

"현아 표정 보니까 그래야겠네. 밥까지 말아 먹겠네."

"...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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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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