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엘 연성

우리의 어버이는

■■과도 같아서

w. 달이슬

주신이라는 존재는 그 어떠한 생명보다 가장 먼저 태어난, 태초부터 존재한 그러한 존재였다. 그는 알려진 사실이 지극히 없는 편에 가까웠다. 그의 첫 아이인 존재는 누군가의 질문에 그렇게 답했다.

‘그분에게 정해져 있는 건 없어. 당신이 상상한 그 모습이 바로 주신의 모습이야.’

주신에게 정해져 있는 건 그 무엇도 없다는 발언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신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정말이지 드물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다양한 주신의 모습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그는 정말로 존재하는 생명체일까.

그의 첫 창조물인 물은 그러한 사실에 의구심을 품었다.

자신에게 첫 숨을 불어넣어준 존재는, 그 어떤 모습도 자신에게 비추지 않아서. 물은 자신을 빚어내고, 자신에게 힘을 주고, 숨결을 불어넣어 자신을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준 어버이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품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또 누구인가.

그가 만든 창조물은 오랜 시간 자신 하나 뿐이어서, 물은 자신이 가장 편안한 곳에 한참을 틀어박힌채 시간에 대한 개념과 인지가 흐릿해질때까지 계속해서 생각했다. 처음 눈을 뜨고 온갖 정보가 물밀듯 들어왔다. 나는 순수하고 세상을 이루는 모든 물의 정수이자 근원. 가장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는 순수함과 본질의 정점.

자신에게 절반 허락된 권능으로 자신의 휘하에 속하는 영들을 창조했다. 필요에 의해서였을까? 물은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해 답을 내리지 못했다. 창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기에 입을 열어 권능을 내뱉었다. 뒤늦게야 그것을 언령이라고 칭한다는 것을 알았다.

가장 수다스러운 아이들을 창조했다. 그들의 하반신은 물고기의 꼬리를 하고 있었다. 가장 수가 많고, 모든 물에 존재하며, 자신의 눈이 되어줄 아이들이었다.

수줍음이 많지만 아름답고 다정한 아이들을 창조했다. 그들은 자신에 비해 한참 어린 아이의 외양을 하고 있었다. 금방 부끄러워하고 수줍어 하지만, 각자의 일에는 열심이었다.

충직하고 강단있는 아이들을 창조했다. 그들은 거대한 동물의 형상을 지녔지만, 자신과 같은 외양으로도 변할 수 있었다. 그들은 충직하고 강한 아이들이었다.

물은 자신의 영역에 북적거리는 휘하 영들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나 또한 처음 창조될때 이런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였을까. 내 어버이는 나를 어떻게 만들어냈을까.

아마도, 아주 오랜 기간 공을 들여 만들었겠지. 강한 힘을 모두 담아낼 육체를, 권능과 전지함을 불어넣고. 아름다운 육신을 빚어내고. 그리고 모든 것을 완성한 후에는 숨을 불어 넣어 자신이 살아 움직이게 했겠지. 자신이 이러한 생각과 타고난 성향을 지닌 것도, 전부 다 그의 안배 하에 이루어진 일들일까? 아니면, 그저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수없이 많은 시간이 흐르고, 물은 다른 존재들을 만났다.

생명이 뿌리내릴 땅은 조용했고, 대기에 숨을 불어넣는 바람은 자리를 비우는 일이 더 잦았으며, 모든것을 사를듯 화려히 타오르는 불은 시끄러웠다. 나의 어버이는, 오로지 나만의 어버이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물은 이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신은 어떤 존재냐고 물어보는 존재들이 있었다.

주신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던 것은 신계의 틀을 다진 네명의 최고신 뿐이었다. 하지만 단 한명을 제외한 다른 신들은 주신을 만난 일에 대해서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기억이 도려내진 것 처럼. 그저 만났다는 사실은 인지하지만, 그 정확한 사실은 기억해내지 못했다.

모든 만물의 어버이는 결국 자신이 처음으로 품어낸 생명에게 유달리 약해서.

‘당신은 그분을 만난 것을 기억한다고 들었습니다.’

‘응? 어떨까?’

‘카노스, 장난하지 말고 말해줘. 그분은 어떤 모습이셨어?’

‘이오웬의 말이 옳아. 우리도 알 권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너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그분의 뜻이지 않을까? 이렇게 나만 기억하는 걸 보면 말이야.’

검은빛을 휘감은 마신은 자신이 물일 적 지어보이지 않았던 미소를 얼굴에 띄워냈다.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눈매를 휘어서. 더없이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한 미소를. 그 미소가 어디까지나 타인을 배려하기 위한 위장색임을 잘 알고 있는 최고신들은 결국 그의 웃음에 져서는, 알겠다며 물러나고는 했다.

그래, 그들의 말대로 마신은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정해지지 않았던, 그 기나길고 끝없는 수명에 지쳐 스스로 이제는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에 정령왕의 자리에서 물러났을때. 그 날 마주했던 그를.

물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까무룩하게, 하염없이. 더 가라앉을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만큼 가라앉는 기분에서, 순식간에 건져져 올려졌다. 순식간에 뭍으로 건져진 상태에서, 흐릿한 시야 속에서 그를 만났다.

주신은, 얼기설기 엮인 사념체, 혹은 개념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것에

생명은 없었다.

그저 어렴풋이 주신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 아래에서 파생된 상상과 개념, 단어들이 엮이고 엉켜서 만들어진.

그저 개념에 불과한.

카노스는 알고 있었다. 사실 다른 최고신들 또한,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주신을 만났다는 것을. 그렇지만 결국 우리가 마주한 주신의 껍데기는 달랐음에.

그 날.

모든 생명의 첫 숨이자, 태초이며, 근원이자 어버이를 만난 날.

나는 나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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