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해준) 오늘 뭐 먹어요? -카레라이스-
요리하는 박서원x영상 찍는 정해준
*결말 부분의 스포일러가 기본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작을 읽으신 후 열람해주시길 바랍니다.
*캐붕, 날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작보다 전체적으로 많이 말랑한 느낌입니다.
***
솨아아-
거세게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올해 장마는 6월에 거의 안 오더니 갑자기 저번주부터 비가 왕창 쏟아붓기 시작했다. 지구온난화라더니 날씨도 말썽이다. 덕분에 하루종일 물 속에 있는 느낌이다. 이제 시작했으니 끝나려면 또 멀었겠구나. 나는 끈적거리는 것 같은 몸을 괜스리 건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아가자 익숙한 카레향이 맡아졌다. 나는 그 냄새를 따라 부엌으로 걸어가자 냄비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카레와 우물거리고 있는 박서원이 보였다.
"타이밍 좋네요? 마침 다 됐어요."
"오늘은 카레예요?"
"네. 비도 오니까요."
밥 좀 퍼줄래요? 따뜻할 때 먹죠. 나는 박서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넓은 그릇에 밥을 담았다. 그대로 박서원에게 넘겨주자 밥 위에 카레를 한 국자 얹었다. 나는 그 그릇을 그대로 받아들고 제자리로 가 올려둔 뒤 냉장고로 다가가 김치를 꺼냈다. 카레 먹을땐 김치 말고 다른 반찬을 안 먹어서 꺼낼 필요가 없다. 박서원은 자기 그릇이 카레를 끼얹어 자리에 올려두었고, 내 행동에 맞추어 반찬 그릇과 수저를 꺼내놓았다. 나는 박서원이 꺼낸 젓가락으로 김치를 두어번 큼지막하게 집어 꺼내놓았다. 반찬통은 다시 정리해서 냉장고에 넣어놓고 재빠르게 자리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버릇이 된 인삿말을 중얼거리며 숟가락을 들었다. 따끈따끈하게 김이 올라오는 밥과 카레를 보니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한 입 넣으니 살짝 매콤하고 카레 특유의 향이 올라왔다. 푹 익은 감자와 당근은 씹을때마다 녹아내리듯 흩어졌다. 카레도 간만에 먹으니까 맛있네. 비가 와 살짝 눅눅하고 추워진 듯한 날씨에 딱이었다. 내가 한두입 먹고 박서원을 쳐다보니 다행이 아직 잘 먹고 있는 듯 했다. 그러다 내 시선을 눈치라도 챈 건지 숟가락을 문 채 내 쪽으로 눈을 마주쳤다. 그러면서 슬며시 웃어 보였다. 둘다 일이 없는 날이라 적당히 편한 옷을 입고 있던지라 올렸던 앞머리도 내려가 있었다. 이거 되게 그거 같네. 남친짤. 정해영이 이 광경을 봤으면 왜 사진을 안 찍었냐고 내 멱살을 잡고 흔들었을 거 같단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박서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해준 씨 그때도 이거 먹었는데."
"그때요?"
"우리집에 처음 온 날이요."
"아."
무슨 이야기인가 했더니. 나는 고개를 슬쩍 돌렸다. 박서원은 그런 나를 쳐다보는 듯 시선이 느껴져 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 박서원도 마찬가지 였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술에 잔뜩 취해있었죠? 빌더쓰 뒷풀이 때도 안 그랬던 사람이."
"거기 분들은 배려 해주셨고, 친구들은 배려를 안 해주니까요."
"흐음. 뭐, 그래도 덕분에 우리 집에도 왔으니까요. 그쵸?"
"......그쵸."
박서원은 다행히 더 캐묻지 않고 말을 돌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박서원은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박서원의 말 대로다. 나는 빌더쓰 시즌2 촬영 이후에는 관련 연예인들과는 거의 만나지 못했다. 더군다나 박서원처럼 기억도 없고 바쁜 사람은 만나려고 해도 못 만났을거다.
