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해준) 오늘은 뭐 먹어요?

(서원해준) 오늘 뭐 먹어요? -감자크로켓&매실차-

요리하는 박서원x영상 찍는 정해준

*결말 부분의 스포일러가 기본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작을 읽으신 후 열람해주시길 바랍니다.

*캐붕, 날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작보다 전체적으로 많이 말랑한 느낌입니다.

***

6월이다. 날짜로 따지면 이제서야 초여름이지만 날씨는 그냥 여름과 별 다를바가 없었다. 8월에 어떻게 버티지? 이게 다 그 지구 온난화 때문이다. 인간의 업보.....업이면 어쩔 수 없나. 날이 더워서인지 생각도 이상한데로 빠지고 있다. 그러던 중, 핸드폰에서 알림이 울려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고 화면을 열었다.

[해준 오빠, 오빠도 올래요?]

친숙한 이름을 띄운 문자가 왔다. 한평화네. 연락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이쪽도 아주 바빴기 때문에(손요운과 구민석 정도) 연락하고 싶다 해도 자주 되는 건 아니었다. 평소에도 먼저 연락을 보내는 터였지만 이 시간에 보내는 건 또 처음이다. 메세지 위에는 숲으로 보이는 풍경의 사진이 보였다. 간만에 쉬나. 나는 손을 움직여 핸드폰을 들고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어디 놀러갔어요?]

[ㅋㅋㅋㅋ그랬음 좋겠네요]

[별건 아니고 이번 일엔 오빠가 와도 될거 같아서요. 한평원도 옆에 있어요.]

[얼굴 볼 겸 한 번 와줄 수 있어요? 제가 줄 게 있는데 저나 한평원은 해준 오빠한테 갈 시간이 안나서]

[(이모티콘)]

한평화는 울고 있는 고양이 이모티콘과 제자리를 폴짝 뛰는 고양이 이모티콘을 보내며 말하였다. 일이면 촬영장일텐데. 왜 내 주변 연예인들은 날 촬영장에 초대하는 거지? 난 더이상 관계자도 아닌데? 내가 관계자였을 때는 빌더쓰 때 뿐이었다. 그 이후론 딱히 뭔가 더 하는 것도 아니었고. 원래 일반인 지인을 촬영장에 부르는 건 자주 있는건가? 이 업종 사람은 이 사람들이 처음이어서 잘 가늠이 안되었다. 한평화는 못본지 오래된 사람이 맞기도 하고 뭔가 줄 것도 있다니 가는게 좋긴 할터였다. 원래 잡혀있던 일정도 취소 되었고. 내가 적당히 답변을 보내자 한평화는 알겠다는 이모티콘을 세개쯤 연달아 보냈다. 용 이모티콘은 안써서 다행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전에 찍었던 영상을 살펴보고, 올렸던 영상도 살펴봐야했다. 그리고 얼마안가 방 안에는 달칵 거리는 소리만이 가득 차게 되었다.

***

조금 쨍한 햇빛을 받으며 나무 사이를 걸어갔다. 이런 장소에 오는 것도 오랜만이네. 출퇴근을 하고 남은 시간에는 쉬거나 사람을 만나는 정도여서 풀이 나있는 곳까지 잘 온 적은 없었다. 하긴 저쪽에서도 불려 나갔을 때만 가긴 했네. 나는 흙을 밟으며 사람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괜찮게 나왔네요. 그림자 피해서 찍는게 맞았어요."

"○○씨께서 이따~만한거 꺼내시는데 와, 무슨 돌덩이인가 했어요."

"아~ 그럼 □□□ 사시는 거예요? 제가 전에 거기서 살았었는데."

"마이크 이쪽이요!"

촬영장은 조금 시끌벅적 했다. 스텝들 얼굴에 표정이 조금 있는걸 보니 촬영은 덜 끝난 듯 했다. 쉬는 시간인가. 이걸로 가늠하니까 좀 미안해지는데...나는 제일 근처에 서있는 스텝에게 한평화에 대해 물어보자 내 얼굴을 보며 아, 네. 한평화 씨는 저쪽 오두막에 계세요. 라며 방향을 가리켰다. 내 얼굴을 알아본 거 같은 반응이었는데, 기분 탓이겠지. 나는 감사 인사를 건네고 스텝이 가리킨 오두막을 향해 걸어나아갔다.

오두막 주변에는 같이 프로그램을 찍는 듯한 연예인이 모여있었다. 내가 아는 얼굴도 한명 정돈 있는거 같다. 제아무리 촬영장을 다녀도 연예인을 보는건 신기하단 말이지. 그나저나 저들 사이에 한평화는 보이지 않았다. 한평원도 있다고 했는데, 한평원도 안보이네. 스텝 사이에 있었나? 내가 제자리에서 핸드폰을 꺼내려고 했을때, 뒤에서 누군가가 툭 하고 부딪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해준 오빠!"

