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ㄹㅅㄱ

[글][ㅈㄷㅇㅅ] 세상에 풀리지 않는 문제는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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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모래시계

ㅇㅇ종도 x ㅇ우석

[세상에 풀리지 않는 문제는]

02

(※ 이종도는 설정 상 양아치입니다. 캐릭터가 하는 빻은 대사는 저의 사상/생각이 아닙니다.)

  이종도를 따라 도착한 곳은 강우석이 좀처럼 갈 일이 없는 동네였다.

  그도 그럴 만 한 것이, 재개발이다 뭐다로 시끄러운 와중에 자릿세까지 올라 말 그대로 상권이 죽은 지구였다. 텅 빈 가게들만 줄지어 있는 바람에 낮에도 용역 깡패들이 버젓이 돌아다니는 곳이니, 우석이 갈 일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대낮에도 이 근처로 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우석이 다니는 학교 학생들도 이 쪽을 거쳐서 가기보다는 대부분 빙 돌아서 멀리 가는 것을 선택했다. 얼마 전에는 저 뒤쪽 골목에 대형 도박장이 들어섰다나 뭐라나. 그 소문에 확신을 주듯, 저녁이 되자 척 봐도 불량해 보이는 사람들이 골목 이곳저곳을 오고 가고 있었다. 허공에 맴도는 담배 연기가 허파를 아프도록 찔렀다. 우석은 속으로 기침소리를 애써 삼키며 잠자코 종도의 뒤를 따라걸었다.

"여긴 어디야?"

  이종도가 도착해서 문을 연 곳은 허름한 술집이었다. 혜린이와 가끔 갔던 그 주점과 다른 점이 거의 없어 보였지만, 담배 연기로 찌든 무거운 공기가 두 공간의 차이를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가게는 밖에서 보던 것보다도 사람이 더 없었다. 이미 있는 사람들도 벌써 몇 잔 씩은 걸친 듯 보였다. 익숙하게 한 쪽 테이블에 앉는 종도를 따라 우석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전교 일등 너 술 잘 먹냐? 아니, 저번에 보니까 못 먹는 거 같더라. 맞냐?"

"어... 못 마셔."

"그럼 넌 먹지 말고 나 먹는 거 구경이나 혀라. 안주 아무거나 시킬 거니까 알아서 집어먹고잉."

  큰소리로 주문을 하는 종도의 목소리를 뒤로 하며 우석은 다시 한번 가게를 둘러보았다. 가게 밖을 지나쳐가는 사람들은 많아도 좀처럼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우석은 라이터를 딸깍거리는 종도의 옆모습을 흘낏 바라보았다. 이종도는 어떻게 이 가게를 알게 된 걸까. 이 근처에 사는 걸까. 평소에는 여기에 누구랑 오곤 했을까, 어지간해서 들를 일이 없어 보이는 가게에 어쩌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오게 된 걸까.

"야, 일등."

"어... 어?"

"너 근데 담배는 왜 산 거냐? 아니 그러니까, 왜 그걸로 산 거여?"

  우석은 라이터를 쥔 종도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 테이블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냥... 다른 걸 살까 했는데, 음료수라던가. 근데 그건 네가 안 먹을 것 같았고, 뭐가 나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가게 주인 분께 여쭤봤어. 여기서 제일 비싼 담배 뭐냐고."

  푸하하하하! 갑작스럽게 들리는 웃음 소리에 우석이 종도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가 그리도 웃긴지 등받이가 없는 의자 위에서 거의 뒤로 넘어갈 것처럼 웃던 이종도가 다시 물었다.

"제일 잘 나가는 것도 아니고, 제일 비싼 담배? 아 존나 웃기네... 그래서 이거 얼마데? 아 달라니까 그걸 주냐 주인은 또? 전교 일등 너 돈은 있고?"

"아니... 담배 한 갑 살 돈은 있지 당연히... 근데 네가 안 필거라고 생각은 못 했네, 미안. 나중에 바꿔줄까?"

"바꾸긴 뭘 바꿔 새꺄. 전교 일등이 제일 비싼 담배 사다 드렸는데, 황송해서 이걸 필 수나 있을지 모르겄다."

"너 그거 안 핀다면서. 진짜 괜찮아?"

"아이고 이미 줬으면서 뭘 더 신경을 쓰냐, 신경 꺼라잉. 니가 담배피냐? 진짜 웃긴 새끼네. 제일 맛있는 거, 제일 잘나가는 것도 아니고 비싼 걸... 아 존나 어이없는 새끼."

"뭐가 그렇게 웃겨... 그리고 그냥... 제일 비싼 거면 대충 맛있겠지 했어. 담배 안 피워봐서 모르지만."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백김치와 깍두기, 단무지 몇 조각과 다 말라서 쪼그라든 오뎅 볶음과 함께 술 두 병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이종도가 미리 주문한 대로 술 잔은 하나 뿐이었다. 일등 너는 물이나 마셔라, 킬킬거리며 소주잔에 술을 따라 자작했다. 

