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ㄹㅅㄱ

[글][ㅈㄷㅇㅅ] 세상에 풀리지 않는 문제는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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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모래시계 (재연)

ㅇㅇ종도 x ㅇ우석

[세상에 풀리지 않는 문제는]

03

  이종도는 강우석이 약속 장소에 나올 것을 딱히 기대하지 않았다. 강우석에게 더이상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이종도였다. 그런 범생이에게 일탈은 한번으로 족하려니 생각하면서도, 기다리라고 한 장소로 걷고있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종도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입가에서 새어나오는 미소를 애써 참으려 하지 않았다. 멍하니 허공을 보고있는 익숙한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다 다가갔다. 

뭐 하냐. - 

  그 때 부터였다. 두 사람은 그 후로도 여러 차례 만남을 가졌다. 일주일에 한 번. 허름한 술집에서 가졌던 충동적인 자리는 목요일 저녁마다 계속되었다. 사실상 술을 마시는 건 이종도 혼자뿐이었다. 말을 하는 것도 거의 이종도 쪽이었다. 강우석은 늘상 식사를 하며 그의 말을 듣곤 했다.

  이종도는 항상 쏟아낼 말들이 많은 듯 했다. 엊그제 먹었던 반찬, 아랫집 부부가 부부싸움 한 이야기, 사무실 복도에 낀 거미줄, 가게 한 구석에 멈춰있는 시계 등등.

  우석은 그 말들을 담담하게 들었다. 이 묘한 만남에서 대답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종도는 아마, 강우석을 암묵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혼자 그렇게 지치지도 않고 줄창 떠들수는 없을테니까.

"아... 이것 좀 하지 말라니까..."

  이종도는 담배를 피면서 간혹 우석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부는 장난을 치곤 했다.  담배 연기를 못 맡는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도 절대 아닌 우석은 인상을 찌푸리며 콜록거렸다.

"냄새 하나도 못 참는 담배를 나한테는 뭣허러 사줬냐? 담배 줄테니 처피다 뒤져라 이거였냐?"

"어? 내가 줬다고? 아, 그 담배? 그때 그거?"

"그때 그게 요거야, 새끼야. 네가 줬던. 벌써 잊어버렸냐."

"...되게 독하네."

  머쓱한 표정을 짓던 우석이 시선을 돌리며 물을 따라 마셨다. 오늘은 웬일로 가게에 손님이 많다. 평소와 달리 늦어지는 안주를 기다리던 우석의 눈이 앞자리에 앉아있는 이종도에게 향했다. 이종도는 음식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항상 그랬다. 처음 만나던 날부터 자리에 앉자마자 다른 건 쳐다보지도 않고 술만 들이켰으니까.

  처음에 강우석은 그러려니 했다. 그러다가 만남이 몇 차례가 반복되자 넌지시 말했다. 빈 속에 그렇게 술만 마시면 속버려, 뭐라도 좀 먹어. - 당연하게도 그 말은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별로 놀랍지도 않아서 또다시 그러려니 했다. 

"식사 전에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몸에 안 좋아."

  언제나처럼 강우석이 말했다. 그리고 또 언제나처럼 이종도는 그 말을 한 귀로 흘려보냈다. 다음주도, 또 그 다음주도. 언제라도 매번 이럴것이라고 강우석은 생각한다. 자기는 우려하고, 이종도는 무시하고. 매번 말해봤자 듣지도 않는 말을 뭐하러 하냐고 묻는다면, 딱히 이유랄 게 없는 게 이유다. 그저 강우석은 생각할뿐이었다. 이 정도 말은 해도 되는 사이겠지. 이제 그 정도 사이는 맞겠지, 하면서.