그런데, 그 날 우연히 길에서 만났다.
누군가가 간절히 필요 하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
***
"하아......"
나는 자리에 주저 앉았다. 술에 취해 머리가 어지러운 것도 있었지만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간만에 보았다고 부어라 마셔라 하던 사이에 있다보니 이미 막차 시간은 끊겨 있었다. 그래서 친구 놈들은 나와 반대편에 살아 적당히 택시를 나눠타고 집으로 가버렸다. 그래. 막차가 끊겨도 택시는 탈 수 있으니까. 여기서 내게 생긴 문제점이라면, 내 지갑과 핸드폰이 잃어버렸단 것이다. 술에 잔뜩 취해서 돌아다닐때 흘렸나? 가게에 놓고 왔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방도가 없다. 무엇보다 이정도로 생각하기도 오래 걸렸다. 상태가 너무 안 좋다. 제자리에서 움직이기도 힘들어 결국 가로등에 머리를 기댄 상태다. 이 나이 먹고 여기서 이러고 있네...덕분에 꼼짝없이 노숙하게 생겼다.
"이제 어디 가지..."
"갈 데 없어요?"
"?"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박서원 씨?"
"네."
"...왜 여기 계십니까?"
"그건 내가 해야 할 말 아닌가?"
익숙한 미소를 짓는 박서원의 얼굴이다. 아니, 조금 다른가. 평소에 올리고 다녔던 앞머리는 모두 내려와있었고 오른쪽 눈 아래의 점 두 개도 없다. 아. 거기가 아니지. 나는 박서원의 말에 고개를 슬쩍 내리며 답하였다.
"...가끔,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가로등 밑에서요?"
"...살다보면..."
"술냄새도 잔뜩 나요."
"......"
나는 얼굴을 숙인채 크게 숨을 내쉬었다. 하필 이 사람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지.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다 다시금 고개를 들고 답하였다.
"...핸드폰과 지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집까지 걸어가려고?"
"아뇨, 그...제가 방금까지 상태가 안 좋았던지라."
"여기까지 오고 나서야 없어졌단 걸 알았단 거네요?"
"......예."
박서원은 내 말을 하나하나 정정했다. 성격 안 좋은 건 여전하다. 박서원은 궁금증이 풀렸는지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그는 혼자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금 내 쪽을 보며 말하였다.
"그럼 우리집에 올래요?"
"......네?"
"집이 이 근처라서요. 안 그래도 카레도 많이 해놨는데 잘 됐네."
"예...?"
내가 박서원 말에 눈만 꿈벅이고 있었지만 박서원은 내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서야 끙끙대며 자리에서 일어난 뒤 겨우 박서원 뒤를 쫓아갔다. 성격 나쁜 건 여전하다 정말...그래도 당장 오늘 노숙할 일은 없어져서 천운인 것은 맞았다. 앞자리가 바뀌니 이젠 바깥에 조금만 오래 있어도 입이 돌아갈 거 같다. 20대 초반엔 가끔 애들끼리 밖에서 잠들기도 하고 그랬던 거 같은데...현대 사회와 같이 발전한 집이 최고지 응. 남의 집이긴 하지만. 아니, 박서원 집은 우리집보다 좋았기에 오히려 이득이었다. 어. 그러고보니 그때 그 집인가? 이번에도 여분 침대는 없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박서원의 뒤를 쫓아갔다.
근처라는 박서원의 말이 사실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아파트가 보였다. 이 커다랗고 높은 건물...원래 살던 집이 맞네. 그런데 왜 그 주변인지 못 알아봤지? 그래도 좀 살았던 곳이라 주변은 외웠다고 생각했는데. 하고 풍경을 떠올리려니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러곤 이내 내가 술에 취해있단 사실을 깨닫고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나중에 술 깨면 알겠지...박서원은 이쪽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나를 자기집까지 안내해주었다. 하긴 '여기'에서는 처음 오는 거지. 다행히 내가 술에 취해있던 상태라서 그런지 별 말 없이 따라오더라도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는 거 같다. 박서원은 익숙한 엘리베터를 타고 익숙한 복도를 지나 익숙한 현관문 앞으로 나를 안내하였다.
