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 Namu

01화. 봉고 세븐의 이산다

***


모년 모월 모일. 날씨, 맑음.


이상한 꿈을 꿨다.

사람들이 모두 바깥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마스크도 방호복도 없이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바이러스 Namu'가 존재하지 않는, 전혀 현실일 리 없는 세상이었다.

나는 이제 오늘이 몇 년 몇 월 며칠 어느 요일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살아남는 것만이 중요한 세계에선

일요일 저녁을 안타까워할 의미가 없고

월요병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

사람들은 이제 다시 방주로 향할 것이다.


"야, 이산다! 뭐해! 벌써 7시가 넘었어. 얼른 나와!"


서희가 텐트 밖에서 윽박을 질렀다. 일기를 쓰던 나는 그의 재촉에 느릿느릿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성질도 급하셔. 다 망해가는 세계에서 7시면 어떻고 8시면 또 어때? 부루퉁한 내 얼굴을 본 서희는 한차례 욕을 퍼부을 기세였다. 나는 선수를 쳤다.


"뭐 얼마나 늦었다고."

"저게 진짜!"

"서희야, 진정해. 산은 원래 아침잠이 많잖아."


가영의 말에도 서희는 내게 삿대질을 해댔다.


"너 때문에 늦어지면 책임질 거야? 다음부턴 좀 일찍 일어나. 알겠어?"

"알았어."


서희는 나를 한참 노려보더니 씩씩거리며 자신의 가족들에게로 향했다. 서희가 돌아간 뒤에 가영이 가까이 다가왔다. 가영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가방에서 물을 꺼내 건넸다.


"서희가 요즘 예민해. 아무래도 불안한가 봐."

"네가 변명할 필요 없어. 나도 그 정도는 이해해."


누구라도 불안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시작은 약 2년 전이었다.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한 청년이 괴병에 걸려 쓰러졌다. 그는 서울의 큰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사흘 만에 사망했다. 그리고 그와 접촉했던 사람들이 같은 증상을 보이며 사망했다. 기이한 것은 증상도 원인도 세상에 존재한 적 없던 병이란 사실이었다. 모든 학자들이 이 병을 연구했고, 마침내 한 학자가 바이러스를 발견하여 이름을 붙였다. Namu. 읽히는 그대로, 병의 증상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한국에서 발견된 바이러스였기 때문에 나무라고 명명하였다. 당시 학계에서는 바이러스 나무에 감염된 사람과 접촉한 사람의 경과를 세 가지로 분류했다.

1. 손 끝 발 끝에서부터 서서히 모든 세포가 나무와 유사하게 변질되어 사망하는 유형

2. 세포가 나무처럼 변질되지 않는 대신 바이러스의 숙주가 되어 점점 성격이 포악해지며 이성을 잃는 유형

― 심지어는 사람을 물어뜯는다. 소설이나 영화 같은 데에 나오는 좀비와 유사하다. 감염자의 타액은 백 퍼센트 확률로 다른 사람을 감염시킨다.

3. 바이러스에 면역 체계를 가진 '면역자' 유형

나는 처음 바이러스에 걸린 남자와는 이웃지간이었다. 그리고 감염자와 확실히 접촉하고도 살아남은 것으로 확인된 전세계에서 유일한 ‘면역자’였다.

처음엔 연구원들이 감염자들의 혈액을 통해 어떻게든 백신이나 치료제를 만들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나무’는 접종도 치료도 불가능했다. 감염자의 혈액으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연구원들은 내 혈액을 요구했다. 일주일에 한 번, 주사기 한 대 분량을 뽑아가면서 숙식과 금전적 보상, 적절한 문화적 생활을 영유하게 도와주었으므로 나는 그러겠노라 답했다.

그러나 내게서 뽑아간 혈액 내에 있는 어떠한 성분도 특별하다 할만한 건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나무’가 면역이 되는지는 밝혀지지 못했다. 연구원들은 외부에서 들어온 바이러스에 의해 사망하거나 2 유형이 되어 스스로 감금, 격리되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각국의 정부는 바이러스 감염자와 접촉자들을 모두 한 곳에 모아 격리시켜보려고도 했으나, 그 때는 이미 바이러스가 각지에 퍼지고 난 후였다.

