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다시, 봄

세상에는 종종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가기 싫어도 한 번은 가야 하는 길이 있다. 말하자면 지금 비누의 앞에 놓인 길이 그랬다. 이제까지 줄곧 미루고 버텨 왔으나 이제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를 치른 지도 두 달이 지났다. 다른 사람들도,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아니,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면 있는 힘을 다 끌어 모아서라도 끝을 내야 하지 않을까.

그 길은 멀었다. 익히 잘 아는 길이건만 고작 두 달 발걸음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 그렇게 느껴졌다. 그냥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일지 모른다. 비누는 그 자신이 천천히 걷기 세계 선수권대회에 출전한 사람 같다고 느꼈다. 한 걸음, 반 걸음, 반의반 걸음, 그리고 정지. 가기 싫다. 그는 제 앞에 놓인 길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리 높을 것도 가파를 것도 없는 야트막한 언덕 위로 아파트 정문이 보였다. 그 집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그냥 눈 딱 감고 달리면 채 1분도 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건 좀 과장이 들어간 생각이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등을 떠밀리는 것 같았다. 비누는 다시 내키지 않는 걸음을 떼었다. 반의반 걸음, 반 걸음, 이제 한 걸음, 그리고 두 걸음 - 걷다 보면 그냥저냥 걸을 만 했다.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저 눈을 감고 걷다 보면 제 목적지가 눈앞에 당도할 것처럼. 오랫동안 습관을 들인 대로 제 몸이 알아서 나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거리는 낯익은 듯 낯설고, 모르는 가게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저 집도 바뀌었구나. 저기도. 저쪽도 공사 중이네. 그는 그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일인 양 양쪽으로 늘어선 건물들을 살폈다.

물론 그 일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비누는 이내 아파트 정문을 통과했다. 빗자루를 들고 길을 지나치던 경비원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비누는 황급히 고개를 푹 숙이며 들릴락 말락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맞받았다. 약간 낯익은 얼굴이었다. 제발, 이대로 그냥 지나가 주세요. 경비원은 오랜만에 오셨네요, 하고 기어이 한 마디를 더 보탰다. 비누는 그 말에 제가 뭐라고 답했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네’ 한 것 같기도 하고 ‘아’ 한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아니요’ 였던가? 그는 쫓기는 사람처럼 걸음을 재촉했다. 조금 전까지 가기 싫어 그토록 걸음을 늦추던 그 길이 갑자기 달가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경비원은 삽시간에 뒤편으로 멀어졌다. 그가 아, 하고 뒤늦게 짧은 감탄사를 발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아니다. 모른다. 그런 소리가 났다 한들 나는 못 들었다. 그는 성급하게 마구 발걸음을 내딛다가 한 번 삐끗하고는 신경질적으로 걸음걸이를 정돈했다. 괜스레 숨이 차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공동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도난 방지를 위해 전자키로 열리는 자동 잠금장치를 설치한 것이 몇 해 전이었으나, 다들 환기가 안 되어 곰팡이가 스는 것보다는 문을 열어두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잠금장치 자체가 그저 오래된 아파트가 그나마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한 일종의 쇼였거나. 뭐,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거기 서서 비밀번호를 입력할 정신적 여유가 없었기에 비누는 그 사실에 안도하고 절망했다. 문이 잠겨 있었더라면 그는 그 핑계로 돌아섰을 테니까. 그는 어두운 현관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엘리베이터는 1층에 서 있었다. 그는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고 문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 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층을 선택했다. 그래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는 층을 틀리지 않았다.