"평화 씨."

"에이, 우리 사이에 편하게 불러요."

"언젠간 하겠죠."

"그거 몇년째 같은 대답인거 알죠? 올해 안에는 해요?"

"글쎄?"

내 말에 한평화는 깔깔 웃었다. 한평화도 여전히 밝은 모습이다. 한평화가 입은 옷을 보니...서천농원 때가 생각나는 복장이다. 장소가 그래서 이런 곳이었나? 잘 어울리긴 해서 별로 위화감은 없었다. 한평화는 모자의 챙을 들어올리며 말하였다. 평원이는 잠깐 가지러 갈게 있어서 갔어요. 금방 올 거예요. 그나저나 오빠, 그 사이에 키 컸어요? 하면서 내 머리 위를 바라보길래, 서른이 넘었는데 크는 사람은 못들어봤어요. 라며 답해주었다. 한평화는 빙글 웃으며 그게 오빠일지도 모르죠. 하고 대답하였다.

한평화는 기억이 남아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초능력과 요괴가 가득한 곳에서 태어났던 것도, 자신의 아버지가 뱀 사건에 휘말려 세상에 없어졌던 것도, 피울 수 없었던 꽃을 피워낸 것도. 한평화는 전부 기억하고 있다. 아마 평생동안 잊지 못할 기억이라고 울면서 말했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그럴 것이다. '정해준'의 기억까지 합쳐진 나도, 그럴 터였으니까.

한평화네에서 기억을 하고 있는 건 송희선과 한평화 정도다. 둘다 기억이 너무 강해서 송희선은 죽을 때까지 잊을 일 없다고 말했었다는데, 나이가 나이시다보니 그런가 괜히 더 진담처럼 들렸다. 그래도 다행히 둘다 잘 지내고 있었나보다. 그 증거로 나를 보는 한평화의 얼굴은 어둡지 않았다. 그래, 이거 때문이라도 얼굴은 봐야했지. 내가 한평화와 대화를 이어가는 사이 내 뒤에서 누군갈 발견한 한평화가 손짓을 하였다.

"한평원, 여기!"

"누나, 이거랑 이거 맞아? 아, 안녕하세요, 해준 씨."

"안녕하세요, 평원 씨."

한평화와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는 한평원은 품 안에 무언가 담겨져있는 플라스틱 통을 안은 채였다. 순한 얼굴로 웃는 표정이 한평화와 닮아있다. 품 안에 안겨 있는 것 말고도 손에 무언가 잔뜩 들고 있던 한평원을 보며 내가 손을 내밀었다. 한평원은 감사합니다, 하며 품에 있던 통을 넘겼다. 나는 빨간색 뚜껑에 잠겨있는 통의 내용물이 궁금해져 슬쩍 내려다보았다. 매실? 내가 그렇게 쳐다보고 있자 한평화는 한평원에게 종이백 몇개를 건내 받으며 말하였다.

"그거 매실청이에요. 우리 할머니가 담군건데 서원 오빠랑 나눠먹어요. 이건 전에 제주도 갔다가 받은건데 귤 슬라이스 해서 말린거라 물에 우려먹으면 좋대요. 그리고 이건 과일이 들어가있는 판 초콜릿인데 이건 과일향 좋아서 오빠가 좋아할거 같아요. 그리고 이건..."

"아니, 잠시만요. 평화 씨, 이거 다 주시는 거예요?"

"? 그럼요. 이만큼도 못주는데 해준 오빠한테 직접 오라고 했겠어요?"

미안해서라도 그렇게 못해요. 얼굴 까먹을까봐 부른 것도 있지만. 얼굴 보니까 좋네요. 한평화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답하였다. 내가 곤란한 표정으로 한평원을 바라보았지만, 한평원도 별수 있냐는 표정을 지으며 답을 대신하였다. 나는 조금 차가운 매실청을 품에 안은채로 한평화에게 다시금 말을 걸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많은데요."

"받아줘요. 그때 얘기 들어준 값으로 해요. 그리고 전에 굿즈 가져다줬던 값까지 쳐서."

"그건 전에 받은걸로 다 끝난거 아니었어요?"

"그거 가지고 있었으면서 오빠한텐 한번도 못썼잖아요. 그리고 여기엔 없으니까 없던걸로 치고!"

"그렇게 따지면 인형도 없잖아요?"

"인형은 있는걸요? 촬영할 때 썼잖아요."

한평화는 핸드폰을 꺼내들더니 스트랩을 흔들어보였다. 흔들어대는 스트랩을 자세히 보니..청룡이다. 인형 나중에 받은거야? 아니, 그리고 여기에 인형이 있어도 그건 이제 내가 가져다준게 아니지 않나? 한평원에게 동의를 구하고 싶어도 중간의 내용은 한평원이 모르는 내용이었다.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는 한평원은 무슨 내용인지 가늠하려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생각해도 드라마 내용이라고 생각하겠지. 결국 나는 묵직한 매실청을 든 채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평화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와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거, 제가 다 못들고 갈거 같아요."