정부가 바이러스 창궐을 명명한 지 1개월 후,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은 ‘나무’는 인간 외의 동식물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신이 인간에게 재앙을 내린 것이라고도 했다. 나는 이 소리를 욕실 하나, 창살이 달린 베란다가 하나 있는 방 안에서 들었다. 문 밖에는 보안 요원이 교대로 24시간을 지키고 서 있었다. 새로 온 연구진은 전처럼 신사적이거나 친절하지 않았다.

바이러스 창궐 2개월 후, 전세계 인구의 5퍼센트가 ‘나무’에 감염되었으며, 그들의 절반 이상은 1 유형으로 사망하고 나머지는 2 유형이 되어 이성을 잃었다. 나는 방에 감금되었다. 전에는 그래도 건물 안을 돌아다닐 수는 있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못했다. 방 안을 드나드는 건 주기적으로 내 건강을 체크하는 의료진 둘과 방을 청소해주는 인부 하나였다. 피를 뽑는 날의 간격은 점점 줄었고, 뽑아가는 양은 점점 늘었다. 나는 방 밖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감염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3개월 째에 감염자가 20퍼센트에 달했고, 이로 인해 법 체계가 서서히 붕괴되었다. 내 손과 발에는 중세 노예들이나 찼을 법한 쇠고랑이 채워졌다. 나는 면역자라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음에도 그러했다.

바이러스 창궐 5개월째에 감염자는 40퍼센트. 어떤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다 집안에서 굶어 죽었고,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밖으로 나와 그룹을 만들었다. 마스크와 방호복은 생활필수품이 되었고, 손에는 평생 쥐어볼 일 없던 무기가 들렸다. 과연 이것들이 ‘나무’를 막는 데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때까지도 연구에는 성과가 없었다. 연구원들은 내게 화풀이를 했다. 욕설은 기본이고 심하면 때리기도 했다.

바이러스 창궐 6개월째 되는 날, 감염자는 50퍼센트. 국경선이 하나둘 무너졌다. 각 나라의 군대와 수뇌부가 무의미해진 건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그리고 연구실은 폭파되었다. 가영의 짓이었다. 화염 속에서 나를 데리고 도망친 건 다름 아닌 서희다. 의외로 이 계획을 세운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는 다정하지는 않았으나 연구원들 중에서 유일하게 나를 사람으로 대하던 이였다. 그는 신물이 난다는 얼굴로 짜증스럽게 말했다.


“엿 같은 놈들. 안 되는 걸 알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시발, 맨날 팬다니까? 쟤를 좀 봐. 때릴 구석이 어디 있나.”


가영은 서희와는 다르게 상냥한 성격이었다. 그러면서도 소름끼치도록 대담한 면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연구실을 폭파한 폭탄은 그의 작품이었다. 그는 공대의 무슨무슨 학과에서 4년 내내 수석이었고, 박사 과정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나는 이공계열은 물론 대학과도 거리가 먼 사람이라 대충 알아들은 척했다.

가영이 말하기를, 서희는 내 얘기를 꽤 많이 했다고 했다. 연구실을 폭파하기로 한 것도 나 때문이라고 했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려주지 않았다. 가영은 다정하게도 내가 충격을 받을까 봐 걱정스러워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연구진들이 내 몸을 실험하기로 했었다. 혈액만으로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으니 아예 나를 바이러스 Namu의 실험체로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전 세계에 유일한 면역자의 신체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겠는가. 생명공학 방면에 무식한 나로서도 상상할 수 있는 실험이, 음……. 대체 뭘 할 수가 있지?


“없지?”

“없네…….”

“역시 이런 시대에 문과는 안 돼.”


서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는 않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아무튼 연구진들이 그때 즈음 어딘가 수상쩍게 굴기는 했다.

그러니까 서희는 단순히 내가 연구진들에게 폭행을 당한다는 것만으로 나를 데리고 나온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날 연구실을 폭파한 건 일이 터지기 전에 탈출을 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우리가 연구실에서 나온 후에 라디오에서는 여러 가지 언어로 매일 같은 방송이 흘러나왔다.


바이러스 'Namu'가 창궐하였습니다―. 살아남은 분들은 모두 '방주'로 모여주십시오.