"...이종도, 너 손 왜 그래?"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우석의 눈이 테이블 아래로 담배곽을 만지작거리는 이종도의 팔 쪽으로 향했다. 술병을 쥔 손등이 온통 멍투성이였다. 우석의 물음에도 아랑곳않고 소주를 따르는 종도의 표정이 태연했다. 뭐 이런걸 신경쓰냐는 듯 했다. 괜한걸 물어봤나, 싶으면서도 우석의 눈은 종도의 손등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손등의 멍 정도야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온 몸에 상처를 달고 살게 뻔했으니. 아직까지는 한번도 심하게 다친 모습을 본적은 없지만, 만약 이종도가 피를 철철 흘리는 모습을 보게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었다. 본인이 모를 리가 없었음에도 우석은 구태여 묻고 싶었다. 

"괜찮냐고. 너."

  에이씨, 상처투성이인 손으로 이종도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언제 자기한테 관심이나 있었다고 저런걸 묻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까짓 게 뭐라고. 상처따위야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강우석의 질문은 익숙하지 않았다.

" 뭔 상ㄱ.... 에휴.. 별 거 아니여. 아까 낮에 애들 기강 좀 잡았더니 그런다. 어지간해선 내가 안 하고 애들 시키긴하는데... 그래도 가끔은 내가 나서줘야, 어?" 

  실실거리며 다시 술을 들이켰다. 강우석이 알 바가 아니었음에도 이상하게 그 참견이 싫지 않았다. 이 새끼가 공부랑 박태수말고 궁금한 것도 있었네-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는 강우석의 표정이 미묘했다. 걱정을 하는 건지, 당황한건지, 아니면 한심하다고 여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항상 무던하던 얼굴에 감도는 혼란함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한다는 질문이 손등의 상처는 괜찮냐니, 언제 강우석이 이런걸 먼저 물어보게 되었지? 

  실실거리던 이종도의 시선이 여전히 혼란한 얼굴로 도토리묵에 젓가락질을 하는 우석의 손으로 향했다. 평생 주먹질이라고는 해봤을리 없는 매끈한 손이었다. 핏자국대신 묻어있는 볼펜 잉크를 잠시 바라보던 이종도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이내 이종도의 시선은 묵을 먹는 강우석의 얼굴로 향했다. 저 맛대가리 없는 걸 잘도 먹는다 싶다. 그걸 당췌 무슨 맛으로 먹는건지 물어볼까 생각하던 이종도는 다시 소주잔으로 고개를 돌렸다.

  술안주로 묵을 시킨 건 이종도였다. 하지만 이종도는 묵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육전이나 새우튀김보다 묵을 더 잘 먹던 강우석때문이었다. 저러니까 비쩍 꼴았지, 사내새끼가 뭔.... - 생각하면서도 군말없이 도토리묵을 시켰다. 어차피 자기는 안주도 안 먹는데 별 상관없으려니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야.... 야, 너 뭐냐? 아씨.... 얼마나 마셨다고 자빠지고 지랄이여....."

  혼자 자작하던 게 영 재미없던 이종도가 소주 몇 잔을 권한 것이 문제였다.

"그러게 왜 줬어.... 나 술 못하는거 알면서...."

"그니까는. 내가 왜 그랬을까? 에휴... 야, 이거 몇 개야. 야."

  손가락 두어개를 강우석의 눈앞에서 흔들며 낄낄거렸다. 테이블 위에 거의 엎어질 것마냥 팔꿈치를 대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강우석이 힘겹게 얼굴을 들었다.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양손으로 종도의 손가락을 잡았다. 하지마... 머리아파 죽겠어... - 마치 기도하는 것 마냥 두 손을 모아 잡은 채 고개를 숙이는 우석을 바라보다, 이종도는 손을 빼냈다. 상체를 지탱하던 종도의 손이 빠지자, 우석은 아예 테이블 위로 이마를 박고 엎어졌다. 그걸 보며 킥킥대던 종도는 이내 단정하게 정리된 우석의 뒤통수를 바라보다 다시 소주를 들이켰다.