문 열리는 소리, 이어 닫히는 소리. 비누는 서로 마주보는 두 집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제 왼쪽으로 돌아서 문을 열기만 하면 되었다. 열쇠조차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현관문 자물쇠를 다이얼식 도어락으로 바꾼 지도 벌써 5년은 되었으니까. 새삼스레 번호를 잊을 일도 없었다. 비누는 느릿느릿 고개를 돌려 도어락을 바라보았다. 도어락 위에 먼지가 뿌옇게 쌓인 것이 보였다. 거기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야, 도어락 번호를 누를 때 그 윗부분을 손으로 문지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지간히 깔끔하게 청소하는 사람이라 해도 매번 자기 집 현관 바깥까지 나와서 도어락 윗부분까지 닦지는 않을 터였다 -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비누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다시 누를 생각조차 하지 못 한 채 눈앞에 보이는 계단으로 그저 내달았다. 세 번 정도 발이 꼬였는데도 계단참 아래로 굴러 떨어지지 않은 것이 용했다. 제 발소리는 계단 내려가는 소리라기보다는 정말이지 굴러 떨어지는 소리 같았을 텐데도. 이웃들이 집에 있었더라면 시끄럽다고 짜증을 냈으리란 생각이 얼핏 떠올랐다 이내 가뭇없이 사라졌다. 비누는 어느 샌가 1층 현관에 다시 서 있었다. 그가 허리를 앞으로 구부리자 센서 붙은 공동 현관문이 혼자 열렸다 닫혔다. 열렸다 닫히고, 다시 열렸다 닫히고. 비누는 그 소리를 배경 삼아 숨을 헐떡였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처럼 목 안쪽이 꽉 막히는데도 이상하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사람처럼 깔딱이는 제 숨소리만 귓전에 그저 시끄러웠다.

 

 

그새 봄이었다. 장례는 겨울이었는데도. 고작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비누는 햇빛에 찬란하게 반짝이는 잔물결을 바라보았다. 작은 하천을 끼고 어디까지고 죽 뻗은 길과, 그 옆에 줄줄이 늘어선 벚나무도. 바람이 불면 벚꽃 잎들이 화려하게 흩날렸다. 풍경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고작 아파트 뒤편 산책로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그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죄스러울 만큼. 비누는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목적지에서 한 발 멀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제 책임과 의무감에서 도망치는 짓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그런데도.

“저기요, 잠깐만요.”

비누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의도적으로 머리를 비우려고 애썼다. 그래서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도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두 번 세 번 그를 따라왔다. 마침내 비누는 걸음을 조금 늦추었다. 그럴 리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길을 묻나? 도를 아십니까? 옷에 뭐가 붙었어요? 그의 머리는 맹렬하게 회전하며 온갖 가능성을 띄워 올렸다. 등 뒤에는 그냥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그냥 길 가던 직장인처럼 보였다.

“...저요?”

“아, 네.”

“네.”

그 사람은 비누의 답변에 당황하는 것 같았다. ‘말씀하세요’라고 한 마디쯤 덧붙였어야 했나?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비누는 그게 그냥 귀찮았다. 용건이 있어서 불렀을 거고, 들어는 주겠다는 뜻으로 네, 했으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반 박자 늦게 불쑥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퍽 오래된 휴대전화 같았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다들 저런 것들을 썼다지만, 이제 와서는 본 지 10년은 되었을 듯한 물건 말이다. 뭘 어째달라는 거지? 비누는 약간 몸을 뒤로 물렸다. 상대는 멋쩍게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

“...이걸로요?”

“네.”

비누는 영 떨떠름한 기분으로 그 전화를 받아들었다. 폴더폰...이지? 그는 어색하게 그것을 열었다. 켜져 있긴 한 것 같았다. 이거 카메라 어떻게 쓰더라? 그가 흐릿한 옛 기억을 더듬어 전화를 조작하는 동안 상대는 재촉 한 마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여기 중간에 이거 누르면 돼요? 비누가 묻자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찍을게요? 비누는 성의 없이 덧붙였다. 상대는 약간 당황하더니 손사래를 쳤다. 비누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진, 찍어 달라셨잖아요?”

“아, 제 사진이 아니고요. 저쪽으로... 벚꽃 사진을 부탁드리려고요.”

비누는 별 생각 없이 상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그 직후에는 벌써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런 건 직접 찍으셔도 되지 않...”

“나중에 받으러 올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네? 아니, 저기, 잠깐만요...!”

돌아보았을 때는 상대는 벌써 저만큼 멀어지고 없었다. 가히 우사인 볼트래도 믿을 법한 속도였다. 아니, 실제 우사인 볼트를 만난다면 생각이 달라질지 모르겠으나, 나약한 스마트폰 좀비들만 보던 눈에는 저만큼만으로도 어마어마했다. 다시 말해, 한 발 뒤늦게 뒤따라 뛴다 한들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체 뭐야? 비누는 휴대전화를 반쯤 들어 올린 자세 그대로 망연히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이게 뭔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받으러 온다니, 무슨 수로? 그들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다. 비누는 원래도 사람 얼굴 알아보는 데는 소질이 없었고, 이번 경우엔 심지어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다시 만난다 한들 알아볼 자신도 없었다.

