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판길 위의 궤도

[AU:피겨 스케이팅 선수] 나인루스

123456789012 by NINE
11
0
0

튀는 얼음 파편, 낯에 서늘하게 들이닥치는 공기, 직선과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곧은 춤선. 아이스링크장 위에서의 속도는 곧 다치지 않음과 비례하고, 느림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고수의 행위거나 초짜의 서투른 걸음으로 해석된다. 늘 얼음 위를 바라보던 루시아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낸 것은 한 사람 뿐이었다고. 그 사람을 따라갈 자는 없을 거라고. 어떤 천재가 온다고 한들, 그 위에서 가장 아름다운 원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배역, 주인공이 아닌 보조 역할. 박수를 치고 트레이너가 되어 안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빙판길 위의 궤도

우리 모두가 한 번 즈음은 꿈꾸는 바다 위에서의 춤, 그것을 실현하는 자들.

BGM : TRI4TH / Green Field

얼어붙은 살얼음 길을 함부로 걸어다니는 자들은 없다. 추운 지대의 사람들은 겨울이 온 뒤에야 얼음을 캐기 위해 썰매견들과 함께 긴 거리를 달려 못과 정을 꺼내둔다. 도끼와 곡괭이를 통해 바닥을 파낸다. 시추가 완료된 곳에서 나오는 것은 물도 아닌 얼음, 얼음, 그리고 얼음 뿐이다. 뺨이 얼 정도로 추운 곳에서도 인간들은 활동한다. 루스는 다큐멘터리를 보며 생각했다. 안드로이드를 쓰면 되는 거잖아. 그러면 당신 같은 인간들이 다칠 일도 없을텐데. 그리고 생각한다. 인공적으로 얼음을 만들어서 팔면 얼마나 쉬울까. 우리가 카페에서 통상적으로 보급되는 얼음과 마찬가지로 ‘자동화 과정’을 거친 것들은 얼마나 깔끔할까. 굳이 저렇게 꾸역꾸역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24세기임에도.

그래, 24세기임에도 자연과 과학을 거부하는 자들은 존재했다. 아나키스트도 니힐리즘의 신봉자도 아닌 그들은 그저 살아온 방법이 그랬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비효율적이다. 비정형적이다. 곡선을 그리는 것과 직선을 그리는 것 중 가장 빠르게 결과물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은 직선이다. 곡선처럼 꺾인 것들은 언제나 긴 시간을 소모하게 된다.

-샥,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면 장면이 오버랩된다. 그는 빙판길 옆에 앉아 아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선수들이 바쁘게 중앙에서 원을 그리며 연습하는 사이 그 겉에서 떠돌기를 반복하며 꺄르륵 웃는 소리를 들린다. 결국 모든 것이 유흥 거리다. 모든 것이 재미를 견디기 위한 하나의 연습에 가깝다. 저들 중 재능이 있어 저 위를 뛰어다니겠다고 하는 이들은 몇 없을 것이다. 중앙에서 코치의 지도를 받아가지도 않고 속도를 높이면서도, 관광객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템포를 조정하는 이들을 바라본다. 루스도 그 가에 서서 포즈를 잡아보았다. 저게, ‘기본 자세.’ 그 다음에는 ‘상체를 숙인다.’, 혹은, ‘팔을 열심히 교차한다.’ 그러다 우당탕 넘어지는 소리. 루스는 문을 열고 들어선다. 빙판길 위로 자그마한 울음소리를 파악한 기체는 말한다. “조심하세요, 지나가겠습니다.”

그러다 오후 6시가 지나면 다들 저녁을 먹으러 빠진다. 늦게까지 더 놀고 싶다고 주장하는 아이들은 부모의 손에 이끌리거나 재촉 따라 가장자리로 물러나고, 친구들끼리- 혹은 홀로 즐기기 위해 빙판길을 찾은 어른들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따뜻한 아메리카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점잖게 물러난다. 아니면 한 바퀴 빠르게 돌고 나갈 방법을 찾거나.

“아이스 트럭 투입 되겠습니다.” 그들만의 은어로 부른다. 열심히 돌고 있던 선수들 또한 빠져나간 조용한 곳에서 얼음이 서서히 갈리며 원래의 모습을 취한다. 선수 한 명이 루스에게 다가온다.

“루스, 슬슬 스케이트 모드 해제해도 괜찮지 않겠어?”

“괜찮습니다. 이대로 대기하는 것이 편합니다.”

“그렇다면야, 뭐… 에이브 선배는 아직까지도 안 왔고?”