"아오 쯧.... 내가 다시는 니한테 술마시라고 하나 봐라.... 쪽팔려서 진짜..."

  혼자서 마시는 술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었는데. 왜 오늘따라 이 놈한테 마셔보라고 했는지 스스로도 통 알 수가 없었다. 서로가 술을 따라주는 그림이 되는 날은 평생 오지 않을 걸 안다. 강우석이 갑자기 술을 잘 마시거나 좋아하게 될 일은 없어보이니.

  강우석에게 술을 권한건 언제나 있는 이종도의 변덕 중 하나였다. 스스로뿐 아니라, 강우석도 그걸 알고있었다. 말도안되는 변덕임에도 불구하고 강우석이 그 충동성을 받아주는 이유를 이종도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냥 짐작할 뿐이었다. 이 정도는 받아줄 수 있나보다, 라고. 

  우석의 머리맡에 눌린 계산서를 꺼내자 뒤통수를 보이며 엎드려있던 우석의 머리가 옆으로 기울었다.  잠든 우석의 옆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은 우석의 얼굴이 낯설었다. 학창시절에는 항상 교실의 뒷자리에 앉았고, 앞이나 옆에 앉았다해도 뭐, 그때는 별 관심이 없었으니.

  사실 지금도 영 기분이 이상한건 마찬가지였다. 어쩌다가, 강우석이랑 이런 사이가 되었더라. 내가 왜 지금 강우석이랑 마주보고 앉아서 술을 마시다가, 소주 두어잔에 꼴아박은 강우석을 바라보고 있는거지.

  생각해봤자 별로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이종도는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어째서인지 우석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 미안해... 깜빡 잠들었네... 지금 몇시야?"

"인났냐? 뭔 여기가 느그 집 안방인줄 알어.... 일어나. 마감 시간 다 됐다."

  퍼뜩 고개를 들며 일어나는 우석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아직 채 잠에서 완전히 깨지않아 비틀거리던 우석은 용케 일어나지 않고 종도를 따라 식당을 나왔다. 

  여름이지만 저녁이라 바람이 서늘했다. 쌀쌀한 온도라서 다행스러웠던 건, 어지간히 취한 사람이 아니면 술을 깰 날씨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이었던 점은, 강우석이 그 '어지간히 취한 사람'에 속해있었다는 점이었다.

  넘어지지않고 걷는 게 정말 신기할 지경으로 우석은 거의 눈을 감고 걷고 있었다. 다행히 지난번에도 그렇고, 우석에게 귀소본능은 확실하게 있는 듯 했다. 종도의 팔을 잡고 가고있었지만 걸어가는 방향만은 착실하게 하숙집쪽으로 향하고 있었으므로.

  이종도는 순순히 우석에게 팔을 내어주었다. 눈을 감고 비척비척 걷는 꼴이 우스워서 일부러 팔을 앞뒤로 크게 흔들기도 했다. 팔이 흔들리면서 강우석의 상체도 함께 흔들렸다. 꼭 실에 매달려 움직이는 목각인형같았다. 웃기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군소리없이 우석의 하숙집쪽으로 향하는 건 그 이유 때문이었다. 

"야, 야야야, 야! 야임마!"

  우석에게 한쪽 팔을 내준 채 유일하게 자유로운 다른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리던건 이종도의 실수였다. 그 실수로 우석의 옆으로 지나가는 오토바이를 아슬아슬하게, 정말 간발의 차이로 피할 수 있었다. 어쨌든 피했으니 실수는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만약 종도가 우석을 강하게 끌어당기지만 않았어도 우석은 정말 큰 사고가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애초에 두 사람 모두 정신이 멀쩡했다면 이럴 일도 없었으니.

  우석의 곁을 지나쳐가는 오토바이를 향해 욕설을 내뱉다가, 여전히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우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

"야, 니 뭐하냐? 눈 똑바로 안 뜨고 다니냐?"

".....미안...."