"들어와요. 슬리퍼는 저쪽."
"실례하겠습니다..."
현관문이 열리자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아니, 조금 다르다면 다르다고 해야하나. 입구에서부터 저쪽에 있을 때보다 조금 더 물건이 놓여져 있었다. 슬리퍼도 놓여있네. 원랜 없었는데. 나는 비틀거리면서 슬리퍼에 적당히 발을 우겨넣고는 박서원 뒤를 마저 따라갔다.
"이 방에서 자요. 화장실은 저쪽. 오늘은 일단 씻고 자고."
"예...감사합니다..."
박서원은 복도방 중 하나에 문을 열어 내게 방 안을 보여주었다. 다행히 이쪽에선 제대로 된 손님방이 있었다. 예전에 내가 쓰던 그 방이네. 나는 비척비척 걸어들어가며 외투를 벗었다. 그런데 박서원이 제 방에 돌아가지 않고 서있던 탓에 고개를 돌려 물었다.
"뭐 주실 거라도 있습..니까..?"
"아뇨. 그건 아니고.."
"그럼 저...나가주실래요."
박서원이 집주인이긴 했고 나는 술에 잔뜩 취한 상태였지만 어쨌든 나름 정신이 있는 채로 걸어오고 옷도 벗을 수 있으니 충분한 거 아닌가. 아, 내가 자기 집 바닥에 토할까봐 그런가? 그 생각을 하니 어쩐지 또 술기운이 확 올라왔다. 아, 얼른 자야 한다니까...나는 어질거리는 머리를 최대한 바르게 세워보려 했지만 결국 잘 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어지러운데 박서원이 계속 말을 걸어온다. 덕분에 중간중간 박서원의 물음에 대답도 했는데 방금 대답 했는데도 무어라 말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 자야해. 자야한다고.
"왼쪽? 오른쪽?"
"......"
갑자기 왠 수수께끼야. 겨우 든 정신으로 입을 다물었다. 자기 집을 왜 나한테 물어? 나야 저쪽에서 여러 밤을 묵긴 했지만 여기선 그런 적이 없었다.
"...본인 집인데...제가..말해야 합니까..?"
겨우 차린 정신으로 박서원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박서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더 어이없거든.
그러더니 박서원이 나를 이끌고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이쪽 방도 다행히 멀쩡한 방이었다. 박서원은 나를 데려다놓고 무어라 말을 하더니 다른 방에 들어가서 내가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다. 나는 주는대로 갈아 입었고 그 침대에 나를 올리길래 얌전히 누웠다. 왜 같이 자는지 도통 알수가 없었지만 몸상태가 몸상태라서 그냥 이대로 누워있기로 했다. 지엄하신 박서원 님께서 무슨 이유가 있으시겠지. 그렇게 자리에 누운지 얼마 되지도 않은 때에 나는 의식이 점점 사라져갔다. 비싼 집 침대는 침대도 좋다는 생각이 내 의식의 마지막이었다.
***
"카레...네요?"
"네. 해장용."
카레가 해장용이야? 내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카레를 쳐다보고 있자 박서원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해장 효과 있다던데. 그래도 안 맞는 사람이 있긴 해서 먹어 보고 판단해요. 어차피 어젯밤에 먹으려던 거라서 줄 수 있는 것도 이거 뿐이에요."
옆에 콩나물국도 있으니까 그것도 먹고요. 나는 박서원의 말에 반신반의하며 천천히 카레를 섞었다. 냄새 맡아도 토기가 올리오지 않는 거 보면 괜찮을 거 같기도 하고. 천천히 입에 넣고 씹어보니 카레향이 진하게 났다. 속이 안 좋아지려던 찰나 갑자기 매운맛이 확 느껴져 순간 목에 걸렸다. 급하게 옆에 있던 국을 들이마셨다. 이쪽도 뜨거워서 별반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박서원은 나를 보고 킬킬 웃더니 어느샌가 찬물이 담긴 컵을 내밀었다. 줄 거면 진작 주던지. 머쓱해진 나는 괜히 박서원이 내밀어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카레는 괜찮나보네요? 매워하는 거 빼고."