"아, 많이 무거워요? 괜찮을거 같아서 있는대로 챙긴건데."

"아니, 자동차면 괜찮은데....제가 버스 타고 와서요. 양손이 안비면 아무래도 타기가.."

"그 문제예요? 그럼 걱정마요. 매니저 언니한테 태워달라고 부탁드릴게요."

"그래도 괜찮아요?"

"그럼요, 어차피 저 이거 하루 종일 찍는 거거든요. 언니도 갔다오면서 커피라도 사먹으라 하면 되죠. 언니! 나 잠깐만!"

그렇게 말을 마친 한평화는 어딘가로 뛰어가며 외치기 시작했다. 이거 하루 종일 찍는 거라고?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 중천에 있는 해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많이 찍어도 절반 찍었나...해 질때 까지면...으. 나는 내가 다니는 직장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그래 태워다주겠다는데 거절 할 필욘 없겠지. 나도 쉬는 날에 나와서 이러는 거니까. 얼른 가서 쉬어야지. 나는 속으로 혼자 납득하다가 다시 손을 내민 한평원에 눈길을 돌렸다. 내가 다 들고 있는게 불편해 보였는지 매실청을 받아 들었다.

"누나가 해준 씨 많이 좋아해서 그래요. 이해해주세요."

"저를요?"

"네. 빌더쓰 때 만났던 분들을 유독 좋아해요. 그만큼 좋은 분들 이시기도 하지만요."

한평원은 멀리서 매니저와 대화하는 듯한 한평화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품에 안고 있던 매실청이 한평원의 움직임에 따라 같이 찰랑거렸다.

"촬영 했을 때 되게 좋은 분위기였어서 저도 좋아하고 있어요. 처음 뵙는 분들이 많았는데, 마치 몇년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들 처럼 잘 어울렸으니까요. 가족끼리 있던 분들도 많아서 그랬던걸까요?"

전 사실 국장님 나오신다고 했을때 정말 걱정 많이 했거든요. 다른 배우분들도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잖아요. 그런데 정말 편하게 대해주셔서 좋았고, 재미있었어요. 한평원은 방긋 웃어보이며 말하였다. 나는 그런 한평원에게 비슷하게 대답하였다. 아마 잘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친해질 수 있었던 거겠죠. 저도 재미있었어요. 내 대답을 들은 한평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장에 있던 주연 배우 중 절반 이상은 기억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데 저쪽에서 잘 지냈던 사람이 여기서도 안맞을리 만무했다. 백하연과 최나라는 촬영장에서 처음 만났지만 10년동안 절친이었던 것처럼 붙어다녔고, 빌더쓰가 아니었으면 만날 일이 없던 김재수와 백성찬도 몇년을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것처럼 서로를 편하게 대했다. 그런 사람들끼리 다 만난 곳인데 편하지 않을리가 없었지. 덕분에 정작 촬영장에서 몇번 보지 않았던 한평원과도 불편한 분위기는 없었고, 한평화가 나를 그렇게 대하더라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가끔 보다보면 기억이 있는지 헷갈려서 말할 뻔 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오빠! 매니저 언니가 오케이 했어요! 지금 바로 다녀온다네요. 그렇게 안서둘러도 되는데."

"저 배려해서 빨리 데려다 주시려는 걸테니까요. 그럼 저흰 여기서 인사할까요."

"아, 벌써요? 아쉽게...오빤 안아쉬워요?"

"나중에 또 볼거잖아요. 잘 지내는 것도 확인했고."

"뭐, 그렇긴 하죠. 아, 맞다. 해준 오빠 잠깐만 이쪽으로요."

나는 한평화의 손짓에 살짝 몸을 구부린채 옆으로 붙었다. 그러다 한평화는 셀카모드로 된 핸드폰을 든 채로 씩 웃어보였다. 갑자기 셀카? 자세를 잡은 한평화를 보고 반사적으로 표정을 지었다. 찰칵, 하는 연사음이 몇번 들리고 나서야 한평화는 나를 다시 풀어주었다. 핸드폰으로 몇개 확인을 하고는 다시 나와 한평원을 불러 사진을 찍었다. 다시 몇개 정도 확인하고는 누군가에게 메세지를 보내는 듯 했다. 누구지?

"누구한테 보내는 거예요?"

"서원 오빠요."

".....예?"

"이 오빠는 이래야 얼굴 좀 보러 나오던가 하니까요. 하여튼 사람들이랑 잘 지낼거 같이 굴면서 얼굴 보기 힘들어가지고."