“...뭐냐고, 대체...”

비누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한순간은 그냥 이대로 휴대전화를 하천에 던져 버리고 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냥 이 근처 어디다 아무데나 두고 가면 안 되나, 그런 생각도 했다. 그냥 경찰서에 갖다 맡겨 버려? 그건 셋 중 가장 매혹적인 상상이었다. 어쨌든 그는 제대로 교육받고 자란 양심 있고 교양 있는 현대인이었으니까. 그만하면 내가 해 줄 건 다 해 준 것 아닐까. 그는 가만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벚꽃 사진 같은 건 그 사람도 알아서 찍을 수 있을 텐데. 굳이 이 오래된 휴대전화로 찍어야 할 만한 일도 아닐 텐데. 나랑은, 상관도 없는데.

물소리가 들렸다. 얕은 시냇물이 흘러가는 소리였다. 그리고 바람 소리, 누군가가 웃는 소리,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리는 듯한 이야기 소리. 세상은 너무 아름다웠고, 비누는 되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충동적으로 몸을 돌려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아무튼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그 자리에서 찍을 수 있는 중 가장 아름답게 나올 법한 구도로. 까짓 거, 부탁받은 김에 사진 몇 장 찍어서 경찰서에 갖다 맡긴대도 큰일이 나는 건 아닐 테니까. 그러면 정말로, 내가 해 줄 건 다 해 준 거니까. 그 정도면 저승에서 누군가 내게 책임을 묻는대도 떳떳한 거 아닐까. 한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비누는 제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아이처럼 어깨를 움츠렸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 지났다. 이 동네에 벚꽃이 이렇게 많은 줄 비누도 오늘 처음 알았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 국화를 벚꽃으로 바꿔야 하는 거 아니냐. 불평을 들어 줄 사람도 없기에 그는 혼자 속으로만 그렇게 이죽거렸다. 벚꽃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이쯤 되면 좀 심한 것 같았다. 무슨 가로수를 죄다 벚나무로 바꿔놓은 듯했다. 원래 있던 그 나무들은 어디로 갔을까? 비누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올랐다. 슬슬 찍을 만큼 찍었으니 천변을 벗어나 경찰서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 사람이 정말로 이 전화를 찾으러 올 생각이라면 좀 서둘러야 할 것 같기도 했다. 벌써 해가 지고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노을 사진 하나만 찍을까. 비누는 계단 꼭대기에서 잠깐 몸을 돌렸다. 그가 유명 사진작가가 되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테지만 피사체가 이 정도로 멋지다면 궁색한 기술로 찍었대도 좀 근사한 사진이 나올 법했다. 그는 하늘과 벚나무와 하천이 한 번에 담기도록 애써 구도를 조정했다. 이제 촬영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버튼을 막 누른 순간 화면이 제멋대로 바뀌었다. 사진 속에는 어떤 남루한 집안 풍경 같은 것이 담겼다.

비누는 눈을 깜빡였다. 이게 뭐지? 그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에는 다시 하늘과 벚나무와 하천이 보였다. 그러나 조금 전 찍힌 사진은 여전히 보관함에 그대로 있었다. 다시 봐도 남루한 집안 풍경이다. 비누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사진을 삭제했다. 그리고 다시 노을 사진을 찍으려고 시도했다. 이번에도 상황은 비슷하게 흘러갔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비누가 화면이 바뀌는 순간을 제대로 보았다는 것뿐이었다. 마치 카메라 줌을 한없이 당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늘과 벚나무와 하천이 순식간에 멀어지고, 하천 건너편 저 너머에 다 쓰러져가는 작은 집이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이번에도 사진 속에 담긴 것은 남루한 집안 풍경이었다.