라디오에서 말한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의 사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자신이 바이러스 연구실의 생존자이며, 방호 체계를 갖춘 건물의 주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건물 안에 거대한 식량창고가 있으며, 건물 앞에 강이 있어 식수 공급이 용이하니 자신에게 오면 안전한 보금자리를 제공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의심스러운 말이었지만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모였다. 서희의 부모님과 언니, 서희의 연인이었던 가영, 가영의 동생인 지영, 그리고 유일한 면역자인 나, 이렇게 일곱이었다. 그렇게 방주로 가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1화. 봉고 세븐의 이산다


내 이름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제대로 들었는지 되묻고는 했다. ‘산다’라니, 살고자 하는 의지가 아주 강해보이는 이름이라고들 했다. 그런 사람들의 기대를 깨서 아쉽지만, 내 이름은 한자로 뫼 산山에 차 다茶를 쓴다. 동백의 다른 이름이 산다라고 했다. 차라리 그냥 동백이라고 짓지. 마주치는 사람마다 이름의 뜻을 설명해야 하는 건 꽤 귀찮은 일이었다.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느냐면, 오늘도 ‘사람 나무’를 보았기 때문이다. 1 유형에 걸린 사람이었다. 연구소에 있던 사람들은 1 유형으로 죽은 사람들을 사람 나무라고 했다. 만약 그들이 나무로 변하더라도 의식이 있고 움직일 수 있다면 나무 인간 정도로 불렀겠지만,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 나무라고 불렀다.

특이한 건 사람마다 변하는 나무의 종류가 다르다는 점이었다. 어떤 사람은 매화, 어떤 사람은 목련, 어떤 사람은 잣나무, 어떤 사람은 참나무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 가장 흔한 건 소나무였다. 오늘 본 나무는 벌써 가지에 붉은 꽃망울을 피운 동백나무였다.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파란색의 네일 팁만 아니었더라면 진짜 나무인 줄 알았을 정도로 완벽하게 나무화가 되어있었다. ‘나무’가 퍼진 게 벌써 2년이나 되었으니 초기에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의 신체는 제법 그럴싸한 나무가 되었다. 지영은 동백이 된 사람 나무를 보며, 자기도 나무가 되면 예쁜 꽃을 피우는 나무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였다가 가영에게 한 시간 동안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렇게 말을 하니 사람이 나무가 된다는 말은 낭만적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모르면 몰랐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나무의 생김새에 감탄을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 사람 나무를 보았을 때는 너무 징그러워서 구역질이 났다. 그 형태가 기괴하거나 흉측해서 그렇게 느꼈다기보다는 이 세상에 저런 형태의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서 오는 역함이었다. 어쩐지 신화를 그려놓은 만화 같은 데에서 저런 걸 본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완전히 나무가 된 사람은 그나마 나았다. 나무화가 진행 중인 사람은 더욱 끔찍했다. 부드러운 살갗과 거칠거칠한 나무껍질이 공존하는 피부를 지닌 사람과 눈이 마주친 날은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하기야, 당사자가 더 끔찍한 기분일 것이다.

아직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던 시기에 나무 1 유형에 걸린 한 유튜버는 바이러스에 걸린 후 죽기 직전까지의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연구소에 갇혀 있으면서 나도 그 영상을 보았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내부에서부터 나무가 차오르는 느낌이라고 했다. 대체 그게 무슨 느낌이야. 그렇게 설명하면 누가 알아듣겠어.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설명도 알아듣긴 하였는지 그가 올린 영상의 좋아요 수가 이 주만에 일억을 넘겼다. 연구원들의 폭언과 폭행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그나마 그 영상 덕분이었다. 저런 바이러스에 걸려 몸이 손 쓸 수 없이 변해가는 걸 느끼는 것보다는 차라리 병에 절대 걸리지 않는 면역자라는 사실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연구소에서 탈출한 날, 나는 ‘봉고 세븐(Bongo seven)’에 합류했다. ‘봉고 세븐’은 지영이 붙인 우리 일곱 사람의 팀 이름이다. 내가 들어오기 전에는 ‘봉고 식스(six)’였다. 타고다니는 차가 봉고차에 인원수가 여섯이라 ‘봉고 식스’였다나. 물론 ‘봉고 세븐’은 유닛으로 갈라져 나온 ‘봉고 투(two)’ 멤버인 지영과 나 둘만 부르는 이름이고, 나머지 ‘봉고 파이브(five)’는 그렇게 부르는 걸 딱히 좋아하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 파워레인저 같은 걸 좋아하던 나는 나쁘지 않은 작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서희는 아니었는지 질색을 했다. 나는 그래도 열세 살인데 그 정도면 괜찮은 센스였다고 칭찬을 했다가 놀린다고 오해한 지영이 삐치는 바람에 반나절 동안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사과를 해야 했다. 다행히 이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봉고 투’ 유닛은 유지되고 있었다. 이름도 아직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근데 진짜 괜찮지 않아? 나는 좋은데, 봉고 세븐.”