"이정도로 맵다고 생각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요. 그럼 그런 걸로. 나한테 고마워 하기나 해요."
그런게 맞다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해봤자 박서원은 듣지도 않을 거 같아 그냥 조용히 밥이나 먹었다. 하여튼 재수 없는 사람같으니. 매운 건 자기가 더 못먹으면서. 저쪽에서 엽X 시켜먹었을 때 매워도 티 안 내려고 물만 홀짝홀짝 마시던 거 누가 기억 못할 줄 알고? ...뭐 이제 혼자만의 기억이긴 하다. 억울해서 나중에 매운 걸 같이 먹을수도 없고. 그렇게 내가 한그릇을 다 비워내자 박서원은 자연스레 내 그릇을 들고 치웠다.
"술도 덜 깬 사람이 뭘 하려고요. 앉아 있어요."
"다 깼습니다만."
"알죠. 그래도 앉아 있어요. 집안살림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아마도 알텐데. 그렇지만 지금 여기에선 모르는게 맞기에 그냥 입 다물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박서원이 찬장을 열자 그 안에 여러 식기가 보였다. 박서원 집에 저정도 양의 그릇이라니. 오래 살고 볼일이었다.
저쪽에선 그 잠깐 있던 내가 그릇을 채워 넣어야 했다. 뭘 먹을 때마다 일회용 용기 사서 쓰기도 귀찮아서 얘기하자 박서원이 준 카드로 수저랑 그릇 몇 개를 최소한의 정도로는 사두었었다.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그거 보고 이제서야 사람 좀 사는 거 같다고 얘기 하셨었지. 여긴 알아서 잘 해먹어서 도우미 아주머니도 안 계신 거 같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이나 하며 앉아있자 호출벨 소리가 들려왔다. 토요일 오전부터 누가 오기로 했나.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 자리로 가자 화면에 여자 얼굴이 보였다. 아, 이 사람 옆집 사람이네. 어디서 봤나 싶었더니. 내가 지냈었을때도 이 집으로 번호를 잘못 누르는 사람이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손을 멈추었다. 아니, 애초에 나 집에 갈 생각 안 하고 뭐하는 거야? 너무 자연스럽게 박서원 집에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술 덜 깬 거 맞는 거 같다. 이런 생각도 제대로 못하다니. 박서원은 그 사이 설거지를 끝낸건지 젖은 손을 가볍게 털며 말하였다.
"누구 왔어요?"
"예? 아. 여자 분인데, 아는 분인가요?"
내가 모르는 척하며 물어보자 박서원은 인터폰을 바라보더니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다 아. 하는 소리는 내었다. 그러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여긴 옆집이라고 이야기 해주자 여자는 화들짝 놀란 것처럼 보이더니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리고 나는 그걸 기점으로 집에 가봐야겠다고 박서원에게 말했다. 물론 그 말에 집에 갈 돈은 있냐는 얘기를 들어버렸지만 말이다. 핸드폰만 있어도 별 문제 없었을텐데. 이 거리를 걸어가기도 그렇고. 내가 머리를 싸매고 있자 박서원이 차키를 내밀었다.
"가져가요."