“네, 나인 씨는 오후 8시 부터 오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즈음이면 밥 먹고 온 우리들로 인해 빙판이 엉망이 될텐데.”

“그럼에도 잘 하시지요, 나인 씨는.”

루스는 드물게 칭찬을 입에 담는다. 본인도 모르는 것이다. 멀뚱거리며 서있는 것에다 대고 그 인간을 묻는다. 나는 잘해? 루스는 쉽사리 답변하지 못한다. 아까 넘어질 뻔한 것 다 봤습니다, 조심하십시요. 남의 손을 자르면 저희는 큰일 나지 않습니까. 정도로 타박한다. 상대는 에이, 나도 칭찬 받고 싶었는데! 라던가, 나도 그런 건 안다며 투정을 부리고 간다. 자판기에서 뽑아온 따끈한- 그렇다 해서 서늘하지도 않은 임시 충전 베터리 팩을 던져주며 오늘도 힘내라고 한다. 루스는 온정에 감사하다고 말을 뱉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말마따나 에이브 나인 선수는 오후 8시, 30분 만에 밥을 다 먹은 피겨 스케이팅 꿈나무들이 자유롭게 빙판 위에서 춤을 추고 자세를 잡으며 실컷 논 뒤에야 등장한다. 엉망이 된 곳 위에서 발판 자국만을 보고도 사람을 콕콕 집어내며 진도에 대해 타박한다. 유일한 선수 출신인 자가 할 수 있는 재롱과도 마찬가지고, 유일하게 대회에 나가본 적 있는 사람만이 부릴 수 있는 여유이기도 하다. 아예 꼴찌 발라당 넘어져가며 해버렸다면 꼴 좋다고 같은 스케이트장의 사람들이 말을 했을텐데, 그렇지만도 않다.

에이브 나인은 넘어지는 것 조차 의도를 담아서 하는 선수였다. 그가 만년 3등과 2등에서 그칠 수 있는 것도 의도적으로 실수를 했기 때문이다. 이를 알아차린 감독관이 노하여 그의 점수를 실격 처리 시킨 것을 말리는 장면이 잠깐 이쪽 판에선 이야깃거리가 됐다.

그러니, 태생적인 천재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대부분의 것을 해낼 수 있는 천재란 그런 것이다. 한쪽 방면에서 압도적인 재능을 보이는 천재란 그런 법이다. 스트레칭을 하던 그는 대뜸 보조 안드로이드를 부른다.

"루스 빙판 위로 오십시오."

"또 무슨 사고를 치시려고요."

"별 건 아닙니다. 잠깐의 실험을 해보고자 합니다."

루스는 감이 좋지 않았다. 실험이라는 말에 식은땀이 흐르는 팀원들도 있었을 것이다. 저런 괴짜 같은 인간이 실험이라니, 분명 의도적으로 넘어지게 하거나 예술적으로 스핀하다가 멀미 나서 토하는 법 알려주기 따위일지도 모른다. (나인은 실제로 이런 것을 알려준 뒤 코치에게 된통 혼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누구의 전담 스승도 되지 못하게 됐다.)

“이번엔 또 뭘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나인.”

“별 거 아닙니다. 당신과 춤을 추고 싶습니다. 이 빙판 위에서.”

“어째서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야, 그게 재밌을 것 같으니깐요."

"나인 씨는 재밌으면 다 괜찮죠?"

"당연한 말을 하십니다. 재미 만큼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도 없지요."

"무모하세요, 나인."

"하지만 스릴 있으면 삶에 기쁨이 깃듭니다. 자 올라오십시오. 나는 인내심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가장 오랜 시간동안 빙판 위에서 살며 노력해온- 두 배나 살아온 코치에 비해 더 긴 시간 동안 빙판의 건너에서 춤을 연습해왔을 이가 하기엔 우스운 소리다. 루스는 그리 생각하며 오른다. 아직 갈아두지 못한 날로 인해 둔탁한 소리가 얼음을 갈랐다. 스크래치가 별로 나지 않은 빙판 위로 흰 선이 한 쌍 그어진다. 무게가 나가는 탓이다. 걷듯이 이동하던 그는 어느 사이 밀듯이 동작하고, 밀듯이 동작하던 그는 어느 사이 나아가듯이 움직인다.