툭 뱉는 내 말에 가영은 말 없이 웃어주었다. 그 정도로 별로인가?

‘봉고 세븐’이라는 이름의 모티브가 된 봉고차는 가영의 소유였다. 두부 같은 흰색에 무려 열두 명이나 탈 수 있는 세련된 봉고차다. 봉고차라는 이름 말고 달리 뭐라고 부르는 이름이 있다고 했는데 금방 잊어버렸다. 나는 자동차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서희네 아버지 말을 들어보면 비싼 차라는 모양이다. 바이러스가 퍼질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이 차는 태양열과 태양광을 연료로 쓴다고 했다. 12인승이지만 사람이 일곱이었기에 맨 뒷자리가 남아서 그 의자는 짐칸으로 쓰고 있었다. 그곳엔 생수와 필터를 갈아 끼워서 사용하는 휴대용 정수기, 전투식량 여러 박스, 통조림 한 박스, 차 안에서 덮을 수 있는 얇은 담요와 옷가지가 있었다. 원래 짐칸이었던 곳엔 휴대용 발전기, 원터치 텐트 두 개와 침낭 여섯 개, 캠핑용 냄비와 식기 세트, 그 외에 잡다한 기구들이 들어있었다. 전부 가영이 준비한 물건들이다. 언젠가 가영에게, 동생인 지영이와 둘이서만 살고 있는데 어떻게 열두명이나 탈 수 있는 봉고차를 살 생각을 했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멋있잖아. 봉고차. 그리고 언젠가 서희랑 결혼하면 서희네 가족이랑 같이 캠핑도 가고 싶었거든. 근데 이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


가영은 시원하게 웃었다. 이공계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철저함 속에 엉뚱한 낭만을 숨기고 사는 사람들일까? 자기 딸과 결혼을 하겠다는 말을 하는 짧은 머리의 여자를 보며 서희네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그 말을 못 들은 척 하려는 눈치였지만, 2년이 지난 지금은 체념한 듯했다.


“내릴 거니까 방호복 입고 마스크 써.”

“나도?”

“그러고 나갔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냐.”


서희는 항상 짜증을 내기는 하지만 틀린 말은 한 적이 없으므로, 나는 군말없이 마스크를 썼다. 봉고차가 멈춘 곳은 마트가 딸린 주유소였다. 간판에는 나는 알아볼 수 없는 중국어가 쓰여있었다. 어렸을 때 한자를 배운 서희의 어머니만 시뻘겋게 칠해놓은 간판 글씨를 띄엄띄엄 읽어서―간판은 간체자였다― 대충 무슨무슨 가게라고 쓰여있겠거니 짐작만 할 뿐이었다.

일 년 전, 38선을 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국경을 넘을 거라고는 예상조차 못했다. 이미 북한 주민들이 남한으로 넘어왔다더라 하는 소리는 들었지만 와닿지가 않았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하며 38선 코앞에 도착하고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 세계 인류에게 닥친 재난 상황이라 그런지, 38선 근처에서도 지키는 군사가 없었다. 하기야, 대단하신 분들이라고 바이러스가 피해 가는 것도 아닌데 뾰족한 수가 있었겠는가. 군인들이 도망을 간다고 해도 사람이 나무가 되는 판국이라 막을 수가 없으니 내버려 두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을 터다. 그 누구의 경고도 제재도 없이 국경을 넘는 일은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긴장이 되거나 두려운 마음이 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덤덤했다. 사람이 없으니 그냥 어디 유원지에나 놀러 온 기분이었다.