그 말에 나는 진심이냐는 표정으로 박서원을 쳐다보자 뭐가 웃긴지 박서원은 작게 웃어 보이고는 농담이라며 차키를 집어 넣었다. 그냥 가져갈 걸 그랬나? 박서원은 지갑을 다시 꺼내더니 오만원 두어장을 내게 쥐어줬다. 이정도면 모자라진 않겠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속으로 박서원 님이라고 부르며 돈을 받았다. 속으로만 불렀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박서원은 해산물을 못먹었다. 저쪽에선 밥을 자주 먹어본 적이 있어야지. 먹어봤자 내가 배달시킨 음식을 나눠먹는 수준이었다고. 여기에서도 밥을 같이 먹어봤자 빌더쓰2 회식때 말고는 먹은 적이 없었다. 회식도 고기 구워먹은 게 끝이었다. 그러고보니 횟집은 안 가나 싶었는데, 비싸서가 아니라 못먹는 사람이 있어서였군. 사람 모으는데 돈 다 쓴 곳이 소고기집을 왜 그렇게 가나 했더니.
아무튼 결론적으로 박서원은 콩나물국도 못먹는다. 비려서. 해산물 못먹는다더니 콩나물국도 못먹을줄은. 결국 해장용은 카레가 아니라 콩나물국 쪽이었단 걸 그제서야 알았다. 찾아보니 카레도 해장 음식이라고는 하는데 솔직히 그쪽보단 콩나물국이 훨씬 해장용이다. 자기가 먹지도 못하는 걸 끓여놓다니. 기분이 묘해졌다. 박서원의 말대로 고마워해야 했었다. 아니, 감사인사 제대로 받고 싶으면 그냥 말로 하면 됐잖아. 나는 괜히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술집에 얌전히 모셔져 있던 핸드폰 화면을 켰다. 그러곤 주머니에 대충 넣어져있던 걸 꺼냈다.
박서원
010-XXXX-XXXX
자기 개인번호라고 나가기 직전에 따로 적어주었다. 왜 주나 했더니.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손가락을 움직여 자판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정해준입니다.]
***
"그때 진짜 웃겼는데."
"네..."
"가로등 불빛 밑에서 쭈그려 있는 모습이 마치 스포트라이트 같았다니까요."
"예......"
"독백은 안 하나 싶을때 혼자 중얼거리더라고요. 1열에서 잘 봤어요."
"예에......."
박서원이 즐겁다는 듯이 이야기 했지만 나한텐 전혀 즐겁지 않았기에 대답을 흘겼다. 일부러 얘기 잘 안 하는 주제인데 박서원이 그걸 고려해줄리 없지. 이대론 끝이 안 날 거 같아서 나는 입을 열어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다른 주제를 말했다.
"그러고보니 그때 카레는 왜 끓였던 거예요?"
"응?"
"카레 많이 해놨다면서 데려온 거잖아요. 누가 오려 했는데 안 온 거예요?"
박서원은 내 말에 두눈을 깜빡이다 재밌는게 생각이라도 난듯 눈을 반쯤 접으며 예쁘게 웃어보였다. 불안한데. 다른 얘기로 돌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박서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아, 난 또 뭐라고."
"......"
"왜요, 누가 왔었는지 신경 쓰여요?"
"아뇨."
나는 박서원의 말에 재빠르게 대답하였다. 그러자 박서원은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을 낀 채로 몸을 뒤로 뉘였다. 그러곤 꼬고 있던 쪽 발을 까닥거리면서 말하였다.
"신경 써야죠. 남자친구가 사귀기 전에 누굴 만났는지 안 궁금해요?"
"안 궁금합니다."
"왜?"
"...어차피 다 여성 분일 거잖아요."
박서원은 내 말에 생각하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눈을 차마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슬쩍 돌렸지만. 그러자 박서원 쪽에서 기분이 좋다는 듯 작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 어차피 남자는 정해준 씨가 처음일거다?"
"...맞잖아요?"
"아니면 어쩌려고?"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랬으면 나한테서 본인이 처음이길 바라는 부분을 그렇게 찾진 않았겠죠."
나도 연애를 많이 한 건 아니었지만 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첫 연애가 아니라는 걸 아는 이상 모든 것이 처음일 순 없다. 나도 어차피 남자는 박서원이 처음이고 박서원도 비슷하리라 생각하고 딱히 물어보진 않았다. 지금이야 서로 많이 안정되어 큰 갈등은 없어졌지만 초기의 박서원은 나에게서 무언갈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때 당시엔 나도 저쪽의 박서원과 이쪽의 박서원을 종종 떼어놓고 생각하려 했기에 그게 티가 났나 싶어 그럴때마다 확인 시켜줬다.