음, 지금이야말로 조금 전 결심을 실행에 옮겨야 하는 걸까. 비누는 손에 든 휴대전화와 하천 건너편의 낡은 집을 번갈아 보았다. 최대한 온건하게 표현하려 해도 귀신 붙은 휴대전화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10년 전에도 최신 소리는 못 들었을 법한 오래된 휴대전화에 이 정도로 확대가 가능할 만큼 고성능 카메라가 붙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설령 그런 오버 테크놀로지가 적용된, 다시 말해 무늬만 폴더폰인 고성능 휴대전화라 한들, 집 벽을 뚫고 그 안쪽을 찍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역시 귀신 붙은 휴대전화다. 그렇게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하고 손끝이 간질간질했다. 역시 이대로 하천에 - 막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 엄마, 나 추워.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비누는 휴대전화를 돌아보았다. 그 화면에는 아직도 그 집 안쪽의 정경이 떠올라 있었다. 이미 해가 거의 떨어졌는데도 불조차 밝히지 않아 방 안은 어둑어둑했다. 그 어슴푸레한 그림자 속에서 뭔가가 어른어른 움직이는 것이 언뜻 보였다. 작은 아이 같기도 했다. 아이가 네 발로 기어 다니고 있었다. 어린아이 귀신?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갑자기 추운 느낌이 들고, 뒷목까지 오소소 소름이 돋건만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작게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그 기침의 주인공일 듯한 화면 속 아이는 이제 바닥에 주저앉은 채 투정을 부리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배고파. 심심해. 추워... 엄마...

아이의 목소리는 길게 꼬리를 끌며 늘어지건만 답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이는 손을 뻗어 무엇인가를 잡고 흔들었다. 뭐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비누는 홀린 듯 화면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어두운 화면 속에 아이의 팔뚝만 하얗게 떠올라 보였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이 뭔가를 움켜쥐고 있는 것이 어렴풋했다. 아이는 이제 어둡다고, 무섭다고 울먹거렸다. 비누는 눈에 힘을 주었다. 옷자락, 같기도 하고. 아이가 쥐고 흔드는 대로 희미하게 흔들리는 그것은 마치 옷을 입은 사람의 신체 일부 같았다. 말하자면 바닥에 드러누운 사람의 다리 같은 것 말이다. 바닥에, 드러누운.

뭔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냥 정신없이 뛰고 또 뛰었던 것 같았다. 마침 바로 앞에 하천을 건너갈 수 있도록 징검다리가 있었기 망정이지, 안 그랬더라면 그냥 물로 뛰어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까짓 얕은 시냇물 따위 빠져 죽을 리도 없으니까. 그 집은 생각보다 금방이었다. 비누는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렸다. 안은 아무도 없는 양 조용했다. 뒤늦게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이 소리를 듣고 놀라서, 무서워서 문을 열어 주지 않는 거면 어떡하지. 비누는 두드리던 손을 늦추고는 계세요, 계세요, 하고 몇 번 불렀다. 제가 듣기에도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였다.

“...누구세요?”

문이 빠끔히 열렸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 되었음직한 소녀가 문틈으로 눈만 내놓고 물었다. 오히려 비누가 더 놀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뒤늦게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며 헐떡이는 숨결이 부끄러웠다. 전혀 엉뚱한 집이지 않은가. 완전히 잘못 짚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그렇게 미친 듯이 문을 두들겨 놓고 그냥 도망칠 수도 없었다. 미안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비누는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누며 애써 입을 열었다.

“...그, 죄송해요... 누가, 쓰러진 걸 본 것 같아서, 그...그래서 그만...”

“......”

“미안, 합니다... 제가 뭘... 잘못 봤나 봐요...”

“...괜찮으세요?”

소녀가 문을 조금 더 열었다. 비누를 바라보는 눈빛에 희미한 연민과 슬픔이 묻어났다. 아니, 그냥 비누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오늘 처음 만났건만 아이가 그를 그런 눈으로 볼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소녀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되돌리더니, 어딘지 서글픈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물이라도 한 잔 드릴게요.”

“아, 아뇨... 괘, 괜찮... 괜찮아요...”

“숨차게 뛰어오셨잖아요. 급하게 두드리셨잖아요. 잠깐만 계세요.”

소녀는 문을 닫고 돌아섰다. 나직한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다. 비누는 어색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제가 뭘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도대체 뭘 기다리고 있는 거지? 그냥 이대로 돌아서도 될 텐데도 - 그 순간 문이 열리고 소녀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물이 든 잔을 내밀었다. 비누는 거절할 겨를도 없이 얼떨결에 잔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소녀의 눈빛에 쫓기듯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한 모금, 그리고 다시 한 모금. 더는 넘어가질 않았다. 비누는 어물어물 입 안으로 고맙다고 중얼거리며 잔을 돌려주었다. 소녀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고맙습니다.”

“...네? 뭐...가요...?”

“10년 전쯤... 우리 엄마도 갑자기 쓰러져서 돌아가셨거든요.”

