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에 남긴 고해
시온 라피우스 관계로그
에이브 나인은 시온 라피우스를 애정한다. 확답할 수 있다. 사랑하는가? 그건 잘 모르겠다. 우리는 고작 2주를 봐왔으니까. 이런 시간들로 확언할 수 있는 애정은 없다. 미쳤거나, 흔들다리 효과에 의해 모든 걸 맡겼거나. 둘 중 하나겠지. 나인은… 아마 후자였을 것으로 스스로의 상태를 추정한다. 그야 고작 2주 밖에 안 본 젠더리스 작자 한 명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는 욕망이 드는 일은 태어나 난생 처음이었으니까. 입을 맞출 적 마다 조심스러워지고, 잡혀서 들어올려지면 그렇게나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고, 내려다보며 색이 다른 눈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자니 귓가가 홧홧해지고…
그래. 이게 애정이 아니라면 누가 도대체 정과 애를 못과 정으로 다룰 수 있겠는가. 에이브라는 대리석에 망치를 붙이며 부술 구간을 찾는다. 코하쿠토나 사암처럼 두들긴다 해서 화려한 이펙트와 함께 산산조각나진 않겠지만, 이렇게 처음 느끼는 감정들 앞에선 겸손해질 필요성이 있다.
첫째. 이 감정의 유통기한은 어떻게 되는가. 아마 3개월. 안 본다면 3주일. 그런데 이미 나를 줘버렸으니 87.5% 확률로 무기한.
둘째. 이 감정의 이름엔 무엇이 들어갈 수 있는가. 사랑? 진부하다. 나는 그걸 할 줄 안다. 로맨틱함?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지. 속이 뒤틀리고 심보가 베베 꼬여 꽈배기가 되는 것도 로맨틱이라고 할 수 있다면야.
셋째. 이 감정엔 어떤 끝이 기다리고 있을까. 적어도 저 치가 내가 하는 짓거리들 죄다 성희롱인데 좋답시고 받아내다 못해 실실 웃고 자빠진 꼬락서니 보자니…
그러나 문제.
시온 라피우스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시온 라피우스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시온 라피우스는 사령의 삶에 익숙해진 채로 긴 시간 살아왔기에 타인을 쉬이 믿지 못한다. 선순환의 가능성을 제공해주었을 적 붉어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착각이 들던 눈가와 떨리지도 않던 음정 따위가 그의 고단함을 되려 증명한다.
시온 라피우스는 아마, 내 사랑을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믿지 않을 것이다. 내 거짓말의 합산으로 인하여가 아니라, 개인적인 이슈로 인하여.
이거 괘씸하잖아?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것은 꾸준히, 훗날 애정하노라고 말해주는 수 밖에 없다. 에이브 나인은 나른하게 숨을 뱉는다. 공백. 정적. 고요 속에서 고독함을 짓씹는다. 비어있는 충전 포트가 웅웅거리는 소릴 내고 창문 밖에서 연구원들이 지나간다. 나는 너를 애정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내 몸을 바친 자에게 바치는 세레나데이자 헌정에 가까우니까. 그러나 너가 나를 믿지 못한다는 것은 조금 괴로울 것 같다. 네가 나를 애정함에도 불구하고 표현 한 톨 못하고 삼키면서, 내가 뱉는 것을 쳐낸다면 그건 조금 많이, 아니. 실은 대단히 서러울 것 같다. 트웰브와의 유대에서 깨달은 바가 있다면 감정이 전면 부정당하는 일 만큼 서글픈 일도 없으니까…
그럼에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에이브 나인은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꾸준히 트웰브를 찾을 것이고, 가끔은 혼미한 정신 속에서 시온 라피우스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침대 시트를 손톱으로 긁어나갈 것이다. 잃고 싶지 않다고 몸 웅크려 엉엉 소리 내지도 못한 채 목 마르게 울다가 겨우 밖으로 나가 물을 마시고 감정을 추스를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다. 뜻대로 흘러가는 일 하나 없다. 그러나 나, 인내엔 자신이 있다고. 이 에이브 나인, 요즘 트렌드에 따르면 천재가 사랑을 하고 필부가 멍청이같이 서서 바라보는 것이 ‘유행’이기에 기꺼이 그에 탑승하겠노라고 마음 속에서 선언한다.
이는 모조리 속에서만 이루어진 독백, 고해, 너를 향한 한 편의 서사.
속에 그저 남겨진 채로 있는 고해.
애정에 관한…
하나의,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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