  생각 할수록 웃긴 놈이다. 불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여기까지 순순히 따라 온 것도 그렇고.  비싸니까 맛있을 거다? 강우석이 사온 담배는 향이 독한 종류 중 하나였다. 담배라고는 평생 거리가 멀어 보이는 놈이 스스로 들어가서 달라고 했을 광경을 생각하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안 피는 거여도 음료수 따위보다 낫겠지. 또 다시 피식거리던 종도는 다시 한 잔을 비웠다.

"야... 그거 도수 높은 거 아니야? 천천히 마셔."

  안주로 나온 라면 가닥을 깨작거리던 강우석이 말했다. 내가 지같은 줄 아나. 이종도는 보란 듯 물컵에 술을 채워 마셨다. 경악하는 강우석의 표정이 컵 너머로 보인다. 그 표정을 마주하자 왜 인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아니, 기분이 좋은 건가. 그냥 술 기운인가. 속으로 계속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건 그냥 강우석이 웃겨서 그런거다. 기분이 좋다기보다는, 그냥 웃기니까. 

"...와. 너 술 잘 마시는구나."

"내가 잘 먹는 것도 있는데, 니가 못 먹는 거여. 너 저번에 뻗어있을 때 몇 병 먹고 그런 거냐?"

"...."

"왜 갑자기 말을 안 해."

"병은 무슨, 누가 술을 그렇게 까지 마셔."

"별... 그것도 안 먹으면 안 처먹은 거랑 뭐가 다른데요. 사내 새끼가 병 단위로는 마셔줘야지."

"아 진짜 뭐라는 거야... 하여튼 나는 저번에... 몇 잔이었지, 세 잔, 아니 네 잔이었나..."

"...?"

"...뭐, 왜..."

"네 잔? 네 병도 아니고 네 잔? 뭐 처먹었길래. 룸가서 보드카라도 먹었냐?"

"아니. 포장마차에서... 막걸리였어..."

  개미만한 강우석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종도가 또다시 포복절도를 했다. 이번에는 아예 상 위로 엎어져서 박장대소하는 이종도를 질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우석이 라면을 떠 자신의 대접에 옮겨 담았다. 어차피 이종도는 술만 마시느라 손도 안 댔으니까, 그리고 웃느라 그걸 보고 있지도 않았다.

"아... 막걸리를, 아 씨발... 하하하하! 막걸리 네 잔에 그렇ㄱ, 아하하하!"

  좀처럼 웃음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 이종도때문에 가게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죄 이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야아... 고만 좀 웃어. 슬슬 눈치를 보며 쿡쿡 찔러보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는 이종도때문에 우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 그래 웃어라... - 종도를 말리기를 포기한 우석이 다 붇기 시작한 라면 면발을 입에 넣으며 조그만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정확히 말해서 '잔'은 아니야. 알잖아. 막걸리는 그 대접같은, 어. 이만한 사발에다가 마시는거. 그러니까 실제로는,"

"니는 고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냐? 막걸리 먹고 꼴아가지고는? 기집애들도 그거보단 술 잘 마시겠다, 어유... 배 찢어지겄네..."

"너 예전부터 그놈의 기집애 소리 좀... 아휴... 됐다..."

  불어서 툭툭 끊어지는 면발을 숟가락으로 떠 먹으며 우석이 중얼거렸다. 자신이 술을 못 한다는 게 그렇게도 웃길까, 이게 도대체 뭐라고. 세상에 즐거운 일이 어지간히도 없나 보다 생각하며 우석은 여전히 큭큭거리는 종도를 흘겨보았다. 그래, 재밌으면 됐다.

"아 라면 혼자 다 먹었네 새끼... 이모, 여기 라면 하나 더 요."

"너 안 먹길래. 술만 먹는 줄 알았지."

"그럴 거면 내가 라면을 왜 시켰겄냐. 우리 미래의 판검사님 잡수십쇼잉, 하고 놨겄냐?"

"...라면 다 불을 때까지 손도 안 댔으면서."

  말로는 그렇게 투덜댔지만 막상 새로 나온 라면도 국물만 몇 번 떠먹을 뿐, 면발에는 손도 대지 않는 이종도였다. 깡술만 연달아 들이키면서 이종도는 계속해서 강우석에게 의미없는 이야기들을 던졌다. 어제 먹은 해장국, 아침에 따까리 하나가 사고 친 이야기, 골목 안쪽에 죽어서 버려져 있던 고양이 시체, 떨어진 신발 밑창 등. 

  그 이야기 속에 박태수는 없었다. 일부러 태수의 언급을 피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자 가게에는 사람이 조금 많아졌다. 물론 고작 몇 테이블 더 찬 정도였지만, 아까에 비교하면 민망할 정도로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동네의 분위기가 이래서 그런가 찾아오는 손님들은 대부분 이종도와 비슷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옷차림부터 시작해서 말투, 걸음걸이, 표정부터 앉는 자세나 서로를 부르는 호칭까지. 잘 모르는 우석이 보기에는 모두 비슷하게 보였다.