같은 일 하면 뭐하냐고. 한평화는 끝으로 갈수록 작게 중얼거리며 대답하였다. 뭐..박서원은 한평화처럼 쉬는 날이 많이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 쉬는 날에는 집에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정작 그 기간동안엔 다른 사람을 잘 안만났다. 불만을 가질 사람이 없나 했는데 바로 옆에 있었네. 한평원도 대화 내용이 궁금했는지 한평화의 옆에 서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1 사라졌다."

"꼭 이럴때만 빨라요."

"그래도 웬만하면 바로 답장하잖아."

"한평원, 누나 놀리냐?"

"아닌데..."

한평원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평화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을 두고 액정을 살펴보자 곧 답장이 날아왔다.

[정해준 씨가 왜 거기 있어?]

[지금도 있어?]

[평화야]

[정해준 씨?]

연달아 오는 박서원의 답장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다가 나를 부르는 메세지에 조금 놀랐다. 알고서 보낸거야, 그냥 보낸거야? 박서원이라면 감으로 내가 보고 있을 거란걸 눈치챘을 가능성이 있긴 하다. 나는 주머니에서 슬쩍 핸드폰을 꺼내고 데이터를 켰다. 그러자 지잉거리는 진동음이 연달아 울려 순간 핸드폰을 놓칠뻔 했다. 무슨 알림이, 하는 생각으로 잠금을 푸니 박서원에게 메세지가 잔뜩 와있었다. 옆에 있던 평화가 내 반응을 보고 내 핸드폰을 바라보고는 으, 하며 진절머리를 냈다.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무슨 연락을 인소 남주처럼 집착해."

"평소에 이러진 않죠..."

나는 한평화의 말에 적당히 대답하며 의문을 표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평화를 만나고 오는 정도였으니 평소에도 이정도는 아무말 없이 나가더라도 문제가 없었다. 나는 내 핸드폰을 바라보며 메세지 내용을 확인했다.

[정해준 씨]

[거기 촬영장이죠?]

[빨리 나오는게 좋은데]

[정해준 씨]

나는 박서원의 메세지를 보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빨리 나와야 하는 건데? 옆에서 내용을 궁금해하는 한평화와 한평원에게 메세지 내용을 보여주니 한평화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한평원은 무언가 생각하더니 이내 깨달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 그렇네요. 해준 씨, 얼른 가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네?"

"왜?? 오빠 급한 일 있어요?"

"아뇨, 그런 건 없는데..."

내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한평화는 다시금 한평원을 바라보았다. 나 또한 같이 시선을 보내자 한평원은 순하게 웃으며 해준 씨, 궁금하세요? 라고 말하였다. 보통 한평원이 저렇게 말하면 내가 듣고 나서 후회하는 건데. 그 말을 듣자 안 궁금해졌다. 아니, 궁금한데 안 듣고 싶어졌다. 들으면 내가 괴롭기만 한다. 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한평화가 날 보고 왜 그러냐는 듯 반응했다. 한평원은 자신의 누나가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게 상관 없는지 나를 매니저가 있는 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평화 씨! 평원 씨! 촬영 들어가야해요!"

"네! 금방 갑니다!"

"어, 저 분 그 분이죠?"

"?"

나는 마지막에 들려온 목소리에 의문이 들었다. 뭐지? 모르는 사람 같은데. 소리가 들렸던 곳으로 고개를 내밀자 어떤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들은 나에게 할 말이 있다는 듯이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뭐야? 날 알아? 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그런 상황을 한평원이 봤는지 나를 최대한 가리면서 반대쪽으로 몸을 밀었다.

"해준 씨, 얼른 가요. 얼른."

소근거리는 한평원의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편에서 사람들이 걸어왔지만 애써 무시하고 차가 있는 쪽으로 향하였다. 어, 잠시만요! 뒤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내 짐을 들고 있던 한평원은 끝까지 나를 가리면서(그래봤자 나보다 작아 그다지 가려지진 않았다) 차로 데려다주었다. 해준 오빠, 다음엔 꼭 더 같이 놀아요! 어느샌가 따라온 한평화가 짧게 인사를 건넸고 한평원도 짧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을 기약하였고 그대로 승합차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머지 않아 차는 출발하였다.

***

"평원이가 알아서 잘 말려줬네요. 일부러 정해준 씨한테 설명 안했었는데."

집에 도착한 나는 박서원과 만나 아까 있었던 일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박서원은 그럴것 같았다는 마냥 대답을 하기에 나는 더더욱이 의문이었다. 왜 모르는 사람들이 날 아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이지? 이해가 안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박서원을 바라보고 있자, 박서원은 입을 열어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정해준 씨, 빌더쓰 촬영장 왔었잖아요."

"그렇죠. 제가 보조작가 겸이긴 했으니까요."