"에이 씨ㅂ.... 니 방금 뒤질뻔한거 알어, 몰러? 어?"

  이제서야 술이 깬 듯, 눈을 껌뻑이며 마른 세수를 하는 우석의 표정이 멍했다.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우석의 시선이 종도의 팔을 붙잡은 자신의 손으로 내려갔다.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어낸 강우석이 두어발짝 물러났다.

미.. 미안.- 바닥을 응시하며 웅얼거리던 우석은 대답없는 이종도의 걸음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이종도는 금새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오토바이에 치일뻔해서도 그렇지만, 새끼오리마냥 자기 뒤를 따라오는 강우석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작 소리 좀 친 거 가지고 기가 죽어서 눈치 보는 것도 그렇고, 진짜 다칠뻔한것도 그렇고.

  치이기라도 했으면 진짜 귀찮을 뻔 했네. - 생각하며 이종도는 우석의 표정을 살폈다.  술은 완전히 깬 듯, 더이상 팔을 잡지 않고 똑바로 걸어오는 우석의 얼굴이 잔뜩 풀이 죽어있었다. 괜히 그 표정이 짜증이 났다. 주머니에서 오토바이때문에 잠시 잊었던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물었다.

"아오 ㅆ... 니는 뭐..... 고거 한 마디 했다고 쪼냐? 뭔 사내새끼가 돼가지고는.... 좆 떼라, 니 그럴거면. 에휴... 한심한 새끼."

"야.. 무슨 그런 말을 해... 미안해서 그런거지, 쫄기는 무슨. 말을 해도 진짜...."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발 보폭이 넓어졌다. 여느때처럼 두 손으로 가방줄을 꼭 붙잡고 걷는 모습이, 벌개진 얼굴만 아니었다면 술을 마셨다고 쉽게 짐작하지 못한 것이었다.

  귀소본능 확실하네. - 한결 편해진 두 손을 주머니에 넣으며 이종도가 중얼거렸다. 서늘한 바람으로 날아간 술기운때문에 한기를 느낀 우석이 두 팔을 감싸안으며 걸었다. 

  이종도는 다시 한번 담배연기를 훅 내뱉었다. 그래, 지금 우리 사이에 이 정도는 받아줄 수 있나보다.

"종도야... 아까 고마워. 조심히 들어가. 앞으로... 술 안 마실게."

  사거리에 도착한 우석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종도에게 인사를 건냈다. 사거리에서 영진의 하숙집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그걸 알고있는 이종도는 구태여 혼자 가겠다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어지간히 쌀쌀했던듯 빠른 보폭으로 걸어가는 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쪽으로 걸음을 옮긴 것은 또 다른 변덕이었다.

  다른 이유가 있는건 아니고, 저 등신새끼 또 아까처럼 오토바이에 들이박을뻔하기라도 하면 또 나만 아쉬워지니까.

  그래. 그뿐이었다. 

"경보하냐? 넘어지겄다 새끼야."

  걸어가는 우석의 어깨를 툭 치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곁눈질로 보이는 우석의 멍한 표정을 무시하면서. 하여간 웃긴 놈이다. 항상 생각했지만. 그리고 동시에 짜증이 났다. 이유는 당췌 알 수가 없었다. 이 찐따 새끼가 오토바이에 치일 뻔해서, 평소보다 도토리묵을 더 많이 남겨서, 지가 사준 담배도 못 알아봐서, 아니면 자기 팔을 놓고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강우석의 뒷모습을 보고.

 

"....도착했네. 고마워. 조심히 들어가, 이종도."

  대답없이 닫히는 철문의 차가운 소리가 익숙했다. 혼자서 걷는 길목도, 공중에 흩뿌려지는 담배냄새도. 익숙해야 하는데도 평소와는 다른 공기가 왠지 기분이 나빴다. 

  날씨가 쌀쌀해서 그렇겠지, 생각하며 이종도는 발걸음을 옮겼다. 비가 오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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