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 검정, 초록, 그리고 다시...
체리님자꾸저한테어려운거만주실래요?
w. 달이슬
소년은 바닥에서 일어나 엉망이 된 옷을 정돈했다. 먼지가 들러붙고, 흙이 묻고, 피가 엉겨붙어 온통 엉망이었다. 돌에 찢겨 너덜거리기도 하는 옷을 가만히 본 소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미 각오한 일이었지만, 생애가 지나면 지날수록 가중되는 원념과 자신을 향하는 상대의 이유 모를 증오에는 익숙해지려 해도 어딘지 모르게 어려웠다.
소년은 하도 얻어맞아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끌어 움직이려다 그만두고는 벽에 기댔다. 지쳤다. 이대로 계속해서 반복되는 저주 속에서 살다보면 결국 신들에게서도 잊혀지고, 나 자신마저 내가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통받는지도 잊게 되겠지. 그리하여 결국 이 굴레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난다면 그제야 그 무엇도 없고, 나 자신조차 존재하지 않는 무로 돌아가 쉴 수 있으리라.
아프지 않겠지.
그때 나는 그런 것 조차 느낄 수 없을테니.
소년은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가볍게 움켜쥐었다가 이내 힘을 풀었다. 차라리 처음으로 다시 얻었던, 그 생에서처럼 힘이라도 있다면 좋을텐데. 아니, 어차피 그런 힘이 있어도 결국 피해만 더 끼칠 뿐이니 없는게 나으려나. 인간으로 태어나 가장 진창에서 구르게 되버린 생애에 소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처음으로 가진 생은 더없이 차갑고 길고 외롭고 홀로였던 생. 두번째 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루하고 제대로 된 재미라고는 없던. 그럼에도 책임을 져서 그 길고 고독한 생에서 내려왔다. 그 이후로는 정말 그 두 생과는 다를 정도로 파란만장한 생들만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리고…
푸른색의 소년과, 백금색의 그를 만났다.
연두색 머리에 금빛 눈을 가지고 지냈을때는 그래, 그 둘과 함께 다녔다. 그들은 자신의 저주를 알면서도 흔쾌히 돕겠다 나섰다. 한 명은 자신을 친우라고 칭하며 돌아와주기를 말했다. 그래서, 그 둘과 함께 주신의 의식에 닿기 위한 열쇠의 위치를 알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그럼에도 결국
마음을 준 것은 변질된다.
시간이 지나면, 그 마음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그들을 떠나버렸다.
상처받고 싶지 않았고, 상처를 주기 싫었다.
결국 잊혀져서 생이 끝나고, 다시 돌아온 생애에 돌고 돌아 다시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시간이 흐르고, 흐르고.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육체는 바뀔진대 속은 그대로, 계속해서 모든 것을 기억하고. 기억하며, 잊지 못하고, 그 모든것을 지켜보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소년은 물의 왕을 만났다.
여행을 하던 중이었을까? 그는 간편한 여행복을 걸치고, 후드를 눌러쓴 채였다. 라피스 라줄리가 박힌 서클렛이 그가 자신이 기억하던 그 물의 왕임을 증명했다. 표정이야 많이 달라졌지만. 처음 만났을때는 날카로운 얼굴상에 비해 늘 순하게 내려간, 웃는 얼굴이라서 그랬을까. 소년은 자신을 향해 적의를 내비치며 자신을 경계하는 물의 왕을 보고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엘뤼엔의 아들, 많이 성장했네.
아. 그러고보니 이제 그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소년은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물의 왕이 오히려 더 적대심을 내비치는 것을 보며 불현듯 깨달아버렸다. 그래, 이젠 그 누구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이것 마저 저주. 그리고 자신이 받아들이기로 감내했던 업보. 그렇지만 막상 이렇게 마주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더러운 것을 잔뜩 묻혀놓고 어떻게 나를 아는거지?
더러운 것이라고 했다. 처음 재회했을때는 그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홀린듯 자신을 바라보며 강아지 같은 모습만 보여주더니. 역시 시간이 흐르며 그 역시 많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게 평범한 반응이겠지. 예상했다고 해서 아프지 않느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미묘하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런 생애도, 괜찮지. 지루하던 삶에 비하면 충분히…
전혀 괜찮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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