빌더쓰 시나리오 작가인 오늘에게 내가 겪었던 기억이나 경험을 들려주어야 했었기에 어쩔수가 없었다. 시즌 2는 흐름상 주인공을 정민준(정해준의 배역 이름이다)으로 하는 것이 타당했고 나는 그 일을 겪은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글을 쓰는 재주는 없었기에 시나리오 작가인 오늘 옆에 붙어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오늘과 친한 박서원과 자연스레 만나게 되었고, 그 외에 기억이 남아있는 사람이나 빌더쓰 배우들과 자연히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때 나를 소개할 수 있는 건 보조작가라고 속이는 것 밖에는 답이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한평화 같은 사람과 그곳의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려웠으니까.

촬영장에 가게 된 건 또 다른 이유다. 배우들과 인연을 트니 촬영장에 구경오라는 제의를 받고 호기심으로 한 번, 국장님이 불러서 두 번, 손요운이 불러서 세 번, 이런식으로 배우들이 돌아가며 촬영장으로 나를 끌고갔기 때문이다. 나도 엄연히 회사를 다니고 있었기에 그들을 만나려면 황금같은 주말을 쪼개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부르는 사람이 부르는 사람이었다. 제일 거절하기 어려운 건 송희선이 놀러 오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도 찾아갔다. 내 말은, 거절하기 어려운 사람들만 나를 불렀기에 갈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가 촬영장으로 들어갈 때마다 타당한 이유를 댈 수 있는 것이 빌더쓰 보조작가라는 타이틀이었기에 촬영장 안에서 마주치는 사람에겐 그렇게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빌더쓰 시즌 2가 끝나고도 꽤나 지나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 당시에만 참여를 했었고, 촬영하는 족족 불려나갔던 것도 아니었다. 촬영팀 말단에는 한 번 들어왔다 빠지는 사람 또한 많았기에 나를 기억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설마하는 마음으로 박서원을 바라보자 박서원은 검지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하였다.

"촬영장에 종종 찾아왔던 걸로 기억하는 스탭들이 많기도 했는데...아무래도 그쪽 입장에서 정해준 씨는 베일에 쌓인게 너무 많은 사람이어서인지 잘 안잊더라고요. 무엇보다 그 분들이랑 너무 서스럼 없이 잘 대화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나봐요."

백성찬 같은 사람이랑 대화하는 건 괜찮았는데, 손요운 씨나 구민석 씨, 심지어는 국장님이랑도 평범하게 얘기를 잘 했잖아요. 누가봐도 아는 사람 처럼 보였거든요. 박서원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내게 말하였다. 이게, 관계를 따지는 사람한테는 아무래도 크게 신경쓰이는 부분이니까요. 인맥 덕분에 보조작가 일도 하고 촬영장도 들락날락 했나? 하지만 그렇다기엔 정해준 씨 이름은 어디에도 안남아있고 정해준 씨 쪽으로 돈이 빠져나간 것도 없죠. 그정돈 피디님께 여쭈어만 봐도 알테니까요. 그럼 정해준 씨가 어디 회장 아들인가? 그건 아니니까요. 남은거라면, 빌더쓰에서 연기했던 배우분들과 피디님 같은 분들의 인연이에요. 대배우랑 국장님이랑도 잘 아는 사람이 일반적인 배우와 인맥을 쌓으려고 하는 거 같아 보이는데, 이게 정해준 씨도 연기를 시작할려는 것 같아 보이게 되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정해준 씨가 어느 작품을 한다고 하는 말이 없어요. 아다리가 맞는 게 하나도 없는거죠. 박서원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덕분에 정해준 씨 얘기는 스탭쪽에서 좀 많이 알려져있어요. 국장님 지시로 쉬쉬하는 편인데, 촬영에 있었던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니까요. 말단은 하루만 들어왔다 빠지고 그러기도 하고요. 거기에 빌더쓰 출연진 분들이 정해준 씨 얘기를 종종 하기도 하니까, 배우 쪽에서도 정해준 씨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어요. 아니면 인맥이 있는 정해준 씨를 써먹을려고 하는 경우도 있고요."

나는 박서원의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내가 그정도로 신경 쓸만하게 행동했었나? 나름 촬영장에선 입을 다물고 있었고 배우들이랑 이야기 하는 건 최대한 사람이 없을때였는데. 나는 내가 일반인이라는 것에 괜찮다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반대였던 것 같다. 상황이 어지럽구나. 한평원이 왜 급하게 나를 밀었는지도 이제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아마 거기서 잡혔으면 곤란한 상황에 빠지는 게 뻔했겠군. 나중에 감사 인사 전해야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박서원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메세지로 빨리 나오라고 한 거였군요."

"네. 아무래도 애인이 그런 일로 다른 사람한테 붙잡혀 있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진 않아서요."

