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의 필패
딸기 밭과 사람 득실거리는 숙소로 더는 돌아가지 못하게 된 형제자매에게.
에바 미리암 넬슨은 자기 자신의 삶에 들이닥친 운명이 불운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뼛속의 구멍에까지 침투한 숙명에 대해 호불호를 붙여봤자 곪는 건 자기 자신 뿐임을 알았다. 그러나 밤마다 묻게 된다. 그래서 신들이시어. 우리를 왜 낳아 이 고난 속에 밀어넣으셨는지. 우리가 현대 사회 속에 빌붙어 살아가지도 못하게 만들고, 저주와 고독 속에서 몸부림치게 만드는 것이 재밌으셨는지. 그래도 옛적인 우리들 중 몇이 뛰어난 학자와 예술가, 역사의 활자 속 한 획을 그어둔 위인들이 됐다는데 현대에서까지 그걸 바라시는 건지.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자비를 베푸소서. 어젯밤엔 헤르메스 숙소의 미배치된 아이가 너무 서러웠던 탓에 감싸안은 무릎에 손바닥 자국 남을 정도로 울었다 하덥니다. 그 이전 날엔 아테나 숙소의 아이가 머리 좋아봤자 결국 도태될 것이 뻔한데 무슨 의미 있겠냐며 어머니가 직접 내려준 책을 불구덩이 속에 집어던졌고, 그보다 더 전엔- 너무 많은. 양 손과 발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것임에 뻔한. 어쩌면 내 몸 위에 자라난 모든 구멍과 털의 개수보다도 더 많은 시절만큼의 슬픔과 억울함이 있었더랍니다.
그러나 에바 미리암 넬슨이,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수많은 반쪽피가 그러하듯 염원은 염원으로 남을 뿐, 기도를 한다고 하여 언제나 번제가 성공적이게 마쳐지진 않는다. 방 한 켠에 만들어둔 화로에 유서를 적어둔 종이를 집어넣으며 양 손을 맞잡는다. 아무것도 해결 되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이 상태라도 유지하게 해달라고. 이 위태롭고 아슬한 시소 위에서 내려가진 않을테니. 몇 번이나 신들의 부름에 이끌려, 그래. 원하신다면야 퀘스트라도 나갈테니…
베터리 빠진 핸드폰, 전원 코드가 뽑힌 텔레비전, 그리고 수동으로 연결해야 하는 와이파이 공유기 같은 걸 보며 자라난 아이는 자연스레 자신이 세상에서 유리된 사람임을 자각한다. 이런 처지에 놓인 ‘문제아’들 투성이인 캠프로 떠밀려 보내진다고 해서 그 씁쓸함이 옅어지진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말을 했지. 나는 이 캠프에서 뼈 묻을 생각 없다고. 빌어먹을 가루가 되어 관에 묻힐쏘냐. 나 튀어나가 뭐라도 외치리라고. 나 여기에 묻혀 죽어버리고 싶지 않다고., 나는 분명 하고자 하는 것 있고 원하는 것 있으며 나아가고자 하는 길이 명확하니
……….
에바 미리암 넬슨은 자신의 운명을 알았다. 그는 인간 세상에 편입되지 못할 것이다. 끝까지 사이에 남아 방황하다가 죽음 마저 허락받지 못한 채로 아비의 종속이 되어 종신 계약이나 맺을 것임에 뻔했다. 자신은 자연의 아이가 천천히 늙어가는 것과 달리 끝을 거부당한 생명체처럼 몸이 이어붙여지고 더는 늙지 않게 되어 창백한 피부와 가느다란 팔다리 길디 긴 검은 머리결 지닌 채로 땅바닥을 걸어다닐 것이고, 사람 하나 쉬이 오기 힘든 절벽 위를 배회하며 애도를 할 것이다.
유령이 시야 안에 들러붙고 안구 너머의 시신경에 이코르의 유전자가 흐르는 한 자신은 붉은 피를 흘려도 식칼에 의해 다치고 셀레스티얼 브론즈에 의해서도 다칠 것이고 괴물의 발톱에 의해서도 다칠 것이고, 같은 족속들이 뱉는 말에도 다칠 것이다. 인간이란 불완전한 생명체는 신을 닮아 빚어졌으니 각각 나름대로의 결함이 있으며, 그 결함은 우리를 영웅으로 성장케한다. 이것은 불운이다. 이것은 유일한 기회다. 동시에 우리에게 놓인 마지막 안배이다. 에바 미리암 넬슨은 태초의 인간이 그러하였듯, 그의 자유의지로 과실을 딴 것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
그녀는 해가 저무는 시대의 자유의지였고, 신화의 의미가 퇴색되어 종교 전쟁의 전야가 보이는 현대전에 속할 수 없는 군인으로 태어났다. ‘그녀’는 그랬다. 어쩌면 ‘그’도. 어쩌면 ‘그것’도. 어찌 보자면 ‘그 반쪽피’는. 아니면 ‘하데스의 자식’이라던가, ‘넬슨 씨’라던가, ‘이브’, 라던가…….
21세기의 전투기와 총기류 아래에서 견뎌낼 수 있는 십 대 청소년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쪽피 사이에선 존재할 수도 있으나 그런 트라우마 상황에 굳이 내몰리지 않더라도 겪을 수 있는 상실이라곤 모조리 삼켜 체험 경험을 한 세대가 우리들이다. 전쟁도 치뤄, 갈등도 해, 화해를 했다가 또 어설프게 굴러가…. 악은 고개를 치켜들지 못하며 선은 언제나 당당히 흰 깃대를 치켜든 채로 칼 끝을 검정에 겨눈다.
그리고 에바 미리암 넬슨은 제 이름을 바닥에 떨궈 못질을 하며 필패를 외친다.
그래. 내가 졌습니다 아버지.
그러니 거두어가소서.
우리 모든 형제들의 운명이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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