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부재

써틴 관계로그

123456789012 by 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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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 나인은 어린 나이에 재기불능이란 단어를 체화했다. 그 다음엔 무기력이었고, 종착지는 음울이었다. 허비한 시간들이 아쉽진 않았다. 모든 인생이 추모와 부고로 이루어져 있으니 보다 일찍 체득한 것이라고 보면 되는 일이었다. 보다 일찍 납득하면 되는 일이라고 받아들이면 됐다. 그러나 모든 삶이 비루해야 하는 법은 아니기에 그는 어느 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연구를 도와줄 안드로이드를 구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 첫 타자가 와이트먼이라는, 가면을 쓴. 사연 하나는 비굴하게 굴어 자신의 비참함을 함께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던 안드로이드였다.

감정의 부재

우리는 언제나 잃고만 살아왔으니, 우리의 관계 또한 잃음으로 명명되어야 마땅하다.

무게라는 것이 언제나 묵직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그 안드로이드는 부피가 제법 있었다. 인간처럼 조형이 된 그것은 수면 모드에 들어가면 코를 골 줄 알았고, 종이에 베이기라도 하면 그 엄지에서 곧바로 붉은 혈액이 송골송골 맺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매일 밤마다 양치를 같이 하고 곁에 앉아 숨을 색색 고르며 자기 직전의 묘한 시간을 향유하고 있다 보면 자연스레 농밀한 대화가 오가곤 했다. 그렇기에 에이브 나인은 가이아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직전에 와이트먼이라는 기체의 비밀에 대해 다 알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와이트먼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밀이라는 것은 표정 분석 기능이 다른 안드로이드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탑재 된 그에게 있어 불가하였다. 진실이라는 것은 언제나 거짓말을 뱉고 모면하기에 바쁘다 못해 다른 사람을 짓이길 생각만 하는 치에게 있어 까다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진실말을 말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엔 어떤 기분이 들었더라. 오롯이 사실만을 논하기로 했을 때엔 또 어떤 마음이 속에서 술렁거렸더라. 에이브 나인은… 답을 알았다. 나는 너를 친애하는 것이요, 내 실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를 귀하게 여기게 될 것임에 뻔하노라노. 딱 보자. 우리 사이 5년만 지나도 서로가 없으면 안 될 것이고, 우리는 불합리하게도 서로의 ‘이해자’가 될 것이노라고.

너는 감정적어고 다정다감하며 세심한 안드로이드고, 나는 이성적이면서도 광폭한-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인간이니까. 너는 폭탄 해체자가 될 것이고 나는 수류탄이 되어 늘 핀을 스스로 뽑고 다닐 것이다. 그럼에도 그 꼴이 익숙하다고 우리는 서로를 챙기며 다니겠지. 아니, 네가 내 뒷바라지를 다 할 확률이 높을테지만 말이다…

“와이트먼. 저를 아끼십니까.”

“예,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당신을 아끼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난폭한 행동은 그만둬주셨으면 합니다만, 안 그러실테죠.”

“당연한 말씀도…”

“에이빌어먹을 나인, 당신은 스스로를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꼭 그래야만 합니까?”

“예.”

그러며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당신이 소중히 여기고 있는데 굳이 나조차 나를 신경써야만 하겠냐고. 인생이 무상한 자에겐 삶이란 그저 잠깐 쉬다 가는 일이지, 휴식이 잠깐의 안식처가 되는 것이 아니기에 막막했다. 그러다 써틴과 나인이 됐을 때엔 어떤 마음이었더라. 확실한 건,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는 마음이 샘솟았던 것 같다. 트웰브를 잊지 못한 그가 할 수 있는 최후의 발악. 트웰브를 끝끝내 사랑하지 않게 된 에이브 나인이 할 수 있는 최악의 발버둥.

나는 나 대신 너를 사랑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사이 이전과 달라질 바 없으면서도, 우리는 동등한 양의 감정을 교차하여 나누어주게 될 것이다. 균등한 분배 만큼 이상적인 것도 없으니 너에게 가장 뒤틀린 숫자인 13을 내어주겠다. 그것을 네 이름으로 삼아 부르고, 그걸 네 육신으로 두어 호명하고…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는 말이야.

나도 내 자신을 올곧게 사랑할 수 있게 되어버리지 않을까.

그렇기에 에이브 나인은 써틴을 애정했다. 도구가 되지 못한 도구, 도구가 되지 못한 삶, 도구가 되지 못한 생, 이 모든 걸 떠나 서로가 서로의 결격사유가 되길 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너에게 바치는 하나의 마음. 도구로 변절되지 않기를 바라 악과 기를 쓰고 너의 염원을 산산조각 내는 것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

“써틴. 나는 당신을 친애합니다.”

“갑작스레 무슨 말을 하실려고요, 나인.”

“당신이 내 이름을 호명할 순간 마다 나는 내가 존재함을 체감합니다…”

“…….”

써틴은 말문이 막혔다. 존재함을 체감함이란, 그렇다면 본래는 그러지 않았다는 소리와도 마찬가지니까. 그러나 침묵한 채로 제 마지막 주인이 할 말을 지켜보기로 마음 먹었다. 나인은 침을 한 번 삼켰다.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는 소리가 선명했다.

“에이브는… 가족 이름 같은 겁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메르헨-디아의 실패작이지요.”

“스스로를 그렇게 폄하하지 마십시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지요. 나는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화성을 떠나버렸으니까. 나아가서, ……. 에이브는, 멸칭이기도 했지만 애칭이기도 했습니다. 2의 세제곱, 에이트라는 숫자의 변형어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나와 트웰브 사이에는 남 같은 것 필요하지 않을 거라 여겨 에이브로 부르게 됐으나- 아, 혀가 길어집니다.”

“듣고 있습니다, 나인. 천천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 요지는, 당신을 에이브 써틴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예?”

“내 가족이 되어 주십시오. 서류상으로도, 호적상으로도, 에이브 트웰브와 에이브 나인, 그리고 에이브 써틴이 되어 나와 함께 있었음을 증명해주십시오. 종이 위에 가족이라는 단어가 찍히기 위해선 수많은 노력이 필요할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해낼 자신 있습니다. 나는 기체권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이지 않습니까. 당신의 기회 같은 걸 언제든 들어줄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심지어 나는 돈도 제법 있고, 당신 먹여살릴 충전 포트 서너개 즈음은 집에 설치해둘 수도 있습니다. 물론 언제나 손에 물 묻히게 만들고, 내가 지쳐 뻗은 날엔 씻겨주게 될 것이며, 귀찮다고 널부러진 날엔 옷조차 정리해주고 말테고, 빌어먹을, 이러니까 온통 단점 같잖아…”

에이브 나인의 목소리는 볼품없이 떨렸다. 스스로도 이를 알고 있었다.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눈을 맞추고, 한 번 더 호명한다.

“트웰브. 당신을 내 가족으로 두어, 이 다양한 세상에서 형제도, 부모자식 관계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내…마지막, 가족이 되어주십시오. 내가 당신의 마지막 주인이 되어주듯이.”


* 엔딩 나면 해야 하는 것이 바로 관계로그 치기겠죠? 우리 가좍이 되어버리자. 우리 함께 살자. 그리고 같이 묻히자. 그 다음엔 기억 백업해서 세상을 유랑하며 살아가자. 그게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낭만일테니까. 우리 낭만 있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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