사진 봤을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그대로 날아갈까도 생각했었어요. 박서원은 약간 투덜거리는 듯한 말투로 말하였다. 나는 그런 박서원을 보며 작게 웃어보였다.

지금의 박서원은 내가 어떻게 그 사람들과 그정도로 친한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딱히 캐묻지는 않았다. 나와 그들의 관계를 존중해주고 건드리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이것이 그의 상냥함이라는 것을 알고있다. 그렇기에 이런 이야기를 나누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점은, 그때의 박서원과도 같은 점이었다.

"......"

"? 왜요?"

"흠....됐어요. 지금 키스하면 밀어낼거잖아요."

"...방금 그런 분위기였어요?"

"내가 만든 분위기 아니에요? 정해준 씨가 만들었지."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니 박서원은 어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코끝을 살짝 깨물고는 도로 거리를 벌렸다. 얼른 나와요. 저녁 먹어야죠. 나는 그렇게 말을 건네는 박서원을 따라 걸어나갔다. 아직도 코끝에 남아있는 감각이 괜히 나를 간지럽혔다.

***

저녁을 먹은 후, 우리는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였다. 한평화가 주었던 선물을 그제서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일단 송희선이 담아주었다고 말한 매실청은 작은 병에 나누어 냉장고에 넣었다. 그리고 슬라이스 되어 말려진 귤, 이건 판 초콜릿인데 과일이 얹어져있다. 귤 모양 안마봉? 이건 뭐야. 감귤을 뒤집어 쓴 인기 캐릭터 인형도 들어가있었다. 오, 감귤 초콜릿이네. 제주도에 다녀왔다더니 귤과 관련된 물건이 한두개가 아니었다. 나는 감귤 초콜릿 하나를 까 입안에 넣었다.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맛이군. 다른 초콜릿 하나를 들어 박서원에게 흔들어보이자 눈을 두어번 깜빡이더니 입을 벌렸다. 먹을거면 그냥 건네주려고 했는데. 별 수 없이 포장지를 까 박서원 입 안에 넣어주었다. 박서원은 입 안에 초콜릿을 녹여 먹으며 말하였다.

"얜 제주도를 휩쓸고 왔대요?"

"평화 씨 말로는 제주도에 갔다가 잔뜩 받았대요. 팬분이 주신거 같은데."

"그렇다기엔 양이 너무 많아요. 이 중에 반은 아마 저희 주려고 직접 샀을걸요."

음. 박서원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그럴듯 했다. 한평화라면 자기 사람은 끔찍히 챙기는 사람이니까. 나는 감귤을 뒤집어 쓴 캐릭터 인형을 들고 쳐다보고 있는 박서원을 바라보았다. 박서원은 머리에 씌워진 귤이 벗겨지는 게 궁금했는지 모자 사이로 손가락을 두어번 넣더니 이내 모자를 벗겨냈다. 이거 진품이네요. 진품이요? 가품은 이런거 벗겼을때 귀 같은 게 없어요. 그대신 싸고. 그걸 보던 거야? 나는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벗긴 모자를 들고 가더니 식탁 근처에 놓여있던 고양이 인형 중 하나의 리본을 풀고, 귤 모자를 씌웠다. 그러곤 다시 모자 위로 리본을 묶었다.

"이정도면 되겠죠. 인형은 이미 있으니까."

"버리게요?"

"아뇨, 촬영 하려고요."

박서원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금 앞치마를 허리에 두르기 시작했다. 저녁은 먹었잖아요? 간식 만들게요? 박서원은 그렇다고 답하며 재료 세팅하는 동안 카메라를 놓아달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답하며 손에 쥐고 있던 것을 거실 탁자 위에 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카메라를 세팅하는 동안 박서원은 재료 준비를 마쳤다. 감자, 양파, 당근, 빵가루...튀기는 건가. 고로케? 박서원에게 물어보자 맞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철이라서 감자가 많더라고요. 이렇게라도 먹어야지."

준비를 끝마친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내가 한 손을 들고 손가락 세개를 피며 사인을 주었다. 셋, 둘, 하나. 신호에 맞추어 카메라는 녹화가 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선 감자는 껍질을 벗기고 적당한 크기로 깍두 썰기를 한다. 감자칼이 사락사락 움직이는 소리가 카메라에 들려왔다. 그렇게 썬 감자는 끓는 물에 넣어 삶는다. 찜기에 쪄도 괜찮지만 어차피 부숴서 쓸거고 물에 직접 넣는 경우 물에다 미리 간을 해 둘수 있어 나중에 고로케에 간을 맞추기에 더 편하다고 한다(잠시 카메라를 멈출때 말해주었다).

