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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가 당신을 부를 때
그래, 여행을 가고 싶었다. 나도 남들과 기록할 만한 추억 따윌 쌓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런 감성적인 건 죽어서 해도 괜찮다. 그런데 내가 왜 함께 가자고 했지. 연구소에 들른 전 직장 동료가 팜플렛을 주며 제안을 할 적 부터 혹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 것이었다면 진작에 추진해서 갔겠지. 어쩌면 눈이 가득 쌓일 적 까지 기다린 걸지도 모른다. 이것도 헛소리다. 인공눈이 늘 흩날리는 곳에 ‘계절’이라는 개념 따윈 존재치 않는다.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싶었던 걸까. 21세기에나 현존하던 나라를 회상하며 아름다운 옛날 사진을 짜깁기해서 팔고, 아마존에서 모조리 구매 가능한 물건들을 특별한 것이라도 되듯 예쁘게 담아 두 배, 세 배로 뻥튀기한 가격에 파는 관광지엔 당최 왜 가고 싶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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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와 나 사이에 놓인 무수히 많은 점과 선들
에이브 나인은 놀랍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와 나는 깊은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축에 속하고, 그렇게나 서로 붙잡고 물어 뜯던 초반 시간대에 비해 10년이 흐른 지금은 뭐, 선녀같지. 그러니까 나 말고 시온 라피우스가. 괴팍한 성질머리에다가 상대가 깨닫기 전까지 입 함부로 여는 작자도 아닌 치 좋답시고 달라붙어 자그마치 나이 앞자리가 한 번 바뀔 만큼 함께 걸어왔다. 트웰브에겐 향을 피우며 감히 전하지도 못할 비밀을 가득 만들었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던 것이겠지.
원목 가구와 쌉싸름한 향이 나는 향수 사이의 캐모마일 내음. 그리고 당신. 이방인. 여행자. 외딴 사람. 군인이라기엔 청명하고 민간이라기엔 습관이 몸에 베여버린 이. 내 인생에 급습해온 해일 같은 당신. 나는 당신이 지긋지긋해 미치겠는데, 이젠 없으면 허전해질 것임에 뻔하기에 내 마음을 고이 조각내 구경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는 왜 시온 라피우스에게 유난히 차갑게 구는가. 그건 내가 가장 약했던 시기를 상대방에게 보여준 적이 없어서 생기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왜 시온 라피우스에게 달갑지 않다는 듯한 투로 말을 내뱉는가.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다소, ‘싸가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럼에도 왜 시온 라피우스와 여행을 가고자 결심을 내렸는가. 글쎄다…….
어쩌면 그가 내 뺨을 감싸두며 한참 서투른 감언이설 뱉는 것이 마음에 들었던 걸지도 모르지. 내 회로는 달콤한 것에 참 잘도 길들여져 있어 웬만한 것이 아니면 쉬이 넘어가는 편도 아닌데, 투박한 것이 속을 후벼 파고 들어와 어디도 가지 못하게 막아버린 걸지도 모른다. 망치로 못을 두들겨 나무 위를 올라가던 에벌레의 진로를 막아봤자 순회하면 된다지만, 사람의 심정이란 그리 쉬운 작용을 하지 못하므로.
그렇다면 나는 저 치를 사랑하나? 아무렴, 사랑하지. 내 일부분을 조각해서 내어주고 싶을 정도로. 그만큼 나를 똘똘 뭉쳐 피 한 방울 조차 쉽게 주고 싶지 않아질 정도로. 애정이란 나 스스로를 견고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상대를 덜 상처입히기 위해선 내가 나무의 껍질을 엮어둔 것처럼, 돌의 가루를 물에 섞어둔 것처럼- 단단하고 부드러워져야만 한다. 그런데 난 한평생 견고함을 가장하며 살아왔으니 그건 자신 있고. 부드러움은 좀 어려웠는데, 끝내 택한 것이 수단이다.
예상이 가겠지.
