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국면
나인&크레이 핀
에이브 나인은 월면 지구에 정착한 지 얼마 안 지나 제법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 원더러 호의 탑승자이자 생존자였던 것뿐만 아니라 개인 연구소를 차려 ‘기체권 향상 연구’를 시작한 것으로 말이다. 운동권에 가깝지 않나? 라고 누군가는 속닥거렸으나… 뭐 어떤가. 어떤 분야로든 천재는 활약하는 법. 그의 이름과 명성은 남다른 것이 됐다.
그러는 와중 가장 시달리는 인간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크레이 핀- 아차, 주의하시오. 핀이라는 단어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하여튼, 크레이는 죽을 맛이었다. 아니, 살 맛이던가? 크레이는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했다. 서른 해 동안 인생을 살아오며 무력과 회피를 맡던 그는 기어코 화성에 가지 않는 선택지를 골랐다. 명백한 부인이었다. 더글라스 핀에겐 엿 한 번 먹인 꼴임과 동시에, 자신의 트라우마를 슈뢰딩거의 상자 안에 가두어버린 것이었다.
“이봐, 나인.”
“네, 부르셨습니까 크레이.”
“넌 도대체 왜 날 고용한 거냐?”
“글쎄요……. 당신이 짜증났나?”
“야 인마.”
“농담입니다.”
서류를 달칵이며 정리한다. 논문을 제 자리에 맞춰 정렬한다. A to Z까지 알맞게 나열하다 보면 크레이는 익숙함을 느낀다. 보통 이런 순간이 오면 뭐라고 하는 늙은 영감탱이 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건 존재치 않는다. 크레이는 낯섦을 느낀다. 그래. 나는 더글라스 핀과 같이 있지 않다. 보다 더 성격 더러운 에이브 나인과 함께 있지. 눈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당신이 안쓰러워서 고용했습니다.”
“하아?”
“나이 서른 됐는데도 인생의 갈피를 못 잡은 당신이 저 같아서 고용했단 의미입니다. 나같은 ASPD들은 자아 확장을 통해 타인을 인생의 개념에 도입하지요. 그러니까…”
“나인, 요약.”
“당신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외의 정보값이 우리 사이에 필요합니까? 그리고 방금 선반 잘못 꽂아뒀으니 한 번 더 정리해두십시오. 오후 3시에 미팅 잡혀 있으니 미리 몸을 정돈하는 것도 권고드립니다.”
“야, 너는 그 로봇처럼 말하는 것 부터 어떻게 해봐라.”
“어쩌라고.”
“싸가지를 없애진 말고.”
달그락, 달그락… 그릇을 정리하고 컵을 교체한다. 커피를 리필할 필요도 없고, 담배향을 맡을 이유도 없다. 이 연구원은 클린-한 삶을 살아오고 있으니까. 물론 가끔가다 코피를 흘리면 곤란해지곤 하는데, 그것도 감당할 만 했다. 뭐라고 야단치며 침대로 내쫓으면 될 일이었으니까.
크레이는 지금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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