감자를 삶는 동안 옆에서 당근과 양파 같은 재료들을 잘게 썰어준다. 본래 베이컨도 이때 썰어서 넣었는데, 이번에는 고기는 안넣을 모양인 듯 했다. 잘개 썬 채소들은 기름을 두른 팬에다 넣고 볶아준다. 지글지글 거리는 소리와 함께 박서원은 익숙하게 프라이팬을 흔들며 재료를 볶아갔다. 그 후 삶은 감자를 물에서 건져내고 볼에 넣는다. 방금 건진 감자를 하나 집어들어 후후 불더니 그걸 내 쪽으로 내밀었다. 식히는 게 날 주려고 그랬던거였나. 민망해진 나는 조금 쭈뼛거리다 이내 받아먹었다. 박서원이 식혀주었다 한들 방금 갓 나온 감자였기에 아직도 좀 뜨거웠다. 그래도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천천히 씹어 넘겼다. 음, 진짜로 간이 되어 있네. 포슬포슬하고 따뜻한 감자에 간까지 딱 되어있으니 이대로 먹어도 충분히 맛있었다. 맛있다는 의미로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자 박서원이 피식 하고 웃는 소리를 내었다. 자신의 입에도 감자를 하나 집어넣고는 남은 감자들을 으깨기 시작했다. 감자를 으깬 뒤, 볶아두었던 채소를 넣어서 섞는다. 박서원은 섞은 것을 작게 떼어내어 자신의 입에 넣어보더니 소금을 조금 더 뿌린 후 다시 섞었다. 화면 안에 거의 완성된 속 재료들을 고정샷으로 몇 초동안 찍었다.

그 다음으론 가루들을 묻힌 뒤 튀겨내는 것 뿐이었기에 잠깐 설거지를 해야 했다. 나는 이대로 갔다간 또 박서원 혼자 설거지를 할 것 같아서 말도 하기 전에 먼저 싱크대에 자리를 차지했다. 그 꼴이 퍽 우스웠는지 박서원은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며 웃어보였다. 그러곤 등 뒤로 다가와 팔을 두루는 듯 싶었는데, 내 허리에 앞치마를 해주었다. 옷 젖으면 안되잖아요. 놀리는 듯한 말투에 나는 그런 박서원을 살짝 쳐다보다 이내 싱크대로 고개를 돌렸다.

설거지를 간단하게 끝내자 박서원이 넓고 높이가 조금 있는 그릇에 가루들을 붓기 시작했다. 이건 이렇게 찍는게 맞나? 생각보다 어려웠다. 나는 여러 각도에서 박서원이 가루들을 붓는 걸 찍은 후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 촬영하였다. 먼저 밀가루를 묻히고 그 다음에 계란물을 묻힌 뒤 마지막으로 빵가루를 묻힌다. 그렇게 하나하나 발라주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박서원은 마지막 하나까지 묻힌 뒤에 손을 씻으며 간단히 정리를 하였다. 본래는 기름을 예열하면서 간단하게 설거지를 하지만, 촬영 하는 것이니 따로 하는 것이 좋겠다며 설거지를 다 마친 뒤에야 기름을 올렸다. 잠시 예열이 될 동안 기다리다 빵가루를 살짝 넣으니 뽀글뽀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제서야 박서원은 젓가락으로 고로케를 집어들어 기름에 튀기기 시작했다. 그냥 집어 넣으면 손에 튈 가능성이 높아 팬 옆면에 미끄러지듯 넣으면 괜찮다는 설명도 덧붙여주었다.(이는 편집으로 잘라 자막으로 넣었다) 지글지글 튀겨지는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고로케에는 기름 냄새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맡아졌다. 밥을 먹은지 얼마나 됐다고 배고파지네. 박서원은 색깔을 봐가며 고로케를 뒤집어가다 건져낸 후 키친타올 위에 얹어두었다. 기름이 빠질때까지 조금만 기다리다 다른 접시 위에 정리하여 쌓아올렸다.

내가 그 모습을 촬영하자 박서원은 내 쪽으로 다가와 내 어깨를 건드렸다. 그러곤 카메라 앞쪽으로 고개를 까딱이며 사인을 보냈다. 나는 그 신호에 맞추어 조용히 카메라 앞에 섰다. 의자에 앉아 고로케를 하나 집어 한 입 베어물자 바삭한 튀김옷 안에 보들보들한 감자와 어우러지는 향이 나는 채소들이 입맛을 돋구었다. 그러자 곧 카메라에서 삑 하는 소리가 들리며 박서원이 고개를 들었다.

"맛있어요?"

"네. 늘 맛있는 것도 신기하네요."

"뭘 새삼."

"박서원 씨도요."

박서원은 내 대답에 피식 웃으며 카메라 옆으로 지나갔다. 어디로 가나 했더니 매실청을 꺼내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먹고 있던 고로케를 내려놓고 박서원에게 다가갔다.

"잠시만요. 그것도 찍을게요."

"이것도요? 정해준 씨 생각보다 영상에 욕심이 있었네."