우리는 내친김에 개성에 있는 한옥 마을과 복원된 고려시대 궁궐인 만월대를 실컷 구경했다. 통일도 되지 않았는데 번호판에 대전이라고 적힌 봉고차를 타고 개성에 관광을 다니는 날이 오다니. 돌이켜보면 미쳤었나 싶은 마음이 들지만, 나는 무슨 귀신에라도 씌인 사람같이 한옥 마을에를 가자고 했고, 또 이상하게도 다들 동의했다. 그때의 나는, 꼭 개성에 있는 한옥 마을에 가야만 했던 건 아닐 것이다. ‘나무’가 퍼지기 전에도 전주 한옥마을은 가본 적도 없었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냥 문득, 정말 문득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가자고 했다. 너 때문에 늦으면 책임 질 거냐는 말이 입버릇인 서희가 그때만큼은 반대하지 않았다. 아마 연구소에서도 원하는 걸 요구한 적 한번 없던 내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한옥마을에서 제일 높아 보이는 누각에 올라 노을을 감상했다. 북한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전부 나무가 되어가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공기가 깨끗해서 빨간 태양이 참 예뻤다.


“준비 다 했으면 나가자.”


지영과 서희의 언니인 정희는 망을 보고, 서희의 부모님은 차에서 대기, 나와 가영, 서희는 마트를 털어오기로 했다. 지금까지 마트에 무언가 남아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 한적한 지역에는 라면이나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통조림 따위가 남아있기도 했다.

손에는 각자 둔기를 하나씩 들었다. 둔기라고 해도 특별한 건 없었다. 길을 가다가 발견한 공사장에서 주운 튼튼한 철제 파이프다. 제법 큰 공사장의 부지 규모에 비해 남은 파이프 수는 조금 적어보였다. 사람들의 생각은 거기서 거기구나하고 생각하며, 우리도 사람 수에 맞춰 파이프를 챙겼다. 정희는 그 파이프를 방호복과 마스크를 쓴 채 소독제를 뿌려 박박 닦았다. 의미가 없다는 건 알지만 그렇게 하면 마음이 좀 편해질 것 같다고 하길래 나도 옆에서 거들었다. 겉에 묻은 흙먼지를 닦아낸 철제 파이프는 근사한 둔기가 되었다. 나는 이러고 있으니 꼭 게임이라도 하는 것 같다고 나름대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농담을 해보았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인구의 50퍼센트 이상이 감염자인 세상이지만, 이 무기는 감염자보다는 굶주린 인간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나는 내 손아귀에 들기에는 조금 두꺼운 쇠파이프를 두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둔기를 휘두를 자신은 없긴 하지만 서희는 그래도 쥐고 있으라고 했다.

마트 안은 텅 비어보였다. 주유소에 딸린 마트 치고는 내부가 제법 넓어서 우리는 구역을 나누어  진열대를 살펴보기로 했다. 중국어를 몰라서 진열대 위에 쓰여있는 말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나는 생필품과 위생용품이 있던 구역을 맡았다. 다른 데는 텅 비어있고, 성인용 팬티형 기저귀와 생리대는 몇 팩 남아있었다.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지. 나는 블록 쌓기를 하듯 차곡차곡 쌓아 들었다.

가영이 맡았던 과자와 음료 코너는 예상대로 수확이 없었고, 식재료와 향신료를 맡았던 서희는 들고온 걸 보여주었다. 흰 가루가 담긴 비닐 포장지 겉에는 白糖이라고 적혀있었다. 아마 설탕인 듯했는데 유통기한이 1년 전까지였다.


“괜찮겠지?”

“괜찮아. 포장 안 뜯었잖아.”


걱정스럽게 묻는 내 말에 서희는 문과스럽게 답했다.

성인용 기저귀와 생리대, 설탕 한 봉지를 얻고 조금 기분이 좋아져 깔깔 웃으며 나오던 우리는 빨리 뛰라는 굵직한 고함 소리를 들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지영이었다. 봉고차는 이미 문을 연 채로 출발하고 있었고, 달리기가 느린 나는 무슨 일인지 파악할 틈도 없이 가영의 어깨에 걸쳐졌다. 뒤에서 무언가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서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생리대를 그 누군가의 얼굴에 냅다 집어던졌다. 짐짝처럼 자리에 내동댕이쳐지고 정신이 없는 와중에 닫히는 봉고차 문 사이로 보인 건 갈색 가지가 다시 사람의 손으로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바이러스 창궐 1년 반 되는 오늘, 변이된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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