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유지 장치의 굴레

루시아 관계로그

123456789012 by 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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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 나인은 확신한다. 코드 콜론 루시아를 개조하려고 하는 사람 있다면, 그 자리는 자신이 차지해야만 한다고. 주먹 휘두르든 뭐든 해서 그 자리를 쟁취한 뒤에 제 손 뻗어 분해했다가 재조립을 시도하고 싶다고. 비록 그 분야로는 손을 안 붙인지 어언 15년이 지났지만 자신은 천재 아니던가? 적절한 자격 취득 즈음이야 한 달 꼬박 코피 질질 흘려가면 해낼 수 있고, 손에 익지 않은 감이야 틀릴 적 마다 새끼 손가락 한 번 씩 꺾어가면 한 손가락 다 거덜나기도 전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의 선이 각오로 변질됐을 즈음 나인은 전화를 걸었다. 아아. 휴스턴, 휴스턴. 여기는 에이브 나인입니다. 코드 콜론 루시아의 일시적 권한 양도를 희망합니다.

생명 유지 장치의 굴레

에이브 나인이 안드로이드에게 사랑에 빠지고 마는 것 즈음이야 언제나 있는 일이었기에…….

비슷했다. 세상과 관련되어 염증과 고름이 폐를 채웠음에도 두 발로 꿋꿋하게 세상 살아간다는 점이 말이다. 자신보다 한참 오래 된 권태와 무기력은 분노와 이해로 변질되지 않았고, 이성과 감정으로 격변하지도 않았다. 그저 간직을 한 채로 살아왔을 뿐이다. 코드 콜론 루시아는 안드로이드라는 불변하지 않는 신체 안에서 삶을 연명하고, 옌디아 메르헨-디아는 에이브 나인이라는 새로운 시체에서 눈을 뜨고.

고해하자면, 에이브 나인의 명패엔 여전히 옌디아 메르헨-디아라는 이름이 부가적으로 적혀있었다. 개명 신청을 적극적으로 요구한 적이 없었다. 신분 증명을 위해 많은 걸 정정하는게 귀찮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그는 이름 란에 에이브 나인이라는 것을 적어 내 행정 처리에 엿을 먹이는 기발한 사람-안드로이드 쥐어짜기 전법을 썼을 뿐, 이름을 정정한 적은 없었다. 그저 시대가 바뀌었음에 따라 그의 몰상식한 행동이 이해 받았을 뿐, 3세기 전이었다면 숱하게 많은 프로그램과 개발팀에서 이름이 빠졌으리라. 2370년은 아니었다.

그리고 2371년도 아니게 될 것임에 뻔했다. 에이브 나인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이 왜 그렇게나 안드로이드의 분해에 거부감을 곱씹기 시작했다. 코드 콜론 루시아의 개조 보고서를 적으면서 식은땀을 연신 흘리고 헛구역질을 하다 기어코 몸에 힘 풀려 탁자 모서리에 이마를 거하게 찍어버린 뒤의 일이었다. 벽에 주르륵 기대어 앉아 연산 과정을 이어나갔다. 이게 다 빌어먹을 트웰브 탓이다. 이게 다 그 가증스럽고 짜증나던 트웰브 탓이다. 이게 다…….

안드로이드에게 의존적이게 자라온 생명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많지 않다. 그러므로 사고 또한 안드로이드에게로 귀결된다. 어쩌면 난 이 자리가 대체되길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 새로운 이름이 적혀, 기왕이면 자신이 아는 형태로, 강단이 있고 올곧게 자신의 말을 퍼부어대던 이에게로 전승되기를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

미친 짓이지. 애꿎은 안드로이드 하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지 않던가. 익숙한 혐오감과 자괴감이 일렁거리며 들이닥친다. 그런데 생각해봐, 옌디아 메르헨-디아. 이게 마지막이잖아. 이것만 해낸다면, 지긋지긋하던 유년과의 담을 쌓을 수 있어.

그러므로 에이브 나인은 퇴각이 아닌 전진이라는 버튼을 누른다. 스위치를 달칵거리고 레버를 밀어 노선을 변경한다. 보고서를 정갈하게 작성한 에이브 나인은 루스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간다. 문을 박차고 열며 뱉는 첫 마디는 이렇다.

“옌디아 메르헨-디아의 이름으로도, 에이브 나인이라는 이름으로도 당신을 개조하고자 한다면. 그러면 당신에 대한 내 신의를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부연설명은 덧붙이지도 않는다. 손을 맞잡거나 다가가서 부담스러운 눈길 주는 것 대신, 문에 기댄 채로 긴장된 자세를 취한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 탓에 입이 더는 벌려지지 않는다. 뭐라 말하면 좋느냔 말이다. 당신을 일시적이게 도구로 다루고 싶다고, 당신에게 많은 것을 털어놓고 싶다고, 당신과 수많은 것들을 새로이 그려나가고 싶다고… 당신이, 내가, 우리가, 이 숱한 고통 속에서도 살아가고 긍정적이게 바뀔 수 있는 존재임을 입증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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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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