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창작 단편

[1차]비 오는 날

쏴아아. 내리는 게 아니라 쏟아진다는 표현이 더 걸맞을 비를 바라보며 소녀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가방 안쪽에 접는 우산에 있긴 했지만 이렇게 거센 비를 보고 있노라니 밖으로 나갈 엄두가 쉬이 나지 않았다. 조금 약해지는 걸 기다릴까. 현관에 서서 물웅덩이가 무수히 생겨나는 땅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런 것을 고민할 때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집에 안 가고 뭐해."

"아, 그, 그게..."

소녀는 곁에 다가온 소년의 얼굴을 보며 얼굴을 붉히며 입을 오물거렸다. 분명 먼저 간 줄 알았는데 반장이라 선생님 일을 돕고 이제 나온 모양이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모습을 소년은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혹시 우산 없어?"

"어?"

"없으면 같이 쓰고 갈래?"

팡 소리와 함께 큰 장우산이 활짝 펴지고 그걸 든 소년이 소녀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 모습에 소녀는 몰래 뒷짐을 지며 가방 바닥을 매만졌다. 이쯤에 접은 우산이 있었을터였다. 우산은 있지만... 소녀는 흘끗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항상 멀리서, 근처에서 몰래 훔쳐보았던 미소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이 미소를 조금만 더 볼 수 있다면...

"으응. 미안하지만 부탁할게!"

소녀는 가방에서 손을 떼고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하루만 작은 거짓말은 눈감아달라며 신에게 빌면서.


비는 점점 약해지긴 커녕 점점 거세지는 것만 같았다. 무수한 빗방울이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다행이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심장소리가 소년에게까지 들릴지도 모르니까. 한 우산 아래, 가까운 거리. 자꾸만 부딪히는 어깨와 어깨에 소녀는 오른손으로 심장 부근을 지그시 눌렀다. 나만 이렇게 신경쓰는 건 아닐까. 흘끗 소년을 보니 시선이 느껴졌는지 소년이 소녀를 마주보았다. 딱 부딪힌 시선과 시선에 놀란 소녀가 주춤거리며 소년에게서 반 발자국정도 떨어졌다. 우산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비가 소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적셔갔다.

"너무 떨어지지마. 어깨 젖잖아."

"어? 어, 어...!"

젖는 것따위 개의치도 않다는듯 자신의 어깨를 감싸오는 손길에 소녀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비에 젖어 어깨는 분명 차가워졌을터인데 닿은 손은 뜨거웠다. 그 열기가 훅 얼굴까지 끼쳐올랐다.

"괜찮아? 얼굴이 빨간데."

"아, 응! 괜찮아!"

"비 와서 날이 좀 추워서 그런가. 감기 조심해."

"너, 너야말로!"

소녀는 삑사리를 내며 대답한 후 고개를 푹 숙였다. 창피했다. 창피해도 너무 창피했다. 새빨개진 얼굴도, 과하게 커진 목소리도, 뻣뻣하게 굳은 몸도. 아무리 숨기고 숨기려도 해도 온몸으로 좋아한다고 외치고 있는 자기자신이 미웠다. 어떡해. 분명 눈치챘을거야. 눈물까지 찔끔날 것 같았지만 더이상의 추태를 부릴 수는 없어 꾹 참았다. 그러고 있으니 옆에서 작게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긴장 안해도 될텐데."

"어?"

"도착했어. 여기 맞지?"

고개를 드니 소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 입구가 보였다. 아. 저도 모르게 작은 탄식을 내뱉은 소녀는 도망치듯이 우산에서 빠져나와 현관 아래에 섰다. 이대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반, 이렇게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반이었다. 그래도 감사인사정도는 해야겠지 하고 뒤돌아 얼굴을 마주하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기분탓일까, 소년의 얼굴도 약간 불그스름한 것 같았다.

"그럼 내일 또 보자, 초아야."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가볍게 손을 흔드는 소년의 모습에 소녀, 초아의 어깨가 작게 튀었다. 이름, 알고 있었구나. 아까완 다른 이유로 올라올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으며 초아도 살며시 웃었다.

"으응! 오늘 고마웠어! 내일 또 보자, 재민아!"

겨우 내뱉은 감사인사와 이름. 별 것 아닌 말인데도 상대가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도 다르게 느껴졌다. 재민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멀어져갔다. 빗소리와 함께 섞여드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초아는 오랫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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