"욕심 있어서 나쁠게 뭐 있어요."

박서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대로 매실청을 꺼내들었다. 안찍겠다는 소리군. 박서원은 유리컵 두개를 꺼내어 컵에 얼음을 담고 매실청을 약간 부은 뒤 찬물을 넣었다. 그리곤 머들러를 꺼내어 휘휘 저어보였다. 박서원은 양손에 컵을 들더니 내게 고로케를 들고 따라오라며 걸음을 옮겼다. 거실에서 먹으려 그러나? 나는 일단 박서원의 말대로 고로케가 든 접시를 들고 뒤를 따라갔다. 박서원은 거실을 지나쳐 테라스쪽까지 나가는 것을 보고 그대로 발을 옮겼다. 바쁜 생활을 하다보니 테라스는 있어도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 간만에 쓸 마음이 들었나보다. 밖에 놓여져 있었는데도 관리를 잘 한 듯 의자와 테이블은 때깔 하나 더러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야외에 있는 거라 살짝 더러웠던 탓에 박서원은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닦을 것을 찾으러 갔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저 앞쪽에는 높은 건물들이 몇 개 보였지만 풍경을 감상할때 심히 방해되는 정도는 아니었다. 밤하늘도 적당히 보였고 건물들은 다 저마다 빛을 내고 있어 그리 나쁘지도 않은 광경이었다. 그렇게 잠시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 박서원이 걸레 하나를 가져와 닦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그릇이나 컵을 들어올리며 거들었다. 그도 신경써서 닦을 생각은 아니었는지 적당히 먼지만 덜어내고 도로 걸레를 치우고 왔다. 살짝 남아있던 물기는 살살 부는 바람에 금방 날아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박서원은 내 반대편에 앉으며 고로케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튀김류 먹는 건 오랜만이네? 관리해야 한다고 입에 잘 대지 않는 종류 중에 하나였는데 이건 괜찮았나보다. 나도 고로케를 먹으며 조용히 앉아있자 박서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간만에 먹으니까 맛있네요. 이것도 어릴때 아니면 잘 안먹었는데."

"저도 어릴때 이후론 안먹었던 거 같아요. 먹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아무래도 잘 해먹는 종류는 아니니까요. 기름도 많이 써야하고."

"그런데 왜 고로케예요? 감자 요리는 다른 것도 있지 않아요?"

"그냥요. 어릴때 감자가 남으면 할머니가 만들어주셨거든요. 버릇이죠."

그러다보니 만들었네요. 이걸 만들고 나서 생각하네. 박서원은 한손으로 턱을 괸채 말하였다.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이 내 머리카락과 같이 박서원의 머리카락도 흔들었다.

박서원의 할머니는 저쪽에 있을때와 마찬가지인 때에 돌아가셨다. 저쪽과 다르다면 박서원은 할머니의 임종과 장례식을 동생과 함께 지킬수 있었다는 거지.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박서원의 눈에는 그리움이 깃들어있었지만 슬픔 보다는 따스함이 담겨있었기에 조용히 앉아 그를 기다렸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박서원은 다시 눈을 맞추며 말하였다.

"정해준 씨한테 이런건 처음 얘기해주던가요?"

"아뇨, 전에 다른 것도 얘기 해줬어요. 할머니 도와서 지화 만들었다는 이야기요."

"아, 그건 얘기 했던가? 맞아요. 제가 할머니 닮아서 손재주는 괜찮은 편이었거든요."

"요리 실력도 그런거 같고요."

"그렇죠. 박서예는 이런거 하나도 안닮아서 큰일이지만요. 덕분에 제가 다 먹여 살렸어요."

"박서예 씨는 그렇게 얘기 안하시던데."

"걔가요?"

"오빠는 자기 덕분에 인간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거라던데요."

"걔가 하는 말 중에 대부분은 헛소리니까 기억하지 않아도 돼요."

"근데 그 말은 저도 박서예 씨 말에 동의해요."

"너까지 그러게?"

"틀린 말도 아니잖아."

박서원은 내 대답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보였다. 애인이 편도 안들어주네. 평소에 잘 하던가요. 이것보다 더 잘하라고? 일 그만 두고 옆에 붙어있어야 하나? 그런 소린 하지 말고요. 저한테 잘 하란게 아니라 동생한테 말하는 거예요. 정해준 씨도 동생한테 잘 하진 않잖아요? 저정도면 잘 해주는 거죠. 정해준 씨도 참 양심이 없어요. 누구 보단 있으니까 걱정마세요. 나는 박서원과 이렇듯 실 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고로케를 나눠먹었다. 꽤나 많이 만들었던 터라 나눠 먹고서도 고로케가 남았는데 그 중에 몇개는 박서예 쪽으로 들려보낸거 같았다. 후에 박서예에게서 자신의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메세지가 날아왔을 때에는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