애초에 말이 안 된다. 박서원 성격상 자기가 나 이전에 남자와 교제를 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티나게 굴지 않았을거다. 티나게 굴면 그걸 신경쓰지 않을 사람이다. 그리고 나 이전에 남자를 사귄 적이 있다 해도 내가 그에게서 정이 떨어질 이유가 되진 않는다. 내가 애도 아니고. 오히려 물어보는 박서원 쪽이 더 끈질겼기에 박서원이 더 애같아 보였지. 심할땐 박서예 앞에서도 그랬었기에 그땐 박서예가 박서원의 뒷통수를 쳤던 적도 있다. 그런 사람이 나 이전에 남자가 있을리 만무했다. 오히려 내가 박서원 이전에 남자가 있었는지 확인 받는 꼴이었으니까.
"......"
"이제 다 놀렸죠? 치울게요."
내가 박서원 앞에 놓여있는 그릇을 집어 치우려 하자 익숙한 손이 내 손목을 잡았다. 뭔가 싶어서 박서원을 쳐다보려고 하자 잡힌 손목 쪽에서 소름이 돋아 나도 모르게 그릇을 놓쳤다. 나는 손을 풀고 내 팔 위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을 보다가 급하게 박서원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말도 없어서 조금 반성하나 싶은 줄 알았더니 그러긴 커녕 기분이 좋다는 듯 예쁘게 웃는채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아주 잘 아네요."
"...당연하죠."
"그러게. 당연한 건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도 박서원이 웃고 있는 얼굴을 보자니 입이 열리지 않았다. 본인이 기쁘다는데 구태여 내가 뭐라고 얘기하겠나 싶어지는 마음도 있지만, 저렇게 환히 웃고 있는데 굳이 뭔가 말해서 저 표정이 깨어지는 것도 딱히 원하지 않았다. 이 표정을 내 앞에서만 짓는다는 걸 알고 난 뒤로 더 그렇고. 내가 이도저도 못하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자 박서원은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더니 그대로 내게 다가와 입을 맞추고는 떨어졌다.
"놀린 건 미안해요. 그때 정해준 씨 좀 귀여웠거든요. 얼굴도 새빨갛고, 말도 평소답지 않게 어눌했어가지고."
"...그런가요."
"그리고 그 날 와야했던 건 여자가 맞긴 해요. 박서예랑 늘이가 오기로 했던 날이었거든요."
결국 둘이서 논다고 우리집에 안 와서 난 혼자 있었지만. 하지만 그 덕에 정해준 씨가 왔으니 잘됐잖아요?
박서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치우려던 그릇을 자연스레 자신이 정리하고 있었다. 기분이 어찌나 좋은지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다. 나도 가만히 서있다가 박서원이 물을 트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식탁을 닦으며 자리를 정돈했다. 박서원이 저렇게 웃을때마다 적응이 안 된다. 그때마다 자꾸 사고가 멈춰버려서 제자리에 멍하니 멈춰 서있기만 한다. 이게 좋아하는 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어서 인정하고나니 더 자주 그러는 거 같지만. 별 수 있나.
각자 치울게 별로 없었기에 정리는 금방 끝났다. 서로 손을 깔끔하게 씻고 닦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맞췄다. 아까보단 좀 더 길게 입을 맞추고 떼어내자 박서원이 먼저 입을 달싹였다.
"...카레 냄새."
"그야 카레 먹었으니까요."
"역시 씻고 마저 할까?"
"마저 하긴 뭘 마저 해요. 청소 먼저 해야죠."
"이따해요. 이따가."
박서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뭐가 그렇게 급한지 날 잡아끌고 욕실로 향하였다. 나는 순순히 박서원 뒤를 따라가면서 작게 웃었다.
정말이지, 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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