루스는 직감한다. 아니, 에이브 나인은 직감한다. 이 깡통 같은 작자는 나와 함께 춤을 춰주기에 안성맞춤의 상대라고. 루스는 깨닫는다. 내가 또 에이브 나인의 간악한 흉계에 걸렸구나, 하고. 그리고 이동한다. 걷는다. 동작한다. 직선이 아닌 긴 곡선을 그리며 링크장 위에 원을 그린다. 가장 이상적인 시작점. 그 다음엔 가로질러 1을 그린다. 그 길을 서너번 반복하며 선을 만든다. 어느사이 뭘 하려는 건지 구경하려는 듯 걸음을 멈춘 예비 선수들이 가장자리로, 거미 새끼들 우르르 몰려가듯 빠져나간다.

그 다음엔 S자로 휙 꺾어버리고, 이어서 여덟 팔자. 아니, 나인은 무한이라는 공식을 사용했다. 천천히 모래시계의 틀을 잡아가며 하나의 알갱이이자 틀이 굳혀지기 시작한다.

얼음 바람이 뺨을 스친다. 그 동작을 수백, 수천, 수만 번 반복한 사람처럼 군다. 눈을 감은 뒤에도 궤도를 그리는 모습이 자유롭다고 루스는 얼핏 생각해버리고 만다. 우습지. 가장 아름다운 동작을 보인 것은 그 사람 뿐이었는데. 그럼에도 한 번 다리 엉키지 않고, 어디에 부딪히거나 오차 내지 않고 같은 선 위를 계속해서 죽죽 긋는다. 누군가가 감탄사를 뱉는다. 계속해서 '동일한 장소'를 그었기에 기어코 홈이 파인 것이다. 지나치며 숨구멍으로 들린 말 하나. "위험할 지도 몰라." 루스는 눈을 감지 못한 채로 집중한다. 어디까지 가볍게 동작해야만 할지, 어디까지 무게를 감내할 수 있을 지 간을 본다. 앞에 있는 이가 다그친다.

"집중하십시오. 지금은 나와 춤을 추고 있는 것 아닙니까?"

"춤을 추고 있다기엔, 우린 지금도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는 걸요, 나인."

"루스, 이렇게까지 자국이 난다면 우리가 물러난 뒤에야 깡통이 한 차례 와서 이 위를 밀어야만 하겠습니다. 그렇지요?"

"네, 맞습니다. 그렇게 되겠죠. 슬슬 그만하고 물러설까요?"

"싫습니다. 이제부터가 본판인데."

그리고 턴, 드리프트, 끼익 하는 불길한 소리-

그러나 넘어진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루스는 급하게 휘청이며 한 발로만 땅을 딛어 유영하는 자를 쫓아 나선다. 물고기들이 물 안에서 헤엄치듯 직각으로 탁탁 끊어 이동하는 음이 분명하게 들린다. 몸의 움직임과 회전만을 사용하여 무게에 따른 가속도를 붙인다.

혹시나 모를 위험에 따라 루스는 쫓고, 쫓고, 또 쫓는다. 나 잡아봐라- 하고 노는 것도 아니고. 루스는 발 사이에 채이는 금이 자신에게 휘청거림을 제공하자 각오를 한다. 무게를 무시하고 바닥을 팍 내리 찍으며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쫓기 시작했다. -쫓고 쫓기는 한 쌍의 춤에 참여하게 된다.

그제야 루스가 자각하는 것 하나. 무게를 신경쓰지 않고 빙판길 위를 긁으며 나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더 상쾌한 일이구나. 속도가 차츰차츰 느려진다. 직선에서 원을 그리고, 타원을 모방하다가 다시금 무한의 궤도 위에 탑승하여 기초 동작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그러다가 간단한 스핀. 나인이 먼저 하면 루스 또한 따라 한다. 덜컥, 하고 얼음이 묵직한 소리를 낸다.

"두려워하지 말아! 밟아, 그리고 찍어 내려. 그리고, 또 전진을 해. 그리고 또, 나아가는 거야. 그런 식으로 궤도를 맞춰. 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잖아, 넌!"

외침에 따라 거절하지 않고 얼음 위를 유영한다. 루스는 그제야 체감한다.왜 우리는 얼음 위를 유영하는가. 어째서 인간들은 스포츠에 목숨을 거는가. 이 차갑고 시려운 곳에서 몸까지 상해갈 것을 알고 있음에도 얇은 옷을 입고 춤을 추는가. 튀는 얼음 파편, 낯에 서늘하게 들이닥치는 공기, 직선과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곧은 곡선.

사람들은 분명 이 위에서 낭만을 찾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제야 루스는 조연에서 주연으로, 아무개 배역에서 인생의 배우로 한 단계 오른다…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루스는 그것이 나인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구분하지 않기로 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