"야, 이종도. 오늘 웬일이냐? 일 있다며?"

"종도 형님, 오셨습니까!"

"형님, 괜찮으시다면 혹시 저희 쪽으로 합석 안 하실랍니까?"

"종도야, 이 친구는 누구냐?"

  비슷한 게 아니라 어떻게 다들 아는 사이인건지, 한 두 명 씩 와서 인사를 해대는 통에 우석은 금방이라도 체할 것만 같았다. 이 술집에서 처음 보는 우석이 궁금한지 간간히 건너편으로 시선을 주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살면서 친구가 많아본 적이 없는 우석에게 낯선 시선들을 견뎌내는 일은 상당한 고역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대답대신 간단히 손짓으로 돌려보내는 이종도에게 막혀, 이내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원래의 자리들로 돌아갔다. 그렇게 이종도가 네 번째로 사람을 돌려보냈을 때가 되어서야 우석은 긴장을 풀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왜 한숨을 쉬고 지랄이야."

"한숨 아니야."

  물을 따라 한 모금 마시던 우석이 이내 궁금하다는 듯 종도에게 물었다.

"근데 너 왜 저 사람들이랑 같이 안 마셔? 아는 사이 아니야? 너도 나보다는 저 분들이랑 같이 떠들고 술 많이 마시는게 더 재미있을 거 아니야."

  이종도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강우석은 딱히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대답이 금방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귀찮아서 답을 아예 안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러워."

"어?"

"저 새끼들 존나게 시끄러워서, 일은 같이 해도 술은 같이 못 처마신다고. 씨발 같이 놀다가는 아주 내 귀가 먼저 먹겄어요. 썅...."

"아... 뭐, 그럴 수 있지..."

"그리고... 아니다."

"응?"

"아니라고. 야, 야야! 라면, 라면 다 불어터졌네 씨발. 니 얼른 안 먹고 뭣허냐. 하여튼 곱게 자라서 음식 아까운 줄을 몰라요."

"...아까 혼자 먹는다고 뭐라고 한 게 누군데."

  우석의 신경을 라면 대접으로 돌려놓고선, 이종도는 속으로 방금 들었던 질문을 곱씹었다. 

  평소라면 당연히 용역 업체 친구들과 같이 마시면서 떠들었을 것이다. 물론 시끄러운 건 맞지만 이종도도 시끄럽긴 매한가지였고, 그 정도의 소음에는 진작 적응이 되어있다. 그런데 오늘은 유달리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른 날이면 어땠을지 몰라도. 이상한 일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술도 못 하고 말 주변도 없는, 술 상대로는 꽝인 전교 일등을 앞에 앉혀놓고 싶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혼자 자작하는 건 궁상맞다고 그렇게 싫어했었는데 상대가 강우석이니 대충 좋은 핑계이려니 싶다. 이종도는 벌써 바닥을 보이는 두 번째 병을 잔에 비웠다.

  술을 삼키며, 이종도는 아까 하려다 삼킨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저 새끼들은 못생겨서 술 먹을 맛 안 나.-

  그렇다고 강우석은 잘생겼나? 사실 그런 건 생각 해본 적이 없다. 애초에 기집애도 아니고 똑같이 좆달린 새끼한테 잘생겼네 못생겼네 하는 게 의미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 허구한 날 깡패질하면서 담배나 태우고 입에 걸레 물고 다니는 놈들보다야, 강우석이 더 낫겠지. 외관이든 행동거지든. 오늘 하루 정도는 이런 애랑 같이 있어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종도의 변덕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종도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 변덕이 조금은 오래 갈 것 같다고.

"야, 일등."

"강우석이야."

"아.. 강우석."

"왜."

"오늘 몇요일이야.. 목요일인가? 너 목요일 저녁에 시간 비냐?"

"어? 어... 이제 뭐 종강도 했고... 딱히 급한 일은..."

"그려? 잘 됐네. 다음 주 목요일 저녁 7시에, 지금 여기로 나와. 늦기만 해."

"어..? 왜?"

"어 는 무슨 어 야. 새끼가 얼빵해가지고는, 간다. 까먹지마라잉."

  혼자서 술 세 병을 비웠음에도 흔들리지 않고 인파 속으로 걸어가는 이종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우석은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옷에 밴 담배 냄새와 라면 냄새가 꿉꿉한 공기로 인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비가 올 것 같았다.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왜 인지 취한 기분이었다. 가게에서 몇 시간동안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벌써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까 어둡고 눅눅하던 동네와는 달리, 사람이 많은 번화가 한 가운데는 시원했다. 이종도와 걸었던 골목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강우석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상하게도, 이 공간에 자신이 영 어울리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석은 문득, 이종도도 자신과 같은 기분이 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여름의 서늘한 공기에서 습하고 눅눅한 술집 한 구석을 생각하게 되는 게, 어쩌면 이종도 뿐만이 아니게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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