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창작 단편

#선착순으로_멘션_온_3개로_짧은_글쓰기(2017.06.25)

멘션 온 단어

우산

양자택일

분홍색 매화


"아, 비 온다."

토도독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새파랗던 하늘이 어느새 잿빛으로 변하고, 그 풍경을 담고 있던 창문엔 어느새 물방울로 여러 선이 그어져 있었다. 나는 보고 있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살짝 창문에 손을 대자 냉기가 손바닥 전체에 머물렀고, 창문에 내 손 모양대로 하얀 김이 서렸다. 나는 그 자세 그대로 회색빛으로 변한 세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학생들이 떠난 운동장엔 크레이터처럼 물웅덩이가 고이고, 안 그래도 칙칙했던 건물들이 더 어두워져 본 모습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빗소리에 모든 소리가 가려져 내 주변은 적막으로 가득 찼다. 마치 세상과 동떨어진 것 같은 기분. 언젠가 읽었던 종말 후의 세계에 있는 것 같아 설핏 웃음이 흘렀다.

창문에서 손을 떼며 공상의 세계와 멀어졌다. 제자리에 돌아와 얄팍한 가방을 뒤적거렸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 흔한 우산 하나 들어있지 않았다. 교실에 담임 선생님이 갖다 놓은 예비용 우산이 있었던 것 같은데. 흐릿한 기억에 의지하며 나는 가방을 들고 도서관 밖으로 나갔다.


열쇠로 자물쇠를 열고 침묵 속으로 한 발자국 내밀었다. 워낙 조용한 터라 발걸음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교실 뒤편 우산꽂이에 다가가 봤지만 누가 버린 망가진 우산만이 하나 있었을 뿐, 멀쩡한 우산이라고는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하나 남은 우산을 펼쳐보았지만 너덜너덜한 게 도저히 쓸 만 해 보이지 않았다.

"우산꽂이는 쓰레기통이 아니야."

불평을 툭 던지며 우산을 도로 꽂아 넣고 내 자리에 돌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여전히 빗소리가 귀를 두드리고 있다. 내게 우산은 없다. 예비용 우산도 없다. 그래도 봄비라 그런지 세기가 약하다. 가방으로 대충 막고 뛰어가거나 그냥 이렇게 그치기를 기다려도 될 것 같다.

"양자택일..."

중얼거리며 시선을 슬쩍 옮겼다. 창문 바로 옆에 있던 분홍색 매화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매화는 회색빛 세상에서도 홀로 꼿꼿하게 제 빛깔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결국은 비에 휩쓸려 조금 지고 말겠지만. 그렇다면 저 빛깔도 오늘까지라는 걸까. 나는 턱을 괴고서 매화를 빤히 바라보았다.

"...비가 그치길 기다릴까."

"깜짝이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앞문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어두워서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곧이어 교실 불이 환하게 켜지고, 눈이 부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사이 그 누군가가 내 앞까지 다가왔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그의 얼굴이 보였다.

"선생님."

"집도 안 가고, 불도 안 켜고 여기에서 뭐 하고 있었어?"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비가 와서요. 우산이 없어서 비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가 교실에 우산 갖다 놨잖아?"

"네. 그거 때문에 교실에 온 건 데 이미 없네요."

"뭐?"

내 말에 놀란 선생님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셨다. 그래 봤자 없는 우산이 생길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굳이 우산꽂이에 다가가 아까 내가 했던 행동을 똑같이 반복하셨다. 선생님은 어깨를 살짝 늘어뜨리셨다. 설마.

"...선생님도 우산 없으세요?"

"아, 응... 깜박하고 놓고 왔어."

멋쩍게 웃으며 선생님은 볼을 긁적이셨다. 새 학기가 시작하고 처음 뵈었을 때부터 어리숙해 보였던 선생님은 첫인상 그대로셨다. 3년 차에 올해가 첫 담임이라 하셨나. 아직 학기 초반이지만 반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뻔히 보였다. 속마음을 미뤄 넣고 나는 가볍게 말을 던졌다.

"선생님, 차는요?"

"나 집이 멀지 않아서 운동할 겸 자전거로 다니거든."

운동하는 사람치고는 말라 보이는데. 운동해서 마른 걸까, 아니면 말라서 운동하는 걸까. 아무래도 좋지만.

"너는 교실에서 혼자 뭐했니?"

"매화..."

"응?"

무심코 튀어나간 말에 눈동자를 데굴 굴렀다. 쓸데없이 솔직하게 말해버렸어. 선생님을 훔쳐보니 멍청한 표정으로 눈만 끔벅거리고 계셨다. 이런 분이시니 대충 괜찮겠지. 나는 매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매화가 예쁘길래 보고 있었어요."

"아아. 매화 말이지. 응, 정말 예쁘다."

선생님은 그냥 나에게 맞춰주시는 건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모를 대답을 하시고선 매화쪽으로 시선을 옮기셨다. 선생님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비 때문에 곧 지겠지만요."

편한 분위기 때문일까. 혼자서 담아두기만 했던 생각도 여과 없이 나가버렸다. 그래도 상대가 상대라 그런지 아까와 같은 꺼리낌은 없었다. 나는 그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매화를 보았다. 무수히 떨어지는 빗방울이 분홍색 꽃잎을, 노란 수술을, 갈색 나뭇가지를 차례차례 때리고 지나간다. 매화는 힘없이 흔들리기만 한다. 곧 있으면 져버릴, 한순간의 아름다움. 그 덧없음 때문에 나는 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이렇게 매화를 보고 교실에 머무르게 된 것도 그저 예뻐서가 아니라 동정심이 들었기 때문일 거다.

"음... 그럴까?"

뜬금없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매화는 추운 날씨에도 피고, 아치고절이라는 말이 붙을 만큼 강한 꽃이잖아. 봄비 정도로 쉽게 지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꽃은 어차피 다 지게 되어있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래도 괜찮지 않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듯이 바라보았지만 선생님은 여전히 매화에 시선을 고정하고 계셨다. 선생님 뒤로 비가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꽃이 진다는 건 곧 열매가 열린다는 거니까. 비를 맞아도, 바람에 흔들리며 꽃은 열매가 되는 거야."

선생님이 고개를 돌리셨다. 시선이 정면으로 맞부딪히자 선생님은 싱긋 웃으시며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셨다. 빗소리가 멈추었다. 빗소리마저 사라진 정적 속에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퍼져나간다.

"꽃다운 너희도 멋진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선생님 힘낼게."

구름이 멀어지고 아득하게 햇빛이 내려온다. 내게도, 선생님에게도. 눈이 부신데도 눈 한 번 깜박일 수도 없었다. 눈 부신 햇빛과 선생님의 눈빛과 머리에 닿은 온기가 그 순간의 전부였다. 나는 숨을 삼키었다.

"선생님."

"응?"

"오글거려요. 누가 국어 선생님 아니랄까봐."

"엑."

"그리고 여학생 막 만지시면 성추행으로 신고당할 수도 있어요."

"나, 난 그런 의미로 한 게 아니라! 기분 나빴다면 미안..."

황망히 손을 떼고 고개를 숙인 선생님을 애써 무시하고 난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내 심리를 대신하듯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비 그쳤어요. 전 이만 가볼게요."

"정말이네. 앗, 혼자 가지 말고 선생님이랑 같이 가자!"

뒤늦게 따라오는 선생님을 보지도 않은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비도 그치고, 빗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마음이 소란스러웠다. 나는 한 손에 얼굴을 묻고 입술을 깨물었다.

선택을 잘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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