비누는 헛숨을 들이켰다. 애써 미소 짓는 소녀의 얼굴 위로 화면 속 아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제가 뭘 좀 알았더라면, 그래서 빨리 병원으로 모셔갔더라면 엄마도 돌아가시지 않았을 텐데. 소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비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는 아직 죽음이 뭔지도 이해하지 못 했을 법한 나이였다. 설령 알았다 한들, 그 어린아이가 어떻게 쓰러진 어머니를 병원까지 모셔갈 수 있었겠는가. 소녀는 슬프게 고개를 숙였다.

“...그때도... 이렇게... 우리 엄마, 쓰러진 거 보고... 누가 와 줬더라면...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

“그치만 지금은 아무도 쓰러진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걱정 마시고, 어두운데 조심해서 가세요. 고맙습니다.”

“...아, 아뇨...”

소녀는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이고는 천천히 물러났다. 문이 닫혔다. 비누는 한참 그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그 아이의 잘못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나는 내 잘못이었지 않았나. 비누는 천천히 돌아섰다. 내가 갔더라면 우리 엄마는. 내가 뭐라도 했더라면. 어쩌면, 그랬더라면.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넘쳤다. 왜? 엄마, 왜 그랬어?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 왜, 그때는 -

“저기요, 잠깐만요.”

비누는 그 자리에 딱 멈추어 섰다. 낮에도 들었던 목소리였고, 낮에도 들었던 부름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낮에 보았던 그 사람이 맞는 듯했다. 비누는 호흡을 고르고는 약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전화, 찾으러 오셨어요?”

“...네.”

잘된 일이었다. 경찰서를 찾아갈 것도 없이, 휴대전화를 건네주고 돌아서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 다 끝난다. 아주 깔끔하게, 더 고민할 것도 없이. 비누는 생각 없이 오른손을 들었다. 손에 쥔 휴대전화를 넘기고, 몸을 돌려서, 그냥 이대로 앞으로 쭉 걸어가면 된다. 그러나 그는 연료가 떨어진 기계처럼 부자연스럽게 중간에 멈춰 선 채로 전혀 꺼낼 생각도 없는 말을 던지고야 만다.

“...왜 저한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셨어요?”

“제 아내가 벚꽃을 좋아했거든요.”

그건 대답이 아니었다. 그런 건 답이 될 수 없었다. 비누는 그 다음 말을 재촉하듯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잠깐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2년 전에 자살했습니다. 오늘이 그 사람 기일이에요.”

“......”

“우연히 지나가다 봤을 때, 꼭... 그 사람이 죽고, 정신이 없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그래서 부탁드렸어요.”

“...이거... 꼭, 하필이면 이걸로 찍어달라고 한 것도, 이유가 있었던 거죠?”

“그 사람이 쓰던 전화라서요. 그걸로 사진을 찍으면 그 사람한테도 보일 것 같았어요.”

비누는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그런 걸 물은 것이 아니라고 하고 싶었다. 이 전화가 뭔가 좀 이상하다는 걸 당신은 알고 있었느냐 묻고 싶었다. 알고 부탁했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의도였는지. 그러나 갑자기 다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으면 어떻고, 틀리면 또 어때서. 비누는 한숨을 내쉬고는 모든 질문들을 잘 싸서 목 안으로 삼켰다. 그냥, 됐다. 여기요, 가져가세요. 그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상대는 휴대전화를 받으려는 듯 마주 손을 내밀었다. 그 손바닥 위에 전화를 올려놓으려다 비누는 잠시 멈칫했다.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목소리가 불쑥 밀고 나왔다.

“...저기, 그... 이거, 한 번만 더 쓰고... 돌려드려도 돼요?”

어쩌면, 혹시라도. 만의 하나라도. 그 집의 문을 열고 이 화면 너머로 바라보면, 그 순간의 엄마를 볼 수 있을지도 몰라서. 그럴 수 없다 해도, 아직 살아있던 순간의 엄마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비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딱딱하게 굳은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상대는 말없이 손을 거두더니,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돌려주실 수 있을 때, 이쪽으로 연락 주세요.”

“......”

“저한테 직접 연락하시기 불편하시면 그냥 명함하고 같이 경찰서에 맡기셔도 되고요.”

“...고맙습니다.”

비누는 명함을 받아들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쩌면 상대는 뭔가 더 할 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슨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비누도 굳이 그가 더 말을 걸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하천을 따라 걸어갔다. 마주할 용기가 마침내 생길 그 어느 순간을 기다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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