나는 포상이라는 개념을 들먹이며, 휴가라는 것을 언급하며 상대와의 여행을 제안했다. 반응은 가관이었다.
“당신이요?”
“네, 저와 그쪽이 말입니다.”
“왜요? 아니, 저야 좋지만.”
“가고 싶다는데 뭐가 그렇게 문제입니까? 취소해드려요?”
“아뇨?”
“혀가 기네?”
“길어야 키스 하기 쉽, 아악!”
“귀하께선 봐주면 기어오르는 것이 너무 심하십니다…….”
상대에게서 배운 호신술이나 역으로 써먹고 자빠졌으면, 이젠 상대방의 답변이 올 차례이다. 시온 라피우스는 헤헤, 얻어맞고도 뭐가 그리 좋다고 웃으면서 승낙한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엔 아주 자신을 들어 연구소 내에서 빙글빙글 돌며 보는 사람 남사스럽게 굴기까지! 이를 지켜보던 연구원들이 ‘웬일로 라피우스 씨의 머리채를 안 잡으시지?’ 하는 쑥덕거림이 들려도 20초 정도는 참아줄 정도로 상대를 애정하므로 인내한다. 견딘다. 그러다 못 참아 냅다 코라도 잡아당길까 고민하던 참엔 발이 바닥에 닿는다. 기가 막힌 작자다.
“그 제안, 취소하시면 안됩니다. 또 말 실수라고 하면 저 상처받을 겁니다.”
“당신에게 상처 주는 걸 그만 즐겨야만 할텐데.”
“이럴 때엔 상처 주지 않겠다고 해야하는 거 아닙니까?”
“내게서 다정을 바라지 마십시오.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모질게 답해도 부드러운 손길이 다가온다. 아, 이것 보아라. 시간은 많은 것들을 해결해주고, 사람을 위하여 바뀌는 건 질색이다. 그러므로 너가 변할 적 까지 나는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입맞춤을 받는다. 아르얀로드의 한 거대한 연구소이자 집 앞, 문가에 서서. 인공 광원이 푸르스름하게 빛나며 밤 시간대를 알리는 곳 아래에서 사랑을 속닥인다.
“그렇지만 사랑은 바라게 됩니다.”
“당신이 주는 것에 비해선 보잘것 없는 양이 될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지만 이젠……. 우리가 주고 받고 있음을 알고 있으니까, 덜 두렵습니다.”
“여전히 불안하십니까?”
“나인, 나는 당신의 부드러운 말에도 흔들리고 상처를 입는 유약한 젠더리스입니다.”
“제기랄. 여린 젠더리스가 취향이라고 하지 말 걸 그랬나…”
키득거리는 음정. 연인처럼 서로의 턱을 문지르고 하순을 깨물며 행위를 나눈다. 그러나 연인이 되고 싶진 않다. 그래. 이건 일종의 여행厲行과도 마찬가지다. 나는 너에게 관계의 종결을 설명하기 위해 온정을 나누고, 너는 나에게 관계의 종말을 듣고 납득하는.
시온 라피우스, 시온 라피우스, 시온 라피우스……. 세 번 부르면 죽는다는 미신에 맞춰 그대의 이름을 입술 안에서 소리 없이 발성한 것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왜 나는 애정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온전하게 있길 바라지 않고 파멸하며 산산조각 나서 또 내게 거대한 흉을 남기길 바라는 건지. 지독한 트라우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지. 네가 먼저 날 애정한다 했잖아. 떠나지 않겠다 했으니 그 무게를 짊어져야만 하는 법이지.
그렇게 여행길에 오른다.
엔딩은 아직 멀었고, 우리는 오랜 시간을 살아가게 될 것이니까
미내님 생일 축하를 이런 식으로 하는 미륵불은 어떠세요
바다라는 거 제가 정말 좋아하는 곳인데 말입니다
바다가 삶이라면 발버둥 쳐 생을 추구하겠다고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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